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농업, 씨앗부터 바꾼다… 2030년까지 584억원 '종자주권' 투자
제주 첫 종자산업·신품종 육성 5개년 계획
감귤·브로콜리·마늘 등 우량종자 보급 확대
아열대 과수 등 13작목 기후대응 품종 개발
병·재해 강한 채소·식량·사료작물 선발
지역 육성품종 확산에 전체 예산 76% 집중
해외종자 의존 줄이고 농가 보급 속도가 관건
【파이낸셜뉴스 제주=정용복 기자】 기후변화가 제주 농업의 재배 지도를 바꾸자 제주도가 '씨앗'부터 다시 짠다. 더위와 병해충, 이상기상에 견디는 신품종을 개발하고 제주에서 키운 품종을 농가에 빠르게 보급하는 데 2030년까지 584억원을 투입한다. 실제 농가의 품종 교체와 종자 보급에 전체 사업비의 4분의 3 이상을 배정한 점이 핵심이다.
8일 제주특별자치도 농업기술원에 따르면 '제1차 종자산업 및 신품종 육성 기본계획(2026~2030년)'을 마련해 앞으로 5년간 제주형 종자산업 육성과 신품종 개발을 추진한다.
제주도가 종자산업과 신품종 육성을 아우르는 중장기 계획을 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농업기술원은 지난해 11월 제정된 '제주특별자치도 종자산업 및 신품종 육성 지원에 관한 조례'를 토대로 기본계획을 만들었다.
비전은 '지속가능한 제주농업의 미래, 고부가가치 종자산업 허브 조성'이다.
계획의 출발점은 기후변화다. 기온 상승과 이상기상, 새로운 병해충이 확산하면 지금까지 잘 자라던 품종도 생산량과 품질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감귤과 채소류 비중이 큰 제주 농업은 재배 환경 변화에 맞는 품종을 얼마나 빨리 개발하고 농가에 공급하느냐가 경쟁력과 직결된다.
국립종자원도 고품질 종자의 안정적인 생산·공급과 신품종 육성자 권리 보호를 종자산업의 핵심 기능으로 두고 있다. 국내 육성품종도 보급체계가 충분하지 않은 작물은 지역 농업기술원과 농업기술센터가 종자를 증식해 농가에 공급하는 구조가 활용된다.
제주도의 5개년 계획은 크게 세 갈래다. 우선 감귤과 브로콜리, 마늘 등 8개 작목의 우량종자 생산·보급체계를 만드는 데 53억9900만원을 투입한다.
과수 신품종의 보급을 확대하고 제주 재배환경에 맞는 채소 종묘와 씨마늘 등 종구, 식량작물 우량종자의 생산·공급을 늘린다.
좋은 품종을 개발해도 농가가 쓸 종자와 묘목을 충분히 생산하지 못하면 실제 재배면적 확대까지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연구실에서 품종을 만드는 단계와 농가가 실제로 심는 단계 사이의 간격을 줄이는 게 과제다.
기후변화 대응 신품종 육성에는 82억7900만원을 배정했다. 대상은 아열대 과수 등 13개 작목이다. 고품질 감귤과 아열대 작목을 개발하고 병에 강한 채소 품종을 육성한다. 식량·사료작물 가운데 병해와 재해에 견디는 품종 선발도 확대한다.
제주 농업에서 신품종은 새로운 이름의 작물을 하나 더 만드는 문제가 아니다. 고온과 가뭄, 집중호우가 반복돼도 생산량과 품질을 지킬 수 있는지, 새로 유입되는 병해충에 얼마나 견디는지가 농가 소득을 좌우할 수 있다.
가장 많은 돈은 개발된 품종을 실제 농가에 퍼뜨리는 데 들어간다. 제주도는 지역 육성품종 확산과 농가소득 증대 분야 5개 사업에 447억5500만원을 투입한다. 전체 세부사업비의 약 76%다.
제주에서 육성한 감귤로 기존 품종을 교체하도록 지원하고 지역 신품종과 토종종자의 현장 보급도 확대한다.
신품종 정책의 성패는 개발 건수보다 재배면적과 농가 선택에서 갈릴 수밖에 없다. 품질이 좋아도 묘목과 종자를 구하기 어렵거나 기존 품종을 바꾸는 비용과 위험이 크면 농가는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새 품종의 수확량과 상품성, 병해충 저항성, 시장 가격이 실제 재배 현장에서 검증돼야 보급 속도도 빨라질 수 있다.
이번 계획은 제주 농업의 '종자주권'을 정책 전면에 올렸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해외에서 들여온 종자와 품종에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국제 공급망이 흔들리거나 로열티와 종자 가격이 오를 때 농가 부담이 커질 수 있다.
제주 환경에서 직접 선발·육성한 품종이 늘면 기후 적응력을 높이고 종자 공급 불안에도 대응할 여지가 커진다.
다만 584억원을 투입한다고 곧바로 종자주권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품종 개발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농가 실증과 종자 증식, 품종 교체, 시장 평가까지 이어져야 성과가 완성된다.
농민이 원하는 품종과 연구기관이 개발하는 품종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일도 중요하다. 맛과 수확량뿐 아니라 노동력 절감과 저장성, 유통 적합성, 소비시장 변화까지 품종 개발 단계에서 함께 반영해야 한다.
제주도는 이번 계획을 통해 제주 환경에 적합한 우수 품종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안정적인 종자 공급체계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제주 농업의 미래를 바꾸는 출발점은 거대한 시설이 아니라 작은 씨앗일 수 있다.
김경익 제주도 농업기술원 연구개발국장은 "기후변화와 시장 변화에 대응하는 품종을 개발하고 생산·보급체계를 강화해 농가 소득 향상에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email protected] 정용복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