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예금만 2억" 주식 없이 자가 사는 50대, "퇴직하면 뭐 먹고 살지 잠이 안온다" [은퇴자 X의 설계]
평균 퇴직 나이 52세... 경력 살릴 일자리는 '좁은문'
대기업서 다시 대기업으로 이직한 사람은 37%뿐
[파이낸셜뉴스] 연봉 7000만원, 퇴직연금 1억3000만원, 연금저축펀드 4000만원, 예금 2000만원. 국민연금 예상 수령액은 월 150만원 선이고, 수도권에 대출이 꽤 남아 있지만 아파트 한 채는 보유하고 있다.
정년을 3년 앞둔 성태환 부장(57·가명)의 노후 준비 현황이다. 30년 가까이 인사 업무를 해온 그다. 국가데이터처·한국은행·금융감독원이 공동으로 실시한 2025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50대 가구의 금융자산 평균은 1억6507만원, 중앙값은 8100만원이다. 퇴직연금과 연금저축, 예금을 합친 성 부장의 금융자산은 중앙값은 물론 평균도 웃도는 수준이다.
성 부장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비슷하다. "너 정도면 준비 많이 했다." "은퇴해도 돈 걱정은 크게 없겠네."
성 부장도 내심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런데도 최근 막연한 불안감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그 불안의 실체를 깨달은 것은 대학 동기들과의 저녁 자리에서였다.
술잔이 몇 순배 돌자 대화는 자연스럽게 퇴직 이야기로 흘렀다. 자산이 얼마네, 연금을 어떻게 굴리네 하는 이야기가 오가던 중 한 친구가 툭 던진 질문에 자리가 잠시 멈췄다. "근데 너는 은퇴하면 뭐 할 거냐?" 성 부장은 물론 다른 친구들도 선뜻 답하지 못했다.
국민연금 예상액도 알고 있었고 퇴직연금 규모도 계산해봤다. 하지만 회사를 떠난 뒤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갈 지에 대해서는 답이 없었다.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다. 다만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지가 그려지지 않았다.
성 부장의 고민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국가데이터처의 2025년 5월 경제활동인구조사 고령층 부가조사에 따르면 취업 경험이 있는 고령층이 생애 가장 오래 다닌 일자리를 그만둔 평균 나이는 52.9세다. 법정 정년인 60세보다 7년 이상 이르다. 정년을 다 채우는 사람이 오히려 소수라는 의미다.
반면 장래에도 일하기를 원하는 고령층은 69.4%(1142만명)에 달했다. 희망 근로 연령은 평균 73.4세였다.
52.9세에 주된 일자리를 떠나는데, 일하고 싶은 나이는 73.4세다. 20년의 간극이 있다.
이 의지는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국가데이터처 국가통계포털을 보면 지난해 60세 이상 취업자는 683만4000명으로, 50대(667만9000명)를 처음으로 앞질렀다. 1963년 연령별 취업자 집계가 시작된 이래 60세 이상이 50대를 역전한 것은 처음이다. 70세 이상 취업자도 216만2000명으로 사상 처음 200만명을 넘었다.
문제는 그 20년 동안 어떤 일을 하느냐다. 일하는 고령층은 늘고 있지만 평생 해온 일과 같은 자리로 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일하려는 의지는 분명한데 의지를 받아줄 일자리가 마땅찮다.
미래 일자리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성 부장은 경력을 우선 생각했다. 30년 가까이 인사 업무를 해왔으니 그 경력을 살릴 자리를 먼저 찾은 것이다. 채용 대행, 중소기업 인사 자문, 교육 강사. 그러나 막상 알아보니 자리는 많지 않았다. 있다 해도 경력에 견줘 조건이 크게 낮았다.
결국 검색창에 남은 건 경력과 무관한 일자리들이었다. 경비, 시설 관리, 주차 관리, 택배, 배달, 택시, 소규모 프랜차이즈. 스크롤을 내릴수록 선택지는 좁아졌다.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자리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30년 가까이 사람을 뽑고 평가하고 교육하던 경력과 연결되는 지점을 찾기 어려운 점이 아쉬웠다.
통계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고령층 취업자를 직업별로 보면 단순 노무 종사자가 22.6%로 가장 많다. 반면 관리자는 2.1%, 사무 종사자는 8.3%에 그친다.
옮기는 일자리의 질도 낮아진다.
국가데이터처가 2025년 6월 발표한 2024년 일자리이동통계를 보면, 직장을 옮긴 임금근로자 중 41.3%는 임금이 줄어드는 일자리로 이동했다. 대기업에서 이직한 사람 중 다시 대기업으로 간 경우는 37.0%뿐이었고, 56.6%는 중소기업으로 옮겼다. 은퇴 후 재취업에서 대기업을 나와 중소기업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반영된 결과다.
경력이 이어지는 경우도 많지 않다.
2025년 5월 고령층 부가조사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취업한 고령층 중 최근 일자리가 생애 주된 일자리와 관련 있다고 답한 비율은 71.0%였다. 나머지 29%는 평생 해온 일과 무관한 일자리로 옮겼다.
주변 선배들의 모습도 비슷했다. 대기업 임원 출신도, 금융회사 지점장 출신도, 제조업 부장 출신도 회사를 나온 뒤에는 이전 경력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어렵게 자문역이나 계약직 자리를 구해도 기간은 짧고 급여는 예전 수준에 크게 못 미쳤다.
성 부장은 "선배들이 회사 다닐 때는 부장, 이사, 상무 등 관리자였는데 회사를 나오면 그냥 '아저씨'가 되더라"며 "지금은 웃고 있지만 처음에는 적응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퇴직한 성 부장의 한 선배는 자신의 경력을 살려보려 유튜브 채널을 열었다. 30년 가까운 직장 경험을 풀어내면 누군가는 볼 거라고 생각했다. 카메라를 사고 편집을 배우고 영상 몇 편을 올렸다. 그러나 구독자는 좀처럼 늘지 않았고 몇 달 뒤 채널은 멈췄다.
"내 경험이 콘텐츠가 될 줄 알았는데, 그걸 어떻게 풀어내고 누구에게 전할 지를 몰랐다"는 게 선배의 말이었다.
한국폴리텍대학 신수림 교수는 "중장년 교육생들을 보면 쉽지 않은 결정을 하고 온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30년 가까이 해온 일과 전혀 다른 기술을 새로 배운다는 것은 본인 스스로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고, 주변에 설명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라며 "그럼에도 자격을 따고 다시 일하겠다는 목표로 교실에 앉은 분들은 이미 큰 결심을 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신 교수는 특히 중장년층의 학습 태도에 주목했다. 그는 "40대 이상은 장난삼아 공부할 연령대가 아니다. 생활비와 가족 부양, 재취업이라는 현실적 과제를 안고 오기 때문에 학습 동기가 분명하다"며 "전기나 산업설비처럼 이전 경력과 무관한 분야라도 끝까지 배우려는 열의가 크다"고 말했다.
성 부장도 비슷한 고민에 닿아 있다. 국민연금 수령액은 계산할 수 있다. 퇴직연금 잔액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30년 인사 경력을 어디에 다시 쓸 것인가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성 부장 같은 고민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창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고용노동부의 중장년내일센터는 만 40세 이상이면 재직 중에도 이용할 수 있다. 단순 일자리 알선이 아니라, 지금 가진 경력을 어떻게 다시 쓸 수 있을지를 상담하는 곳이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도 만 40~64세를 대상으로 생애설계 상담과 경력탐색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방향이 잡혔다면 국민내일배움카드로 직업훈련비를 지원받거나, 이미 퇴직했다면 한국폴리텍대학 신중년 특화과정을 활용할 수도 있다.
다만 2025년 서비스경영학회지에 실린 연구(박가열·조정윤·임선미)는 이런 서비스들의 가장 큰 문제로 낮은 인지도를 꼽는다. 있는데 모른다는 얘기다. 정년을 3년 앞둔 성 부장 역시 최근에서야 이런 제도들의 존재를 알게 됐다.
■중장년내일센터(고용노동부)
대상: 만 40세 이상 미취업자 및 재직자
혜택: 1:1 맞춤형 생애경력설계, 전직 무료 컨설팅
■서울시50플러스재단
대상: 만 40~64세 서울시민
혜택: 중장년 인턴십 프로그램, 생애설계 상담 및 교육
■국민내일배움카드(고용노동부)
대상: 45세 이상 대기업 재직자, 중소기업 재직자, 구직자 등
혜택: 5년간 300만~500만원 직업훈련비 지원
■한국폴리텍대학(신중년 특화과정)
대상: 만 40세 이상 미취업자(일부 재직자도 허용)
혜택: 현장 실무 기술 교육비, 실습비, 식비 전액 무료
kkskim@fnnews.com 김기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