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엔 뚫린 엔화 165엔 가나' 日 구두개입에도 엔저 베팅 확산
골드만 "2000년 이후 최고의 캐리 환경"
【파이낸셜뉴스 도쿄=서혜진 특파원】미국과 이란 간 군사적 긴장 고조와 국제유가 급등, 미국 금리 인상 전망이 맞물리면서 엔화 가치가 39년 7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일본은행(BOJ)의 추가 긴축 지연 우려와 다카이치 사나에 내각의 적극 재정 기조까지 겹치면서 시장에서는 엔화 약세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하고 있다. 해외 헤지펀드들이 엔화를 빌려 고금리 자산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를 확대하는 가운데 달러당 165엔까지 열어둬야 한다는 관측도 나온다.
22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163.21엔 안팎에서 거래됐다. 전날 뉴욕시장에서는 한때 163.24엔까지 오르며 1986년 12월 이후 약 39년 7개월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엔화 가치로는 같은 기간 최저 수준이다.
■중동 긴장·유가 급등에 달러 매수
이번 엔화 약세는 대외 변수와 일본 내부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다.
미국이 호르무즈 해협에서 이란의 군사 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공습을 단행하고, 친이란 예멘 후티 반군이 사우디아라비아 해상 봉쇄를 선언하면서 국제유가가 급등했다. 브렌트유는 배럴당 92달러를 넘어섰고 서부텍사스산원유(WTI)도 85달러를 웃돌았다.
중동 리스크가 안전자산인 달러 수요를 자극한 데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일본에서는 유가 상승이 원유 결제를 위한 달러 매수 증가로 이어졌다. 실제 일본의 6월 무역수지는 원유 수입 부담으로 두 달 연속 적자가 확대됐다.
미국의 추가 금리 인상 전망도 엔화 약세를 부추기고 있다. 미국 페드워치 기준 올해 7월 금리 인상 가능성은 하루 만에 16%에서 26.2%로 높아졌다. 미·일 금리 차가 다시 확대될 것이라는 기대가 엔화 매도와 달러 매수를 자극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일본은행(BOJ)이 다른 주요 중앙은행보다 금리 인상에 뒤처질 것이라는 '비하인드 더 커브(Behind the Curve)' 우려가 커지고 있다. 마루야마 린토 SMBC닛코증권 수석 금리·외환 전략가는 이를 감안해 "엔화의 하단을 달러당 165엔 부근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적극 재정·감세 논의도 부담
다카이치 내각의 재정정책도 엔화 약세 요인으로 지목된다. 정부는 올해 '호네부토(골태) 방침'에서 성장 투자 확대를 위해 재정 운용 기조를 완화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식료품 소비세 인하 논의도 진행되고 있지만 재원 마련 방안은 제시하지 않았다.
마루야마 전략가는 "재정에 대한 우려 역시 엔화의 부담 요인"이라고 평가했다.
시장에서는 일본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 가능성도 크지 않다고 본다. 마루야마 전략가는 "엔화는 역사적인 수준까지 하락했지만 환율 변동성은 여전히 낮다"며 "국제유가가 상승하는 상황에서는 개입에 나서더라도 효과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고 전망했다.
가와카미 아키히로 미쓰비시UFJ은행 애널리스트도 "지금까지 재무성 발언에서는 과거와 같은 긴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향후 당국의 발언 수위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가타야마 사쓰키 재무상은 이날 엔화 약세에 대해 "필요하다면 언제든 적절하고 단호하게 대응하겠다"며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엔 캐리 트레이드 다시 확대
시장 참가자들이 더 주목하는 것은 엔 캐리 트레이드의 확대다.
엔 캐리 트레이드는 금리가 낮은 엔화를 빌려 달러 등 고금리 통화나 주식·채권 등 위험자산에 투자하는 전략이다. 금리 차이를 꾸준히 확보할 수 있고 환율이 안정되면 추가 수익도 기대할 수 있어 글로벌 헤지펀드가 널리 활용한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현재 환경을 "2000년 이후 캐리 트레이드에 가장 우호적인 투자 환경"이라고 평가했다. 주요10개국(G10) 국가 간 금리 차가 이례적으로 크게 벌어진 데다 주요 통화의 변동성도 역사적으로 낮아졌다는 이유에서다.
골드만삭스는 향후 수개월 동안 엔화와 스위스프랑, 유로, 캐나다달러를 조달통화로 활용하는 전략을 추천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스튜어트 젠킨스 골드만삭스 외환 전략가는 엔화를 가장 유력한 조달통화로 꼽았다.
그는 "일본 당국의 엔화 매수 개입 가능성은 경계해야 하지만 미·일 간 장기적이고 뚜렷한 금리 차와 일본의 재정 우려를 고려하면 향후 수개월 동안 엔화는 꾸준히 약세를 보일 것"이라며 "장기적으로도 엔화는 가장 유력한 조달통화"라고 평가했다.
골드만삭스는 현재 엔 캐리 트레이드가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진단했다. 2022년 이후 엔화를 빌려 포지션을 구축한 투자자들은 수년간 스와프 수익을 쌓아 일부 환차손을 감내할 여력이 생겼다는 분석이다.
현재 엔화를 매도하고 달러를 매수해 1년 보유하면 달러당 약 4.8엔의 스와프 수익을 얻을 수 있으며 3년이면 약 12.4엔이 누적된다. BOJ의 금리 정상화가 더디고 미국 금리가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한 이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닛케이는 내다봤다.
■전문가들 "엔화 170엔도 이상하지 않아"
투기세력의 엔화 약세 베팅도 강해지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의 지난 6월 글로벌 외환·금리 심리조사에서는 엔화 약세 전망이 2022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금융·재정정책 리스크를 이유로 하반기에도 엔화 약세가 이어질 것이라는 응답이 우세했다.
로빈 브룩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자신의 X(엑스, 구 트위터)에 엔화가 163엔대로 떨어진 것과 관련해 "일본의 금리 위기"라고 규정했다. 그는 "장기금리를 억제하면서 통화를 안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금리를 적정 수준보다 낮게 유지하는 한 희생되는 것은 통화 가치이며 엔화가 170엔 이상으로 약세를 보여도 이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다만 일본 정부가 엔화 약세를 무리하게 되돌리기도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외환시장 개입이나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엔 캐리 트레이드가 한꺼번에 청산될 경우 2024년 8월 '레이와의 블랙먼데이'와 같은 글로벌 증시 급락이 재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분간 엔화는 지정학적 리스크와 미·일 금리 차, 일본의 재정정책, 엔 캐리 트레이드 확대가 맞물리며 약세 흐름을 이어갈 가능성이 클 것으로 시장에서는 전망했다.
[email protected] 서혜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