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視角] 유일한의 길
1945년 초 미국 전략정보국(OSS)의 비밀기지가 있던 캘리포니아 샌타카탈리나섬. 머리가 희끗희끗한 쉰 살의 기업가가 여기에 있었다. 수십킬로미터의 해안을 헤엄치고 밤하늘의 비행기에서 맨몸으로 낙하산을 펼쳐 뛰어내리는 특수훈련을 받고 있다. 20대의 젊은 청년들도 피를 토하는 지옥 같은 시간이다.
작전명은 냅코(NAPKO) 프로젝트. 경성(서울)과 조선총독부 침투가 목표 중 하나다. 일본의 항복으로 작전은 결국 무산됐지만 8개월에 걸친 훈련은 혹독했다. 요원들은 폭파 기술, 위장술, 독도법, 무선통신기술까지 마스터한다. 이 경성 침투조의 조장이 당시 쉰 살의 기업가,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1895~1971)이다.
미국에 간 것은 아홉살 때였다. 그가 태어났던 구한말 평양은 당시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 거점이 평양이었고, 선교사를 통해 태평양을 건넌 것이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손에 낯선 언어로 쓰인 성경 한 권을 쥐여주며 먼 길을 배웅했다. 제물포항에서 출발한 배는 한달 만에 미국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한다. 다시 기차로 갈아타고 마지막 당도한 곳이 네브래스카주의 신앙심 깊은 자매의 집이다.
역사의 한복판으로 들어서게 된 것은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이끌던 한인회 조직을 만나면서부터였다. 고교생 때 박용만을 도와 미국 국무부로부터 '대한제국 시민의 자주권'을 인정받는 레터를 받아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미시간대 3학년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이 주도한 한인 자유대회에서 청년 연사로 단에 오른다. "우리 대한민국은 자유로운 민주 국가가 되어야 하며, 우리는 독립할 자격이 있고, 반드시 그리될 것입니다." 연설의 제목이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에 대한 선언'이었다('유일한의 생애와 사상, 김형석').
고국의 땅은 제물포항을 떠난 지 20년이 흐르고 나서야 밟게 된다. 미국에서 제너럴일렉트릭 회계사로 출발해 식품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뒤였다. 거부가 된 유학파 청년 사업가의 눈에 고국의 풍경은 참담했을 것이다. 메마른 산천에 깡마른 농부들만 득실했다. 가장 열악한 문제가 보건이라고 봤다. 의사의 수도, 약품도, 영양도 형편없었다. 미국으로 돌아가 회사를 정리하고 의약품을 사모아 다시 귀국한다. 그때가 1926년이었다.
종로2가 덕원빌딩에 사무실을 차려 유한양행 간판을 올렸다. 의약품 수입을 우선으로 시작해 화장지, 비누, 치약 등 위생용품과 염료, 농기구까지 품목이 확대된다. 사업은 나날이 번창한다. 한국의 특산품을 미국 시장으로 수출하는 일도 했다. 나아가 의약품 자체 생산에 도전해 수출까지 성사시킨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판로개척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뒤 태평양전쟁 발발로 그는 미국에서 발이 묶인다. 거기서 선택한 일이 목숨을 건 경성 침투 특수공작이었던 것이다.
해방 후 돌아와 그가 걸었던 길은 경영자의 모범답안이었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 그리고 교육보국이다. 나라의 힘은 학벌이 아니라 기술인재에 있다고 말한 이가 그다. 그러면서 기술학교를 세우고 전 재산을 사회에 돌렸다. 딸에게 남긴 유언장엔 "학교 벌판의 땅 5000평을 유한동산으로 꾸며 학생들이 마음대로 놀 수 있게 하라"고 썼다. 그리고 '절대 울타리를 치지 말 것'. 미래의 아이들 발목을 잡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유일한이 세운 유한양행은 올해로 100년이 됐다. 연매출 2조원대의 회사는 국내 대표 제약사를 넘어 국산 신약 가능성을 보여주며 개척자 역할을 하고 있다. 창업주의 정신이야말로 이 회사의 큰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유일한을 기리는 창작물도 인기다. 윤태호의 웹툰 'NEW 일한' 연재물이 공개됐고, 뮤지컬('스윙 데이즈, 암호명 A')도 무대에 올려졌다. 더 많이 그의 삶이 공유되었으면 한다. 오로지 권력을 잡는 것만이 목표로 보이는 정치권이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아야 할 발자취다. 기업가의 길, 이 시대 어른의 길을 다시 생각한다.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