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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視角] 쿠팡, 괘씸죄에 걸렸나

2021년 글로벌 테크 공룡 메타(페이스북)는 전 세계 106개국 5억3300만명에 달하는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통째로 털렸다. 유출 경위는 황당할 만큼 허술했다. 해커들은 메타의 친구 찾기 기능인 '연락처 가져오기' 도구의 취약점을 노렸다. 자동화 프로그램(봇)으로 무차별적인 '데이터 스크래핑(무단 수집)'을 감행한 것이다. 이용자의 전화번호와 페이스북 고유 ID를 매칭해 이름, 생년월일, 거주지, 이메일 주소까지 포함된 거대한 고객정보를 생성시켰다. 그리고 5억명 넘는 이용자 정보를 무차별 공개했다. 메타가 서비스 구조의 치명적 결함을 방치해 5억명 넘는 정보를 털린 대가는 어땠을까. 유럽연합(EU)의 아일랜드 데이터보호위원회(DPC)는 2억6500만유로(약 380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지난 11일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지난해 발생한 쿠팡의 대규모 정보유출 사고와 관련해 6246억8100만원의 과징금을 결정했다. 국내외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과징금 제재다. 물론 쿠팡의 과실은 크다. 퇴사한 외국계 직원이 인증시스템과 인증키를 수개월간 농락한 걸 까맣게 몰랐다. 그 과정에서 회원 3322만명과 비회원 433만명 등 총 3755만명의 정보가 유출됐다. 배송지 정보 6398만건과 공동현관 비밀번호까지 고도의 해킹이 아닌 안전관리 미비로 털린 것이다. 개인정보위 조사 결과는 쿠팡의 '보안 불감증'을 여실히 증명한다. 여기에 사태 초반 쿠팡이 보여준 태도도 기름을 부었다. 김범석 쿠팡Inc 의장은 대규모 유출 사태가 터진 지 한 달이 지나서야 뒤늦게 사과문을 냈다. 올 초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야 투자자들에게 첫 육성 사과를 전했다. 국내 소비자의 공분이 극에 달했음에도 한국을 직접 방문해 고개 숙여 사과하지 않은 건 아쉬운 대목이다. 그래서인지 전대미문의 과징금 폭탄이 오롯이 법적 산정기준의 결과인지 의문이다. 처벌의 엄정함이 법 집행의 형평성과 객관성을 행여 잃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정당한 제재가 아닌 국가의 폭력이 된다. 쿠팡의 과징금은 지난해 연간 영업이익(6790억원)에 육박한다. 기존 국내 최대 과징금인 SK텔레콤의 1348억원을 4.6배나 뛰어넘었다. 4000만명의 신용정보를 고객 동의 없이 알리페이에 무단 전송했던 카카오페이는 59억6800만원의 과징금을 받았다. 직접 비교가 어렵다고 해도 형평성의 문제가 나올 수 있다. 알리페이에 넘어간 개인정보에는 휴대전화 번호, 이메일 주소, 자금부족 가능성과 관련된 정보(카카오페이 가입일, 충전 잔고 등) 등 총 24개 항목이 포함됐다. 정보의 민감도는 쿠팡보다 더 높다. 정보유출이 퇴사 직원의 짓이든, 회사의 업무적 차원이든 고객 모르게 이뤄진 건 마찬가지다. 개인정보위는 쿠팡 정보유출 피해의 실질적 규모나 2차 피해 가능성을 엄정하게 계량화하지 않았다. '직전 3개년 평균 매출액의 3% 이내'라는 법적 원칙을 최우선 기준으로 삼은 정황이 더 커 보인다. 쿠팡이츠나 쿠팡플레이 등 관련 없는 매출은 제외했다고 한다. 이를 제외하면 쿠팡 본체 매출의 '3% 상한선'을 최대한 반영했다는 셈이다. 사안의 본질보다 여론의 눈총과 '유통 공룡 길들이기'라는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괘씸죄'를 더했다는 의구심이 든다. 과도한 징벌적 규제의 부메랑은 결국 시장과 국민에게 돌아온다. 이번 처분으로 쿠팡의 일년 치 수익이 날아갈 위기다. 지금 전국 각지에서 추진 중인 신규 물류센터 투자와 고용 확대 계획의 전면 재검토도 불가피해졌다. 전국 100여개 물류센터에서 9만명을 고용하며 지역경제의 모혈을 돌리던 플랫폼의 발이 묶일 수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자리 감소와 서비스 질 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성장한 글로벌 기업의 보안관리 허술은 분명 엄정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나 정보유출의 실질적 피해를 입증하지 않고 '패가망신' 격의 처벌을 내린다면 살아남을 기업이 몇이나 될 것인가. cgapc@fnnews.com 최갑천 기자

[사설] 미·이란 종전해도 완전 정상화까진 넘을 산 많다

미국과 이란 전쟁이 마침내 출구를 찾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3일(현지시간) "(이란과) 종전 양해각서(MOU)에 서명할 예정이며, 서명 직후 호르무즈해협은 모두에게 개방된다"고 밝혔다. 수개월째 이어진 전쟁이 종전의 문턱에 다가섰다는 기대감이 한층 높아지고 있다. 그동안 종전 가능성이 수차례 제기됐지만 번번이 결렬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자방식의 서명 절차까지 공개됐고, 아바스 아라그치 이란 외무장관도 "협상의 최종 단계가 완료되는 대로 서명·발표될 것"이라고 밝혀 종전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졌다. 고유가와 공급망 불안으로 어려움을 겪어온 한국 경제에도 반가운 소식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아직 안도하기에는 이르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이번 합의는 우선 원칙에 합의한 뒤 세부 사항을 추후 협의하는 방식이다. 호르무즈해협은 서명 직후 개방될 수 있지만 이란 핵문제와 동결자산 해제, 호르무즈해협 통행료 부과 등 핵심 현안은 향후 60일 동안 추가 협상을 이어가기로 했다. 워싱턴 일각에서 이번 합의를 '60일짜리 휴전 연장' 또는 '다음 협상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다. 무엇보다 석유와 액화천연가스(LNG) 등 전 세계 해상 원유 수송량의 20%, 국내 원유 수입량의 70%가 지나가는 호르무즈해협의 통행료 부과 문제는 여전히 불안요인이다. 통행료가 부과될 경우 결국 국제유가와 국내 에너지 가격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아라그치 장관은 최근 이란 국영TV에서 "호르무즈해협 관리 문제는 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여기에 레바논 주둔 이스라엘군 철수 문제와 미국·이란 내부 강경파의 반발도 변수다. 분쟁 재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 호르무즈해협 재개방에 합의하더라도 선박 통행과 물류 시스템이 완전히 정상화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아부다비국영석유회사(ADNOC)는 "선박 이동뿐 아니라 생산·저장·수송·보험·금융·물류 전반이 함께 복구돼야 한다"며 물동량이 전쟁 이전의 80% 수준을 회복하는 데 최소 4개월, 완전 정상화는 2027년 상반기 이후에야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 시장은 일단 환영하는 분위기다. 뉴욕 증시 주요 지수는 일제히 상승했고 국제유가도 급락했다. 호르무즈해협이 정상적으로 개방된다면 글로벌 에너지 가격 안정과 증시 회복에 대한 기대도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 경제 역시 그 수혜를 입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합의가 어디까지나 원칙적 수준의 합의에 가깝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완전한 종전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고 글로벌 공급망이 정상화되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정부와 산업계는 유가 하락을 일시적 호재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인플레이션 안정에 적극 활용하되 MOU 이후 협상이 결렬될 경우 유가가 다시 급등하는 상황에도 대비해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호르무즈 통행료 등 새로운 비용 구조가 고착화할 가능성에 대비해 에너지 수입선 다변화와 전략비축유 확충, 공급망 재편을 멈추지 말고 더 속도를 내야 한다. 재생에너지와 원전 등 에너지 자립 기반 강화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종전 기대감에 취하기에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

[사설] 올해 초과세수 15조 추정, 미래성장 재원으로 써야

올해 반도체 경기와 부동산시장, 주식시장이 활황세를 보이면서 세수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예상되는 초과되는 세수는 대략 15조원으로 이보다 더 늘어날 수도 있다. 국세수입은 지난해 373조원대였는데 올해는 431조원대로 추정된다. 올해 세수 초과는 반도체 업종을 비롯한 일부 업종의 호경기에 따른 법인세 증가가 주된 이유다. 소득세와 증권거래세도 납부액이 늘고 있다. 매년 세수 부족에 시달렸던 나라 재정 상황이 오래간만에 좋아진 것이다. 문제는 예상보다 늘어난 초과세수의 활용 방안이다. 우리는 당연히 미래 성장동력 확충자금으로 쓰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유용한 활용법이라고 본다. 행여 이 돈을 국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현금 살포용으로 쓸까 봐 우려스럽지만, 정부의 생각도 다르지 않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이재명 대통령이 그런 언급을 했다. 최근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미래 세대를 위한, 또 대한민국의 성장 잠재력을 키우는 방향에 투자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정부 안팎에서는 초과세수를 재원으로 하는 '미래대응기금(가칭)'을 만드는 방안이 고려되고 있다고 한다. 초과세수가 발생하면 국가재정제도에 사용처와 절차가 규정돼 있다. 지방교부세 정산이나 채무 상환에 쓰는 것 등이다. 그러나 지금 돈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분야를 찾아야 한다. 바로 첨단산업 분야와 새로운 미래산업에 대한 투자다. 세계 각국은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로봇, 바이오 산업 등에 천문학적인 자금력을 동원하여 지원을 퍼붓고 있다. 경제대국 중국의 첨단산업이 단기간에 한국을 위협하거나 이미 기술력을 추월한 것은 국가적 지원에 힘입은 바가 크다. 우리와 경쟁하는 대만이나 일본도 마찬가지다. 민간기업의 투자력은 한계가 있다. 시장경제하에서 국가의 직접적인 지원은 제약이 있겠지만 방법을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간접적인 방법은 세제 지원과 인프라 건설 지원 등도 가능할 것이다. 민관이 협력하여 최적의 투자방안을 만들어내야 한다. 세수는 경제흐름에 따라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있다. 이런 세수 호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알 수 없다. 내년까지는 호황이 이어져도 그다음에는 작년과 같은 세수 부족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말이 있다. 성장동력을 키우기 위한 예산이 필요했는데, 초과세수는 굴러들어온 호박이나 마찬가지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유용하게 써야 한다. 한번 놓친 기회는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고 기약도 없다. 10조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한 전 국민 지원금이 내수 확대로 연결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결국 시간은 걸리겠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가 민생을 살리는 데 효과적인 수단임이 증명된 것이다. 당장 힘들어도 앞을 내다봐야 한다. 국가재정도 마찬가지다.

[기자수첩] 침몰하는 선관위

배에 자그마한 균열이 생기면 물이 새어 들어온다. 방치하면 배는 침몰한다. 선거관리위원회의 현재 상태다. 선관위는 침몰 중이다. 선관위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심장이다. 민주주의 그 자체인 선거의 공정성과 신뢰를 책임지는 기관이어서다. 어느 기관보다 엄격하고도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러나 수년간 드러난 선관위 모습은 가관이었다. 최근 선거 때마다 선관위의 크고 작은 관리 부실이 도마에 올랐다. 2022년 대선 때도 이른바 '소쿠리 투표' 오명은 물론이고, 2025년 대선도 투표용지 외부 반출 등 부실 행태들을 지적받았다. 이뿐인가. 선관위 고위 간부들의 자녀들이 부정 승진하고, 친인척 채용비위가 전방위적으로 벌어졌다. 불과 몇 년 사이였다. 이런 작은 균열들이 모여 결국 선관위가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발생했다. 사상 초유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다. 가장 기본적인 투표용지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특히 유권자를 사전에 파악하는 여러 장치를 통해 참정권 보장을 위한 각종 수단도 마련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이 사태를 단순 실수·착오로 치부할 수는 없다.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붕괴했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선관위를 향한 국가적 불신은 임계점을 넘어섰다. 그럼에도 선관위를 외부에서 통제할 방안은 헌법상 독립기관이라는 점에서 모두 막혀 있다. 여야가 머리를 맞대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를 추진 중이지만 선관위의 부실 행태를 근본적으로 뿌리 뽑기에는 역부족이다. 지금이라도 선관위 운영구조를 개혁하고, 체질개선에 나서야 한다. 이에 선관위 대개혁을 위한 원포인트 개헌 논의가 정치권에서 나오고 있다. 선관위의 조직 운영과 감사체계, 위원 구성방식 등을 손질해 외부 통제책을 강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여야가 공히 뜻을 모아 선관위 개혁의 필요성을 주창하는 만큼 잃어버린 국민 신뢰 회복을 위한 선관위 대개혁 개헌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아울러 이 같은 개헌 시도를 통해 '87체제'를 끝내고 도래할 미래에 어울리는 새로운 헌법을 마련하기 위한 '개문발차' 기회로도 활용하길 바란다. 침몰하는 배를 건져내는 것은 방향을 지시하는 선장의 역할이다. 선관위의 부실 선거관리로 침몰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한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정치권에 선관위 대개혁을 위한 각성을 주문한다. gowell@fnnews.com

[포럼] 李정부의 '메가특구' 성공하려면

6·3 지방선거가 끝나고 민선 9기 지방정부가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 새로 선출된 자치단체장들에게 부여된 시대적 과업은 쇠퇴일로에 있는 지역경제와 골목상권을 살리는 일이다. 국내외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여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일자리를 늘리고, 종사자들의 정주 환경을 개선하여 지역에서 생활과 소비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지방정부가 풀어야 할 문제는 어떻게 기업의 투자를 끌어낼 것인가이다. 기업으로서는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고, 인력을 구하기 쉬운 수도권을 떠나 지방에 연구센터나 생산공장을 두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기업의 지방 투자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파격적인 유인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새로 선출된 광역단체장들이 관심을 기울여 추진해야 할 것이 메가특구이다. 이재명 정부가 국가균형 성장을 위해 새롭게 설계한 이 제도는 인접 시도에 걸쳐 있는 여러 개의 산업과 혁신 거점을 하나의 대규모 특구로 지정하고, 획기적인 투자 유인책을 마련했다. 먼저 특구에 최고 수준의 규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세 가지 방식의 규제 특례를 제공한다. 첫째, 메뉴판 식 규제 특례로, 기업과 지방정부가 필요로 하는 규제 완화를 미리 준비된 형태로 제공하여 투자 기업이 쉽게 선택할 수 있게 한다. 둘째, 수요응답형 규제유예는 메뉴판에 없는 규제 중 기업이 원하는 규제 완화를 빠른 심의를 통해 허용하는 제도이다. 셋째, 기존 규제샌드박스 제도를 개선하여 기업들이 신기술과 서비스를 더 넓은 공간에서 더 빠르게 실증할 수 있도록 한다. 특구에 투자하는 기업에는 이러한 규제 완화와 더불어 재정, 금융, 세제, 인재, 인프라 측면의 지원이 패키지로 제공되어 투자 매력도를 높인다. 재정에서는 성장엔진 특별보조금을 신설하여 메가특구의 신산업에 투자하는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한다. 현 정부가 새롭게 조성한 국민성장펀드와 지역성장펀드는 특구 내 기업의 대규모 설비투자와 스타트업의 창업과 성장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한다. 세제 혜택도 기존의 지방 이전 기업에 주어지는 법인세 감면에 더해 투자, 고용 및 연구개발(R&D)에 비례하여 확대할 예정이다. 거점국립대를 중심으로 특구 내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여 공급하고, 산업단지를 비롯한 거점 지역의 주거, 교육, 의료 인프라를 개선하여 정주 인구를 늘릴 계획이다. 특구 제도가 이번 정부에서 처음 도입되는 것은 아니다. 1973년 대덕연구단지로 시작한 연구개발 특구가 전국 19곳에 지정되어 있으며, 신기술의 실증을 위해 문재인 정부에서 시작한 규제자유 특구도 전국에 40곳 이상 지정되어 운영되고 있다. 윤석열 정부에서 지방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시작한 기회발전 특구도 55곳이나 지정되어 있다. 이렇게 각종 특구가 이미 운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메가특구제도를 새롭게 도입하고자 하는 것은 기존 특구의 지원책이 기업의 투자를 유인하는 데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새롭게 추진되는 메가특구가 지방경제의 신성장 엔진이 되기 위해서는 국내외 기업에 매력적인 투자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발표된 통합지원 패키지가 충실히 이행되어야 한다. 이병헌 광운대 경영학부 교수

[fn광장] 제조강국 韓, 혁신의 '두뇌' 심어라

지금 세계 경제는 단순한 경기 순환이 아니라 근본적인 구조적 전환(Structural Transformation)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인공지능(AI), 양자기술, 바이오 혁명이 산업의 경계를 허물고 있으며, 글로벌 공급망은 과거의 '효율성' 중심에서 '안보와 신뢰' 중심으로 급격히 재편되고 있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 리쇼어링, 프렌드쇼어링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생존 조건이 되었다. 이러한 대외 격랑 속에서 한국은 생산가능인구 감소가 가속화되면서 내수시장 축소와 복지비용 폭증이라는 이중고가 현실화되고 있다. 제조 강국으로 쌓아온 기반을 혁신 강국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면 장기 정체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추격형 성장 모델의 한계가 명확해진 지금, 혁신으로 돌파해야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다. 해답은 조지프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에서 찾을 수 있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데서가 아니라, 그것을 끊임없이 뒤흔드는 혁신에서 찾았다. 새로운 기술과 기업이 기존 산업을 대체하는 과정 자체가 성장의 진정한 원천이다. 여기에 내생적 성장 이론(Endogenous Growth Theory)이 힘을 더한다. 기술과 혁신은 경제 시스템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며 지식 축적, 인적 자본, 강력한 인센티브가 결합될 때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 이는 202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필리프 아기옹·피터 하윗의 '창조적 파괴를 통한 지속적 성장'과 직결된다. 한국이 과거 추격형 성장에서 벗어나 선도형 또는 혁신형 성장으로 나가려면 바로 이 혁신 메커니즘을 작동시켜야 한다. 일본은 제조 강국이 혁신 강국으로 전환하지 못한 대표적 사례다. 1980년대 세계 최고 제조 경쟁력을 가졌으나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장기 침체에 빠졌다. 카이젠식 점진적 개선에는 강했으나 파괴적 혁신과 디지털 전환을 놓친 것이 결정적 한계였다. 경직된 노동 시장과 안정 지향 문화가 창업과 위험 감수를 막았다. 반면 미국은 대학, 벤처캐피털, 자본시장이 연결된 혁신 생태계를 통해 새로운 기업을 지속적으로 탄생시켰다.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와 강력한 인센티브가 핵심이다. 부가가치만을 강조해온 탓에 발생한 제조업 공동화의 부작용에 직면해 있으나, 최근 반도체법,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을 통해 혁신과 제조 기반을 다시 결합하는 전략적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우리의 최대 무역 상대국 가운데 하나인 중국은 '연성 예산 제약'하에서 부채를 동원해 성장을 이어온 결과 지방정부와 부동산 부채가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중국제조 2025'를 통해 전기차, 배터리, AI 등 전략 산업에서 빠르게 기술 경쟁력을 축적하고 있다. 과잉생산과 혁신 역량이 결합되면서 한국에 단순한 가격 경쟁이 아닌 구조적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을 기술 추격자이자 혁신 경쟁자로 정확히 인식하고 공급망 다변화와 기술 우위 전략을 강화해야 한다. 한국 경제는 대기업 중심 연구개발(R&D)의 한계와 서비스 산업의 낮은 생산성이라는 구조적 제약에 봉착해 있다. 대기업 체계는 기술 추격에는 효과적이었으나 파괴적 혁신에서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또한 서비스업 노동생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26위로 최하위권이며, 그 격차가 계속 확대되고 있다. 각종 규제와 아날로그 법체계가 AI와 데이터 활용을 가로막아 전체 생산성 저하를 초래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제조업 편중 성장의 잔재로, 서비스 부문의 디지털 전환 지연과 규제 과잉, 중소기업의 투자 부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결국 한국 경제가 재도약하려면 혁신으로 돌파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첫째, 혁신 주체를 대기업뿐만 아니라 스타트업 등으로 다변화하고 창업부터 재도전까지 이어지는 선순환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대기업과 스타트업 간 개방형 혁신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지원정책이 필수다. 둘째, 서비스 산업의 고도화와 스마트 규제 개혁이 시급하다. AI와 데이터를 의료·교육·금융 등에 적극 도입하고, 규제 샌드박스 확대와 데이터 공유 체계를 통해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셋째,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기반 위에 AI를 접목한 지능형 제조로 전환하여 기술 주권을 확보해야 한다. 넷째, 창의성과 문제 해결 역량을 중심으로 한 인재 양성 체계로 전환하고, 노동 이동성을 높이며 주 52시간제 같은 불합리한 노동 규제를 과감히 철폐하며, 해외 인재 유입을 확대함으로써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혁신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제조라는 강력한 심장에 혁신이라는 뇌를 이식할 때 진정한 혁신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다. 박기순 한중경제포럼 회장

'화성인' 머스크, 나스닥 안착… 전 지구인이 베팅하다 [글로벌 리포트]

【파이낸셜뉴스 뉴욕=이병철 특파원】 "인류를 다행성 종족으로 만들겠다"는 일론 머스크의 꿈이 24년 만에 마침내 월가에 상장됐다. 135달러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화성을 향하고 있었다. 사상 최대 규모의 기업공개(IPO)에 나선 스페이스X는 단숨에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으며 미국 자본시장의 새 역사를 썼다. 인류 최초의 조만장자가 된 머스크에게 이번 상장은 단순한 부의 확대가 아니다. 달 탐사와 화성 정착, 그리고 인류를 '다행성 종족(multiplanetary species)'으로 만들겠다는 24년간의 꿈을 현실로 옮길 자금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월가 역시 로켓 제조업체가 아닌 '인류의 다음 100년'에 투자하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135→160.95→166.75 2026년 6월 12일(현지시간), 나스닥에 'SPCX'라는 주식 종목 코드가 처음 떴을 때 주가는 공모가 135달러를 훌쩍 웃도는 150달러에서 출발했다. 장중 한때 176.52달러까지 치솟으며 상승률이 30%를 넘어섰고, 종가는 160.95달러로 마감됐다. 하루 만에 19% 상승한 것이다. 시간외 거래에서도 열기는 식지 않아 166.75달러까지 올랐다. 거래량도 기록적이었다. 상장 첫날 오후 2시 기준으로만 이미 3억6000만주 이상이 거래됐는데, 이는 올해 두 번째로 큰 IPO였던 세레브라스의 첫날 전체 거래량보다 10배 많은 수준이다. 최종적으로 첫날 거래량은 5억주를 넘어섰다. 거래대금만 약 800억달러(약 110조원)에 달해 미국 증시 역사상 가장 뜨거운 IPO 가운데 하나로 기록됐다. 2012년 페이스북 상장 당시 기록한 약 5억7000만주의 첫날 거래량은 여전히 미국 IPO 역사상 최대 수준으로 꼽힌다. 스페이스X 역시 이에 육박하는 거래량을 기록하며 월가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1조7700억달러→2조1040억달러 하루 만에 '빅6' 클럽 입성. 공모가 135달러 기준 스페이스X의 시가총액은 1조7700억달러였다. 하지만 종가가 160.95달러로 확정되면서 시가총액은 2조1040억달러로 불어났다. 시총 1위는 엔비디아(4조9600억달러)이며 그 뒤를 알파벳(4조3800억달러), 애플(4조2700억달러), 마이크로소프트(MS·2조8700억달러), 아마존(2조5400억달러)이 잇고 있다. 머스크의 테슬라는 1조5000억달러로 시총 8위다.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한 차고에서 시작한 민간 우주기업이 세계 최대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750억달러, 아람코의 3배 이번 IPO의 조달 규모는 750억달러다. 이는 2019년 사우디 아람코가 기록한 역대 최대 IPO 조달액(약 260억달러)의 거의 3배에 달한다. 스페이스X는 총 5억5555만5555주를 주당 135달러에 매각해 막대한 자금을 확보했다. 5억5555만5555주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계산된 숫자다. 주당 135달러를 곱하면 조달액이 정확히 750억달러에 수렴한다. 머스크 특유의 상징적 연출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조달 자금은 차세대 우주선 스타십 개발과 스타링크 인프라 확충, NASA 달 탐사 지원 사업, 그리고 머스크가 평생의 목표로 제시해온 '인류의 다행성 종족화(making life multiplanetary)' 비전 실현에 투입될 전망이다. 머스크는 텍사스주 스타베이스 본사에서 열린 행사에서 "이 영상을 보고 있는 여러분이 누구든, 스페이스X는 여러분을 달로, 화성으로, 궁극적으로는 그 너머까지 데려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창업 초기 시절을 떠올리며 "스페이스X가 성공할 가능성은 10%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7946억달러→1조달러 이날 가장 극적인 숫자는 주가가 아니었다. IPO 직전 머스크의 순자산은 포브스 기준 약 7946억달러였다. 스페이스X 상장으로 그의 스페이스X 지분 가치가 재평가되면서 순자산은 1조달러를 돌파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조만장자(trillionaire)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실물 1달러 지폐로 1조달러를 환산하면 총 1조장의 지폐가 필요하다. 미국 1달러 지폐의 길이는 약 6.14인치(15.6㎝)다. 이를 일렬로 늘어놓을 경우 총 길이는 약 9700만마일(약 1억5600만㎞)에 달한다. 이는 지구와 달 사이 평균 거리인 23만8855마일(약 38만4400㎞)을 200회 이상 왕복할 수 있는 수준이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 따르면 지구와 태양 사이 거리는 약 9300만마일(약 1억5000만㎞)로, 1조달러 지폐를 늘어놓은 길이가 이를 넘어선다. 이를 인류 전체로 나눠보면 또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미국 인구조사국과 유엔(UN) 추계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인구는 약 82억명이다. 1조달러를 전 인류에게 균등하게 배분할 경우 1인당 약 122달러(약 17만원)를 나눠줄 수 있는 규모다. 머스크의 재산 규모는 다른 억만장자들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포브스 집계에 따르면 머스크 다음으로 부유한 인물인 구글 공동 창업자 래리 페이지의 순자산은 약 2940억달러다. 조만장자의 기준선인 1조달러와 비교하면 여전히 7060억달러의 격차가 존재한다. ■82.4%…흔들리지 않는 '머스크 제국' 82.4%는 스페이스X 상장 이후에도 일론 머스크가 행사하게 될 의결권 비율이다. 스페이스X는 차등의결권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머스크는 1주당 10개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클래스 B 주식의 90% 이상을 보유하고 있으며, 1주당 1개의 의결권을 가진 클래스 A 주식도 12.3% 소유하고 있다. 그 결과 IPO를 통해 막대한 자금을 조달하고도 회사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은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이는 이번 상장의 또 다른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기업이 상장하면 창업자의 지분율과 영향력은 점차 약해진다. 그러나 머스크는 전체 지분의 일부만 시장에 공개하면서도 경영권을 확고히 지키는 방식을 택했다. 실제로 이번 IPO를 통해 시장에 풀린 지분은 전체 기업가치 대비 약 4% 수준에 불과하다. 결국 투자자들은 머스크의 비전에 자금을 댄 것이지, 머스크를 견제할 권한을 얻은 것은 아니다. 로켓 발사 일정부터 스타십 개발, 스타링크 확장, 인공지능(AI) 사업 투자, 나아가 화성 정착 계획에 이르기까지 스페이스X의 미래를 결정하는 최종 권한은 여전히 머스크 한 사람에게 집중돼 있다. ■4400명의 백만장자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스페이스X 현직 및 전직 직원 약 4400명이 이번 상장으로 백만장자 반열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최고운영책임자(COO) 그윈 쇼트웰과 최고재무책임자(CFO) 브렛 존슨은 각각 10억달러 이상의 지분 가치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가장 눈길을 끄는 인물은 임원이 아니다. 2015년 시급 28달러를 받으며 입사한 멕시코 출신 용접공 후안 에르난데스는 공모가 135달러 기준으로 약 88만달러 상당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180억달러 매출, 그러나 49억달러 손실 화려한 IPO 뒤에 가려진 재무 성적표는 복잡하다. 스페이스X의 2025년 연간 매출은 180억달러로 전년 대비 33% 증가했다. 그러나 같은 해 순손실은 49억달러를 기록했고, 상각 전 영업이익(EBITDA)은 65억8000만달러였다. 수익의 엔진은 단연 스타링크다. 스타링크는 2025년 114억달러의 매출을 올려 전체 매출의 61%를 차지했고, 영업이익은 44억달러를 기록했다. 가입자 수는 155개국에서 1030만명을 넘어섰으며, 2년 연속 가입자 기반이 두 배씩 늘었다. 문제는 xAI다. 스페이스X가 2026년 2월 인수한 xAI 부문은 2025년 한 해에만 63억5000만달러의 영업손실을 냈다. 스타링크가 창출한 현금흐름이 AI 투자 재원으로 활용되는 구조다. 우주 산업의 수익이 인공지능 경쟁의 실탄으로 쓰이고 있는 셈이다. ■숫자 너머의 질문 2조달러짜리 회사, 1조달러짜리 인간, 4400명의 백만장자. 6월 12일 하루가 만들어낸 숫자들이다. 스페이스X는 이제 단순한 로켓 회사가 아니다. 위성 인터넷과 인공지능, 우주 데이터센터, 그리고 달과 화성까지 머스크가 그리는 제국의 지도는 지구 밖으로 뻗어 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비전에 월가가 처음으로 가격을 매긴 날이 바로 6월 12일이었다. 문제는 49억달러의 적자와 109배의 PSR(주가매출비율·시가총액을 연간 매출로 나눈 값)이 보여주듯 이 모든 것이 아직 '약속'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나스닥 투자자들은 그 약속에 750억달러를 걸었다. 투자자들이 산 것은 로켓 회사의 주식이 아니라 인류를 다행성 종족으로 만들겠다는 머스크의 꿈이었다. pride@fnnews.com 이병철 특파원

10년 집념이 일군 TPC 국산화… 국내 넘어 해외 공급망 넘본다 [박신영의 초격차 K산업]

【파이낸셜뉴스 울산=박신영기자】 울산 석유화학단지에 들어선 애경케미칼 테레프탈로일 클로라이드(TPC) 생산공장. 공장 곳곳을 가로지르는 주황색 배관은 이곳의 차별화된 경쟁력을 상징한다. 단순한 원료 생산시설이 아니라, 애경케미칼이 10여년간 연구 끝에 완성한 친환경 기술이 구현된 현장이기 때문이다.지난 3월 준공된 이 공장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아라미드 섬유 핵심 원료인 TPC를 독자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이다. TPC는 아라미드 원료에서 80%를 차지할 정도로 핵심 소재다. 그동안 국내 아라미드 업체들이 대부분 수입에 의존했던 원료를 이제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독자 개발한 친환경 순환 시스템 적용 지난 12일 공장 내부에 들어서자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설비를 따라 길게 이어진 주황색 배관이었다. 애경케미칼이 독자 개발한 친환경 광염소화 공법의 주요 설비다. 기존 TPC 생산 공정은 이산화황이 발생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반면 애경케미칼은 광염소화 공법을 적용해 이산화황 발생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염화수소는 포집해 재활용하는 순환 시스템도 구축했다. 친환경성과 경제성을 동시에 확보한 셈이다. 최근 유럽을 중심으로 환경 규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이 같은 공정은 단순한 친환경 기술을 넘어 글로벌 경쟁력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공장 곳곳에 설치된 배관은 부산물을 다시 원료로 활용하는 순환 구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공장이 완성되기까지는 1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TPC 연구가 시작된 것은 2015년이다. 당시 연구소에서 관련 개발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현재 생산기술을 완성한 주역 가운데 한 명인 이호창 AX솔루션팀 팀장은 10년이 넘는 시간을 TPC 개발에 쏟아부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이호창 팀장은 지난해 10월 31일 '화학산업의 날'에 산업통상부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공장 현장에서 만난 그는 "지금 공장장이신 이종화 전무님이 당시 연구소 팀장이었는데, TPC 연구를 한번 해보자고 제안했다"고 개발 초기 상황을 떠올렸다. 그는 "10년 동안 연구를 이어오면서 솔직히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며 웃었다. 이어 "개발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적지 않았지만 장치기술이 발전하면서 사업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됐고, 운도 어느 정도 따라줬다"며 "결국 연구소에서 시작한 기술이 실제 공장으로 구현되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고부가가치 스페셜티 전환 기점 실제로 애경케미칼이 확보한 경쟁력은 단순히 국산화에 그치지 않는다. 그동안 수입 TPC는 운송 과정에서 고형화돼 국내 업체들이 다시 녹이는 재용해 공정을 거쳐야 했다. 이 과정에서 상당한 에너지와 비용이 발생했다. 하지만 울산에서 생산된 TPC는 액상 상태로 공급이 가능해 별도 재용해 과정이 필요 없다. 공급망 안정성은 물론 에너지 절감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에 애경케미칼은 향후 국내 아라미드 생산업체들을 주요 고객으로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국내 아라미드 시장은 효성첨단소재, 코오롱인더스트리, 태광산업 등이 주도하고 있다. 현재는 국내 업체들에 시험용 제품을 공급하며 품질 검증 절차를 진행 중이다.  회사는 중장기적으로 해외 시장 진출 가능성도 높게 보고 있다. 특히 애경케미칼이 적용한 친환경 광염소화 공법은 기존 공정 대비 환경 부담을 줄일 수 있어 글로벌 환경 규제가 강화될수록 경쟁력이 부각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향후 친환경 원료에 대한 수요가 확대될 경우 국내 공급을 넘어 해외 고객사 확보와 수출도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종화 애경케미칼 울산공장장(전무)은 "이번 TPC 생산은 단순한 신규 사업 진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며 "범용 화학제품 중심의 벌크 사업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스페셜티 케미칼 기업으로 전환하기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아라미드 시장 성장에 따른 수요 확대가 예상되는 만큼 애경케미칼은 TPC를 기반으로 고기능 소재 사업 비중을 높여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padet80@fnnews.com 박신영 기자

[fn사설] 쿠팡 역대급 과징금, 통상 갈등 없도록 만전 기해야

[파이낸셜뉴스]쿠팡에 6247억원의 과징금이 부과되면서 향후 파장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단일 개인정보 유출 사고로는 역대 최대 규모이자, 한 기업에 부과된 과징금으로도 최고액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쿠팡은 한국이 아닌 미국 기업이다. 그만큼 쿠팡에 대한 과징금 부과에는 우리 정부가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 우선 절차에 따른 정당한 조치를 하는 것이다. 쿠팡은 인증 서명키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퇴직자가 5개월 넘게 정보를 빼낼 수 있도록 방치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법적 근거 없이 회원 활동기록을 수집했으며, 조사 과정에서 자료를 삭제해 조사를 방해한 사실까지 확인됐다고 한다. 이번 제재는 단순한 개인정보 유출 사건을 넘어 기업의 기본적인 책임 의식 문제에 해당한다. 합당한 절차와 그에 상응한 제재로 응하는 게 맞다. 특히 이번 제재에서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할 원칙은 공정성이다. 해외 기업이라는 이유로 차별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통상관계나 외교적 부담을 고려해 외국기업 봐주기를 해서도 안 된다. 만약 외국계 플랫폼이라는 이유로 제재 수위를 낮춘다면 같은 법을 적용받는 국내 기업은 역차별을 당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결국 국가나 개별 기업의 이해관계보다 우선해서 지켜야 할 대상은 개인정보를 도둑맞은 국민과 소비자의 권익이다. 다만 절차의 정당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조금이라도 오해의 불씨를 남기지 않도록 충분히 설명하는 소통이 함께 따라야 한다. 우선 이번 과징금이 '역대급'이라는 표현 때문에 한국이 유독 외국 기업을 가혹하게 다룬다는 오해를 사서는 안 된다. 해외에서는 이미 조단위가 넘는 엄청난 금액의 제재가 이뤄진 사례가 있다. 한국만 무리하게 막대한 과징금을 부과한 게 아니라는 점을 인식시켜야 한다. 그럼에도 부과 대상 기업인 쿠팡측에서 순순히 수용할 것으로 낙관할 수 없다. 특히 우려되는 건 이번 제재를 계기로 미국 정치권의 로비와 통상 압박이 거세질 가능성이다. 공교롭게도 미국이 한국에 통상 압박을 가하는 시점과 쿠팡 제재 시점이 맞물리고 있다. 미국이 글로벌 관세부과를 위해 주요국들에 대한 문제점을 찾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쿠팡 제재를 마치 미국기업에 대한 불이익으로 몰아세우면 양국간 통상 교섭도 난항에 빠질 수 있다. 이미 일부 미국 의원들은 한국의 개인정보 규제가 자국 기업을 겨냥한 차별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을 펴왔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국내법 집행의 문제와 통상·외교 현안은 분명히 다른 쟁점이다. 정부는 이번 처분이 국내법과 절차에 따른 합법적 조치임을 일관되게 설명하는 동시에 쿠팡 문제가 한미 간 다른 통상·외교 현안과 연계되지 않도록 외교적 관리에도 만전을 기해야 한다.

[사설]호황에도 취업자 큰 폭 감소, 'K자 성장' 극복 시급

한국 경제가 올해 1·4분기 반도체 수출 호조에 힘입어 고성장을 기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상위권을 기록했고, 국내 증시 시가총액도 세계 6위권에 올라섰다. 화려한 성적표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 반도체를 빼면 자랑할 만한 수준이 아닐 수 있다. 반도체가 사실상 홀로 한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취업자 수는 오히려 줄었다. 한국은행 경제활동별 성장기여도에 따르면 1·4분기 반도체가 포함된 컴퓨터·전자 및 광학기기 업종은 전기 대비 12.5% 성장했다. 제조업 전체 성장률 3.9%를 크게 웃돈다. 성장기여도도 압도적이다. 한은은 1·4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분 중 반도체가 차지한 비중이 55%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전체 성장률은 높아졌지만 반도체를 제외하면 다른 산업의 성장 기여는 제한적이었다는 의미다. '반도체의, 반도체에 의한, 반도체를 위한 경제'라는 말이 과장이 아닌 셈이다. 초호황이 일자리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11일 발표된 '5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15세 이상 취업자는 지난해 동월 대비 4만명 감소했다. 취업자 수가 줄어든 것은 1년5개월 만이다. 청년 취업자는 25만5000명 급감해 팬데믹 이후 가장 부진했다. 자동차 등 제조업 일자리 감소세도 23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반도체 산업의 구조적 특성이 원인으로 꼽힌다. 반도체는 대표적인 자본집약형 산업이다. 생산과 수출이 늘어도 고용 증가 효과는 크지 않다. 지난해 4·4분기 반도체 생산은 12.8% 증가했지만 임금근로자 일자리는 1.9% 늘어나는 데 그쳤다. 산업연구원 분석에서도 반도체의 취업유발 효과는 제조업 평균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그 결과 K자형 성장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있다. AI 수요 급증에 따른 반도체 호황으로 '삼전닉스' 등 일부 기업 종사자는 성과를 누리고 있다. 반면 자동차·정유·내수 제조업 종사자들은 고유가·고환율·고물가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산업 간 격차는 소득 격차로 이어지고 있다. 국가데이터처의 1·4분기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소득 상위 20%와 하위 20% 가구 간 소득 격차는 6년 만에 가장 큰 수준으로 확대됐다. 반도체 업계의 성과급 지급이 본격화하면 분배지표는 더 악화할 가능성이 있다. 이제는 성장의 양보다 성장의 질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취업자 감소를 중동발 지정학적 불안이나 경기 변동 같은 외부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 일시적 충격이 구조적 실업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반도체 대기업의 협력사 투자 확대를 유도하고, 반도체 산업에서 창출된 세수와 부가가치가 내수·고용 연계 산업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정책적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한다. 반도체에서 시작된 온기가 경제 전반으로 확산될 때 비로소 진정한 성장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경제의 다음 과제는 성장률 제고가 아니라 K자형 성장의 극복이어야 한다.

[사설]한일 AI·반도체 협력, 경제 안보 윈윈 모델로 키워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엔비디아와 손잡은 인공지능(AI) 팩토리를 일본에서도 가동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SK의 메모리 반도체와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 여기에 일본의 소재·장비 인프라를 연결해 한일 반도체 생태계를 넓히겠다는 취지다. 최 회장은 신규 반도체 공장 건립 지역으로 일본이 좋은 후보지라는 언급도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11일 실린 인터뷰를 통해 밝힌 내용이다. 앞서 최 회장은 한일 경제공동체 구상을 제안하며 에너지, 저출산 등 구조적 위기에 양국이 함께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와 일본은 둘 다 제조업 강국이면서 에너지 자급률은 낮다. 동시에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급속한 고령화로 신규 노동력 부족, 지역 소멸, 사회보장 부담 등 공통의 문제를 안고 있다. 독자적으로 해법을 찾기엔 비용과 대가가 너무 크다. 양국이 경험과 기술을 공유한다면 위기 대응의 효율을 한층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상호 보완적 산업구조를 활용해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고 치열한 기술경쟁 시대에 함께 승자가 되자는 것이 최 회장의 제안이다. 날로 첨예해지는 미중 기술 패권 경쟁 구도에서 한일 경제협력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도 주목할 만하다. 세계 각국이 보호무역 장벽을 높이 세우고 있고 글로벌 공급망은 시시각각 재편되고 있다. 반도체와 AI는 국가 경쟁력의 핵심 인프라가 됐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와 제조 역량, 통신 인프라에서 독보적인 국가다. 일본은 반도체 소재·장비, 정밀 제조 분야 생태계가 탁월하다. 양국이 손잡으면 훨씬 큰 규모의 시장과 공급망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SK와 엔비디아가 추진하는 AI 팩토리는 단순한 데이터센터가 아니다. GPU와 고대역폭메모리(HBM), 초고속 네트워크를 결합해 AI 모델의 학습과 추론을 대량으로 처리하는 지능 생산설비다. 향후 로봇, 자율주행, 신약 개발, 에너지 관리까지 산업 전반의 생산성을 좌우할 핵심 거점이 될 것이다. SK는 내년 국내서 첫 AI 팩토리를 가동하고 이어 이를 일본으로 확장하겠다는 것인데 한일 양국의 AI 인프라는 이를 발판으로 더욱 시너지를 낼 수 있다. 한일 협력의 미래를 물론 낙관적으로만 볼 순 없다.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다. 과거사와 국민정서, 기술유출, 산업 주도권 경쟁은 민감한 문제다. 협력이 한쪽의 종속으로 비쳐서도 안 될 것이다. AI 소프트웨어와 제조 데이터 활용까지 한국의 AI 역량을 종합적으로 키우면서 일본과의 협력은 상호보완 원칙하에 설계돼야 한다. 한일 기업들이 움직이는 만큼 양국 정부는 규제와 세제, 전력 인프라, 연구개발(R&D) 협력의 제도적 기반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 AI 팩토리와 반도체 공장은 막대한 전력과 부지, 숙련인력을 요구하는 산업이다. 양국이 AI, 에너지, 인재, 실버산업을 묶어 장기 협력 플랫폼을 만들 필요도 있다. AI 시대에 한국과 일본의 핵심 인프라 동맹은 경제안보 차원에서도 의미가 크다. 한일 연대는 이제 과거 통상협력을 넘어 미래 산업 핵심 파트너로 올라서야 한다. 최 회장이 제안한 AI·반도체 협력이 양국의 새로운 윈윈 모델로 자리 잡을 것으로 기대한다.

[기자수첩] 전세사기 피해자의 또다른 족쇄

"이제는 정말 이사를 가고 싶은데 집이 팔리질 않아요. 부동산에서도 일단 월세를 놓고 기다리자고 하네요." 2023년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받은 A씨는 요즘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보증금을 모두 날리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전세사기 피해 주택을 직접 낙찰받았지만, 정작 그 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다. A씨가 거주 중인 곳은 서울 금천구의 한 빌라다. 근린생활시설로 분류돼 거래가 쉽지 않은 데다 전세사기 사태 이후 비아파트 시장 침체까지 겹치며 매수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피해를 막기 위해 선택한 셀프낙찰이 또 다른 족쇄가 된 셈이다. 전세사기 피해자들 사이에서 셀프낙찰은 대표적인 피해구제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우선매수권을 활용해 피해자가 직접 경매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실제 피해자 커뮤니티에서는 셀프낙찰 경험담과 방법을 공유하는 게시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전세사기는 대부분 전셋값이 매매가를 웃도는 '깡통전세'에서 발생하는 만큼 낙찰 이후 매각은 또 다른 문제다. 특히 빌라와 근린생활시설 등 비아파트는 전세사기 사태 이후 수요가 크게 줄어 피해주택 상당수가 여전히 시장에서 외면받고 있다. 그사이 세제 지원 시계는 돌아가고 있다. 현행법상 전세사기 피해자가 피해주택을 취득하면 취득세와 등록면허세를 감면받을 수 있지만 관련 특례는 올해 말 종료된다. 집은 팔리지 않았는데 지원은 끝나는 상황이 현실이 될 수 있다. 전세사기 문제는 흔히 피해자 구제라는 관점에서만 논의된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집을 팔지 못해 발이 묶여 있는 이유는 결국 비아파트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셀프낙찰은 피해를 줄이는 수단일 뿐 출구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전세사기 문제가 불거진 지 4년. 이제는 셀프낙찰 이후도 들여다봐야 할 때다. 최근 정부는 비아파트 공급 확대와 규제완화 방안을 잇달아 내놓고 있지만, 비아파트 시장이 활력을 되찾지 못한다면 피해자들의 고통도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은 집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피해주택을 정리하고 다음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전세사기 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피해자를 집주인으로 만드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집을 떠날 수 있는 시장을 만드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 act@fnnews.com

[기고] '연결'의 시대, 다시 뛰는 부산·경남

최근 부산과 경남에는 다시 '연결'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산업과 물류, 도시와 사람이 다시 이어져야 한다는 공감대다. 지역은 지금 또 하나의 전환점 앞에 서 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앞서가느냐보다 어떤 방향으로 함께 움직이기 시작하느냐다. 세계의 물류지도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첨단산업 경쟁 심화 속에서 이제 물류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 인프라가 되고 있다. 최근 북극항로 가능성까지 현실화되면서 항로 변화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항로가 바뀌면 물류가 바뀌고, 물류가 바뀌면 산업과 투자 흐름 역시 달라진다. 지금 부산과 경남은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다. 가덕도신공항 건설과 진해신항 조성, 북극항로 논의까지 이어지며 동북아 물류 환경 자체가 새로운 전환기를 맞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를 얼마나 먼저 읽고 실제 성장동력으로 연결하느냐다. 결국 앞으로의 경쟁력은 개별도시 경쟁이 아니라 항만과 공항, 산업과 물류가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되느냐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부산은 이미 해상 물류 경쟁력을 충분히 입증해 왔다. 신항은 대한민국 컨테이너 물동량의 중심축이자 세계적 환적항만으로 성장했고, 부산·경남·울산으로 이어지는 동남권은 조선·자동차·기계 산업이 집적된 국내 최대 제조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제조와 물류 기반이 동시에 집적된 지역은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그러나 이제는 해상 물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반도체와 바이오, 인공지능, 로봇 같은 첨단산업일수록 속도와 공급망 안정성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글로벌 주요 물류 허브들도 항만과 공항, 철도를 유기적으로 연결한 복합물류 체계를 중심으로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그 변화의 핵심에 가덕도신공항이 있다. 2035년 개항을 목표로 추진 중인 가덕도신공항이 완공되면 부산·경남은 해상과 항공, 철도가 결합된 '트라이포트' 기반을 갖추게 된다. 여기에 2040년 개항 예정인 진해신항까지 더해지면 동남권은 생산과 물류, 유통과 산업이 연결되는 거대한 복합 플랫폼으로 확장된다. 단순한 인프라 확충을 넘어 기업의 투자 환경과 산업구조 자체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다음 달이면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장으로 취임한 지도 어느덧 1년6개월, 임기 반환점을 맞게 된다. 최근 지역의 변화 역시 결국 '연결'의 문제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산업과 물류, 기업과 행정, 부산과 경남이 하나의 흐름으로 움직일 때 비로소 새로운 성장도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 역시 이러한 변화에 맞춰 새로운 역할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 개발률은 이미 98%를 넘어섰다. 이제는 얼마나 넓게 개발하느냐보다 어떤 산업을 유치하고 어떤 기업과 함께 성장할 것인가가 더 중요해진 시점이다. 단순한 산업단지를 넘어 산업과 물류, 기술과 사람이 연결되는 플랫폼으로 변화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 역시 조직체계를 다시 정비했다. 이달부터 기존 2본부 4부 12과 체제를 2본부 1실 4부 14과 체제로 확대하고, 정원도 102명에서 110명으로 늘렸다. 투자유치와 기업지원 기능을 보다 세분하고 전략산업 대응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다. '혁신성장부' 신설과 기업지원 체계 개편을 통해 기업의 투자 결정부터 성장, 후속 투자까지 보다 유기적으로 지원하는 현장중심 행정을 강화하고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수도권 중심 구조 속에서 살아왔다. 많은 청년들이 기회를 찾아 지역을 떠났고, 지역은 인구감소와 산업 침체라는 어려움을 동시에 겪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부산·경남은 다시 한번 새로운 기회를 맞고 있다. 산업과 물류, 기술과 사람이 연결되는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부산·경남은 단순한 물류 거점을 넘어 대한민국 성장의 새로운 축으로 다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변화는 단순한 지역 개발을 넘어 대한민국 성장전략의 전환과도 맞닿아 있다.박성호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장

[fn광장] '퐁피두센터 한화'에 바란다

2026년 6월 4일 서울 여의도에 퐁피두센터 한화가 개관했다. 이는 우리가 아는 해외 유명 미술관의 분관 유치가 아니다. 이번 개관은 국제 문화기관과 국내 민간기업이 협력해 새로운 문화 인프라를 구축한 사례이자, 서울이 글로벌 문화 네트워크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정책적 사건으로 볼 필요가 있다. 퐁피두센터는 단순한 전시기관이 아니다. 1977년 개관 이후 현대미술, 디자인, 건축, 음악, 영상, 퍼포먼스를 아우르는 복합문화 플랫폼으로 기능하며 현대 문화기관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 왔다. 특히 미술관의 역할을 소장과 전시에 한정하지 않고 연구와 교육, 창작 지원, 국제교류까지 확장했다는 점에서 세계 문화예술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서울에 개관한 퐁피두센터 한화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퐁피두센터 한화는 스페인 말라가, 중국 상하이에 이은 세 번째 해외 거점이다. 이는 최근 서울이 국제 미술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상의 변화를 보여준다. 프리즈 서울 개최 이후 서울은 아시아 주요 미술시장으로 자리매김했으며 국제 갤러리와 컬렉터, 문화기관의 관심도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과거 국제 문화 콘텐츠를 수용하는 시장으로 인식되던 서울이 이제는 글로벌 문화 네트워크의 주요 거점으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파리 퐁피두센터 본관이 2030년까지 대규모 리노베이션에 들어간 상황에서 서울이 해외 거점으로 선택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번 프로젝트는 문화 인프라 구축 방식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국내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이 주로 후원과 협찬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퐁피두센터 한화는 장기간의 국제 협상과 공간 조성, 운영 전략이 결합된 프로젝트다. 문화예술을 일회성 사회공헌이 아닌 지속 가능한 문화자산으로 접근한 사례라는 점에서 향후 기업 메세나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건축적 측면 역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설계를 맡은 장 미셸 빌모트는 루브르박물관 리노베이션을 비롯, 세계 주요 문화공간 프로젝트를 수행한 건축가다. 퐁피두센터 한화는 전통 기와의 곡선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도 여의도라는 도시 맥락 속에서 개방적 문화공간을 구현하고자 했다. 이는 단순한 건축 디자인을 넘어 문화공간과 도시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제안으로 읽힌다. 그러나 퐁피두센터 한화의 진정한 가치는 개관 이후의 운영 방향에서 결정될 것이다. 파리 퐁피두센터가 세계적 영향력을 확보한 이유는 단순히 유명 작품을 소장했기 때문이 아니다. 새로운 예술 실험을 지원하고 신진 예술가를 발굴하며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이 교류하는 플랫폼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퐁피두센터 한화 역시 단순한 해외 명작 전시공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국제교류의 허브로서 국내 예술가와 해외 문화기관을 연결하고, 공동 연구와 공동 제작을 촉진하며, 차세대 창작자를 육성하는 역할까지 수행해야 한다. 특히 아시아 문화기관들과의 협력 네트워크를 확대함으로써 국제 문화교류의 실질적 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의 확산은 예술 창작 환경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오늘날 문화기관은 더 이상 작품을 소장하고 전시하는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지식과 창의성, 기술과 예술이 융합되는 실험의 장이자 미래 문화 담론을 생산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국제 문화기관의 브랜드를 유치하는 것만으로 문화 경쟁력이 확보되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을 통해 어떤 창작자를 성장시키고, 어떤 예술적 실험을 지원하며, 어떤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생산하느냐다. 퐁피두센터 한화 역시 세계적 명작을 소개하는 전시장을 넘어 창작과 연구, 교육과 국제교류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개방형 문화 플랫폼으로 발전해야 한다. 국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예술가와 연구자, 시민과 산업이 만나고 협력하는 혁신 생태계의 거점이 될 때 비로소 그 존재 이유가 완성될 수 있다. 퐁피두센터 한화의 개관은 하나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다. 결국 그 가치는 얼마나 많은 관람객이 찾았는가가 아니라 한국 문화예술 생태계에 어떤 변화와 기회를 만들어냈는가에 의해 평가될 것이다. 서울이 글로벌 문화 네트워크의 핵심 거점으로 성장할지,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가 국제 문화협력과 문화인프라 구축의 새로운 모델로 자리매김할지는 앞으로의 운영 역량과 장기적 비전에 달려 있다. 이상미 유럽문화예술콘텐츠 연구소장

[포럼] 李정부의 지역외교 전략

프랑스에서 올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열리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도 초청을 받아 참석하고 있다. 한국은 2020년 이후 꾸준히 G7 정상회의에 초청을 받았다. G7 초청이 높아진 한국의 위상을 보여준다는 말이 진부할 만큼 글로벌 무대에서 우리의 위상은 높고 견고하다. 높아진 위상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우리는 이런 위상에 걸맞은 적극적이면서도 치밀한 글로벌·지역 외교전략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의문도 든다. 한국의 지역외교전략과 비전은 탈냉전 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냉전 시기 한국은 강대국이 만든 냉전질서 속에 옴짝달싹하기 어려웠다. 개발도상국인 한국의 국가 역량은 한반도 문제 관리를 위한 외교도 벅찼고 적극적 지역 정책, 비전은 먼 이야기였다. 냉전이 끝나면서 비로소 우리 외교를 구속했던 냉전질서도 느슨해졌고, 이어진 경제성장과 민주화로 우리 외교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도 늘어났다. 한반도와 주변 4강을 넘어 더 넓은 지역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는 이런 배경에서 등장했다. 체제전환을 시작한 공산권 국가들과 적극적인 관계 수립을 통해 한반도 문제 관리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넘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려는 의도가 이 정책에 드러났다.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를 화두로 삼았다. 너무 빠른 확장이란 비판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후반의 빠른 경제성장과 민주화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글로벌 차원으로 눈을 돌린 외교 이니셔티브다. 1990년대 말 경제위기 속에 탄생한 김대중 정부는 경제위기 극복을 최우선으로 했다. 함께 위기를 맞은 동남아 국가들과 연대를 통한 위기극복을 지역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다. 아세안+3 등 동아시아 지역협력에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은 이런 지역외교 전략의 결과였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가 만든 남북 화해의 분위기를 계승하면서 높아진 한국의 위상을 동북아로 투영한 동북아 균형자론에 기반한 동북아중심국가 전략을 추진했다. 이어진 이명박 정부는 신아시아 이니셔티브를 주창했다. 아시아 전반으로 외교적 초점을 확대하면서 한국의 구체적인 경제이익 실현을 앞세운 중상주의적 지역외교 전략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다시 동북아로 회귀해 동북아평화협력구상, 그리고 후반에는 이를 북방으로 연장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지역외교 전략으로 삼았다. 격화되는 미중 전략경쟁 속에서 등장한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문제에 천착하면서도 아세안, 인도를 포함한 신남방정책과 북쪽으로 눈을 돌린 신북방정책을 펼쳤다. 주변 4강 외교를 벗어나 외교적 다변화라는 화두를 실천했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뒤를 이은 윤석열 정부는 인도태평양 정책을 앞세웠다. 이재명 정부는 강대국 경쟁에 강대국 일방주의, 글로벌 및 지역질서의 혼란이라는 복합적 위기를 항해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한국의 위상, 그 어느 때보다 혼란한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 지형은 향후 글로벌 질서, 지역의 미래와 질서를 어떻게 형성해갈지에 대한 한국의 구체적 비전과 전략을 그 어느 때보다 필요로 한다. 이런 시대적 요구에 답할 수 있는 이재명 정부의 지역외교전략이 긴요하다는 것은 필자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