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 경쟁에 흔들린 다자주의… 제주서 '중견국 연대' 해법 찾다
제21회 제주포럼 세계지도자 세션 개최 기후·핵위험·AI 윤리는 경쟁과 분리해 협력 반기문 "유엔과 중견국 협의체 함께 활용해야" 유도요노 "미중 사이 중견국 더 적극적으로 행동" 잔단샤타르 "제주포럼, 협력 의제 시험대 역할"
【파이낸셜뉴스 제주=정용복 기자】 강대국 경쟁이 경제와 안보, 첨단기술 분야로 번지면서 국제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문제까지 경쟁의 영역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기후위기와 감염병, 핵위험, 사이버안보, 인공지능(AI) 윤리는 어느 한 국가가 국경을 닫고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이다. 하지만 이를 다뤄야 할 유엔과 다자주의 체제의 조정 능력은 약화되고 있다.
국제질서가 협력과 대결의 갈림길에 선 가운데 세계 지도자들이 제주에 모여 '협력을 어떻게 다시 작동시킬 것인가'를 논의했다. 이들이 제시한 해법은 거대한 국제기구 하나에 모든 문제를 맡기는 방식이 아니었다. 유엔을 개혁하는 동시에 중견국과 지역 협의체가 대화의 공간을 만들고, 기후·에너지·AI처럼 이해관계가 맞는 분야부터 작은 협력을 쌓아야 한다는 제안이다.
25일 서귀포시 표선면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에서 제21회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제주포럼 세계지도자 세션 '분열된 세계에서 협력의 재구상'이 열렸다.
가레스 에번스 전 호주 외교부 장관 겸 호주국립대학교 명예교수가 좌장을 맡았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 곰보자브 잔단샤타르 전 몽골 총리, 필리프 뢰슬러 전 독일 부총리가 참여했다.
■ '각자도생'으로 풀 수 없는 공동위험
국제협력이 어려워진 가장 큰 배경은 강대국 경쟁이다. 경제와 안보가 결합하고 반도체·AI·핵심광물·공급망이 국가 전략의 일부가 되면서 국제사회는 협력보다 진영과 국익을 앞세우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문제는 경쟁이 심화될수록 국가 간 협력이 필요한 위험도 함께 커진다는 점이다. 기후변화로 발생하는 폭염과 홍수, 감염병 확산, 사이버 공격과 핵위험은 국경 안에서 통제하기 어렵다. AI가 무기체계와 드론에 활용되면서 기술 경쟁과 인류 안전 사이의 새로운 규칙도 필요해졌다.
반기문 전 사무총장은 기후위기와 강대국 경쟁, 유엔과 국제기구의 약화를 국제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3대 문제로 꼽았다.
반 전 사무총장은 "아무리 강력하고 자원이 풍부한 국가도 홀로 살아남을 수 없다"며 "기후변화와 강대국 경쟁, 유엔의 약화는 국제협력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진단했다.
그의 발언은 다자주의가 외교적 명분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생존과 연결된 현실적 수단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기후위기나 감염병 대응에서 다른 국가가 실패하면 그 피해가 국경을 넘어 확산되기 때문이다.
세계 지도자들은 경쟁 자체를 없애기는 어렵다고 봤다. 대신 공정하게 경쟁할 분야와 반드시 협력해야 할 분야를 구분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뢰슬러 전 독일 부총리는 "국가 지도자의 역할은 공정한 경쟁이 가능한 영역과 세계적 협력이 필수적인 영역을 구별하는 것"이라며 "우리는 분열된 세계에 살고 있지만 영구적으로 갈라진 세계가 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산업과 시장에서는 경쟁하더라도 기후·보건·핵위험·사이버안보·AI 윤리와 같은 공동위험을 다루는 대화 창구까지 닫아서는 안 된다는 설명이다.
■ 흔들리는 유엔… 개혁과 실행력 요구
전후 국제질서의 중심에는 유엔을 비롯한 다자기구가 있었다. 그러나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국제기구의 의사결정이 멈추거나 합의가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반 전 사무총장은 유엔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유엔을 대체할 수 있는 보편적 국제기구는 아직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다자주의에 대한 비판에도 유엔은 국제사회가 원하는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가장 권위 있는 국제기구"라며 "협력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유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지만 유엔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자주의를 되살리려면 회의와 선언에 머물던 기존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참석자들은 국제기구의 책임성과 실행 능력을 높이고, 합의된 의제가 정책과 사업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뢰슬러 전 부총리는 "다자기구는 기후변화와 같은 세계적 위협에 실제로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며 "그래야 중견국뿐 아니라 강대국과 다른 협력 상대도 다시 협상 테이블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했다.
국제기구의 권위는 회원국 수나 역사보다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에서 나온다는 지적이다. 다자주의 개혁이 조직과 제도를 손보는 차원을 넘어 결과를 만들어내는 실행 체계로 이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 강대국 사이 '연결자'로 나서는 중견국
세계 지도자들이 공통으로 주목한 주체는 중견국이다. 중견국은 미국이나 중국처럼 세계질서를 좌우하는 강대국은 아니지만 경제력과 외교력, 국제적 신뢰를 바탕으로 국가 간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나라를 뜻한다.
강대국이 직접 대화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중견국은 대화의 통로를 열고, 여러 국가가 참여할 수 있는 협력 의제를 제안하는 연결자 역할을 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 호주, 인도네시아 등과 아세안이 대표적으로 거론됐다.
유도요노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강대국 중심 질서가 힘의 논리로 흐르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강자의 힘은 견제돼야 하며 강한 국가는 원하는 대로 하고 약한 국가는 견뎌야 하는 질서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며 "다자주의의 침식과 극단적 민족주의, 일방주의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과 일본, 호주,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지역 중견국과 아세안이 미중 경쟁 속에서 균형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이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며 "중견국은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반 전 사무총장도 멕시코·인도네시아·한국·튀르키예·호주가 참여하는 중견국 협의체 믹타(MIKTA)와 아세안, 아세안+3, 동아시아정상회의 등을 창의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중견국 연대는 강대국에 맞서는 또 다른 진영을 만들자는 의미와는 다르다. 대립하는 국가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는 의제를 발굴하고 대화가 완전히 끊기지 않도록 완충지대를 만드는 역할에 가깝다.
■ 5~10개국 '작은 연합'으로 협력의 속도 높인다
모든 국가가 참여하는 다자협의체는 대표성과 정당성이 높지만 합의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반대로 소수 국가만 참여하는 협의체는 특정 현안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잔단샤타르 전 몽골 총리는 다자주의를 보완할 방안으로 5~10개국이 참여하는 목적 중심의 '소다자 연합'을 제안했다.
그는 "다자주의는 여전히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며 "녹색에너지와 핵심광물, 회복력 있는 공급망, AI 거버넌스 등 구체적인 과제를 중심으로 5~10개국이 참여하는 목표 지향적 연합을 구성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모든 국가가 AI 규범에 한꺼번에 합의하기 어렵다면 비슷한 문제의식과 제도를 가진 국가들이 안전 기준을 먼저 만들고 적용한 뒤 참여 범위를 확대할 수 있다. 기후기술과 핵심광물 공급망, 감염병 대응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
잔단샤타르 전 총리는 "중견국이 강대국을 대신하자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이 분열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소다자 협력은 유엔 중심의 다자주의를 대체하는 체제가 아니라 실행 속도를 높이는 보완 장치다. 작은 협력에서 성과를 만든 뒤 국제사회 전체의 규범과 제도로 확장하는 방식이다.
■ 동아시아, 역사·안보 대화부터 복원
동아시아는 경제적 상호의존도가 높지만 역사 문제와 영토 갈등, 북핵, 미중 경쟁이 복합적으로 얽힌 지역이다. 안보 위기가 발생할 때 이를 관리할 상설 협력체계가 유럽보다 취약하다는 점도 한계로 꼽힌다.
하토야마 전 일본 총리는 국가 지도자 간 상호 존중과 제도화된 대화가 전쟁을 막는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국가 지도자가 다른 나라를 존중할 때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가능해지고 전쟁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동아시아의 협력은 정상 간 회담만으로 만들어지기 어렵다. 역사와 안보 문제에 대한 정부 간 대화와 함께 학계·언론·시민사회의 교류를 꾸준히 이어가야 정치적 갈등이 발생하더라도 관계 전체가 단절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동아시아는 제로섬 안보에서 벗어나 공동·협력·포괄 안보로 나아가야 한다"며 기후 대응과 에너지 전환, 디지털 기술 윤리 등을 공동 협력 분야로 제시했다.
제로섬 안보는 한 국가의 안보 강화가 다른 국가의 위협으로 인식되는 구조다. 이에 비해 협력 안보는 감염병과 기후재난, 사이버 공격처럼 여러 국가가 함께 대응해야 모두의 안전이 높아지는 문제를 중심에 둔다.
■ 드론에 탑재된 AI… 기술 경쟁에도 규칙 필요
AI는 이번 세션에서 새롭게 부상한 국제안보 의제였다. AI 기술이 산업과 행정뿐 아니라 드론과 무기체계, 정보전에도 활용되면서 기술 개발 속도를 따라갈 국제적 규범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AI가 드론과 무기체계에 사용돼 큰 피해를 일으키고 있는 만큼 AI 윤리 기준을 세우는 일도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AI 무기체계는 공격 판단의 책임이 인간과 개발기업, 군대 가운데 누구에게 있는지 불분명해질 수 있다. 자율무기 오작동이나 데이터 편향, 사이버 공격으로 인한 통제권 상실도 국제사회가 함께 다뤄야 할 위험이다.
참석자들이 AI 윤리를 기후위기와 핵 비확산에 견줄 공동 의제로 제시한 이유다. 국가 간 기술 경쟁은 이어가더라도 인간의 생명과 안전에 직결되는 최소 기준은 공동으로 마련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 제주포럼, 중견국 협력의 '정책 실험실'로
제주포럼의 역할도 재조명됐다. 세계 지도자들은 제주포럼과 같은 국제회의가 유명 인사의 연설을 듣는 행사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중견국과 국제기구, 시민사회가 새로운 협력 의제를 발굴하고 정책으로 발전시키는 공간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잔단샤타르 전 총리는 "제주포럼과 같은 플랫폼은 중견국과 국제기구, 시민사회가 공동 전략을 만들고 다자주의 의제를 발전시키는 시험대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제주는 강대국 정치의 중심에서는 떨어져 있지만 평화와 국제협력을 상징하는 공간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제주4·3의 아픈 역사를 화해와 평화의 가치로 전환해 왔고, 제주포럼을 통해 정부와 국제기구, 전직 정상, 전문가가 만나는 대화의 장도 축적했다.
이번 세션이 던진 메시지는 '협력이 필요하다'는 원론에 머물지 않는다. 보편적 대표성을 가진 유엔을 개혁하고, 중견국이 대화의 연결자로 나서며, 5~10개국 규모의 소다자 협력으로 구체적인 성과를 만들자는 제안이다.
기후위기와 핵위험, AI 윤리처럼 경쟁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서는 강대국도 결국 협상 테이블로 돌아와야 한다. 제주포럼이 선언을 반복하는 국제행사를 벗어나 중견국 협력 의제를 설계하고 검증하는 정책 실험실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가 앞으로의 과제로 남았다.
jyb@fnnews.com 정용복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