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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베트남 농산물 판매의 역설

베트남내 여러 농업협동조합은 미국·일본·유럽 등 기준이 까다로운 선진국 시장에 다양한 농산물을 수출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선진국 수출 기준을 충족한 이러한 농산물이 베트남 내수시장에서는 판매가 부진하다. 람동성에서 용과를 생산하는 호아레 농업협동조합은 생산된 용과가 베트남 유기농 기준(VietGAP)을 충족해 생산량의 80% 이상을 중국, 유럽, 일본 등으로 수출하고 있지만, 베트남 국내 시장에서 판매되는 용과는 수출용만큼 인기가 높지 않다. 즉, 생산한 농산물이 세계 여러 시장의 수출 기준을 충족한다면 국내 소비도 더 수월해야 하나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가격인데, 가격은 베트남 소비자의 구매결정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동탑성 호아록 모래망고 협동조합에 따르면, 호아록 모래망고의 가격은 일반적으로 kg당 약 7만₫으로, 태국·인도·중국 등에서 수입되는 망고보다 ㎏당 약 2만동 비싸다. 베트남 소비자들은 구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비싼 가격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즉, 여러 농업협동조합들이 수출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투자를 확대함에 따라 상승된 생산 비용으로 인해 판매 가격이 높아지면서 국내 판매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역설은 수출 기준을 충족하는 제품들이 베트남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베트남 사람들은 껍질이 검게 변한 잘 익은 바나나를 선호하는데, 이는 잘 익은 바나나가 더 달콤하고 향이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 소비자들은 껍질이 단단한 덜 익은 바나나를 더 선호하는데, 이는 덜 익은 바나나가 건강에 좋은 영양소가 더 많이 함유되어 있고 신선하고 안전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또한, 수출용 자몽과 오렌지는 신선해야 하지만, 베트남 소비자들은 약간 시든 자몽과 오렌지를 선호한다. 셋번째 이유는 수출은 주로 기술 표준 충족에 초점을 맞추면 되지만, 국내 판매는 소비자의 인식과 구매 습관이 더 우선하기 때문이다. 해외 고객들은 원산지·균일성· 포장 규격 등 일반적으로 명확한 기준 체계에 따라 농산물을 구매한다. 즉, 그들은 단순히 농산물을 사는 것이 아니라 품질 시스템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 소비자들은 해당 농산물이 선진국의 수출 기준을 충족하더라도 포장이 매력적이지 않거나 브랜드 인지도가 약하거나 차별성이 부족하다면 선택하지 않는다. 또한, 다양한 농산물이 전통시장·온라인·슈퍼마켓 등 다양한 유통채널을 통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다른 대안을 쉽게 찾을 수 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농산물이 풍작을 이루고 품질은 전혀 떨어지지 않음에도 가격이 하락하는 경우가 있다. 이제 베트남 농업협동조합은 농산물 생산 뿐만 아니라 브랜딩·유통체계 강화 등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품질은 단순히 필요조건일 뿐이고, 이제는 소비자가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사설]기업간 AI 격차 방치하면 산업 생태계에 피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인공지능(AI) 활용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AI의 산업 적용이 확산될 조짐이다. 그런데 중소기업의 AI 활용이 기대 이하라면 인공지능 전환(AX)도 더딜 수밖에 없다. 대한상공회의소 경제연구원이 11일 내놓은 '생성형 AI 활용의 대·중소기업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AI 격차가 다방면으로 나타나고 있다. 생성형 AI 활용률은 대기업이 66.5%인 반면 중소기업은 52.7%에 그쳐 13.8%p의 격차를 보였다. 더 심각한 것은 제조업에서의 격차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점이다. 서비스업의 대·중소기업 AI 활용 격차는 9.2%p에 불과하지만 제조업은 무려 24.2%p에 이른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차이도 뚜렷해 수도권 중소기업 활용률(57.3%)이 비수도권(47.8%)을 크게 앞선다. 우리 경제의 허리를 떠받치는 제조업 중소기업과 지방 중소기업이 AI 활용의 사각지대로 놓여 있다는 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대기업만 잘하면 낙수효과로 중소기업도 혜택을 볼 것이란 생각은 철 지난 사고에 불과하다. 특히 AI는 과거의 신기술 등장 상황과 현격하게 다르게 생산성과 경쟁력을 가르는 핵심 변수로 작동하고 있다. 우선 산업 생태계의 균열이 가속화될 우려가 크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공급망으로 촘촘히 연결돼 있다. 대기업이 AI로 공정 효율화와 품질 혁신을 이룬 반면, 협력 중소기업이 전통적 방식에 머문다면 품질의 안정성과 생산일정 조절이 어려울 것이다. 지역 간 불균형 발전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나라 상당수 영세 중소기업들은 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AI 전환이 수도권 대기업 중심으로만 진행되고 비수도권 제조업 중소기업의 AI 활용률은 낮다. 이럴수록 AI가 지역 간 경제 격차를 더욱 크게 벌리게 될 위험이 크다. 결국 미래 경쟁력을 갖춘 산업 생태계를 만들려면 중소기업을 위한 AI 지원을 아낌없이 해줘야 한다. 다만 물질적 지원으로 중소기업의 AI 경쟁력이 무조건 개선되는 건 아니다. 이번 조사에 따르면 AI로 절감한 시간을 대기업 근로자는 '새로운 프로젝트와 업무 수행'에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중소기업 근로자는 '업무 외 휴식과 개인시간 확보'에 쓴다는 결과가 있다. AI를 활용하더라도 미래 역량 축적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라는 뜻이다. AI는 이미 국가의 산업 경쟁력을 결정짓는 기반 인프라가 됐다. 전기나 인터넷처럼 AI를 자유자재로 활용하지 못하면 기업은 경쟁에서 도태되는 시대를 맞고 있다. 그런 글로벌 플레이어에서 대기업만 중요한 게 아니다. 대기업과 동반성장하는 협력 파트너인 중소기업의 AI 경쟁력도 끌어올려야 한다. 이런 점에서 중소기업을 위한 AI 지원은 단순한 시혜가 아니라 대한민국 경제 전체를 위한 전략적 투자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사설]반도체 이전, 균형발전책이라도 결정권은 기업에

정부와 일부 대기업들이 수도권에 집중된 반도체 생산거점을 충청·호남권으로 분산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한다. 오는 29일 청와대에서 열릴 이재명 대통령과 주요 그룹 총수 간담회에서 이런 방안이 공개될 것이라는 것이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수요 급증에 따라 반도체 공장을 신설 또는 증설할 계획인데 광주·전남 장성, 충남 온양 등을 후보지로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는 첨단 패키징 후공정 공장을 광주특별시에 설립하고, SK하이닉스도 패키징을 비롯한 일부 후공정 시설을 호남에 지을 수 있다는 구체적인 관측도 나오고 있다. 두 반도체 기업의 이런 구상은 정부의 국토 균형발전 계획과도 맞물려 있다. 정부는 이른바 '5극 3특'이라는 이름으로 지역발전 계획을 추진 중이다. 수도권 집중을 해소하고 인구 급감으로 소멸위기에 몰린 지방을 되살리겠다는 취지다. 반도체 기업들의 호남 등지 이전은 그런 의미에서는 이유가 충분하다 할 것이다. 호남 지역은 태양광·해상풍력을 이용한 전력 생산량이 풍부하고 땅값도 저렴해 부지 확보도 용이하다고 한다. 해남 솔라시도에는 이미 삼성 주도로 2조5000억원 규모의 국가 인공지능(AI) 컴퓨팅센터가 추진되고 있어 시너지 효과도 볼 수 있다. 수도권과 영남 지역에 비해 산업시설이 부족한 호남에 반도체 공장이 들어서면 지역발전을 위한 성장엔진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차그룹도 새만금을 AI 데이터센터와 로봇 제조시설, 수소 인프라 등을 포함한 미래산업의 거점으로 검토하고 있다. 다만 이런 논의는 정부가 주도할 것이 아니라 기업에 최우선의 결정권을 줘야 한다. 기업으로서는 가까운 지역 또는 한곳에 공장들과 협력업체들이 모여 있어야 의사결정과 전체적인 운영이 유리할 것이다. 입지가 나쁜데도 정부의 강권으로 어쩔 수 없이 이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최종 판단은 기업에 맡겨야 한다. 균형발전은 필요하지만 아무래도 지역은 인재 확보와 협력업체와의 소통, 교통 문제 등에서는 불리하다. 수도권 집중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기업들이 수도권을 선호하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영남 지역의 역차별이다. 반도체 기업의 양대 산맥인 두 대기업이 모두 호남 지역을 신규 투자처로 정한 것은 정치적 고려가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살 수 있다. 일부 여당 인사들은 최근 용인반도체 산단을 새만금 등 호남 지역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해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물론 호남 지역의 산업시설이 부족한 것은 맞지만 일부 지역을 대상으로 한 일방적인 지원 또한 균형발전에 역행한다. 정부는 지난해 말 남부권 반도체 혁신벨트 구축 전략을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경북 구미의 소재·부품 단지도 포함돼 있다. 이번 논의와는 상관이 없지만 추경호 대구시장 당선인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반도체 팹 유치를 핵심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다. 균형발전은 국가적 과제이지만 이런 복잡한 문제들을 고려해서 추진해야 한다. 기업 운영의 효율성을 도외시하고 정치적 논리로 공장 입지가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이다. 5극3특의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다.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 지역에 적합한 업종을 선택하고 기업의 의견을 존중하기 바란다.

[강남視角] 유료방송 살릴 골든타임

장자(莊子)가 지역 토호인 감하후를 찾아갔다. 밥을 굶고 있으니 곡식을 꿔달라고 요청했다. 감하후는 "나중에 세금을 받아 선생에게 300금을 빌려드리면 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기분이 상한 장자는 "제가 어제 이리로 올 때 나를 부르는 자가 있었다"며 운을 뗐다. 수레바퀴 자국 속 고인 물에 빠져 있던 붕어가 자신을 다급하게 불렀다는 것이다. 붕어는 장자에게 "나는 동해 파도에서 튕겨져 나온 바다신의 신하"라며 "물 한 바가지만 부어 나를 살려달라"고 빌었다. 장자는 "내가 오나라와 초나라 왕을 만나러 가는데, 그때 가서 서쪽 강의 물을 끌어다 댈 테니 그러면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붕어는 이 말을 듣고 발끈 성을 냈다. "나는 물 한 바가지만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는데, 당신이 이처럼 말하니 차라리 일찌감치 나를 건어물 가게에서 찾는 편이 더 나을 것이오." 당장의 생존 위기에 처했던 장자에게 지역 토호가 나중에 돈을 주겠다고 핑계를 대자 장자가 해준 말이다. 동양 고전 '장자'의 '외물'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우화는 수레바퀴 자국 속의 붕어, 즉 '학철부어( )'라는 사자성어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 케이블TV와 IPTV 등 유료방송 업계가 처한 상황이 여기에 딱 맞는 형국이다. 적절하고 시급한 도움이 필요한 때에 정부와 정치권에선 시간이 걸리는 거대정책 논의만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케이블TV 업계 관계자는 "우린 다 응급환자인데 의사들이 몇년째 치료방법만 고민하고 있다"면서 "업계에서 누구 하나 쓰러지는 걸 봐야 정부가 관심을 가질 것 같다"고 토로했다. 케이블TV 업계의 영업이익은 바닥 상태다.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에 따르면 케이블TV 전체 영업이익은 2017년 3486억원에서 2024년 148억원으로 95.8% 줄었다. 케이블TV 전체 제작비는 1258억원으로 제작비가 영업이익의 8.5배 수준이다. 영업이익이 줄어든 가장 큰 원인은 기형적인 비용구조와 역차별이다. 유료방송사들은 가입자와 매출이 줄어든 상태에서 콘텐츠사업자(CP)들과의 협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LG헬로비전은 스포츠 전문채널 '스포티비'(SPOTV) 송출을 7월부터 중단키로 했다. 양측은 방송사 매출과 해당 채널의 시청률 기여도 등에 따른 대가 협상을 해온 끝에 서로 양보하지 못하고 송출중단에 이르게 됐다. 이미 수년 전부터 발생했던 케이블TV(SO)와 방송채널사업자(PP)의 갈등이 현실화된 모양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와의 '기울어진 운동장'도 꾸준히 문제로 거론된다. 매출 대비 콘텐츠 비용의 비중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치솟았지만 규제 형평성은 완전히 무너진 상태다. 유료방송사들은 매년 의무적으로 막대한 방송통신발전기금(방발기금)을 내며 공적 재원을 분담하고 있지만, 미디어 시장의 포식자가 된 OTT는 방발기금 징수 대상에서 빠져 있다. 여기에 유료방송을 옥죄고 있는 낡은 광고 규제, 결합상품 규제, 꽁꽁 묶인 요금제 규제 등은 수년째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적자 상태에서도 방발기금을 꼬박꼬박 내는 현재 구조로는 케이블TV사업이 오래가기는 어렵다. 경쟁이 어려우면 도태되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도 합당해 보일 수 있다. 다만 지역 정보전달의 공공재 역할까지 하는 케이블TV업계로선 억울함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주무기관인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는 제도 전반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방발기금 체계를 검토 중이라고 한다. 특정 업계만 방발기금을 인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업계에선 올해에도 방발기금 감면 자체는 물 건너간 것으로 보고 있다. 시장에서 이미 많은 플레이어들이 사라진 후 시스템이 개편되면 그 개편 효과는 얼마나 될지 주무기관 입장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완벽한 대책'이 이상적이겠지만, 죽어가는 업계 입장에선 당장 '한 바가지의 물'이 더 필요한 법이다. ksh@fnnews.com

[테헤란로] 국민연금의 최우선 과제는

국민연금은 단기적 증시 수급이나 여론에 좌우되지 않도록 기금운용의 재무적 전문성과 의사결정 독립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거버넌스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최근 기금운용위원회가 국내주식 목표비중을 높이고 전략적자산배분(SAA) 허용 범위를 한시적으로 확대하며 시장 내 기계적 매도 압력을 완화하려 한 조치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중장기 자산배분 원칙 측면에서 보면 한계가 분명하다. 국민의 노후자금을 운용하는 기관으로서 보다 중요한 것은 단기 대응이 아니라 일관된 리스크 관리체계다. 기금의 중장기 자산배분 전략이 장기 재무분석 대신 시장 수급이나 정책 요구에 이끌려 사후 조정되는 관행이 반복된다면 포트폴리오 분산 원칙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국내주식 등 특정 자산군의 비중을 단기에 상향 조정해 위험 노출도(익스포저)를 넓혀 놓은 상황에서 시장 조정 장세가 도래하면 기금 전체 손실 위험이 커지고 국민연금 자산배분 신뢰도 약화될 수 있다. 국내주식 비중 확대는 성과 측면에서는 단기 수익률을 끌어올렸지만 자산배분 원칙 측면에서 논쟁의 여지가 크다. 올해 3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투자 규모는 320조9000억원으로 기금적립금의 21.0%를 차지했다. 국내 증시 급등으로 실제 비중이 기존 목표비중을 웃돌자 기금위가 이를 사후적으로 현실화한 셈이다. 시장 환경도 우호적이지 않다. 이달 1~9일 코스피 일평균 거래량은 5억1176만주로 집계됐다. 올해 1~5월 일평균 거래량(8억6920만주)과 비교하면 40% 넘게 줄어든 수치다. 지난 8~9일에는 코스피가 하루 만에 8.29% 급락했다가 이튿날 8.19% 급등하는 등 이례적인 변동성을 보였다. 이로 인해 '공포지수'로 불리는 코스피200 변동성지수(VKOSPI)는 91.23까지 올랐다. 거래량이 줄고 변동성이 커진 국면에서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비중 상향은 시장 안정 효과와 운용 안정성 훼손 가능성을 동시에 낳는다. 문제는 어느 쪽이 더 큰가가 아니라 그 판단이 장기 재무분석과 위험관리 원칙에 따라 이뤄졌는지에 있다. 결국 국민연금이 단기적인 시장 안정 수단으로 활용되는 구조적 모순을 끊어내는 것이 핵심과제다. 이를 위해서는 기금위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 구조를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변동성이 상수로 자리 잡은 시장 환경에서 국민의 노후자산을 지키는 방법은 단기 처방이 아니라 원칙에 기반한 자산배분과 철저한 위험 관리에 있다. elikim@fnnews.com

[fn광장] 말의 무게, 말의 품격

오래전 일본 중부 소도시 닛코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곳을 보지 않고서는 일본을 봤다고 말하지 말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닛코의 풍광은 아름답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쇼구(東照宮)는 물론 일본 3대 폭포의 하나인 게곤폭포, 산중 호수 주젠지코 등 볼거리가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은 도쇼구 내 작은 마굿간 앞이다. 이 마굿간 처마 아래 조각된 세 마리 원숭이, 즉 산자루(三猿)를 보기 위해서다. 세 마리 원숭이는 각기 다른 표정과 모습을 하고 있다. 한 마리는 양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다른 한 마리는 두 귀를 가렸다. 또 다른 한 마리는 오른손으로 입을 막고, 왼손으로는 오른손을 꾹 누르고 있다. 이 모습은 '논어' 안연편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제자 안연이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는 "자기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공자님 말씀을 잊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아니, 어쩌면 인류는 지난 수천년 동안 이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지 모른다. 특히 누구나 자신의 말과 생각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할 수 있는 오늘날에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지금 말이 너무 많은 시대를 살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밤사이 쏟아진 SNS 게시글과 댓글이 인터넷을 뒤덮고 있다. 정치인의 막말이 뉴스가 되고, 연예인의 경솔한 발언이 도마에 오르며, 익명 뒤에 숨은 악성 댓글은 누군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힌다. 여기엔 남과 여, 노와 소, 여와 야가 따로 없다. 모두가 말하고, 모두가 분노하고, 모두가 상대를 가르치려 든다. 구화지문(口禍之門)이라는 말이 있다. 입은 재앙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뜻이다. 당나라 말기 재상 풍도는 '설시(舌詩)'에서 "혀는 자신의 몸을 자르는 칼"이라고 했다. 칼은 본래 남을 향해 휘두르는 것이지만, 말이라는 칼은 결국 자신을 먼저 베고 만다.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내뱉은 말 한마디가 평생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되고, 충동적으로 올린 SNS 글 하나가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경우를 우리는 숱하게 봐왔다.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정치권의 막말 논란도 마찬가지다. 상대 진영을 향한 조롱과 비난은 갈수록 거칠어지고, 한순간의 실언이 정책과 비전을 집어삼키기도 한다. 그때마다 당사자들은 "진의가 왜곡됐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해명하지만 이미 시위를 떠난 말화살은 되돌릴 수 없다. 정치인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기업인은 과거 발언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유명인은 오래전 SNS 게시물 때문에 사과문을 올린다. 더 큰 문제는 SNS가 말의 속도를 너무 빠르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실수로 한 말이 그 자리에 있는 몇 사람의 기억 속에 남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손가락을 몇 번만 움직이면 말과 글이 빛의 속도로 퍼져나간다. 말은 빨라졌지만 생각은 짧아졌다. 숙성되지 않은 말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다. "트위터는 인생 낭비다"라고 말한 사람은 전설적인 축구 감독 알렉스 퍼거슨이다. 그는 웨인 루니가 SNS에 막말을 쏟아내며 물의를 일으키자 "인생에서 트위터 말고 할 수 있는 게 백만가지는 있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기업 구글을 이끌었던 에릭 슈밋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인생은 반짝이는 모니터 속에서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하루 한 시간쯤은 스마트폰의 전원을 끄라고 권유했다. 역설적이게도 디지털 시대를 이끈 사람들이 디지털 과잉을 가장 먼저 경계한 셈이다. 옛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그 해답을 알고 있었다. 과언무환(寡言無患), 말이 적으면 근심이 없고, 신언무우(愼言無尤), 말을 삼가면 허물이 없다고 여겼다. 생전의 법정 스님은 "사람은 모두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태어난다"며 "어리석은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여 그 도끼로 자신을 찍고 만다"고 했다. 한 사람의 됨됨이를 뜻하는 한자 품(品)은 입 구(口) 세 개가 쌓여 이뤄진 글자다. 품격이란 결국 쌓이고 쌓인 말의 탑이라는 얘기다. 도쇼구 마굿간 처마 아래 세 마리 원숭이는 오늘도 묵묵히 같은 모습으로 전 세계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하나는 눈을 가리고, 하나는 귀를 막고, 하나는 입을 막고 있다. 사람들은 산자루를 관광명소쯤으로 여기지만 어쩌면 그 원숭이들은 수백년 동안 같은 경고를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보지도, 듣지도 말 것까지야 없지만 본 것을, 들은 것을 모두 말할 필요는 없다고.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투표율보다 '공정·신뢰'가 먼저… 선거 패러다임 바꿀 때 [논설실의 뉴스 진단]

6·3 지방선거의 가장 극적인 드라마는 충남도의원 논산시 제1선거구에서 나왔다. 개표 마감 결과 더불어민주당 기호엽 후보와 국민의힘 윤기형 후보가 1만1592표를 획득하며 '동점'을 기록했다. 재검표를 통해 무효표 중 기 후보가 2표, 윤 후보가 1표를 추가로 얻으면서 '단 1표' 차로 기 후보가 승리했다. 유권자의 '한 표'가 지닌 무게가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당신의 한 표가 역사를 바꾼다"는 구호가 진부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 느끼게 된다. 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투표지 부족 사태'는 이처럼 신성한 주권자의 '한 표'에 먹칠을 한 것이다. 항의집회가 계속되는 등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재선거, 국정조사, 특검 등 주장도 백가쟁명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선거 관리로 국민의 참정권이 훼손된 중대한 사태의 구조적 문제점과 가능한 대안을 진단해 본다. ■국민의 참정권을 훼손한 선거 참사 2026년 6·3 지방선거는 헌정사상 초유의 '투표지 부족 사태'로 얼룩지며 K-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서울 송파 등 전국 여러 투표소에서 본투표 당일 발생한 투표지 부족 사태는 단순 관리부실이 아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구조적 문제와 오판이 부른 참사이다. 선관위는 예산을 전년 대비 110% 이상 받았지만 본투표 용지 인쇄 하한선을 유권자의 50%로 하향 조정했다. 잔여 투표지 폐기비용 절감과 보관 과정에서의 탈취·유실 위험 제어라는 명분이었다. 남은 투표지가 부정선거 음모론에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격전지나 특정 지역의 투표율 변동 상황 등을 유기적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탁상행정이었다. 투표하지 못한 유권자는 물론 출구조사 발표 후 투표한 유권자의 참정권은 심각하게 침해되었다. 부정선거론 불씨에 기름을 부은 일이기도 하다. 노태악 중앙선관위원장·허철훈 사무총장 등이 사퇴하고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했지만, 붕괴된 선거행정의 신뢰는 회복이 어렵다. 투표지가 없어 국민주권이 훼손되는 사태가 발생한 자체가 대한민국 선거 관리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선관위 역사로 본 선거 관리의 헌법적 가치 대한민국 헌법이 선거관리위원회를 독립된 헌법기관으로 만든 것은 뼈아픈 역사적 경험의 산물이다. 건국 초기 선거행정은 내무부 소관으로 권력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권력이 선거 과정을 장악한 귀결이 1960년 3·15 부정선거였다. 당시 정권은 공무원 동원, 사전투표 조작, 투표함 바꿔치기 등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결국 4·19혁명이라는 국민적 저항과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선거위원회(1961년 제3차 개헌), 선거관리위원회(1962년 제5차 개헌)라는 독립적 기구를 창설한 것은 유혈의 교훈이 바탕이 되었다. 현행 헌법 또한 제7장에서 선거관리위원회를 독립된 합의제 헌법기관으로 규정하고 있다. 선거 관리는 국민주권을 실현하고 민주공화국 체제를 지탱하는 가장 핵심적인 인프라이다. 전기가 끊기면 천지가 암흑이 되듯, 선거 관리가 무너지면 민주국가의 정당성 자체가 사라진다. 선관위의 독립성은 견제 없는 권력에 안주하라는 특권이 아니다. 외부 압력에 흔들리지 말고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환경을 유권자에게 제공하라는 엄중한 '헌법적 명령'이다. ■독립성 방패 뒤의 모럴 해저드 오늘날 선관위는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의 방패 뒤에 숨어 외부의 감시를 거부하는 '폐쇄적 관료조직'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이번 사태 기저에는 견제받지 않는 조직 특유의 도덕적 해이와 무사안일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지방선거를 앞둔 올 5월 선관위 휴직자는 176명, 6월에는 181명이었다. 대선과 지선이 있었던 2022년(200명 이상 휴직)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선거가 없던 2021년 2월 휴직자는 84명이었다. 본연의 업무에 집중해야 할 선거철에 직원들의 대거 휴직은 의도적 도피로 볼 수밖에 없다. 투표지 부족 사태나 소쿠리 투표 논란, 사전투표 관리 부실 등 선거 참사는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휴직 공백'이 '특혜 채용'으로 이어지는 구조도 일상화되었다. 선거철 휴직 공백은 선관위 내부의 '경력자 채용' 제도를 악용하는 빌미가 되었다. 선거철 휴직자 대거 발생→지역 선관위 인력 부족→비공개 또는 형식적 공개 경력 채용→고위직 자녀 등의 '부모 찬스' 입사로 이어지는 것이다. 감사원에 따르면 선관위에는 조직적인 특혜 정황이 만연했다. 직원 자녀 채용을 위해 내부 공고를 숨기거나 맞춤형 채용공고를 내고 면접관을 동료들로 구성하는 방법 등이다. '신의 직장' 세습을 위해 휴직 공백과 인사권을 결탁한 것이다. '선관위는 가족회사'라는 말이 쉽게 나올 만큼 선관위 구성원의 특권의식과 도덕적 해이 정도는 심각하다. 선관위 문제의 근본적 원인으로는 '외부 감시가 없는 폐쇄성'과 '비상근 위원장 체제'가 꼽힌다. 선관위는 헌법상 독립기관이라는 이유로 감사원 등 외부의 견제를 거부함으로써 '제 식구 감싸기'와 '가족 회사화'가 가능했다. 중앙선관위원장은 대법관이, 각급 선관위원장은 지역 법원장 등이 겸직한다. 본업인 재판이 있다 보니 비상근 위원장의 조직 장악력과 책임성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내부 승진한 '사무총장'이 전권을 행사하면서 '그들만의 리그'가 형성될 수 있었다. 선관위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의 명령은 명확하다. 각급 선관위원장의 상근화, 외부 감사 수용, 선관위 직원의 외부교류 등 해체 수준의 전면적 개혁입법 조치를 단행해야 한다. 중립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의 사무 분야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를 즉각 실시하도록 공직선거법과 감사원법 등을 정비해야 한다. ■사전투표 제도의 구조적 결함과 신뢰의 위기 투표지 부족 사태의 핵심 원인 중 하나는 사전투표와 본투표 간의 자원배분 및 예측 실패였다. 2013년 도입된 사전투표 제도는 투표율 제고와 국민편의 증진이라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반면 해를 거듭할수록 선거행정의 불신을 가중시키는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다. 현행 사전투표는 어디서나 사전 신고 없이 투표할 수 있는 '통합선거인명부' 체제에 기반한다. 이 제도는 본투표 당일 특정 지역 투표소 인구 이동률이나 투표 수요의 예측을 방해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더 중대한 문제는 사전투표 관리 과정의 사회적 불신이다. 사전투표 종료 후 투표함을 별도 장소에 보관·이송하는 과정은 끊임없는 부정선거 음모론의 먹이가 되어왔다. 현재의 극단적 진통 역시 사전투표와 선관위에 대한 누적된 불신의 표출이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축제인 선거가 불신과 갈등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면, 제도를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마땅하다. 이번 선거의 경우 사전투표 첫날인 지난달 29일과 6월 3일 사이에 5일의 간극이 있다. 여론 추이가 변할 수 있고, 후보자의 자질과 문제점이 뒤늦게 드러날 수도 있으며, 후보 사퇴 등 상황 변화도 있을 수 있다. 동일한 시점에서 유권자의 의사가 집약되어야 한다는 원칙 훼손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도 사전투표는 폐지가 바람직하다. 2025년 발표된 '펜앤여론조사'에 따르면 "사전투표 폐지"가 44.9%, "유지해야"가 49.2%였다. 미디어디펜스 조사는 "폐지" 44.6%, "유지" 50.1%로 나타났다. 유지 의견이 약간 높지만 10년 넘게 시행된 사전투표 제도에 대한 불신 여론이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투표율이 높으면 특정 진영에 유리하다는 신화도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이번 선거도 지방선거로서는 비교적 높은 투표율을 보였지만 특정 진영의 유불리로 작용하지 않았다. ■외국의 선거 관리 사례가 주는 시사점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은 투표율보다 선거 과정의 엄밀성과 투명성을 중시한다. 프랑스는 선거조작 가능성과 이송 과정의 불투명성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사전투표 및 우편투표 제도를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선거 당일 투표가 불가능한 유권자는, 사전에 공증을 거쳐 신뢰할 수 있는 대리인이 표를 행사하는 엄격한 '대리투표 제도'를 운영한다. 편의성을 희생하더라도 선거의 정당성과 신뢰성을 100% 확보하겠다는 결단이다. 대만은 당일 투표·당일 현장 수개표를 원칙으로 한다. 세계적인 정보기술(IT) 강국이지만 대만은 부정한 개입 소지를 차단하기 위해 사전투표를 허용하지 않는다. 유권자는 선거일 당일 자신의 호적지에 지정된 투표소에서만 투표해야 한다. 투표 마감 즉시 투표소를 개표소로 전환, 현장에서 투표지를 한 장씩 들어 올리며 육성으로 기표 결과를 외치고 칠판에 바를 정(正) 자를 적어 개표하는 '현장 수개표'를 관철한다. 이송 과정이 없으므로 투표지 바꿔치기 등의 음모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독일은 과거 베를린 일부 선거구에서 투표용지 배부 오류 등으로 마감시간 이후에 투표가 진행되는 혼선이 발생하자, 연방헌법재판소가 해당 지역의 재선거를 명한 바 있다. 유권자의 평등권과 선거의 공정성이 오염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선거 과정의 완결성이 민주주의의 성패를 가르는 절대적 기준임을 보여주는 명확한 사례다. ■사전투표 폐지와 '복수 선거일' 전향적 대안 현행 사전투표 제도는 득보다 실이 많음이 통계적·경험적으로 증명되었다. 이제 우리는 편의주의의 맹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투표율 제고보다 선거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높일 수 있는 대안을 검토해야 한다. '사전투표 폐지 및 복수 선거일' 제도가 좋은 대안이다. 사전투표 대신 금요일과 토요일, 혹은 일요일과 월요일 형태로 연속된 '2일간의 본투표일'을 정하는 방안이다. 유권자는 사전투표라는 불확실한 변수 없이, 주소지의 지정 투표소에서 선거일 중 하루를 택해 투표하게 된다. 투표함을 이송하지 않고, 투표소를 개표소로 전환하는 것도 검토해야 할 대안이다. 이런 제도는 우선 투표소별 선거인 명부와 한계 수량이 완벽하게 고정된다. 선관위가 투표지 숫자를 잘못 예측하여 유권자를 돌려세우는 참사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투표 마감 후 투표함을 며칠씩 다른 장소에 보관할 필요 없이, 투표 종료 후 현장에서 즉각 개표를 하거나 완벽하게 통제된 당일 이송이 가능해져 음모론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 충분한 투표 기간 확보로 유권자의 참정권을 현재 수준으로 보장할 수 있다. ■맺음말 선거는 단순한 행정 서비스가 아니다. 국민이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신성한 계약이다. 6·3 지방선거의 투표지 부족 사태는 선관위의 독점적 관료주의와 편의성만을 좇던 우리 선거제도에 대한 경고장이다. 부정선거 여부는 수사와 국정조사 등을 통해 밝혀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특권조직이 된 선관위를 수술대에 올리고, 선거 불신의 온상이 된 사전투표를 폐지하여 선거의 헌법적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진영논리와 당리당략을 떠나 지금 대한민국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개혁과제이다. dinoh7869@fnnews.com 노동일 주필

국민연금 비중 조정의 역설 [테헤란로]

[파이낸셜뉴스] 국민연금은 단기적 증시 수급이나 여론에 좌우되지 않도록, 기금운용의 재무적 전문성과 의사결정 독립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거버넌스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최근 기금운용위원회가 국내주식 목표비중을 높이고 전략적 자산배분(SAA) 허용 범위를 한시적으로 확대하며 시장 내 기계적 매도 압력을 완화하려 한 조치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중장기 자산배분 원칙 측면에서 보면 한계가 분명하다. 국민의 노후 자금을 운용하는 기관으로서 보다 중요한 것은 단기 대응이 아니라 일관된 리스크 관리 체계다. 기금의 중장기 자산배분 전략이 장기 재무 분석 대신 시장 수급이나 정책 요구에 이끌려 사후 조정되는 관행이 반복된다면 포트폴리오 분산 원칙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국내주식 등 특정 자산군의 비중을 단기에 상향조정해 위험 노출도(익스포저)를 넓혀 놓은 상황에서 시장 조정 장세가 도래하면, 기금 전체 손실 위험이 커지고 국민연금 자산배분 신뢰도 약화될 수 있다. 국내주식 비중 확대는 성과 측면에서는 단기 수익률을 끌어올렸지만, 자산배분 원칙 측면에서 논쟁의 여지가 크다. 올해 3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투자 규모는 320조9000억원으로 기금적립금의 21.0%를 차지했다. 국내 증시 급등으로 실제 비중이 기존 목표비중을 웃돌자, 기금위가 이를 사후적으로 현실화한 셈이다. 시장 환경도 우호적이지 않다. 이달 1~9일 코스피 일평균 거래량은 5억1176만주로 집계됐다. 올해 1~5월 하루 평균 거래량(8억6920만주)과 비교하면 40% 넘게 줄어든 수치다. 지난 8~9일에는 코스피가 하루 만에 8.29% 급락했다가 이튿날 8.19% 급등하는 등 이례적인 변동성을 보였다. 이로 인해 '공포지수'로 불리는 코스피200 변동성지수(VKOSPI)는 91.23까지 올랐다. 거래량이 줄고 변동성이 커진 국면에서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비중 상향은 시장 안정 효과와 운용 안정성 훼손 가능성을 동시에 낳는다. 문제는 어느 쪽이 더 큰가가 아니라, 그 판단이 장기 재무 분석과 위험관리 원칙에 따라 이뤄졌는지에 있다. 결국 국민연금이 단기적인 시장 안정 수단으로 활용되는 구조적 모순을 끊어내는 것이 핵심 과제다. 이를 위해서는 기금운용위원회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 구조를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변동성이 상수로 자리 잡은 시장 환경에서 국민의 노후 자산을 지키는 방법은 단기 처방이 아니라, 원칙에 기반한 자산배분과 철저한 위험 관리에 있다.  elikim@fnnews.com 김미희 기자

[사설]청년채용 기업에 인센티브, 근원적 처방 찾아야

정부가 일자리를 늘리면서 투자를 병행하는 기업에 여러 인센티브를 제공할 것이라고 9일 발표했다. 이날 청년정책 관계장관회의를 통해 공개된 '기업지원-일자리 연계형 재정 지원방안'에 따르면 청년·지역인재 채용실적에 맞춰 정부가 기업 보조금과 정책자금 우대 금리 등 혜택을 주겠다는 것이다. 국비 지원으로 훈련을 받은 청년 인공지능(AI) 인재를 중기와 소상공인의 AI 전환 지원과 연결하겠다는 구상도 방안에 들어있다. AI 확산으로 고용 없는 성장에 대한 우려가 날로 커지고 있다. 정부 방안은 고용난 해소에 부분적으로 도움이 될 순 있다. 청년실업, 지역 공동화 해법을 기업 인센티브로 풀겠다는 의도인데 해 볼만한 시도다. 우리 사회의 청년 고용난은 이미 고질적 병폐가 됐다. 지난 4월 기준 청년층 고용률은 24개월 연속 하락했다. 금융위기 이후 최장기 감소세였다. 시장 밖으로 밀려난 청년은 갈수록 늘고 있다. 무기력한 상태의 '그냥 쉬었음' 청년층이 40만명에 이른다. AI 전환은 청년 고용난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 AI가 가장 먼저 대체하는 일이 신입직원의 현장 기초업무다. 자료 조사, 문서 작성, 코딩 보조, 고객 응대, 단순 분석 업무가 주타깃인 것이다. 실제로 스탠퍼드 디지털경제연구소는 AI 노출도가 높은 직종인 소프트웨어 개발, 고객지원 등에서 22~25세 초기 경력 근로자의 고용 감소가 두드러졌다고 분석했다. 청년 고용난은 지방 공동화와도 직결된다. 지방에서 좋은 일자리를 못 찾은 청년들이 수도권으로 떠나고 청년이 사라진 지역의 기업은 인력난으로 투자를 꺼린다. 청년 일자리 부족이 지역소멸을 부채질한다. 정부가 지방 이전, 지역인재 채용 기업에 더 큰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것은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보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문제는 근원적 처방책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점이다. 지금 절실한 것은 단순한 고용보조금이나 채용 인센티브를 넘어선 획기적 개선책이다. 청년 고용난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도권과 지방,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격차가 해소돼야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청년들이 장기 백수 신세를 감수하면서 대기업만 바라보는 현실은 단순한 일자리 미스매칭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 임금, 복지, 경력 개발, 고용 안정성에서 기업 간 격차가 너무 크다. 청년 고용 대책은 보조금을 더 주는 수준으론 한계가 분명하다. 중소·중견기업이 청년에게 매력적인 일터가 되도록 정부가 구조적인 수술을 병행해야 한다. 생산성 향상, 임금 지급 여력, 직무교육, 복지 인프라를 함께 끌어올려야 하는 것이다. AI 전환 지원도 단순한 장비 도입이나 컨설팅에 그쳐선 안 된다. 중소기업이 실제로 업무방식을 바꾸고 청년 인재가 그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구조로 설계돼야 한다. 청년 AI 인재를 현장에 연결하는 사업 역시 정교한 성과 관리와 사후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회사 이익을 지금의 근로자가 다 가지겠다는 식의 이기적인 대기업 노조 투쟁방식은 미래 세대에 악영향을 주는 것은 물론이다. 같은 시기 다른 일터의 근로자에게도 심각한 위화감을 준다. 고임금 정규직의 폐쇄적 구조가 굳어질수록 청년들은 좁은 문 앞에서 무기력한 잉여인력이 될 것이다. 정부와 기업, 노조의 합리적인 협조와 대응이 청년 문제를 풀 수 있다.

[사설]"반도체 말곤 경쟁력 잃고 있다"는 지적

지난해 다소 부진했던 한국 경제가 올해 1·4분기 반도체 수출 호조 등에 힘입어 큰 폭의 성장세를 기록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다. 유력 외신은 한국 경제를 두고 "세계 경제의 승자"라고 평가할 정도다. 하지만 지금 한국 경제는 하나의 엔진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모습이다. 반도체가 사실상 홀로 성장을 떠받치고 있다. 하나의 엔진만으로는 지속적인 비행을 장담하기 어렵다.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한국은행은 9일 1·4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속보치보다 0.1%p 높은 1.8%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지난 4월 발표된 속보치도 시장 예상을 크게 웃돌았는데, 확정치는 그보다도 높아졌다. 지난해 1·4분기 -0.2%의 역성장 이후 2·4분기 0.6%, 3·4분기 1.4%로 회복세를 보이다가 4·4분기 다시 -0.1%로 주춤했던 흐름과 비교하면 이번 반등은 의미가 크다. 명목 GDP 증가율은 10.5%로 50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올해 성장률 전망치 상향 기대가 커지는 이유다. 실질 국민총소득(GNI)도 전분기보다 9.2% 늘었다. 가계의 실질소득 여건이 개선되면서 내수 회복에 대한 기대도 높아진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반도체·방산·조선 등 주력 산업의 호황이 한국 경제 성장세를 이끌고 있다고 평가했다. 마이클 브린 인사이트커뮤니케이션스 최고경영자는 FT에 "수입 에너지 의존도와 높은 물가, 청년실업 등 구조적 문제에도 성장엔진은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현재까지는 주력 산업들이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성장의 그늘도 적지 않다. 국내에서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의 전반적인 가격 수준을 보여주는 GDP 디플레이터는 12.9%에 달했다. 수출가격 상승이 명목 지표를 끌어올리는 동안 기업의 원가 부담과 체감물가 압력도 커졌다는 뜻이다. 수출기업이 벌어들인 돈의 상당 부분이 오른 수입 원자재 가격과 에너지 비용으로 빠져나가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내수 물가로 전가될 수 있다. FT에서 인용한 김영한 성균관대 교수의 지적도 가볍게 넘길 수 없다. 그는 "한국은 반도체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부문에서 비교우위를 잃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성장의 한계를 짚는 경고다. 더욱이 중국과의 기술격차는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차세대 성장동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반도체 호황 이후를 장담하기 어렵다. 기계·배터리·디스플레이 등 여러 산업에서 경쟁 우위가 약해지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과제는 분명하다. 개선된 가계소득이 소비로 이어지도록 내수 회복에 속도를 내야 한다. 반도체 초격차를 유지하는 동시에 바이오·소프트웨어·첨단소재 등 미래 산업을 키워 성장의 축을 다변화해야 한다. 두 번째 엔진이 필요한 시점이다. 경기 회복 소식은 반갑다. 그러나 이번 반등이 일시적 호황으로 끝날지, 지속가능한 성장의 출발점이 될지는 결국 지금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달려 있다.

[강남視角] 선관위 수요예측에 AI 활용했다면

6·3 지방선거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예사롭지 않다. 시민의 항의 기세가 꺾일 줄 모른다. 참정권 침해에 대한 국민의 정치적 민감도가 매우 높다는 방증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유권자의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투표율에 대한 선관위의 예측 실패다. 올해 유권자들이 투표권을 행사할 가능성을 예측하는 데 실패해 실제보다 부족한 투표용지를 인쇄하고 준비한 행정 마인드가 결정타였다. 그렇다면 시계를 지방선거 이전으로 되돌리면 이번 사태를 막을 수 있을까. 일각에선 인공지능(AI)을 도입해 예측률을 높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AI를 도입했더라도 이번 사태를 막지 못했을 것이란 점이다. AI가 수행하는 유권자 수요예측은 어차피 참고사항일 뿐이다. 선관위 공무원들은 기존 수요예측 방식에 길들여져 AI의 권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선관위를 딱 집어 매도하려는 게 아니다. 행정을 맡은 공무원 사회의 관성을 말하는 것뿐이다. 이재명 정부는 '세계 최고 AI 민주정부'를 국정과제로 삼고 있다. 각 부처에 생성형 AI 활용을 적극 장려하지만 생각만큼 빨리 확산되지 못하는 분위기다. 공공기관의 데이터는 전 국민의 개인정보와 국가 행정정보를 안전하게 다뤄야 하기에 AI와 연결해 사용하는 데 부담이 큰 게 사실이다. AI의 할루시네이션과 보안 문제가 특히 우려된다. 그러나 이유는 딴 데 있다. 기술보다 인간의 태도가 AI 확산의 큰 걸림돌이다. 먼저, 책임의 문제다. AI가 제시한 결과에 따라 의사결정을 내렸다가 예상 못한 책임을 담당 공무원이 뒤집어쓸 수 있다. 가령 선관위 사태로 가정해 보자. AI 예측 시스템이 "이 지역 선거는 보수 성향 유권자의 당일 투표 쏠림이 예상되니 특정 투표구의 인쇄 물량을 늘려라"고 제언했는데 수요예측이 빗나갔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나아가 진영 관점의 예측이 또 다른 선관위 정치 중립성 논쟁을 낳을 수 있다. 이럴 바에야 기존 방식을 고수하는 게 합리적 선택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본인이 해온 업무에 대한 자신감도 AI 도입을 방해한다. 공무원은 자신의 경험을 AI의 통계 결과보다 신뢰하는 편이다. AI가 제시하는 데이터가 자신의 경험과 다르면 "이건 AI가 틀린 것"으로 치부할 것이다. 이처럼 공무원들은 과거의 성공 경험을 업무의 표준으로 삼는다. 반면 AI는 변화하는 현재의 변수를 기반으로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라는 수치를 뽑아낸다. 공무원과 AI의 데이터 속성이 달라 충돌이 불가피하다. 마지막으로 AI를 활용하는 시늉만 낸다는 점이다. 원래 하던 업무방식을 유지한 채 AI를 얹으면 된다는 착각이다. 복잡한 결재라인과 서류 중심의 행정방식이 바뀌지 않고 AI를 연결해 봤자 모래사장에 물 한 바가지 부은 것과 다르지 않다. 결국, 행정업무에 AI 도입을 성공시키는 것은 사람의 태도 변화에 달렸다. AI를 단순 보조용으로 여긴다면 의사결정에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대안으로 AI를 '레드팀(Red Team)'으로 공식화하는 방안이 있다. AI를 보조도구로만 쓸 게 아니라 의사결정의 반대편에 세워 일부러 딴지 거는 질문을 던지도록 역할을 주는 방식이다. 담당자가 놓칠 사각지대를 찾는 데 유용한 방법이다. 책임 회피에 급급한 허술한 조직문화도 쇄신해야 한다. 최종 결정은 결국 인간이 맡고, 그에 따른 책임도 진다는 마음가짐이다. AI를 활용한 의사결정 과정에 인간이 개입하는 구조(Human in the loop)가 명확히 서야 한다. AI 도입의 성패는 성과로 판가름 난다. AI를 도입했더니 업무시간은 줄었는데 실제 성과는 똑같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기껏 AI를 도입했더니 업무 처리만 편해지고, 생산성은 제자리라는 의미다. 성과 향상 없는 AI 행정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jjack3@fnnews.com

[기자수첩] 20대의 초라한 투자성적표

"막차라도 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근 마이너스 통장으로 1억원을 빌려 단일종목 레버리지에 투자한 30대 직장인의 말이다. 그는 코스피의 가파른 상승세를 "사실상 마지막 사다리"라고 표현했다. 포모(FOMO·소외 공포)가 청년들을 빚투(빚내서 투자)로 몰고 있다. 국내 증시의 신용거래융자 잔고는 38조원에 육박하며 사상 최고치를 연일 갈아치우고 있다. 신용거래융자 잔고는 증권사에 돈을 빌려 주식을 매수한 후 갚지 않은 금액으로, 빚투의 대표적인 지표이다. 코스피가 가파르게 오를수록 신용거래융자 잔고도 가파르게 올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수익률을 2배로 추종하는 상장지수펀드(ETF)에도 이들은 빠르게 올라탔다. 지난달 상장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는 첫날 거래대금만 약 10조4000억원에 달했다. 지금 청년들은 실패의 두려움보다 포모의 초조함이 더 크다. 코로나19 국면에서 주식으로 큰돈을 번 또래를 본 청년들은 자산 격차가 이미 벌어졌다고 느낀다. 자본시장연구원은 코로나19 이후 청년층에서 주식·채권·펀드를 보유한 가구 비중이 거의 2배로 늘었고, 소득분위별 금융자산 격차도 더 벌어졌다고 분석했다. 천정부지로 오른 집값 앞에서 주식은 그나마 닿을 수 있는 마지막 선택지로 여겨진다. 청약통장을 깨고 빚을 내 시장에 뛰어드는 이유다. 문제는 결과다. 빠른 수익을 좇은 청년들의 성적표가 오히려 가장 초라하다. NH투자증권에 따르면 지난해 1~9월 수익률 1위는 60대 이상 여성(26.9%)이었다. 20대 여성은 24.8%, 20대 남성은 19.0%로 전 그룹 중 꼴찌였다. 갈린 것은 매매 습관이었다. 남성 평균 주식 회전율은 181.4%로 여성(85.7%)의 두 배를 넘었다. 우량주를 길게 들고 간 쪽이 이겼고, 종목을 자주 갈아탄 쪽이 졌다. 빚투의 손실은 더 가팔랐다. 금융당국이 지난 3월 조정 국면에서 개인 계좌 약 460만개를 분석한 결과, 신용융자 투자자의 평균 수익률은 -19%로 일반 투자자보다 두 배 이상 낮았다. 특히 20대 빚투 소액 투자자의 손실률은 일반 투자자의 3배가 넘었다. 사다리가 무너진다는 청년들의 두려움은 실재한다. 하지만 그 두려움이 단기 수익률 추구와 레버리지로 향할 때, 결과는 격차 해소가 아니라 격차 확대였다. 빠르게 벌려다 가장 못 버는 역설이 데이터로 확인된 셈이다. 무너진 사다리를 탓하기 전에 올라타려는 것이 사다리가 맞는지부터 따져볼 때다. fair@fnnews.com 한영준 기자

[포럼] 수익률 낮은 아파트 월세 시장

최근 아파트 시장을 두고 '월세나 전월세 전환율이 크게 올랐다'는 분석이 쏟아진다. 뉴스만 보면 월세 시장이 임대인 우위로 급격히 재편되고, 월세 투자 수익률도 좋아진 것처럼 비친다. 그러나 이 두 용어를 동일 선상에서 해석하면 오류가 발생한다. 전월세 전환율과 월세 투자 수익률은 서로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전월세 전환율의 출발점은 전환가격이다. 전세보증금을 월세로 전환할 때 보증금 1원당 얼마의 월세를 받을지 결정하는 비율이다. 이 지표의 용도는 명확하다. 임차인에게는 전세와 월세 중 어느 쪽이 주거비 측면에서 유리한지 따지는 기준이 되고, 임대인에게는 '보증금 대신 월세를 얼마로 책정할지' 알려주는 가이드라인이 된다. 기준금리와 비교해 현재 월세가 적정한지를 가늠하는 잣대로 활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투자자 관점의 월세 투자 수익률은 전혀 다른 질문에서 시작한다. 투자금액 대비 세전 임대수익의 비율인 명목 수익률을 기준으로 자산의 가치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게를 차릴 때 초기 투자자금 대비 예상 매출과 총수익률을 따져보는 것과 유사하다. 다시 말해 투입한 자본이 외견상 얼마의 수익을 창출하는지 그 '체급'을 먼저 비교하는 원리다. 문제는 이 두 개념이 시장에서 자주 혼용된다는 점이다. '전월세 전환율이 4~5%대이니 월세 수익률도 그만큼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대표적이다. 현실은 딴판이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 3월 서울 아파트 전월세 전환율은 4.7%, 수도권은 5.1%, 전국은 5.3%를 기록했다. 그러나 실제 아파트 월세 수익률은 이 수치에 턱없이 못 미친다. 서울의 경우 적게는 2%대, 많아야 3%대를 넘는 곳을 찾기 힘들다. 이들은 계산의 출발점부터 다르다. 전환율은 세입자에게 돌려줄 보증금을 기준으로 따지지만, 투자 수익률은 집을 살 때 들어간 매입가격을 기준으로 계산하기 때문이다. 매매가가 지나치게 높게 형성된 아파트 시장에서는 월세가 아무리 올라도 매매가격 상승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실제로 KB부동산에 따르면 올 들어 5월까지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지수는 5.47% 상승했다. 반면 같은 기간 월세지수는 3.63% 오르는 데 그쳤다. 전세(3.49%)보다는 높지만 매매가 상승률보다는 확연히 낮다. 결과적으로 아파트 월세 시장은 기묘한 모순에 빠져 있다. 임차인 입장에서는 월세 부담이 눈에 띄게 커졌지만 투자자 입장에서는 여전히 매력적이지 않은 자산이다. 아직 전세제도가 남아있기도 하지만 급등한 매매가격 탓에 초기 투자금 장벽이 너무 높아진 게 핵심 요인이다. 아파트는 월세라는 현금흐름보다는 자본이득으로 보상을 받는 부동산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단순 수치가 아니라 어떤 기준 위에서 도출되었는지 본질을 꿰뚫어 보는 일이다. 전월세 전환율의 상승은 주거비 구조가 변화하고 있다는 신호일 뿐 아파트 월세 투자의 수익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는 증거가 아니다. 이 두 개념을 명확히 분리하지 않으면 월세 시장의 착시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특히 월세를 받아 노후 생계비를 마련하려는 고령 은퇴자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전면 월세 시대가 도래하면 월세 투자 수익률은 개선될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점이 오기까지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

[fn광장] 국민연금 기금운용 성과, 개혁 마무리

2025년 국민연금 개혁은 보험료율을 9%에서 13%로 단계적으로 인상하고 소득대체율을 43%로 조정함으로써 적립기금 소진 예상연도를 2064년으로 늦추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개혁 직후부터 다소 미흡하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5차 재정계산위원회가 정책 목표로 제시한 2093년까지의 기금 유지에는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3년의 기금운용 성과와 향후 수익률 전망을 함께 놓고 보면, 그 평가는 달라진다. 기금운용 성과가 제도 개혁의 공백을 메우며 연금개혁을 사실상 완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기금은 최근 3년 괄목할 만한 수익률을 거두고 있다. 2025년 한 해에만 수익률 18.82%의 역대 최고 성과를 달성했고, 2026년에도 코스피 급등과 해외자산 호조에 힘입어 적립기금은 1800조원을 상회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성과 배경에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 주가가 글로벌 인공지능(AI)·로봇 혁명의 흐름을 타고 큰 폭으로 상승한 것과 정부의 금융시장 선진화 정책이 주효했다. 해외주식 비중 확대와 원화 약세에 따른 환차익도 기여했다. 기금운용 성과는 연금재정 전망의 근본적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필자가 추산한 바로는, 최근 성과를 기반으로 향후 연 5.5%의 수익률이 계속된다면 기금 소진 예상연도는 2095년으로 늦추어져 5차 재정계산위원회가 목표로 삼았던 2093년까지의 기금 유지가 달성된다. 2025년 제도 개혁만으로는 부족했던 30년의 간극을 기금운용 성과가 채워주는 구조다. 기금운용의 성과로 연금개혁이 완성되는 것이다. 가입자와 수급자의 추가 고통 없이 기금운용 수익으로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발군의 사례가 될 수 있다. 국민연금의 성과 의미는 생각보다 깊다. AI·로봇 혁명이 불러온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소수의 대기업 주주에게만 막대한 이익을 집중시킨다는 비판을 낳고 했다. 일부에서는 초과이익의 사회적 공유를 별도의 제도적 장치를 통해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그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대주주로서 이들 기업이 창출한 가치 상승을 기금수익으로 흡수하고, 이를 전 국민이 가입한 연금의 재정 안정으로 환원하고 있다. 기업의 성장 과실이 자본시장을 통해 공적연금 재정으로 흘러드는 이 구조야말로 별도의 세금이나 규제 없이 작동하는 가장 효율적인 이익공유 모델이다. 국민연금이 대형 성장주를 보유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 공유의 실현 수단이 되고 있다. 다만 이 성과를 기금운용 성과만으로 귀속시켜서는 안 된다. 2025년 연금개혁으로 보험료율이 인상되면서 기금에 유입되는 재원의 규모 자체가 커졌다. 더 많은 보험료가 투입되었기 때문에 같은 수익률로도 더 큰 절대 수익금이 발생할 수 있는 구조다. 개혁이 없었다면 기금 규모는 작았을 것이고, 운용 성과의 파급력도 반감되었을 것이다. 적립방식 연금제도에서 연금개혁과 기금운용은 상승적 관계이며, 어느 하나만으로는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성과에 안주하기에는 구조적 취약성이 존재한다. 평가이익의 상당 부분이 미실현 상태이고, 국내주식 비중이 이미 계획치를 초과하여 30% 내외에 달한 점은 새로운 긴장 요인이다. 국민연금 기금운용계획으로 담기 어려운 높은 주식성과로 리밸런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전대미문의 폭발적 주식시장 성장으로 자본시장의 구조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새로운 기금운용계획이 만들어져야 한다. 특정 시점의 평가이익을 구조적 개선으로 해석하는 낙관론적 편향을 경계해야 하고, 하방 시나리오와 스트레스 테스트를 병행하는 신중함이 요구된다. 구조적으로 아직 확장기에 있는 국민연금에서의 국내주식 비중 조정은 기계적인 매도가 아닌 신규 유입 재원의 해외자산 배분을 통한 자연스러운 희석 방식으로 접근해야 시장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 더욱 바람직하게는 기금운용 평균 수익률이 장기적으로 6.5%를 상회할 수 있도록 하여 급여지출이 본격화될 때 발생 가능한 멜팅다운(melting down·기금 잠식)을 막는 것이다. 최근 3년간 국민연금의 빛나는 성과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연금개혁이 기반을 다지고, 기금운용이 그 위에서 성과를 만들어낸 결과다. 이제 과제는 이 성과를 일시적 호황으로 소모하지 않고, 적립기금 소진 방지라는 궁극적 목표를 향한 지속적 역량 강화로 이어가는 것이다.김용하 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

[강남視角] 특허는 숫자 아닌 전략이다

한때 특허 경쟁은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는가'의 문제로 여겨졌다. 기업과 국가는 더 많은 특허를 확보하는 것이 곧 기술력의 상징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글로벌 산업 경쟁의 현실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특허의 숫자가 아니라 그 특허가 실제로 어떤 시장을 만들고, 어떤 가치를 창출하느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엔비디아다. 엔비디아는 단순한 반도체 제조 기업이 아니라 인공지능 시대의 핵심 인프라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그 배경에는 그래픽처리장치(GPU)라는 하드웨어 혁신뿐 아니라 이를 둘러싼 소프트웨어 생태계, 아키텍처 설계, 그리고 전략적으로 축적된 지식재산 포트폴리오가 있다. 중요한 점은 엔비디아의 경쟁력이 특허의 '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AI 컴퓨팅이라는 미래 기술 궤적을 정확히 읽고 그 핵심 영역에 집중한 '질 높은 특허전략'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기술 경쟁은 단순한 발명 경쟁이 아니다. 미래 산업의 표준을 누가 먼저 정의하고, 그 표준을 어떤 지식재산으로 보호하느냐의 싸움이다. 이 과정에서 무의미하게 많은 특허를 보유하는 것은 오히려 전략적 자산이 되기 어렵다. 시장과 연결되지 못한 특허는 비용일 뿐이며, 실제 산업 경쟁력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지식재산 전문가인 수잔 해리슨은 특허를 단순한 법적 권리가 아니라 '전략적 투자자산'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특허의 본질적 질문이 '이 기술이 특허가 가능한가'가 아니라 '이 특허가 어떤 가치를 창출하느냐'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특허의 질은 단순한 기술 완성도가 아니라 미래 시장과의 연결성, 경쟁 우위, 그리고 산업 통제력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특히 인공지능(AI), 반도체, 바이오와 같은 첨단 산업에서는 질 높은 특허의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기술 변화 속도가 빠르고, 모방과 추격이 쉬운 환경에서는 개별 특허의 수량이 아니라 핵심 기술을 얼마나 정확히 선점했는지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즉 하나의 전략적 특허는 수십개의 비핵심 특허보다 더 큰 시장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과거에는 기업들이 특허를 보험처럼 취급하던 시기도 있었다. 가능한 한 많은 특허를 확보해 두면 분쟁에 대비할 수 있고, 기술력을 과시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시장에서는 이러한 접근이 오히려 비효율을 초래한다. 유지비용이 증가하고, 실질적 방어력과 수익창출 효과는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특허전략은 '많이 갖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갖는 것'으로 이동하고 있다. 국가 차원에서도 같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제 지식재산 정책은 특허 출원건수를 늘리는 양적 경쟁에서 벗어나 국가 산업 전략과 연결된 핵심 기술을 얼마나 정교하게 확보하느냐의 문제로 전환되고 있다. 특허 데이터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미래 산업구조를 예측하는 중요한 신호이며,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활용하는지가 국가 경쟁력을 결정짓는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지식재산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관점의 전환이 있다. 과거에는 '얼마나 많이 만들었느냐'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무엇을 위해 만들었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특허는 더 이상 기술의 결과물이 아니라 미래 시장을 설계하는 전략적 도구가 되고 있다. 다가오는 제16회 국제지식재산보호컨퍼런스는 이러한 흐름을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다. '지식재산 시대! 아이디어는 자산으로, 보호는 혁신으로'라는 주제는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 지식재산을 양 중심이 아닌 질 중심으로 재정의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를 담고 있다. 특히 AI와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지금, 질 높은 지식재산 전략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 되고 있다. 지식재산의 시대는 이미 시작됐다. 양이 아니라 질, 그리고 그 질을 가능하게 하는 전략적 통찰이 국가와 기업의 미래를 가를 것이다. padet80@fnnews.com 박신영 산업부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