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명 넘던 전우, 이제 6명뿐"…한국전 노병들 "우리에겐 도움이 필요합니다"
90대 참전용사들 명예 군복 입고 다시 경례
걷고 보고 듣는 것도 힘겨워…감사·예우 넘어 한국전 참전용사 단체 유지 도움 필요
【파이낸셜뉴스 뉴욕=이병철 특파원】 "서울에 처음 갔을 때는 온통 폐허였습니다. 거리에는 벽돌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가 됐습니다."
10일(현지시간) 미국 뉴저지주 포트리의 베테랑 회관. 한국전쟁 참전용사 알베르토 곤잘레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90대 중반의 노병이 마이크를 잡자 70여년의 세월이 순식간에 거슬러 올라갔다.
회관 벽에는 참전용사들의 젊은 시절 사진과 훈장, 표창장이 빼곡했다. 그 앞에 선 다섯 명의 노병은 이날 특별히 제작된 짙은 국방색 군복을 다시 입었다. 허리에는 벨트를 매고 어깨에는 견장을 달았다. 서로의 군복을 바라보며 웃었고, 한 노병은 오른손을 이마에 붙여 힘껏 거수경례했다. 몸은 세월을 비켜가지 못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20세 안팎의 군인으로 돌아간 듯했다.
이날 참석한 한국전 참전용사는 5명. 모두 90세를 넘겼다. 당초 참석하려던 일부 참전용사들은 건강 문제로 행사장을 찾지 못했다. 이날 행사는 한국 의류업체 루비콘스가 참전용사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마련했다.
포트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곤잘레스는 195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부산을 거쳐 인천과 38선 인근에서 복무했다. 그는 "당시 학교에서는 한국이 일본의 일부인 줄 알 정도로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며 "1951~1952년 겨울은 정말 추웠다"고 기억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한국을 서너 차례 다시 찾았다. 전쟁 당시 처음 마주했던 서울은 잔해와 벽돌뿐이었지만 다시 찾을 때마다 도시의 모습이 달라져 있었다.
"갈 때마다 전에 봤던 건물 옆에 새로운 건물이 올라가 있었습니다. 완전히 달라졌죠."
곤잘레스는 "전쟁에서 보낸 1년은 힘든 시간이었지만 한국이 지금처럼 발전한 것을 보니 우리가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가치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다른 노병들의 기억도 하나둘 이어졌다. 알렉스 애서러스는 육군 취사병으로 오산과 수원 사이에서 근무했다. 그에게 남은 기억은 총성과 포탄만이 아니었다.
미군들이 식사를 마친 뒤 남은 음식을 버리면 인근에 살던 한국 주민들이 찾아와 그것을 가져가는 모습을 그는 여러 차례 목격했다. 애서러스는 "이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후 식탁을 따로 마련하고 장병들에게 남은 고기와 으깬 감자, 빵 등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말고 따로 모으도록 했다.
"그렇게 음식을 나눠주니 그들도 행복했고, 나도 행복했습니다."
70여년이 흘렀지만 그가 기억하는 한국전쟁의 한 장면이었다. 애서러스는 먼저 세상을 떠난 전우들도 잊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이런 자리에 초대될 때마다 함께 초대되는 사람들이 있다"며 "한국에서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이라고 말했다.
1952년 18번째 생일에 육군에 자원입대한 대니 베네치아는 전쟁 이후 자신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한국인들의 '감사'였다고 했다.
"한국인들이 보여주는 감사와 사랑은 정말 놀랍습니다."
그는 뉴욕 플러싱의 한 행사에 참석했을 당시 자신의 참전용사 단체를 위해 시계와 1000달러의 후원금을 받은 일화를 꺼내며 "한국 사회가 참전용사들을 대하는 방식에 개인적으로 정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날 군복은 한국에서 제작해 참전용사들에게 전달됐다. 제작에 참여한 업체 측은 "이 옷 한 벌이 여러분이 한국을 위해 한 모든 일을 대신할 수는 없다"면서 "한국인들이 여러분의 희생과 용기를 잊지 않겠다는 약속의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폴 김 팰리세이즈파크 시장도 행사장을 찾았다. 김 시장은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내가 서울에서 미국 학교를 다니고 미국으로 이민 와 시민권을 얻어 시장이 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겠느냐"며 "내가 누린 아메리칸 드림과 기회의 출발점에는 여러분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있었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날 가장 무거운 말은 화려한 기념사가 아니라 스태튼아일랜드에서 온 존 디벤지오의 입에서 나왔다.
18세 때 군에 들어가 1953년 한국전쟁 마지막 6개월을 보냈다는 그는 전쟁 이후에도 원자폭탄과 독가스 관련 군사시험 등에 참여했고, 제대한 뒤에는 건설 현장에서 35년을 일했다.
세월이 흘러 아내와 두 아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최근에는 다섯 번째 증손녀가 태어났다며 잠시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20년 전 몸담았던 스태튼아일랜드 한국전 참전용사 단체 이야기가 나오자 표정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회원이 150명이 넘었습니다. 지금은 여섯 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춘 뒤 자신의 몸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중 절반은 나처럼 걷기도 어렵고, 보기도 어렵고, 제대로 먹기도 어렵습니다. 듣는 것도 힘듭니다."
이어 "이 조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그의 말은 이날 행사의 또 다른 의미를 보여줬다.
70여년 전 이름조차 낯선 나라로 향했던 청년들은 이제 대부분 90대가 됐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식과 훈장, 감사의 옷 한 벌은 이들에게 분명 소중한 예우다. 하지만 남아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 참전용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말만은 아니다. 이동과 의료, 일상생활 지원은 물론 사라져가는 참전용사 단체가 마지막까지 유지될 수 있도록 돕는 현실적인 손길도 절실해지고 있다.
행사가 끝날 무렵 새 군복을 입은 노병들이 한자리에 섰다. 누군가는 지팡이에 의지했고 누군가는 옆 사람의 부축을 받았다. 그래도 카메라가 향하자 허리를 다시 폈다.
그리고 한 노병이 오른손을 들어 경례했다.
70여년 전 대한민국을 지킨 군복은 새것으로 돌아왔다. 이제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은 그 군복 안에서 늙어간 사람들의 오늘이다.
[email protected] 이병철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