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네이버 파이낸셜뉴스

최신 뉴스

[테헤란로] 환율 '1550원'의 경고

'위기는 종종 무감각 속에서 자란다.' 원·달러 환율이 장중 1555원을 돌파했다. 개장 기준으로는 17년3개월 만에 최고 수준이다. 환율은 이미 15거래일 연속 1500원대를 기록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최장 구간이다. 과거라면 비상상황으로 받아들여졌을 숫자가 어느새 일상이 됐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1540원 돌파가 충격으로 여겨졌지만 시장은 곧바로 더 높은 숫자에 적응했다. 이상할 정도로 정적이었다. 환율이 1500원을 넘어선 이후에도 위기의식은 좀처럼 감지되지 않았다. 정치권에서도, 사회에서도, 공적 논의의 장에서도 환율 급등이 국가적 현안으로 다뤄지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물가와 금리, 기업 비용, 가계 실질소득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변수임에도 일부 시장 전문가들의 영역처럼 취급됐다. 외환당국의 대응 역시 큰 흐름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두 차례 구두개입성 발언이 있었지만 시장을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환율은 1500원대를 굳혀갔고, 경고신호는 계속 쌓여갔다. 그런데도 위기에 걸맞은 대응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환율이 1550원을 넘어서자 외환당국은 긴급회의를 열고 과도한 변동성과 일방향 쏠림현상에 대한 강경 대응 방침을 내놓았다. 역외 차액결제선물환(NDF) 거래와 투기적 거래에 대한 경고도 이어졌다. 늦었지만 필요한 조치다. 환율이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하면 당연히 더 이른 단계에서 논의됐어야 할 대응이기도 하다. 물론 최근 환율 상승에는 중동 정세 불안, 미국 금리 전망, 글로벌 달러 강세 등 외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외환당국이 지목한 역외 NDF 거래 역시 단기적인 변동성을 키우는 요인일 수 있다. 그러나 시장은 개별 요인의 나열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원인 설명의 반복이 아니라 정책신호에 대한 신뢰의 회복이다. 늦었지만 외환당국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시장이 주목하는 것은 회의의 횟수도, 발언의 수위도 아니다. 정책이 실제로 기대와 흐름을 바꿀 수 있는가, 그 단 하나다. 지금부터가 진짜 시험대다. 1550원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시장이 오랫동안 보내온 경고의 누적된 결과다. 문제는 그 경고가 충분히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는 데 있다. 위기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한동안 그 안에 있었고, 다만 그것을 위기로 인식하지 못한 채 익숙해지고 있었을 뿐이다. imne@fnnews.com 홍예지 금융부 차장

[사설] 금융시장 휘청, 예상 뛰어넘는 강력 대책 나와야

금융시장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증시는 미국 반도체주 급락 충격에 휘청였고, 원·달러 환율은 장중 1550원선을 웃돌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국채금리까지 급등하면서 불안감이 시장을 넘어 경제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그야말로 '블랙 먼데이'다. 코스피와 코스닥이 8일 동반 급락하며 잇따라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됐다. 코스피는 장 초반 8000선이 무너지고 7500선도 내줬다. 코스닥도 1000선이 깨졌다. 충격의 진원지는 미국 반도체주 폭락이다. 엔비디아와 마이크론, AMD 등 주요 반도체주의 시가총액이 지난 주말 하루 만에 1조3000억달러 넘게 증발했다. 브로드컴의 실적 발표를 계기로 AI 데이터센터 투자와 반도체 호황이 정점을 지난 것 아니냐는 우려가 확산했다. 여기에 미국의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까지 거론되면서 위험자산 회피 심리가 커졌다. 반도체 의존도가 높은 한국 증시가 미국발 충격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외환시장 상황은 더 심각하다. 원·달러 환율은 장 초반 1555원을 넘어섰고, 전날 야간거래에서는 1560원선마저 돌파했다. 중동전쟁 장기화에 따른 고유가와 외국인 자금 이탈 등이 맞물리며 환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채권시장에서도 3년 만기 국고채 금리가 2년7개월 만의 최고 수준까지 상승했다. 한국 경제를 둘러싼 여건도 녹록지 않다. 반도체 등 주력 산업 경쟁력에 힘입어 경상수지 흑자가 이어지고 국가 신인도도 비교적 견고한 편이다. 그럼에도 중동 정세 불안이 100일 넘게 이어지면서 안전자산인 달러 선호현상이 이어진다. 수출 호황에도 기업들이 벌어들인 달러가 국내로 충분히 유입되지 않고 있는 데다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투자 계획에 따른 달러 수요도 부담이다. 시장이 향후 원화 약세에 베팅하고 있다는 뜻이다. 외국인투자자 역시 20거래일 넘게 순매도를 이어가며 시장 불안을 키우고 있다. 당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연이어 구두개입에 나섰고 휴일에도 긴급 시장점검회의를 열어 대응방안을 논의했다. 투기적 움직임과 시장교란 행위에 대한 엄정 대응 방침도 밝혔다. 국민연금 환헤지 비율 상향 등의 대책도 거론된다. 그러나 이런 조치만으로는 시장을 안정시키기 어렵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당국이 꺼내 들 수 있는 카드가 제한적이라는 점이 문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시장의 불안을 잠재울 보다 강력한 대응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 때 안전판 역할을 했던 한미 통화스와프 재추진 등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책이 필요하다.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중장기 전략을 재점검하고, 금리 상승에 따른 가계부채와 빚투 리스크에도 선제적으로 대비해야 한다. 시장이 보내는 경고를 일시적 충격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물론 과잉반응도, 과소평가도 모두 위험하다. 지금이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하고 대응책을 마련할 골든타임일 수 있다.

[사설] 2기 접어든 李정부 최고 국정목표는 성장과 통합

이재명 대통령이 8일 취임 1주년을 맞아 내외신 기자회견을 했다. 경제, 부동산, 안보, 외교, 투표용지 부족 사태 등에 관해 견해를 소상히 밝혔다. 이 대통령이 취임 1년을 맞은 시점에 한성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함으로써 사실상 이재명 정부 2기 체제로 들어섰다. 한 국무총리 후보자 지명은 향후 국정에서 첨단산업 육성을 포함한 경제에 역점을 두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역대 두번째 여성 국무총리 후보자라는 점도 여성의 경제·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의미를 담았다고 본다. 이제 이 대통령은 지난 1년 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회견에서 언급한 것처럼 필요하다면 개각을 통해 국정을 쇄신하여 민생과 경제를 발전적으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 다양한 현안들이 있지만 국민들로서는 가장 중요한 분야가 경제다. 한국 경제는 최근 장기 내수부진에 빠져 침체를 거듭했다. 저성장 고착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시점에서 천만다행으로 반도체가 호황 국면에 들어서 경제를 살려내는 형국이다. 반도체 활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지만 첨단산업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앞으로 점점 더 커질 것이다. 반도체 산업이 뒤떨어진 유럽이나 일본 등을 보면 일찍이 반도체를 주요 업종으로 삼아 키워온 우리가 정부와 기업이 얼마나 잘했는지 실감하게 된다.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는 전통 제조업도 살리면서 이재명 정부는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로봇, 바이오·제약 등 최첨단 고부가가치 산업을 키우는 데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없다면 한국 경제가 현재 어떤 상황에 놓여있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기업은 정부와 함께 경제를 이끌어가는 쌍두마차다. 어느 한쪽에 문제가 생기면 경제가 느려지거나 심하면 전복되기도 한다. 정부와 기업이 공동보조를 맞추어 협력해야 경제가 지속성장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탈 없이 나아갈 수 있다. 기업이 없으면 국가도 경제도 없다. 기업은 공격이나 탄압의 대상이 아니라 도와주고 돌봐줘야 할 경제주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기업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해외 시장 개척과 수출 증대를 위해 피땀을 흘리고 있다. 국가가 할 일은 이런 기업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정책의 큰 그림을 통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마침 6·3 지방선거가 최근 끝나 지자체 단체장들과 지방 의원들이 새 임기를 시작했다. 국회에도 새로 뽑힌 의원 14명이 입성하는데,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기를 기대한다. 정부, 중앙정부의 힘만으로 나라 전체를 이끌어갈 수 없다. 지방정부와 국회가 함께 손발을 잘 맞추어야 나랏일이 잘 굴러간다. 지난 1년 동안 바로잡아야 할 정치적 사안들은 어느 정도 정리됐다. 선거 이후에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예상치 못한 갈등요소가 불거졌는데, 신속한 수사와 제도 개선을 통해 수습해야 할 것이다. 선거에서 드러난 민심처럼 이 대통령이나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지금부터는 일방적 독주를 자제하고 야당과의 협치를 통해 통합의 정치를 구현해야 할 것이다. 강력한 성장전략을 앞세워 'K-이니셔티브'의 새 시대를 열겠다고 한 이 대통령의 약속이 반드시 지켜지기 바란다. 더불어 혁신과 개혁이 없이는 발전이 있을 수 없다. 노동, 교육 등 필요한 분야에서 개혁의 기치를 들어 올릴 때다.

[fn광장] ESG 환상 접고 사업 본질 집중해야

도덕론과 종말론이 결합하면 무소불위가 된다. 세계의 종말에 대비하고 인류를 구원하는 대의명분으로 절대적 권위를 확보하기 때문이다. 각종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교리의 기본적 구조에서 도덕적 당위론과 종말적 구원론이 교차하는 이유이다. 사회경제적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에너지 고갈, 식량위기, 물 부족 등이 단골 메뉴로 변주된다. 또한 이러한 사안들은 다양한 이해관계와 결합되면서 사회적 영향력이 생겨나고 기업경영에도 파급되었다. 1968년 서유럽 지식인들을 주축으로 국제 전문가그룹인 로마클럽이 발족하였다. 1972년 출간한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는 인구 증가, 공업생산, 식량생산, 환경오염, 자원고갈의 5가지 분야에 대해 1900년부터 1970년까지의 자료를 바탕으로 2100년까지 추이를 예측했다. 핵심은 세계인구가 증가하고 자원소비가 계속되면 현대문명은 한계에 도달한다는 경고였다. 특히 석유와 천연가스의 고갈시기를 20~30년 후인 2000년대로 전망하였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이러한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셰일가스와 심해유전을 비롯해 확인된 에너지 매장량은 오히려 대폭 증가하였다. 이러한 오류와는 무관하게 로마클럽이 제시한 유한한 자원과 무한한 성장의 충돌이라는 거대담론은 자원고갈과 문명종말의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지속가능성의 개념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이러한 맥락에서 2000년대 기업분야에서 환경·사회·지배구조(ESG)경영이 부각되었다. 21세기 기업 도덕론인 ESG는 기후변화, 자원절약, 환경보호, 다양성 확보, 사회갈등 해소 등 각종 사안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였고 금융업계는 일부 투자와 대출에 ESG 요소를 반영하였다. ESG는 정치권, 언론과 학계, 전문가 집단 및 시민단체가 기업에 각자의 입장에 따른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한 효과적 명분이 되었다. 심지어 전 세계에서 대주주·경영진의 도덕적 흠결을 가리는 전술적 도구로서 ESG가 호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일종의 메가트렌드인 ESG는 미국에서부터 거품이 빠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하고 국제기후금융계획도 폐지하였으며 화석에너지 관련규제도 대대적으로 철폐하고 있다. 미국 주요 산업에 대한 부담 감소라는 경제적 측면과 함께 탄소배출과 기후변화의 상관성 등에 대한 실질적 근거도 불명확하다는 입장이다. 실제로도 화석연료 사용과 기후변화의 상관성에 대한 과학적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또한 ESG를 주도하던 유럽의 경제적 쇠퇴도 동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특히 친환경 저탄소 관련기술을 선도하여 차세대 산업경쟁력으로 발전시키려던 유럽연합(EU)의 미래산업 구상이 차질을 빚으면서 자동차, 화학 등 주요 산업들이 난관에 봉착했다. 글로벌 자동차 산업이 대표적이다. 21세기 초반 전기차(EV)는 온실가스 배출감소를 통한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대의명분에 배터리 기술발전이 결합되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증폭되었다. 각국 정부도 보조금 지급, 충전인프라 확충 등으로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독일의 벤츠, BMW, 미국의 GM, 포드 등은 2030년대 100% EV 전환을 선언하였다. 일본의 닛산은 EV 선구자였고, 혼다도 적극적으로 투자하였다. 반면 도요타는 급격한 EV 의무화 정책에 부정적 입장으로 하이브리드-EV 병행전략을 표방하였고, 전 세계 ESG 투자자와 환경단체로부터 변화를 거부하는 시대착오적 기업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기존 자동차 기업 중에서 최대 승리자는 도요타이다. 현재 도요타는 하이브리드를 앞세워 글로벌 자동차 시장 1위를 질주하는 반면 여타 회사들의 EV 투자는 회수 불가능한 매몰비용으로 전락하고 있다. 특히 혼다는 EV사업 정리에 따른 90억달러 손실로 1957년 상장 이후 69년 만에 적자로 전환하였다. 기존 주요 자동차 기업들이 미래전략산업으로 추진했던 EV시장의 주도권마저 신규 참가자인 미국 테슬라와 중국 BYD에 넘어갔다. 현시점 우리나라 기업의 입장에서 ESG의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는 없다. ESG 흐름을 각자의 입장에서 적절히 수용하면 된다. 다만 ESG의 트렌드에 경도되어 현실과 사업전략이 유리되는 경우는 경계해야 한다. 정치사회적 트렌드에 과잉반응하여 추진하는 사업의 실패는 오롯이 기업의 손실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ESG 거품은 소위 본진인 미국부터 급속하게 빠지고 있다. ESG의 도덕론적 한계를 통찰하고 사업의 본질인 고객과 시장에 천착해야 한다. 김경준 전 딜로이트컨설팅 부회장

[포럼] 과학기술 외교력이 국가 경쟁력

지난달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제11회 유엔 과학기술혁신(STI) 포럼'이 열렸다.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주관 포럼은 2030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달성을 위해 과학기술의 역할을 논의하는 국제 무대다. 올해도 전문가 500여명이 기후위기, 빈곤, 청년창업, 기술격차 등 복합과제를 논의했다. 필자는 유엔 과학기술 전문가그룹 위원으로 '물 시스템 전환' 세션과 '청년창업 지원' 특별세션에 패널로 참여했다. 물 부족 문제 논의 중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의 물 소비가 주요 의제로 떠올랐다. 빅테크 데이터센터의 막대한 냉각수 사용으로 일부 지역의 식수 공급까지 우려된다는 내용이었다. 기후와 빈곤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AI 인프라 문제가 핵심 의제로 다뤄진 장면은 상징적이다. 과학기술이 산업과 연구 영역에 머물지 않고 국제질서와 외교·안보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확장됐음을 보여준다. 과학과 외교가 맞물려 움직인 역사는 오래됐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핵무기 개발 후 핵 비확산 논의의 문제의식과 근거를 제공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는 백신이 외교 수단이 됐다. 2021년 이스라엘은 시리아에 스푸트니크V 백신 비용을 지불하고 억류된 자국민을 돌려받았다. 백신이 적성국과의 협상에서 외교 카드로 활용된 사례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외교를 보조하는 수단을 넘어 국제질서를 움직이는 권력이 됐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스타링크는 전장 통신망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고, TSMC의 반도체 생산 역량은 미중 전략경쟁의 핵심 변수로 거론된다. 유전체 데이터는 안보자산으로 분류되고, 반도체 공급망 재편은 국가 간 연구협력까지 흔들고 있다. 첨단기술은 이제 경제와 안보, 외교를 동시에 움직이는 전략자산이다. 이런 시대에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에서 앞서려면 기술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국제 의제를 선점하고,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연구 성과를 세계의 규범과 표준으로 연결하는 힘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과학기술 외교력이다. 2023년 서울에서는 노벨상 수상자들과 청소년들이 대화하는 '노벨프라이즈 다이얼로그'가 열렸다. 필자는 조직위원장으로 참여하며 스웨덴 등 여러 나라가 수십년간 구축한 글로벌 과학 네트워크의 힘을 실감했다. 일본의 노벨과학상 수상자 27명 배출 배경에도 연구 투자뿐 아니라 국제사회와 연결해 온 시간의 축적이 있다. 우리에게도 그런 축적이 필요하다. 그 연결의 시간을 한국도 이제 본격적으로 쌓아가야 한다. 우리 연구자들이 국제 회의장을 더 자주 찾아야 하고, 한국 과학기술의 성과가 세계의 언어로 더 폭넓게 오가야 한다. 과학기술외교는 선언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자리에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사람이 꾸준히 나타나야 한다. 기술패권 시대의 경쟁은 더 많은 기술을 개발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기술의 규칙과 표준을 누가 만들고, 어떤 가치와 방향으로 이끌어 가느냐의 경쟁으로 이어진다. 과학기술이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시대라면 과학기술 외교력은 곧 국가 경쟁력이다. 문애리 한국여성과학기술인 육성재단 이사장

[사설] 젠슨 황과 연쇄회동, AI 주도권 확고히 쥘 계기로

7개월 만에 방한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연일 종횡무진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서울 강남의 치킨집에서 삼성, 현대차 총수와 깐부회동을 했던 황은 이번엔 홍대 삼겹살 식당에서 SK, LG, 네이버 회장과 만찬을 가졌다. 강남 PC방에선 게임회사 수장을 만났고, 을지로 평양냉면 식당에서 다시 현대차 회장과 회동했다. 이어 방송, 야구장까지 누볐다. 방한 마지막 날인 8일엔 국내 인공지능(AI), 로봇 스타트업 대표들과 비공개 간담회도 예정돼 있다. 엔비디아가 한국을 중시한다는 신호는 차고 넘친다. 황은 입국 첫날부터 "한국에 깜짝 놀랄 선물을 준비했다"며 이목을 끌었다. 그러면서 "한국은 탁월한 제조업 능력과 로봇산업을 지원할 거대한 생태계도 조성돼 있다"며 한국의 AI 저변을 평가했다. 황이 준비한 선물은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가속기 베라루빈, 베라 중앙처리장치(CPU) 등과 관련된 국내 협력 프로젝트라고 한다.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저전력 D램 등 대규모 반도체 물량을 주문할 가능성도 있다. 연구개발(R&D)센터 설립도 공식화함으로써 차세대 AI 생태계 핵심 파트너로 한국에 손을 내민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한국 입장에선 엔비디아와 협력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와 소프트웨어 생태계는 현재 글로벌 AI 산업의 사실상 표준에 가깝다. 엔비디아가 구축한 생태계는 세계 기업들이 공통으로 올라 타는 거대한 인프라가 됐다. 엔비디아 플랫폼을 통해 한국의 메모리, 파운드리, 패키징, 로봇 기술이 세계 시장과 바로 연결된다. 엔비디아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분야는 많이 있다. 문제는 협력방식이다. 세계로 가기 위해 엔비디아에 올라 타는 것은 필요하지만 부품을 공급하고 엔비디아 칩을 사서 쓰는 수준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뜻이다. 한국은 AI 시대 핵심 가치사슬에서 하청 공급사로 전락하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반도체 호황의 외형에 취해 산업 주도권의 본질을 놓쳐선 안 된다는 뜻이다. 관건은 역시 피지컬 AI 주도권이다. 생성형 AI가 모니터 안에서 세계를 바꿨다면 피지컬 AI는 로봇과 자동차, 공장과 물류 현장에서 현실세계의 생산 시스템 전체를 뒤흔드는 기술이다. 한국은 자동차, 배터리, 조선, 전자, 반도체 공정이라는 강력한 물리적 기반을 갖고 있다. 이 기반 위에 AI 모델, 로봇 운영체계, 산업 데이터 등 제반 기술을 결합해야 진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황이 한국의 로보틱스 가능성을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엔비디아와의 협력을 한국형 피지컬 AI 생태계 구축을 위한 지렛대로 삼아 한국 기업이 더 높이 날 수 있길 바란다. 정부는 한국의 제조현장을 AI 실험장으로 전환하는 현실적인 전략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기업은 막대한 제조 데이터를 자산으로 기술과 표준을 새로 만드는 데 사활을 걸어야 한다. 더불어 기업 이익이 기술과 미래 투자를 위해 쓰일 수 있도록 폭넓은 사회적 지원도 필요하다.

[사설] 반도체 호황 의존 넘어 진짜 경제실력 키워야 할 때

최근 우리 경제에 대한 밝은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올해 한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1.7%에서 2.6%로 대폭 올렸다. 1·4분기 성장률은 OECD 35개 회원국 가운데 무려 2위를 찍었다. 글로벌 투자은행들도 앞다퉈 한국의 연간 성장률을 3%대로 올려 잡았다. 그런데 이런 긍정적 지표와 배치되는 전망이 나왔다. OECD가 지난 3일 공개한 최신 데이터에 따르면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올해 1.66%, 내년 1.52%에 이어 내년 4·4분기 1.46%까지 떨어진다는 전망이다. OECD가 관련 수치를 제공한 이래 처음으로 1.5%를 밑도는 전망이 나온 것이다. 주요 47개국 순위로는 2년 새 28위에서 32위로 내려앉은 것으로 나타났다. 상반된 성장률 수치는 우리 경제의 근본적인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경제성장률 수치가 상향되는 건 반도체 특수가 견인하는 효과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재성장률이 하락 추세라는 건 우리 경제의 생산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생산성 하락은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투자 둔화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구조 문제를 모두 포함한다. 이런 구조적 문제가 계속 방치되고 있다는 얘기다. 주가가 최근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수출이 잘되는 것을 보면서 호황이 온 것으로 착각할 때가 아니다. 반도체 사이클이 정점에 도달하면 떨어질 개연성이 높다. 지금 잘나갈 때 허약한 경제체질을 바꾸지 못하면 하강 국면의 충격은 훨씬 가혹해진다. 우리 경제에 대한 자신감도 좋지만 좋은 흐름을 탈 때 미래에 대한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우선, 반도체 효과를 산업 생태계 전반으로 확산시키는 환경을 만들 때다. 반도체에서 벌어들인 이익과 기술력을 생산성을 높이는 설비와 기술에 재투자하는 게 맞다. 아울러 인공지능(AI) 관련 투자가 설비와 지식재산 투자로 이어지고 연관 산업의 고도화로 확산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이렇게 반도체의 경쟁력을 다른 산업에서도 효능감을 느낄 수 있도록 가치사슬을 확장해야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동력이 될 수 있다. 경제체질을 바꾸는 구조개혁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잠재성장률 하락은 인구 고령화와 노동공급 감소, 자본축적 둔화, 생산성 정체가 중첩된 결과다. 이전 정부들이 생산성을 갉아먹는 사회 전반의 구조적 문제를 인식하면서도 개혁을 제대로 밀어붙이지 못했다. 노동시장 유연화, 시장개방, 규제 혁신이라는 불편한 과제들에 정면으로 마주해야 될 때다. 생산성 향상을 위한 구조조정은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을 피하면 더 큰 위기로 돌아온다. 잠재성장률은 한 나라 경제의 기초체력이다. 내수가 침체되면 추가경정예산을 꾸려 어느 정도 반등시킬 수 있다. 수출이 어려우면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잠재성장률은 이런 단기 부양책으로 올릴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노동과 자본, 기술과 제도, 사람과 산업이 함께 변해야 상승할 수 있는 수치다. 그 변화도 단시일 내에 나타나지 않고 꾸준히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확인할 수 있다. 표면의 숫자 뒤에 숨겨진 우리의 실제 경제 실력을 깨달아야 한다. 노동친화적 정권이 있는 지금이 역설적으로 구조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유리한 시점임을 명심해야 한다.

[강남視角] 증시 최고점 찍고 내려가나

주식시장 곳곳에서 피크아웃(정점 통과 후 하락) 불안감이 고개를 들고 있다. 현 정부 출범 1년여 만에 코스피가 6000p가량 급등하는 등 전무후무한 급등장이 전개됐지만 상승폭만큼 추격매수 부담 역시 커졌다. 더욱이 글로벌 금융시장의 석학과 투자 대가들이 잇달아 경고음을 내고 있는 것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대목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이다. 2000년 저서 '비이성적 과열' 출간을 통해 인터넷 버블 붕괴를 경고했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앙지인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위험성도 비교적 정확하게 짚어냈다. 2013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그가 고안한 '경기조정 주가수익비율(CAPE)'은 미국 증시 기준 40배 수준으로, 역대 최고치인 2000년 43배에 근접했다. CAPE는 현 주가를 최근 10년간 물가를 반영한 실질 순이익 평균치로 나눈 것으로 단기 이익에 급변하는 주가수익비율(PER)의 한계를 보완한 게 특징이다. 이 지표가 역사적 고점에 다가선 것은 사실상 시장이 역대급 실적 기대감을 선반영했음을 의미한다. 워런 버핏 역시 최근 투자자들의 심리를 '도박'에 비유하며 시장 과열을 우려했다. 그동안 증시 낙관론자들은 이러한 경고를 저금리 등을 근거로 반박해왔다. 2000년 미국 30년 만기 국채금리 6.5% 수준과 비교하면 현재 금리는 4%대로 자금조달 비용이 여전히 낮고, 따라서 주식 투자 매력이 유지된다는 논리다. 하지만 채권시장에선 이 같은 장밋빛 전망에 균열을 내고 있다. 지난달 미국 30년 만기 국채금리는 장중 2007년 이후 최고 수준까지 치솟았고, 미국 10년물 국채금리도 심리적 저항선인 4.5%를 넘어섰다. 일본 10년물 국채금리는 약 30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올라섰다. 미국과 일본의 채권 금리 발작은 초저금리 시대의 종언과 통화정책 전환 가능성을 시사한다. 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당시 코스피는 8000선을 돌파한 직후 7100선까지 밀려나며 급격한 변동성에 노출됐다. 이미 금리인상은 기정사실화로 굳어지고 있다. 얼마 전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는 통화정책 방향 기자간담회에서 금리인상을 시기의 문제로 봤다. 20년 이상 제로금리로 글로벌 투자자들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나 다름없었던 일본은 2024년 이후 물가안정과 환율방어를 위해 금리 정상화에 나섰다. 특히 한동안 묶어놨던 기준금리가 이달에 0.25%p 인상으로 기울고 있어 31년 만에 1%대 진입을 목전에 뒀다. 전 세계에 풀린 엔화 자금의 본격적인 회수를 의미해 엔캐리트레이드 청산 리스크도 높아진 셈이다. 미국 역시 사정이 복잡하다. 인플레이션 압력 고조로 케빈 워시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의 금리인하 가능성에 회의적인 기류가 농후하다. 4월 생산자물가지수(PPI)는 전년 동월 대비 6.0%, 소비자물가지수(CPI)는 2023년 5월 이후 가장 높은 3.8%나 상승했다. 이런 시기에 성급한 금리인하는 물가를 더 자극할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금리를 올리자니 트럼프 대통령과 정면충돌이 불가피하다. 만에 하나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국내에선 자금이 빠져나가 원·달러 환율 상승을 부추길 게 자명하다. 증시에선 외국인의 파상적인 매도 공세가 환차손 우려로 더 거세질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위험요인이 증시 조정국면으로 이어진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이 '비이성적 과열'을 경고했던 1996년 이후에도 미국 증시는 2년 이상 상승세를 이어간 바 있다. 다만 현재 시장에 내재된 가격 부담과 구조적 환경 변화는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운 현실이 됐다. 기대수익률은 낮추고 포트폴리오를 리밸런싱하는 등 리스크 관리 강화가 중요해졌다. 일기예보 비 소식에 반드시 비가 내리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우산조차 챙기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 있다. 지금 시장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 또한 다르지 않다. 강세장의 환희에 취해 있기보다 정점 너머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눈을 돌려야 한다. winwin@fnnews.com

[기자수첩] 후폭풍 거센 '투표용지 부족' 사태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후폭풍이 이어지고 있다. 선거관리위원회를 향한 쇄신 요구도 거세다. 이번 사태로 드러난 선관위의 안일한 선거 준비와 부실한 대응은 향후 국정조사나 별도 조사기구로 철저히 규명될 필요가 있다. 다만 이미 치러진 선거를 다시 해야 하는지, 나아가 이를 곧바로 '부정선거'로 규정할 수 있는지는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7일까지 공개된 선관위 발표에 따르면 이번 지방선거에서 전국 67개 투표소가 투표용지 부족으로 추가 용지를 긴급 공급받았다. 이 가운데 실제 투표가 중단됐다가 재개된 곳은 22곳이다. 선관위는 통상 투표용지가 과다하게 남는 점을 고려해 선거인 수의 50% 수준만 인쇄했다고 해명했다. 본투표 참여 규모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실책이다. 이번 사태는 선거법 위반 소지도 안고 있다. 공직선거법 제151조 1항은 투표용지를 선거일 전날까지 각 읍·면·동 선관위에 송부해 봉인·보관하도록 규정한다. 선거 당일 추가 공급 과정이 적법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또 일부 선거인은 오후 6시 이후 투표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와 개표방송에 노출됐다는 점에서 투표 마감시각까지 당선인을 예측하게 하는 여론조사 결과 공표를 막는 선거법 108조에 위반된다는 지적도 있다. 이 때문에 상당수 시민은 재선거를 요구하고 있다. 다만 재선거 여부는 엄격한 법적 요건에 따라 판단된다. 공직선거법과 기존 판례에 따르면 선거 무효는 단순한 절차상 하자만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선거법 위반이 존재하고, 그 위반이 실제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돼야 한다. 우선 선관위의 실책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따라야 한다. 사태의 원인과 제도적 허점이 명확히 밝혀져야 한다. 필요하다면 국정조사나 특검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한 유권자에 대해서는 국가 손해배상도 이뤄질 수 있다. 다만 당장 이번 사태를 외부 세력이 개입한 '부정선거'로 단정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대법원은 지난 2022년 민경욱 전 미래통합당 의원이 제기한 선거무효소송을 기각하면서 각 부정선거 의혹의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부정선거 행위 주체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이 같은 주장은 법적으로 인정되기 어렵다. 냉정한 사실 확인과 재발 방지책 마련에 집중할 때다. scottchoi15@fnnews.com

[포럼] 스타벅스의 출구 전략

영미권과 달리 한국의 기업은 오너가 직접 경영하거나 영향력을 발휘한다. 덕분에 의사결정이 빠르고, 책임감도 강하다. 특히 산업화 시절에 오너 창업주의 리더십은 강력했다. 그들은 일자리를 만들고, 국가경제를 일으켰다. 비록 정경유착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지만, 존경받을 자격은 충분하다. 그러나 오늘의 오너 경영인은 과거 창업주와 다르다. 일부 오너 경영인은 기업을 자신의 이미지와 취향을 드러내는 무대로 착각한다. 개인의 이익과 인기가 기업의 장기적 신뢰보다 앞선다. 오너의 인식 오류는 개인의 실수로 끝나지 않는다. 피해는 주주, 근로자, 협력업체, 납품 중소기업으로 번진다. 스타벅스는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에 '탱크데이' 프로모션을 시작하면서 현대사의 아픔을 희화화했다. 비난이 쏟아지자, 정용진 회장은 대표이사와 담당 임원을 해임했다. 반나절 만이었다. 그러나 여론은 정용진 회장의 정치 성향에 주목했다. 오너가 계열사의 프로모션까지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너의 성향은 조직의 문화에 스며들 수밖에 없다. 이번 스타벅스 논란은 그런 점에서 새로운 형태의 오너리스크다. 1966년 당시 비료는 국가의 핵심 산업이었다. 삼성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은 울산에 세계적 규모의 공장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건설자재를 수입하면서 사카린 원료를 밀반입했다. 식용 사카린을 제조해 이익을 취하려 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창사 이래 최대 위기였다.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했고, 관련 임원인 차남과 함께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로부터 1년5개월 후 경영에 복귀했고, 1969년 삼성전자를 설립했다. 2014년 대한항공의 '땅콩회항' 사건도 사회를 들끓게 했다. 조현아 당시 대한항공 부사장은 승무원의 기내 서비스가 맘에 들지 않자 이륙하려던 여객기를 강제로 되돌렸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갑질에 그치지 않았다. 총수 일가의 지배구조 문제로 번졌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직접 사과했고, 당사자도 부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여론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다만 불매운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리 미워도 외국에 가려면 대한항공을 타야만 했다. 마침 해외유행 붐이 일었었다. 스타벅스의 오너리스크는 생각보다 오래갈 수 있다. 과거 삼성은 기업 헌납과 회장 퇴진이라는 초강수를 뒀다. 그리고 삼성전자라는 획기적 전환점을 만들었다. 스타벅스는 사과와 임원 해임 그리고 행사를 기획한 실무팀을 해산한 것밖에 없다. 정용진 회장은 이번 문제를 마케팅 실수와 검수 실패쯤으로 본 듯했다. 시간이 흐르면 해결될 거란 생각은 버려야 한다. 대한항공처럼 수요 폭발과 독과점적 시장 구조의 덕을 기대할 수 없다. 커피는 대체재가 많아 스타벅스 말고 갈 곳이 많기 때문이다. 스타벅스의 오너리스크는 법적 책임을 묻기 어렵다. 그 대신 소비자의 감정과 기억에 더 오래 남을 것이다. 오너리스크가 무서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관건은 스타벅스의 출구전략이다. 오히려 오너리스크를 스스로 도려내야 한다. 오너의 성향과 기업 운영을 분리하고, 조직의 문화를 바꿔야 한다. 시장과 소비자가 인정할 때까지 변화하고, 신뢰를 쌓아야 한다. 스타벅스가 존경받는 기업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오동윤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

[fn광장] HBM 넘어 V-D램 준비하라

인공지능(AI)이 촉발한 메모리 슈퍼사이클이 한국 반도체 산업을 다시 끌어올리고 있다. 올해 1·4분기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매출 81조원, 영업이익 53조원을 기록했고 SK하이닉스도 매출 52조원, 영업이익 37조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생성형 AI 확산으로 그래픽처리장치(GPU)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결합한 AI 가속기 수요가 폭증하면서 HBM, 서버용 D램, 낸드플래시까지 동반 호황을 맞은 결과다. 그러나 지금의 호황이 곧 미래의 초격차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AI 서버 투자는 2029년 이후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공급 부족이 길어질수록 후발국과 신규 기업의 진입 동기도 커진다. 범용 D램과 낸드 가격이 급등하는 시기일수록 기술 선도기업은 현재 수익을 미래 연구개발(R&D)과 공급망 강화에 재투자해야 한다. 메모리 산업의 경쟁축은 이미 단순 증산에서 차세대 구조 전환으로 이동하고 있다. HBM4는 2048비트 인터페이스와 스택당 2TB/s 수준의 대역폭을 요구하고, HBM4E는 더 높은 속도와 열·전력 조건을 요구할 것이다. D램은 11㎚급을 넘어 10㎚ 이하로 진입해야 하고, 낸드플래시는 300단 이상 수직적층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더 큰 과제는 기존 2차원 D램 셀의 한계를 넘어서는 3차원 V-D램 또는 3D-D램이다. 2029년 이후에도 기술우위를 유지하려면 셀 구조 설계, 주변회로와 셀의 수직접합, 초박형 웨이퍼 가공, 하이브리드 본딩 등 전혀 다른 난도의 공정을 양산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이는 단순한 선폭 축소가 아니라 재료, 장비, 패키징, 계측 기술이 동시에 바뀌는 산업 전환이다. 중국의 추격도 더 이상 가볍게 볼 수 없다. CXMT는 범용 D램 시장에서 점유율을 빠르게 높이며 4위권 사업자로 부상했고, HBM 개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YMTC는 270단 안팎의 3D 낸드를 양산하고 300단 이상 제품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술격차는 존재하지만 중국 정부의 지원과 내수 시장, 국산 장비 사용 확대가 결합되며 추격 속도는 빨라지고 있다. 미국의 수출규제가 중국의 첨단 공정을 늦추는 효과는 있지만, 동시에 중국의 소재·부품·장비 국산화를 가속하는 역설도 만들고 있다. 한국이 메모리 소자 기술만 앞서고 장비·소재 생태계에서 뒤처진다면 초격차의 기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의 과제는 명확하다. 첫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현재의 HBM 증설에 머물지 말고 10㎚ 이하 D램, V-D램, 3D-D램, 16단 이상 HBM을 동시에 준비해야 한다. 둘째, 국내 소재·부품·장비 기업은 기존 공정의 대체공급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하이브리드 본딩, 초박형 다이 핸들링, 웨이퍼 박막화, 고정밀 계측·검사 등 차세대 공정에서 차별화된 제품을 확보해야 한다. 셋째, 정부는 단기 과제가 아니라 5년 이상 장기 로드맵을 기반으로 R&D, 실증, 양산 검증을 연결해야 한다. 반도체 장비와 소재는 연구실 성능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수요기업의 테스트베드와 초기 구매, 정부의 위험 분담이 결합돼야 실제 양산에 들어갈 수 있다. 특히 국산화율이라는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특정 공정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신뢰성과 수율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대학·연구소·소재·부품·장비 기업이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는 12인치 웨이퍼 실증 인프라인 트리니티 팹이 조속히 구축·운영되어야 하며, 전문인력 양성체계도 확충해야 한다. 실패 위험이 큰 선행 공정일수록 민간 소재·부품·장비 기업의 단독투자가 어렵기 때문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역대 최대 영업이익 일부를 활용해 연 1조원 규모의 소재·부품·장비 기초연구 자금을 출연하고, 이를 통해 국내 소재·부품·장비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시대의 메모리 호황은 한국 AI 반도체 산업에 다시 찾아온 기회다. 그러나 중국과의 격차가 줄어드는 속도를 고려하면 안심할 수 없다. 현재의 실적에 취해 미래 구조 전환이 늦어진다면 초격차는 순식간에 평준화될 수 있다. 중국은 더 이상 저가 범용 제품만으로 경쟁하지 않는다. 장비와 소재까지 함께 키우며 한국의 약한 고리를 파고들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차세대 메모리 구조와 국내 소재·부품·장비 생태계를 함께 키우는 국가적 전략이다. 지금의 투자 결정이 2030년 글로벌 메모리 지형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반도체의 다음 10년은 HBM의 성공을 넘어 V-D램과 3D-D램,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국내 공급망을 얼마나 빨리 양산 경쟁력으로 연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석학교수

[기고] 새 정부 1년, 기초연구의 새로운 길 열어

새 정부 출범 1년이 지났다. 과거에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찬바람이 기초연구 생태계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그 복원을 위한 힘찬 여정의 시간도 1년이 벌써 지난 것이다. 지난 1년간 예산의 복원을 넘어 기존의 예산보다 확대되는 등, 기초연구 생태계는 이제 회복의 과정 중에 있다. 기초연구에 대한 지원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의 확보가 국가 경쟁력의 출발점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새 정부의 기초연구 R&D 지원 방침 중 두드러지는 특징은 청년 연구자에 대한 다양한 지원, 우수 연구자에 대한 장기적 안정적 지원, 개인 연구를 넘어선 기관 차원의 연구생태계 강화, 그리고 지역 R&D의 활성화 등이다. 과학연구 성과의 대국민 홍보에도 힘을 써서 기초연구의 중요성을 체감하게 하겠다는 방향성도 바람직하다고 본다. 다만 준비 없이 진행된 지난 정부의 글로벌 R&D 사업에 대한 반작용으로 해외관련 연구지원을 지나치게 축소하지는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 인재가 해외 지식의 큰 바다에서도 헤엄칠 수 있도록 단단히 지원하는 일도 병행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 벌어진 기초연구진흥협의회 회의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당시 기초연구예산을 대폭 삭감하고는 기초연구의 방향 자체도 수월성 위주의 연구로만 집중하겠다는 정책 기조가 제시되었던 때였다. 기초연구는 도전적 연구를 다양하게 수행할 수 있어야 탁월한 성과가 나온다. 다양성은 배제하고 수월성만 추구하겠다면 그건 기초연구 진흥과는 거리가 먼 철학이라는 점이 너무나 명확했다. 당시 회의에서 일부 위원이 사퇴하는 등 위기가 고조되었지만 결국 기초연구의 방향을 '다양성 위의 수월성' 으로 재정립하자는 절충안으로 기초연구진흥협의회의 회의 파행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다양성 기반의 수월성' 기조가 새 정부에서 진행하고 있는 모든 기초연구 진흥사업의 실질적인 기반이 되어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아무런 협의나 공감대 없이 하루 아침에 정부 R&D가 무너질 수 있다는 충격적 경험은 학문후속세대로 하여금 기초연구에 몰입해서 얻을 수 있는 보람의 크기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의 크기가 훨씬 크게 느껴 지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다행히 지난 1년간 현장 목소리에 과기정통부와 교육부가 귀를 기울였다. 그 덕에 젊은 연구자 지원이 두터워 졌고 기회의 폭도 넓어졌다. R&D 예산 대폭 삭감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국가 예산의 10%를 기초연구에 투자토록 하는 '기초연구진흥법의 개정안'이 국회에 올라가 있으니 통과를 희망해 본다. 없던 길을 새롭게 찾아 가는 것이 선진국 대한민국의 기초연구가 가야 할 길이다. 가다 보면 길이 된다.이준호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fn사설] '뉴노멀' 되어가는 고환율, 방어책은 경제 체력 키우는 것뿐

[파이낸셜뉴스] 환율이 심상치 않다. 원·달러 환율이 장중 1540원대까지 치솟았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원화 가치가 가장 낮은 수준으로 내려앉으면서 시장 불안도 커지고 있다. 14거래일 연속 1500원선을 웃돌면서 1500원대가 '뉴노멀'로 굳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온다. 고환율·고물가·고금리의 '3고(高)'가 현실화하면서 민생경제 전반에도 비상이 걸렸다. 서울외환시장에서 5일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9.4원 오른 1539.1원에 주간거래를 마쳤다. 한때 1550원선을 위협하기도 했으나 장 막판 낙폭을 줄였다.  환율 상승의 배경으로 미국과 이란 간 협상 교착에 따른 고유가, 20거래일째 이어진 외국인 주식 순매도 등이 꼽힌다. 외환당국은 전날 고환율 흐름이 임계 수준에 이르렀다고 판단해 "외환시장 동향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있으며 과도한 쏠림 현상이 발생하면 즉시 필요한 조치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구윤철 부총리도 이날 "금융·외환시장 변동성과 민생물가에 각별히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당국의 경고에도 시장은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당국의 이 같은 구두 개입만으로는 환율 상승세를 꺾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들의 달러 자산 보유 전략 등으로 사상 최대의 수출 호조에 따른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도 원화 약세를 꺾지 못하고 있다. 이례적인 일이다. 환율 방어 부담은 외환보유액 감소로도 나타나고 있다. 5월 말 기준 외환보유액은 4269억9000만달러로 한 달 전보다 8억8000만달러 줄었다. 그렇다고 적극적인 시장 개입도 쉽지 않다. 자칫 투기적 수요를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시장 심리를 되돌릴 만한 뚜렷한 카드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내주식복귀계좌(RIA) 유입 효과는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 안전판 역할을 했던 한·미 통화스와프 재추진 논의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하반기 환율 전망도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다. 시장에서는 1600원선까지 오를 수 있다는 전망마저 나온다. 환율 상승은 수입물가를 끌어올리고 결국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이미 고물가에 시달리는 중소기업과 서민들의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물가 안정을 위한 한국은행의 금리 인상 가능성과 미국의 긴축 기조 장기화 전망까지 겹치면서 서민경제의 어려움은 한층 커질 것으로 보인다. 당국은 우선 시장 상황을 면밀히 점검하면서 '3고'에 가장 취약한 계층에 대한 선별 지원에 나서야 한다. 수입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 지원도 시급하다. 장기적으로는 견고한 재정 건전성을 토대로 경제 체력을 길러야 한다. 경제의 자생력을 키워야 외부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원화 약세를 막아낼 수 있는 것이다.

[사설] 새 관세 카드 꺼내든 美, 대응 서둘러 피해 줄여야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법원 제동으로 상호관세 정책 추진에 차질을 빚자 새로운 관세 카드를 꺼내 들었다. 무역법 301조를 활용해 무역 상대국에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은 미국의 10% 글로벌 관세 적용 대상인데, 이번 조치가 현실화할 경우 수출환경이 다시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2일(현지시간) 한국의 강제노동 생산품 수입금지 관련 법적 장치와 단속체계가 미흡하다고 평가하고 중국, 일본, 영국 등과 함께 12.5% 관세 부과 대상국으로 분류했다. 여기에 과잉생산 부문 조사 대상에도 포함돼 반도체와 자동차 등 주력 산업이 추가 관세 압박을 받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과잉생산 판정을 받으면 관세가 5%p 추가돼 최대 17.5%까지 부담해야 한다. 반도체 슈퍼사이클로 수출과 증시가 호조를 보이고 있지만 미국의 추가 관세는 적잖은 부담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지난해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계획을 제시하며 관세 부담을 낮췄고, 대미 수출 실효관세율도 8.7%로 미국 10대 수출국 중 6위 수준까지 내려갔다. 하지만 이번 조치로 그동안의 협상 성과가 상당 부분 무력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유럽연합(EU)도 다음 달부터 철강 무관세 물량을 대폭 축소하고 초과 물량에 대한 관세를 50%로 인상할 예정이어서 통상환경은 더욱 녹록지 않다. 무역법 301조는 미국이 중국 제재에 활용한 전례가 있어 상호관세보다 강력한 압박 수단으로 평가된다. 정부는 그동안 미국 측에 관련 조치의 부당성을 설명해 왔지만 강제노동 생산품 수입통제 제도가 미흡하다는 미국 측 평가를 피하지 못했다. 다만 이번 조치는 국내 강제노동 문제가 아니라 해외 강제노동 생산품 수입차단 노력을 평가한 결과인 만큼 제도 개선을 통한 대응 여지가 있다. 미국은 다음 달 초 서면 의견수렴과 공청회를 거쳐 최종 조치를 확정할 예정이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USTR 발표 직후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과의 화상면담에서 한국에 적용될 관세가 지난해 합의한 15% 수준을 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렇더라도 관세 부과 사유로 지목된 법적 장치와 단속체계를 점검하고 필요한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한다. 캐나다와 EU, 멕시코, 인도네시아 등이 제도 개선을 통해 상대적으로 낮은 관세 그룹에 포함된 점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과잉생산 조사에도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반도체·자동차 업계와 공조해 가격정책의 투명성과 시장 경쟁의 공정성을 설명하고, 한국 기업들이 미국의 공급망 안정과 안보 강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도 강조해야 한다. 정부는 '적극 소통'이라는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 성과로 대응능력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한 한국이 강제노동 생산품 수입통제 미흡국이라는 불명예를 안은 채 최종 결정을 맞아서는 안 된다.

[사설] 이제 손 맞잡고 민생 회복과 지역 부흥에 힘 쏟길

무조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승리했다고는 보기 어려운 6·3 지방선거가 막을 내렸다. 시도지사 선거에서 여당은 12곳, 야당인 국민의힘은 4곳에서 이겼고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는 여당이 9곳, 국힘이 4곳, 무소속이 1곳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외견상 여당의 압승이 아니라고 할 수 없지만, 당초 여당이 기대했던 싹쓸이 당선은 아니었다. 서울과 대구, 경남 등 주요 선거구이자 경합지역에서 여당은 국힘에 패배함으로써 전체적으로도 스스로 이겼다고 말할 수 없는 결과가 나왔다. 어떤 선거에서나 민심은 일방적인 쏠림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잘하는 정치와 잘못하는 정치를 분별해서 표로 보여준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처음 치러진 이번 선거는 전반적으로 볼 때 당시 여당이었던 국힘을 심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주요 지역에서는 국힘 후보를 선택함으로써 여당의 독주 정치에 경고를 보냈다. 한쪽에 힘이 과도하게 쏠린 정치판도의 폐해를 국민도 잘 알고 있다. 야당인 국힘에 일부 힘을 실어준 이번 선거는 야당에 견제 역할을 잘하라는 의미라고 본다. 야당이 앞으로 할 일은 국민이 모아준 힘을 바탕으로 균형자로서 정치의 중심을 잡아 여당과 협력하여 국정을 바른 길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집권 여당도 독주에 제동을 건 민심을 되새겨 정치를 멋대로 좌지우지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의 언급처럼 겸허하게 결과를 받아들여 국정에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둘 다 이긴 것이 아니라 둘 다 진 선거다. 결과에 승복하면서 유권자 국민의 뜻을 깊이 헤아려 오직 국민과 민생을 위해 땀을 흘려야 한다. 이번 선거는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해 선거 신뢰성을 떨어뜨렸다. 무엇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책임이 크다. 진상을 철저히 조사한 뒤 응당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번 사태의 원인은 수차례 문제가 지적되었던 중앙선관위의 안이하고 오만한 조직 운영이라고 본다. 추후 조직 쇄신책도 당연히 내놓아야 한다. 이제 여야는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면서 무엇보다 경제 살리기에 매진하기 바란다. 마침 이재명 정부 1주년이 된 시점이다. 수출 활황으로 성장률이 높아지고 주가가 크게 오르는 등 지난 1년 동안의 경제 운영은 합격점을 주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수출이나 주식은 일부 기업이나 국민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었을 뿐이다. 대다수 국민은 경제가 좋아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가는 날로 오르고 경제의 한 축인 자영업은 회복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른바 '그들만의 리그'로 양극화는 더 깊어지고 있다. 겉보기에 좋은 경제의 온기가 서민층으로 퍼지도록 여야는 손을 맞잡고 고민해야 한다. 새로 뽑힌 지역 일꾼들도 내 고장 살리기, 지방 부흥을 위해 손발이 닳도록 뛰기 바란다. 이번 선거는 4년마다 한 번 있는 지방선거다. 지역이 살아야 나라 전체가 부강해진다. 향후 4년이 죽어가는 내 고향을 되살리는 골든타임이라고 생각하고 열성을 쏟아야 할 것이다.국민 앞에 허리를 굽신거렸던 후보자의 태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번에 당선된 인물들 모두 마찬가지다. 당선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오만해지고, 일보다는 정쟁에 빠지는 정치인들의 행태를 국민은 기억한다. 유권자는 그런 인물은 다음 선거에서 반드시 낙선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