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불합치'가 만든 무법지대…국회 서랍 속 잠자는 법령들
입법 진공 상태, 벼랑 끝으로 내몰린 국민
국회의 고질적 직무유기, 국민 피해로 직결
사법 공백 메울 실질적 입법 가이드라인 절실
"사법부도 질타한 입법 태만 끝내야" 한목소리
[파이낸셜뉴스] 국가 최고 규범인 헌법 제정을 기념하는 제헌절을 하루 앞둔 가운데, 정작 헌법을 수호해야 할 국회가 '입법 태만'으로 사법 공백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에도 법 개정을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법적 보호망에서 밀려난 국민은 무법지대로 내몰리는 실정이다. 법조계와 학계 안팎에선 국회의 고질적인 입법 지연을 제도적으로 감시하고 강제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6일 헌법재판소에 따르면 1988년 헌재가 출범한 이후 지난 6월 30일까지 총 623개 법령에 대해 위헌·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다. 헌법불합치란 해당 법률이 위헌이지만, 즉각 효력을 잃을 때 발생할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 국회에 법 개정 시한을 주고 한시적으로 법을 존속시키는 결정이다. 즉 국회에 대안을 만들 시간을 양해해 준 배려인 셈이다.
하지만 국회는 이 같은 유예기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분기 행정소송법 등 위헌성 법률 4건이 뒤늦게 개정됐지만,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법령 12건은 개정되지 않은 채 국회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다. 이 중 법령 6개는 이미 헌재가 정해준 입법 시한마저 훌쩍 넘긴 채 국회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다.
개정 시한을 넘긴 헌법불합치 법률들은 사실상 효력을 잃는다. 법조계에선 처벌이나 규제 근거가 사라진 이 같은 '무법 상태'가 법치주의 관점에서 극도로 위험하다는 경고가 나온다. 범죄와 형벌을 미리 법률로써 규정해야 한다는 죄형법정주의와 근대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들어 사회적 혼란을 일으킬 수 있어서다.
대표적인 '입법 진공' 사례 중 하나로 형법상 낙태죄가 거론된다. 헌재는 지난 2019년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하며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2020년 12월 31일을 개정 시한으로 못 박았다. 그러나 국회는 임신중지 허용 주수를 둘러싼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대체 입법을 차일피일 미뤘다. 결국 시한을 넘긴 지 5년 5개월째 아무런 법적 가이드라인이 없는 '입법 공백'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합법적 기준이 사라지면서 여성의 안전과 태아의 생명권 모두가 최소한의 법적 보호망 밖으로 밀려나는 모양새다. 의료 현장에선 음성적이고 안전하지 않은 '깜깜이식' 낙태 시술과 공식 허가를 받지 못한 임신중지 약물의 오남용이 여성 건강을 위협하는 한편, 임신 후기 낙태에 대해서도 명확한 불법 기준이 없어 태아를 모체 밖으로 꺼내 숨지게 한 뒤에야 '살인죄'를 우회 적용해 처벌하는 기형적인 사법 처리가 반복되고 있다.
입법 공백의 비극적 단면은 지난 3월 4일 진행된 '36주 만삭 낙태 브이로그' 사건 1심 판결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대체 입법 부재로 낙태죄 효력이 사라지자 법원은 살인 혐의를 적용해 병원장과 집도의에게 각각 징역 6년과 4년의 실형을, 산모에게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국회의 입법 개선 방치로 법적 가이드라인이 없어 사법적 혼선과 입법 진공이 지속되고 있다"며 "이 비극을 오롯이 피고인들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어 입법 공백을 양형에 참고했다"고 이례적으로 판시했다. 법을 집행하는 사법부마저 국회의 직무유기를 공식 판결문으로 공인한 셈이다. 해당 사건은 항소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헌재 판단을 무력화하는 입법 지연의 고질적 병폐는 사회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일몰 후 옥외집회를 전면 금지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2009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개정 시한을 넘긴 채 무려 16년 이상 장기 미개정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이로 인해 밤샘 철야 시위가 방치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법인약국 설립 제한 논의를 담은 '약사법'의 경우, 2002년 9월 19일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이후 24년째 개정안이 통과되지 않아 통계상 '최장기 입법 지연 법률'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국회의 입법 태만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거세다. 국회가 입법 의무를 미루며 생긴 사법 공백의 고통과 사회적 혼란이 고스란히 국민의 피해로 전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을 방지하기 위해 헌재의 위헌결정에 따라 송부된 안건의 경우 소관 국회 상임위원회의 공청회 개최를 의무화하거나, 일정 기간 내에 해당 법률안 심사를 완료하도록 강제하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다만 국회의 자율적인 입법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삼권분립의 원칙론 또한 무시할 수 없어, 실효성 있는 입법 체계 마련을 둘러싼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한상희 건국대 로스쿨 명예교수는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이나 헌법불합치뿐만 아니라 '한정위헌' 결정을 내릴 경우, 해당 법안이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에 자동으로 상정되도록 국회법을 개정하는 것이 실질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보다 강력한 사법적 경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치적 공방에 갇혀 작동을 멈춘 입법부를 깨우기 위해선 결국 '법적 책임'을 지게 하는 방식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정태호 경희대 로스쿨 교수는 "입법 부작위로 발생한 국가의 책임을 묻는 '국가배상청구 소송'을 상징적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다"며 "단순히 배상금을 받아내는 목적을 넘어, 국회의 무책임한 방임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가장 강력한 제동 장치는 국민들의 준엄한 감시라는 조언도 있다. 차진아 고려대 로스쿨 교수는 "정당과 언론, 시민단체 등이 연대해 비판 여론을 끈질기게 제기해야 한다"며 "국회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사회적 감시망을 구축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강조했다.
jyseo@fnnews.com 서지윤 최은솔 박성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