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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하의 본초여담] 건망증은 병이지만 〇〇은 좋은 약이로구나

[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것을 이야기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의종금감에 그려진 혈위도(穴位圖) : 신문혈(왼쪽부터), 백회혈, 귀 주위혈.
의종금감에 그려진 혈위도(穴位圖) : 신문혈(왼쪽부터), 백회혈, 귀 주위혈.

옛날 어느 남자가 심한 건망증을 앓게 되었다. 수년 전부터 근심과 걱정으로 인해 노심초사하는 날이 이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이미 한 일과 해야 할 일들을 기억해 내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시간이 이미 흘러 있었던 먼 일들은 더더욱 까마득했다.

증상은 심해져 낫을 가지러 창고에 가서는 창고 문을 열고서는 멍하니 있기 일쑤였고, 다행히도 낫을 찾아 들어도 왜 낫을 가지러 갔는지 몰랐다. 아침에 있었던 일은 저녁이면 까먹고, 저녁에 있었던 일은 하룻밤 자면 기억하지 못했다. 심지어 서 있을 때는 걸어야 한다는 것도 몰랐고, 방에서는 앉아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그러나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절기(節氣)를 말하고 해 뜨는 방향이나 길을 찾는 능력은 예전과 다름이 없어 남자의 지남력(指南力)만은 여전했다.

가족들은 점도 쳐보고 무당에게 시켜 굿도 해 봤지만 효험이 없었고, 마을 의원들에게 치료를 맡겨도 차도가 없었다. 이 남자가 심한 건망증에 걸렸다는 소문은 점차 옆 마을에도 퍼졌다. 옆 마을에는 의술에 도통한 허의원이란 자가 있었는데, 가족들은 재산의 절반을 주겠노라면서 남자의 건망증을 치료해 달라고 했다. 남자의 건망증은 그만큼 심각했다.

허의원은 먼저 몇가지 실험을 통해서 치료가 가능한지를 보겠다고 했다. “건망증은 점괘로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무작정 약만을 투약한다고 해서 좋아지지 않습니다. 우선 제가 몇가지를 확인해 보겠습니다.”라고 했다.

의원은 남자에게 다가서서 윗옷을 벗겼다. 그랬더니 남자는 옷을 달라고 했다. 다음으로는 한 끼를 굶겼다. 그랬더니 남자는 밥을 달라고 했다. 밤이 되어 다시 어두운 방에 들어가게 했더니 불을 밝혀 달라고 했다.

그러자 허의원은 “이 건망증은 치료가 가능합니다. 내일부터 저와 남편분만이 한방에서 7일간을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그 동안에는 식사만 넣어 주시고 아무도 들어 오시면 안됩니다. 제가 약방에서 치료 약재와 침구를 채비해서 다시 오겠습니다. 부인께서는 붓과 벼루, 그리고 한지를 두툼하게 준비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다음 날 허의원이 도착해서 남편과 한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동네 의원 중 한명이 치료과정이 궁금해서 미칠지경이었다. 아무도 들어오면 안된다고 한 말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건망증을 치료하겠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동네 의원은 문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연신 들여다 보았다.

허의원은 몇가지 약재를 섞어서 탕제를 조제했다. 약재를 살펴보니 바로 귀비탕(歸脾湯)이었다. 귀비탕은 심각한 고민이나 근심 걱정 끝에 불안, 초조해하면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잠을 잘 이루지 못하며 건망증까지 나타나는 증상을 치료하는 명방(名方)으로 알려진 처방이다. 또한 백복신, 원지, 석창포를 갈아서 환을 만들었는데, 바로 총명환(聰明丸)이었다. 총명환은 귀비탕과 함께 먹였다.

다음으로는 새벽에 한번 잠들기 전에 한번 침구를 했는데, 위치를 자세히 보니 신문혈(神門穴)과 백회혈(百會穴)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신문혈에는 자침을 하고 백회혈에는 뜸을 떴다. 손목에 있는 신문혈과 정수리의 백회혈은 건망증에 특효혈이었다. 또한 틈나는 대로 귀를 전체적으로 당겨주되 특히 귓불을 자주 잡아당기게 했다. 양생법에 귀를 자주 만져주면 총명해진다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허의원은 남자에게 눈을 감고 명상을 시켰다. 모든 기억을 되살리는 데에는 단초가 있는 법. 남자에게 전에 있었던 어떤 일을 떠올리게 하면서 계속해서 주변의 자잘한 일들을 통해서 기억해 내도록 했다. 명상은 집중력을 높이는 데에도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사실 일주일 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은 바로 집중을 통해서 과거 일들을 스스로 기억해 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관찰되었다. 남자는 허의원의 지시대로 날마다 중간중간 붓으로 무언가를 계속 적어냈다. 적어 놓은 문구 일부에는 점을 찍어 놓기도 하고, 낫모양의 꺽쇠 표시를 하기도 하고, 빗금으로 그어 놓는 것이었다. 밖에서 지켜보던 의원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허의원과 남자가 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남자는 정상처럼 행동했다. 해야 할 일을 챙기면서 잊는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 연신 자신이 적어 놓은 내용의 책자를 들여다 보면서 무언가를 표시를 하고, 또 적기를 반복했다. 바로 비망록(備忘錄)이었다. 비망록을 작성해서 해야 할 일과 이미 한 일은 잊지 말도록 한 것이다. 비망록은 요즘 말하면 일종의 메모인 셈이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난리가 났다. 건망증에서 회복된 남자는 수년 동안의 일이 차츰차츰 기억나기 시작한 것이다. 부인이 어느 날 달밤에 외간 남자와 담소를 나누던 순간, 아들놈이 글공부는 안 하고 놀음에 파묻혀 지냈던 일하며, 자신에게 돈을 빌려 갔다가 갚지 않고 있는 옆집 사내, 자신을 험담하는 마을 사람들. 이런저런 일들이 떠 오르더니 괴로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괴로움을 참다못한 남자는 부인을 내쫓아 버렸다. 그리고 아들에게는 몽둥이를 들었다. 돈을 빌리거나 험담했던 마을 사람들에게는 찾아가 불같이 화를 냈다. 남자는 건망증이 치료되면서 다시 이득과 손실을 따져야 했고, 슬프거나 즐거웠던 일, 좋고 나쁜 일이 기억이 나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일어났다.

남자는 옆 마을 허의원에게 다시 찾아갔다. “의원님, 저를 다시 예전으로 되돌려 주시오. 내가 건망증이 있을 때는 심상이 아득하고 하늘인지 땅인지 구분하지도 못했으나 천치처럼 걱정만은 없었소. 그러나 지금은 삼라만상의 인간사와 희노애락비공경(喜怒哀樂悲恐警)의 칠정(七情)이 내 머리를 감싸 나를 어지럽히고 있으니 너무 고통스럽구려. 잠깐이라도 다시 건망증을 얻을 수 있다면 제발 방법을 알려 주시오.”라고 간청했다.

허의원은 당황스러웠다. 건망증을 치료했지만 다시 다사다난(多事多難)한 고통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허의원은 남자를 안심시켰다. “지금 과거의 모든 일들이 사소한 것까지 기억이 나서 고통스럽다지만, 앞으로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점차 다시금 조금씩 잊혀질 것이오. 사람이 망각한다는 것은 과거의 모든 것을 기억할 필요도 없고 기억해서도 안되기 때문일 것이오. 조물주가 인간을 만들 때 건망증이란 병도 주었지만 망각이란 약도 함께 주었소. 기억을 지우는 방제(方劑)는 따로 없소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건망(健忘)과 망각(忘却)의 차이는 무엇이오?” 남자가 물었다. 허의원은 “건망은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고, 망각은 잊고 싶은 것을 자연스럽게 잊어가는 것이요. 따라서 건망은 치료의 대상이지만 망각은 정상이며 심(心)을 보호하는 방어기제요.”라고 답했다.

남자는 “그럼 치매(癡呆)와 건망은 어떤 차이가 있소? 혹시 내가 치매는 아니었소?”라고 다시 물었다. 허의원은 “치매는 한번 잊었던 기억을 절대 되살릴 수 없고 비망록도 도움이 되지 않소이다. 또한 치매는 때와 장소도 구분하지 못한다오. 반대로 건망은 몇 가지 단서를 주면 다시 기억을 떠올 릴 수 있다오. 당신은 지남력이 여전하고 예전의 온갖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치매가 아니라 건망이었을 뿐이오. 또한 건망에는 비망록이 매우 도움이 되는 방법이요.”라고 설명했다. 남자는 그나마 다행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비망록은 작성했지만 그리 완벽하게 적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 잊고 싶은 일들은 통 붓으로 두껍게 줄을 그어 모두 지워버렸다. 꼭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중요했지만 과거의 모든 일을 완벽하게 기억할 필요까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잊혀져 가는 일들이 생겼다. 그러면서 ‘내 건망증으로 생활에 불편함이 컸지만, 망각 또한 복잡다단한 삶에 있어서 때론 약이 될 수 있었구나.’라고 되뇌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 의부전록-기사(紀事)> 列子周穆王篇. 宋陽里華子中年病忘. 朝取而夕忘, 夕與而朝忘, 在塗則忘行, 在室則忘坐. 今不識先, 後不識今, 闔室毒之. 謁史而卜之, 弗占, 謁巫而禱之, 弗禁, 謁醫而攻之, 弗已. 魯有儒生, 自媒能治之. 華子之妻子, 以居產之半請其方. 儒生曰 “此固非卦兆之所占, 非祈請之所禱, 非藥石之所攻. 吾試化其心, 變其慮, 庶幾有瘳乎.” 於是試露之而求衣, 飢之而求食, 幽之而求明. 儒生欣然告其子曰 “疾可已也. 然吾之於密傳不以告人, 試屏左右, 獨與居室七日.” 從之, 莫知其所施爲也. 而積年之疾, 一朝都除. 華子既悟, 乃大怒, 黜妻, 罰子, 操戈逐儒生. 宋人執而問其以, 華子曰 “曩吾忘也, 蕩蕩然不知天地之有無, 今頓識既往數十年來存亡得失, 哀樂好惡, 擾擾萬緒起矣. 吾恐將來之有亡得失, 哀樂好惡之亂吾心如此也. 須臾之忘, 可復得乎?”(열자 주목왕편. 송나라 양리의 화자는 중년에 건망증을 앓았다. 아침에 받은 것을 저녁이면 잊고 저녁에 준 것을 아침이면 잊었으며, 길에서는 걷는 법을 잊고 방에서는 앉는 법을 잊었다. 지금은 이전 일을 모르고 나중에는 지금 일을 모르니, 온 집안이 걱정했다.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쳐도 들어맞지 않고, 무당을 찾아가 기도해도 억제되지 않고, 의사를 찾아가 치료해도 낫지 않았다. 노나라의 어느 유생이 이것을 치료할 수 있다고 스스로 선전하므로 화자의 처자식들은 재산의 절반을 내놓겠다며 그 방법을 물었다. 유생은 “이는 본디 괘조로 점칠 일도 아니고 빌어서 성취할 일도 아니며 약석으로 공격할 일도 아닙니다. 제가 시험 삼아 그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 생각을 바꾼다면 차도가 있을 것입니다.”라 했다. 이에 시험 삼아 옷을 벗겨 놓자 옷을 달라 하고, 굶기자 밥을 달라 하며, 어두운 곳에 두자 밝은 곳을 찾았다. 유생은 기뻐하면서 화자의 아들에게 말했다. “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비밀스러운 전승을 남에게 알리지 않으니,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환자와 단둘이 7일 동안 방에 있게 해주십시오.” 그 말을 따랐으므로 그가 시행한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여러 해 묵은 병이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졌다. 화자는 깨어난 다음 곧 크게 성을 내며 아내를 내쫓고 아들을 벌주었으며 창을 들고 유생을 쫓았다. 송나라 사람이 그를 붙잡고 까닭을 물으니, 화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 내가 건망증이 있을 때는 아득하여 천지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는데, 지금 갑자기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존망득실과 애락호오를 기억하니 어지러이 만 가지 생각이 일어나오. 나는 장래의 존망득실과 애락호오가 내 마음을 이처럼 어지럽힐까 두렵소. 잠깐이라도 건망증을 다시 얻을 수 있을는지?”라고 하였다.

< 광제비급> 健忘, 思慮傷心脾也. 又云健忘者, 徒能而忘其事也, 用歸脾湯.(건망증은 생각을 과히 하여 심과 비를 상해서 된 것이다. 또 건망증은 모든 일을 해 놓고는 잊어버리는 것이니 귀비탕을 처방한다.
)

< 의휘> 善忘. 白茯神, 遠志, 石菖蒲 等分, 爲末, 蜜丸菉豆大. 名曰聰明丸. 神門針, 灸百會.(잘 잊어버리는 증상에는 백복신, 원지, 석창포 같은 양을 가루내고 꿀로 녹두만한 환을 만든다. 이름하여 총명환이다. 또한 신문혈에 침을 놓고 백회혈에 뜸을 뜬다.)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