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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視角] 유일한의 길

1945년 초 미국 전략정보국(OSS)의 비밀기지가 있던 캘리포니아 샌타카탈리나섬. 머리가 희끗희끗한 쉰 살의 기업가가 여기에 있었다. 수십킬로미터의 해안을 헤엄치고 밤하늘의 비행기에서 맨몸으로 낙하산을 펼쳐 뛰어내리는 특수훈련을 받고 있다. 20대의 젊은 청년들도 피를 토하는 지옥 같은 시간이다. 작전명은 냅코(NAPKO) 프로젝트. 경성(서울)과 조선총독부 침투가 목표 중 하나다. 일본의 항복으로 작전은 결국 무산됐지만 8개월에 걸친 훈련은 혹독했다. 요원들은 폭파 기술, 위장술, 독도법, 무선통신기술까지 마스터한다. 이 경성 침투조의 조장이 당시 쉰 살의 기업가,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1895~1971)이다. 미국에 간 것은 아홉살 때였다. 그가 태어났던 구한말 평양은 당시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 거점이 평양이었고, 선교사를 통해 태평양을 건넌 것이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손에 낯선 언어로 쓰인 성경 한 권을 쥐여주며 먼 길을 배웅했다. 제물포항에서 출발한 배는 한달 만에 미국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한다. 다시 기차로 갈아타고 마지막 당도한 곳이 네브래스카주의 신앙심 깊은 자매의 집이다. 역사의 한복판으로 들어서게 된 것은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이끌던 한인회 조직을 만나면서부터였다. 고교생 때 박용만을 도와 미국 국무부로부터 '대한제국 시민의 자주권'을 인정받는 레터를 받아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미시간대 3학년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이 주도한 한인 자유대회에서 청년 연사로 단에 오른다. "우리 대한민국은 자유로운 민주 국가가 되어야 하며, 우리는 독립할 자격이 있고, 반드시 그리될 것입니다." 연설의 제목이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에 대한 선언'이었다('유일한의 생애와 사상, 김형석'). 고국의 땅은 제물포항을 떠난 지 20년이 흐르고 나서야 밟게 된다. 미국에서 제너럴일렉트릭 회계사로 출발해 식품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뒤였다. 거부가 된 유학파 청년 사업가의 눈에 고국의 풍경은 참담했을 것이다. 메마른 산천에 깡마른 농부들만 득실했다. 가장 열악한 문제가 보건이라고 봤다. 의사의 수도, 약품도, 영양도 형편없었다. 미국으로 돌아가 회사를 정리하고 의약품을 사모아 다시 귀국한다. 그때가 1926년이었다. 종로2가 덕원빌딩에 사무실을 차려 유한양행 간판을 올렸다. 의약품 수입을 우선으로 시작해 화장지, 비누, 치약 등 위생용품과 염료, 농기구까지 품목이 확대된다. 사업은 나날이 번창한다. 한국의 특산품을 미국 시장으로 수출하는 일도 했다. 나아가 의약품 자체 생산에 도전해 수출까지 성사시킨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판로개척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뒤 태평양전쟁 발발로 그는 미국에서 발이 묶인다. 거기서 선택한 일이 목숨을 건 경성 침투 특수공작이었던 것이다. 해방 후 돌아와 그가 걸었던 길은 경영자의 모범답안이었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 그리고 교육보국이다. 나라의 힘은 학벌이 아니라 기술인재에 있다고 말한 이가 그다. 그러면서 기술학교를 세우고 전 재산을 사회에 돌렸다. 딸에게 남긴 유언장엔 "학교 벌판의 땅 5000평을 유한동산으로 꾸며 학생들이 마음대로 놀 수 있게 하라"고 썼다. 그리고 '절대 울타리를 치지 말 것'. 미래의 아이들 발목을 잡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유일한이 세운 유한양행은 올해로 100년이 됐다. 연매출 2조원대의 회사는 국내 대표 제약사를 넘어 국산 신약 가능성을 보여주며 개척자 역할을 하고 있다. 창업주의 정신이야말로 이 회사의 큰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유일한을 기리는 창작물도 인기다. 윤태호의 웹툰 'NEW 일한' 연재물이 공개됐고, 뮤지컬('스윙 데이즈, 암호명 A')도 무대에 올려졌다. 더 많이 그의 삶이 공유되었으면 한다. 오로지 권력을 잡는 것만이 목표로 보이는 정치권이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아야 할 발자취다. 기업가의 길, 이 시대 어른의 길을 다시 생각한다.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

[사설] 구내식당까지 교섭대상 인정, 노동현장 혼란 크다

현대자동차가 사내 하청 생산직과 구내식당 근무자, 영업사원 등 하청노조와 직접 교섭해야 하는 '진짜 사장'이라는 지방노동위원회 판정을 받았다. 한화오션 역시 위탁 급식업체 노조와 교섭에 응해야 한다는 중앙노동위원회 판단이 나왔다. 경영계가 우려해 온 '비핵심 업무'까지 원청의 사용자성이 확대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현실화한 셈이다. 현대차에 대한 결정은 노란봉투법 시행 이후 완성차 업계에서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파장이 크다. 교섭을 요구한 하청노조에는 공장 등의 서열(부품 배열)·불출(부품 운반) 업무를 담당하는 비정규직지회뿐 아니라 구내식당, 보안·경비, 판매대리점 카마스터 조직까지 포함됐다. 직접생산을 넘어 식당·경비·판매까지 원청 교섭 대상이 확대된 것이다. 한화오션 사례도 비슷하다. 급식과 통근버스 운영 등 지원 업무를 맡는 협력업체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원청의 교섭 의무를 인정하면서 사용자성 확대 가능성을 보여줬다. 비핵심 업무를 외주화해 온 국내 산업계의 도급체계 전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특히 현대차는 국내 제조업 간접고용 구조를 상징하는 사업장이다. 이번 판정이 산업계 전반의 기준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원청의 노사 관리 부담과 경영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현대차 협력업체가 8500곳에 이르는 상황에서 교섭 의무의 범위가 어디까지 확대될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앞으로 수많은 하청노조와 별도 협상을 해야 하고 교섭 결렬 시 소송전까지 이어질 수 있어 정상적 경영활동의 위축이 우려된다. 현대차는 정규직 노조의 파업 가능성까지 겹치면서 정규직과 하청노조를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경영계는 이번 판단이 지난 2월 고용노동부 해석지침과도 배치될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노동부는 "일반적인 도급계약 관계에서는 도급인이 수급인에게 계약 이행의 내용이나 절차에 관해 일반적·결과 지향적으로 지시할 수 있다"고 해석했다. 이는 계약상 관리·감독 권한과 근로조건을 실질적으로 지배·결정하는 구조적 통제를 구분해야 한다는 취지다. 경영계는 이번 판정이 그 경계를 지나치게 넓게 해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현대차는 여러 차례 심의 끝에 결론이 났고, 한화오션은 지노위 판단이 유보됐었다. 사용자성 인정 범위를 둘러싼 논란이 그만큼 크다. 이번 판정을 계기로 기업들을 상대로 한 원청 교섭 요구는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금속노조는 이미 현대모비스 등 계열사와의 원청 교섭도 요구하고 있다. 중노위 재심 판단 요구도 늘어날 수 있다. 현재 중노위에는 포스코와 고려아연 등의 사용자성 재심 사건 20여건이 계류 중이다. 노란봉투법은 취약 노동자를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실질적 지배력이라는 추상적 기준이 급식·경비·통근버스 등 지원 업무까지 확대된다면 입법 취지를 넘어선 과잉 적용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기업들이 불확실성을 피하기 위해 외주·도급 구조를 축소하거나 생산거점을 해외로 이전하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다. 정부와 국회는 사용자성 인정 범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법률과 지침으로 서둘러 정립해야 한다. 노동자 보호와 기업 경영의 예측 가능성이 충돌하지 않도록 제도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자수첩] 귀농귀촌의 성공 조건

아버지의 설렘은 드문 일이다. 지난해 아버지가 귀농귀촌을 위해 점찍어둔 충북 단양군 시골집에 같이 갔다. 아버지는 창문 밖 벚나무를 가리키다가 '더 멋진 곳이 있다'며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뒷동산까지 나를 끌고 올라갔다. 집터 이곳저곳을 다니느라 들뜬 아버지는 스마트폰을 떨어트린 줄도 몰랐다. 해가 저물고 땅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잃어버린 것을 찾던 아버지의 웃음만은 너무나 잘 들렸다. 평생 서울에만 산 아버지가 이제 농촌에 산다. 은퇴 목사인 아버지는 서울에서 지자체, 사회복지시설과 함께 장애인, 학교 밖 청소년에게 제과제빵 기술을 가르쳤다. 많은 베이비부머가 그렇듯 아버지는 노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리 많지 않은 연금만으론 부족할 것이다. 농사로 돈을 벌긴 쉽지 않을 것 같다. 앞으로는 단양에서 일정 소득을 얻으면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다. 내가 마음속으로 농어촌기본소득 시범사업지에 단양군이 선정되길 바랐던 이유다. 귀촌인을 곁에서 볼수록 기본소득엔 사회연대경제(사연경)가 절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농촌에 모인 이들이 가진 뜻과 기술이 협동조합, 마을기업으로 발전할 때 지역이 살 수 있어서다. 문제는 지역을 이끌 서비스와 주민의 역량이다. 현재 1인당 기본소득 15만원은 단순 재화 소비에 집중됐다. 하지만 식품 사막, 고령화를 겪는 농촌 주민의 필요는 서비스다. 미용, 돌봄, 이동장터, 마을버스, 빈집 민박업, 로컬 푸드, 교육 등 수요는 크지만 기본소득과 연결해 비즈니스로 풀어낼 민간은 드물다. 주민들이 기본소득을 사용할 정육점을 직접 운영하는 순창군 협동조합 같은 모범 사례는 적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앞으로 시범사업지 '확장'이 아닌 사연경의 '연결'에 집중해야 한다. 2025년 농촌 서비스공동체는 40개, 사회적 농장은 133개에 불과하다. 2028년까지 각각 120개, 180개로 늘린다지만 전국 농촌 규모에 비해 적다. 사회적협동조합의 농촌 사회간접자본(SOC) 시설 운영도 지난해 23곳에 그쳤다. 향후 기본소득 대상지인 전국 69개 인구감소지역에 비춰 미비하다. 지금껏 큰 정책적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이 숫자에서 드러난 셈이다. 농식품부는 앞으로 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로컬의 개개인을 잇고 부처별로 흩어진 사연경 형태를 묶어야 한다. 그 어려운 길을 농촌형 사연경 정책과 내년도 예산으로 보여 달라. 그 길이 기본소득을 성공으로 이끌 연결점이다. 지난주 아버지가 함께 빵 봉사하던 또래들을 단양에 초대했다. 그들은 연결되길 바라고 있다. junjun@fnnews.com

[사설] 농민이 농협의 주인이 되도록 개혁해야

정부가 농협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미 1차 개혁안은 얼개가 나왔고, 2차 개혁안을 최근 간담회를 통해 밝혔다. 2차 개혁안은 비대한 중앙회의 권한을 분산하고 도시와 농촌 조합의 격차를 해소하는 방안이 담겨 있다고 한다. 농협은 농민들의 권익과 복지를 향상하기 위한 조합 형태의 조직으로, 중앙회 산하에 은행과 증권사를 거느린 거대 조직이다. 한국의 농협은 2016년 기준 국제협동조합연맹(ICA)에 가입된 농업 관련 협동조합 중 세계 1위라고 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규모가 큰 만큼 운영과 선거 과정에 온갖 비리에 노출돼 있다. 중앙회장은 조합장들이 일종의 간접선거로 뽑는데, 그 과정에서 수십억원의 금품이 오간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중앙회장 선거는 비리의 복마전이다. 중앙회장에 당선되고 나면 그동안 수사를 받지 않은 회장이 없다고 할 정도로 회장의 개인 비리가 판을 쳤다. 농민들이 뽑는 조합장 선거도 마찬가지다. 1970년대식 금품 선거가 상례가 돼 있다. 선거 비리를 처벌해도 다음 선거에서 또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 속에 있었다. 조합장의 권한과 그에 연관된 이권이 크기 때문에 기를 쓰고 당선하려는 것이다. 정부의 개혁 추진은 늦은 감이 있다. 일단 중앙회장의 간선제를 187만 농민의 직선제로 바꾸기로 했다. 이 부분은 농협에서도 동의하고 있지만 외부 감사위원회 설치를 농협의 반대로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농협 운영을 투명하기 위해서는 외부 감사제도를 반드시 관철해야 한다. 2차 개혁은 중앙회의 지배구조를 바꾸는 것으로 1차 개혁 이상으로 중요하다. 전체적으로 정부가 추진하는 방향은 맞다. 중앙회장과 조합장의 독단적인 운영과 비리를 막기 위해서는 지배구조를 바꾸는 것이 절대적이다. 기왕에 개혁을 추진한다면 다시 손볼 일이 없도록 빈틈없이 제도를 완비하기 바란다. 농협의 주인은 중앙회장이나 조합장이 아니라 조합원인 농민이 되어야 한다. 농민의 주인의식을 높이는 쪽으로 개혁이 추진돼야 하는 것이다. 농민의 참여를 확대하고 자율성을 높여줘야 한다. 현재 농촌의 가장 큰 문제는 고령화다. 젊은 층이 도시로 떠난 상태에서 70대 이상의 농민들이 농사를 짓고 한국의 전체 농업을 이끌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은 큰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10년에서 20년이 지나면 소멸되는 농촌이 급증할 수 있다.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농협의 역할과 임무는 앞으로 더 커질 것이다. 정부의 힘만으로 농촌을 되살리기 어렵다. 전국 방방곡곡에 조직을 가진 농협이 농업 살리기에 앞장서야 하는 것이다. 연로한 농민들은 농협 운영에 관심이 적다. 농촌이 사라지면 농협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농협이 젊은 층을 농촌으로 끌어들이고 농업을 키울 방안을 정부와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정 노력을 통해 비리 조직이라는 오명부터 벗어야 할 것이다.

[기고] 공공생리대, 모두의 건강권 위한 첫걸음

오는 7월부터 '모두의 생리대'라는 이름의 공공생리대 지원 시범사업이 12개 지방자치단체에서 시작된다. 이번 시범사업은 올초 대통령이 제기한 생리대 가격 부담과 품질 좋은 생리대 지원의 필요성과도 맞닿아 있다. 생리대는 장기간 반복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필수품이지만, 그동안 가격 부담과 품질에 대한 우려는 개인이 감당해야 할 사항으로 여겨져 왔다는 문제 인식에서 출발하였다. 생리대가 없어 수업이나 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외출 중 난처한 상황을 겪거나, 비용이 부담스러워 필요한 만큼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은 일상에서 종종 발생한다. 이는 단순한 생활 불편이 아니라 생리를 하는 이들의 건강권, 학습권, 노동권, 사회참여권과 연결되는 문제다. 공공생리대 지원이 필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첫째, 생리용품은 기본적인 위생과 건강, 안전을 위해 필요한 필수 물품이다. 생리용품을 제때 사용하지 못하거나 품질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은 제품을 사용할 경우, 일상의 불편을 넘어 위생과 건강상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둘째, 생리용품 구입 비용은 생리를 하는 사람에게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부담이다. 이를 개인의 몫으로만 두지 않고 사회가 함께 줄여가는 것은 성평등 정책의 중요한 과제이다. 셋째, 생리용품 접근에는 격차가 존재한다. 청소년, 저소득층, 장애인, 노숙인, 이주민 등은 필요한 순간 생리용품을 바로 확보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따라서 공공생리대 지원은 취약계층을 포함해 생리를 하는 모든 사람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보편적 건강정책이다. 이번 시범사업을 통해 국민의 건강권 제고와 생리대 가격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생리대 설치 자체보다 어떻게 운영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생리대가 어디에 비치되어 있는지, 얼마나 쉽게 찾고 사용할 수 있는지, 제품의 품질은 적절한지, 재고 보충과 위생 관리는 안정적으로 이뤄지는지를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특히 장애인도 불편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지급기의 설치 높이, 음성 안내, 이동 동선까지 세심하게 고려해야 한다. 또 모니터링을 통해 실제 이용자의 접근 및 현장에서 느끼는 다양한 경험을 반영하고, 현장 담당자의 관리 부담과 개선 의견 등도 함께 살펴야 한다. 공공생리대 지원은 얼핏 소소한 사업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행정복지센터, 공공도서관, 역사 등 생활 공간에서 필요한 순간 누구나 부담없이 생리대를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이는 건강권을 보장하는 동시에 일상에서 체감할 수 있는 성평등 정책이다. 이번 시범사업이 더 많은 지역과 다양한 시설로 확대되어, 누구나 안심하고 생리대를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김동식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기고] 기업이 뿌린 사회공헌의 씨앗

전기 사용량 데이터로 고독사를 막고 저출생 극복을 위해 난임 직원에게 치료비를 지원하며, 화염 속을 뛰어드는 소방 로봇을 개발하는 기업들. 지난 7주간 파이낸셜뉴스에서 담아낸 기업 사회공헌의 현장이다. 단순 기부나 일회성 봉사를 넘어, 기업의 핵심 기술과 역량으로 사회문제를 풀어가는 이 흐름은 우리 사회가 기업 사회공헌에 거는 기대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최근 국내외 기업들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선언하는 데에서 나아가, 사회공헌을 기업 가치와 직결된 핵심 경영 전략으로 내재화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 환경·사회적 활동 등을 의무적으로 공시하도록 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고, 국제재무보고기준(IFRS) 재단 산하의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는 전 세계가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ESG 공시 표준을 발표했다. 한국도 이러한 국제적 흐름에 발맞춰 상장 기업을 중심으로 공시 의무화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ESG 공시가 이제 사실상 '제2의 재무제표'로 자리 잡는 것이다. 투자자와 소비자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사회공헌은 이제 기업의 평판과 지속가능성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됐으며 기업 경영의 새로운 기준으로 떠올랐다. "좋은 일을 하기는 했는데, 얼마나 사회를 좋게 만들었나요?"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지금까지의 평가는 주로 투입 중심이었다. 얼마를 기부했는지, 몇명이 봉사활동에 참여했는지가 주된 지표였다. 기업 사회공헌을 통해 실제로 수혜자의 삶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정부 지출이 필요한 공공 예산을 얼마나 절감해 주었는지는 제대로 측정되지 못했다. 일부 민간단체들을 중심으로 기업이 창출해 낸 사회적 가치를 화폐 단위로 환산해 측정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는 있지만, 데이터 수집의 어려움과 전문성 확보라는 과제 앞에서 일선 단체들은 아직 길을 모색하는 중이다. 성과로 드러날 때 비로소 인정이 따라오고, 인정이 따라올 때 발전이 시작된다. 성과를 충분히 입증하지 못하면 선한 의지로 시작한 사회공헌 활동이라도 지속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이 딜레마를 풀기 위해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다만, 사회공헌의 성과는 정부가 일률적으로 평가하기보다 민간이 스스로 측정하고 입증할 수 있도록 기반과 역량을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민간이 자율적으로 측정하고 입증할 때 훨씬 신뢰성이 높아지며, 창의성과 혁신성도 북돋아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창출된 성과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구조를 만드는 것은 또 다른 과제다. 성과가 세제·포상 등 인센티브와 연결될 때 기업은 더 전략적으로 사회공헌을 설계하게 되고, 민관협력은 자연스럽게 확대될 것이다. 기업이 사회공헌의 성과를 스스로 평가하고, 그 평가가 실질적인 보상으로 이어지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파이낸셜뉴스의 7주에 걸친 기획기사가 보여준 것처럼, 기업의 사회공헌은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서 묵묵히 작동하고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기업의 선의가 성과로 증명되고, 그 성과가 다시 사회를 변화시키는 선순환이 될 수 있도록 정부가 앞장서겠다. 기업과 사회, 정부가 함께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가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될 때 우리 사회는 더욱 지속가능한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

[포럼] 월성원전 계속 운전하려면

국제사회에 약속한 '2030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가 4년 앞으로 다가왔다. 정부는 NDC 달성을 위해 무탄소 에너지 확대를 천명했지만, 전력 현장의 실상은 시급하기 짝이 없다. 당장 2026년 11월 월성 2호기를 시작으로 3·4호기가 차례로 운영을 정지한다. 총 2.1GW 규모의 이 원전들이 제때 전력망에 복귀하지 못한다면 연간 약 160억kwh의 청정에너지가 증발한다. 이는 24시간 상시 전력공급원으로 재생에너지로 대체하기도 어렵다.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으로 대체할 경우 600만t 이상의 온실가스가 추가 배출되어 2030 NDC 달성은 사실상 물 건너갈 공산이 크다. 에너지 안보와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는 월성 2·3·4호기의 계속운전이 필수다. 그러나 현행 규제제도의 모순은 월성 원전 계속운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2030 NDC 달성을 위해 법제도 개선과 관련 부처의 총력 대응이 시급하다. 우선 국회와 정부는 계속운전을 가로막는 두 가지 법적 걸림돌을 시급히 제거해야 한다. 첫째, 원자력안전법상의 인허가 기산점과 기간의 개정이다. 우리나라는 계속운전 허가 기간을 10년으로 묶어두고 있으며, 그마저도 과거의 '설계수명 만료일'부터 소급하여 계산한다. 월성 원전은 계속운전을 위해 수천억원을 들여 압력관을 교체해야 한다. 인허가 심사와 자재 조달, 시공에 수년이 소요되어 막상 재가동을 하더라도 정작 운전할 수 있는 기간은 6~7년에 불과하다. 6~7년 운전으로는 투자 대비 경제성이 나오기 힘들다. 미국처럼 계속운전 승인 후 '새 면허 발효일'부터 기간을 기산하거나 일본처럼 '정지 기간을 수명에서 제외'하는 것이 상식에 부합한다. 또한 계속운전 허가 기간을 20년으로 확대하는 법 개정이 조속히 이루어져야 사업자가 투자를 감행할 수 있다. 둘째,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특별법 내 독소조항의 개정이 병행돼야 한다. 특별법 제36조 제6항은 부지 내 임시저장시설의 용량을 원전의 '설계수명 기간 동안 발생할 것으로 예측되는 양'으로 제한하고 있다. 월성 원전은 이미 1992년부터 부지 내 임시저장을 아무런 안전 문제 없이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조항으로 인해 계속운전 허가를 받더라도 추가로 나오는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할 저장시설을 지을 수 없다. 이 조항을 방치하면 월성 원전은 계속운전에 들어가도 2037년경 저장공간 포화로 가동을 할 수 없는 모순에 직면한다. 국회는 계속운전 등 여건 변화 시 저장용량을 유연하게 변경할 수 있도록 특별법을 개정해야 한다. 아울러 한국수력원자력은 선제적인 투자와 공급망 관리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핵심 부품의 적기 조달을 위한 '패스트 트랙' 공급망을 구축하고, 선행 정비계획을 수립하여 물리적 공사기간을 최소화해야 한다. 기후에너지환경부 역시 탄소중립 컨트롤타워로서 적기 계속운전을 위한 전방위적 정책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심사인력을 집중 배치하고 절차를 효율화하여 심사 장기화로 인한 가동공백을 최소화해야 할 것이다. 지금 정부와 국회가 전향적인 법제도 혁신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대규모 전력공급 공백과 함께 대한민국의 탄소중립 약속도 지키기 어려워진다. 정동욱 한전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 총장

[fn광장] 지금이 금융 혁신의 골든타임

외환위기 이후 우리 금융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은행은 건전성을 중시하게 되었고, 자본비율과 리스크 관리도 세계적 수준으로 올라섰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던 나라가 이제는 안정적인 금융시스템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는다. 분명 값진 성취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외면해왔다. 그렇게 건전해진 금융이 과연 우리 경제를 더 생산적이고 더 포용적으로 만들었을까. 산업화 시기의 금융은 국가 성장전략의 도구였다. 국민의 저축을 모아 제조업과 수출산업에 공급했고, 그것이 한국 경제의 고속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IMF 이후에는 방향이 달라졌다. 금융은 안정성과 건전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기 시작했다. 위기를 겪은 뒤였기에 당연한 선택이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금융이 점점 더 위험을 회피하는 구조로 굳어졌다는 점이다. 그 결과 자금은 미래 성장성이 높은 혁신기업보다 담보가 확실한 부동산과 가계대출로 몰렸다.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합리적이었다. 주택담보대출은 표준화가 쉽고, 손실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 전체로 보면 결과는 달랐다. 혁신기업과 스타트업에는 충분한 자금이 흐르지 못했고, 한국 경제는 부동산 중심의 구조에 갇히게 되었다. 금융은 더 안전해졌지만 더 생산적이지는 못했다. 동시에 금융의 문턱 밖에 놓인 사람도 적지 않았다.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 청년 창업자, 외국인 노동자들은 전통적인 신용평가 체계 안에서 제대로 평가받기 어려웠다. 금융은 건전해졌지만 충분히 포용적이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새롭게 금융 대전환의 기회가 열리고 있다. 1990년대까지의 산업화 금융 시대, 외환위기 이후의 안정화 금융 시대를 거쳐 이제 인공지능(AI) 기반 혁신금융의 시대로 금융의 본질이 바뀌고 있다. 금융은 결국 정보를 판단하는 산업이다. 돈을 빌려줄지, 투자할지, 위험을 감수할지 결정하는 일이 모두 정보 분석의 문제다. 과거에는 사람이 제한된 데이터만 보고 판단했다. 이제는 AI가 수천 개 변수와 비정형 데이터를 동시에 분석한다. 거래패턴과 현금흐름, 공급망 정보, 소비패턴까지 종합적으로 읽어낸다. 이 변화는 생산적 금융을 가능하게 한다. 기존 금융은 과거의 재무제표와 담보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미래 성장성이 높은 기업일수록 과거 데이터가 부족하다. AI는 스타트업의 고객 유지율, 온라인 거래 흐름, 공급망 안정성 같은 데이터를 분석해 미래 가능성을 더 정교하게 평가할 수 있다. 자본이 과거 실적만 좋은 기업이 아니라 미래 성장성이 높은 기업으로 흐를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이는 잠재성장률 하락이라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동시에 AI는 포용적 금융도 가능하게 만든다. 정규직 급여 이력이 부족하더라도 현금흐름의 안정성을 분석할 수 있고, 금융거래 기록이 짧더라도 소비 패턴과 생활 데이터를 통해 신용을 평가할 수 있다. 과거 금융 시스템이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포용성과 생산성은 원래 충돌하는 목표처럼 여겨졌지만 AI 시대에는 그렇지 않다. 더 많은 사람과 기업을 더 정밀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금융은 동시에 더 생산적이고 더 포용적일 수 있다. 그러나 기회가 있다고 미래가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금융회사 스스로 변해야 한다. AI 전담부서를 만드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영업과 리스크, 마케팅과 IT 사이의 벽을 허물고 데이터를 공유해야 한다. 실패를 최소화하는 문화만으로는 안 된다. 작은 실험을 빠르게 반복하며 학습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앞으로 금융회사의 경쟁력은 점포 숫자가 아니라 데이터를 얼마나 잘 활용하고 AI를 얼마나 조직 깊숙이 내재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부의 역할 역시 너무도 중요하다. 지금의 금융규제는 여전히 사전 허가와 세부 규정 중심이다. 하지만 AI 시대의 혁신은 실험 없이는 불가능하다. 정부는 모든 것을 미리 허락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소비자 보호와 책임성 같은 큰 원칙만 제시하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혁신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샌드박스도 단순한 예외 허용이 아니라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는 학습 체계가 되어야 한다. 한국은 이미 오픈뱅킹과 마이데이터,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조건은 충분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방향성과 실행력이다. AI 시대를 단순한 기술 변화로 볼 것인가, 아니면 금융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역사적 기회로 만들 것인가. 답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손병두 토스인사이트 대표

10년 만에 뒤바뀐 이혼소송의 룰 — 위자료, 증거, 변호사 시장까지 다 바뀌었다[부장판사 출신 김태형 변호사의 '알쏭달쏭 이혼]

[파이낸셜뉴스]  최근 몇 년 사이 이혼 소송의 양상은 눈에 띄게 변화하고 있다. 필자는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에서, 그리고 2022년부터 2024년까지 다시 수원가정법원에서 근무하며 약 10년의 간극을 두고 이혼 재판을 직접 다루었다. 여기에 현재 변호사로서의 실무 경험까지 더해보면 이혼 소송이 과거와는 분명히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체감한다. 그 주요 변화는 아래와 같이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위자료, '보상'에서 '제재'로 첫 번째 변화는 위자료 액수의 상승이다. 과거 실무에서는 부정행위가 인정되는 경우 배우자에 대한 위자료는 약 3,000만 원, 상간자에 대한 위자료는 약 1,500만 원이 일종의 공식처럼 작용되었다. 법원 실무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위자료의 기능을 단순한 정신적 손해배상을 넘어 '불법행위에 대한 억지 및 예방 수단'으로 보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언론이 주목하는 고액 위자료 판결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여러 하급심도 전반적으로 위자료를 높게 인정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이혼 소송에서 위자료가 갖는 의미 자체가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혼 사유의 중심, 부정행위 두 번째 변화는 이혼 사유의 구조적 변화다. 과거에는 이혼 사유로 폭력, 중독, 경제적 문제, 원가족과의 갈등 등 다양한 사유가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다. 부정행위는 그중 하나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러나 최근 사건들을 보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상당수 사건에서 부정행위는 다른 이혼 사유들과 결합 되어 언제나 핵심 이혼 사유로 등장하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부부 사이에 아무런 갈등도 없었는데 외도 때문에 이혼 소송이 촉발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젊은 부부들의 이혼 사유로는 부정행위가 압도적이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SNS의 발달, 정조의무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 그리고 간통죄 폐지 등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과거와 달리 부정행위를 발견했을 때 '참고 살기' 보다 '즉시 이혼'으로 이어지는 선택이 증가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증거는 더 중요해졌지만, 증거 확보는 더 어려워졌다 세 번째 변화는 증거 확보 환경의 변화다. 과거에는 통화내역, 문자 메시지 수발신 내역, 카톡 내역, 카드 사용 내역, 기지국 위치 등 객관적 증거 자료를 법원을 통해 비교적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당사자가 증거 확보를 위해 무리한 방법을 동원할 필요성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는 개인정보 보호와 사생활 비밀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관련 증거 신청에 대한 법원의 채택은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통신사나 플랫폼 사업자 역시 영장이 없으면 내밀한 자료 제공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부정행위를 입증하기 위한 합법적 증거 확보는 더욱 어려워졌고, 일부에서는 도청이나 위치추적, 흥신소 의뢰와 같은 위험한 방법에 의존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이는 이혼 소송 당사자가 재판 과정에서 형사적 리스크까지 부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과열되는 '이혼 전문' 시장 마지막 변화는 이혼 전문 변호사의 급증이다. 과거에는 이혼 사건을 담당하는 변호사의 풀이 제한적이었고, 실무 스타일도 비교적 균질했다. 그러나 현재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변호사 수가 증가하면서 이혼 소송 시장에 진입하는 변호사 인원도 급격히 늘어났다. 이혼 사건은 다른 전문 분야에 비해 진입장벽이 낮은 데다가 부동산 가격 상승 등 재산분할 규모의 확대에 따라 수임료도 상승하는 경향이 있어 더욱 많은 변호사가 몰리고 있다. 또한 이혼이 더 이상 숨겨야 할 일이 아닌 '선택의 문제'로 인식되면서 이혼 자체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크게 증가하였다. 최근 방송과 여러 콘텐츠에서 이혼을 다루는 방식 역시 이러한 흐름을 강화하고 있다. 그 결과 시장은 확대되었지만 동시에 경쟁은 치열해졌고, 전문성의 편차 역시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변화의 본질 이 네 가지 흐름을 종합하여 보면, 최근 이혼 소송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이혼사유가 부정행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위자료는 점진적으로 상승하고 있으며, 증거 확보는 더욱 어려워졌고, 법률 시장은 과열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실무 변화만이 아니라 가족과 혼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앞으로 이혼 소송은 더욱 정교한 소송전략과 전문성이 요구되는 영역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김태형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 l 김태형 변호사는 가사∙상속 분야 전문가이다. 2007년 법관 임용후 2024년 수원가정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17년간의 법관생활을 끝내고 법무법인 바른에 합류했다. 김태형 변호사는 법관시절 2012년부터 총 8년간 가사∙상속 및 소년심판 업무를 담당했다. 특히 법관 퇴직 전 5년(2019~2024)간 수원가정법원에서 가사소년전문법관으로 수많은 가사∙상속 관련 케이스를 처리하면서 이 분야의 전문성을 확보했다. 베스트셀러인 "부장판사가 알려주는 상속, 이혼, 소년심판 그리고 법원"(박영사, 2023)의 저자이기도 하다.

[테헤란로] 헛된 청소년 자살예방 대책

지난 5월 최교진 교육부 장관의 기자간담회 자리는 책임감보다 무력함이 앞섰다. 장관은 국가 교육 백년대계를 이끌 수장임에도 "최교진 하면 떠오르는 교육정책은 특별히 고민해 본 적이 없다"며 본인의 비전 부재를 당당히 시인했다. 한 달 뒤인 6월 9일 교육부를 필두로 15개 부처가 합동 발표한 '10대 청소년 자살예방 범정부 추진 대책'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최근 10년간 청소년 자살이 계속 증가하는 현실에서 정부는 '진로 고민과 학업 스트레스'를 원인으로 정확히 짚었다. 거창한 수식어가 붙은 만큼 단 한 번의 실패가 낙오로 이어지는 사회 구조를 깨뜨릴 거시적 개혁안이 담겼어야 했다. 하지만 뚜껑을 연 대책안은 허무했다. 정부가 내놓은 핵심 방안은 '공교육 기반 청소년 마음근육 강화'다. 교내 사회정서교육을 6차시에서 17차시로 늘리고 동아리 활동을 지원하겠다고 한다. 아이들이 삶을 포기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대학 간판이 없어도 인간답게 재기할 수 있는 '출구'가 없는 숨 막히는 구조 탓이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개선하고 고졸 취업자를 파격 지원하는 고용노동부의 대책이나 학벌 간 임금 격차를 줄이는 재정경제부의 안목은 없다. 부처별 기존 사업을 '자살 예방' 이름 아래 짜깁기한 백화점식 실적 채우기에 불과하다. 고층건물 출입차단장치나 난간 개량 같은 토목대책이 주요 과제로 이름을 올린 이유다. 결국 정부는 원인이 '사회, 즉 경쟁 구조'에 있음을 알면서도 대책은 '개인, 즉 마음근육'에게만 요구하는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고 있다. 이는 '사회가 지나치게 경쟁적인 것은 바꿀 수 없으니, 너희가 마음공부를 열심히 해서 독한 스트레스를 견뎌내라'는 무책임한 주입이다. 최 장관은 "이름을 내세우는 정책보다 현장에 덜 필요한 정책을 덜어내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번 대책은 도리어 학교 현장에 행정적 부담과 새로운 교육 차시를 얹어주며 교사와 학생을 피로 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그물망이 아무리 촘촘해진들 아이들이 마주한 낭떠러지가 그대로라면 비극은 멈추지 않는다. 죽음의 길목을 지키며 감시카메라를 늘릴 게 아니라, 낭떠러지 아래에 패자부활이라는 거대한 안전망을 먼저 쳐야 한다. 대학에 가지 않아도 당당한 사회인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구조적 개혁, 그것이야말로 범정부 대책에 마땅히 담겼어야 할 진짜 알맹이다. monarch@fnnews.com 김만기 기자

[사설] 미·이란 종전으로 생길 새로운 기회 선점해야

106일간의 미국과 이란 간 전쟁이 사실상 끝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4일(현지시간) 이란과 종전합의를 선언했고, 오는 19일 스위스에서 양해각서(MOU) 서명식이 열린다. 글로벌 경제를 흔들었던 중동발 불확실성이 드디어 해소되는 것이다. 우리 경제도 중동 리스크라는 악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진짜 시험대는 지금부터다. 종전을 계기로 모든 국가와 기업들이 새로운 자유경쟁에 뛰어들 것이다. 이런 치열한 경쟁에서 우리가 선도자가 되기 위해 크게 두 가지 정책 방향을 놓쳐선 안 된다. 먼저 전쟁 이전 수준으로의 정상화다. 유가가 안정될수록 시장개입 조치는 단계적으로 거둬들여야 한다. 전쟁 기간 3개월 넘게 유지된 석유 최고가격제는 정유업계에 4조원 이상의 누적 손실을 안겼다. 시장 기능이 마비될수록 부작용은 커진다. 물론 최고가격제를 급히 풀면 소비자 부담이 갑자기 치솟는 충격이 뒤따를 수 있다. 국제유가 안정 추이를 면밀히 살피면서 시장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하는 가격 정상화가 필요하다. 물가 문제는 더 어려운 숙제다. 유가 급등은 생산자물가와 수입물가를 거쳐 소비자물가에 시차를 두고 영향을 미친다. 그간 기업들은 유가 비용 상승분을 제품·서비스 가격에 반영해왔다. 한번 오른 가격은 쉽게 내려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에너지 가격 하락의 수혜가 제품과 서비스 가격에 반영될 여지는 충분히 있다. 정부는 물가 흐름을 촘촘히 점검해 유가 하락에 따른 물가 관리에도 신경써야 할 것이다. 고환율 문제도 여전히 숙제다. 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를 유지한다면 유가 하락이 가져오는 긍정적 효과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수입 원자재 가격이 달러 기준으로 내려가도 원화로 환산하면 체감 하락 폭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원화 약세는 외국인 주식 순매도 영향이 큰 만큼 환율 문제는 별도의 구조적 처방이 필요하다. 이런 정상화의 노력과 함께 종전이 가져올 사업 기회를 누리는 것도 필요하다. 이번 이란 사태는 에너지 수급의 취약성을 드러냈고, 중동 물류망의 중요성을 재확인시켰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산업 경쟁력도 확인하는 시기였다. 대표적인 것이 방산이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은 한국 방위산업의 역량을 다시 한번 시험하는 계기가 됐다. 중동 분쟁이 불을 지핀 방산 수요는 종전 이후 역내 안보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커질 것이다. 에너지 인프라 재건과 플랜트 복구도 마찬가지다. 전쟁으로 손상된 중동 산유국들의 생산·정제 시설을 복원하려면 수년의 시간과 막대한 자본이 투입될 것이다. 한국 건설과 플랜트 기업들에는 중동 재건시장이 열리는 셈이다. 막혔던 중동 수출시장도 다시 숨통이 트이면서 전쟁 기간 위축됐던 교역도 회복세가 기대된다. 물론 낙관은 이르다. 호르무즈해협이 열려도 공급망이 완전히 정상화되기까지 최대 90일이 걸릴 전망이다. 핵 프로그램을 둘러싼 협상을 포함해 종전합의가 항구적 평화로 이어질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그럼에도 종전이 눈앞에 닥친 순간의 선택이 중요하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것은 구호가 아니라 준비된 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전쟁의 충격을 딛고 정상화를 서두르는 동시에 종전이 여는 새로운 시장 기회를 선점하는 전략적 민첩함이 필요한 때다.

[사설] 美 첨단 AI 수출 통제, 자립 역량 확보 시급

미국 정부가 사이버 보안 능력으로 주목받아온 인공지능(AI) 기업 앤스로픽의 최신 모델 '페이블5'와 '미토스5'에 대해 외국인 접근을 전면 제한했다. 미국 밖 이용자는 물론 미국 내 외국 국적자, 심지어 자사 외국인 직원까지 사용 대상에서 제외했다. 국가안보를 이유로 내세웠다. 사실상 첨단 AI를 전략무기처럼 관리하겠다는 선언이다. 미국 상무부는 12일(현지시간) 하워드 러트닉 장관 명의의 지침을 통해 이 같은 조치를 공식화했다. 그동안 미국이 반도체와 그래픽처리장치(GPU) 수출을 제한한 적은 있지만 AI 모델 자체를 통제한 것은 이례적이다. AI 경쟁이 칩을 넘어 모델과 알고리즘, 나아가 국가안보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조치로 앤스로픽이 주도하는 글로벌 AI 보안 협력체 '프로젝트 글래스윙'에 참여한 한국 기관들의 계획에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이 프로젝트에는 삼성전자, SK텔레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등 국내 기업과 기관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기업의 기술을 활용해 AI 기반 사이버 위협에 대응하려던 구상이 하루아침에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번 사태는 '소버린 AI'가 왜 필요한지를 다시 묻고 있다. AI는 더 이상 일상을 편리하게 만드는 서비스가 아니다. 경제와 산업, 국방과 안보를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다. 최첨단 AI를 소수 국가와 기업이 독점하는 상황에서 외국 기술 의존이 커질수록 공급중단이나 규제 변화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세계는 이미 'AI 냉전' 체제로 접어들고 있다. 미국은 최첨단 AI를 전략자산으로 묶기 시작했고, 중국은 국가 차원의 총력전으로 맞서고 있다. 앞으로 AI 모델과 데이터, 컴퓨팅 인프라를 둘러싼 통제는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이 지금처럼 기술과 인재, 인프라 투자에 머뭇거린다면 AI 강국은커녕 기술 소비국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정부도 2027년 자립을 목표로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에 나섰다. 그러나 추진 속도가 더 빨라져야 한다. 또 모델 개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데이터센터 등 컴퓨팅 인프라를 확보하고 공공·국방·산업 현장에서 국산 AI를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생태계도 키워야 한다. 특정 AI에만 사이버 보안을 의존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복수의 해외·오픈소스 모델을 활용하는 다중 공급망 체계도 갖춰야 한다. 글로벌 AI 경쟁은 미국 기업이 최고 성능을 유지하는 가운데 중국 업체들이 뒤를 바짝 추격하는 미중 양강구도로 굳어지고 있다. 한국은 독자 AI 모델을 가진 3위권 국가로 꼽히지만 이들 양국과 비교하면 격차가 크다는 평가다. AI 주권은 구호가 아니라 생존전략이다. 미국의 이번 조치는 기술패권 시대에 남의 기술에만 기대는 나라가 어떤 위험에 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다. 뒤늦게 위기감을 말할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 AI 자립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특파원 칼럼] 미국 생활 10개월 斷想

미국에 온 지 10개월. 오기 전 떠오르는 이미지는 철저한 자본주의, 약육강식의 사회, 살아남은 사람이 승자, 각자도생의 나라였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시간은 몇 가지 경험을 통해 이런 단편적인 인식을 조금씩 바꾸어 놓았다. 몇 달 전 아이가 심하게 아픈 적이 있었다. 동네 병원을 찾았지만 의료진은 곧바로 종합병원 응급실로 가보라고 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응급실 문을 들어섰다. 의료진은 곧바로 피검사와 소변검사를 했고, 담당의사는 두세 차례 병실을 찾아 아이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했다. 그사이 간호사들은 수시로 다가와 "걱정하지 마세요"라며 부모의 불안한 마음을 다독였다. 검사 결과 큰 이상은 없었고, 집으로 돌아가 약을 복용하면서 몇 차례 외래 진료를 받으면 된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제야 잔뜩 움츠러들었던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미국 병원비가 살인적이라는 이야기를 이미 들어왔기에 걱정이 됐다. 병원 직원이 다가와 "의료보험은 무엇을 가지고 계세요"라고 물었다. 병원 측은 의료보험 상황을 확인한 뒤 최종 비용은 추후 안내하겠다며 일단 귀가를 권했다. 3일 후 전화가 왔다. 응급실 비용이 7000달러(약 1000만원)에 달한다는 안내였다. 그러면서 최종 비용을 우편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며칠 후 떨리는 손으로 병원에서 온 우편물을 열어봤다. 최종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금액은 700달러였다. 90%가 삭감된 것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제도가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미국과는 매우 달랐다. 또 다른 경험도 있다. 미국에 정착한 지 30년이 넘은 한인 이민자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어느 날 한 교민에게 물었다. "미국 사람들은 자녀가 성인이 되면 독립시키고 더 이상 재정적 지원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한국 이민자들도 그렇게 하나요." 질문을 던진 순간,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듯한 분위기가 흘렀다.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반응이었다. 자녀가 대학을 졸업하면 독립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결혼할 때도 부모가 특별히 지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집을 마련하는 일도, 결혼비용을 감당하는 일도 자녀 스스로의 몫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녀들 역시 부모의 지원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본인 인생인데 당연히 자기가 책임져야지요." 돌아온 대답은 짧았지만 단호했다. 비슷한 경험은 또 있었다.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는 자녀를 둔 한인 이민자를 만난 적이 있다. 미국에서도 의사는 대표적인 고소득 전문직이다. 게다가 의사가 되는 과정은 한국 못지않게 치열하다. 문득 한국적 사고방식으로 질문을 던졌다. "자녀가 의사가 돼 돈을 많이 벌게 되면, 부모가 은퇴한 뒤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기도 하나요." 이번에도 반응은 같았다. 질문 자체를 낯설어했다. 미국이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라는 말은 틀리지 않다. 다만 우리가 놓치는 부분이 있다. 미국은 개인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만큼 국가와 공동체 역시 가족이 감당해야 할 부담의 상당 부분을 함께 나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의 독립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녀 역시 부모의 노후를 인생의 의무처럼 받아들이지 않는다. 개인의 독립은 개인의 의지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 시스템 위에서 가능해진다. 이런 사회 시스템은 아이들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미국 아이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진로를 고민한다. 대학 진학 자체보다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에 더 집중한다. 인턴십과 봉사활동, 아르바이트 경험을 쌓으며 사회 진출을 준비한다. 독립이 당연한 문화이기 때문이다. 부모들의 삶도 달라진다. 자녀를 끝까지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이 적다 보니 노년을 보다 주체적으로 보낸다. 여행을 다니고, 운동을 하며, 소일거리를 찾는다. 자녀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한국에서 부모는 자녀를 위해 늙고, 자녀는 부모를 위해 지친다. 미국 10개월이 내게 묻는다. 그 헌신이 서로를 위한 것이었냐고. pride@fnnews.com

[손성진 칼럼] 투자자도 정부도 냉정할 때

온 나라를 주식 광풍이 휩쓸고 있다. 소외받던 한국 주식시장이 이렇게까지 성장할 줄은 국민 대다수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배짱 좋게 장기 투자한 사람들은 생애에 처음 만져보는 큰돈을 벌었을 수 있다. 그 대열에 참여하지 못한 국민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 있다. 정부나 개인투자자들이 생각해 볼 점들이 많은 시점이 됐다. 부를 쌓을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젊은 층의 주식 투자는 천금 같은 기회가 됐다. 평생을 모아도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한 젊은 층은 너도나도 주식에 뛰어들었다. 벤처붐이 일었던 20여년 전과 유사하다. 일부는 성공해서 집 살 자금을 벌었을 것이다. 앞으로 그 기회가 얼마나 남았는지는 냉정하게 판단해 봐야 한다. 아마도 상당한 투자자들은 손실을 봤을 것으로 본다. 한몫 보려고 베팅을 했다가 되레 나락으로 떨어진 투자자도 있을 것이다. 손실을 본 투자자가 절반을 넘는다면 주가부양 정책이 자산 확충에 결과적으로 피해를 주었다는 말이 된다. 외국 전문가들은 한국인의 주식 투자를 투기와 도박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빚투'나 레버리지, 미수를 겁 없이 이용하기 때문이다. 미국 시장에서도 한국 투자자들의 이런 성향은 여실히 드러난다. 큰 수익을 거둔다면 다행이겠지만, 그 반대의 상황에 있을 투자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시장이 급변동하고 있다. 매수 사이드카와 매도 사이드카가 매일 번갈아 발동될 만큼 주식시장은 예측 불가의 널뛰기 장세다. 이럴 때일수록 투기꾼이 날뛰고 '모 아니면 도'라는 투기판이 된다. 투자가 투기로 변질될 때 건전한 풍토를 해치는 사회악이 된다. 투기는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무너뜨린다. 하루에 수백만원의 수익과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도박판에 빠지면, 직업과 노동은 무의미하게 여겨질 것이다. 고수익을 보고 직장을 그만두는 사례가 반갑지도 않다. 손실을 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면 기업이나 국가로서는 손실이다. 그 이전에 개인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좋은 현상이 아니다. 정부도 냉정하게 장을 바라볼 시점이다. 정부가 투기를 부추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저평가된 한국 주식시장을 정상화시켜 놓은 것은 정부의 공이다. 그러나 의도적 부양의 측면이 없지 않다.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 상품 허용은 시장 급등락의 원인이 되고 있다. '빚투'를 하지 말라면서 한편으로 부추긴 꼴이다. 시행 시기도 너무 늦었다. 대개 새로 집권한 정부는 증시부양책을 쓴다. 주식 투자로 누구나 돈을 번다면 나쁠 것이 없어 보인다. 개인의 자산이 증가하면 소비 증대와 성장률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나쁠 것이 없지는 않다. 주식시장에서 번 돈이 부동산시장으로 흘러들어 집값 안정에 역효과를 내고 있는 것이 예다. 올해 1∼4월 주식·채권 매각대금 3조7254억원이 주택 시장에 투입됐다는 데이터가 있다.물론 돈을 벌어 좋고 비싼 집을 사면 투자자의 이익이다. 그러나 부동산 안정을 추구하는 정책과는 엇박자다. 국민연금의 주식 투자는 어떨까. 이재명 대통령은 주가가 오르면 투자를 하지 않은 국민들도 이익이라고 했다. 국민 전체의 노후자금으로 고갈 위기에 있는 국민연금이 투자로 돈을 벌었기 때문이라는 취지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말하는 수익은 미실현이익, 즉 평가이익이다. 국민연금이 수익을 실현해야 실제로 국민에게 이익이 된다. 국민연금이 수익을 낸 것은 사실이지만 실현하기는 어렵다. 국민연금이 차익을 실현하기 시작하는 순간 주가가 폭락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역대 정부처럼 현 정부도 국민연금을 주가부양과 환율안정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매입한도를 수십년 만에 늘렸다. 주가가 급등한 배경에는 국민연금이 있는 것이다. 국민연금 리밸런싱(매도) 시기가 큰 문제다. 조금씩 비중을 줄여야 한다. 매도를 계속 늦춘다면 다음 정권으로 폭탄 떠넘기기가 될 수 있다. 정부는 이제 주가부양이 아닌 시장안정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급등은 언젠가 급락을 부를 수 있다. 물론 코스피지수가 1만을 넘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예단하기 어렵다. 그런 마당에 무작정 더 오를 수 있다고 부추길 계제는 아니다. 증권·금융사들도 마찬가지다. 무턱대고 내놓는 장밋빛 전망은 투자자의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 투자의 최종 책임은 투자자 자신에게 있는 것은 맞다. 그렇다고 정부나 금융기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투자를 부추기는 행위는 무책임하다. tonio66@fnnews.com

[포럼] 우주데이터센터에 거는 기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래학자로 평가받았던 앨빈 토플러의 저서 '제3의 물결'은 정보화 시대가 가져다줄 미래를 다양한 측면에서 예측했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 시대의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류 문명을 3개의 물결로 나누고 농업, 산업, 정보화 혁명으로 구분하였다. 제3의 물결에서는 인간의 두뇌에 저장되어 있던 사회적 기억이 컴퓨터의 등장으로 기억량이 증대되고 연결이 활성화되면서 새로운 문명건설 작업이 다양한 국면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고 믿었다. 또한 소형화가 진행되면서 컴퓨터가 필요한 모든 장소에서 지적 정보가 가득찬 환경으로 변모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제3의 물결'이 발표된 1980년은 개인용 컴퓨터의 대중화와 모바일 컴퓨팅의 혁명을 이끌었던 정보기술(IT)산업의 선구자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가 대학을 중퇴하고 컴퓨터 관련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토플러가 예언한 정보화 시대는 이제 단순한 '정보의 생성과 처리'의 차원을 넘어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지식혁명이 산업은 물론 일상 전반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이런 면에서 대규모 정보의 저장·관리·배포를 위한 핵심 IT인프라가 집결된 데이터센터는 지식 정보화 시대의 '심장' 역할을 하고 있다. 단순하게는 개인의 휴대폰에 저장된 정보들이 구름(Cloud)을 타고 저장되는 것은 물론 챗GPT에 요청한 문의사항의 답변을 계산해 주는 거대언어모델 기반의 AI 기능까지 어딘가에 위치한 데이터센터에서 처리된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이터 수요에 부응하여 데이터센터 부지를 확보, 건설하려는 노력도 전 세계 관련 기업들이 사활을 걸고 치열하게 진행 중이다. 보통 대형 축구장 크기의 수십, 수백배 이상의 부지를 확보하여야 하는 데다 웬만한 도시 규모의 전력소모와 열처리를 위한 수자원 확보가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AI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현재 건설계획된 809개 데이터센터의 대부분이 가뭄 피해를 겪고 있는 지역에 건설되고 있으며, 급증하는 데이터센터가 생태계를 더 심각한 물 부족 상태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최근 발표되었다. 이로 인해 세계 최대 규모로 유타주에 건설이 승인된 '스트라토스' AI 데이터센터는 지역주민과 환경단체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는 일반 서버보다 전력소비가 훨씬 높아 단일 시설이 원자력발전소 1기(1GW)와 맞먹는 전력을 소모하기도 한다. 정보화 시대의 심장인 데이터센터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전력과 물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아킬레스건이자 AI산업 성장의 핵심병목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데이터 기반경제와 뉴스페이스를 견인하고 있는 제프 베이조스와 일론 머스크가 작년 말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우주 데이터센터 설립비전을 제시한 것은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즉 AI 시대가 요구하는 전력 및 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구를 떠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주장이다. 사상 최대 규모의 기업공개에 성공한 스페이스X의 우주데이터센터 구축 발표로 아르테미스 달탐사보다 더한 전 세계인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주광혁 연세대 인공위성시스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