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메네이 사후의 권력 진공, 벙커 속 1인자 대신 '실권자' 택한 美
군인·시장 거친 테크노크라트의 부상, 실리 중시 실세
호르무즈 30억 통행료, 공급망 봉쇄 스위치를 쥔 유일한 키맨
은둔한 모즈타바의 그림자 통치와 갈리바프의 제도권 장악, 누가 1인자인가
군인·시장 거친 테크노크라트의 부상, 실리 중시 실세
호르무즈 30억 통행료, 공급망 봉쇄 스위치를 쥔 유일한 키맨
은둔한 모즈타바의 그림자 통치와 갈리바프의 제도권 장악, 누가 1인자인가
[파이낸셜뉴스] 전 세계 원유의 20%가 흐르는 호르무즈 해협에 '1회 30억원'이라는 사상 초유의 통행료 청구서가 날아들었다. 한국을 비롯해 글로벌 물류망 전체가 거대한 비용 인플레이션의 시한폭탄을 떠안게 된 셈이다. 이 지정학적 아수라장 속에서 워싱턴의 시선은 이란 테헤란의 대통령궁이 아닌 마즐리스(의회 건물)를 향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이번 사태를 수습할 실질적인 대화 창구로 이란의 새 최고지도자인 모즈타바 하메네이나 마수드 페제시키안 대통령이 아닌,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이란 의회 의장을 주목하고 있다. 세계 언론들은 이를 미·이란 관계가 거래 국면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장면으로 보고 있다.
호르무즈 장악한 실질적 통제권자
이란 의회가 전격 가결한 호르무즈 해협 통행료 부과 법안은 표면적으로는 서방의 제재에 맞선 군사적 도발로 읽히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대미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치밀하게 기획된 전략적 알박기에 가깝다. 이란은 유엔 국제해양법협약(UNCLOS)을 비준하지 않았다는 자국법의 맹점을 활용해 '무해통항권'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통행료의 명분을 만들었다. 여기서 미국이 주목한 것은 이 거대한 글로벌 사설 톨게이트의 법적 승인과 집행, 그리고 무엇보다 '징수 유예'를 결정할 수 있는 실질적 권한이 입법부 수장인 갈리바프의 손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미국은 온건파 내지 개혁파로 분류되는 하산 로하니 전 대통령이나 현 페제시키안 대통령 정부와 협상을 시도해 왔으나 번번이 강경파인 혁명수비대(IRGC)의 무력 도발, 최고지도자의 거부권에 부딪혀 합의가 무산되는 경험을 반복했다.
혁명수비대의 물리적 군사 행동은 통제가 불가능한 상수지만 의회를 통과한 법안의 시행령은 정치적 타협에 따라 얼마든지 발효 시기를 늦추거나 사문화시킬 수 있는 변수다. 미국은 호르무즈 해협의 실질적 봉쇄를 막고 글로벌 물류 대란을 저지하기 위해 이 법안의 스위치를 쥐고 있는 갈리바프를 협상의 유일한 키맨으로 낙점하고 물밑 채널을 가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강경파 외피 쓴 테크노크라트
미국이 대외적으로 극우 강경파로 분류되는 갈리바프를 오히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협상 파트너로 여기는 배경에는 '닉슨이 중국에 간다(Nixon goes to China)'는 외교가의 오랜 격언이 깔려 있다. 강경파만이 내부의 반발을 잠재우고 적국과 타협할 수 있다는 논리다.
갈리바프는 이란-이라크 전쟁 참전 용사이자 혁명수비대 공군 사령관을 역임한 군부의 핵심 성골이다. 온건파 대통령이 미국과 타협안을 가져오면 매국노로 몰아붙이던 군부 강경파들도 자신들의 직속 상관이었던 갈리바프가 주도하는 합의안 앞에서는 감히 반기를 들기 어렵다. 미국은 바로 이런 '합의의 이행 가능성'을 가장 높게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그는 교조적인 이념에만 함몰된 성직자들과 달리 철저히 실물 경제의 효율성을 좇는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그는 무려 12년간 테헤란 시장으로 재임하며 서방의 혹독한 경제 제재 속에서도 도로, 터널, 지하철 등 대규모 인프라 확충 사업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다. 체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미 구호보다 당장의 외화 확보와 경제 재건이 시급하다는 사실을 행정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체득한 인물이다.
미국 중동연구소(MEI)의 알렉스 바탄카 이란 프로그램 국장은 "갈리바프는 실용주의적 보수주의자이자 테크노크라트로, 이념적 수사보다는 국가 인프라 구축과 경제적 성과 도출을 최우선시한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그가 종교적 도그마가 아닌 달러의 논리로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통행료 유예를 대가로 한 동결 자금 해제 카드를 쓸 수도 있다.
은둔한 최고지도자와 전면에 나선 2인자
미국의 갈리바프 선택은 알리 하메네이 전 최고지도자의 사망 이후 벌어지고 있는 이란 내부의 극심한 권력 공백 사태와 맞닿아 있다. 최고지도자직을 승계한 모즈타바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표적 공세를 피하기 위해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그는 철저히 은폐된 벙커에서 일부 정보기관과 핵심 무장 조직을 통해 '그림자 통치'를 이어가고 있지만 전시 상황 속에서 국가 기능 전반을 온전히 장악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 거대한 권력의 진공 상태를 파고든 인물이 바로 의회와 행정부, 군부 내 엘리트 집단을 결집시킨 '제도권 권력'의 갈리바프다.
현재 명목상 1인자인 모즈타바 세력과 실질적 국가 권력을 통제하는 갈리바프 세력은 서방의 전방위적 압박이라는 외부 위협 앞에서 아슬아슬한 공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실질적 통치권을 둘러싼 정면충돌은 이란 내부에서 이미 시작됐다.
이 지점에서 미국이 갈리바프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은 매우 정교한 지정학적 베팅이라는 지적이다. 미국은 장기적으로 이란이 모즈타바 중심의 통제 불능한 종교 원리주의 체제로 굳어지는 것보다, 전면에 나서 국가를 통제하는 갈리바프 체제로 재편되는 것이 중동 정세 관리에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갈리바프가 이번 호르무즈 통행료 정국에서 미국과 협상의 성과를 낸다면, 실질적인 1인자로 등극할 명분을 얻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km@fnnews.com 김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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