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특파원 칼럼] 370조엔 vs 4755조원

파이낸셜뉴스
서혜진 도쿄특파원
서혜진 도쿄특파원

"인공지능(AI)·반도체 등 17개 전략분야에 대해 민관이 370조엔 이상의 투자를 추진한다."(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관이 강하게 나선 만큼 민간도 마인드셋을 전환해 투자목표를 다시 제시해야 한다."(쓰쓰이 요시노부 게이단렌 회장)

지난달 30일 관민 협력 투자구상이 공개된 일본 성장전략회의에서 정부와 민간을 대표하는 두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이날 일본 정부는 AI, 반도체, 에너지, 조선, 바이오 등 17개 전략분야를 묶어 2040년까지 370조엔(약 3532조원) 이상을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게이단렌(일본경제단체연합회)은 민간 설비투자 목표를 250조엔(약 2394조4500억원)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맞받았다. 겉으로는 관민이 함께 속도를 맞추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부가 투자 방향을 제시하고 민간이 그 틀 안에서 대응하는 분위기다.

이번 구상은 경기 부양보다 산업정책을 개별 지원에서 패키지형 투자로 전환하는 성장전략에 가깝다. 그러나 시장은 환호보다 계산기를 먼저 두드리고 있다. 실제 민간과 재정의 비율이 어떻게 나뉠지, 추가 국채 발행이 어디까지 확대될지가 초점이다.

일본 국채 시장은 오랜 기간 안정을 유지해왔다. 일본은행(BOJ)이 국채의 절반 이상을 보유하고 초저금리 환경 속에서 정부의 이자 부담은 억제돼 왔다. 그러나 금리 정상화가 본격화되는 지금 이 구조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번 계획이 더 복잡하게 읽히는 이유는 '일회성 경기 부양'이 아닌 '상시투자 체제로의 전환'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경기대응을 위해 재정을 늘리고 다시 줄이는 일이 반복됐지만 이제는 AI·반도체 같은 전략산업이 장기 재정 구조 안으로 편입되는 방식에 가까워지고 있다. 투자 확대가 성장정책이면서 동시에 재정구조 자체가 되는 순간 정책은 선택이 아니라 경로가 된다.

일본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일본 정부는 2027년 이후 연간 약 10조엔(약 95조7810억원) 규모의 추가 재정 지출을 전제로 효과를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17개 분야, 62개 기술을 포괄하는 설계는 범위가 넓어 선택과 집중이 흐려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이번에 구체적인 투자배분은 공개되지 않았다. 어떤 기술과 산업을 우선순위로 둘 것인지 기준이 불분명할 경우 정책은 전략적 투자보다 분산된 지출로 흐를 수 있다.

이 논쟁은 한국과 무관치 않다. 한국 역시 지난달 29일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를 발표하며 대규모 산업 투자 사이클에 들어섰다. 핵심은 제조 AI 전환이다. 정부는 2030년까지 민관이 20조원을 투입해 100조원 이상의 경제효과를 창출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국가 제조데이터와 AI 모델을 구축하고 이를 산업단지와 제조 현장으로 확산시키는 구조다.

물론 한국의 접근은 일본과 결이 다르다. 일본이 국가가 산업 포트폴리오를 설계하고 투자 프레임을 전면에 세우는 방식이라면 한국은 민간기업의 투자결정이 먼저 움직이고 정부는 데이터, 인프라, 제도, 금융을 보완하는 구조에 가깝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도의 4755조원 규모 반도체 투자, 용인 클러스터, AI 데이터센터 확장은 이미 민간 사이클이 주도하는 형태다.

다만 두 나라가 마주한 질문은 같다. 투자 규모가 아니라 그 투자가 어떤 구조 위에서 지속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일본은 국가 주도의 투자 확대가 재정과 금리 제약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시험대에 올라 있고, 한국은 민간 중심 투자구조가 경기 사이클 변화 속에서도 유지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낼지가 관건이다. 최근 벌어지는 논쟁도 결국은 투자 규모보다 그 결정을 가능하게 한 원칙과 구조가 얼마나 지속 가능한지에 대한 시장의 검증 과정인지 모른다.

sjmary@fnnews.com 서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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