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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주거안정, 관계부처 협업에 있다

지난 5월 14일 국토교통부 장관 주재로 열린 수도권 주택건설 현장 관계자 타운홀 미팅에 참석했다. 장관을 비롯해 관련 부서 담당자들이 100명의 현장 관계자를 만나 주택 공급이 왜 막히고 있는지, 어떤 제도·정책이 필요한지 듣는 자리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무엇보다 실제 애로사항을 파악해 정책으로 연결하려는 진심이 느껴졌다. 이날 현장의 건의는 크게 네 방향이었다. 첫째, 금융이다. 비 아파트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중도금·잔금대출 등 공급 전 과정에서 자금 조달이 막혀 있다는 호소가 많았다. 둘째, 세제이다. 소형 오피스텔 등 전월세 시장 안정화에 기여하는 주거의 경우 주택 수 제외 기준을 현실화하고 일몰을 연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다음으로 공공매입과 인허가 개선이다. 신축매입 약정가격 현실화, 지자체 그림자 규제 해소가 필요하다는 건의가 있었다. 넷째, 비 아파트 공급모델 다양화다. 비 주거 건축물의 주거 전환, 민간 장기임대주택 육성 등 단기간에 공급 가능한 방안들이 제시됐다. 현재 시장의 가장 큰 어려움은 집을 짓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어려운 환경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공사비는 이미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고, 금융 문턱도 높아졌다. 금리 부담, 분양시장 불확실성, 인허가 지연, 자재 수급 문제와 공사비 갈등까지 겹치면서 신규 사업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특히 비 아파트와 오피스텔은 서민과 청년의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해왔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공급 여건이 크게 나빠졌다. 이는 최근 전월세 가격의 급등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최근 국토부가 도시형생활주택 규제 완화, 공실 상가·오피스의 주거 전환, 주택기금 사업자대출 확대 등의 대책을 발표한 것은 긍정적이다. 단 지금은 국토부의 의지만으로 공급이 완성되지 않는다. 세제 관련 부처는 서민 주거안정을 위한 소형 임대주택에 대해 주택 수에서 제외하는 원칙을 더 분명하고 안정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투기 수요와 민간의 임대 공급시장을 같은 잣대로 다루면 필요한 공급까지 위축된다. 금융 당국도 기존 주택 거래시장과 신규 분양시장을 구분해 봐야 한다. 투기적 수요 관리는 필요하다. 하지만 신규 공급을 뒷받침하는 분양시장까지 같은 관점으로 규제하면 공급 자체가 지연된다. 주거안정 실현은 가격 상승 억제, 수요 억제만으로는 어렵다. 필요한 곳에, 필요한 유형의 집이, 제때 지어지도록 세제와 금융의 신호가 함께 맞아야 한다. 조일진 도시이야기 대표

[포럼] 숏폼 시대에 K드라마의 미래

박해영 작가의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모자무싸)'가 막을 내렸다.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와 마찬가지로 박해영 작가 팬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한 회가 끝날 때마다 명대사에 대한 반응도 뜨거웠다. '모자무싸'에서 제목과 대사를 통해 표방하고 있는 '무가치함'은 근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진지한 문학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싸워온 주적이자 현대인들이 드라마와 같은 서사물에 빠져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대인이 느끼는 삶의 허무는 병리적 현상이기도 하지만 누구나 느끼는 보편적 증상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지긋지긋한 무가치 속에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느냐다. 당연히 서사보다 월등히 중요한 것은 삶 그 자체다. 드라마와 같은 서사가 가치를 지니는 것은 때로 삶의 허무를 달래주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우리는 삶의 무가치를 견디기 위해 서사를 접하며, K-드라마는 오락과 의미를 동시에 제공해온 대한민국의 특산품이다. 지난 수년간 대한민국이 자랑할 만한 드라마는 지속적으로 축적되어 왔다.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확산되어온 K-드라마에 대한 관심은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플랫폼과 협업하면서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시장으로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드라마 시장과 영화 시장의 인력교류가 활발해졌고, 황동혁 감독과 같은 창작자는 드라마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저명한 창작자로 발돋움했다. 드라마의 가치는 산업적인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국가와 같은 큰 의미에 대한 공동체 관련 서사부터 가족이나 친목집단에 대한 미시 서사까지, 드라마는 공동체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를 자연스럽게 제공하는 드문 장르다. 가족 혹은 유사 가족과 같은 작은 공동체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은 '모자무싸'를 비롯한 박해영 작가의 작품을 애호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의 결일 것이다. 대한민국 영상산업 영토를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해 왔고, 국민 감수성에 중요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K-드라마가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필자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당연한 명제는 아니다. 국내 영상산업의 총체적 위기로 드라마 제작편수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2026년 제작편수가 반등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리고 있지만, 앞으로의 추세는 예상하기 어렵다. 단위당 콘텐츠를 소비하는 이용자의 이용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16부작이었던 드라마 회차 수가 12부작으로 줄어든 것은 이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숏폼과 릴스에 익숙해진 이용자들에게 드라마 시청은 갈수록 버거운 마라톤이 될 가능성이 높다. K-드라마의 미래가 낙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드라마를 통해 이미지 제고를 해온 대한민국, 텐트폴 콘텐츠가 필요한 미디어 산업, 다양한 볼거리가 필요한 이용자 모두에게 K-드라마는 여전히 선전해 줘야 할 존재다. 대한민국 드라마는 자신이 가진 가치를 꾸준히 증명해 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러한 성과가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인식하고, 드라마가 앞으로도 그 가치를 입증해 나가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관심과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일이다. 노창희 디지털산업정책 연구소장

[fn광장] 조지 오웰의 묘비 앞에서

2010년 7월 25일 오후, 나는 영국 옥스퍼드주 작은 마을 서턴코트니를 향해 일행과 가고 있었다. 그곳의 올세인츠 교회 묘지는 조지 오웰(1903~1950)이 잠든 곳. 런던과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오웰의 흔적을 답사하는 여정의 마침표였다. 묘역에 들어서자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내가 여기에 오다니! 작가의 안식처를 직접 찾아보고 싶었다. 묘역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다 오웰의 묘비를 발견했다. 순간, 당혹스러웠다. 묘비가 너무나 초라해 보여서였다. 여기 에릭 아서 블레어 잠들다(Here lies Eric Arthur Blair) 1903년 6월 25일 태어나 1950년 1월 21일 숨지다(Born June 25, 1903 Died January 21, 1950) 조지 오웰은 작가로 데뷔한 1933년부터 사용한 필명. 묘비에는 생을 받을 때의 본명이 음각되어 있었다. 무릎을 꿇은 채 묘비를 쓰다듬었다. 여러 가지 상념이 교차했다. '소설가님, 여기까지 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비석을 어루만지는데 문득 뒤쪽의 묘비가 눈에 들어왔다. '데이비드 애스터(David Astor) 1912~2001.' 데이비드 애스터가 누구지?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7년간 옵서버 신문 발행인을 지낸 언론인. 소설가보다 아홉 살 아래였지만 그를 존경했고 아낌없이 도와준 사람. '동물농장'이 세상 빛을 본 것은 1945년 8월 17일. 원고는 1944년 2월에 완성되었지만 런던의 출판사들은 소련의 눈치를 보느라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커앤워버그' 출판사가 용기를 냈다. '동물농장'은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데뷔 12년 만에 마침내 먹고사는 문제에서 해방되었다. 두 사람이 알게 된 것은 '동물농장'이 나온 직후였다. 유력신문 발행인과 유명 소설가. 두 사람은 모든 면에서 대화가 통했고, 신뢰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구상한 소설을 써내고 싶었다. 몸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머릿속에 꽉 차 있는 이야기를 마냥 미뤄둘 수는 없었다. 소설 제목은 '유럽 최후의 남자'. 그는 스코틀랜드의 외딴 섬 주라(Jura)로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애스터에게 부탁을 한다. 그곳에 들어가 소설을 쓰고 싶은데 도와달라. 천재는 몰입하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 몰입은 스스로를 고립시킨 고독한 상태에서 가능해진다. 글 감옥에 갇힌 채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 주라섬에서도 사람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이 반힐(Barnhill). '동물농장'을 써낸 월링턴의 집보다 몇 배 더 고립된 황량한 오지였다. 그곳에는 플레처 집안 소유의 농가 한 채가 있었다. 애스터는 플레처 집안과 연락해 이 집을 장기 임차했고, 오웰은 1946년 말 이곳에 들어갔다. 집필을 하는 동안 오웰은 간간이 피를 토했다. 거칠고 음울한 환경에서 그는 '유럽 최후의 남자'를 탈고했다. 타자기로 친 원고를 수없이 고치고 고쳐 원고를 완성한 게 1948년 12월 4일. 원고를 런던의 세커앤워버그 출판사로 우송한다. 출판사는 책을 편집하면서 '유럽 최후의 남자'라는 제목 대신 작가와 협의해 '1984'로 바꿨다. 그가 섬을 나온 것은 1949년 1월. 폐결핵이 악화되어 더 이상 섬에 머물 수 없었다. 애스터는 그가 런던에 오는 즉시 입원 치료를 받을 대학병원 병실을 잡아놓았다. 병원에서 집중치료를 받았지만 몸이 결핵균에 너무 많이 갉아먹힌 상태였다. 그는 병실에서 소니아 브라우넬에게 청혼한다. 첫 부인과 사별한 지 4년 만이다. 1949년 가을 그는 병실에서 애스터가 지켜보는 가운데 브라우넬과 결혼한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눈을 감았다. 장지를 정해준 사람도 애스터였다. 89년의 생애를 산 애스터는 이렇게 유언했다. "오웰 묘지 뒤에 묻어달라." '1984'는 용어 혼란과 역사 조작을 일삼는 전체주의 폭정을 고발한 디스토피아 소설. 목숨과 맞바꾼 소설이 '1984'다. 조성관 작가·지니어스 테이블 대표

[차관 칼럼] 한반도 평화공존 위한 3대 정책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지 어느덧 1년이 되었다. 정부가 출범했던 1년 전 남북 간에는 대화와 교류가 7년 이상 단절된 시기였고, 그 7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는 불신으로 서로를 짓누르기에 충분했다. 이에 더하여 지난 2023년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과 지난 정부의 대결적 대북정책으로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되었던 시기에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고, 한반도의 위기상황을 '평화공존'의 남북 관계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 이재명 정부의 시대적 사명이었다. 통일부는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을 발표하고 크게 3대 분야에 초점을 두어 정책을 구체화해 나갔다. 통일부가 가장 시급하게 추진해야 했던 과제는 잃어버린 일상의 평화를 접경지역에서부터 회복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출범 일주일 만에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지하고, 군사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대북전단도 민간에 적극적으로 요청하여 자발적 중단을 이끌어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접경지역에서 들렸던 괴음과 오물·쓰레기 풍선, 그리고 전단은 사라지게 되었고, 지난해 11월 파주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88%가 "변화된 일상에 만족한다"고 응답했다. 또한 지난 1월 발생한 민간인 평양 무인기 침투 사건에 대해 통일부 장관의 공식적인 유감 표명과 재발방지 조치 발표는 평화를 위한 이재명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특히 지난해 12월 경찰관 직무집행법, 5월 항공안전법이 개정되어 한반도 상공에서 인위적으로 긴장을 고조시키는 행위는 제도적으로도 근절되었다. 그리고 접경지역에서 찾은 평화는 한반도 전역으로 스며들어 갔다. 둘째, 통일부는 꽉 막힌 남북 관계의 바늘구멍을 뚫기 위해 그 기초를 다지는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되었던 북한주민접촉신고 처리 지침을 지난해 7월 폐지하는 등 남북 간 교류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민간교류의 자율성을 보장했다. 아울러 대화와 교류를 담당하는 부서를 신설해 통일부 조직을 정상화했고, 올해 남북협력기금을 1조원대로 회복하여 남북협력추진의 재정적 기반도 마련했다. 마지막으로, 국민주권정부로서 국민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북한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평화통일의 공감대를 확산해 나가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다. 안보 중심의 주입식 통일교육을 참여형 평화·통일·민주시민교육으로 전환했고, 국민의 성숙한 민주시민의식에 부합하게 지난해 12월 '노동신문'을 일반자료로 재분류하는 등 북한 자료에 대한 접근성을 확대했다. 이런 통일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북 간 연락채널은 연결되지 않은 상태이고, 남북 간 대화의 문은 닫혀 있다. 지난주에 북한 내고향여자축구단이 국제대회 참가를 위해 방문한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많은 관심을 끌었던 것이 남북 관계의 현주소다. 정부는 '한반도 평화공존'이라는 뿌리를 소중히 심어 왔지만, 현재 남북 관계와 엄중한 한반도 정세라는 척박한 토지에서 그 뿌리를 깊이 내리는 데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통일부는 일희일비하지 않고, 그 뿌리가 든든히 자리 잡아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평화공존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고 제도화해 나가고자 한다. 이를 위해 앞으로도 국민 여러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경청하며, 이해와 지지를 구해 나갈 것이다. 김남중 통일부 차관

[기고] 가난 증명보다 따뜻한 밥이 먼저다

복지 예산은 매년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에는 증명하기 어려운 가난으로 신음하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국가의 도움을 받기 위해 서류를 떼고, 자신의 가난을 입증해야 하는 행정 절차는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 요청을 주저하게 만드는 높은 장벽으로 작용한다. '배고픔에는 증명서가 필요 없습니다'는 기치 아래 정부가 '그냥드림' 사업을 시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냥드림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국민에게 자격 기준을 먼저 묻지 않고 식품을 즉시 지원하는 사업이다. 지난해 12월 57개소에서 시범적으로 시작해 올해 5월 18일 본사업으로 전환되면서 운영 사업장이 280개소로 대폭 확대되었다. 그냥드림이 기존 현물지원 사업과 다른 점은 단순히 식품을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사업은 추가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이용자에게는 상담을 거쳐 복지서비스를 연계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4월까지 9만 7926명에게 식품을 제공하였고, 이 중 상담을 통해 1553가구에게 복지서비스를 연계하였다. 그냥드림 사업이 현장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제가 있다. 첫째, 사람과 행정의 조화가 필요하다. 본사업을 시행하면서 꼭 필요한 자가 그냥드림을 이용할 수 있도록 자가점검표를 도입하였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위기로 인식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리는 자가 생기지 않도록 현장 인력이 방문자의 상황을 세심하게 살펴 위기 신호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또한 경찰청과 협약을 맺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냥드림에 연계할 수 있도록 한 예처럼, 위기가구를 마주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사회 내 기관과 인적자원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둘째, 정부와 민간의 협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신한금융그룹이 100억원을 후원하는 등 민간 후원금 116억원을 확보한 것은 고무적이다. 정부는 그냥드림을 통해 위기를 극복한 사례를 확산해 사업성과를 알리고, 이를 기반으로 민간의 참여를 꾸준히 이끌어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홍보 수단을 다각화해야 한다. 경기에 민감한 임시일용직이나 소상공인 등은 갑작스러운 위기가 닥쳐도 복지 제도를 이용해 본 경험이 없어 도움을 청할 생각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다. 주저 없이 그냥드림을 떠올릴 수 있도록 이들이 많이 찾는 장소를 중심으로 홍보를 강화해야 한다. 또한 주거 불안정 가구가 밀집한 지역을 찾아가는 이동형 코너도 고려할 수 있다. 가난을 증명하지 않아도 따뜻한 밥 한 끼를 먼저 지원하는 것은 '퍼주기'가 아니라 인간 존엄을 지키기 위한 국가의 책무다. 그냥드림이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곳까지 단단히 묶어주는 연대의 이정표가 되기를 기대한다.홍경준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포럼] AI·로봇 시대의 생존 의지

인공지능(AI)과 로봇의 발전으로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고 한다. 한편 인간 노동의 상당 부분이 불필요해지고 일자리들이 사라져서 결국 기본소득과 같은 대규모 재분배가 필요해질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가 과도한 낙관과 지나친 비관 사이를 오가며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술 발전이 인간 노동의 필요성을 급격히 줄일 것이라는 전망도, 더 많은 사람이 국가의 재분배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모두 인간이 스스로 살아내기 위해 노력하려는 의지를 약화할 위험이 있다. 우리 사회와 문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바로 그 살아내려는 의지 말이다. 산업혁명 당시에도 기계가 노동을 대체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컸다. 영국의 스핀햄랜드제도는 임금이 생계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공동체가 그 차액을 지원하는 사실상의 최소소득 실험이었다. 그러나 그 제도가 노동의욕을 저해한다는 비판이 거세게 제기되었고, 결국 영국은 이후 빈민법 체계를 대폭 수정하게 된다. 이미 200여년 전 사람들도 기술 발전에 직면하여 노동과 생계보장의 관계를 두고 지금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맹자는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라 했다. 안정된 생업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건강한 사회 역시 유지되기 어렵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구가 스스로 움직인다면 노동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그는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시민에게 자기수양과 공동체적 책임의식은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보았다. 노동으로부터의 자유가 인간을 더 고귀하게 만들 가능성과 더 쉽게 타락시킬 가능성이 동시에 열려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생산성에서 AI와 로봇에 뒤처지더라도 인간 노동을 생산 과정에서 배제하는 것은 소중한 생산자원을 버리는 일이다. 비교우위의 논리가 말해주듯, 사회 전체의 효율은 모든 자원이 제 역할을 찾을 때 극대화된다. 설령 노동 없는 생계가 가능하다 해도 인간 노동이 생산 과정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것은 경제 전체로 보면 여전히 손실이다. AI와 로봇 기술 발전이 곧 인간 노동의 광범위한 배제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생산을 어떻게 조직할지는 결국 제도와 선택에 달려 있다. 인류의 역사적 경험과 고민의 결과는 다수의 구성원이 생산의 책임을 담당하는 쪽을 가리킨다. "누가 얼마를 가질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임은 분명하지만, 이를 재분배만으로 해결하는 것보다는 "생산과 노동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고민하여 생산 과정에서부터 그 답을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역사 속 많은 사회가 이미 생산된 몫을 둘러싼 지대추구와 분배갈등에 몰두하기 시작했을 때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여주는 기술 발전과 인간의 노동은 양립할 수 있을까? 생산성 향상이 일하는 사람의 수가 아니라 각 사람이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쪽으로 활용된다면 그것은 가능하다. 기업의 인사조직과 고용관행, 나아가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이중구조의 개선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생산에 참여하고 높아진 생산성의 과실을 자신의 소득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경제와 제도를 설계하는 것, 그것이 우리 앞에 놓인 과제다. 김민성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fn광장]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진 美中

2500년 전 아테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베이징에 등장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열흘 전 베이징 미중 정상회담에서 미중은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현실은 역설적으로 이미 함정에 들어섰다. 시 주석은 중국의 부흥과 마가(MAGA·미국 우선주의)는 공존할 수 있다고 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투키디데스는 동양에서 공자, 맹자가 활동하던 시절 1등 도시국가 스파르타와 2등 아테네가 평화 공존보다는 끝내 전쟁의 함정에 빠져드는 과정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상세하게 서술했다. 두 강대국은 강자의 논리를 내세워 협력보다는 갈등, 화해보다는 증오를 통해 멸망에 이르렀다. 하버드대 그레이엄 엘리슨 교수는 2017년 저서 '예정된 전쟁'에서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을 지적했다. 그는 지난 500년간 1·2 등 국가 간의 충돌 16건을 분석한 결과 75%인 12건이 전쟁으로 귀결됐다며, 미중의 충돌은 17번째 사례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미중이 현재의 경쟁구도를 변경하지 않는다면 전쟁 발발은 필연적이라고 했다. 베이징 정상회담은 미중 양국이 이미 함정에 빠졌다는 장면을 리얼하게 연출했다. 중국 상무부는 정상회담 직전 인천에서 열린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과 허리펑 중국 국무원 부총리 간 무역 경제 협의에서 합의한 다섯 가지 사항을 회담 후 공개했다. 양측이 확실하게 합의한 사항은 무역위원회(board)와 투자위원회(board) 설립뿐이다. 네 가지 사항은 관세협정의 긍정적인 합의 도출, 중국은 소고기(beef)와 대두(bean) 등 농축산물과 미국산 항공기(boeing) 구매 등 협력 증진에 양측이 노력한다는 내용이다. 일부 미국 언론은 합의의 모호성을 들어 중국이 미국산 콩(bean)을 몇 번째 사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5B의 요구 중 2B인 위원회만 구체적이다. 반면 백악관이 공개한 협의 결과는 중국과는 천양지차다. 보잉 항공기 200대 구매, 지난해 약속한 대두 계약 이외에 3년간 매년 최소 170억달러의 농산물 구매, 미국산 소고기 수입제한 해제 등을 발표했다. 양측의 입장 차이는 동상이몽의 합의문으로 표출됐다. 중국은 양국 간 무역 경제 협의의 원칙과 방향을 설명했다. 중국은 관세협정에 대해 긍정적인 합의를 도출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무역전쟁의 핵심인 관세를 이번 회담에서 전혀 논의하지 않았다고 했다. 인천 합의사항은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은 중국의 양보를 부각하며 구체적 수치 성과를 나열했다. 미국의 핵심광물 공급망 부족 우려에 대해 중국이 해명할 것이라는 백악관의 발표와 달리 중국은 희토류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요컨대 양국 간 실질적인 합의는 없었다. 알코올기피증의 트럼프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건배 후 와인을 마셨지만 성과는 미흡했다. 금년도 미중 정상회담은 4라운드가 계획돼 있으며, 1라운드는 시 주석이 득점했다. 오는 9월 2라운드 워싱턴, 3라운드 11월 선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4라운드 12월 주요 20개국(G20) 마이애미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다. 시 주석은 정상회담에서 미국을 '쇠퇴하는 국가(Nation in decline)'로 각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경제협력 대가로 중국이 제안한 '중미 건설적 전략 안정 관계'를 수용하고 대만에 대한 무기 판매를 재고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내왔다. '건설적'은 미중 관계의 방법론, '전략적'은 미중 관계의 관점, '안정적'은 미중 관계의 목표를 의미한다. 중국의 입장이 반영된 새로운 외교관계 개념이다. 미국이 새로운 개념의 관계를 일단 거부하지 않아 중국은 명실상부한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했다. 기존의 1등 스파르타에 도전하는 2등 아테네가 아니라 공동선두 개념이다. 중국은 미국이 공정성과 호혜성을 바탕으로 건설적 전략 안정 관계를 구축하는 데 동의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가 베이징을 떠나자마자 3등 국가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방중하여 미소로 반미 연대의 사진을 찍었다. 2등과 3등 국가가 밀착하여 1등 국가를 압박하는 형국이다. 일주일 사이에 1등과 3등 국가의 지도자가 이례적으로 방중함으로써 베이징은 세계 외교의 중심지가 됐다. 미국은 러시아와 밀착한 중국에 공동선두를 허용함으로써 군사와 경제 분야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대만 독립을 둘러싼 중국의 공세적 입장, 인공지능(AI) 기술 관련 반도체와 희토류 등 누가 더 상대를 압도할 카드를 많이 가지고 있는지가 게임의 최종 결말을 좌우할 것이다. 한국 외교에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몰려오고 있다는 신호다. 남성욱 숙명여대 석좌교수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포럼] 현대인의 '창살'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지위와 가치는 사회가 정한 기준에 따라 배분된다. 이러한 '성과 사회'의 논리가 개인의 내면에 침투할 때, 현대인은 외부의 강압 없이도 스스로를 노예처럼 부린다. 한병철 교수가 제시한 '피로사회'도 이를 가리킨다. 하루하루 숨 가쁜 질주 속에서 우리는 문득 베르테르를 떠올린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떠나오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라는 해방감 넘치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그는 왜 친구와 도시를 뒤로하고 자연으로 향했을까. 그곳에서 만난 롯테와의 사랑은 어떤 의미일까.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공동의 토지에 울타리가 쳐지고 사유재산제가 확립된 순간을 문명화의 시발점으로 보았다. 그에게 문명화란 인간을 이기적 욕망과 불평등의 틀에 가둔 타락의 과정이었다. 루소가 외친 "자연으로 돌아가자"라는 선언은 단순히 숲으로 가자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물질적 욕망과 경쟁이 지배하기 이전으로 돌아가 인간 본연의 연민과 공감력을 회복하자는 호소다. 18세기 중반 루소와 동시대를 살았던 괴테는 이 철학자의 사상을 소설로 형상화했다. 겉으로만 보면 이 작품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이지만 깊은 곳에는 도시와 자연의 대립을 통해 근대 문명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시선이 담겨 있다. 주인공은 규범과 격식, 신분 질서라는 문명화가 지배하는 질식할 것 같은 도시를 떠나 '살아있는 자연'과 교감하고자 했다. 그에게 자연은 영혼의 순수성과 사랑의 원형이었고, 이는 롯테와의 만남으로 표현된다. 무도회에 갔다가 밤이 되어 뇌우가 몰려오고, 비에 젖어 생명력을 더해가는 창밖의 자연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함께 눈물을 흘리며 깊은 영적 교감을 나눈다. 그러나 베르테르를 기다리는 현실은 냉혹했다. 롯테에게는 약혼자 알베르트가 있다. 그는 합리성과 근면성으로 대변되는 문명의 세계를 상징하는 인물로, 베르테르와 대척점에 서 있다. 베르테르는 어쩔 수 없이 도시로 돌아가 공사관 직원이 되지만, 그곳에서 겪는 좌절은 현대인이 겪는 기성의 제도와 현실에서의 소외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신분의 벽, 상관의 고압적 태도, 기계적 일상 속에서 그는 "나를 괴롭히는 것은 질식할 것 같은 시민사회의 관계들"이라며 절규한다. 그가 마주한 벽은 인간의 생명력을 메마르게 하는 근대 관료제와 합리성의 세계였다. 결국 그는 롯테를 찾아 발하임으로 되돌아오지만 그녀는 이미 알베르트와 결혼했고, 꿈꾸었던 사랑은 이루지 못한다. 막스 베버는 개신교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이 냉혹한 질서의 기원을 밝힌다. 근면과 성과를 강조하는 자본주의 정신은 본래 종교적 경건함에서 출발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영혼은 사라지고 효율성만 남았다. 그래서 인간은 영혼 잃은 전문인, 심장 없는 향략인이 되어 '철창'에 갇히게 된다. 루소의 선언이나 베르테르의 절규도 이를 가리킨다. 베르테르는 자신이 창살이 쳐진 감옥에 갇혀있다고 느끼는데, 마찬가지로 현대인도 성과지표라는 이름의 현대적 창살을 경험하고 있다. 이 창살에서 벗어날 때 베르테르의 슬픔은 멈출 것이다. 그때 우리는 루소가 꿈꿨고 베르테르가 갈구했던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김길웅 성신여대 인문융합예술대학 명예교수

[포럼] 성과급 시대, 中企 생존전략

삼성전자 성과급 분쟁이 총파업 직전에 노사가 극적 합의를 이루며 일단락되었다. 합의안에 따라 올해 삼성전자 메모리 사업부 직원은 자사주를 포함해 1인당 6억원가량(세전, 연봉 1억원 기준)의 성과급을 받게 된다. 삼성전자 성과급 협상을 계기로 성과급제가 빠르게 전체 기업으로 확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벌써 현대자동차 등 여러 대기업에서 '영업이익 N% 성과급'을 요구하는 노조의 목소리가 크다. 대기업은 성과급제 도입을 피할 수 없다. 어떤 형태이건 성과급을 주지 않는 대기업은 이류로 취급되어 직원들의 사기가 저하되고 대대적 인재 유출을 감수해야 한다. 성과급제의 거센 흐름은 중소기업도 거스를 수 없다. 중소기업의 임금은 대기업의 약 55~60%인데, 성과급이 더해지면 그 차이는 더욱 벌어진다. 성과급이 없는 중소기업은 심각한 인력난에 처해 생존을 위협받게 될 것이다. 현재 성과급제를 운영하는 중소기업은 20~30%에 불과하다. 나머지 중소기업은 성과급 대신에 상여금, 보너스, 격려금 등을 지급한다. 대기업과 벤처기업은 성과급 보상으로 주식이나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을 활용한다. 벤처기업은 임금보다 주식 성과급으로 인재를 끌어당긴다. 상장하거나 인수합병하면 주식을 받은 직원이 큰돈을 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중소기업은 상장 가능성이 작아 주식 가치가 불분명하고 주식을 현금화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성과급으로 주식을 제공하는 중소기업은 전체의 3~7%에 그칠 만큼 희소하다. 이런 점에서 정부는 비상장주식의 유통시장을 확대하고 중소기업의 인수합병을 적극 장려하는 정책을 펼칠 필요가 있다. 또한 중소기업 직원의 주식매수권 행사 이익에 대한 과세특례 혜택을 확대하여 실질적 보상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주식 보상이 어려운 중소기업들은 이익공유형이 차선책이다. 중소기업은 사업이 단순하고 조직이 작아 직원 간의 협업 비중이 크기 때문에 대기업처럼 복잡한 성과시스템이 필요 없다. 영업이익이 목표를 초과하면 초과분의 10~20%를 직원들에게 배분하는 이익공유형 방식이 더 적합하다. 여기서 상생협력 차원의 대기업 지원이 요구된다. 중소기업은 환경변화에 따른 수익의 변동성이 크고 현금 유동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성과급을 지급할 여력이 충분하지 않다. 이에 대기업이 사업성과에 대한 협력 중소기업의 기여도를 평가하고 이에 상응하는 성과공유금을 중소기업의 성과급 재원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대·중소기업의 성과공유제를 이익공유제로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기업이 성과급 잔치를 벌이니 협력 중소기업의 노조도 성과급을 달라고 요구한다. 노란봉투법의 영향으로 대기업은 하청 중소기업의 노조 요구를 무시할 수 없다. 노조의 압박에 밀리기보다는 공급망 전체에 성과주의를 확산한다는 취지로 대기업이 먼저 협력 중소기업의 성과제 도입을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국 중소기업의 성과보상제는 정부와 대기업 모두가 다 같이 힘을 합해야 실현될 수 있다. 중소기업까지 성과급제가 퍼지면 자연스럽게 선순환 상생협력 문화가 조성될 것으로 기대한다. 임채운 서강대 경영학과 명예교수

[fn광장] 대체 불가한 '韓 반도체 산업' 만들자

인공지능(AI)의 발전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 올해는 딥마인드의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머쓱하게 하며 전 세계에 충격을 안긴 지 10주년이 되는 해이다. 불과 10년 만에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은 AI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으며, AI와 자연스럽게 대화하며 답을 찾는 시대가 되었다. 거대언어모델(LLM)에 기반을 둔 AI 비서의 도래로 우리는 일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혁신하며 새로운 문명에 적응하는 중이다. 머지않아 단순하고 반복적인 지식노동은 모두 AI의 몫이 될 것이며, 수많은 직종이 소멸하고 또 완전히 새로운 직종이 탄생할 것이다. 더욱이 최근 미국과 이란의 갈등 등 지정학적 분쟁에서 목격한 AI 기반 첨단무기의 활약상을 보면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세상이 도래하는 것은 아닌지 서늘한 기분마저 든다. 어쩌면 이것이 AI가 가져올 미래 세상의 거대한 서막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6개월 혹은 1년 뒤에 또 어떤 기술적 도약이 우리를 놀라게 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제임스 와트의 개량된 증기기관이 인류를 고된 육체노동에서 해방시키고 산업혁명을 이끌었듯, AI의 도래는 인류가 누적해 온 모든 지혜를 즉각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제시하며 인간 고유의 지적 역량마저 대체하려 하고 있다. 고도로 발달한 인공초지능(ASI)과 공존해야 할 인류는 앞으로 어떤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인지, 우리는 AI와 어떤 파트너십을 구축해야 할지 매우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이 모든 경이로운 문명사적 변화가 가능했던 기저에는 그래픽처리장치(GPU)라는 강력한 병렬 연산장치와 이를 뒷받침하는 초고속 고대역폭메모리(HBM)의 혁신이 있었다. AI 주도권을 잡기 위한 전 세계 빅테크 기업들의 과감하고 공격적인 인프라 투자 경쟁으로 GPU와 HBM은 이제 부르는 게 값이 된 상황이다. 현재 글로벌 기술 패권은 미국의 독보적인 칩 설계, 대만의 압도적인 파운드리(위탁생산) 제조, 그리고 한국의 세계 최고 수준 메모리 제조 역량이라는 '삼각 편대'가 이끌며 세계 산업의 패러다임을 통째로 바꾸고 있다. 한국이 AI 반도체 생태계의 결정적 한 축을 담당하게 된 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천재일우의 기회다. 아울러 치열한 기술 패권 경쟁과 글로벌 무역질서의 격변 속에서 무서운 속도로 추격해 오던 중국 반도체의 예봉을 꺾고 격차를 벌릴 수 있는 수년의 '골든타임'을 확보하게 된 것도 국가적으로 대단히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이 귀중한 골든타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그 누구도 쉽게 넘볼 수 없는 '대체 불가한 초크포인트(Chokepoint)' 산업으로 격상시켜야 한다. 우리가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메모리 제조의 강점은 극한으로 끌어올리되, 그동안 약점으로 지적되어 온 취약한 시스템 반도체 설계 역량과 파운드리, 그리고 소재·부품·장비 생태계를 전면적으로 보강해야 한다. 과거 세계무역기구(WTO) 체제하에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소재와 장비를 적기에 아웃소싱하여 가격경쟁력 있는 반도체를 만들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기술 블록화가 심화된 현재는 철저히 전략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어느덧 반도체 산업은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핵심자산이 되었으며, 반도체 공급망 관리는 안보적 차원에서 철저히 기획되고 육성되어야 한다. 특히 국내의 척박한 환경에 놓인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회사들이 자생할 수 있도록 집중적으로 지원하여 거대한 혁신 생태계를 조성해야만 한다. 더 나아가 AI 혁명은 이제 가상의 소프트웨어 공간을 넘어 제조 현장과 현실 세계를 직접 제어하는 '피지컬 AI(Physical AI)'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머지않아 모든 산업 영역에 AI가 깊숙이 접목될 것이다. 제조업 강국인 한국은 생생한 제조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 세계 시장에 내놓는 우리의 자동차, 휴머노이드, 선박, 항공우주, 스마트 팩토리, 방산제품 등 모든 제품은 최고급 제조 현장 데이터로 학습한 AI로 인해 근본적으로 차별화될 것이며, 그 혁신 제품의 핵심 두뇌에는 우리가 직접 설계하고 제조한 국산 AI 반도체가 탑재되는 가슴 벅찬 미래를 꿈꿔본다. 우리가 선제적으로 AI 인프라를 확보하고 반도체 산업 혁신 생태계를 완성할 때 전 세계의 훌륭한 젊은이들이 반도체 벤처기업을 창업하기 위해 기회의 땅 한국으로 앞다투어 찾아오는 역동적인 내일을 소망해 본다. 윤의준 한국공학한림원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