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리더십 공백, 제주서 해법 묻다… 사무총장 후보들 "다자주의 다시 세워야"
제21회 제주포럼 유엔 사무총장 후보자 대담
올해 하반기 선출 앞두고 개혁 비전 공개
그린스판·그로시·마키 살 등 후보자 참석
반기문 "공개 검증의 장, 제주포럼 의미 커"
조현 "유엔 존재감·유능함 입증이 핵심 과제"
【파이낸셜뉴스 제주=정용복 기자】 세계가 어느 때보다 유엔을 필요로 하는 순간, 정작 유엔의 존재감은 약해지고 있다는 진단이 제주에서 나왔다. 기후위기와 전쟁, 핵위험, 빈곤, 디지털 격차처럼 국경을 넘어 확산되는 위협은 커지고 있지만, 이를 조정해야 할 다자주의 체제는 신뢰와 실행력의 위기를 동시에 맞고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올해 하반기 차기 유엔 사무총장 선출을 앞두고 후보자들이 제주포럼에 모여 유엔 개혁과 다자주의 재구상 방안을 제시했다. 단순한 외교 행사라기보다 차기 유엔 수장이 어떤 리더십으로 국제질서의 공백을 메울 것인지를 공개적으로 검증하는 무대가 됐다.
제주평화연구원과 보다나은미래를위한 반기문재단, 유엔재단, 글로벌여성지도자 재단은 25일 오후 1시30분 서귀포시 표선면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그랜드볼룸AB에서 '유엔 사무총장 후보자 대담: 다자주의 재구상' 세션을 개최했다.
대담에는 레베카 그린스판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사무총장, 라파엘 마리아노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 마키 살 전 세네갈 대통령, 캐롤린 로드리게스 버켓 주유엔 가이아나 대사, 마리아 페르난다 에스피노사 전 유엔총회의장이 참석했다. 미첼 바첼레트 전 칠레 대통령은 영상으로 참여했다. 좌장은 샤란짓 레일 배스스파대 총장이 맡았다.
이날 후보자들이 공통으로 던진 메시지는 분명했다. 유엔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지금의 방식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회원국 중심의 전통적 외교만으로는 기후위기와 AI 거버넌스, 핵위험, 글로벌 공급망, 빈곤과 불평등을 감당하기 어렵다. 유엔이 다시 신뢰를 얻으려면 더 빠르게 움직이고, 더 넓게 연결하며, 평범한 시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주문이 이어졌다.
반기문 보다나은미래를위한 반기문재단 이사장은 개회사에서 이번 대담의 의미를 '공개 검증'에서 찾았다. 반 이사장은 자신이 2006년 유엔 사무총장직에 도전했을 당시 후보자들이 대중의 감시나 공개 토론 없이 여러 나라를 오가며 이른바 '조용한 외교'를 벌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제주포럼이 제공한 개방적 무대는 후보자들이 역량과 자질을 공개적으로 검증받는 기회라고 평가했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축사에서 차기 유엔 사무총장의 과제를 더 직접적으로 제시했다. 조 장관은 "전 세계가 어느 때보다 유엔을 필요로 하는 이 시점에 오히려 유엔은 점점 더 존재감을 잃고 있다"며 유엔이 여전히 유효하고 유능하며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 함께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일이 차기 수장의 핵심 과제라고 강조했다.
유엔의 존재감 약화는 단지 국제기구 내부의 문제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분쟁, 기후재난, 핵위험, 식량·에너지 위기, AI와 디지털 질서 재편은 서로 맞물려 있다. 한 사안의 실패가 다른 위기로 번지는 시대에 유엔이 조정자 역할을 하지 못하면 각국은 더 좁은 국익과 진영 논리로 움직일 가능성이 커진다.
레베카 그린스판 사무총장은 유엔이 더는 혼자 모든 역량을 독점하는 시대가 아니라고 진단했다. 그는 "1945년 유엔 창설 당시에는 많은 역량이 유엔에 집중돼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개별 국가와 지역기구, 민간 부문, 시민사회가 모두 상당한 역량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AI와 디지털 거버넌스 분야에서는 민간 부문과의 협력이 유엔의 독립성을 해치는 일이 아니라며, 오히려 그런 협력을 하지 않는다면 유엔이 존재 의의를 잃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유엔 개혁의 방향을 보여준다. 과거의 유엔이 국가 간 합의와 선언을 중심으로 움직였다면, 앞으로의 유엔은 기술기업과 시민사회, 지역기구, 국제금융, 연구기관을 함께 묶어 실제 문제 해결 능력을 높여야 한다는 뜻이다. AI 규범이나 디지털 격차 해소처럼 정부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의제에서는 이런 연결 능력이 더욱 중요해진다.
마리아 페르난다 에스피노사 전 유엔총회의장은 유엔의 역할을 '예방'에서 찾았다. 그는 "민간인이 고통받는 모든 상황은 유엔의 행동을 필요로 한다"며 "자신의 해법은 예방"이라고 강조했다. 유엔을 인류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제도적 성과로 평가하면서도, 더 효율적이고 서비스 지향적이며 사람들과 실제로 소통하는 기구로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캐롤린 로드리게스 버켓 대사는 "사무총장이 유엔의 플랫폼을 모든 회원국이 함께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언론의 관심에서 벗어난 위기라도 인류 공동의 사안이 의제에서 밀려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국제정치에서 관심을 받는 전쟁과 그렇지 못한 분쟁, 큰 국가의 위기와 작은 국가의 재난이 다르게 취급되는 현실을 겨냥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마키 살 전 세네갈 대통령은 유엔 리더십의 핵심을 신뢰 회복으로 봤다. 그는 "사무총장이 분쟁을 예방하기 위해 가용한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해야 하지만, 이는 사무총장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안전보장이사회를 비롯해 회원국과 당사자 간 신뢰를 다시 구축하는 과정이 필수이며, 그 신뢰가 난제를 해결하는 토대라는 것이다.
라파엘 마리아노 그로시 사무총장은 "유엔이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신뢰가 회복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후위기와 기아, 핵위협, 빈곤처럼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에 유엔이 실질적으로 대응할 때 유엔에 대한 신뢰가 되살아날 수 있다"고 말했다. 차기 사무총장 선출을 유엔의 존재 의의가 시험대에 오른 시기의 중대한 결정으로 규정했다.
영상으로 참여한 미첼 바첼레트 전 칠레 대통령은 위기가 폭발하기 전에 예방하고, 모든 회원국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유엔 헌장의 원칙과 가치에 뿌리내린 다자주의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특히 당사자들이 대화를 거부할 때도 소통의 통로를 열 수 있는 사무총장의 역량을 강조했다.
후보자들의 발언은 서로 다른 표현을 썼지만 한 방향으로 모였다. 차기 유엔 사무총장은 강대국 사이에서 중립적 의전 역할을 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사라지는 의제를 다시 꺼내고, 갈라진 국가들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며, 기술과 기후, 핵위험처럼 미래세대의 삶을 좌우할 의제를 국제규범으로 연결해야 한다.
이번 세션이 제주에서 열렸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제주포럼은 올해 '분열의 시대, 협력의 재구상'을 대주제로 내걸었다. 유엔 사무총장 후보자 대담은 그 대주제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 자리였다. 국제질서가 흔들릴수록 협력의 필요성은 커지지만, 협력을 가능하게 만드는 제도와 리더십은 더 강한 검증을 요구받는다.
제주가 평화와 공존의 가치를 국제사회에 제시해 온 공간이라는 점에서 이번 대담은 지역 외교의 상징성도 갖는다. 국가 정상과 국제기구 수장, 후보자들이 제주에서 유엔 개혁을 논의한 것은 제주포럼이 단순한 지역 행사를 넘어 글로벌 공공외교 플랫폼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과제도 남아 있다. 공개 대담이 유엔 선출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더라도 실제 사무총장 선출은 여전히 안보리와 회원국 정치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후보자들의 개혁 구상이 유엔 내부 권한 구조와 강대국 이해관계를 넘어 실행으로 이어질지도 지켜봐야 한다.
그럼에도 이번 제주포럼 대담은 유엔 개혁 논의를 시민과 국제사회 앞에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차기 사무총장에게 요구되는 것은 더 많은 선언이 아니라 더 잘 보이는 유엔, 더 빨리 움직이는 유엔, 더 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는 유엔이라는 메시지였다.
jyb@fnnews.com 정용복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