정치 정치일반

[2022대선지식창고] 그땐 다 투표했어. 투표율로 보는 시대사

조예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12.21 14:39

수정 2021.12.22 18:55

그 시절 투표율이 높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국민은 무엇이 바뀌길 바라며 투표 했나 

©파이낸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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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하늘은 먼지로 뒤덮여있더니 오늘은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부모님과 집을 나섰다.

2017년 5월 17일, 오늘은 19대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이다."

[파이낸셜뉴스] 1987년 이후로 쭉 12월에만 이뤄지던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그런데 2017년에는 5월에 할 수밖에 없었죠. 탄핵으로 대통령 자리가 공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수선한 정국이었지만 시민은 차분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아침, 질서정연하게 투표소 앞에 줄을 섰습니다. 혼란한 시기를 다독이기라도 하듯, 모두 차분하고 평온한 표정으로요. 그 날은 대통령 선거 20년 만에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한 날이었습니다.

1. 흔들리며 피는 꽃처럼, 5월엔 우리도 잠시 흔들렸습니다
-77%의 역대급 투표율로 드러난 국민들의 소망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일반인 최순실 씨는 정치에 개입하고 재단을 이용해 국비를 횡령하는 등 국정농단을 일으켜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국민은 책임을 다하지 못한 대통령을 엄벌하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나와 매일 촛불을 들었습니다. 광화문은 촛불이 만든 파도로 일렁였고 파도는 박 전 대통령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습니다.

©뉴스1, 2016년 12월
©뉴스1, 2016년 12월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쉽게 깨지진 않을 거야!'

-당시 시위 곡으로 쓰인 가요, 여자친구의 ‘유리구슬' 中

국민은 신중한 태도로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했습니다. 2017년 제19대 대선에는 문재인 당시 후보를 비롯, 총 15명의 후보가 출마했는데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고용 확대와 청년 지원 등 실용적인 정책을 내세웠습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는 강한 안보와 기업 활성화 정책을,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한반도 비핵화와 4차 산업 혁명 관련 정책을 강조했습니다. 제19대 대선 투표율은 77.2%를 기록했습니다. 1997년 제15대 대선 이후로 2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였습니다.

©파이낸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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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60년에는 97.0%, 제8대부터 12대까지는 기록이 없다?
-국민은 우리인데, 대통령은 누구 손으로 뽑나요?

투표율이 97.0%를 기록한 해도 있습니다. 1960년 제4대 대선입니다. 제4대 대선은 3월과 8월, 두 번의 투표를 거쳤습니다. 후보였던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득표수를 조작하는 등 3·15부정선거를 자행해 당선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4·19혁명을 일으켜 이승만 대통령을 물러나게 만들었습니다. 제2공화국 헌법에 의해 대통령 선거 방식도 간접 선거로 바뀌었습니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뽑게 된 것이죠. 새로운 대선에서 민주당의 윤보선 당시 후보가 재적 의원 2/3 이상의 표를 받아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투표율은 97.0%로 초대 대선을 제외하면 가장 높습니다.

초기 대선은 높은 투표율을 자랑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연임한 초대부터 제3대까지의 선거에서 초대를 제외한 투표율은 88.1%, 94.4% 입니다. 투표율이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 대선에서 백범 김구 선생과 겨루기도 했지만 이후 불법 개헌 등으로 부정 선거를 이어왔습니다.

©대통령 기록관, 1960, 공공누리 제 3유형 개방, '윤보선 제4대 대통령 취임선서낭독2'
©대통령 기록관, 1960, 공공누리 제 3유형 개방, '윤보선 제4대 대통령 취임선서낭독2'

투표율에 관한 기록이 없는 해도 있습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자리를 꿰찬 후 제5대부터 7대까지 직접 선거로 선출된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통해 대통령 선거를 간접 선거로 전환했으며 제8대와 제9대 선거에 단일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투표율이 무의미한 시대죠.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1979년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된 최규하 당시 후보 역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실시하는 선거에 단일 후보로 출마, 당선되었습니다. 같은 해 '12.12사태'로 권력을 장악한 군부 세력의 전두환은 요식 행위에 가까운 제11대 대선을 치렀습니다. 제12대 대선도 제한된 정치 상황 속에서 간접선거가 이루어졌습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8대부터 12대까지의 투표율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3. 가장 평화롭고, 가장 치열했던 1987년 투표
-89.2%의 국민들은 무엇을 염원했나
'10만이 30만이 되고 100만이 되어 저들의 음모를 물리치던 1987년 6월, 6월의 아들딸들이여!'

-시 <1987년 6월> 中, 김용화

제13대 대선은 1987년 6월 항쟁과 그에 따른 '6.29선언'으로 이루어진 선거였습니다. 1987년 10월 29일 국민 투표로 개정한 헌법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라는 규정과 대통령 임기를 단임 5년으로 하고, 국민의 기본권 조항을 대폭 개선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국민은 16년 만에 치르게 된 직선제를 뜨겁게 환영했습니다.

©대통령 기록관, 1988, 공공누리 제 3유형 개방,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 환호 답례'
©대통령 기록관, 1988, 공공누리 제 3유형 개방,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 환호 답례'

제13대 대선 당시 관심을 모은 후보는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이른바 '3김'으로 불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이었습니다. 당시 후보들은 국민의 관심을 끌기 위해 독특한 방법으로 선거 유세에 나섰는데요. 노태우 후보는 어린이와 함께 선거 운동에 나섰으며 김대중 후보는 밀양 아리랑을 개사해 불렀고, 김종필 당시 후보는 만화를 그려 배포하기도 했습니다. 치열한 접전 끝에 1987년 12월, 노태우 당시 후보가 승기를 들어 올렸습니다.
당시 투표율은 89.2%. 이후 13대 대선 투표율을 넘어선 대선은 없었습니다.

새 시대를 만드는 투표
-한 장의 표가 모여 100%의 투표율을 만든다

제 20대 대선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이번 대선은 과연 몇 프로의 투표율을 기록할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투표권은 대한민국의 주인만 가질 수 있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투표는 우리 손으로 더 나은 미래, 더 나은 국가, 더 나은 삶의 문을 열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cyj7110@fnnews.com 조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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