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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산재 반복에 영업이익 5% 과징금, 이중삼중 과도한 기업 옥죄기

[파이낸셜뉴스]산업재해 논란에 휩싸인 기업들에 대한 옥죄기가 갈수록 태산이다. 산업재해로 최근 1년간 근로자 3명 이상이 숨지면 영업이익의 최대 5%까지 과징금을 물리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어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 이어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까지 더해져 기업의 이중 삼중고가 우려된다. 우선 과징금 제도의 무게를 따져봐야 한다. 상한이 영업이익의 5%이지만, 기업에는 천문학적 액수가 될 수 있다. 더구나 중소·중견기업에는 경영의 존폐 여부를 뒤흔드는 액수다. 사고 한 번의 과징금이 자금 압박과 연쇄 부실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작업중지 요건 완화도 과도한 경영권 침해를 낳을 수 있다. 개정안은 근로자 등이 "급박한 위험이 있거나 우려되는 경우" 사업주에게 작업중지를 요구할 수 있게 하고, 사업주는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이를 따르도록 했다. 작업중지권 행사 주체도 넓혔다. 그런데 '우려'라는 표현은 기준이 모호해서 고무줄 처럼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다. 이런 모호한 규정들이 노사간 이견과 분쟁의 불씨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전반적으로 이번 법이 담고 있는 내용을 보면 과도한 기업 옥죄기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 이번 법을 '제2의 노란봉투법'이라 부르는 이유다. 노란봉투법의 통과 전후 상황을 복기해보자. 법안이 시행됐을 때 발생할 폐해와 혼란을 두고 극심한 논쟁을 낳았다. 당시 정부와 여당은 법이 통과돼도 현장 혼란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법이 시행되자 책임 범위와 교섭 대상을 둘러싼 해석 다툼이 이어졌고, 불확실성은 오히려 커졌다. 모호한 조항을 일단 통과시키고 시행할 경우 벌어질 혼란을 우리는 이미 노란봉투법에서 경험했다. 그런데도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이쯤 되면, 기업이 느끼는 규제의 피로감도 극에 달할 만하다. 2020년부터 시행중인 전부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은 행정제재를 대폭 강화한바 있고, 사고가 나면 경영책임자를 처벌하는 중대재해처벌법까지 시행 중이다. 여기에 이번 산업안전보건법 일부 개정으로 과징금이라는 경제적 제재가 또 가해지게 생겼다. 같은 사고를 두고 행정제재, 형사처벌, 경제처벌이 겹겹이 적용되는 구조다. 이런 식으로 사후 처벌을 두겹 세겹 한다고 산재가 기대만큼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을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실제로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됐는데도 막을 수 있는 사고가 반복되는 점은 처벌 위주 접근의 한계가 드러났다는 방증이다. 법은 이미 통과됐다. 그나마 법 시행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일만 남았다. 정부는 하위법령과 적용 지침을 꼼꼼하게 마련하기 바란다. 과징금 부과 대상과 산정 방식, 감경 사유를 구체적으로 정해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할 것이다. 나아가 정부와 국회는 이번 법의 시행 과정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해 필요하면 보완 입법도 나서야 한다.

[기자수첩] 최적요금제, 횟수보다 정확도

건강검진은 자주 받을수록 좋은 걸까. 몸 상태를 더 꼼꼼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건강검진에도 적정한 주기가 있다. 달라지는 몸 상태를 고려해야 하고, 검사에 드는 시간과 비용도 무시할 수 없어서다. 통신요금도 유사하다. 10월부터 통신사가 가입자의 이용패턴을 분석해 더 적합한 상품을 알려주는 '최적요금제 고지' 제도가 시행된다. 통신사는 계약일이 속한 다음 달 1일을 기준으로 6개월이 지날 때마다 1개월 이내에 최적요금제를 안내해야 한다. 통신비 부담을 덜겠다는 취지는 반갑다. 하지만 '6개월'이 최적의 주기인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고지가 잦다고 더 정확한 요금제를 추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6개월간 이용량에는 방학이나 휴가, 출장, 스포츠 중계 시청 등 일시적인 변화가 상대적으로 크게 반영될 수 있다. 반면 1년 이상 분석 기간을 늘리면 보다 장기적 이용패턴을 살펴볼 수 있다. 잦은 안내가 소비자의 피로도를 높일 수 있는 점도 우려된다. 각종 문자와 알림에 노출된 소비자들이 통신사의 안내마저 스팸처럼 여기고 지나칠 수 있어서다. 사업자의 부담도 고려할 부분이다. 통신사는 수천만명의 이용량과 요금제를 분석해 적합한 상품을 산정해야 한다. 초안대로 제도를 운영할 경우 사업자가 부담할 비용은 연간 약 438억원으로 추산된다. 결국 관건은 이 같은 비용을 들여 연 2회 고지하는 것이 연 1회보다 추가적인 소비자 편익을 만들어내느냐다. 해외는 정보 과부하와 사업자 비용을 고려해 한국보다 긴 주기로 고지 제도를 운영한다. 유럽연합(EU)은 2018년 최적요금 정보를 최소 연 1회 제공하도록 규정했다. 올해 초 제안한 디지털네트워크법(DNA)에서는 정기고지 의무를 삭제하는 방향으로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영국은 약정 만료 시 최적요금을 안내하고 무약정 이용자 등에게는 연 1회 정보를 제공한다. 고지 주기를 늘리더라도 이용자의 선택권을 보완할 수단은 있다. 한국통신사업자연합회(KTOA)의 스마트초이스나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통신 마이데이터를 통해 필요할 때 이용량에 맞는 요금제를 추천받을 수 있다. 앞으로 정부가 살펴봐야 할 것은 몇 번 안내했느냐보다 안내 이후 무엇이 달라졌느냐다. 요금제 변경률과 통신비 절감 효과를 살펴 연 2회 고지가 뚜렷한 추가 편익을 만들지 못한다면 주기 조정 여지도 열어둘 필요가 있다. 최적요금제에서 중요한 것은 고지의 빈도가 아니라 정확도다. [email protected]

[사설] 초과세수로 나랏빚 갚는 것도 미래 세대 위한 투자

정부가 올해 63조2000억원에 이르는 초과세수 일부를 활용해 국고채 발행 물량을 줄이기로 했다. 고유가와 주요국 긴축 여파로 국고채 금리가 오르고 금융시장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신규 국채 공급을 줄여 금리를 안정시키고 나랏빚 증가 부담도 덜겠다는 방향은 바람직하다. 다만 축소 규모가 초과세수에 비해 크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이형일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난달 30일 확대 거시재정금융간담회에서 금리 상승이 과도하면 초과세수 일부를 활용한 국채 발행물량 축소 등 시장안정조치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이미 발행한 국채를 만기 전에 사들이는 '긴급 바이백'에도 나서겠다고 했다. 시중에 풀린 물량까지 관리하겠다는 뜻이다. 시장에선 연말까지 발행물량을 10조원 이상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초과세수를 주거·일자리·서민금융 등 민생 분야에 투입하자는 데 더 무게를 뒀다. 내년 예산안도 장기 추세를 웃도는 세수인 추가세수 162조3000억원을 미래대응기금에 넣으면서 국채 발행 축소엔 12조5000억원만 배정했다. 나라 살림은 넉넉지 않다. 내년 국가채무는 1519조8000억원으로 처음 1500조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율은 48.3%로 낮아지지만 반도체 호황으로 명목 GDP가 일시적으로 커진 데 따른 착시라는 지적도 나온다. 국가채무 이자비용도 올해 36조5000억원에서 내년 42조8000억원으로 늘어난다. 금리가 오르면 미래 세대의 부담은 더 커진다. 초과세수는 반도체 경기에 기댄 일시적 수입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2021~2022년에는 당초 예산을 크게 웃도는 세수가 걷힌 뒤 2023년 56조원, 2024년 30조원대의 세수결손이 이어졌다. 이를 상시 재원으로 여겨 한번 늘리면 되돌리기 어려운 경직성 예산이나 소비성 지원을 확대하는 데 쓰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명절 농축수산물 할인 지원을 내년 설·추석을 합쳐 1조원 가까이로 늘리자며 "미래대응기금으로 해도 된다"고 언급했다. 정부안 1600억원의 6배다.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미래대응기금은 청년·성장동력·지방·교육 등 중장기 사업에 쓰려는 돈이다. 이를 해마다 반복되는 단기 사업에 쓰면 기금 취지가 흐려질 수 있다. 할인 지원이 수요를 자극해 농산물 가격을 오히려 끌어올릴 수도 있다. 늘어난 세수는 빚을 줄이고 재정여력을 확보하는 데 먼저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빚을 갚는 것도 미래를 위한 투자다. 대외 충격이나 저출생·고령화에 대비하는 것도 '미래 대응'의 본뜻에 가깝다. 재정 운용이 정치 일정에 흔들리지 않도록 재정준칙을 마련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초과세수가 생기면 일정 비율 이상을 채무 상환에 쓰도록 하는 것이다. 국채 발행을 줄여 시장을 안정시키면서 대규모 예산 증액을 추진한다면 정책의 일관성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정부는 63조원 초과세수를 재정건전성 회복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

[사설] 美 일방적 대미투자 발표, 떠밀리듯 끌려가선 안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2000억달러 대미 전략투자 사업을 전격 공개했다. 텍사스에 가스복합화력발전소를 짓고, 미국에 대형 원전 8기를 건설하며,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개발에도 한국 자금을 투입한다는 내용이다. 한미 관세협상의 후속 작업이 구체적 사업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는 있다. 하지만 미국 측은 우리 정부가 아직 사업성을 검토 중인 알래스카 LNG 개발에 500억달러 이상을 투자하기로 확정된 것처럼 발표했다.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그렇지 않다. 알래스카 사업은 이제 검토에 착수한 단계로, 상업적 합리성과 국내법상 조건이 충족된 경우에만 추진 여부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한미 간에 합의된 것은 아닌 것이다. 다른 사업도 협상에서 얻은 성과는 최대한 살리고 두번, 세번의 점검이 필요하다. 1호 사업인 텍사스 엔시날 가스복합화력발전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의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겨냥한 223억달러 규모 사업이다. 미국 에너지 인프라 시장에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점은 긍정적이나 안정적인 장기 수요처 확보 등 마지막까지 점검할 과제가 만만치 않다. 원전 분야에선 최대 1200억달러를 들여 대형 원전 8기를 건설하되 이 중 2기에 한국형 APR1400을 적용하기로 했다. 웨스팅하우스와의 기존 합의로 막혀 있던 미국 시장 문턱을 낮춘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8기의 부지와 사업구조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APR1400 2기의 실제 착공과 국내 업체의 참여 수준, 웨스팅하우스 지분의 실질적 권리까지 개별 계약을 통해 국익을 챙겨야 한다. 투자금 회수 안전장치를 구체화한 것은 성과로 평가할 만하다. 모든 사업을 우산형 투자목적회사(SPV) 아래 묶어 수익과 위험을 통합 관리하고 연간 200억달러 투자 상한도 법적 구속력이 있는 운영계약에 넣기로 했다. 한 사업의 수익성이 떨어질 경우 다른 사업의 수익으로 보완할 수 있도록 한 것인데 손실 걱정을 덜 수 있는 장치로 볼 만하다. 문제는 알래스카 LNG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 540억달러를 투자하는 사업처럼 발표했지만 우리 정부는 아직 투자 여부가 결정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알래스카 북극권 노스슬로프의 천연가스를 약 1300㎞의 파이프라인으로 남부 니키스키까지 끌고 와 액화한 뒤 아시아로 수출하는 초대형 사업이다. 예상 사업비만 445억~545억달러에 이른다. 막대한 파이프라인 건설비는 반세기 가까이 사업의 발목을 잡아왔다. 10여년 전 엑손모빌·BP 등이 알래스카주와 공동개발에 나섰지만 경제성에 대한 회의가 커지면서 추가 투자를 중단했고, 결국 주정부가 사업을 넘겨받았다. 지금도 막대한 초기 투자비와 공사비 상승 가능성, 미국· 걸프연안·캐나다 LNG와의 가격경쟁력이 난제로 남아 있다. 수십년간 경제성의 벽을 넘지 못한 사업인 만큼 우리 정부는 더욱 냉정하게 손익을 따져야 한다. 2000억달러는 미국의 정치적 성과를 만들어주기 위한 돈이 아니다. 국민 부담이 뒤따르는 한국의 투자자금이다. 원전시장의 문을 열고 우리 기업의 미국 진출 기회를 넓힌 성과는 살리되, 정부가 내건 투자원칙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가 앞서가더라도 우리는 냉정을 잃지 말고 추가 협상을 벌여야 한다. 떠밀리듯 떠안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강남視角] 금메달보다 소중한 공정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치열한 메달 레이스만큼이나 관심을 모으는 이슈가 일부 선수들의 병역 혜택이다.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올림픽은 동메달 이상)을 따면 된다. 물론 병역 혜택이 곧 '면제'는 아니다. 병역법에 따라 예술·체육요원으로 편입된다.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544시간의 의무봉사활동을 채우면 병역의무가 끝난다. 선수 입장에선 군 입대에 따른 경기 공백이 생기지 않고, 가치가 제일 높은 시기에 계속 뛸 수 있다는 점이 큰 매력이다. 현행 병역특례 제도는 엘리트 체육을 육성하기 위해 지난 1973년 도입됐다. 스포츠를 통한 '국위선양'이 명분이었으나, 그 속내는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북한에 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병역특례는 '군대 로이드'라고 할 만큼 선수들에게 확실한 동기를 부여했다. 덕분에 한국 스포츠가 크게 발전한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공정성이다. 특히 아시안게임이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병역 리스크를 해결하기 위한 통로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합법적인 병역 브로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번 아시안게임 결과에 따라 야구는 금메달 하나로 무려 16명, 농구는 7명이 무더기로 병역 혜택을 받는다. 2022년 항저우 아시안게임 당시에는 야구에서 공 하나 던지지 않은 투수가 병역 혜택을 받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올해 아시안게임에는 듣도 보도 못한 종목들이 등장하면서 논란이 더 커지는 모양새다. '게임이 e스포츠인가' 하는 논쟁은 차치하고라도 뿌요뿌요 챔피언스, 포켓몬 유나이트, 배틀그라운드 모바일 등 특정 게임 타이틀이 아시안게임의 메달 이벤트라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과거 싱가포르 국영신문사에 근무할 당시 동료가 해준 얘기가 떠오른다.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뒤 1967년에 의무병역제를 실시했다. 남자는 모두 18세가 되면 군이나 경찰, 소방서 등에서 2년을 복무한다. 시민권자는 물론 영주권자의 2세도 마찬가지다. 거동이 불가능하다거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예외는 없다. '본인의 능력에 맞는 일'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 동료에 따르면 "왼쪽 다리가 불편한 친구는 군에서 문서수발을 담당하며 병역의무를 이행했다"고 한다. 병역 대상자의 경우 해외 출국도 제한되고, 병역을 기피하는 경우 강한 처벌(징역형)을 받은 다음 복무는 그대로 해야 한다. 싱가포르 역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게도 병역특례는 없었다. 조셉 스쿨링은 2016년 리우 올림픽 수영에서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를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병역 관련 혜택은 '입대 연기'가 전부였다. 그것만 해도 '기적 같은' 엄청난 특혜였다고 한다. "한 사람의 예외를 인정해주는 순간 원칙이 무너진다. 그러다 보면 원칙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다한 이들과의 형평성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 싱가포르 정부의 판단이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병역의 의무는 '신성한' 것이라고 배웠다. 대한민국 청년이라면 (원칙적으로는) 누구나 한 번은 짊어져야 한다. 예외는 가능한 한 없어야 하고, 예외를 인정하는 경우에도 우리 사회가 수긍할 수 있을 만큼 엄격하고 일관성 있는 기준이 요구된다. 'K팝, K컬처를 전 세계에 알린 일등 공신 방탄소년단(BTS)도 군대에 갔으니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도 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 사회를 지탱하는 한 축인 공정(公正)과 그 기준에 대한 얘기다. 공정의 가치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의 금메달보다 훨씬 크고 무겁다. 병역특례를 도입한 지 50년이 넘게 지났고, 세상은 달라졌다. 그사이 한국은 반도체가 세계 1등을 다투고, 주요 20개국(G20)에 들어갔으며, 10대 무역강국으로 발돋움했다. 국위선양을 전제로 한 병역특례도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 손질할 때가 됐다. 본래의 목표와 정당성을 재검토한 뒤 국민적인 신뢰를 되찾을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찾아야 한다. [email protected]

[fn광장]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교수신문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매년 연말이면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발표한다. 단순히 그해 유행한 말을 뽑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습을 네 글자로 압축해 보여주는 일종의 '사회 진단'이다. 지난해에는 '세상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변한다'는 뜻의 변동불거(變動不居)를 뽑았고, 12·3 비상계엄이 발동된 2024년에는 도량발호(跳梁跋扈·함부로 날뛰며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른다), 각종 비리가 난무했던 2023년에는 견리망의(見利忘義·이익을 보면 의리를 잊는다)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했다. 또 지금으로부터 딱 6년 전인 지난 2020년에는 아시타비(我是他非·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를 맨 앞자리에 올렸다. 아시타비는 사실 원전이 없는 말이다. 변동불거는 '주역(周易)', 도량발호는 '장자(莊子)'와 '후한서(後漢書)', 견리망의는 '한서(漢書)'에 적을 두고 있지만, 이 말은 새로 만든 일종의 신조어다.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를 공표한 이래 조어를 그해의 키워드로 뽑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굳이 따지자면 아시타비의 원말은 '내로남불'이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내로남불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으로, 1996년 15대 총선 직후 박희태 당시 신한국당 의원이 처음 사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출처도 불분명한 이 속어(俗語)를 전면에 내세우기 좀 뭣했는지 교수신문은 이를 사자성어 형식으로 바꿨다. 당시 한 신문은 이 말을 'I am right, you are wrong'이라는 영어 문장의 이니셜을 따 'IRYW'라고 줄여 불러도 되겠다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올해도 이 말을 '올해의 사자성어'로 다시 뽑아도 전혀 문제될 게 없어 보인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주장하는 말들이 세상을 온통 뒤덮고 있어서다. 역사학자 이정철은 지난 2016년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라는 제목의 책을 세상에 내놓은 바 있다. 200자 원고지 2000장 분량의 이 두툼한 책은 조선 선조 8년(1575년)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선조 23년(1590년)까지 당쟁이 격화하는 과정을 재구성하면서 정의로운 사림(士林)이 왜 현실정치에선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면밀히 살핀다. "선한 의도나 윤리가 정치를 대신할 순 없었다"는 이 책의 전언은 지금도 유효하다.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 책이 던지는 화두는 현 정부의 이념과 각종 정책을 들여다보는 도구로 쓰일 수도 있을 듯하다. 선한 의지와 자신감으로 시작했지만 나쁜 결과를 초래한 경우가 발에 차일 정도로 차고 넘쳐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부동산과 농지 정책이다. 이들 정책에는 '내가(혹은 우리가) 옳다'는 강한 도덕적 확신이 깔려 있다. 이러다 보니 부동산과 농지 투자는 반드시 척결해야 할 거대 악이 돼 버렸다.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지나치다 보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구차히 따르지 않는 오만도 부리게 마련이다. "시장을 이기는 정부도 없지만, 정부를 이기는 시장도 없다"는 태도가 대표적이다. 최근 내놓은 농지 정책만 해도 그렇다. 정부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이라는 원칙을 앞세워 농지 전수조사와 함께 농사를 짓지 않는 땅에 대해선 처분명령과 이행강제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농지 투기를 막겠다는 취지는 이해할 만하지만, 농업인 감소와 고령화로 농지가 남아돌아도 농사지을 사람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상속받은 농지를 직접 경작하기 어려운 경우까지 일률적으로 규제한다면 선의의 농지 소유자까지 범법자로 내몰 수 있다. 원칙이 옳다고 해서 그 원칙을 현실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정책까지 옳은 것은 아니다. 이렇게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다 보니 '웃픈' 현실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정작 정부가 내세운 기준을 고위공직자들에게 적용하면 설명하기 곤란한 사례가 적지 않아서다. 최근 장관 인사청문회에서도 주택이나 농지 등을 둘러싼 각종 논란이 잇따랐다. 당사자들은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고 해명했지만, 국민의 눈에는 정부가 투기나 편법으로 규정했던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일 수 있다. 정부가 국민에게 요구하는 기준과 자신들에게 적용하는 기준이 달라지는 순간,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아시타비의 반대말은 춘풍추상(春風秋霜)이다.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자신에게는 가을 서릿발처럼 엄격하게 대하라는 뜻이다. 정책의 정당성은 좋은 명분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명분을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때 비로소 힘을 갖는다. 국민에게 높은 허들을 요구한다면 정부와 공직자 역시 그 허들을 넘어야 한다. 남의 허물에는 추상같이 엄격하면서 자신에게는 봄바람처럼 너그러워서는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email protected]

[김세원의 문화읽기] 백일장이 아닌 노벨문학상

10월은 노벨상 수상자 발표로 시작된다. 다음 주면 생리의학상을 시작으로 물리학, 화학, 문학, 평화, 경제학 분야의 수상자가 차례로 호명된다. 1901년 첫 시상 이후 노벨상은 인류가 가장 권위를 인정하는 상이 되었지만, 분야마다 무엇을 재는지는 다르다. 과학상은 검증된 발견과 기술적 성취를 평가한다. 반면 평화상과 문학상은 당대의 역사적 맥락과 시대의 공기를 반영한다. 과학상 수상자를 두고 '왜 하필 그 사람인가'를 묻는 일은 드물지만, 문학상 발표 뒤에는 거의 해마다 해석과 평가가 엇갈린다. 노벨문학상의 120여년 역사를 반추해 보면 이 상은 단 한 번도 '누가 가장 잘 썼나'를 가린 적이 없었다. 노벨은 유언장에 '이상적인 방향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사람'이라 적었고, 이 모호한 '이상적'을 어떻게 읽느냐가 곧 상의 역사가 되었다. 20세기 초 한림원은 이를 기독교적 도덕관으로 읽어 톨스토이와 에밀 졸라 같은 거장을 '지나치게 급진적이거나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그렸다'는 이유로 탈락시켰다. 두 차례 세계대전은 그 기준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이상주의는 희망을 노래하는 태도에서 비극을 직시하는 태도로 옮겨 갔고 헤세와 카뮈, 홀로코스트를 증언한 넬리 작스가 그 전환을 대표한다. 냉전기에는 체제의 폭력을 고발한 문학이, 탈식민 시대에는 주변부의 목소리가 호명되었다. 외압에 밀려 상을 거부한 파스테르나크와 신념으로 거부한 사르트르는 이 상이 한 번도 정치의 무풍지대에 있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역사적 트라우마와 인간의 연약함을 응시한 한강의 수상도 이 궤적 위에 있다. 노벨문학상은 문장의 완성도를 가리는 트로피가 아니라 시대의 상흔 앞에서 작가가 취한 태도를 다는 저울이었다. 이 사실은 생성형 인공지능(AI) 시대에 새로운 무게를 얻는다. 거대언어모델은 방대한 텍스트를 학습해 몇 초 만에 거장의 문체를 흉내 내고, 매끄러운 플롯을 조립한다. 문장의 유려함과 서사의 기교는 더 이상 인간 작가의 독점 자산이 아니다. 그렇다면 언젠가 기계가 쓴 소설이 이 상을 받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계가 복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 문장이 어디에서 길어 올려졌는가 하는 삶의 내력이다. 노벨문학상이 한 편의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문학세계 전체에 주어지는 '작가상'이라는 점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물론 낙관만 할 일은 아니다. 번역과 편집, 자료 조사에서 AI는 이미 작가의 도구가 되었고 기계와 함께 쓴 작품을 어디까지 작가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할지는 모든 문학상이 머지않아 답해야 할 질문이다. 그럼에도 방향은 분명하다. 잘 쓴 글이 흔해질수록 상은 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통과한 시간을 더 엄격하게 물을 것이다. AI 시대의 노벨문학상은 가장 잘 쓴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사람을 찾는 제도로 남을 것이다. 올해 스톡홀름의 저울이 누구를 가리키든,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그 이름 뒤에 놓인 시간이다. 김세원 전 한국문화관광연구원장 ■약력 △고려대 국제통상학 박사 △뉴욕주립대 기술경영학 석사 △전 가톨릭대 부교수 △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문화코드로 읽는 지구(2019)

[기고] 소나무 재선충병 피해지 수종전환, '적지적수' 원칙으로 신중해야

최근 기후위기와 맞물려 소나무재선충병이 확산되면서, 감염 피해지의 소나무를 벌채하고 그 자리에 다른 나무를 심는 '수종 전환(수종 갱신)'이 전국적으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경제성이 높거나 병해충에 강하다는 이유로 새로운 나무를 도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40여 년간 산림 공직에 몸담고 산림청장을 거쳐, 현재 대학에서 산림기후환경을 연구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학자의 시선으로 볼 때, 최근의 수종 전환 흐름은 자칫 산림 생태계의 본질을 외면한 성급한 처사가 될 수 있어 깊은 우려를 금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산림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며 16억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는 소나무는 우리 민족과 애환을 함께해 온 고유의 향토 자생 수종이다. 조선 시대부터 국가 차원에서 벌채를 엄격히 금지하는 정책을 폈을 만큼, 그 역사·문화적 가치 또한 깊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생태학적 사실이 있다. 현재 우리 땅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림 중에서 인위적으로 심은 나무는 약 7%에 불과하며, 나머지 대부분은 오랜 세월 동안 한반도의 자연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하며 스스로 번성한 자생지라는 점이다.  소나무는 햇빛을 매우 좋아하는 극양수(極陽樹)로, 토양의 양분이 부족하고 건조한 척박한 땅에서도 강인하게 뿌리를 내린다. 즉, 현재 소나무가 무리 지어 자생하는 숲은 애초에 다른 수종들이 살아남기 힘든 거칠고 메마른 환경일 확률이 높다. 따라서 재선충병 피해지를 다른 수종으로 개량하고자 할 때는 '왜 오랜 세월 동안 그 곳에 다른 나무가 아닌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는지'를 생태학적 관점에서 정밀하게 분석하는 작업이 최우선돼야 한다.  이러한 생태적 특성과 입지 조건을 무시한 채, 그저 수요자의 요구나 단기적인 경제성만 좇아 수종을 변경했을 때 어떤 뼈아픈 결과가 초래되는지는 최근의 언론 보도를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방제 후 벌채지에 부가가치가 크다는 이유로 수종 전환 면적의 상당 부분을 편백으로 채웠으나, 극심한 가뭄을 견디지 못하고 절반 이상이 집단 고사하는 안타까운 사태가 발생했다. 공중 습도가 높고 비옥한 토양을 요구하는 편백을 건조하고 척박한 소나무 자생지에 심었으니, 이는 생태적 섭리를 무시한 예견된 실패였다.  산림은 공장과 다르다. 공장에서는 시장의 수요와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언제든 기계 시설을 교체하고 생산 품목을 바꿀 수 있지만, 복잡한 유기체인 자연 생태계는 결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건강한 종자를 채취하고 양묘장을 거쳐 튼튼한 어린나무를 기르는 과정부터, 척박한 산지에 심어 온전한 활착률을 확보하기까지의 사전 준비에만 숱한 세월이 필요하다. 나아가 그 나무들이 자라 온전한 숲의 기능을 발휘하기까지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이라는 인고(忍苦)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행정 편의주의나 일시적인 유행에 휩쓸려 섣불리 수종을 갱신해서는 안 되는 명백한 이유다.  결국 소나무재선충병 피해지에 대한 수종 전환은 철저하게 '적지적수(適地適樹·알맞은 땅에 알맞은 나무를 심음)'의 원칙에 입각해야 한다. 국가에서 구축한 '맞춤형 산림지도'를 적극 활용해 해당 지역의 토양 성질, 수분 조건, 지형 및 미세 기후 등 현지 여건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최적의 수종을 선택해야 한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산림 생태 전문가의 정밀한 현장 진단과 숲을 직접 가꿔 갈 산주의 의견을 반드시 수렴하는 절차가 선행돼야만 한다.  자연에는 인간이 함부로 거스를 수 없는 엄연한 섭리가 있다. 척박한 바위틈과 메마른 땅을 묵묵히 푸르게 덮어준 소나무의 생명력을 기억하며, 무리하고 인위적인 대체보다는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 숲의 백년대계를 짊어진다는 막중한 책임감으로, 타 수종 전환에 그 어느 때보다 신중을 기해야 할 시점이다.

[사설] 생산·소비·투자 '트리플 감소', 낙관 말고 내수 살려야

8월 생산과 소비, 투자가 나란히 감소했다. 30일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전산업생산은 전월보다 1.3% 줄어 두 달 연속 줄었고, 소매판매도 1.8% 감소해 두 달째 뒷걸음질했다. 두 달 연속 증가했던 설비투자마저 10% 가까이 줄었다. 생산·소비·투자가 동시에 감소한 것은 지난 5월 이후 석달 만이다. 한 달 수치만으로 경기 흐름이 꺾였다고 단정할 상황은 물론 아니다. 자동차업계의 여름휴가와 일부 업체 파업에 따른 특수요인도 감안해야 한다. 실제 자동차 생산은 24.8%나 줄어 2020년 2월 이후 최대폭 감소를 기록하면서 지표를 끌어내렸다. 설비투자도 7월 선박·항공기 투자가 크게 늘었던 데 따른 기저효과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그 대신 반도체 제조용 장비 등 기계류 투자는 오히려 증가했고, 서비스업 생산도 늘었다. 정부는 이런 차원에서 9월엔 생산·소비·투자가 모두 반등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이대로 경기 회복을 낙관하는 것은 섣부르다. 무엇보다 소비가 불안하다. 자동차 생산 차질과 가전제품 선수요 등 일시적 요인이 있었다지만 두 달 연속 감소한 소비를 특수요인 탓으로만 돌릴 순 없다. 이날 고용노동부 발표에 따르면 7월 실질임금도 전년보다 0.3% 줄어 넉 달 연속 감소세를 면치 못했다. 명목임금 상승률이 물가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계의 실질 구매력이 약해지면 소비 회복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금리 부담까지 다시 커지고 있다. 8월 은행권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연 4.66%로 넉 달 연속 올라 3년9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신용대출 금리는 6.33%, 전체 가계대출 금리는 4.76%까지 뛰었다. 벌이는 물가를 따라잡지 못하는데 대출 이자 부담은 커지고 있는 셈이다. 소비와 투자가 스스로 살아나기에 녹록지 않은 환경이다. 대외여건도 만만치 않다. 미국 장기 국채금리가 5% 안팎의 높은 수준에서 움직이면서 고금리 장기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의 높은 금리는 국내 시장금리와 환율에도 상승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제 금리가 한동안 높은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을 전제로 경제정책을 운용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럴수록 정부가 재정을 동원해 소비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는 단기 부양책에 의존해선 안 된다. 국채 발행을 늘려 경기 둔화에 대응하다 시장금리를 더 밀어 올리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한정된 재정은 취약계층과 미래 성장동력에 집중하고 불요불급한 상시지출은 최대한 억제해야 한다. 누차 지적했듯이 투자 역시 반도체 등 일부 업종의 호황에만 기댈 일이 아니다. 기업들이 새로운 공장과 설비에 돈을 쓸 수 있도록 대대적인 규제·인허가 개선책이 필요하다. 현장의 투자 걸림돌을 과감하게 걷어내야 하는 것이다. 높은 금리가 장기간 지속될 경우 취약차주와 한계기업,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의 부실 위험이 다시 커질 수 있다. 당국은 부실이 커지기 전에 선제적으로 구조조정하고 금융권의 손실흡수 능력도 보강해야 한다. 8월의 '트리플 감소'를 경기 침체의 신호로 과장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일시적 요인이라며 경기 회복을 낙관할 상황도 분명 아니다. 9월 지표가 예상대로 반등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한 달의 반등이 아니라 회복의 지속성과 강도, 확산 여부다. 실질임금 하락과 가계의 이자 부담, 기업 투자 위축 등 내수의 취약점을 하나씩 도려내고 고금리 장기전에도 견딜 수 있는 경제체력을 키워야 한다. 반도체와 수출의 온기가 소비와 투자까지 퍼져 나가게 하는 것이 지금 정책의 우선 과제다.

[사설] 표현의 자유도 진실의 벽은 넘지 못한다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영화 제작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사건의 배후에 있는 것처럼 역사를 왜곡한 혐의로 전 서울시 의원에 의해 경찰에 고발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측근인 유영하 국민의힘 의원은 "영화가 명백한 사실을 비틀어 역사를 왜곡하고 박 전 대통령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며 "유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패륜행위이자 역사에 대한 반역"이라고 주장했다. 육 여사 피격사건은 재일교포 2세 문세광의 소행임이 수사와 재판을 통해 명백하게 확인됐다. 그것은 진실이다. 영화가 박 전 대통령 측 또는 중앙정보부가 사건을 계획했을 수 있다고 암시한 것은 진실을 왜곡한 것이 분명하다. 제작사 측은 "영화 속 가설과 극적 설정을 역사적 사실로 제시하고 있지도 않다"고 주장했지만 궤변에 가깝다. 문학작품이나 영화의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좌익과 빨치산, 인민군을 찬양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던 소설 '태백산맥'을 내사했던 검찰이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무혐의로 결론낸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는 결코 무한하지 않다. 그대로의 사실, 즉 진실을 왜곡할 권리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단 하나뿐인 절대적 가치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영화를 만든 허진호 감독은 다른 영화에서도 역사를 왜곡한 전례가 있다. 바로 영화 '덕혜옹주'다. 고종의 딸 덕혜옹주가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영화에서처럼 항일운동을 하거나 한글학교를 세운 적은 없다. 옹주는 감시를 받았지만 일제의 도움으로 풍족한 생활을 했다. 옹주는 어머니 장례 참석 차 귀국한 일이 있는데 조선 땅을 한번도 밟지 못했다고 영화에서는 그렸다. 극적 효과를 위해 진실을 왜곡한 것이다. 예술적 상상력의 영역은 기록이나 증거가 남아 있지 않아 사실과 진실을 알 수 없는 문제로 한정되어야 한다.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인물이나 사건을 픽션화한 드라마를 왜곡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록이나 사진으로 존재하는 진실을 부정하는 것은 가짜뉴스와 다름이 없다. 거짓이 주는 감동은 의미가 없다. 진실보다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진실을 부정함으로써 관련된 사람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면 명백한 실정법 위반행위다. 그런 점에서 영화 '암살자(들)'이 고발을 당해 법의 심판대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고 막을 도리는 없다. 이번 논란이 좌우 진영 논쟁, 정치적 공방으로 비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영화 내용이 북한의 선전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나왔던 내용과 흡사했다는 탈북민의 증언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이념적 시각에서 볼 것이 아니라 오직 진실 추구의 잣대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5·18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이 또한 진실 왜곡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다.

[테헤란로] 오디세이와 스크린쿼터

"왜 다들 아이맥스, 아이맥스 하는지 알겠다. 다음에도 여기서 보고 싶다." 영화 '오디세이'를 서울 용산아이파크몰 아이맥스관에서 본 관객의 말이다. 영화에서 '관람' 못지않게 '체험'의 가치가 중요해지면서 이제는 무슨 영화를, 어디서 볼지가 중요해졌다. '오디세이'를 일반관에서 보고도 '용아맥' 표를 다시 구하려는 관객이 있는 이유다. 숫자도 변화를 보여준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올 상반기 아이맥스·4DX·스크린X 등을 포함한 특수상영 매출은 457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6.3% 늘었다. 관객 수는 285만명으로 49.0% 증가했다. 전체 극장 매출에서 특수상영이 차지하는 비중은 7.9%이지만, 성장세는 전체 극장 매출 증가율을 앞질렀다. 홀드백이 점차 짧아지는 가운데 특수상영은 극장산업의 새로운 돌파구로 주목받고 있다. 동시에 고민이 따른다. 스크린쿼터 때문이다. 현행 제도에 따라 365일 운영하는 스크린은 연간 최소 73일 한국영화를 상영해야 한다. 특별관도 예외는 아니다. 용아맥의 올해 한국영화 상영일은 35일로, 연말까지 38일을 더 채워야 한다. 그런데 남은 석 달 톰 크루즈 신작 '디거'를 시작으로 '어벤져스: 둠스데이' '듄: 파트3' 등 특별관 포맷에 적합한 외화 블록버스터가 개봉을 앞뒀다. 지난해 말 일반관 포맷의 코미디 영화 '윗집 사람들'이 용아맥에 걸린 사례가 있다.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을 채우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스크린쿼터의 취지는 중요하다. 다만 특별관에서는 관객의 기대치도 무시할 수 없다. 특별관에 어울리는 한국영화가 충분하지 않을 때마다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의 생각은 어떨까. 영화전문지 '씨네21'이 지난 10일부터 13일까지 SNS에서 진행한 설문에는 1368명이 참여했다. 응답자의 81.4%가 특별관의 스크린쿼터를 면제하거나 적용 일수·방식을 바꾸는 등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71.4%는 특별관에서 볼 영화를 고를 때 그 상영관의 기술적 특성에 적합한지를 주요 기준으로 삼았다. 한국영화 보호와 관객의 니즈 사이, 대안은 없을까? 의무상영일을 스크린마다 계산하지 않고 영화관 전체에서 합산하는 방식이 거론된다. 한국영화 상영일의 총합은 유지하되 각 관의 편성을 조정하는 것이다. 상영일의 총량이 같다고 한국영화 보호 효과까지 같은 것은 아니다. 제도를 손질하려면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핵심은 유연성이다. 제도의 취지는 살리면서도 달라진 관람 환경을 감안한 탄력적 운용이 필요하다. [email protected] 신진아 기자

[특파원 칼럼] 동남아 장악 시동거는 일본 방산

"뜻을 같이하는 아시아 국가들과 손을 맞잡고, 친구가 필요로 하는 협력을 해 나가겠습니다. 힘을 합쳐 이 지역을 함께 강하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일본이 앞장서겠습니다." 베트남을 방문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지난 5월 2일 하노이국립대에서 한 강연은 섬뜩할 정도로 강력했다. 2차 세계대전 패전국 멍에에 갇혀 모호한 단어로 평화를 외치던 이전의 총리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다카이치는 "남중국해에서의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현상 변경 시도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며 중국을 노골적으로 겨냥했지만, 짧게 말하면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로 돌아왔다"는 선언이었다. 중국을 비롯한 일부가 일본이 다시 전쟁가능국가로 진입하고 있다며 강력 반발했다. 하지만 이는 한쪽만 본 것이다. 다카이치의 진짜 노림수는 방위산업이다. 올 2월 총선 압승 후 일본의 움직임은 이를 그대로 드러낸다. 다카이치 내각은 지난 4월 말 '방위장비이전 기본 3원칙'을 개정했다.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거나 국제분쟁 당사국이거나 원래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면'이란 전제를 달았지만 일본의 첨단무기를 수출할 수 있게 허용하겠다고 했다. 2014년 아베 신조 총리 때 제정한 이 원칙은 그동안 무기수출을 비전투 후방지원(구조·수송·경계·감시·소해)으로만 제한했다. 그러나 다카이치는 개정을 통해 이 족쇄를 모두 풀었다. 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주가를 높이고 있는 K방산에 엄청난 도전이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은 과거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국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며 미국의 첨단 군수기술을 통째 빨아들였다. 일본은 세계 최초로 항공모함을 보유했던 나라답게 해상자위대의 최첨단 호위함과 잠수함 등 해군 무기는 세계 최강을 자랑한다. 더 무서운 것은 자금력이다. 일본은 2023년부터 '정부 안전보장능력강화 지원(OSA)' 제도를 통해 개발도상국 군대에 일본산 방위장비와 관련 인프라를 무상으로 구축해주고 있다. 다카이치는 올해 이 예산을 181억엔으로 증액했다. 작년의 두 배에 달한다. 최근 전쟁 압력이 높아지고 있는 유럽이나 중동 지역이 아니라 자금력이 약한 동남아를 비롯한 아시아 권역을 겨냥하고 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먼저 호위함, 잠수함 등 바다 무기 시장에 경고등이 켜졌다. 일본은 현재 필리핀에 첨단 호위함 수출 및 공동개발을 추진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와는 잠수함 수출을 타진하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필리핀은 우리나라 HD현대중공업이 호위함, 초계함, 경비함 등을 일부 계약했거나 계약을 추진하고 있는 곳이다. 또 인도네시아는 논란이 있지만 이미 FA-50 경공격기 수출계약을 진행한 나라다. 일본은 이에 더해 최근 자국의 중고 군함을 무상 또는 초저가로 제공하고 있다. 예산이 부족한 동남아 국가에 일본이 국방력 강화를 위한 대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지상 무기는 그나마 사정이 괜찮다. 한국이 K9 자주포, K2 전차, 천무 등을 운영하며 실전능력과 납기 운용에서 아직은 압도적 우위를 가지고 있어서다.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처지는 아니다.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일본이 중국의 팽창에 맞서 아시아에서 미국의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는 앞으로 아시아 국가의 무기 표준이 일본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은 이미 미국과 공대공미사일(AMRAAM), 패트리엇(PPAC-3) 공동생산 협약을 맺고 개발 중이며 영국, 이탈리아와는 차세대 전투기 개발을 이미 시작한 상태다. 반면 우리나라는 동남아의 한 국가가 최첨단 지상무기 수입 의사를 내비쳤음에도 중국의 눈치를 보며 아직 결정을 못하고 미적대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린다. 글로벌 방산시장은 경제 논리도 중요하지만 정치적·지정학적 논리도 함께 작용한다. 특히 중국과 가까이 위치한 동남아는 더욱더 그렇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빨간불은 이미 켜졌다. [email protected] 김관웅 기자

"아파트, 미래에도 핵심 주거… 공급확대·지방분산 동시에" [논설실의 뉴스 진단]

한국 사회가 연일 부동산 문제로 들끓는다. 정부는 세제개편과 대출규제로 수요를 억제해 시장을 정상화하겠다지만, 업계는 오히려 시장 왜곡을 우려한다. 그 중심에 한국 부동산을 특징짓는 아파트와 전세가 있다. 도시·교통공학을 바탕으로 부동산 정책을 연구해온 김진유 경기대 교수(아시아부동산학회 회장)에게 한국 부동산의 현주소와 해법을 물었다.―아파트가 도입 60여년 만에 전국 주택의 절반을 훌쩍 넘었다. 최근 젊은 세대의 아파트 선호가 집착에 가까울 정도다. ▲1960년대 도시 집중으로 주택난이 심화되자 신속한 대량공급을 위한 최선의 대안이 아파트였다. 대량공급이어서 비용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아파트 거주를 꺼렸으나 1970년대 초 한강맨션아파트(1970), 반포주공아파트(1972) 등 중산층 이상을 겨냥한 공급을 계기로 선진 주거문화로 여겨지며 '단지족' '반포족' 같은 말까지 생겼다. 고도성장기 긴 노동시간 탓에 집을 직접 관리할 여유가 없었던 데다 공원·놀이터·주차장까지 갖춰 주거여건도 월등히 좋았다. 급속한 산업화로 거주이전이 잦아진 상황에서 아파트는 환금성과 새 주거지 적응성이 높고, 보안.프라이버시.익명성도 뛰어났다. 최근엔 고급주택의 위상까지 얻었다. 외국의 고급주택은 '게이티드 커뮤니티'나 단독주택이 대부분이지만, 한국은 나인원 한남·에테르노 청담처럼 최고급 아파트가 존재하고 자산 가치도 높다. 여행·취미 등 하고 싶은 게 많은 젊은 세대는 특히 관리가 편하고 방음·주차 불편이 없는 아파트를 선호한다. 요즘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인기다. ―"공동주택이 많아질수록 공동체가 해체됐다"고 하셨는데. ▲한국 아파트는 공동주택이라기엔 커뮤니티 형성이 미흡하다. 프라이버시가 더 중요한 가치여서 오히려 일본 학계 개념인 '집합주택'에 가깝다. 아파트 주민들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알려 하지도 않아 미국 도시계획 이론가 제인 제이콥스가 말한 '일상 속 상호부조'가 일어나지 않는다. 한국 도시에서 공동체가 해체된 것은 잦은 이동 때문이다. 고도성장기 평균 거주기간이 3년에 불과했다. 만남과 헤어짐이 잦아 감정 소모가 힘드니 서로 정을 주지 않게 됐다. ※제인 제이콥스는 거창한 공동체 조직보다 일상에서 이웃끼리 서로 알고 돕는 상호부조가 도시의 안전과 질서를 만든다고 봤다. 자신이 살던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에서는 상점 주인들이 아이들을 지켜보고, 이웃끼리 우산·돈·열쇠 등을 빌려주는 일상적인 관계가 형성돼 있었다. 이런 관계가 제이콥스가 말한 '거리의 눈(eyes on the street)'이다. ―서울 아파트값 급등이 놀라운데, 국제도시 대비 높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서울의 매매·임대가격은 낮은 수준이다. 조사 결과 방 3개 아파트 중위가격은 미국 맨해튼 400만달러(약 54억원)·외곽 브루클린 120만달러, 도쿄 주요 6개구 2억5000만엔(약 22억원)·나머지 23개구 1억2000만엔인 반면 서울은 강남 4구(강남·서초·송파·강동) 20억9000만원, 전체 평균 10억5000만원이다(2026년 7월 기준). 임대료는 훨씬 저렴해 글로벌 통계 플랫폼 '넘비오' 기준 서울은 주요 도시 중 139위다. 방 3개 아파트 기준 뉴욕이 한국의 3.6배, 싱가포르 2.3배, 런던 2.2배, 로스앤젤레스·시드니·홍콩이 2배 비싸고 도쿄는 비슷하다. 그런데도 체감 주거비가 높은 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서울·수도권 중심으로 가격이 급등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형병원 접근성 등 수도권의 인프라와 교육·문화 격차를 실감하며 수도권 집중이 강화됐다. ―아파트가 향후에도 핵심 주거형태로 남을지. ▲그럴 가능성이 크다. 서울은 향후에도 초과 수요 상태여서 대량공급을 위해서는 아파트가 불가피하고, 주거편리성·공급단가 측면에서도 우위를 점한다. 뉴욕 맨해튼이나 도쿄, 싱가포르 등 세계적 도시들도 도심 럭셔리 아파트가 핵심 주거유형 역할을 하고 있다. ―전세가 한국에서만 발달했다는 말이 있는데. ▲인도·볼리비아·페루·콜롬비아·모로코 등 세계 6~7개국에도 존재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는 한국이 유일하다. 기원은 기원전 15세기 메소포타미아문명에서 찾는데, 곡식을 빌리는 대신 자식을 맡겨 노동력을 제공하다 빚을 갚고 데려오던 관습이 주거에 들어온 것이다. 세종실록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 국내 최고(最古) 기록은 정조 때 무관 노상추가 서울 양반가 셋집 보증금을 못 받아 애먹었다는 일기다. 전세 전신인 가사전당·세매가 조선시대에 이미 일반화돼 있었다. 1876년 개항 이후 항구도시에 농촌 노동력이 몰려 임차 수요가 폭증하고 상인들의 목돈 수요도 늘면서 전세가 본격 확대됐다. ―임대차시장에서 이미 월세 비중이 전세를 넘어섰다. 임차인 입장에서 어느 쪽이 유리한지. ▲전세사기 등 리스크와 전세보증금 절대액 상승으로 추가 전세금 조달이 쉽지 않아지면서 반전세가 늘고 있다. 보유세 상승과 임대인 고령화에 따른 생활자금 수요도 임대인들의 월세 선호를 부추긴다. 임차인의 생활비만 보면 전세가 유리하다. 전세 대출이자가 월세보다 적기 때문이다. ―전세는 '주거 사다리'라는 긍정적 시각과 갭투자로 투기를 조장한다는 부정적 시각이 갈린다. ▲한국에는 전세뿐 아니라 보증부 월세도 존재한다. 보증금을 늘려가며 전세를 끼고 내 집을 마련하는 것은 대출을 활용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정상 수요이자 서민의 전형적인 자산 형성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갭투자'는 전세의 부정적 측면만 강조한 왜곡된 용어다. 다만 이 방식으로 여러 채를 사들이는 경우만 '갭투기'라 불러야 한다. 정부의 제도 개선 미흡으로 전세사고·전세사기 가능성이 계속 높아졌다. 전세권설정 의무화나 전세가율 상한제, 임대인·임차인 정보의 투명한 제공 등으로 해결할 수 있다. 정책 당국에 수차례 제언했지만 사유재산권 보호, 개인정보보호 등의 이유로 시행되지 않는 게 아쉽다. ―아예 사라져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런 주장은 자동차 사고가 난다고 차를 타지 말자는 것과 같다. 2024년 국내 전세금 규모가 1000조원에 달한다는 연구가 있었다. 보증부월세 보증금까지 합치면 2000조원을 넘을 것이다. 최소 200년 이상 이어온 이 제도에 치명적 문제가 있었다면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월세만 있는 국가는 팬데믹 당시 실직한 임차인이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는 사례가 속출해 강제퇴거 금지조치를 시행해야 했다. 한국은 전세든 월세든 보증금이 최소 월세의 12개월치는 됐기에 그런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주거 안정성을 높이려면 전세·보증부월세·월세 등 선택지를 다양화해 임대인과 임차인이 각자 처지에 맞게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시장에 미친 영향은. 보수·진보 모두 목표는 주거 안정이라면서도 실제 정책은 크게 다른데. ▲서민 주거안정 대책의 영향은 막대하다. 택지 공급과 주택 규제 조절, 공공임대 등 공급 확대로 시장 안정을 꾀한 것은 긍정적이지만 과도한 세제·대출·공급 규제는 시장을 왜곡해 변동성을 키웠다. 정책 내용이 진영마다 다른 건 솔직히 말해 부동산이 지지율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국민 주거안정이라는 본래 목표가 표와 당선, 정권 유지·재창출 같은 정치적 이익과 뒤섞이면서 지지층에 따라 정책 수단이 달라진다.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보수당이 집권하면 전 정부가 애써 마련해 둔 공공임대주택을 아예 민간에 팔아버리기도 한다. ―공급이 핵심이라는 데는 모두 동의한다. 향후 공급정책의 핵심은. ▲정상 수요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는 것이다. 공급의 80% 이상을 담당하는 민간은 분양·입주 때 자금 회수가 불안해지면 주택사업을 축소한다. 공공부문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한국토지주택공사(LH)·서울주택도시공사(SH)·경기주택도시공사(GH) 등 3대 공공주택 공급기관 직원은 총 1만1000명 정도로 대형 건설회사 2~3곳 직원 규모에 불과하다. ―재건축 등 정비사업이 공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나. 초고층 선호현상은 바람직한가. ▲정비사업은 필요하다.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도시가 쇠퇴해 활력을 잃는다. 다만 정비사업으로 새 주거지를 만들 때 아쉬운 부분이 있다. 평지나 핵심 업무지구에는 초고층 아파트도 가능하지만 구릉지에서까지 고층을 고집하는 것은 도시경관이나 기반시설 효율성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대표적 한강변 아파트 중 건물 높이 250m, 70층 재건축이 검토되는 것은 과한 측면이 있다. 모든 시민이 즐겨야 할 한강변 경관을 사유화해서는 안 된다. 한강 유람선에서 보면 여의도를 제외하고는 아파트로 병풍을 둘러친 것처럼 보이는데, 프랑스 파리 센강의 유람선에서 보는 전경과 너무 다르다. ―수도권 공급 확대가 과밀을 부추긴다는 지적도 있다. ▲수도권 주택공급과 국토균형 모두 필요하다. 세부 전공이 주택수요 추정인데, 실제 수도권 수요를 추정해보면 매년 서울 5만호 포함 19만호나 된다. 사실상 공급이 불가능해서 가격 상승이 불 보듯 뻔하다. 따라서 지방 분산도 매우 중요한 과제다. 정부는 지방 일자리에 집중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방 활력을 위해서는 의료·교육·문화 인프라도 함께 갖춰져야 한다. 지방에서도 서울 대형병원 수준의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고 강남 대치동 수준의 학원가가 있어야 한다. 최근 동탄 학원가에 대치동 일타강사들이 강의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정도는 돼야 지방이 주거지로서 매력을 갖는다. ■ 김진유 교수 약력 △한양대 도시공학과 박사 △한국감정원(현 한국부동산원)·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 연구원 △경기대 스마트시티공학부 교수 △아시아부동산학회(AsRES) 회장 △국토부 전세피해지원위원회 위원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 위원 △한국부동산분석학회 회장 △한국주택학회 회장 △저서 '도시의 미래'(공저·2024), '전세'(2017) 등 다수 [email protected]

[차관 칼럼] 국가가 책임지는 뱃길

육지에서는 버스가 하루 운행을 멈춘다고 해서 마을이 고립되지는 않는다. 다른 버스나 지하철, 택시, 자가용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섬은 다르다. 여객선이 멈추는 순간, 육지와 단절된다. 여객선은 섬 주민에게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다. 병원에 가고, 장을 보고, 일을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생활의 길이다. 관광객과 주민을 실어 나르고, 섬에서 생산한 농수산물과 섬에 필요한 생필품을 운송하는 생활의 동맥이다. 정부는 섬 주민의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1956년부터 민간선사가 수익성 부족으로 운항을 포기한 항로를 '국가보조항로'로 지정해 운영해왔다. 정부가 건조한 국고여객선을 민간선사에 위탁하고, 운영비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현재 전국 99개 연안여객항로 중 29개가 국가보조항로로 운영된다. 하지만 그동안의 방식으로는 주민들이 기대하는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선박 관리가 민간선사에 맡겨져 있다 보니 최대 25년 사용할 수 있는 국고여객선이 관리부실로 평균 17년 만에 폐선됐다. 국고여객선 예비선은 항로별로 분산 관리돼 다른 지역의 항로에서 운항공백이 발생하더라도 신속하게 투입하기 어려웠다. 이제 그 방식을 바꾸려 한다. 올해 5월 개정된 해운법에 따라 내년부터는 국가보조항로는 '공영항로'로 이름을 바꾸고, 공공기관이 직접 운영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됐다. 이를 바탕으로 내년에 29개의 공영항로 중 서해안 지역 11개 공영항로를, 2028년에는 전체 공영항로를 한국해양교통안전공단에 위탁해 운영할 계획이다. 단순히 운영주체를 민간에서 공공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섬 주민의 이동을 '시장에 맡겨야 하는 서비스'가 아니라 '국가가 책임져야 할 기본적인 생활권'으로 바라보는 변화다.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것은 안전이다. 해양교통안전공단의 선박·여객선 안전관리 전문성을 활용해 운항과 선박관리를 체계화하고, 전국 공영항로에 높은 수준의 안전관리체계를 적용할 예정이다. 주민들이 느끼는 불편함도 줄여나갈 것이다. 섬 주민에게 필요한 생활밀착형 서비스를 주민의 입장에서 찾아 개선할 것이다. 우선 고령의 섬 주민들이 생필품을 구입해 여객선에 싣고 들어가야 하는 불편을 덜 수 있도록 주문한 생필품을 선원들이 섬까지 운송해주는 시범사업을 추진한다. 운항의 연속성도 높인다. 항로별로 관리하던 국고여객선 예비선을 전국 단위로 통합 관리, 선박 정비 등으로 운항이 일시 중단되는 항로에 신속하게 투입할 계획이다. 섬은 우리 국토의 일부이자 많은 국민이 삶을 이어가는 생활의 공간이다. 섬에 산다는 이유로 이동의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거나 필요한 서비스를 충분히 누리지 못해서는 안 된다. 어디에 살든 안전하게 이동하고, 일상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여객선이 섬과 육지를 오가고, 주민들이 필요할 때 배를 타고 육지로 나갈 수 있는 것, 어쩌면 너무 당연해서 그 가치를 잊기 쉬운 일상이다. 정부는 그 당연한 일상을 지키는 일을 국가의 책임으로 생각한다. 섬 주민에게 여객선이 단순한 배가 아니라 삶과 육지를 이어주는 든든한 길이 될 수 있도록, 국가가 그 길을 더욱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이어갈 것이다. 남재헌 해양수산부 차관

[fn광장] '실용외교'가 국익에 도움 될까

우리는 잊고 살지만 한반도는 얼마 전까지 세계의 화약고였다. 한반도를 노린 것은 중국과 일본만이 아니었다. 러일전쟁과 한국전쟁은 부동항을 얻고자 하는 신흥강대국 러시아의 등장에 의해 촉발되었다. 러일전쟁은 한반도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의 각축이었지만, 사실은 러시아 남하를 100년에 걸쳐 막아온 해양세력의 패권국 영국의 존재가 일본 승리를 결정지었다.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패권을 둘러싼 100년 전쟁 그레이트게임이었다. 그리고 일본을 패퇴시킨 것은 미국이었다. 한국전쟁은 한반도 남부를 얻고자 하는 스탈린의 작품이었고, 영국을 이은 패권국 미국이 개입해 이를 저지했다. 이후 냉전이 종결될 때까지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세력의 각축장이자 첨예한 격전장이었다. 승전국 미국에 의해 수천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중국, 일본, 러시아가 우리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지역의 균형(equilibrium)이 형성되었다. 미국이 만든 자유주의 국제질서였고, 우리는 미국과 강력한 동맹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또한 자유주의 국제질서로 인해 한국은 외세의 간섭 없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며 세계적 무역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안전과 평화를 가져온 대외 전략환경에 있어서 퍼펙트스톰이 다가오고 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이것을 만든 주인공 미국에 의해 무너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규범 기반의 국제질서 대신 '거래적 외교(Transactional Diplomacy)'를 우선시하여 동맹을 중시하지 않는다. 특히 한정된 국방·재정 자원을 무분별한 세계 경찰 역할에 쓰기보다는 외교안보상의 우선순위를 본토 안전과 직접 결부된 아메리카대륙의 확고한 지배력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고, 중국 견제를 위해 동맹 네트워크를 강화하기보다 한국·일본 등 동맹국 역할과 부담의 강화를 구하고 있다. 트럼프의 미국은 우리 안전을 지키는 자애로운 후원자가 아니라 자국 이익만을 추구하는 거래 중심의 행위자로 변하였다. 자유주의 국제질서 붕괴와 함께 지정학적 균열도 한반도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강력한 신흥대국이 등장했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각축의 그레이트게임이 부활하려 한다. 중국은 정치·경제·군사·첨단기술 등 모든 면에서 패권국 미국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일대일로 전략은 유라시아대륙과 해양을 동시에 지배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중국 제조업은 선진국 평균의 제조업 수준을 뛰어넘었다. 인공지능(AI), 양자컴퓨터, 그린에너지 등 첨단분야에 있어서 맹렬히 미국을 추격 중이다. 냉전 이후 힘을 잃고 있던 러시아도 북한과의 군사동맹을 부활시키면서 한반도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가 줄어드는 가운데, 중러의 전략폭격기 편대와 함대가 한반도 주변 해공역에서 다니는 것은 이제 상시적인 일이 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북한이 57발의 핵무기를 보유했다고 지적했듯이 북한 핵무장은 이미 현실이다. 핵무기 없는 세계 5위의 군사대국 한국은 핵무장한 북한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 러북 군사동맹 부활과 함께 북중 군사교류도 재개됨으로써 조만간 북한군도 참여한 북중러 3국 군사훈련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전쟁이나 이란전쟁은 강 건너 불이 아니고 점점 그 화마가 우리 주변으로 전이될 수 있다. 한반도가 다시 그레이트게임의 화약고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는 것을 지혜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냉전 이후 역대 정권은 한미동맹을 강조하면서도 균형외교를 표방했다. 이재명 정부가 표방하는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는 문재인 정부뿐만 아니라 윤석열 정부도, 박근혜 정부도, 이명박 정부도 표방했다. 말이 실용이지 균형외교의 다른 표현이다. 냉전 종결로 사회주의권이 붕괴했고, 중국도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동참한 상황이었기에 일정 부분 균형외교가 가능했다. 그러나 지정학적 균열의 강대국 각축 시대에 과연 균형외교가 가능할까. 구한말 조선도 나름대로 균형외교를 했다. 일본과 협약을 맺는 동시에 러시아와는 밀약을 맺었고, 다른 열강에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문제는 열강들은 그러한 정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데 있다. 강제병합 과정에서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균형외교의 실체이고, 우리가 처한 최악의 지정학적 환경의 실체다. 과연 우리가 실용외교와 국내정치에 매몰되어 있을 정도로 한가할 수 있을까. 윤덕민 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 前 주일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