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초격차 유지해야 우위 굳힌다… 정부 R&D 뒷받침 필수" [반도체 호황의 그림자]
(下) 韓美석학이 바라본 K반도체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
韓, AI반도체만 집중하면 위험
범용D램·HBM 경쟁력 키워야
中 CXMT 성장땐 주도권 약화
국제공동연구센터 구축 등 제안
차세대 공정 테스트베드 필요성
"한국 반도체가 경쟁력을 지키는 길은 결국 '기술 차별화'다. 메모리를 비롯해 반도체 어느 분야든 장기적인 경쟁 우위는 기술 리더십에서 나온다." (크리스 밀러 미국 터프츠대 교수)
중국은 10년 넘게 '돈이 되는 반도체'가 아니라 '살아남을 반도체'에 돈을 부었다. 지난 2014년부터 중국 정부가 수 차례에 걸쳐 조성한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기금', 이른바 '빅펀드' 규모를 단순 합산하면 6867억 위안(한화 약 139조원)에 달한다. 중앙정부와 국유 금융권이 빅펀드를 통해 자금을 대고, 지방정부도 별도의 지원에 나서며 반도체 기업들이 긴 적자와 업황 부진을 견딜 기반을 만들어줬다. 그렇게 버틴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는 이제 범용 D램에서 글로벌 주요 경쟁자로 올라섰고, 최근 메모리 호황을 등에 업어 생산능력 확대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칩 워' 저자인 크리스 밀러 미국 터프츠대 교수는 이 같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맞설 한국의 해법을 '모든 분야'에서의 기술 리더십에서 찾았다. 중국과 생산능력만으로 맞붙는 게 아니라, 아직 앞서 있는 지금 기술 격차를 계속 만들어내야 장기적인 경쟁 우위를 지킬 수 있다는 진단이다.
문제는 경쟁의 단위가 기업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은 국가 자금과 지방정부, 금융권까지 반도체 굴기에 가세한 상태다. 한국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개별 기업의 투자에만 기대기보다 기업이 기술·생산 경쟁력을 높이는 동안 정부가 장기 연구개발(R&D)과 연구 인프라를 맡아주는 '민관 원팀'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中 범용 D램서 이미 주요 플레이어
밀러 교수는 29일 파이낸셜뉴스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고성능 제품에선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중국 업체 간 기술 격차가 상당하다. CXMT가 향후 몇 년간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서 상당한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도 "범용 D램에선 이미 CXMT가 중요한 플레이어가 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밀러 교수는 CXMT가 소비자용 D램에서는 빠르게 기술력을 끌어올렸지만, HBM을 비롯한 첨단 제품에서는 아직 한국 기업과 상당한 격차가 있다고 봤다. 그는 "CXMT는 HBM을 포함한 고성능 데이터센터용 제품에서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그 이유 중 하나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가 없고 현재로서는 이를 확보할 경로도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메모리 업체들이 향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글로벌 선두 기업의 기술 수준에 도달하거나 추월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가까운 시일 내에는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다만 범용 D램의 상황은 다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중심의 기존 메모리 시장이 중국 업체까지 포함하는 경쟁 구도로 재편될 가능성에 대해 밀러 교수는 "단순한 D램 제품에서는 이미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짚었다.
올 들어 대규모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중국 반도체 기업들의 기업공개(IPO)도 잇따르고 있다. CXMT는 지난 7월 상장을 통해 최대 666억 위안(약 13조5100억원)을 조달했고, 상장과 동시에 중국 본토 증시 시가총액 1위에 올랐다. 중국 1위 낸드플래시 기업인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도 IPO를 신청하고 상장 절차를 밟고 있다. 조달 규모는 330억 위안(약 6조7000억원)으로 예상된다.
밀러 교수는 IPO 자체보다 이를 발판으로 한 생산능력 확대에 주목했다. 그는 "CXMT의 경우 상대적으로 더 큰 폭으로 생산능력을 확대할 계획"이라며 "소비자용과 기타 저마진 D램 제품에서 더 큰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고 내다봤다.
■추격 대응 핵심은 결국 '기술'
중국 메모리 산업의 성장 속도를 좌우할 핵심 변수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를 꼽았다.
최근 미중 정상회담 이후에도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에는 큰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밀러 교수는 "CXMT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와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을 제한하는 유일한 요인은 고성능 D램을 비용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데 필요한 첨단 반도체 제조장비에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이라고 했다. 이어 "수출통제가 더 강화된다면 CXMT는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국의 대응책으로는 지속적인 기술 혁신을 제시했다. 그는 "지속적인 기술 혁신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CXMT를 비롯한 중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미국의 수출통제도 중요한 요인으로 언급했다. 한미 기업 간 기술 협력도 이미 이뤄지고 있는 것과 관련, 밀러 교수는 "한국 메모리 기업들은 이미 미국의 AI 및 그래픽처리장치(GPU) 기업들과 긴밀하게 협력해 더욱 성능이 뛰어난 메모리 반도체를 개발하고 있다"고 전했다.
■범용 내주고 AI반도체 올인하면 위험
국내에서는 범용 D램부터 HBM까지 경쟁력을 함께 가져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기업의 기술 경쟁과 함께 정부의 장기적인 연구개발(R&D) 지원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차이나 반도체 라이징' 저자이자 국내 반도체 전문가인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범용 메모리를 중국한테 내어주고, 국내 기업들은 AI 반도체로 올인하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 제일 위험한 시점"이라고 일갈했다. 이어 "D램에서의 점유율이 있어야 HBM에서의 점유율도 유지되는 것"이라며 범용 D램 점유율을 잃고 CXMT가 글로벌 2강 수준으로 올라올 경우 한국 기업들의 가격 주도권 역시 약화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중국과의 경쟁은 과거 일본 업체들과의 치킨게임과도 성격이 다르다는 판단이다. 권 교수는 "한국 업체들은 지금까지 일본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과 치킨게임을 해봤지 중국과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며 "중국과의 치킨게임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중국은 회사 대 회사의 치킨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이어 "한국은 회사가 나서지만 중국은 회사 플러스 정부"라고 부연했다.
그만큼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봤다. 기업이 당장 투자하기 어려운 장기 R&D와 연구 인프라를 국가가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해야 되는 연구는 분명히 해야 하지만, 기업들이 여력이 많지도 않고 쓸 돈이 있으면 오히려 생산을 더 하고 싶어 할 것"이라며 "반드시 필요한 연구는 국가가 지원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는 R&D 전용 팹과 국제 반도체 공동연구센터 등을 제시했다. 권 교수는 "한국의 새로운 차세대 반도체 공정이나 소재, 여러 소자 기술들을 테스트할 수 있는 새로운 허브가 될 수 있게 정부가 판을 깔아주되 관여하지 않는, 기반시설을 조성해주되 간섭하지 않는 플레이어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결국 기업은 기술·생산 경쟁력을 높이고, 정부는 장기 R&D와 연구 인프라를 지원하는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정책의 연속성도 주문했다. 권 교수는 "제도적인 연속성과 어느 정도의 일관성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mail protected] 조은효 임수빈 김학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