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출판

맛집보다 문명, 관광보다 통찰… 52개국 건넌 CEO의 여행법 [책을 읽읍시다]

유선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맛집보다 문명, 관광보다 통찰… 52개국 건넌 CEO의 여행법 [책을 읽읍시다]

[파이낸셜뉴스] "여행의 진짜 목적지는 도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여행은 언제부터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배움의 방식이 됐을까.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유럽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 유행한 '그랜드 투어'는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 상류층 청년들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 유럽 대륙을 횡단하며 고대 유적과 르네상스 예술, 외교적 매너와 사교 문화를 익혔다. 이 여행은 유흥이 아니라 정계와 외교계, 예술계로 나아가기 전 거치는 최종 교육이자 통과의례였다.

괴테는 1786년부터 1788년까지 이어진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예술적 생기를 되찾았고, 훗날 '이탈리아 기행'을 남겼다. 바이런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기존 여행길이 막히자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스, 터키를 거치는 여정을 택했고, 그 경험은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로 이어졌다.

훗날 레스터 백작이 된 토머스 코크는 어린 나이에 떠난 그랜드 투어에서 수집한 고대 조각과 르네상스 회화, 필사본을 바탕으로 영국 건축과 취향의 변화를 이끌었다. 그랜드 투어는 한 개인의 견문을 넓히는 여행을 넘어 유럽의 예술, 건축, 지성사를 움직인 문화적 촉매제였다.

이강호 PMG·프런티어 코리아 회장의 'CEO의 그랜드 투어'는 이 오래된 여행의 형식을 오늘의 경영과 인문적 사유로 옮겨온 책이다. 세계 최대 펌프 제조기업 덴마크 그런포스그룹의 한국 법인 창립 CEO를 지낸 저자는 40년 가까이 글로벌 기업과 한국 기업의 경영 현장에 몸담아왔다.

은탑산업훈장과 덴마크왕실훈장을 수훈한 그는 세계 52개국을 오가며 도시와 사람, 기업과 문명을 만났다. 이 책은 그가 2019년부터 '포브스코리아'에 연재한 '이강호의 생각여행' 가운데 30편을 엄선해 엮은 결과물이다.

'CEO의 그랜드 투어'가 흔한 여행 에세이와 다른 지점은 분명하다. 저자는 여행지를 소비하지 않는다. 맛집과 명소, 사진 찍기 좋은 풍경을 늘어놓는 대신 한 도시가 품은 시간과 정신을 읽어낸다.

파리와 로마에서는 문명의 깊이를 보고, 런던과 암스테르담에서는 도시의 품격을 배운다. 코펜하겐에서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노르웨이의 피오르에서는 자연 앞에 겸손해지는 법을 떠올린다. 미국에서는 혁신과 도전정신을, 일본에서는 장인정신과 장수 기업의 철학을, 중국의 만리장성과 병마용에서는 국가와 문명의 흥망을 사유한다.

책의 힘은 여행과 경영, 예술과 철학을 억지로 연결하지 않는 데 있다. 저자는 특정 도시에서 얻은 인상을 곧장 처세술이나 성공 법칙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대신 장소가 품은 역사,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선택, 그 선택이 오늘의 사회와 기업에 남긴 흔적을 차분히 따라간다. 그래서 이 책에서 여행은 감상의 행위라기보다 질문의 형식에 가깝다. 좋은 도시는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오래 살아남는 기업에는 어떤 철학이 있는가. 리더는 낯선 세계 앞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한 사회의 품격은 어디에서 오는가.

암스테르담에서 고흐를 마주하는 장면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저자는 고흐의 예술적 열정과 고뇌를 바라보며 창업주와 후계자, 역사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역할을 떠올린다. 코펜하겐에서는 운하와 미술관, 의사당과 폐기물 처리장을 오가며 도시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묻는다. 비엔나에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흥망을 통해 국제 협상력과 글로벌 리더십을 되짚고, 시안에서는 진시황의 병마용과 만리장성을 통해 권력의 불멸과 소멸을 성찰한다. 여행지는 배경에 머물지 않고, 현재를 해석하는 거울이 된다.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은 'CEO의 시선'이다. 저자는 예술 작품 앞에서도 경영을 떠올리고, 자연 앞에서도 조직과 인간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 시선이 차갑거나 효율 중심으로만 흐르지는 않는다. 오히려 오랜 경영 경험을 거친 이가 결국 도달한 결론은 사람과 태도, 품격과 책임의 문제에 가깝다. 경영도 결국 사람의 일이며, 리더십 역시 성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책 전반에 흐른다.

저자가 직접 찍고 기록한 사진들도 글의 밀도를 더한다. 대자연의 풍광, 오래된 궁전과 유적, 예술가의 흔적이 남은 공간, 박물관과 미술관, 글로벌 기업의 현장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들은 저자의 사유가 출발한 현장의 증거다. 독자는 사진과 글을 따라가며 한 글로벌 CEO가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읽고, 그 경험을 어떻게 자신의 경영 철학으로 전환해왔는지 확인하게 된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기자 정보

#그랜드 투어 #이강호 #CEO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