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소리 없는 살인자 '온열질환'…벼랑 끝에 선 '땡볕 노동'

서지윤 기자, 이보미 기자, 전상일 기자
파이낸셜뉴스

폭염 속 야외 노동자, 뙤약볕 아래 사투
"쉬면 곧 소득 감소"…지침 외면받는 현장
무더위 무방비 노출, 인명 피해로 이어져
전문가들 "현장 맞춤형 대책 마련돼야"

기사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한 AI 이미지
기사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한 AI 이미지

[파이낸셜뉴스] "예전엔 하루에 한 번만 옷을 갈아입으면 됐는데 요즘은 서너 번 바꿔 입어도 온몸이 땀범벅이에요. 일하다가 머리가 핑 돌고 어지러울 때가 많아요."

서울 전역에 첫 폭염중대경보가 발령된 지난 4일 오후 성북구의 한 건설 현장. 30년 넘게 현장을 지켜온 50대 건설 노동자 한모씨가 작업복에 번져 있는 흰 띠를 가리키며 혀를 찼다. 땀이 쏟아지고 말라붙기를 반복하며 생긴 염분 자국이었다. 이날 기상청이 집계한 낮 최고 기온은 35도 안팎이었으나, 각종 구조물과 콘크리트 열기가 뒤엉킨 작업장의 체감온도는 40도를 훌쩍 뛰어넘었다.

전국적으로 살인적인 더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땡볕 아래로 나서는 야외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정부가 낮 시간대 작업 중단 권고 등 온열질환 예방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현장에선 여전히 실질적인 휴식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5일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온열질환으로 인한 산재보험 최초요양급여 신청·승인 건수는 매년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산재 신청 건수는 2021년 23건에서 2022년 28건, 2023년 37건, 2024년 57건, 2025년 90건으로 급증해 4년 만에 약 3.9배 늘었다. 산재 승인 건수 역시 2021년 19건에서 2025년 77건으로 해마다 꾸준히 증가했다.

무더위와 폭염이 이어지고 있는 지난 3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로에서 시민들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무더위와 폭염이 이어지고 있는 지난 3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로에서 시민들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실제 피해 규모는 통계치를 크게 웃돌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산재 인정의 핵심 요건인 업무 연관성을 입증하는 과정이 까다롭고, 초기 증상이 단순 피로나 가벼운 어지럼증으로 치부돼 산재 신청조차 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사례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폭염이 장기화하고 강도 역시 거세지면서 노동자들의 안전이 위협받을 여지가 커지고 있다는 점도 우려를 더하는 대목이다.

체감온도에 따른 휴식 제공과 옥외작업 최소화를 골자로 한 정부의 폭염 예방지침이 마련돼 있지만, 현장의 반응은 차갑다. 해당 지침이 강제성이 없는 단순 권고 수준에 그치는 데다, 정해진 물량과 기한에 쫓기는 노동자들에게 휴식은 곧 임금 감소나 계약 해지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가이드라인이 아무리 강화되더라도 현장의 구조적인 여건이 바뀌지 않는 한 폭염 속 휴식권 보장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현장 관계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건설업 종사자 장모씨는 "주변을 둘러보면 택배나 배달 라이더 같은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를 위한 온열질환 대책은 일회성 캠페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며 "프리랜서 비율이 높은 건설 노동자들 역시 휴게시간 보장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폭염이 계속된 지난 3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에서 한 노인이 생수를 들고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폭염이 계속된 지난 3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에서 한 노인이 생수를 들고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무더위는 실제 인명 피해로도 이어지고 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폭염 대처상황 보고에 따르면 5월 15일부터 집계된 누적 온열질환자는 사망자 19명을 포함해 총 2221명으로 파악됐다. 특히 지난 3일 하루에만 환자 186명이 쏟아져 나왔고, 사망자는 2명이 늘었다. 같은 날 전북 완주군에서는 오토바이를 수리하던 80대가 온열질환으로 쓰러져 숨졌으며, 경기 양주시에서는 50대 오토바이 기사가 배달 도중 열탈진으로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전문가들은 단순한 지침 하달을 넘어 노동자 스스로 생명과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폭염 대책을 사업주의 일방적 결정에만 맡겨둘 경우 현장 적용에 한계가 있는 만큼, 작업 환경을 가장 잘 아는 노동자가 위험을 인지했을 때 직접 휴식이나 작업 중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작업장의 위험도와 환경에 따라 작업 방식을 변경하거나 일시 중단할 수 있도록, 강제력 있는 법적 기준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email protected] 서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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