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fn광장] 반도체 '대박'과 위기 '트라우마'

파이낸셜뉴스

"AI시대, 반도체 슈퍼사이클 개화
수요확대에 '삼전닉스'이익급증
내년 세수 500조 이상 기대 고조
주가상승, 경상수지 개선 효과 커
고환율, 아세안 불안 확대는 우려
추가세수 활용, 혁신·투자 나서야"

김규성 정치부장
김규성 정치부장

기획예산처 박홍근 장관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내년 국세 수입이 당초 전망인 412조원을 훌쩍 넘은 '500조원+알파(α)'로 사상 최대 세수를 기록할 것이란 대목에선 유독 자신감이 묻어났다. 지난 13일 이재명 대통령 주재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박 장관이 국가재정운용 방향을 제시하는 모습을 TV 생중계로 보면서 스친 느낌이다. 박 장관의 여유는 어디에서 왔을까. 4선 중진 국회의원이면서 초대 기획처 장관이라는 경력이 갖는 무게감일까.

정답은 모두가 알고 인정하는 '반도체 대박' 영향이 아닐까 싶다. 인공지능(AI) 대전환 시대를 맞아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본격화되고 있다. AI 구동에 필수적인 고대역폭메모리(HBM)의 사실상 독점공급 기업인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은 급증세다. 반도체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물량 부족에다 가격도 높아서다. 올해 2·4분기 삼성전자는 하루에 1조원씩 영업이익을 냈다. SK하이닉스는 지난 10일(현지시간) 미국 증시에서 265억달러(약 40조원) 조달에 성공했다. 미국 증시에 상장한 외국 기업 중 가장 큰 조달규모로 나스닥 시장에 입성했다.

기업 이익 급증은 세수증가로 이어진다. 법인세, 근로소득세 등이 더 걷히면 예산당국은 지출을 늘릴 여력이 커진다. 더 걷힐 세수가 100조원을 훌쩍 넘긴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정부가 내년 예산을 올해보다 10% 이상 증가한 800조원대로 편성하겠다는 자신만만함의 배경이다. '삼전닉스'의 활약은 또 여럿 있다. 국부가 팽창 중이다. 코스피 상승세를 이끌었고, 경상수지 흑자도 큰 폭으로 늘렸다. 올 5월까지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1412억8000만달러다. 지난해 연간 흑자액(999억7000만달러)을 5개월 만에 넘어섰다. 역대급 성적이다.

'호사다마'는 잔칫집에 재 뿌리는 말이지만 좋은 일이 생길수록 혹시 망칠 만한 조짐은 없는지 살피라는 교훈도 담고 있다. 경제영역으로 해석을 확대하면 '위기' 조짐은 없는지 경계하라는 경구다.

찜찜한 흐름은 있다. 원화 가격 급락이다. 원·달러 환율은 좀처럼 1500원대 아래에 안착하지 못하고 있다. 경상수지 흑자로 보면 이해 불가다. 삼성전자 실적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반도체 수출로 그만큼 달러를 벌고 있다. 환율만 보면 2009년 금융위기와 별반 다름없다. 환율만의 문제일까, 아니면 우리의 경제체력이 약해진 탓일까. 동남아 통화의 약세도 묘하다. 인도네시아가 유독 심하다. 인도네시아 정부 재정 악화가 원인으로 꼽힌다. 태국, 필리핀, 베트남도 재정악화·통화가치 약세다. 아시아 통화 동반 약세는 1997년 외환위기 트라우마를 소환한다. 당시 위기는 태국에서 시작돼 각국으로 전염됐고, 한국까지 덮쳤다. 그때는 고정환율제였다. 변동성 흡수력이 월등한 현재의 변동환율제와는 다르다. 외환보유액도 두껍다. 분명히 다르지만 닮은 면도 있다.

경계심을 유지해야 한다. 반도체 효과를 활용해 위기 트라우마에서 탈피해야 한다. 추가세수로 유입되는 막대한 재원은 기존 경제시스템 전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정부가 추가세수를 일회성이 아닌 미래대응기금으로 조성, 미래·청년·지방·교육에 집중 투자하겠다는 점은 적절하다. 반도체 등 3대 메가프로젝트 지원 방침도 당연하다.

다만 정책방향이 옳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격언이 빈번하게 인용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미래대응기금은 관련법에 따라 조성·설치되겠지만 정부 쌈짓돈이 될 것이란 우려는 있다. 기금은 예산과 달리 국회의 심의·견제 기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정권의 이해나 정치논리에 따라 돈 쓸 데를 늘리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과거 사례가 이를 대변한다. 예상 못한 세수가 쏟아졌을 때,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3저' 호황의 노태우 정부는 정당성 보완을 위해 임금·복지 확대 요구에 맞춰 재정을 확대했다. 1994~1995년 소위 1차 반도체 호황 당시 김영삼 정부는 미래투자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이라는 치적에 집중, 위기를 불러왔다. 반도체 사이클이 좋았던 문재인 정부도 호기를 놓친 건 마찬가지다.

반도체 대박과 정치논리가 결합하면 과감한 혁신과 투자는 물 건너간다. 반도체발 추가세수가 구세주가 아닌 위기를 불러오는 독이 될 수 있다.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이었던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의 멘트는 여전히 유효하다. "1990년대 중반 모두가 반도체 특수에 눈이 멀어 취약해져 가는 경제구조를 방치했는데, 이것이 외환위기의 원인이었다."
mirror@fnnews.com 김규성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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