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들의 마지막 바람…"한국이 우리를 기억해주길"
【파이낸셜뉴스 뉴욕=이병철 특파원】 "이제 5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한국을 위해 싸웠던 분들이 한 분, 두 분 우리 곁을 떠나고 있습니다. 한국이 이분들을 조금만 더 기억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미국 한국전참전용사회(KWVA)에서 유일한 한국인으로 한국 업무를 맡고 있는 이응철(64) 씨는 이 말을 꺼내는 순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암 투병으로 건강이 예전 같지 않지만, 그는 남은 시간을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위해 쓰기로 했다. "이 일이 제 마지막 소명인 것 같다"는 그의 목소리에는 담담함과 절박함이 함께 묻어났다.
4년 전 협회에 합류한 그는 미국 50개 주에 흩어져 사는 참전용사들의 안부를 챙기고, 분기마다 발간되는 협회 잡지를 만들며, 한국 정부와 기업을 찾아 후원을 요청하는 일까지 사실상 홀로 도맡고 있다.
그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매달 잡지를 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작비가 부족해 석 달, 넉 달에 한 번 겨우 발간합니다. 참전용사들이 직접 회비와 후원으로 운영하던 시대는 끝났어요. 이제는 한국이 이분들을 기억해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가 만드는 잡지는 미국에서 사실상 유일한 한국전 참전용사 전문 간행물이다. 7000여 부가 미국 전역으로 배포된다. 낙동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의 기록은 물론, 폐허가 된 한국에 밀가루를 보내고 전쟁고아를 입양했던 참전용사들의 삶, 그리고 전쟁 이후 눈부시게 성장한 오늘의 한국까지 함께 담아낸다. 잡지 한 권에는 전쟁의 역사뿐 아니라 한국을 향한 노병들의 평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씨 역시 한국과 미국을 모두 경험한 독특한 삶을 살아왔다.
대학을 졸업한 뒤 한국군 정보여단에서 약 3년간 복무했고,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미군 정보부대에 입대해 주일미군으로 근무하며 한국과 일본 등 극동 지역 정보를 담당했고, 워싱턴DC 정보사령부에서도 1990년대 초까지 복무했다.
제대 후에는 뉴욕에서 다이아몬드와 귀금속 사업을 시작했다. 유대인들과 30년 넘게 사업을 하며 생계를 꾸렸고, 은퇴할 때까지는 재향군인회 활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인생의 전환점은 은퇴 후 찾아왔다.
재향군인회(VFW)에 가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과거 함께 근무했던 동료가 그를 찾아왔다. 당시 한국전참전용사회 회장이었던 그는 "한국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며 한국 담당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에는 건강을 이유로 거절했다. 하지만 끝내 외면할 수 없었다. "이분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늘 부모가 있었다.
그의 부모는 모두 군인이었다. 한국전과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군 장학생으로 미국에서 교육을 받다가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었던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지금의 참전용사들이 결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부모님 생각이 더 많이 납니다. 저분들도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누군가의 어머니입니다. 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쳤던 분들인데 마지막 순간만큼은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그가 가장 힘을 쏟는 일은 후원을 연결하는 것이다.
협회는 미국 정부로부터 별도의 운영 지원을 받지 못한다. 잡지를 만드는 비용조차 부족해 발간 횟수를 줄였고 회원 대부분이 90대 중반을 넘기면서 모임에 참석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는 한국 정부에서 이들의 존재를 조금 더 기억해주길 바라고 있다. 미국에 있는 한국정부 관계자들을 만나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큰돈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잡지를 계속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지원, 한국 행사에 참전용사들을 한 번 더 초청하는 일. 그것만으로도 이분들은 '우리를 아직 한국이 기억하고 있구나' 하고 큰 위로를 받습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여러 차례 후원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여의도순복음교회였다.
그는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가 뉴욕을 방문했을 때 협회의 어려운 사정을 말씀드렸는데 흔쾌히 도움을 주셨다"며 "그때 참전용사들이 정말 큰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미국 곳곳에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살아 있다고 했다. 인디언 출신 참전용사, 일본계 미군, 해병대 출신 노병까지 저마다 한국전의 기억을 품은 채 살아가는 이들의 대부분은 이미 90대 중반을 넘겼다.
"시간이 없습니다. 해마다 더 많은 분들이 우리 곁을 떠나고 있습니다. 한 분이라도 더 살아 계실 때 그분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한국이 감사하고 있다는 마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가 바라는 미래는 거창하지 않다.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한국이 우리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만 느낄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그냥 만들어진 나라가 아닙니다. 자유를 위해 이름도 모른 채 이국땅에서 싸웠던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 위에 세워졌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한국과 참전용사들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고 싶습니다."
pride@fnnews.com 이병철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