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네이버 파이낸셜뉴스

최신 뉴스

[특파원 칼럼] 日에 배워야 할 핵심광물 확보 전략

"한국에서는 핵심광물 확보를 위한 오프테이크(장기 원료 구매) 계약이 필요하다는 얘기는 하지만 일본이 그 계약을 얻고 공급원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잘 얘기하지 않습니다." 지난 11일 도쿄 아오야마가쿠인대에서 열린 '2026년 한일 경제안보 파트너십 심포지엄'. 이후 만찬장에서도 공급망 협력 얘기가 이어졌다. 한 전문가는 일본의 희토류 확보 과정을 설명하며 한국이 놓치고 있는 대목을 이렇게 지적했다. 공급망과 에너지·자원 안보를 다룬 이번 행사에서는 한일 전문가들의 진단과 대책이 네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협력의 필요성에는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누가 어떤 위험을 부담하고 무엇을 주고 받을지에 대한 실행 방안은 뚜렷하지 않았다. '안정적 공급망 구축을 위한 한일 협력' 세션의 패널인 지시마 도모노부 한난대 교수도 제도적 협력의 진전을 곧바로 성과라고 부르기는 이르다고 지적했다.  희토류는 이런 협력을 검토할 만한 분야다. 이날 강연자로 나선 하라다 다케시 일본에너지·금속광물자원기구(JOGMEC) 심사역은 호주 희토류 기업 라이너스에 대한 일본의 투자 사례를 소개했다. 라이너스는 호주에서 채굴한 광물을 말레이시아에서 분리·정제해 중국을 거치지 않고 공급한다. 2024년 기준 세계 자석용 희토류 정제의 91%를 중국이 차지한 시장에서 귀중한 대체 공급원이다. 한국 기업들도 라이너스 공급망에 참여하고 있다. LS에코에너지는 희토류 금속화를, JS링크는 영구자석 생산을 추진한다. 하지만 일본은 기업의 개별 참여를 넘어 정책금융과 담보, 우선공급권을 결합해 조달망 자체를 구축했다. 심승규 아오야마가쿠인대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은 먼저 대출과 공급권을 연결했다. JOGMEC과 종합상사 소지쓰는 각각 94%, 6%를 출자해 합작법인 JARE를 세웠다. JARE는 라이너스에 돈을 빌려주면서 주요 자산을 담보로 잡아 유일한 담보채권자가 됐다. 일본에 우선 공급한다는 대출조건을 어기면 담보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생산 이후 달라질 협상력에도 대비한 구조다. 담보는 계약을 지킬 장치였지만 생산자가 무너지면 공급권도 소용없다. 라이너스가 자금난에 빠지자 JARE는 미지급 이자 일부를 탕감하고 금리를 낮추며 만기를 연장했다. 공급권 확보에 그치지 않고 생산업체가 버티도록 도운 것이다. 공급원을 유지하는 한편 일본이 원료를 받을 권리도 확대해왔다. 지난해 6월 말 기준 JARE의 라이너스 지분은 약 3%였지만 공급관계는 2038년까지 이어진다. 올해 확대된 계약에서는 중희토류 등의 생산량 50%를 확정 구매하고, 조건에 따라 최대 75%까지 공급받을 수 있게 했다. 일본 시장의 독점 판매는 소지쓰가 맡았다. 작은 지분으로도 원료를 우선 공급받고 일본 기업에 판매할 경로까지 마련한 것이다. 반면 한국의 참여는 아직 개별 기업 차원에 머물러 있다. 일본 사례가 한국에 던지는 질문은 정책금융의 역할을 투자비 지원에 한정할 것인지, 공공이 공급업체의 위험까지 분담하며 장기 공급권을 확보할 것인지다. 공급업체가 자금난에 빠져 이자를 깎거나 상환을 늦춰야 한다면 한국에서는 누가 이를 판단하고 책임질 것인가. 민간기업은 이자 감면이나 상환 연장이 회사에 줄 이익을 주주에게 설명해야 한다. 국가 전체의 공급망 안보를 위해 기업에 장기 위험까지 떠안기기는 어렵다. 공기업이 이를 분담하려면 추가 지원으로 생산을 유지할 수 있는지, 공급권의 가치가 비용에 걸맞은지 판단할 역량과 책임질 권한이 있어야 한다. 한국에도 기업이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을 분담하고 공급원을 지켜줄 공적 내비게이터가 필요하다. 기업의 선택을 존중하면서 공급망의 취약지점과 대안을 분석하고 중요사업에서는 금융위험을 분담해 장기 공급권을 확보하는 역할이다. 일본은 계약으로 공급권을 확보하고 공급업체가 어려워지면 금융조건을 조정해 공급원을 지켰다. 한국의 공적 지원도 투자 이후까지 내다볼 때다. [email protected] 서혜진 기자

[기고] AI 투자전쟁, 혁신기업이 승부 가른다

인공지능(AI) 기술 경쟁은 데이터센터나 첨단 반도체 공장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스마트 글라스처럼 일상의 제품에도 수많은 첨단기술과 기업의 역량이 집약돼 있다. 스마트 글라스는 안경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첨단기술의 집합체다. 대용량 고성능 데이터 처리 프로세서부터 초소형 광학계와 극소형 디스플레이, 센서, 반도체, 통신 네트워크, 공간컴퓨팅, 생성형 AI까지 서로 다른 기술이 하나의 기기 안에서 작동해야 한다. 선명한 화면이나 뛰어난 AI 성능만으로는 시장을 만들 수 없다. 무게와 발열, 전력 소모 같은 난제까지 해결해야 경쟁력 있는 제품이 탄생한다. 필자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스마트 글라스와 AI 글라스를 연구하며 하나의 첨단제품 뒤에는 수많은 기술 중소기업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이 반도체를 장악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핵심 부품과 장비, 소프트웨어를 담당하는 혁신기업의 기술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완성도를 높이기 어렵다. 벤처캐피털 등 민간투자자는 수익성과 투자금 회수 가능성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발기간이 길고 초기 시장이 작거나 설비투자가 큰 소재·부품·장비 기업은 상대적으로 선택받기 어렵다. 민간의 선택만으로 국가 전략기술에 필요한 자금 공급까지 보장하기는 어렵다. 주요국이 공공재정과 정책자금을 활용하는 이유다. 미국은 '반도체과학법'을 통해 반도체 산업에 527억달러를 책정했고, 유럽연합(EU)은 'InvestAI'를 통해 2000억유로의 AI 투자를 동원하겠다고 밝혔다. 중국도 정부 주도의 국가창업투자유도기금을 통해 민간자본을 끌어들여 1조위안 규모의 자금을 조성하고 초기 단계 첨단기술 기업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반도체·피지컬 AI·AI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대규모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AI 경쟁은 데이터센터의 크기나 GPU 숫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장비·부품·소프트웨어를 국내 기업이 충분히 공급하지 못한다면 투자 성과가 우리 산업에 축적되기 어렵다. 따라서 첨단산업 투자전략에는 혁신기업을 육성하는 금융정책이 함께 가야 한다. 매출과 담보가 부족한 기술 중소기업은 금융의 문턱도 높다. 기술력과 시장성을 평가해 보증을 제공하는 정책금융은 이런 기업이 시장에서 가능성을 검증받을 기회를 넓혀준다. 정부가 추가 세수를 미래 성장에 활용하는 '미래대응기금' 신설을 추진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국가가 미래산업에 투자한다면 기술 중소기업의 금융 인프라도 확충해야 한다. 기술보증기금 등 정책금융기관의 재원을 획기적으로 확충해 공공이 먼저 위험을 나누고 민간자금을 연결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스마트 글라스 시장의 주도권도 결국 핵심 기술을 제품으로 완성하는 기업이 가져갈 것이다. 세계 각국이 막대한 자금을 AI에 쏟아붓는 지금, 진짜 경쟁력은 투자액보다 얼마나 많은 혁신기업을 키워내느냐에 달려 있다. 정책금융 기반을 갖출 때 대한민국의 AI 투자는 미래를 위한 자산이 될 것이다.송기봉 ETRI 책임연구원

[차관칼럼] 추석 장바구니 부담 확 줄인다

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이 다가오고 있다. 들판에 곡식이 영글 듯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이 함박 웃음꽃을 피우고, 정을 나누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하지만 올해는 중동전쟁 등 예상하지 못한 대외변수와 폭염·폭우·가뭄 등 기상악화로 국민들의 장바구니 부담이 결코 가볍지 않다. 땀 흘려 가꿔온 농산물이 제값을 받기를 바라는 농업인의 마음과 질 좋은 먹거리를 합리적인 가격에 차려내고 싶은 소비자의 마음을 모두 살피는 것이 농림축산식품부의 역할이다. 이를 위해 농식품부는 추석 성수품 공급 상황을 꼼꼼히 살피면서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우선 배추·무·사과·축산물 등 13대 성수품을 평상시보다 약 1.6배 많은 수준으로 공급한다. 정부 비축물량과 계약재배 물량 등을 적기에 공급하고, 사과·배 등은 실속형 선물세트도 확대해 소비자가 합리적인 가격에 다양한 상품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그동안 가격 부담이 컸던 계란은 추석까지 신선란 수입을 지속, 명절 수요 증가에 차질 없이 대응할 계획이다. 체감물가를 낮추기 위한 할인지원도 대폭 확대했다. 당초 590억원 규모였던 농축산물 할인지원을 1490억원으로 늘리고, 기간도 추석 연휴까지인 이달 30일까지 연장했다. 대형마트에서는 정부 지원에 유통업체 자체 할인이 더해져 농축산물 전 품목을 최대 40%까지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으며, 추석 기간 1인당 할인한도를 한시적으로 적용하지 않아 소비자의 부담을 더욱 덜 수 있도록 했다. 농협도 자체 재원을 투입해 주요 성수품과 상차림 품목의 할인행사를 확대하고, 한우·한돈 등은 자조금단체와 함께 할인판매를 추진한다. 식품기업들도 추석 성수기 소비가 많은 가공식품 등을 중심으로 할인행사에 동참하는 등 정부와 유통업계, 생산자단체, 식품업계가 함께 소비자의 부담 완화에 힘을 모으고 있다. 전통시장을 이용하는 국민을 위한 혜택도 확대했다. 국내산 신선 농축산물 구매 시 일정 금액을 돌려받는 온누리상품권 환급행사를 전년보다 100개소 늘려 전국 300개 시장으로 확대하고, 모바일 대기표 발급시스템도 지난 설보다 2배 확대해 줄서기 불편을 줄인다. 이달 중에는 소비자가 원하는 농축산물을 검색하면 주변 마트 등의 판매가격과 할인정보를 한눈에 비교할 수 있는 '알뜰소비 플랫폼'을 시범운영해 합리적 장보기를 돕는다. 가족과 이웃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추석을 만드는 데도 힘을 보탠다. 연휴 기간 국립자연휴양림과 수목원을 무료로 개방하고 농촌의 다양한 체험 기회를 마련, 가족들이 농촌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한다. 숲체원 등 산림복지시설은 소재 지역에서 5만원 이상 소비가 확인되면 숙박비를 할인하는 행사도 진행한다. 국민이 풍성하고 즐거운 명절을 보내는 데는 기후변화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묵묵히 들녘을 지켜주신 농업인들의 노고가 있다. 농업인들의 정성이 담긴 우리 농축산물로 추석 선물을 나누고 차례상을 준비한다면, 농가에는 큰 힘이 되고 우리 사회 전체에는 따뜻한 상생의 온기가 퍼져나갈 것이다. 농식품부는 추석 연휴가 끝날 때까지 성수품 수급 상황과 물가 동향을 24시간 꼼꼼히 살피고, 필요한 조치를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 김종구 농림축산식품부 차관

[fn광장] 길 잃은 '대법관 제청'

조희대 대법원장의 지난 11일 '법원의 날' 기념사는 의미심장했다. 법원의 날은 사법부 탄생일 기념일이자 사법부 독립을 되새기는 날이다. 원래는 13일이지만 일요일이라 행사를 당겼다. 조 대법원장은 법원이 다른 국가기관이나 정치권력 등 부당한 간섭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법치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평시라면 원론적 발언이어서 주목도가 낮았을 듯싶다. 주요 신문 지면을 차지할 뉴스거리도 아니다. 대법관 후보자를 놓고 청와대와 대법원 사이가 극도로 긴장상태인 현재는 다르다. 헌정사 처음으로 청와대가 대법원장이 제청한 대법관 후보자에 대해 재제청을 요청한 게 몇 주 전이다. 아니나 다를까. 조 대법원장 발언에 청와대는 바로 반응했다. 강유정 청와대 수석대변인은 "신속히 재제청 절차를 진행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 헌법 제104조제2항은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법관 임명 절차는 헌법의 이 조항에 근거해 진행된다. 조문만 놓고 본다면 제청권, 동의권, 임명권이 각각 동등한 권한이다. 노경필 법원행정처장도 국회 답변에서 "대법원장은 독립적 판단에 따라 제청하고 대통령과 국회는 각각 임명권과 동의권을 행사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조 대법원장이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를 거쳐 노태악 전 대법관 후임으로 손봉기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를 제청한 것은 법적으론 타당하다. 다만 법적 완결성에도 절차적으로 미흡함이 남아 있다는 게 문제다. 그동안 제청권 행사 때 청와대와 대법원은 협의를 해 왔다. 관행이었다. 무조건적 제청권 행사가 초래할 대통령 임명거부라는 파국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대법관의 위상은 일반 시민의 상상 이상이다. 사회·정치적 영향력도 엄청나다. 자체로도 헌법기관이다. 우리나라 최고 법원이자, 기본권 보호와 권력 통제의 최후적 보장기관인 대법원을 구성한다. 이러니 정권을 막론하고 대법관 임명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노무현, 이명박, 윤석열 정부 때도 대법관 제청을 놓고 갈등이 있었다. 서로 자기 색깔에 맞는 인물로 대법관을 구성하려 했다. 그때마다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한발씩 양보해 봉합했을 뿐이다. 어느 쪽이 양보했는지는 정권마다 다르다. 상호협의, 그게 관행이었다. 여기서 당연히 의문이 제기된다. 헌법과 관행을 놓고 관행을 우선에 두라는 건 맞나. 그것도 헌법을 두고서 말이다. 관행이 법률보다 우위에 있는 경우를 빈번하게 본다. 비례대표 국회의원의 장관 겸직 금지는 법률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관행이 못하게 막고 있을 뿐이다.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였던 용혜인 의원의 사퇴 사태에서도 이 같은 관행의 힘은 작용했다. 노 전 대법관 후임자 제청을 위해 대법관후보추천위를 구성하고 제청까지 걸린 기간은 209일이었다. 청와대는 그 후보자를 거부했다. 7개월간 양측의 정치력은 발휘됐는가. 그걸 묻고 싶다. 대법원이 재제청 요청에 따라 새롭게 추천위를 구성할지, 기존 후보들 중 한명을 다시 제청할지는 미지수다. 그건 전적으로 대법원 판단이다. 물론 이번 사태가 대법관 증원을 둘러싼 행정부와 사법부 간 기싸움이어서 대립 강도가 강하다는 분석에 동의한다. 법원조직법 개정으로 대법관 정원은 기존 14명에서 26명으로 늘어난다. 내년에 대법원장 포함 3명, 2028년 5명, 2029년 6명, 2030년 6명의 대법관이 바뀐다. 이재명 대통령은 임기 중 22명을 새로 임명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대법관 후보 제청 때마다 매번 이렇게 갈등을 재연할 수는 없지 않을까. 관행, 다시 말해 정치적 협의의 필요성을 서로 인정해야 한다. 한국의 정치지형, 양극화 등 경제환경도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국제정세 또한 갈라치기가 대세가 되고 있다.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하려고만 해서는 갈등이 되풀이되고 시스템은 유지조차 힘들어진다. 법이 모든 걸 규정할 수는 없다. 법과 법 사이 공간은 확실히 있다. 제청권과 임명권은 법으로 명시돼 있지만 정치적 협의로 메워야 할 영역이 중요하다. 그게 국정이고, 정치다. 이 과정에서 꼭 필요한 건 상호존중이다. 오랜 시간 쌓인 관행이 민주주의 유산이다. 선출권력 우위론만을 앞세운다면 관행이 작동하기는 힘들다. 그걸 무시하면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힘들고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 된다. 대법관 한명의 공백이 국민의 기본권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고민해 봐야 한다. 승자독식이 아닌 승복과 절제가 필요하다. [email protected]

[사설] 집단소송제 확대 추진, 소송 남발 부작용도 고려를

정부와 여당이 집단소송제 전면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한성숙 국무총리는 최근 소비자정책위원회에서 "소비자 전 분야에 걸쳐 집단소송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사업자가 보유한 자료를 법원이 제출하도록 명령하는 제도도 신설하겠다고 했다. 법무부도 소액·다수 피해자의 권리 구제를 위한 집단소송제 확대를 주요 과제로 내세웠다. 현재 증권 분야에만 적용되는 제도를 소비자 피해 전반으로 넓히겠다는 것이다. 국회에도 여당이 발의한 관련 법안이 다수 제출돼 있다. 취지는 수긍할 만하다. 수천만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돼도 개별 소비자가 기업을 상대로 소송하기는 쉽지 않다. 피해액이 크지 않으면 비용과 시간 때문에 소송을 포기하기 십상이다. 대규모 피해도 실제 배상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제한적이었다. 집단소송제는 이런 소액·다수 피해의 구제 사각지대를 줄이고 기업의 책임을 강화하자는 취지다. 문제는 제도 도입의 폭과 속도다. 너무 갑작스럽고 전면적으로 추진되면서 기업과 산업 현장에선 혼란과 불안이 커지고 있다. 논의 중인 법안에는 시행 이전에 발생한 피해까지 적용할 수 있도록 한 조항도 있다. 기업으로선 소송 대상과 배상 규모가 크게 늘고 이미 지나간 사안까지 다시 분쟁이 될 수 있다. 이런 불확실성이 투자와 경영 판단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가볍게 볼 수 없다. 먼저 제도를 도입한 해외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집단소송이 가장 활성화된 미국에선 소송 대응 자체가 기업의 막대한 비용 부담으로 굳어진 지 오래다. 미국 로펌 칼튼필즈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대기업들의 집단소송 방어비용은 45억달러를 넘었고, 올해는 48억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개인정보·노동·소비자 분쟁 등으로 소송 범위도 계속 넓어지고 있다. 부작용을 줄이려는 움직임도 적지 않다. 영국은 2015년 경쟁법 위반 사건에 한정해 집단소송을 허용했지만 소송과 법률 비용이 크게 늘자 제도 전반을 재검토하고 있다. 소비자 구제와 기업 부담 사이의 균형을 다시 따져보겠다는 것이다. 유럽연합(EU)은 일정 요건을 갖춘 단체만 소비자를 대표해 소송하도록 하고, 일본도 엄격한 절차와 요건으로 소송 남발을 막고 있다. 당정은 속도보다 제도의 정교함을 먼저 따져야 한다. 소급 적용은 최소화하고, 개인정보·제품안전 등 집단적 피해가 뚜렷한 분야부터 단계적으로 시행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법원이 소송의 대표성과 필요성을 엄격히 사전 심사하고, 중복소송과 무분별한 기획소송을 막을 장치도 갖춰야 한다. 장기 소송을 감당하기 어려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을 위한 보호장치도 중요한 일이다. 집단소송제의 목적은 소송을 늘리는 데 있지 않다. 피해 소비자가 정당한 배상을 받고 기업도 위법행위에 합당한 책임을 지도록 하는 데 있다. 그렇다고 기업이 거액 소송에 상시 노출돼 경영의 예측 가능성까지 흔들려서는 안 된다. 소비자 권리와 기업 활동의 안정성을 함께 지킬 수 있는 한국형 집단소송제를 더 고민해야 한다.

[사설] 한국 경제 덮친 '삼각 파고' 막을 방파제 점검해야

한국 경제를 둘러싼 대외환경이 동시다발적으로 불확실성에 휩싸였다. 국제유가 급등, 미국 국채금리 상승, 인공지능(AI) 산업의 속도조절론까지 삼각 파고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모양새다. 세 변수 모두 대외 불확실성에서 비롯됐다. 대외환경이 악화되면 아무리 국내 경제 펀더멘털이 좋더라도 리스크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유가, 금리, AI 규제라는 세가지 대외 악재의 동시 등장은 수출과 원자재 수입 모두 해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의 진로를 당분간 가로막을 수 있다. 당장 유가 급등이 코앞에 닥쳤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핵심 송유관인 동서 송유관이 드론 공격으로 가동을 멈추면서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했다. 브렌트유는 105달러, 두바이유는 한때 120달러대를 뚫었다. 호르무즈해협 봉쇄에 이어 우회로였던 육상 송유관마저 막히면 중동산 원유에 의존하는 국내 정유·화학업계의 비용 부담이 엄청나게 커질 것이다. 이번 원유 운송경로를 복구하려면 수주일이 걸릴 수 있고, 추가 공격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고유가는 곧바로 수입물가를 자극하고, 이는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 압력으로 전이될 것이다. 지금 우리 경제의 여러 지표가 양호한 편이나 물가는 매우 불안정하다. 국제유가가 높은 상태를 유지하면 하반기 물가 관리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 국내외 금리환경도 좋지 않다. 미국 10년물 국채금리가 5%라는 심리적 저항선을 넘어섰다. 고유가에 따른 인플레이션 우려에다 미국 정부의 막대한 재정적자, AI 인프라 투자를 위한 대규모 채권 발행이 겹치면서 벌어진 일이다. 여기에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추가 긴축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미 국채금리 상승은 우리나라에도 직간접적 영향을 미친다. 미국 장기금리가 오르면 한국의 시장금리에도 상방 압력이 높아진다. 이처럼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리려는 기조가 뚜렷하다. 그러나 정부 입장에선 금리 인상이 서민과 중소기업에 부담을 준다는 점에서 달갑지 않다. 금리 정책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미국발 AI 속도조절론이 급부상하면서 주식시장에 예상치 못한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AI 투자 확대에 힘입어 반도체 메모리가 최고의 호황기를 누릴 수 있었다. 이에 수출실적이 대폭 개선되고, 주요 경제지표들이 상승 곡선을 그렸다. 반도체가 경제를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에서 AI 투자에 급브레이크가 걸린다면 경제에 큰 충격이 될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의 경제 성적이 전반적으로 좋은 건 사실이다. 성장률 전망치가 3%를 웃돌 만큼 경쟁력이 높아졌고, 수출 확대에 따른 초과세수도 상당한 규모에 이를 전망이다. 6년 만에 경기선행지수가 세계 1위에 올랐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에는 대외환경 변수가 자국 경쟁력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다. 대외경제 불확실성에 잘 대처해야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정부는 시나리오별 대응체계를 정교하게 손질해야 한다. 반도체 분야 의존도가 매우 높아 현재 양호한 경제지표는 우리의 실력이라고 보기 어렵다. 반도체가 꺾이면 성장세가 급속히 둔화될 것이다. 낙관에 빠질 게 아니라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염두에 둔 선제적 플랜이 절실한 시점이다.

[기자수첩] 성평등부 장관 '깜깜이' 인선 기준

용혜인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사퇴했다. 이재명 정부 들어 여성가족부·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낙마한 것은 강선우 전 후보자에 이어 두 번째다. 부처의 간판은 바뀌었지만 장관 인선을 둘러싼 혼선은 반복됐고, 정치권에서는 부처 존폐론까지 나오고 있다. 두 차례 인선을 지켜보면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이재명 대통령이 생각하는 성평등은 무엇이고, 성평등가족부에 기대하는 역할은 대체 무엇이냐고. 애당초 원민경 현 성평등가족부 장관을 왜 바꾸려 했는지부터 의문이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여성뿐 아니라 남성 역차별의 목소리도 정책에 반영해 구조적 성차별을 해소해야 한다며 여성가족부를 성평등가족부로 확대 개편했다. 이에 원 장관은 성평등정책실을 신설하는 등 조직을 재정비했다. 정부 출범 2년 차를 맞이해 국정과제 정책들을 본격 실현시키는 단계인 만큼, 원 장관이 이 대통령의 성평등 정책을 국민들 앞에 보여야 할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딱히 정책 실패를 한 것도 아닌 데다 여성·인권 변호 분야에 전문성까지 있는 장관을 느닷없이 왜 교체하려는 걸까. 물론 용 전 후보자와 강 전 후보자는 뚜렷한 상징성이 있다. 용 전 후보자는 1990년생 '워킹맘' 소수정당 대표로 이 대통령의 '기본소득' 철학을 공유한다. 강 전 후보자도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며 동시에 미국 유학과 교수 생활을 거친 정치인이다. 다만 상징성과 장관으로서 적합성은 별개다. 용 전 후보자는 여성·아동 대상 범죄의 수사공백 우려가 제기된 검사의 보완수사권 폐지에 공개적으로 찬성하며 정부의 검찰개혁 기조에 보조를 맞췄다. 강 전 후보자도 이 대통령이 야당 대표였던 시절 가까이서 살뜰히 챙기는 인사로 기자들 사이에서 정평이 났지만 보좌진 갑질 의혹에 답하지 못하고 낙마했다. 인선 과정을 되짚어봐도 이 대통령과의 정치적 친화성 외에 이재명 정부의 성평등·가족 정책을 관통하는 뚜렷한 기준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같은 부처에서 두 차례나 인선이 흔들리고 별다른 실책이 없는 전문성 있는 현직 장관을 왜 교체하려 했는지 기준이 분명하지 않다면 인사권자의 기준을 물을 수밖에 없다. 용 전 후보자도 사퇴 전 기자회견에서 "인사권자께서 나에게 기대한 바가 있어서 지명했다고 생각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마침 이 대통령은 오는 18일 대국민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 앞에 선다. 이 대통령이 생각하는 근본적인 성평등·가족에 대한 철학은 무엇인지, 용 전 후보자가 말한 인사권자의 '기대'는 무엇이었는지 대통령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고 싶다. [email protected] 송지원 기자

[강남視角] 기후변화와 닮은 꼴, AI 규제

"이건 누군가(다른 AI든 편집 과정이든) 이 문서를 다룰 때마다 이전 맥락 없이 손을 대면 생기는 전형적인 문제입니다." 최근 여러 인공지능(AI)을 번갈아 활용해 기획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한 AI 챗봇이 한 말이다. 언뜻 공손해 보였지만 느낌은 달랐다. '누가 내가 만든 문서에 손을 대서 엉망으로 만들었느냐'고 말하는 듯했다. 이어 "다음에 수정할 땐 지적 사항을 체크리스트로 관리하라"고까지 했다. 인간과 대화하는 듯한 오싹함이 밀려왔다. AI가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는 속도는 이미 상상을 초월한다. 최근 오픈AI의 신형 모델은 인터넷에서 사람 여부를 판별하는 '캡차(CAPTCHA)' 기반 브라우저 게임을 통과했다. 단순 텍스트·이미지 판독을 넘어 평행주차나 박자에 맞춰 키보드를 누르는 등 숙련된 인간도 시행착오를 겪는 까다로운 미니게임이었다. AI가 인간처럼 컴퓨터를 다루는 시대가 성큼 다가왔음을 실감케 한다. 이런 눈부신 발전의 뒤편에는 공포가 드리워져 있다. 얼마 전 앤스로픽을 퇴사한 연구원 제이컵 콕슨은 "AI 기업들이 인류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AI 핵심 인재들조차 10년 내 AI가 인류를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최근 다리오 아모데이 앤스로픽 최고경영자(CEO)는 "AI 모델의 성능 향상 속도를 늦춰야 한다"고 촉구했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 일론 머스크 xAI CEO,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창업자 등 AI 거두들도 동의를 표했다. 첨단 기술을 이끄는 주역들마저 제동을 걸 정도로 위험수위가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국의 탐사 저널리스트 애비게일 슈라이어는 저서 '부서지는 아이들'에서 많은 심리치료사와 학자, 전문가가 젊은 세대의 불안과 우울을 유발하는 주원인 중 하나로 기후변화를 꼽는다고 소개했다. 슈라이어 자신은 이 진단에 회의적이지만 실제 아이들이 마주한 현실을 보면 그 불안은 근거가 없지 않다. 지구 온난화의 위험을 알면서도 국가와 기업은 산업 경쟁력 등을 이유로 외면하고 있다. 개인의 힘으로는 이 거대한 위기를 막을 수 없다는 무력감이 어른과 아이들을 짓누른다. 특히 자신의 미래를 지켜낼 수 없다고 느끼는 젊은 세대의 불안은 더 클 수밖에 없다. AI를 둘러싼 현실도 기후위기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미중 패권 다툼과 기업 간 생존 경쟁 속에서 위험을 통제할 국제적 합의가 쉽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속도조절론에 대해 "AI와 데이터센터를 겨냥한 역겨운 음모가 있으며, 이를 기뻐할 유일한 나라는 중국"이라고 주장했다. 국가와 자본이 멈출 줄 모르는 치킨게임을 벌이는 동안 개인이 느끼는 무력감과 공포는 기후위기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이 치킨게임을 막을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기후변화와 AI 사이의 '평행이론'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미 진행된 기후변화는 되돌리는 데 한계가 있지만 AI는 인류가 어떻게 고삐를 쥐느냐에 따라 미래를 긍정적으로 전환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공포에만 사로잡혀 좌절할 필요가 없는 이유다. 무기력하게만 보이는 개인도 출발점이 될 수 있다. AI의 결과물을 무조건 수용하지 않고, 한계와 편향성을 끊임없이 따져 묻는 비판적 태도가 필요하다. 이런 깨어 있는 이용자가 많아지면 기업에는 안전장치를 요구하는 압력이 커지고, 국가도 감시와 규제를 서두를 수밖에 없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 AI 빅테크의 정보 독점에 맞서 개발 과정의 투명성을 요구하고 AI를 감시할 법적 장치를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AI가 문서 작성을 돕는 과정에서 인간처럼 보였던 그 오싹한 순간은 역설적으로 이 기술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 수동적인 소비자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검증하는 주체적 이용자가 되는 것, 그것이 개인에서 시작해 산업과 국가의 변화를 촉구하고 AI 시대를 안전하게 만드는 첫걸음일 수 있다. [email protected]

[포럼] AI 부작용 해소에 정책 집중을

빌 게이츠는 최근 에세이에서 인공지능(AI)이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기회 평등의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가장 심각한 불평등의 원천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과거 기술혁명과 달리 AI는 인간의 사고와 노동 전반을 폭넓게 대체하여 지속적 고용 감소를 일으킬 위험이 크다. 이에 대응해 그는 AI 전환기를 관리할 새로운 사회시스템 구축, 인간 전용 일자리 보장, 그리고 로봇세 도입을 통한 노동과 자본의 과세 비중 재조정이라는 세 가지 글로벌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AI는 여러 분야의 지식과 기술의 손쉬운 융합으로 혁신비용을 낮춰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사회 전반의 혁신을 가속화할 수 있다. 저출산·고령화로 생산가능인구가 급감하는 한국에서 AI는 인구절벽의 충격을 완화할 핵심 돌파구가 될 수 있다. 또 민원 수요가 많은 한국에서 AI를 적극 활용한다면 공공 민원서비스의 효율성과 품질 역시 크게 개선할 수 있다. 그러나 AI의 확산은 일자리 소멸, 빈부격차 심화, 정보 생태계 교란을 동반할 수 있다. 사무직은 물론 소프트웨어(SW) 개발자·변호사·회계사 등 전문직까지 고용불안이 커지고, 기술 선점에 따른 자본의 양극화도 심화할 것이다. 딥페이크와 가짜뉴스, 개인정보 침해, 알고리즘 편향, 범죄 악용 등 사회적 신뢰를 위협할 위험도 커진다. 나아가 AI 과의존으로 인간의 비판적 사고가 퇴화하고, 아동의 인지·사회성 발달 약화도 깊이 우려된다. 따라서 AI의 편익을 극대화하고 부작용은 최소화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교육개혁이다. AI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스스로 생각하고 탐구하는 능력이 약화되어 아이들의 사고력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깊다. 따라서 정답 암기식 교육에서 벗어나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다각도에서 답을 찾는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 주입식 교육을 지양하고 질문과 토론을 통해 비판적 사고와 창의성, 문제해결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와 함께 유연하고 견고한 사회안전망 구축이 병행되어야 한다. 국민연금등 4대 사회보험의 보장성과 재정 건전성을 강화하고, AI를 의료·행정 분야에 적극 활용해 복지비용을 절감해야 한다. 아울러 노동대체에 따른 재교육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AI 기업 과세, 기본소득, 로봇세 등 새로운 사회정책 논의를 본격 추진해야 한다. 한국의 'AI 3대 강국(G3)' 도약은 하드웨어나 기술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진정한 경쟁력은 창의적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도전할 수 있는 환경에서 나온다. 이를 위해 정부는 일자리 감소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방지할 촘촘한 사회안전망 구축과 교육개혁 등 AI 부작용 해소에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나아가 지시와 통제 대신 자율과 도전을 존중하고, 실패를 자산으로 삼는 수평적 기업·사회 문화가 정착될 때 AI는 불평등의 원천이 아닌 지속 가능한 혁신과 부의 기회가 될 것이다. ■약력 △위스콘신대(매디슨) 경제학박사 △KDI 산업·시장정책연구부 선임연구위원(현) △'대통령 직속 G-20 정상회의 준비위원회' 자문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WTO팀장 송영관 한국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fn광장] '작지만 강한 나라' 스위스

스위스는 작지만 강한 나라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가운데 하나이며,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최상위권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삶의 질 지표인 '더 나은 삶'(Better Life) 평가에서도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실업률이 낮은 국가군에 속한다. 또한 스위스는 세계지적재산기구(WIPO)의 글로벌 혁신지수에서 15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발표한 2025년도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70개 대상국 가운데 1위를 차지했으며, 디지털 경쟁력 순위에서도 1위를 기록했다. 안정된 재정 운영, 높은 노동생산성, 경쟁력 있는 제조업 기반, 활발한 연구개발(R&D) 투자가 스위스 경제성장을 이끄는 핵심 동력이다. 스위스는 건전한 재정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GDP 대비 정부 지출 비율은 약 35%로 비교적 낮으며 재정준칙에 기반한 균형재정 정책을 시행해 왔다. 유럽에서 가장 건전한 재정구조를 유지하는 국가 가운데 하나다. 스위스 정부는 세계적으로도 효율성이 높은 정부로 평가받는다. 소득세와 법인세 부담도 크지 않다. 평균 법인세율은 약 14.7%로, 유럽연합(EU) 평균에 비해 훨씬 낮다. 복지국가를 지향하면서도 개인과 기업의 창의성을 최대한 존중하며, 과도한 정부 규모가 초래할 수 있는 비효율과 생산성 저하를 경계한다. 스위스 경제의 또 다른 강점은 세계 최고 수준의 노동생산성이다.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2024년 기준 86.2달러로 세계 1위이며, 2004년의 78달러에 비해 10.5% 증가했다. 한국 28위, 일본 27위와 큰 대조를 이룬다. 제약·정밀기계·전기전자·시계 등 고부가가치 산업이 높은 생산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국가 R&D는 GDP의 3.1%를 차지하며, 인구당 노벨상 수상자 비율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높은 생산성은 높은 임금 수준을 상쇄해 제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제조업 못지않게 서비스업의 생산성도 뛰어나다. 호텔, 레저, 관광은 물론 첨단 금융서비스와 경영관리 서비스도 세계적 수준이다. 글로벌 금융회사인 UBS 등이 활발하게 활동한다. 우리나라 서비스업 생산성이 지난 20년간 제조업의 약 40%에 머문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고부가가치 제조업은 성장과 일자리 창출의 핵심 동력이다. 스위스 제조업은 국가 부가가치의 22.5%, 고용의 17.5%를 창출하며 이는 EU와 OECD 평균을 크게 웃돈다. 제약, 정밀기계, 시계, 전기전자 등 주요 제조 부문의 기술 경쟁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연방공과대학, 응용과학대학 등과의 산학협력도 매우 긴밀하다. 숙련된 장인의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고용이 첨단 제조업 경쟁력의 기반이 된다. 제조업 강국 독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특히 제약과 기계·전기·금속 산업이 두드러진다. 제약 산업은 가장 혁신적인 부문으로, 생산성이 국가 평균의 5배에 달한다. 국가 R&D 지출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며, 국가 혁신체계의 중추적 역할을 한다. 세계 제약 수출시장에서 약 12%의 점유율로 세계 2위권이다. 기계·전기·금속(MEM) 산업은 32만명의 일자리를 창출하며 최대 고용 부문으로 자리하고 있다. 전체 R&D 지출의 14%를 담당하고, 생산성은 국가 평균의 1.4배에 이른다. 1998년부터 2007년까지 부가가치의 5분의 1을 창출했고, 이후 비중은 다소 축소되었으나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도 높은 회복력을 보였다. 중소기업이 전체 일자리의 3분의 2 이상을 담당하며 국민 경제를 든든히 떠받치고 있다. 스위스는 금융위기를 비교적 잘 관리해 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비교적 빠르게 회복했다. 인구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의 외환보유액, 안정적인 통화가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개방적 이민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다. 외국 출생 인구가 전체 인구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며, 이 가운데 40%는 비유럽 출신이다. 경제학자 루치르 샤르마는 스위스를 "덜 사회주의적인 유토피아"라고 표현했다. 강소국 스위스 모델은 재정 건전성, 혁신, 생산성, 제조 경쟁력이 어떻게 지속 가능한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약력 △미국 시러큐스대(뉴욕주) 경제학 박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초당대학교 총장 △교육과학기술부 제2차관 박종구 한성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