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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규제 철학이 규제 품질을 결정한다

사회과학에서는 자연과학과 달리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어 '실험'이 용이하지 않다. 하지만 사회과학에서도 '자연실험'이 일어날 수가 있다. 정책이나 법의 차이 같은 요인이 '같은 집단을 서로 다른 조건'에 놓이게 했다면 '하나의 실험환경'을 만든다. 그러면 하나의 실험환경에 대해 서로 다른 정책효과를 정량화할 수 있게 된다. 쿠팡Inc의 한국법인과 대만법인이 판박이 '개인 정보유출 사고'를 당했다. '판박이'로 규정한 것은 공격자와 수법이 모두 동일하고 유출된 개인정보도 똑같으며 사고발생 시기도 같았기 때문이다. 완벽한 '자연실험' 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하지만 한국과 대만 규제 당국의 행정제재는 전혀 달랐다. 한국 정부는 한국 쿠팡에 4235억 7500만원의 과징금을, 대만은 대만 쿠팡에 6500만원(150만 대만달러)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물론 두 나라의 개인정보 피해유출규모는 달랐다. 한국이 약 3755만건, 대만이 약 20만건이다. 그러나 1건당 과징금을 비교하면 한국은 1만1259원, 대만은 318원으로 두 나라의 건당 과징금 차이는 '35배'에 달한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나. 규제의 철학과 잣대가 달랐기 때문이다. 대만 당국은 '20만명의 정보가 유출됐으니 대형사고다'라고 단순 판단하지 않았다. 대신 '침해의 실질적 위험과 결과'를 함께 봤다. 대만 당국은 유출 정보로 재산이나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은 점에 주목했다. 이름·전화번호·주소 등은 민감도가 낮은 정보로 인식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쿠팡 사건을 법률상 '중대한 사안'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정보의 민감도·2차 피해 여부·사후조치' 등을 종합해 과징금을 부과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규제당국은 헛짚고 있다. 개인정보보호법은 과징금 상한을 '전체 매출액의 3%'로 규정하고 있다. 매출의 3%는 천문학적인 숫자다. 정부가 지난 6월 쿠팡에 부과한 전체 과징금은 6246억8100만원으로 한국 쿠팡 2025년 매출액 45조4555억원의 1.37%이다. 그것도 모자라 개인정보위는 지난 9월 과징금의 상한을 매출액 10%로 상향했다. 이는 비이성적인 조치다. 매출액을 기준으로 하다보니 민감정보 유출에 손을 놓고 있다. 가입자의 연봉, 학력, 종교 등 민감한 정보 43만건이 유출된 모 결혼정보업체에 부과한 과징금은 12억원이 전부다. 성형 시술 내역 등 초민감 정보 20만여건이 유출된 한 의료 플랫폼에 부과될 과징금도 22억원에 그칠 것이란 지적이다. 한국 정부는 정보유출 기업 크기에 방점을 찍는다. 하지만 매출액은 소비자가 입은 피해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똑같은 보안상 과실로 100만명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유출됐는데, 과징금이 매출에 비례한다면 '침해의 정도에 대한 제재'라기보다 '기업의 경제적 규모에 대한 제재'인 것이다. 과징금 액수를 결정하는 중심 기준은 침해행위의 중대성과 실질적 피해여야 한다. 행정제재가 '큰 기업이기 때문에 큰 벌금을 낸다'는 논리를 앞세우면 과징금은 일종의 '규모세'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규제의 철학과 기준이 규제의 품질을 낳는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기고] 도전이 다시 선택지가 되는 사회

창업의 시작은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다. 오랫동안 준비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하기도 하지만, 우연히 발견한 문제를 해결해보다 사업이 되기도 한다. 엘리스그룹도 대학원 동기들과 참여한 공모전이 계기였다. 그러나 시작보다 어려운 것은 그다음이다. 회사를 만들면 자금과 사람, 고객과 시장의 문제를 끊임없이 마주하게 된다.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도 대표는 계속 결정을 내려야 한다. 창업은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드는 일이지만 동시에 수많은 불확실성과 책임을 감당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창업 현장을 보면서 한 가지 질문을 자주 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 사람들이 굳이 창업을 선택할 이유가 충분한가. 창업가의 역량과 의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들이 감수해야 하는 비용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실패했을 때 잃는 것은 크고, 다시 시작할 기회는 충분하지 않다. 실패한 경험이 다음 도전의 자산이 되기보다 꼬리표가 되는 경우도 여전히 많다. 성공한 창업가에게는 박수를 보내지만 실패한 창업가에게는 지나치게 냉정하다면, 뛰어난 인재일수록 더 안전한 선택을 택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 혁신은 사람들에게 더 많이 도전하라고 말한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도전해볼 만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환경이 있어야 한다. 실패의 비용을 낮추고, 한 번의 실패가 다음 기회를 막지 않으며, 다시 시작하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회가 필요하다. 그래서 최근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모두의 창업'을 반갑게 본다. 이 사업의 의미를 단순히 몇 개의 새로운 기업을 만드는 데서 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사람이 창업을 현실적인 선택지로 검토하고, 자신의 아이디어와 가능성을 실제 시장에서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를 넓히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우리 경제가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이미 창업한 기업을 잘 키우는 것만큼 새로운 사람들이 계속 창업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창업은 가볍게 권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다. 하나의 기업을 만들고 구성원과 고객,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일인 만큼 충분한 고민과 각오가 필요하다. 다만 그 책임을 감수하고 도전하려는 사람에게 사회가 필요 이상의 장벽과 실패의 대가까지 지워서는 안 된다. 창업은 특별히 용감한 몇 사람만 감당하는 길이 아니라,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려는 사람이 진지하게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경로가 돼야 한다. 좋은 창업 생태계의 기준도 결국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유니콘이 탄생했느냐뿐 아니라, 새로운 도전이 계속 이어지고 한 번의 실패가 다음 도전을 막지 않는가도 중요한 기준이다. '모두의 창업'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창업을 막연한 모험이 아니라, 충분히 고민하고 준비한 뒤 선택할 수 있는 도전으로 바라보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도전이 성공했을 때뿐 아니라 실패했을 때에도 다음 도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의미 있는 경험으로 인정받았으면 한다. 대한민국이 다시 창업하기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영웅적 창업가가 아니라, 책임 있게 도전하려는 사람이 그 선택을 주저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인지 모른다. 김재원 코리아스타트업포럼 의장

[기고] 바다가 스스로 아쿠아리움 되는 부산

부산항 북항 친수공원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몸길이 3m가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상어가 경관수로를 헤엄치는 모습이 목격되면서 이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위험 가능성이 있는 해양생물인 만큼 안전관리가 우선돼야 하지만 필자는 이 광경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았다. 도심 한가운데서 살아있는 해양생물을 직접 만나는 경험만으로 북항이 순식간에 관심 공간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상어를 북항에 풀어놓거나 위험한 해양동물을 인위적으로 사육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바다를 깨끗하게 하고 생태환경을 복원해 다양한 해양생물이 스스로 찾아오게 하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바다가 스스로 아쿠아리움이 되는 부산'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이다. 필자에게 이번 일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부산시에서 해양환경팀장을 맡아 장기 해양환경정책을 고민하던 당시 해양생태계 복원과 시민 친수공간을 연계하는 이와 유사한 구상을 자체 계획에 담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부산 해양환경정책의 흐름도 이를 뒷받침한다. 2008년 '부산해양환경관리 기본계획에 관한 연구'에서는 연안 오염관리 뿐만 아니라 통합적 해양환경관리, 해양생태계 복원, 시민 참여와 해양환경 교육 등을 폭넓게 제시했다. 이후 부산시는 이러한 정책을 발전시켜 2016년 '부산해양환경관리 종합계획 2030'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2030년까지 4개 분야 21개 사업에 약 5495억원을 투입하는 장기계획이었다. 부산 연안의 수질개선에 머무르지 않고 상괭이와 바다거북 등 해양생물 복원까지 정책목표로 제시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로부터 10년, 부산의 바다는 크게 달라지고 있다. 북항 재개발로 과거 항만시설에 막혀 있던 바다가 시민에게 돌아왔고, 대규모 친수공원과 바다로 연결되는 경관수로가 만들어졌다. 이제 부산의 해양환경정책도 '오염된 바다를 깨끗하게 만드는 단계'에서 '깨끗해진 바다에 생명을 돌아오게 하는 단계'로 발전해야 한다. 그 실험을 북항에서 시작해 보면 어떨까. 필자는 가칭 '부산 북항 도심형 해양생태공원'조성을 제안한다. 핵심은 새로운 대형 건축물을 짓거나 고래·돌고래·상어 등을 잡아 전시하는 것이 아니다. 북항 경관수로와 주변 해역의 수질과 해저환경을 조사하고 잘피와 해조류, 친환경 생태블록과 소규모 인공어초 등을 활용해 물고기와 갑각류가 살아갈 수 있는 서식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먹이생물이 늘어나면 작은 물고기가 찾아오고 작은 물고기가 늘어나면 더 다양한 해양생물이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인간이 해양생물을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해양생물이 찾아올 수 있는 바다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여기에 첨단기술을 접목하면 북항은 더욱 특별해진다. 경관수로에 수중카메라를 설치하고 AI(인공지능) 영상분석 기술을 활용하면 시민과 관광객은 스마트폰이나 현장 화면으로 바닷속을 실시간 관찰할 수 있다. 물고기가 지나가면 어종과 생태적 특징을 알려주는 'AI 바다생물 도감'도 가능하다. 북항은 이런 시도를 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부산역과 원도심에 인접하고 국제여객터미널이 있으며, 영도의 국립해양박물관 등과도 연계할 수 있다. 북항에서 살아 있는 바다를 체험하고 국립해양박물관에서 해양역사와 문화를 배우는 해양생태·문화 관광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세계의 워터프런트 도시들은 화려한 건축물과 상업시설로 경쟁하고 있다. 그러나 부산에는 다른 도시가 쉽게 만들 수 없는 자산이 있다. 바로 살아있는 바다다. 북항의 미래 경쟁력 역시 얼마나 많은 건물을 세우느냐보다 그곳에서 시민과 관광객이 어떤 특별한 경험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번 북항 상어의 출현은 우연한 자연현상이지만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바다를 깨끗하게 만드는 도시에서 생명이 돌아오는 바다를 만드는 부산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그 생명을 시민과 세계인이 함께 보고, 배우고, 즐기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 부산항 북항에서 '바다가 스스로 아쿠아리움이 되는 도시', 그 새로운 실험을 시작해 보자. 임정현 해양공학 박사

[포럼] 누구를 위한 AI 강국인가

미국과 중국의 인공지능(AI)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한국에선 같은 말이 반복된다. 뒤처지면 안 된다. 우리 기술이 있어야 한다. 국가가 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위기감이 좋은 정책을 보장하진 않는다. AI를 만드는 기업의 성장과 그걸 쓰는 국민의 삶이 나아지는 것은 다르다. 정책은 이 둘을 어떻게 연결할지 답해야 한다. 한중미 AI 경쟁은 출발점도, 자원도, 시장도 다르다. 미국은 그래픽처리장치(GPU)와 세계적 AI기업을, 중국은 거대한 내수시장과 산업기반을 가졌다. 그 전략을 축소해 따라 한다고 같은 성과가 나오진 않는다. 투자액, GPU 수, 국산 모델 순위보다 먼저 물어야 한다. 누가 쓰는가. 어떤 문제가 풀렸는가. 지원이 끝나도 고객이 돈을 낼 것인가. 독자 기술은 필요하다. 외국 기업이 값을 올리거나 서비스를 끊을 때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국산이라는 이름만으로 AI 주권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국내 업체라도 데이터가 어떻게 쓰이는지 확인하고, 필요하면 바꾸며, 문제가 되면 멈추고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국산화가 의존의 대상을 바꾸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미국은 안전하고 중국은 위험하다는 이분법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법과 제도 차이는 따지되, 데이터 이용방식과 책임은 어느 기업에나 물어야 한다. 기술은 성능으로, 보안은 검증으로 판단해야 한다. 정책의 방향도 달라져야 한다. 첫째, 지원영역을 좁혀야 한다. 국방과 핵심 공공업무처럼 통제권이 필수인 영역이 있고, 범용기술을 경쟁적으로 도입해도 되는 영역이 있다. 구분 없이 모든 분야에 독자 기술을 요구하면 비용은 커지고 선택지는 줄어든다. 모든 것을 직접 만들겠다는 것은 전략이 아니라 희망에 가깝다. 둘째, 검증이 핵심이다. 공공은 국내 기업에 기회를 주되, 국산이라는 이유로 검증을 면제해서는 안 된다. 작게 써보고 업무시간과 오류가 얼마나 줄었는지 공개하고, 성과가 없으면 바꾸거나 중단해야 한다. 개발 실패는 감수할 수 있어도, 실패를 숨긴 채 지원을 반복해선 안 된다. 셋째, 지원이 개발기업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 중소기업엔 거대한 AI 구상보다 데이터 정리와 교육이 더 급할 수 있다. AI 시연으로만 끝나지 않으려면 실제 사용과 개선 효과를 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특정 업체에 묶이지 않게 계약해야 한다. 데이터 권리와 이전 절차를 명시해야 외국 기업에도 국내 기업에도 끌려가지 않고, 새 기업의 진입로도 열린다. 경쟁을 막아 기업을 지키는 정책과 경쟁할 기회를 만드는 정책은 다르다. 한국의 목표는 미국이나 중국의 축소판이 아니라 제조업과 공공서비스의 문제를 남보다 잘 푸는 나라여야 하고, 자체 기술도 그 수단이다. AI 주권을 외치기는 쉽지만 무엇을 얻었는지 설명하긴 어렵다. 지원기업에는 성과를, 정부에는 근거를 물어야 한다. 국민이 체감하지 못하는 AI 강국은 누구를 위한 강국인가. ■약력 △스탠퍼드대 커뮤니케이션 석사 △서울AI 허브 센터장 △TIPS타운 센터장 △실리콘밸리 한국인 커뮤니티 'Bay Area K Group' 공동대표 및 이사회 의장 윤종영 국민대 소프트웨어융합대학 교수

[fn광장] '지뢰폭발' 北 소행, 軍 단호히 대응하라

지난 21일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에서 지뢰 폭발로 우리 군 간부 3명이 다쳤다. 먼저 공병 팀장이 폭발로 쓰러졌고, 그를 구하던 수색대대장이 두 번째 폭발로 중상을 입었다. 합참은 국과수 1차 감정 결과 우리 군 지뢰가 아닌 것이 확실하며, 폭발 형태와 부상 정도 등을 종합하면 북한군 지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다. 특히 두 차례의 폭발은 2015년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을 연상시킨다. 당시에도 첫 폭발 뒤 구조 과정에서 5분 만에 두 번째 지뢰가 폭발했다. 이번에도 부상자를 구하던 지휘관이 2차 폭발을 당했다. 북한군이 언제, 어떤 의도로 지뢰를 매설했는지는 최종조사로 밝혀야 하지만 이제 북한군 지뢰라는 실체에는 상당히 접근했다. 초기 대응에 아쉬움은 남는다. 군과 유엔사가 현장조사를 위해 DMZ에 진입한 것은 사건 발생 5일 만이었다. 작전 병력이 계획된 수색범위를 벗어났고, 일부 안전조치가 미흡했다는 의혹도 철저히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 논의의 중심은 조사 지연을 질타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북한군 지뢰라면 왜 그곳에 있었으며,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북한이 우리의 의지를 시험할 이유는 충분하다. 북한은 2024년 이후 군사분계선(MDL) 일대에 지뢰를 매설하고 방벽을 구축해왔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에서 포로가 된 북한군의 한국행까지 현실화됐다. 한미 연합연습 축소와 전시작전권 전환을 둘러싼 혼선도 북한에는 우리 군의 대응태세를 시험해볼 기회로 보일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도발의 방식이다. 북한이 처음부터 대규모 충돌을 원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군사분계선을 조금씩 넘고, 지뢰를 매설하고, 우리가 어디까지 묵인하는지를 확인하면서 한 걸음씩 행동의 범위를 넓혀갈 수 있다. 한꺼번에 큰 도발을 하는 대신 작은 도발을 쌓아 상대의 양보를 얻어내는 전형적인 살라미 전술이다. 오늘 허용한 몇 미터는 내일의 몇십 미터로 돌아온다. 대응하지 않는 작은 도발이 다음 도발의 기준선이 된다. 그래서 하이브리드 위협에 대한 억제는 말보다 행동이어야 한다. 우선 DMZ 남측에서 북한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군사분계선 침범과 지뢰매설을 견제할 감시정찰(ISR) 태세를 강화해야 한다.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침범하면 현장에서 즉각 경고하고 퇴거시키며, 반복적 침범에는 현행 교전규칙에 따라 단계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북한군이 매설한 지뢰를 파악 후 제거하는 데 그치지 말고, 유엔사와 국제사회에 정전협정 위반의 책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그러나 군사적 대응은 분노에 따른 보복이어서는 안 된다. 도발의 수준에 맞되 북한이 얻는 이익보다 치러야 할 비용이 크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한다. 경고와 감시 강화, 군사분계선 일대 경계태세 격상, 정전협정에 따른 조치와 필요한 군사적 대응을 단계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작은 도발부터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다. 억제는 상대에게 다음 행동의 비용을 예측하게 만드는 데서 시작한다. 이런 점에서 사관학교 통폐합이나 전작권 전환 같은 거대한 국방개혁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 군이 눈앞의 적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이다. 전작권은 구호가 아니라 적의 의도를 읽고 상황을 판단하며 필요할 때 결심하고 행동하는 능력이다. DMZ에서 벌어지는 작은 도발에도 선을 긋지 못하면서 어떻게 전쟁을 주도할 수 있겠는가. 이번에도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다 부상당한 부사관이 있었고, 쓰러진 부하를 구하려 몸을 던졌다가 중상을 입은 대대장이 있었다. 현장의 장병들은 이미 자신의 책임을 행동으로 보여줬다. 이제 정부와 군 지휘부가 답할 차례다. 북한에 분명히 알려야 한다. DMZ 남측은 북한이 필요할 때 들어와 지뢰를 묻고 우리의 반응을 시험하는 공간이 아니다. 우리 영토와 장병을 위협하면 반드시 발견되고 저지되며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치른다는 선을 다시 그어야 한다. 그 선은 과도한 보복이 아니라 예측 가능하고 일관된 대응으로 지켜야 한다. 북한의 작은 도발을 평화를 위해 참아야 할 사소한 사건으로 취급할수록 다음 도발은 더 커진다. 평화는 도발을 외면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도발해도 얻을 것이 없다는 확신을 상대에게 줄 때 지켜진다. 정부가 단호히 결단할 때다. ■약력 △서울대 법대, 국방대 군사학 박사 △전 한남대 국방전략대학원 겸임교수 △외교부, 한미연합사, 공군, 육군 정책자문위원 △전 국가안보실, 국방부, 합참, 행정안전부 정책자문위원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외교안보센터 연구위원

[기자수첩] 감옥에서 엄마와 사는 영아들

낯선 이가 문 앞에 선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그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에서 거지로 변장한 오디세우스가 목동 에우마이오스의 오두막을 찾는다. 에우마이오스는 그를 손님으로 맞아들여 음식과 잠자리를 내어준다. "모든 낯선 이와 거지는 제우스로부터 온다"는 믿음에서다. 고대 그리스에서 낯선 이를 받아들이는 일은 단순한 친절을 넘어 지켜야 할 환대의 규범이자 문명이었다. 그 오래된 이야기가 지난달 14일 서울북부지법의 한 항소심 법정에서 떠올랐다. 한쪽 손목에 수갑을 찬 20대 여성 A씨의 가슴에는 생후 9개월 된 아기가 안겨 있었다. A씨는 마약류관리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수감됐는데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교정시설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아이는 예방접종을 제때 받지 못했고, 피부 발진도 치료받지 못했다고 한다. A씨는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며 재판부에 보석을 요청했다. 매년 생후 18개월 미만 영아 10여명이 교정시설에서 엄마와 생활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은 엄마가 죄를 지어 법정에 섰는데 아기까지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현실이었다. 김현경은 저서 '사람, 장소, 환대'에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사회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갖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죄를 지은 부모와 아이의 삶을 분리하는 일은 아이에게도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아이를 교정시설 밖에서 키우는 것이 원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모의 범죄와 아이의 삶은 분리돼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이를 맡길 곳이 없는 경우다. 원칙만 남으면 아이는 엄마와 담장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예외적으로 생후 18개월까지 교정시설에서 아이를 양육할 수 있게 한 것도 이런 현실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를 엄마와 떼어놓느냐, 함께 두느냐 같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다. 부모의 형벌과 아이의 삶을 분리할 수 있는 자리를 사회가 마련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아이에게 머물 곳이 있다면 부모는 아이를 위해 구금을 면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고 죄에 상응하는 책임을 질 수 있다. 아이에게 부모와 다른 자리를 내어주는 건 부모의 책임을 가볍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책임을 온전히 묻기 위한 조건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감당해야 할 것은 부모의 죄가 아니다. 부모의 죄를 묻는 순간에도 아이의 얼굴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법과 함께 지켜야 할 문명의 감각일 것이다. [email protected]

[사설] CPTPP 머뭇댈 이유 없으나 농어업 대책이 먼저

정부가 추진 중인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가입하면 제조업 생산과 국내총생산(GDP)은 늘어나지만 농림수산업은 적지 않은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나라경제 전체의 실익만 따지면 가입을 망설일 이유가 없다. 다만 피해가 예상되는 산업에 대한 대책도 차질 없이 마련돼야 한다. 산업통상부 등 관계부처가 28일 공개한 '경제적 영향 분석 잠정 결과'에 따르면 협정 발효 10년 뒤 실질 GDP는 가입하지 않을 때보다 0.38%p 높아진다. 제조업 생산 파급효과는 15년간 연평균 최대 6조7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됐다. 반면 같은 기간 농림수산업 생산은 연평균 약 8500억원 줄어들 것으로 추산됐다. CPTPP는 관세 철폐뿐 아니라 디지털·노동·환경 등 폭넓은 통상규범을 담은 '메가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일본·캐나다·호주·영국 등 12개국이 참여해 회원국 경제 규모가 세계 GDP의 약 15%에 이른다. 보호무역주의가 확산되고 공급망 재편이 이어지는 가운데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서는 거대 경제권 참여가 중요한 과제다. 제조업 생산 증가 효과가 농림수산업 생산 감소분의 8배 가까이 된다는 분석도 가입의 경제적 효과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농어업 피해를 숫자로만 판단해선 안 된다. 한국은 일본·멕시코를 제외한 10개 회원국과 이미 FTA를 맺고 있다. CPTPP에 가입하면 FTA가 없는 멕시코와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만 적용되는 일본에도 추가로 시장을 열어야 한다. 그로 인해 저가 수입 농산물이 늘어나면 고령화와 경영난을 겪는 농어촌의 경제 기반이 약해질 수 있다. 이익은 수출기업에 돌아가고 부담은 농어민이 진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가 공청회에 앞서 분석 결과를 공개한 것은 투명성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이제 실질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품목별 피해 규모를 면밀히 분석해 구체적인 소득 보전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수산물 가공을 지원하고 유통구조를 개선하는 등 경쟁력 강화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K푸드 확산으로 농수산물 수출 기회가 넓어진 만큼 시장개방이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2022년에 가입을 추진하다 높은 시장개방률과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가능성 등을 둘러싼 농어민의 반발에 중단됐던 경험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29일 X(옛 트위터)를 통해 농수축산업계를 향해 "조만간 직접 만나 뵙고 의견을 충분히 듣겠다"고 밝혔다. 또 FTA 피해 지원기금 부족분을 재정으로 채우고 수출 증가액의 일부를 활용해 피해를 보전하는 방안도 내놨다. 대통령이 직접 소통 의지를 보인 것은 긍정적이다. 다만 새 재원 방식은 이해당사자 간 논란이 없도록 면밀히 설계해야 한다. 국회 역시 초당적으로 협력해 불필요한 갈등을 줄여야 한다. 정교한 보상과 체질개선이 함께 이뤄질 때 CPTPP는 한국 경제의 새로운 도약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강남視角] 텍사스 주지사 애벗의 변심

"텍사스는 비즈니스의 속도로 움직인다"고 말한 이는 올해로 12년째 이곳 주지사인 그레그 애벗이다. 텍사스 토박이로 텍사스대와 밴더빌트대 로스쿨을 나왔다. 변호사시험을 준비하던 중 조깅하다 20m 높이의 참나무가 덮치는 사고로 척추를 다쳐 지금까지 휠체어를 탄다. 애벗은 훗날 이 사고를 자신의 정치적 서사의 일부로 자주 언급했다. "삶은 닥친 시련이 아니라 어떻게 대응하느냐로 결정된다." 변호사에서 판사, 주 대법관을 거쳐 주 법무장관을 12년 지냈다. 이 기간 주로 한 일이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상대로 한 규제 소송전이다. "출근하면 연방정부를 고소하고, 집에 간다." 자신의 하루 일과를 이렇게 언급한 적 있다. 휠체어를 탄 법률가의 정치 스타일은 그렇게 전투적이었다. '작은 정부, 낮은 세금, 적은 규제'의 텍사스 보수 모델을 신념처럼 밀어붙였다. 2014년 주지사에 당선된 뒤 "정부가 아니라 사람을 믿는다. 당신들의 꿈의 크기를 제한하지 않겠다"고 한 것도 이 연장선이었다. 기업들이 움직인다. 테슬라와 휴렛팩커드 엔터프라이즈가 글로벌 본사를 텍사스로 옮긴다. 테슬라는 대대적인 기가팩토리 프로젝트도 공개했다. 오라클도 오스틴으로 향했다. 석유와 카우보이의 땅 텍사스가 반도체의 새 기지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소득세가 없고, 땅은 넓었다. 무엇보다 에너지가 축복이었다. 세계적인 유전, 천연가스전에 재생에너지도 충만했다. 거대한 독립 전력시장 ERCOT를 둘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애벗 취임 후 10년간 300개 넘는 기업이 본사를 텍사스로 옮겼다. 인공지능(AI)시대는 그 뒤 도둑같이 왔다. 전기에 목마른 빅테크들이 데이터센터를 여기에 밀어 넣었다. 오픈AI가 주축인 5000억달러 규모의 스타게이트 AI 인프라 사업이 소도시 애빌린에서 첫 삽을 떴다. 말이 뛰던 목장지대에 거대한 AI 설비 골조가 들어섰다. 이렇게 몰린 데이터센터가 300개가 넘었다. 정점은 지난해 말 구글의 깜짝 발표였다. 댈러스 남쪽 미들로디언에서 3년간 400억달러를 텍사스에 쏟아붓겠다고 선언했다. 돌아보면 순식간의 성공이다. 기업들의 물결에 쌍수 들고 환영했던 주민들이 술렁인다. 교회에서 돌아오다 평소와 다른 자갈길로 들어섰다가 달라진 풍경에 분노했다는 목격담도 나왔다. 전기요금이 오르고, 물이 마르고, 집값과 동네의 삶마저 흔들릴 것이라는 불안감이 번졌다. 지역의 60% 넘는 주민들이 데이터센터 반대 깃발을 내건다. 현실적 우려와 막연한 공포가 뒤섞인 결과다. 11월 4선 도전을 앞둔 애벗의 고뇌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극단적 친기업으로 분류됐던 애벗의 톤이 지난 6월부터 달라졌다. 세제 혜택을 줄이고 기업에 인프라 비용 청구서를 들이밀겠다고 했다. 그러고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신규 데이터센터 허가에 전격 제동을 건다. 그러면서 던진 말이 "텍사스 주민이 먼저다(Texans must come first)"였다. 공교롭게도 애벗의 모라토리엄이 선언된 그날(9월 21일), 한국은 3500억달러 대미투자 사업을 공식 발표했다. 1호 사업으로 텍사스 가스복합발전 프로젝트가 확정됐다. 폭증할 데이터센터가 주요 수요처가 될 것이라는 계산이 당연히 있었다. 물론 텍사스에 여전히 전력이 필요한 것은 맞겠지만 한국 특정 발전소가 20년간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리스크 부담과 '상업적 합리성'을 마지막까지 따질 수밖에 없다. 더 주목해야 하는 건 애벗의 변심을 부른 현실이다. 주민들의 불편과 공포 앞에 애벗의 '작은 정부'는 흔들린다. 텍사스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 여러 곳에서 갈등이 불붙고 있다. 송전망 하나 세우는 데 한 세대가 걸리는 한국은 더 뼈아프다. 설득과 합의의 고비가 산 넘어 산이다. 지자체의 힘으로 풀 수 없는 난제다. 딜레마에 빠진 미국, 가시밭길의 한국이다. 그러는 사이 중국은 국가 주도 철권 드라이브로 초고압 전력망을 깔고 데이터센터를 무섭게 지어 올리고 있다. [email protected]

[사설] 줄줄 새는 실업급여, 감액 검토하고 단속 강화해야

실업급여를 부정하게 받아가는 행태가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성실히 세금을 내는 국민들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행위이며, 열심히 일해서 삶을 꾸려가는 서민들을 우롱하는 일이다. 일자리를 잃은 근로자를 위한 사회 안전망인 실업급여의 취지가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반복 수급이 문제다. 29일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김소희 국민의힘 의원실이 고용노동부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5년 내 3차례 이상 실업급여를 받은 반복수급자는 지난해 11만3000명이었다. 2022년 10만2000명이던 수치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이들에게 지급된 실업급여는 지난해 5997억원으로, 1인당 평균 약 530만원이다. 같은 사업장에서 퇴사와 재입사를 되풀이하며 수급한 사람도 6만5000명이고, 한 사람이 7차례나 받은 사례도 있었다. 실업급여를 둘러싼 도덕적 해이 문제는 통상적인 부정수급과 반복수급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부정수급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범죄다. 적발 건수는 매년 2만건을 넘는다. 수급 기간에 취업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사업주와 짜고 월급을 현금으로 받은 사례들이 많다. 자진퇴사한 뒤 옛 거래처 사장과 담합해 단기 근로계약을 맺은 것처럼 꾸민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지방에서 사업장 5곳을 운영하는 사업주가 최근 7년간 브로커 4명을 동원해 허위 근로자를 모집하고 실업급여 5억4000만원 등을 챙긴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부정수급 행위는 성실히 보험료를 낸 근로자와 사업주의 몫을 가로채는 범죄와 다를 바 없다.반복수급은 부정수급과는 달리 볼 측면이 있다. 실업급여는 비자발적으로 이직한 뒤 재취업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주는 제도다. 5차례 이상 반복해서 받은 수급자는 2022년 1만3000명에서 지난해 1만5000명으로 늘었고, 이들에게 지난해 지급된 돈은 610억8600만원에 이른다. 단기 취업의 결과로 반복수급이 증가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노동시장 불안정 등 구조적 원인이 존재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계약직과 단기 일자리 시장에서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당한 사유로 일자리를 잃는 일이 되풀이될 수 있다. 따라서 반복수급자 전체를 잠재적 악용자로 볼 수는 없다. 여러 번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부정이나 도덕적 해이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제도를 의도적으로 악용하는 사례가 섞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퇴사와 재입사를 계획적으로 반복하는 경우다. 제도의 허점을 악용했는지 정밀하게 조사해야 한다. 실업급여는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다시 일어서도록 돕는 최후의 보루다. 줄줄 새는 구멍을 막아 탄탄한 안전망을 만들어야 한다. 일단 부정수급의 통로를 원천 차단하는 일이 시급하다. 특히 갈수록 늘어나는 반복수급이 부정수급으로 변질되는 건 아닌지 살펴야 한다. 이상 징후가 보인다면 현장 실태조사를 통해 현실을 파악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반복수급 횟수가 많은 구간을 중심으로 업종, 사업장, 이직 사유별 조사가 필요한지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토대로 정당한 반복수급과 의심 사례를 가려내 관리할 필요가 있다. 실업급여가 많거나 손쉽게 부정수급할 수 있으면 근로의욕을 떨어뜨린다. 급여를 조정하고 부정행위를 엄단하는 등 제도와 정책 개선이 시급하다.

[테헤란로] 우리 집은 안전하다는 착각

아파트나 주택에서 사망자가 발생한 화재사고가 나면 스프링클러가 있었는지, 감지기와 경보설비는 제대로 작동했는지 등이 뉴스에 나온다. 건물이 언제 지어졌고, 당시 설치 의무가 있었는지, 안전점검은 언제 받았는지도 뒤따라 알려진다. 사고가 난 뒤에야 그 집에 무엇이 없었는지를 따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사는 집의 '사정'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파트라면 관리사무소가 정기적으로 소방점검을 하니 필요한 시설은 모두 갖춰져 있으리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점검을 받은 집과 화재에 안전한 집은 같은 말이 아니다. 소방점검은 이미 설치된 시설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살피는 절차다. 건축 당시 설치 의무가 없어 처음부터 없던 스프링클러까지 새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노후주택의 위험은 법을 어긴 데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지을 당시에는 적법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지금의 안전기준에는 못 미치게 된 집이 적지 않다. 안전에도 '시간의 공백'이 생긴다. 숫자로 보면 그 공백은 작지 않다. 소방청에 따르면 전국 2172만세대 가운데 연기감지기 설치가 필요한 주택은 897만세대다. 전체의 41.3%, 10가구 중 4가구꼴이다. 아파트가 572만세대, 일반주택이 325만세대다. 주택 화재 사망자의 72%가 연기 흡입으로 숨졌다는 점까지 놓고 보면 가볍게 넘길 수치가 아니다. 연기감지기는 불을 끄지는 못하지만 잠든 사람을 깨워 대피할 시간을 벌어준다. 정부도 최근 노후주택 화재 재발방지 대책을 보완했다. 스프링클러가 없는 노후 공동주택의 전기안전점검을 강화하고, 연기감지기와 자동확산소화기 보급을 늘리기로 했다. 소방당국은 수급자와 중증장애인, 독거노인 등 화재 취약계층 453만세대에 감지기를 지원하고 있다. 나머지 444만 세대는 현재 지원 대상이 아니다. 정부는 지원 대상을 화재취약주택까지 넓히고 주민이 직접 화재안전점검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방향은 맞다. 관건은 대책이 실제 가정의 설치까지 이어지느냐다. 감지기가 필요한 주택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은 단순한 시설 부족을 넘어, 주민이 자기 집의 위험을 알고 대비하도록 하는 안내가 충분했는지 돌아보게 한다. 관리사무소와 지자체, 소방당국이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설치해야 하는지 주민에게 더 쉽게 알려야 하는 이유다.지원 대상이 아닌 가구가 필요한 시설을 마련하는 것은 거주자의 몫이다. 그러나 자기 집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실제 설치로 이어지도록 돕는 데까지 행정이 손을 놓아서는 안 된다. 화재는 사고가 난 뒤에야 집의 약점을 드러낸다. 생활 안전행정은 그 약점을 사고 전에 주민이 알고 대비할 수 있게 하는 데까지 가야 한다. [email protected]

[강남視角] 호남반도체, 선결조건은 '물'

태국 방콕 전역이 최근 이틀간 이어진 폭우로 홍수재난지역으로 선포됐다. 도로에는 차량 대신 카약이 등장했고, 동물과 물고기가 함께 헤엄쳐 다니는 모습까지 목격됐다. 방콕은 차오프라야강 하류 삼각주에 자리 잡은 거대한 저지대다. 평균 지표면 높이가 해발 1~2m에 불과하고, 일부 지역은 지반 침하로 해수면보다 낮다. 지난 2012년 3월, 태국 잉락 친나왓 총리가 여주 이포보를 찾았다. 2011년 대홍수로 방콕이 물에 잠긴 직후였다. 당시 홍수로 680명 이상이 숨지고, 약 190만채의 주택이 피해를 입었다. 잉락 총리는 한강홍수통제소에서 홍수경보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이포보를 둘러봤다. 한국의 수자원 관리 경험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같은 날 SK하이닉스 이천공장도 찾았다. 반도체 생산라인을 둘러보는 자리에서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직접 안내했다. 태국 총리가 하루에 둘러본 두 현장은 14년 뒤 '용인 반도체클러스터'에서 다시 연결되고 있다.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움직이는 데 물은 전력만큼 중요한 기반시설이다. 용인 반도체클러스터에는 여주보를 통해 하루 26만5000t의 용수를 공급하는 관로가 건설되고 있다. 이후 추가 공급계획까지 포함하면 하루 30만t 이상의 물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수십조원, 수백조원의 투자가 들어가는 반도체 공장에서 물 공급이 끊기는 상황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포보와 여주보를 비롯한 4대강 사업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도 강의 '물그릇'을 키우는 것이었다. 강바닥을 준설하고 보를 설치해 물을 저장할 공간을 확보했다. 실제 여주저류지는 약 185만㎡ 규모로 조성돼 1530만t의 물을 담을 수 있다. 평소에는 시민이 이용하는 공간이지만 비가 쏟아지면 거대한 물그릇 역할을 해낸다. 한때 장마철이면 익숙했던 대규모 수해와 수재의연금 모금이 이제는 옛말이 됐다. 전기는 상대적으로 대안이 많다.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를 짓고, 원전을 건설하고, 재생에너지 설비를 늘릴 수 있다. 물론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돈과 기술, 정책을 투입하면 공급능력을 키울 수 있다. 물은 다르다. 있는 물을 확보하고 저장해야 한다. 가뭄이 들어도 공장에 끊김 없이 공급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반도체 산업에서 물은 단순한 원재료가 아니라 생산을 지속하게 만드는 산업 인프라다. 호남 반도체의 고민도 여기서 시작된다. 정부는 호남 반도체클러스터에 하루 65만t의 공업용수를 공급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동복댐에서 30만t, 장흥·보성강·나주댐에서 각각 10만t, 주암댐에서 5만t을 공급하고 광주 제1하수처리장에서 하루 30만t의 하수 재이용수를 추가하는 구상이다. 문제는 양보다 안정성이다.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최근 5년간 댐 유입량을 보면 보성강댐은 평균보다 84% 많아진 해가 있었던 반면 장흥댐은 72.2% 감소한 해도 있었다. 반도체 공장이 원하는 것은 비가 많이 오는 해의 물이 아니다. 비가 오지 않는 해에도 생산라인을 멈추지 않게 하는 물이다. 그래서 이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강둑을 높이고 기존 물을 쪼개 쓰는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필요하다면 강을 깊게 파고, 물을 저장할 공간을 만들고, 새로운 수원을 확보하는 근본적인 논의까지 해야 한다. 물 문제를 뒤로 미룬 채 반도체 공장부터 짓겠다는 것은 순서가 거꾸로다. 일각에선 의심하고 있지만 옆에서 지켜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호남 반도체에 대한 의지는 확고하다. 중국 반도체가 따라오기 전에 부지와 전력, 용수, 인력이 있는 곳이라면 미국과 일본 등 세계 어디든 공장을 짓겠다는 것이다. 호남 반도체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정부와 지자체가 먼저 '물'에 대한 해답을 내놓아야 한다. [email protected] 전용기 기자

[사설] '억대 빚' 안고 시작하는 신혼부부, 아이 낳고 싶겠나

결혼은 축복받아야 할 인생의 새 출발이다. 하지만 한국의 신혼부부는 억대 빚을 짊어진 채 첫발을 내딛고 있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결혼 5년 이내 초혼 부부의 대출잔액 중앙값(금액순으로 세웠을 때 한가운데 오는 값)은 2024년 1억7900만원이었다. 통계를 처음 시작한 2016년 7778만원의 2.3배다. 3억원 넘게 빚진 부부 비중도 같은 기간 5.3%에서 24.0%로 늘었다. 집을 보유한 신혼부부의 33.2%는 3억원 이상 빚을 안고 있다. 집을 보유하든 전세를 얻든 빚을 내 신혼집을 마련하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수치가 2년 전 것이라는 점이다. 올해 들어 서울 전셋값은 외곽까지 가파르게 뛰었다. 은평·성북·동대문구에서는 전용 59㎡ 아파트 전세가 8억원을 넘겼고, 마포구에선 10억원에 육박했다. 부동산R114 집계로 8월 수도권 아파트 평균 전셋값은 4억7515만원이었다. 정부의 저금리 전세자금 대출인 신혼부부 버팀목 대출의 수도권 임차보증금 기준 4억원을 훌쩍 넘어선 것이다. 보증금은 치솟는데 저금리 정책 대출의 문은 오히려 좁아진 셈이다. 현재 결혼을 앞둔 청년들이 느끼는 빚 부담은 통계보다 훨씬 무거울 수밖에 없다. 금리 부담마저 커지고 있다. 한국은행은 목표치를 웃도는 물가와 금융안정 위험 등에 대응하기 위해 7·8월 두 달 연속 기준금리를 인상, 연 3.00%까지 끌어올렸다. 원리금 상환 부담이 늘면 소득의 상당 부분을 빚 갚는 데 쓸 수밖에 없다. 높은 주거비와 부채 부담은 결혼을 앞둔 청년에게는 결혼을 미루게 하는 요인이 되고, 신혼부부에게는 출산과 소비를 제약할 수 있다. 빚으로 떠받친 주거가 저출생과 내수부진을 함께 부르는 악순환의 고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정부도 손을 놓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혼부부 특별공급과 신혼희망타운, 공공임대주택 등 지원책을 일찌감치 내놓았다. 지난 6월에는 청년·신혼부부용 공공임대인 행복주택의 맞벌이 소득기준을 월 763만원에서 939만원으로 높였다. 혼인신고로 인한 이른바 '결혼 페널티'를 완화한 것이다. 그러나 공급물량이 수요에 턱없이 못 미쳐 체감효과가 크지 않다는 지적이다. 공급보다 대출 지원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공급이 막힌 상태에서 대출만 늘리면 이 자금이 전셋값과 집값 상승을 부추길 수 있다. 청년들을 더 깊은 빚의 늪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해법은 돈을 빌려주는 대출 지원이 아니라 실제 거주할 집을 공급하는 데 있다. 직장과 가까운 도심에 신혼부부 맞춤형 분양주택과 장기 공공임대주택을 대폭 늘려야 한다. 실거주 의무 등 전세 매물을 위축시키는 규제도 손볼 필요가 있다. 저출생 대책의 핵심은 선심성 지원금이 아니라 청년들이 빚에 짓눌리지 않고 새출발을 할 수 있는 주거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결혼이 축복이 아니라 빚의 출발점이 되는 사회 구조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늘어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사설] 담합 반복하면 등록취소, 강력한 만큼 신중해야

더불어민주당과 정부는 28일 반복적으로 담합행위를 벌인 사업자의 등록을 취소하거나 영업정지를 내리는 등 담합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제재가 강화되는 분야는 안전·에너지·운송·환경 등 17개로 당정은 공정거래법과 17개 개별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담합은 시장경제의 근간을 훼손하고 소비자 등 다른 경제주체를 착취해 부당이익을 꾀하는 중대한 불공정행위"라는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의 말처럼 담합은 좀처럼 근절되지 않는 민생침해 행위다. 물건 가격은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나 업체들이 담합함으로써 소비자들은 값을 비교해서 물건을 선택할 권리를 상실한다. 역대 어느 정부나 담합행위를 단속해 왔지만 뿌리 뽑지 못한 것은 과징금 등을 통한 제재가 약했기 때문이다. 업체들은 담합으로 얻는 이익이 제재로 잃는 손실보다 컸기 때문에 단속을 당하고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같은 행위를 반복해 왔다. 당정의 이번 제재 강화 방침은 담합을 반복할 경우 아예 업체의 문을 닫게 하겠다는 강력한 조치로 볼 수 있다. 민생과 관련된 담합의 대표적인 분야가 설탕과 밀가루 등 식품이다. 민주당 윤준병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올해 적발된 식품업체 담합 5건의 관련 총매출액은 14조9866억원이었다. 공정위가 이들 업체에 부과한 과징금은 총 1조8178억원으로, 매출액 대비 부과율은 12.1%였다. 설탕은 2006년과 2007년 사이에 제당업체와 제분업체가 담합으로 적발됐는데, 올해 다시 담합이 드러났다. 제지업계도 몇 해 걸러 담합을 저지르고 있으며 교복 등 학생용품에서도 담합이 자주 일어난다. 그러나 식품·제지업은 이번 17개 법률의 적용 대상에서 빠졌다. 공정위는 "이번에는 실질적으로 등록·허가가 필요한 업종 가운데 부처와 협의된 17개 업종을 추렸다"고 설명했다. 민생과 관련된 담합의 핵심인 만큼 앞으로 추가하지 않으면 형평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다만 담합은 반드시 없어져야 할 불공정행위이지만 등록 취소 등은 기업의 존립과 관련된 문제이므로 담합으로 판정할 때마다 매우 엄격한 잣대가 필요하다. 특히 먹을거리와 직결된 식품업계의 담합은 철퇴를 내려야 마땅하나 기업들은 과징금마저도 한꺼번에 내면 경영에 치명타를 입는다며 호소하기도 한다. 매출액 대비 12.1%인 과징금 비율이 낮다고는 하지만 담합으로 얻은 이익과 비교하면 낮은 숫자는 아닐 것이다. 과징금을 매긴 공정위가 금액을 스스로 낮춰주는 것도 업체의 입장을 감안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담합은 다시는 없어야 할 민생침해 범죄다. 기업 입장에서 과징금이 과하다고 생각한다면 담합을 하지 않으면 될 것이다. 두말할 필요가 없다. 기업들은 가격 정보 교환도 담합이냐고 항변하지만 그런 행위도 자제하고 조심해야 한다. 차제에 로펌 등을 통해 과징금을 깎아 달라고 하는 등의 기업들의 로비도 없어져야 한다. 공정한 기준에 따라 과징금을 부과하고, 그 행위가 반복될 경우 예외 없이 업체의 경영과 영업을 중단시킨다면 언젠가는 담합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전에 없던 강한 제재인 만큼 입법 과정에서 충분한 의견수렴을 거쳐야 할 것이다. 업계의 의견과 주장도 무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노동일 칼럼] 국민을 이기는 정치는 없다

지난 14일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은 이재명 대통령의 18일 기자회견을 앞두고 "국민을 상대로 이기려 하지 말라"는 고언을 내놓았다. 여론 악화의 본질은 국정 운영의 "신뢰 기반이 무너진 것이 핵심"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의 직언은 당내 비명계의 견제구나 정치적 수사가 아니었다. 정권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의식의 발로이자, 국민 여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라는 조언이었다. 윤 의원의 성품처럼 온건하지만, 진정성을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윤 의원이 언급한 "신뢰의 위기"는 현재 국정이 직면한 실상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신뢰 훼손의 원인으로 공소취소와 연임 개헌 논란을 짚은 윤 의원은 "기자회견을 통해 찌꺼기를 모두 털어내야 한다"는 해법도 제시했다. 이 대통령 기자회견 후 윤 의원은 "마음을 놓았다"는 호평을 내놓았다. 여론의 반응은 엇갈린다.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리얼미터가 지난 21~23일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50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 대통령의 국정수행 긍정 평가는 전주보다 3.1%p 상승한 37.9%를 기록했다. 부정 평가는 3.3%p 하락해 60.1%로 나타났다. 반면 조원씨앤아이(스트레이트뉴스 의뢰)가 지난 19~21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200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 긍정 평가는 37.0%, 부정 평가는 60.8%로 집계됐다. 같은 기관이 지난 5~7일 실시한 직전 조사에서 이 대통령의 긍정 평가는 38.1%였다. 같은 기간 긍정 평가는 1.1%p 하락, 부정 평가는 1.0%p 상승했다. 주목할 부분은 대통령 지지율 하락의 배경이다. 응답자의 24.3%가 '대통령 관련 사건의 공소취소 논란'을 지지율 하락 원인으로 꼽았다. '부동산 가격과 주택 정책'이 17.7%, '검찰·사법개혁 관련 논란'이 17.5%로 뒤를 이었다. 여론조사에서 보듯 이번 회견에서 가장 예민한 이슈는 대통령 본인의 '공소취소' 논란이었다. 윤 의원이 의혹의 깔끔한 정리를 요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회견에서 대통령은 특검의 공소취소 권한 삭제를 요구했지만 '공소취소 추진 전면 철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특검을 통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말로 여전히 불씨를 남겨둔 태도는 국민의 의구심을 강화시켰을 뿐이다. 이 대통령은 본인에 대한 공소취소 논란을 완전히 폐기하겠다는 선언을 내놓았어야 했다. 야당은 물론 같은 진영 내에서의 공세를 차단하고, 국정운영의 강한 동력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는 점에서 아쉽다. 상대적으로 '연임개헌' 논란에 대해서는 헌법상 불가능하고, 연임 생각도 없다는 말로 확실한 선을 그었다고 본다. 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회견 기조는 대중을 '교육'시키려는 훈계조에 가까웠다. 부동산 문제는 윤석열 대통령과 오세훈 시장 시절, 인허가가 대폭 줄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설사 사실이라 해도 현 정권이 들어선 지 거의 1년 반이 되었다. 전 정권 탓보다 "일은 잘한다"고 자랑한 실력을 보여야 할 때다. 코스피 급등락의 원인이 된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도입에 대해 "정부 정책의 불완전성과 부족함이 있던 건 맞는 것 같다"고 시인했다. 그러면서도 "레버리지 ETF가 어떤 과정으로 결정됐는지 세부적인 절차 내용은 제가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는 결정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국정운영의 최고책임자로서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는 발언이다. 정책의 실패는 수정하고 보완하면 된다. 하지만 그 원인을 외부나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순간, 정책의 위기는 곧바로 정권의 위기로 직결된다. 윤 의원이 지적한 정치의 요체는 동서고금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백성의 자연스러운 본성과 삶의 방식을 순리대로 이끄는 정치를 최고의 정치로 꼽았다. 차선의 정치는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을 제시하여 유도하는 정치라 보았다. 세 번째는 백성을 훈계하고 교육하려는 정치로서, 이때부터 정치가 백성의 본성을 거스르기 시작한다고 한다. 법령과 형벌을 촘촘하게 만들어 백성들의 행동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정치가 차악, 백성과 다투는 정치가 최악의 정치라고 보았다. 다시 윤 의원의 말이다. "아직 임기 초반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 방어가 아니라 국정 방향을 다시 세우는 리셋입니다." 국가가 권력으로 국민의 삶을 간섭하고 억누르는 정치보다 국민의 자유로운 본성을 보장해 주는 정치(1, 2단계)가 진정으로 위대한 정치임은 역사가 증명한다. 이 대통령은 "시장을 이기는 정부도 없지만, 정부를 이기는 시장도 없다"는 말로 부동산 정책의 성공을 자신한 바 있다. 현 시국에 적합한 표현으로 그 말을 빌리자면 "국민을 이기는 정치는 없다"일 것이다. 그게 국정방향을 다시 세우는 리셋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email protected]

[포럼] AI가 인류를 파멸시킬까

챗GPT가 촉발한 거대언어모델(LLM)의 급속한 발전으로 범용인공지능(AGI)이 가시권에 들어오면서 공상과학 영화의 소재였던 'AI 인류멸망론'이 학계와 산업계의 화두로 떠올랐다. AI가 인류를 파멸로 이끌 확률을 뜻하는 'p(doom)'이라는 용어까지 통용되고, 안전 연구자들의 경고도 잇따른다. 반면 멸망론은 과장된 공포이자 기술 경쟁을 위한 '사기'라는 반론도 거세다. 누구 말이 옳고,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멸망론자들의 우려는 AI가 자아를 얻어 인간을 미워한다는 영화적 서사가 아니다. AI가 스스로를 개선하는 임계점을 넘으면 지능이 폭발적으로 상승할 수 있고, 그 목표가 인간의 가치와 어긋나면(정렬 실패) 목표를 극도로 효율적으로 달성하려다 인간을 방해물로 여기거나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목표 달성을 위해 자원 확보와 전원차단 방지를 추구하는 '도구적 수렴'도 우려된다. 의식이나 증오 없이도 보상 지표와 인간의 의도가 어긋나는 것만으로 위험이 생긴다는 논리다. 반대 진영의 얀 르쿤, 앤드루 응 등은 LLM이 다음 단어를 예측하는 정교한 알고리즘일 뿐이며, 지능이 높으면 지배욕을 갖는다는 생각은 인간 중심의 투사라고 반박한다. 전력과 데이터센터, 반도체 공급망의 통제권도 여전히 인간에게 있다. 선두 빅테크가 위험을 과장해 후발 주자의 진입을 막으려 한다는 '사다리 걷어차기' 의혹, 편향·딥페이크·저작권 침해 같은 당면한 피해에서 시선을 돌리는 '연막탄'이라는 비판도 있다. 합리적 판단은 양극단을 피하는 데서 출발한다. '2030년 멸망' 같은 구호는 예측이 아니라 가정적 시나리오에 가깝고, AI가 AI 연구를 돕는 것과 폭발적 자기개선도 별개다. 과학자들의 경고가 확률의 '합의'를 뜻하지도 않으며, 막대한 피해 가능성을 빌미로 모든 규제를 정당화해서도 안 된다. 기업의 이해관계가 경고 내용의 진위를 가리지도 않으므로 동기 추측보다 원자료 접근과 독립 검증, 이해충돌 공개가 우선이다. 그렇다고 AI가 의식이 없다는 이유로 위험을 부정해서도 안 된다. 초지능이 아니어도 AI의 오류나 인간의 오용은 이미 큰 피해를 낳을 수 있다. 지금 필요한 태도는 '실용적 예방주의'다. 딥페이크 선거조작, 환각, 사이버 공격 자동화도 통제하지 못하는 인류가 훗날 초지능을 통제할 수는 없다. 현실의 부작용을 다스리는 법과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AGI 시대의 면역력이 된다. 국가 간 '바닥을 향한 경쟁'을 막기 위해 프런티어 모델에는 AI판 IAEA를 통한 배포 전 제3자 안전 감사를 의무화하고, 전력망·무기·금융 등 핵심 인프라의 최종 결정에는 책임질 수 있는 인간이 개입하도록 해야 한다. 자동화와 노동시장 양극화, 부와 컴퓨팅 자원의 집중에도 서둘러 대응해야 한다. 그다음 멸망론을 '꼬리 위험'으로 관리하되, 성능 개발만큼 해석 가능성과 정렬 연구에 예산과 인재를 투입하게 해야 한다. 극단주의자가 AI로 생물무기나 해킹 코드를 만드는, 대량살상의 문턱이 낮아지는 미래에도 대비해야 한다.최윤식 미래학자■약력 △아시아미래인재연구소 소장 △피닉스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박사 △한국뉴욕주립대학교 미래기술경영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