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페트로달러’ 체제가 만든 미국 패권
이란 탈달러·중국 ‘페트로위안’이 균열 시도
호르무즈 해협 둘러싼 에너지 지정학 격돌
이란 탈달러·중국 ‘페트로위안’이 균열 시도
호르무즈 해협 둘러싼 에너지 지정학 격돌
[파이낸셜뉴스] 지난 2월 28일 미국과 이란 사이의 군사 충돌이 시작되면서 이번 사태가 단순한 지역 분쟁을 넘어 국제 에너지 질서와 통화 패권을 둘러싼 갈등이라는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국제 원유 시장은 이른바 ‘페트로달러(Petrodollar)’ 체제 아래에서 움직여 왔다. 그러나 최근 중국이 위안화 기반 석유 거래 확대를 추진하면서 ‘페트로위안(Petro-yuan)’이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따라 미·이란 갈등 역시 단순한 군사 충돌이 아니라 달러 중심 에너지 결제 체제에 균열이 발생하는 것을 둘러싼 지정학적 갈등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페트로달러가 만든 달러 패권과 전쟁
오늘날 국제 석유 거래 대부분이 달러로 결제되는 구조는 1970년대 형성됐다.미국은 달러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중동 산유국과 전략적 협력을 강화했다. 1974년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협정을 체결해 석유 거래를 달러로 결제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미국은 사우디 왕가의 안보를 보장하고 군사 지원을 제공하는 대신, 사우디는 모든 석유 판매를 달러로 결제하고 석유 판매로 얻은 달러를 미국 국채에 재투자하기로 했다.
이 구조는 이후 석유수출국기구 산유국 전반으로 확산되며 국제 에너지 시장의 표준이 됐다. 전 세계 국가들은 석유를 수입하기 위해 달러를 확보해야 했고 산유국들은 벌어들인 달러를 다시 미국 금융시장에 투자했다. ‘페트로달러 체제’로 불리는 이 구조 덕분에 미국은 막대한 재정 적자와 경상수지 적자를 동시에 안고도 달러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페트로달러 체제를 우회하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베네수엘라다. 베네수엘라는 2018년 석유를 담보로 한 국가 발행 암호화폐 ‘페트로’를 도입하며 달러 결제망을 우회하려 했지만 미국의 강력한 제재에 부딪혔다. 앞서 지난 1월 미국이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전격 체포한 것은 겉으로 알려진 '마약' 문제보다 '페트로 달러'에 대한 도전을 공격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2000년대 초 이라크 역시 석유 결제 체제 변화에 나섰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사담 후세인은 석유 수출 결제 통화를 달러에서 유로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발생한 이라크 전쟁을 두고 일부 국제정치 분석가들은 에너지 결제 질서를 둘러싼 갈등이 배경 중 하나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란의 '탈 달러'와 호르무즈 봉쇄
이란 역시 달러 중심 금융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여 왔다. 미국의 금융 제재로 국제 결제망에서 배제된 이란은 생존 전략으로 ‘탈달러화’를 추진했다.
이란은 베네수엘라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독자적인 화폐가 아닌 중국의 위안화 결제 시스템 뒤로 숨는 전략을 택했다. 이란은 중국과 25년 장기 전략 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석유 거래 일부를 위안화로 결제하기 시작했다.
베네수엘라가 고립된 채 달러 체제에 맞섰다면 이란은 중국과의 경제 협력을 통해 보다 조직적인 방식으로 달러 의존도를 낮추려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움직임은 미국 입장에서 중동 에너지 결제 질서에 대한 잠재적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번 전쟁에서 이란이 가장 강력한 전략 카드로 꺼내든 것은 호르무즈 해협이다.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연결하는 이 해협은 세계 원유 해상 수송의 핵심 통로로 전 세계 원유 해상 물동량의 약 20~30%가 통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이라크 등 페르시아만 연안 산유국의 원유 대부분이 이 해협을 통해 글로벌 시장으로 이동한다. 하루 약 2000만 배럴 규모의 원유와 석유 제품이 이곳을 통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란이 해협 봉쇄 가능성을 언급하는 이유는 단순한 군사 대응을 넘어선다. 해협을 통제할 수 있는 지리적 위치를 활용해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에 압박을 가하고 전쟁의 협상력을 높이려는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해협의 가장 좁은 구간 폭은 약 30~50km에 불과해 군사 충돌이나 기뢰 설치, 해상 공격만으로도 해상 교통로가 크게 위축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중동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국제 유가가 즉각 상승하는 현상이 반복된다.
미국이 중동에서 군사적 영향력을 유지하며 해상 교통로 안전 확보에 공을 들여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문가들은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위협이 단순한 군사 행동이 아니라 세계 에너지 공급망과 국제 금융 질서에 동시에 압박을 가하는 전략적 메시지라고 보고 있다.
중국의 도전 '페트로위안'과 한계
미국과 이란의 갈등 속에서 또 하나의 변수는 중국이다. 중국은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이지만 석유 결제 대부분을 달러에 의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은 석유 거래에서 위안화 사용을 확대해 달러 의존도를 낮추려 하고 있다. 상하이에서 위안화 표시 원유 선물 거래를 도입한 것도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다.
석유처럼 거래 규모가 큰 전략 자원의 결제 통화가 될 경우 위안화의 국제적 위상은 크게 높아질 수 있다. 이는 장기적으로 달러 중심 금융 질서에 대한 의존도를 완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또 국제 금융 거래 상당수가 달러 기반 결제망을 통해 이뤄지는 만큼, 위안화 결제를 확대하면 미국의 금융 제재 위험을 일부 줄일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페트로위안이 단기간에 페트로달러 체제를 대체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있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달러 자산의 규모와 유동성이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또 국제 금융 거래의 핵심 인프라인 국제은행간통신협회 역시 서방 금융권이 주도하고 있다. 이 때문에 달러 중심 결제 시스템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에너지 거래와 통화 질서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중국의 페트로위안 전략은 국제 경제 질서에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결국 미국과 이란의 충돌은 단순한 군사 분쟁을 넘어 에너지 공급망과 국제 통화 질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라는 분석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 석유와 통화, 그리고 군사력이 얽힌 이 복잡한 구조 속에서 중동은 앞으로도 세계 패권 경쟁의 핵심 무대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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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yb@fnnews.com 이유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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