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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군사대국 치닫는 독일과 일본

세계의 안보질서가 변하고 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독일과 일본을 직간접적으로 군사강대국으로 내몰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독일의 안보불안을 일으켰고, 중동전쟁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유럽 국가들이 군대를 파견하지 않으면서 미국과 NATO 국가들은 단단했던 대서양 동맹관계가 느슨해져 버렸다. 독일은 히틀러 정권하에서 유대인 600만명을 살상했다. 필자는 독일의 만행을 확인하고자 폴란드 아우슈비츠를 가 본 적 있다. 유대인의 머리카락을 잘라 쌓아 두고 신발들도 보관되어 있는 시설도 보았다. 시체를 태우기 위한 화장터도 그대로 보존되어 독일의 잘못을 반성하려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는 베를린 한복판에도 나치의 만행을 보여주기 위한 시설을 만들어 놓으며 과거의 잘못된 행위를 반성하려 한 것이다. 생체실험을 한 곳도 공개되고 있다. 과거사를 숨기려고 급급하는 일본과는 다르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NATO 국가들의 동맹관계를 소홀히 하면서 독일이 군사 재무장을 하고 있다. 독일은 2025년 헌법을 개정해 국방비 한도를 해제하고 유럽 최강의 재래식 군대를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일본도 들여다보자. 일본의 평화헌법 제9조는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하고 국제분쟁에 군사력을 파견할 수 없도록 명기하고 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투하되면서 무조건 항복을 했다. 그리고 그 당시 미국 맥아더 장군의 의도대로 평화헌법이 만들어진 것인데 다카이치 정부는 일본 헌법 제9조를 개정하려 한다. 패전 후 80년이 지나면서 전쟁의 악몽을 잊어버린 것인가. 일본은 지난 수십년간 미쓰비시중공업과 가와사키중공업이 세계 최고 기술의 전함과 잠수함을 생산하고, 전투기 날개에 탄소섬유수지를 활용하는 군사기초과학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일본은 전후 최초로 군함을 수출하고 살상력 무기를 수출한다고 해 군사력의 과학기술이 첨단화된 독일과 일본의 군사 재무장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작고한 아베 신조 전 총리가 군사강대국 일본의 청사진을 내놓았는데,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아베의 군사강국 일본의 목표를 실현하려 한다. 독일과 일본의 군사강국의 움직임은 멈출 수 없는 세계가 되고 있고, 한국의 안전보장을 위해 자주국방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일본과 중국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동북아질서의 변화에 한국은 스스로에게 한국 안보의 앞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과의 동맹은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어야 하지만 핵잠수함·미사일과 드론 등 한국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자주국방력을 키워야 한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무기 수출에 나서면서 한국의 방위산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국을 침략하고 식민지배하면서 중국까지 쳐들어 가고, 급기야 미국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는데 미국의 핵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져 1945년 무조건 항복을 한 일본이다. 그러면서 1947년 평화헌법을 선포해 군사력을 보유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일본이 100년도 못 버티고 군사강대국으로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면서 대한민국과 국민은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스스로를 지킬 힘을 비축해야 한다. 김경민 한양대 명예교수

[fn광장] AX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것

인류가 인공지능(AI) 시대의 도래를 일상에서 체감하게 된 계기는 2022년 11월 말 오픈AI 챗GPT의 출시였다. 인간의 대화형 질문에 대한 거대언어모델(LLM) 기반 챗GPT의 대답이 항상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인간과 대화하는 기계의 등장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에게 매우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지난 4년 동안 업그레이드된 구글 제미나이, 앤스로픽 클로드, 네이버 하이퍼클로바 등 다양한 생성형 AI를 사용해 본 경험담이 우리 주위에 넘쳐흐른다. 생성형 AI는 문자 커뮤니케이션 시대의 백과사전,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시대의 위키피디아나 네이버 백과사전의 고급 버전이다. 정보와 지식 미디움의 기술적 확장이라는 점에서 물론 주목할 만하다. 그 정보와 지식의 범위가 교육, 학술, 법률, 행정, 과학기술, 산업, 언론, 디자인, 예술의 영역, 즉 개별 전문 도메인까지 전방위로 확대되는 이 시대를 우리는 AI 전환(AX) 시대라고 부른다. 사회의 각 도메인에 AI 테크놀로지가 진입하면서 바뀐 것이 분명히 있다. 첫째, 우리는 매우 똑똑하고 반응이 빠른 비서를 바로 옆에 두게 됐다. 생성형 AI 구독료를 좀 더 많이 지불하면 좀 더 유능한 비서를 옆에 둘 수 있다. 질문하면 바로 답하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물으면 더 구체적으로 반응한다. 그래서 변호사, 회계사, 의사, 약사와 같이 유사한 상담 과업을 반복하는 직종은 곧 소멸되리라는 우려도 있다. 둘째, 정보와 지식을 수집하는 일의 수행 방식과 평가는 효율성 중심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인간 비서를 채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저렴한 비용으로 짧은 시간에 엄청난 양의 과업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평가기준이 되고 있음이 큰 변화다. 컴퓨터 앞에서 간단히 해결되는 작업을 위해 힘들게 도서관에서 두꺼운 서지를 넘길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셋째, 복잡한 인간관계에 부대끼는 실제 세계에 굳이 진입할 필요 없이 가상의 세계 속에서도 얼마든지 정보와 지식을 탐구할 수 있다.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만으로도 자신의 전문 도메인을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욱 커진다. 논쟁도 필요 없고 숙의도 필요 없다. 그 결과 인간은 점점 더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기계와의 상호작용에 더욱 몰입한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 또한 분명히 있다. 첫째, AX 시대 전문 도메인의 플레이어는 여전히 비서 AI가 아닌 마스터 인간이다. 법원 판결, 의사 처방, 정부 정책, 기업 경영전략, 언론 보도, 모두 AI 비서가 효율적인 방식으로 제공한 정보와 지식의 나열만으로 결정될 수 없다. 여전히 법관, 의사, 행정가, 경영인, 신문 편집인이 의사결정의 핵심 플레이어다. 둘째, AX 시대에 AI가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제공하는 정보와 지식은 인간 사고 과정에 필요한 재료이지만 그 자체가 본질은 아니다. 최고의 요리를 위해 좋은 식재료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식재료의 단순 나열이 곧 최고의 음식은 아니다. 최고 요리의 본질이 마스터 셰프의 통찰력과 손맛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셋째, 인간과 기계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가상의 시나리오는 현실의 맥락을 자주 잊게 한다. 가상 세계의 팩트가 항상 현실 세계의 진실인 것은 아니다. 법, 정책, 언론, 심지어는 과학기술 세계가 마주치는 현실 도메인은 모두 매우 특수한 맥락 속에 존재한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여전히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이며, 인간의 개입으로 인해 비로소 해결된다. 그 개입의 책임도 역시 인간의 몫이다. 정부와 기업의 보고서, 학술 논문, 그리고 학생 에세이를 읽으면서 그 내용에 오류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특수한 맥락에 대한 해석과 진단의 자기 기준과 관점이 결여됐다면 최고 점수를 주기는 힘들다. AX 시대에 AI 비서의 도움에만 전적으로 의존해 마스터의 생각과 개입이 빠진 결과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마스터, 본질, 현실의 중요성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들이 점차 망각되고 있음이 우려된다. 스마트한 프롬프트 활용으로 AI를 더 잘 이용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AI는 여전히 정보와 지식을 수집해서 전달하는 비서이자 보조도구에 불과하다. AX 시대에는 확실한 자기 기준을 기반으로 사고하는 진품 전문가의 가치가 더욱 커질 것이다. 인간 지능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학습하고 복제해 내는 AI도 인간의 지성 영역을 완전히 대치하지는 못한다. 두려움 없이 담담하게 AX 시대를 포용하면 된다. 마동훈 고려대 미디어대학 교수

[포럼] JTBC와 미디어 산업의 위기

JTBC를 포함한 중앙그룹 계열사 5곳이 회생을 신청했다. 무리한 투자가 원인이었다는 등 다양한 분석이 쏟아지고 있고, 미디어 산업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원인에 대한 각자의 의견이 있겠지만 이 소식을 접했을 때의 심경은 충격과 착잡함이었다. 뉴스를 접하고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두루 밝은 친구와 식사를 했는데, 그의 반응도 놀라웠다. JTBC만 어려울 뿐 방송산업은 호황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미디어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은 여전히 외양의 화려함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JTBC 사태는 개별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미디어 산업 전체의 구조적 위기를 보여주는 신호라고 봐야 한다. 언젠가부터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K'라는 접두어에서 미디어가 차지하는 지분은 절대적이다. 해당 분야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최근 드는 생각은 K-콘텐츠의 성공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그 이면에 내재된 문제들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콘텐츠 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던 기업이 무너졌다는 측면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JTBC의 과도한 투자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고, 타당한 지적이기도 하지만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 위험 부담이 높은 미디어 산업에서 공격적인 투자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다른 산업은 몰라도 미디어 산업에서 위대한 결과물이 나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무모함은 필수적이기도 하다. 현재와 같은 어려움이 지속되면 부담을 감내하면서 적극적인 투자를 하는 사업자들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안정을 담보로 한 투자만 이어지게 된다면 족적을 남길 만한 콘텐츠 제작을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방송산업에서는 이미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JTBC 정도의 기업이 무너지게 되면 그 파장은 연쇄적이다. 제작사를 포함하여 관련 주체가 겪게 될 어려움에 대한 우려가 다각적 차원에서 제기되고 있다. JTBC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다른 방송채널 사업자도 어렵고, 케이블TV를 비롯한 유료방송 산업의 어려움도 커지고 있다. 미디어는 생태계이고, 채널 사업자와 플랫폼 사업자의 어려움은 생태계 구성원들이 함께 부담해야 할 짐이 될 수밖에 없다. 미디어 산업계와 학계에서 '위기'라는 단어는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고 있지만, 정작 그에 대한 실질적인 대응 방향을 모색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는 단기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처방과 중·장기적인 미디어 산업의 지향점을 같이 모색해야 하는 시기다. 정부에서는 JTBC를 포함하여 어려움에 직면한 사업자들에 대한 지원방안을 마련해줘야 한다. 낡은 규제 개선과 시장에서 버틸 여력이 없는 사업자를 위한 출구전략 마련은 시급한 과제다. 콘텐츠 경쟁력이 한국의 강점이지만, 미디어는 생태계인 만큼 공생을 전제로 한 큰 비전과 가치를 공유하며 생태계 전체가 동반성장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미디어 산업이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는 것은 국가 차원에서 위중한 문제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그에 부합하는 대응이 이뤄져야 한다. JTBC와 같은 사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고 누적된다면 더 이상 'K'라는 접두어를 쓰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노창희 디지털산업정책 연구소장

[차관칼럼] '서랍 속 특허'를 깨워야 할 때

"사실 그 특허는 없앨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없앨 특허가 아니라 깨워야 할 특허였습니다." 국내 한 대학 연구진이 20여년 전 개발한 와이파이 콜링(Wi-Fi Calling) 원천특허는 오랫동안 서랍 속에 잠들어 있었다. 당시 사업성이 크지 않다고 봤던 이 특허는 매년 내야 하는 유지료 부담 때문에 포기를 고민하게 했다. 하지만 이후 미국 주요 통신사들이 사용하는 핵심기술로 자리 잡았고, 특허 라이선스 협상을 통해 수백억원의 가치를 창출했다. 연구실에서 탄생한 아이디어가 시장과 연결되며 새로운 자산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 일화는 '특허의 가치는 등록에서 끝나는가'라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나라는 작년 기준 국내 특허출원 약 26만건으로 세계 4위의 특허 강국이다. 그러나 국민 세금이 투입된 국가 연구개발의 산물인 대학·공공연 특허의 연간 기술이전 수입은 2800억원에 그치고 있다. 이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한 곳의 6400억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특허를 만드는 역량과 이를 시장의 가치로 연결하는 역량 사이에 극명한 간극을 보여준다. 해외에서는 이미 특허가 기업의 미래 성장을 이끄는 전략자산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코닥은 경영위기 속에서도 특허를 매각해 회생의 기반을 마련했고, 노키아는 휴대폰 시장의 주도권을 잃고 사업을 철수했지만 그간 축적해온 특허자산 라이선스를 통해 작년 한 해에만 3조원의 매출을 올렸다. 제품은 사라져도 제조의 근간이었던 우수한 특허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방증한다. 최근 특허 등 지식재산권(IP)을 전문으로 발굴, 가치를 평가해 거래와 라이선싱을 지원하는 기업들이 주목받고 있다. 그중 생산활동 없이 매입한 특허권을 활용해 소송을 제기하는 기업을 NPE(Non-Practicing Entity)라고 부르며, 이들의 행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에서 고품질 특허가 제값을 받도록 돕는 긍정적 측면도 부정하긴 어렵다. 특히 특허 사업화 경험이나 전문인력이 부족한 대학·공공연과 중소기업에는 특허를 시장과 연결시켜 주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이젠 'NPE'나 '특허괴물'보다 'IP수익화 전문기업(PME·Patent Monetization Entity)'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식재산처는 시장성 높은 우수특허를 발굴해 지식재산펀드 등 민간투자 확대로 연결시켜 특허로 돈을 버는 시장을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개별 특허의 일회성 거래가 아니라, 특허가 투자와 수익화로 이어지고 그 성과가 다시 연구개발과 고부가가치 특허 생산으로 연결되는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키는 일이다. 이러한 흐름이 자리 잡을 때 지식재산은 권리 그 자체를 넘어 진정한 기업의 성장 전략자산이자 국가 경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서랍 속에는 시장에서 화려하게 비상할 수 있는 특허가 잠들어 있을지 모른다. 이제는 그 특허가 일을 하도록 깨워야 할 때다. 대한민국이 특허를 많이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알짜 특허들로 기업과 국가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뒷받침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지식재산이 대한민국의 진짜 성장을 떠받치는 든든한 한 축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확신한다. 김용선 지식재산처장

[fn광장] 日 '아시아판 나토' 구상과 한국의 선택

지난 5월 말, 일본 도쿄대학에서 개최된 기타오카 신이치 명예교수의 기념 강연회에 다녀왔다. 기타오카 명예교수는 필자가 일본 유학 시기 수강했던 일본정치외교사 관련 과목의 담당 교수였고, 박사 논문의 심사위원도 담당해 준 인연이 있었다. 특히 그는 2012년부터 시작된 제2차 아베 신조 내각 시기, 총리의 외교안보정책좌장 역할을 맡아 당시 최초로 책정된 국가안보전략서를 기초하였고, 일본 학자로서는 예외적으로 유엔 차석대사 등의 공직도 역임하는 등 21세기 일본의 외교안보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대표적인 일본 내 전략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도쿄대학 법학정치학부 제자들이 마련한 이 강연회에서 기타오카 명예교수는 2021년도에 발간한 편저 등에서 제기해 온 그의 지론을 재차 강조했다. 즉 서쪽으로는 중국, 북쪽으로는 러시아, 동쪽으로는 미국에 직면해 있는 지정학적 조건 속에서 일본이 추구해야 할 대외정책의 방향은 가치와 이익을 공유하는 한국, 필리핀을 포함한 동남아 국가들, 호주 및 뉴질랜드와 더불어 가칭 '서태평양 연합'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주목할 점은 이 같은 구상들이 명칭을 달리하면서도, 일본의 정치가나 전문가들에 의해 폭넓게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는 2024년 9월, 허드슨 연구소에 기고한 영문 논설을 통해 러시아·중국·북한의 핵전력 증강이 초래할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동맹 관계인 미국에 더해 한국, 캐나다, 호주, 영국, 프랑스 등을 구성국가로 포함하는 아시아판 나토 구상을 밝힌 바 있다. 지난해 5월에는 나가타니 겐 방위성 장관이 샹그리라대화에서의 연설을 통해 '오션(OCEAN·One Cooperative Effort Among Nations)'구상, 즉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가치와 이익을 공유하는 국가들 간의 협력체계를 구축하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하였다. 즉 일본의 정치가 및 전문가들은 제1도련선 지역에 대한 중국의 해·공군력 투사와 북한의 핵능력 증대 등에 의해 자신들의 안보이익이 위협에 처할 수 있다고 보고, 미국과의 동맹체제 강화에 더해 주변 우방국들과의 안보네트워크 강화를 구축하는 대외전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이러한 지정학적 구상들을 제기하는 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관련 국가들과의 외교안보적 협력을 촉진하기 위한 조약이나 협정을 체결하면서 그 제도화도 도모하고 있다. 호주, 영국, 프랑스와는 군사정보 공유를 위한 지소미아(GSOMIA) 협정 이외에도 방위장비기술이전협정, 상호군수지원협정(ACSA), 원활화협정(RAA) 등을 각각 체결하였고 수시로 외교와 국방당국 수장 간의 2+2 회담을 개최하는 등 동맹국 미국에 버금가는 안보협력의 제도화를 갖추었다. 필리핀, 인도, 독일, 이탈리아 등과도 지소미아, 상호군수지원협정, 방위장비기술이전협정을 각각 체결하였고 상호 병력의 훈련 등 목적의 출입국 절차를 간소화할 수 있는 원활화협정 체결도 준비하고 있다. 우방국들 양자 간 인적 교류나 부대 간 교류에 더해 다양한 협정 체결을 통한 외교적 제도화까지 구축하고 있는 점에서 우리에 비해 일본이 보다 치밀한 다자안보협력을 추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일본의 이러한 지정학적 구상과 그 제도화가 미국을 경유하여 한국에 요구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제2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발족 이후 미국은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 기조나 중동지역 전쟁 발발 등의 요인에 따라 인태 지역에서의 안보 역할을 점차 한국이나 일본 등 역내 동맹국가들에 분담하는 안보정책을 가시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제시하는 '아시아판 나토' 구상이나 '서태평양 연합' 등의 구상을 트럼프 행정부가 적극 수용하여 한국에도 참가를 요청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으로서는 일본발 지정학적 구상들이 한국의 안보이익 관점에서 어떤 유불리를 초래할 수 있을지 판단해야 한다.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 표명이나 핵능력 고도화 등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으로서도 대미 동맹 강화에 더해 일본, 호주, 캐나다, 그리고 동남아 국가들과의 협력 확대는 마다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지리적으로 인접한 중국과의 관계는 일본의 그것에 비해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양자 혹은 다자 간 교류에 더해 외교적 협약을 통해 국가 간 안보협력의 제도화를 추구하는 일본 안보정책의 특성을 직시하면서 한국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반영한 대외전략구상, 그리고 그를 구현하기 위한 안보협력의 제도화를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박영준 국방대학교 국가안보문제연구소장

[fn광장] 對北 햇볕정책 다시 꺼내들 때 아니다

우리는 과연 북한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냉전이 끝난 1980년대 이후 북한을 제대로 분석하고 정확한 판단을 해왔는지 보면 볼수록 한심한 결과에 놀란다. 이에 입각한 대북정책 또한 마찬가지다. 더욱이 정권 성향에 따라 북한을 보는 시각이 다르고, 동일한 데이터를 보고도 다르게 해석한다. 김일성이 사망한 날, 참석했던 KBS 심야토론에서 김정일 정권은 빠르면 3일 늦어도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될 것이라는 것이 당대 전문가들의 중론이었다. 냉전 붕괴 이후 사회주의 정권이 연일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가운데, 고립된 북한 정권이 붕괴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북한체제 붕괴론은 우리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체제붕괴 파장이 미칠 악영향을 차단하기 위해서 연착륙을 모색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포용적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남북 체제경쟁에서 우리가 돌이킬 수 없게 승리했기 때문에 더 이상 경쟁은 무의미하며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통 크게 접근해야 한다는 논리가 정부나 전문가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미북 제네바합의에도 영향을 미쳐서 북한은 곧 붕괴될 정권이기에 통 크게 경수로 2기 등 우리가 부담하는 대규모 지원을 담았다. 햇볕정책은 체제경쟁에서 승리했다는 판단이 반영된 결과였다. 북한 문제는 강풍보다 햇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심각한 경제식량난으로 수백만의 아사자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이러한 인식이 더욱 굳어져 갔다. 그러나 정작 경제식량위기 속의 북한이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핵무기 양산과 미사일 실험을 지속하고 있고, 매년 2척의 5000t급 미사일 구축함을 건조하고 있으며, 전략핵잠수함까지 건조하고 있는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북한 경제식량난은 사실 의도적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백만의 아사 상황도 당시 옥수수 2억~3억달러어치면 막을 수 있었지만, 북한 정권은 그러지 않았고 모든 자원을 영변 핵시설 등 핵무기 개발에 쏟아부었다. 그 비용의 10분의 1이면 아사자 발생을 막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북한 식량난은 40년 가까이 진행형이다. 최근 유엔 보고서는 주민의 42%가 심각한 영양부족이라고 한다. 만성적 경제위기조차 방치되고 의도된 산물일지 모른다. 북한 경제는 민수경제와 수령과 군을 위한 경제가 다르다. 북한 경제는 민수는 사실상 방치되어 주민 삶을 극단적으로 희생시키고, 오직 수령과 군사력 강화에만 올인하는 '군사요새형 경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민수를 뺀 북한 경제는 우크라이나전쟁으로 호황이고 고도성장 중이다. 김대중 정부 이후 북한에 대한 내재적 접근이 주류가 되면서 오류는 심화되었다. 북한을 외부 잣대로 비판하지 말고 주체사상과 역사적 맥락의 내부적 논리에서 이해하자는 것이다. 심각한 인권유린에 눈감고 북한 핵무장의 심각성을 간과했다. 햇볕정책은 북한이 핵을 개발하고 개방·개혁을 하지 않는 것을 적대적 외부환경에서 찾았다. 이를 해소하면 북한은 스스로 핵을 포기하고 개혁·개방에 나선다는 것이다. 미국의 압살정책 탓에 핵을 개발한다는 북의 논리를 그대로 가져왔다. 핵실험이든 미사일실험이든 우리 정부의 설명에는 항상 협상용이라는 평가가 붙었다. 지난 30년 이상 대북협상 과정을 보면 북한 핵야망이 협상용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미국이 북한의 비밀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을 북한에 제기했을 때 놀랍게도 우리 고위직들은 일제히 제네바합의를 파기하고 남북관계 개선을 훼손하려는 미 네오콘의 조작으로 몰아갔다. 이후 북한 스스로 영변 HEU시설을 공개했지만 이와 관련, 누구도 오류를 인정한 적이 없다. 물론 북한 핵무장을 보고도 누구도 정책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김정일은 절대 세습이 아닌 당성이 강한 젊은 엘리트를 후계자로 육성할 것이라고 보았다.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가 된 것은 혈통이 아니라 그의 능력을 인정받은 결과라는 것이다. 예상과 달리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장하며 전대미문의 3대 세습이 이루어졌다. 햇볕정책을 지탱해온 북한보다 우리가 우월하다는 전제는 무너지고 있다. 북한은 핵무장에 성공했고, 중러와의 군사동맹도 부활하고 있다. 북중러 군사교류는 물론 연합훈련도 보게 될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을 만나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포기 대가로 주한미군 철수를 감행할지 모른다. 전작권 전환보다 비핵국가 한국이 어떻게 생존할 것인지 전략적 고민이 절실한 시점이다. 실패하고 철지난 햇볕정책을 다시 꺼내들 때가 아니다.윤덕민 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전 주일대사

[포럼] 반도체 공장, 왜 호남이어야 하나

호남권 반도체 공장 신설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수도권에 집중된 반도체 공장을 지방에 분산하는 것은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필요하며 타당하다. 하지만 왜 호남이어야 하는가를 놓고 시끄럽다. 호남은 비수도권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 입지적으로 열악하다. 반도체 공장에 필요한 전력·용수·인력·물류·협력사 모두 부족하다. 입지조건을 따져선 호남에 반도체와 같은 첨단 공장이 세워지기 어렵다. 공장이 없으니 낙후되고, 낙후되니 안 들어오는 악순환의 덫에 갇혀 있다. 이게 바로 호남권이 오랫동안 소외된 이유이다. 땅도 좁은 우리나라에서 지역 간 우열을 따지는 건 별 의미 없다. 삼성은 미국 오스틴·테일러와 중국 시안·쑤저우 4곳에서 반도체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중국의 우시·다롄·충칭 세 곳에 생산거점이 있다. 미국과 중국에도 설립한 반도체 공장을 왜 호남권에 못 짓는다고 난리인가.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 TSMC는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응해 미국, 독일, 중국, 일본 등으로 해외 생산기지를 분산하였다. TSMC 일본 공장은 도쿄나 오사카가 아닌 구마모토에 설립되었다. 허허벌판 논밭 가운데 거대한 TSMC 공장이 우뚝 솟은 모습은 기괴하게 보인다. 남부 규슈의 소도시 구마모토현에 TSMC가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결정한 것은 일본 정부가 전력과 용수를 해결해 주고, 공장 건설비의 상당액을 보조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부는 호남권에 반도체 공장이 설립된 다음에 차질 없이 가동하고 운영되도록 전폭적 지원을 제공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반도체 공장은 호남의 산업환경을 개선하고 다른 공장들도 유입되어 선순환 성장동력이 활성화되는 역할을 할 것이다. 문제는 정부가 다른 지역을 배제하고 호남권을 특정해 반도체 공장 입지로 발표하는 과정이 투박해 논란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6·3 지방선거 후 지방발전을 위한 큰 그림을 내보이지 않고 호남만 콕 찍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공장을 건설한다고 하니 비판이 쏟아지지 않을 수 없다. 기업들은 가만 있는데 정부가 먼저 나서 기정사실로 공표하는 바람에 정경유착의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개발시대와 달리 정부가 주도하고 기업이 들러리 서는 것에 대한 국민의 거부감이 크다. 이에 더해 청와대 정책실장이 정치적 편향성이 강한 유튜브에 나와 국가 정책을 공론화한 것이 기름에 불을 던진 꼴이 되었다. 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하다 국가백년대계가 정쟁의 불쏘시개로 전락해 버렸다. 정치적 공방과 지역 간 갈등을 불식하고,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권위 있는 제3자의 정책 자문과 제언이 필요하다. 가덕도신공항 사례와 유사하게 글로벌 컨설팅사가 호남권 반도체 공장의 성공요건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도록 해야 한다. 호남권에 반도체 공장뿐 아니라 대학, 연구소, 소부장 중소기업, 관련 공공기관 등의 생태계 조성계획도 수립되어야 한다. 국내 기업뿐 아니라 글로벌 기업도 유인될 수 있는 여건이 호남권에 조성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수십년 후 호남권에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기 잘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임채운 서강대 경영학과 명예교수

[포럼] 난파선에서 노를 젓는 현대인

불확실한 미래, 통제 불가능한 현실의 절벽을 앞에 두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으로 자주 '난파선에 올라탄 선원'이라는 비유가 사용된다.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가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은 이 위기 상황을 잘 보여준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남긴 "당신은 이미 배에 올라탔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선택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현실이라는 배에 올라타 항해를 하고 있다. 폭풍우 속에서 망망대해를 떠도는 난파선에 탄 우리는 이 절대적인 현실을 어떻게 이겨낼까. 신화시대의 인류는 번개라는 거대한 자연 폭력에 압도당할 때, 이를 '제우스의 분노'로 명명하고 황소를 제물로 바쳤다. 정체 모를 천둥 번개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고대인은 불안을 이겨낼 정신적 도구를 마련한 것이다. 이처럼 신화적 서사는 허구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현실이 가져다주는 정체 모를 불안을 이해하고, 이로부터 거리를 두는 기술이다. 역사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에 따르면,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위압적인 현실의 불안을 넘어서기 위해 시대에 따라 다양한 신화를 수용하고 변형해 왔다. 프로메테우스 서사가 대표적이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변천사는 인류의 '정신적 투쟁기'와 같다. 고대의 인류가 불을 가져다주는 프로메테우스 서사로 자연의 공포를 이기고 문명을 이루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면, 괴테의 프로메테우스는 역경을 이기고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근대적 주체의 자화상이다. 현대에 이르면 모습이 사뭇 달라진다. 카프카는 프로메테우스의 결말을 이렇게 묘사했다. "신들도 지치고, 독수리도 지치고, 상처도 지쳐 아문다. 남은 것은 설명할 수 없는 바위산뿐이다." 그는 본질을 알 수 없는 절대적 현실, 현대인이 마주한 거대한 불안의 실체를 '설명할 수 없는 바위산'으로 표현한 것이다. 유한한 인간이 이 거대한 바위산을 단번에 정복하거나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좌절하는 대신 '설명할 수 없는 바위산'으로 명명함으로써 비로소 이 현실의 본질을 파악하고 방향을 잡아나갈 수 있다. 우리의 관점으로 세계를 은유하고 명명할 때, 세계는 우리가 파악하고 이겨낼 수 있는 영역 안에 들어온다. 물론 이름 붙이는 것만으로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출발점일 뿐이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가치를 따라 살아갈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주체성이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편파적인 주관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과 함께 상호주관적인 세계에서, 함께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를 공유하며, '세계 내적 존재'로 더불어 살아간다. 이런 맥락에서 키르케고르가 말한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개념은 깊은 울림을 준다. 신 앞에 선 단독자는 세상의 유용성이나 손익계산을 넘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붙들고 외롭게 결단하는 사람이다. 불확실한 현실이라는 바위산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이해하며, 자신이 부여한 가치인 '노'를 붙잡을 때 우리는 난파선 위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다. 폭풍우를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 어떤 방향으로 노를 저을 것인지를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김길웅 성신여대 인문융합예술대학 명예교수

[기고] 내 손으로 들어온 의료 마이데이터

[파이낸셜뉴스]  의료 마이데이터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 그동안 정보 수집 과정에서 관행적으로 활용돼 온 스크래핑 방식은 점차 제한되고, 안전성이 검증된 표준 전송 방식인 API 등을 중심으로 개인이 지정한 곳에 자신의 데이터를 전송하고 활용하는 체계가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는 단순히 정보기술 규제가 하나 추가되는 변화가 아니다. 진료기록과 처방 내역 등 가장 민감한 건강정보의 주도권이 의료기관이나 플랫폼에서 정보주체인 개인에게 이동하는 구조적 전환이다. 개인은 자신의 데이터를 어디에, 어떤 목적으로 활용할 것인지 직접 결정하고, 기업은 그 선택을 안전하게 구현해야 한다. 의료 마이데이터는 결국 '데이터를 모으는 산업'이 아니라 개인의 권리를 실질적인 건강 편익으로 전환하는 산업이어야 한다. 데이터 주권의 이동, 일상의 변화를 만들다 과거 우리의 진료기록과 처방 내역은 병원 전산망이나 공공기관 서버에 분산돼 있었다. 내 건강에 관한 기록임에도 정작 필요할 때 한 번에 확인하거나 다른 서비스와 연결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의료 마이데이터가 정착되면 개인은 자신의 건강정보를 직접 확인하고, 필요한 기관이나 서비스에 안전하게 전송해 건강관리와 의료 이용에 활용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일상 속에서 구체적인 가치로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해외에서 갑작스러운 사고로 응급진료를 받게 된 상황에서 개인의 동의 아래 복용약, 과거 병력, 알레르기 정보 등이 신속히 전달된다면 의료진의 판단을 돕고 불필요한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여러 기관에 흩어져 있던 데이터가 개인의 통제 아래 연결될 때, 건강정보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생명과 삶의 질을 지키는 가치 있는 자산이 된다. 신뢰를 지키는 특수전문기관의 역할 다만 의료 마이데이터의 확산은 활용 가능성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민감한 의료정보를 다루는 만큼 보안과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산업 전체가 국민의 선택을 받기 어렵다. 정부가 보안체계와 기술 역량, 재정적 안정성 등을 엄격하게 심사해 보건의료 분야 개인정보관리 전문기관, 이른바 특수전문기관을 지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수전문기관은 단순한 데이터 보관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서로 다른 의료데이터를 표준화하고, 정보주체의 권리를 보호하면서도 의료·돌봄·보험·여행·인공지능 등 다양한 분야가 안전하게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신뢰의 중간 인프라'가 되어야 한다. 데이터 활용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고, 이용자가 자신의 정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역시 특수전문기관이 맡아야 할 중요한 책무다. 정부의 제도적 성과, 이제는 산업의 실행력을 높일 때 정부는 그동안 의료 마이데이터 제도화와 개인정보 전송요구권 도입, 특수전문기관 지정, 개인건강기록 활성화 및 데이터 활용 지원사업 등을 통해 산업의 기반을 차근차근 마련해 왔다. 특히 안전한 전송체계와 신뢰할 수 있는 사업자 기준을 제시한 것은 시장의 불확실성을 낮추고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의미 있는 진전이다. 의료정보를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는 제도적 토대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정부의 노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제 다음 단계는 이러한 제도가 실제 서비스와 사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기업의 실행 여건을 강화하는 것이다. 우선 의료기관별로 상이한 데이터 형식과 전송 품질을 개선하고, 표준 API의 제공 범위와 안정성을 지속적으로 높일 필요가 있다. 데이터가 전송될 수 있다는 제도적 권리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활용 가능한 수준의 정확성과 적시성이 함께 보장돼야 하기 때문이다. 기업이 제도 해석의 불확실성으로 사업 추진을 늦추지 않도록 개인정보 처리, 인공지능 활용, 제3자 제공과 위·수탁 구조 등에 관한 보다 구체적이고 일관된 가이드라인도 필요하다. 혁신적인 서비스를 준비하는 기업이 사안마다 개별적인 법률 해석에 의존하기보다, 예측 가능한 기준 안에서 책임 있게 사업을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보안 투자에 대한 지원도 중요하다. 특수전문기관을 비롯한 의료 마이데이터 기업은 높은 수준의 보안 인프라와 인증체계, 상시 관제 및 전문인력을 유지해야 한다. 이는 국민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비용이지만, 초기 시장을 개척하는 기업에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보안 인프라 구축과 인증 비용에 대한 정책금융 및 지원사업, 공공·민간 공동 실증사업, 우수 서비스의 공공조달과 지자체 사업 연계 등 '사업화의 마지막 구간'을 지원하는 정책이 더해진다면 제도의 성과가 국민이 체감하는 서비스로 보다 빠르게 이어질 수 있다. 정부가 마련한 안전한 제도적 토대 위에서 기업의 기술과 서비스가 성장할 수 있도록, 예측 가능하고 지속 가능한 시장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안전한 토양 위에 피어날 초개인화 헬스케어 룰루메딕 역시 보건의료 분야 개인정보관리 전문기관으로서 이러한 변화에 참여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사업 기회를 얻었다는 의미에 앞서, 안전한 의료 마이데이터 활용의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는 책임을 부여받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룰루메딕은 의료 마이데이터 플랫폼 '디스탯(d'stat)'을 중심으로 개인의 건강정보를 안전하게 연결하고, 인공지능 기반의 건강정보 요약과 맞춤형 관리 서비스로 확장하기 위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또한 글로벌 응급의료 지원 네트워크와의 연계를 통해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여행과 해외 체류 상황에서도 개인의 의료정보가 실질적인 안전과 편익으로 이어질 수 있는 활용 모델을 모색하고 있다. 앞으로의 의료는 아픈 뒤에 의료기관을 찾아가는 수동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개인의 건강 상태를 지속적으로 살피고 위험 신호를 조기에 발견하며 필요한 서비스와 혜택을 연결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의료 마이데이터는 초개인화 헬스케어와 돌봄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인프라가 될 수 있다. 정부가 구축한 제도적 신뢰와 기업의 기술·서비스 혁신이 함께 맞물릴 때, 데이터 주권은 선언에 머물지 않고 국민 개개인의 건강과 안전을 높이는 실질적인 혜택으로 이어질 것이다. 특수전문기관은 그 연결을 가장 안전하게 구현하는 역할을 맡고, 정부는 기업이 책임 있는 혁신을 지속할 수 있도록 제도와 시장 사이의 간극을 메워야 한다. 신뢰와 지원이 함께할 때 의료 마이데이터 생태계는 비로소 지속 가능한 헬스케어 혁신의 기반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김영웅 디지털헬스산업협회 회장·룰루메딕 대표이사

우리는 부부인가, 룸메이트인가[부장판사 출신 김태형 변호사의 '알쏭달쏭 이혼]

[파이낸셜뉴스] 필자는 2010년대 초반과 2020년대 초반, 약 10년의 간격을 두고 가사 재판을 담당하며 수많은 이혼 사건을 접했다. 그리고 현재는 변호사로서 다양한 이혼 사건을 수임하여 처리하고 있다. 10년의 시간을 관통하며 가장 뚜렷하게 변화한 영역 중 하나가 바로 '부부의 성생활', 그중에서도 이른바 '리스(less) 문제'이다. 과거에는 부부 갈등의 한 단면에 불과했던 이 문제가 이제는 주된 이혼 사유로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리스 부부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리스 부부'란 일정 기간 동안 성관계가 거의 없거나 극히 드문 부부를 의미한다. 흔히 1년에 10회 미만을 기준으로 삼기도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통계적 참고일 뿐 법적 기준은 아니다. 실제 상담을 하다 보면 같은 '월 1회'라도 어떤 부부에게는 충분하고, 어떤 부부에게는 심각한 결핍으로 작용한다. 중요한 것은 횟수가 아니라 '상호 만족과 합의'이다. 최근에는 리스의 양상도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남편이 관계를 원하고 아내가 거부하는 유형이 많았다면, 최근에는 오히려 아내가 관계를 요구하고 남편이 회피하는 사례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예를 들어 한 사건에서는 아내가 "남편이 몇 년째 관계를 회피하고 잠자리를 따로 하며 스킨십 자체를 거부한다"고 주장했다. 남편은 "아내가 싫은 것은 아닌데, 너무 피곤하고 관계 자체에 관심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는 단순한 성향 차이가 아니라 부부관계 단절의 중요한 징표이다. 또 다른 사례에서는 남편이 게임과 개인 취미에만 몰두하면서 부부 사이의 친밀감 자체가 사라졌고, 결국 아내가 외도를 저지르게 된 사건도 있었다. 이 사건에서 법원은 외도 자체를 유책으로 보면서도 장기간의 관계 단절 역시 혼인 파탄의 주된 원인으로 함께 고려했다. 리스가 문제되는 경우 리스 자체가 곧 이혼 사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부가 서로 동의하고 불편함이 없다면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실제로 정서적 유대나 공동의 일상적인 삶에 더 큰 의미를 두는 부부들도 많다. 문제는 한쪽이 관계를 원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쪽이 정당한 이유 없이 지속적으로 이를 거부하는 경우다. 민법 제826조는 부부의 '동거 및 협조 의무'를 규정하고 있고, 여기에는 성적 교섭 의무도 포함된다고 해석된다. 따라서 특별한 사유 없이 장기간 성관계를 거부한다면 민법 제840조 제6호, 즉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에 해당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당한 이유'의 유무다. 출산 직후의 회복 기간, 질병이나 성교통, 우울증과 트라우마,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의 사망 정신적 충격 등이 있는 경우에는 성관계 거부에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문제는 경계에 있는 사례들이다. 예를 들어 실제 사건에서 아내는 "관계 시 통증이 점점 심해져 결국 성관계를 회피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남편은 "치료 노력 없이 일방적으로 거부했다"고 주장하는 경우 등이다. 이처럼 신체적·심리적 요소가 뒤섞인 경우에는 법원이 어느 쪽 손을 들어줄지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다. 또 최근에는 '정서 단절형 리스'도 증가하고 있다. 겉으로는 갈등이 없어 보이지만, 대화 단절, 스킨십 부재, 각방 생활이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성관계가 사라지는 유형이다. 이런 경우 당사자조차 문제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거리감이 형성된다. 리스를 유책사유로 입증하는 방법 리스 문제의 가장 큰 난점은 입증이다. 성생활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객관적 증거를 확보하기 어렵다. 실무에서 흔히 발생하는 상황은 다음과 같다. 원고는 "지속적으로 관계를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피고는 "그런 요구 자체가 없었고, 언제나 가능했다"라고 반박한다. 이 경우 법원은 주장만으로 정당한 이유 없는 성관계 거부 사실을 인정하기는 어렵고 결국 입증책임을 지는 쪽이 불리해진다. 따라서 사전에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본인이 참여한 대화 녹음, 카카오톡, 문자 메시지 등 성관계 요구와 거부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기록, 성기능 장애, 통증 등 관련된 상담 기록이나 병원 진료 기록 등이 필요하다. 반면 일기장의 기록, 혼자 작성한 메모나 캘린더 표시 등은 상대방이 인정하지 않을 경우 증거력이 크게 떨어진다. 최근에는 부부 상담 기록이나 정신과 진단서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단순히 "거부했다"는 사실보다 "왜 거부했는지"가 더 중요한 판단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달라진 시대, 달라진 선택 많은 이혼 사건에서 표면적인 이혼 사유는 '성격 차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성생활 불만족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완벽하게 맞는 부부는 거의 없다. 성격도, 생활 방식도, 성적 취향도 대부분은 맞춰 가는 과정 속에서 적절한 관계가 형성된다. 다만 그 '맞춤의 과정'이 서로를 존중하는 범위 내에 있어야 한다. 일방의 희생이 지속되고, 그로 인해 결핍과 좌절이 누적된다면 이러한 관계는 더 이상 건강한 관계로 보기 어려워진다. 최근 사건들을 보면, 성적 결핍이 장기화되면서 별거나 외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겉으로는 명백한 유책 사유로 보이지만 사실 오랜 시간에 걸쳐 관계의 균형이 무너진 결과로 볼 수 있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감당해야 할 수준이 어디까지인가?" 그 범위 안이라면 노력과 조율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선을 넘어섰다면 이혼 역시 현실적인 선택지로 검토될 수 있다. 부부관계는 사랑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이해, 조율, 그리고 때로는 냉정한 판단이 함께 필요하다. 그리고 리스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숨겨진 이야기가 아니라 혼인의 지속 여부를 좌우하는 중요한 화두가 된 것이다. 김태형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 l 김태형 변호사는 가사∙상속 분야 전문가이다. 2007년 법관 임용후 2024년 수원가정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17년간의 법관생활을 끝내고 법무법인 바른에 합류했다. 김태형 변호사는 법관시절 2012년부터 총 8년간 가사∙상속 및 소년심판 업무를 담당했다. 특히 법관 퇴직 전 5년(2019~2024)간 수원가정법원에서 가사소년전문법관으로 수많은 가사∙상속 관련 케이스를 처리하면서 이 분야의 전문성을 확보했다. 베스트셀러인 "부장판사가 알려주는 상속, 이혼, 소년심판 그리고 법원"(박영사, 2023)의 저자이기도 하다.

[포럼] 부메랑이 된 노란봉투법

지난 3월 개정 노동조합법, 이른바 노란봉투법이 시행된 후 100여일이 지났다.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겠다는 법 개정 취지와는 달리 산업 현장은 전례 없는 불확실성의 폭풍우를 맞이하고 있다. 하청노조의 동시다발적 교섭 요구가 빗발치며 개별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혼란이 현실화하는 양상이다. 특히 문제는 원청의 사용자성을 가늠하는 기준인 '실질적 지배력'이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는 점이다. 원청 경영진은 자신들이 법적 교섭 의무를 지는 주체인지조차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성과급 분배와 같은 무리한 요구까지 마주하고 있다. 현행법상 원청의 단체교섭 거부는 부당노동행위로 간주되어 형사처벌로 이어질 수 있기에 하청노조의 거센 요구를 무작정 외면하기도 어렵다. 결국 개정법이 하청노조에는 강력한 압박 수단을 부여했지만 원청기업에는 예측이 어려운 사법 리스크를 지운 셈이 됐다. 이러한 상황은 예상 밖의 곳에서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혹시라도 실질적 지배력을 인정하는 근거가 될까 우려한 원청은 하청과의 상시적 소통이나 현장 안전을 위한 일상적 기술협력마저 주저한다. 이는 원청의 안전관리 책임을 강화한 중대재해처벌법의 취지와도 정면으로 상충한다. 아예 강성 노조가 있는 하청과의 거래를 단절하거나 하청 외주를 축소하려는 움직임까지 감지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폐해가 단순히 원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중소 하청업체와 소속 노동자에게도 전가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청 사측 입장에서는 자사 노조의 요구를 수용하자니 원청과의 거래단절이 두렵고, 원청의 눈치만 살피자니 내부 노사갈등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길이 막막하다. 노동자 보호를 표방한 개정법이 역설적으로 중소기업의 폐업과 하청 노동자의 연쇄 실직을 부르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물론 노동 위험을 외주화하며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일부 원청의 행태를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감당 불가능한 사법 리스크가 산업 생태계 전체를 상시적 위기로 내몰고 있다면 이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제도 시행 과정에서 드러난 맹점들을 면밀히 점검해 조속히 보완해야 한다. 보완책으로는 우선 사용자성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 핵심 근로조건에 대한 직접적·구체적 결정권 행사 여부나 채용·해고·임금 결정에 대한 실질적 관여 여부와 같이 산업별 특성을 반영한 구체적인 판단기준을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교섭 거부에 대해 형사처벌을 무조건 앞세우기보다는 행정적 구제 제도나 조정 기능을 우선 활용하는 유연함도 필요하다. 아울러 수많은 하청노조의 동시다발적 교섭 요구로 인한 대혼란을 막기 위해 교섭의 절차와 범위를 체계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절차적 장치도 입법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복잡한 노동시장의 격차 해소를 형벌의 위협이나 거친 규제에만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개정법이 촉발한 혼돈을 넘어 양극화된 노동시장을 정상화해 나가기 위해서는 신속히 보완입법에 나서야 한다. 이 과정에서 노사정이 서로를 공존의 동반자로 인정하고, 누구든 수긍할 수 있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룰을 만들어 나가는 상생의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김태은 법무법인 비트 대표변호사

[fn광장] 외신을 맹신하는 '韓 외교 사대주의'

우리의 외교 문제 분석에서 가장 큰 결함은 외국 언론과 전문가에게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향에 있다. 우리에게 유의미한 점을 우리의 입장에서 발굴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유는 그네들이 세계적인 외국 언론이고, 저명한 학자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들에겐 유의미한 점이 우리와는 별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 별 의미 없지만 우리에게 유의미한 내용을 주장하면 주류에서 벗어난 '설(說)'로 왕왕 치부한다. 그래서 우리 언론이나 전문가들은 그네들의 견해와 시각을 가감 없이, 여과 없이 마치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수용하는 사대적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외국 언론인과 전문가들은 당연히 자국과 상관있고 유의미한 점에만 관심이 있다. 우리가 처한 상황과 당면한 과제가 그네들과 엄연히 다른데도 우리는 그들의 분석 관점과 틀에서 우리의 외교를 보려 한다. 지난 4월 미중 정상회담도 그들이 재단한 승패 스토리를 우리는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우리네 지도자가 아니라 별 의미도 없는데도 말이다. 뉴욕타임스, CNN이 자국 대통령을 폄훼하는 데 혈안이 된 속성이 강해도 우리는 수용한다. 중국 인사의 트럼프 영접 스토리도 마찬가지다. 중국 외교부장이 영접하는 것이 전통이지만 이번엔 중국공산당 서열 8위 한정을 이례적으로 파견했다. 이런 역사를 간과한 뉴욕타임스는 그에게 의사결정권이 없다며 중국의 홀대로 비판했다. 그것도 2014년 오바마 대통령을 영접한 외교부장 겸 외교 국무위원 양제츠의 사례에 빗대어서 말이다. 그 역시 의사결정권이 없을뿐더러 당서열은 한정보다 낮다. 뉴욕타임스의 무지를 우리 언론, 전문가도 가감 없이 수용했다. 5월의 중러, 6월의 북중 정상회담도 마찬가지다. 한반도, 북핵, 한국이 언급되지 않은 단순한 이유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이들 회담에서 사상 처음으로 언급된 유의미한 발언이 많았는데도 말이다. 작년 9월 베이징에서 김정은은 홍콩, 신장, 티베트, 대만 등 중국의 핵심 이익을 존중한다고 사상 처음 밝혔다. 같은 달 최선희 북한 외무상도 중국에서 하나의 중국 외교원칙 지지와 대만 문제의 외부간섭 반대 입장을 사상 처음 공개했다. 10월의 리창 총리와 올 4월 왕이 외교부장과의 평양 회담에서도 김정은이 이를 재확인했다. 과거 북중 정상과 고위급 회담의 의제는 제한적이었다. 각국의 성과, 양국의 공동 현안,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문제 등에 집중했다. 이를 초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만 유사시에 북한의 간여, 관여 가능성을 염두에 둔 포석으로 보인다. 또한 북중 정상은 처음으로 자매도시 간의 협력을 강조했다. 북한 군함 구축사업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조선소가 경제특구가 아닌 지방에 있다. 지난 2월 9차 노동당 대회에서 해군력 강화를 국책사업으로 채택했다. 게다가 북중러 3국이 작년 9월에 공동 군사훈련에 합의한 상황에서 급선무다. 육상훈련은 불가능하다. 외국군의 자국 영토 진입을 불허하는 사회주의 전통 때문이다. 중러 육상 군사훈련이 중앙아시아 등 제3국에서 진행되는 이유다. 따라서 북중러의 군사훈련은 해상에서만 가능하다. 북한 해군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아직은 시기상조다. 양국 정상은 아시아의 발전과 평화에 공동대응하는 데도 합의했다. 북중 협력의 지리적 범위가 한반도를 초월한 순간이다. 중러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도 사상 처음 밝힌 양국의 입장을 우리는 무시했다. 중장거리 미사일 배치, 미국과 동맹국의 핵 공유 반대 입장을 처음 전했다. 특히 이들의 핵 반격 능력뿐 아니라 확장 억제력, 핵 공유, 핵방어시스템(킬체인) 강화 반대를 처음으로 명시했다. 우리의 2024년 한미 워싱턴 선언, 개발 중인 킬체인, 논의 중인 핵추진잠수함 건조 등이 중러의 반대 사안에 해당한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6월 19일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우리의 핵잠수함 추진을 엄중히 경고했다. 핵확산과 충돌 가능성을 촉발하는 원흉으로 보는 인식을 표출했다. 우리가 외신과 외국 전문가의 견해와 관점에 함몰될 때 정작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유의미한 점을 적지 않게 놓친다. 그네들은 자국 중심의 사고에서 의미를 찾는다. 우리의 입장, 상황, 국익은 뒷전이다. 주변 4강에 둘러싸인 주권 국가로서 외교적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입장과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는 함량을 충분히 이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성(知性) 사대주의에서 벗어나는 노력이 선제적으로 이뤄져야 하겠다.주재우 경희대 중국어학과 교수

숫자로 못 담는 기업정보, 대면 IR 통해 신뢰 줄 수 있어[한미재무학회]

【 뉴욕=이병철 특파원】 현대 자본시장에서 정보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생산되고 널리 공유된다. 기업 공시는 전자공시 시스템을 통해 공개되고, 애널리스트 보고서와 뉴스는 시장 참여자에게 신속하게 전달된다. 더 나아가 최근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과 확산으로 투자자는 방대한 자료를 더 빠르게 분석하고 투자 판단에 반영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정보가 많아졌다고 해서 투자 판단이 그만큼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같은 실적 발표도 어떤 투자자는 일시적 부진으로 해석하고, 다른 투자자는 장기적 경쟁력 약화의 신호로 받아들인다. 시장에서 차이를 만드는 것은 정보를 얼마나 많이, 얼마나 빠르게 얻느냐만이 아니라 그 정보가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졌고 어떻게 해석돼야 하는지를 가려내는 과정이다. ■정보는 많아졌지만 해석은 더 어려워져 투자 판단에서 정보의 해석이 중요하다면 정보가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는지도 중요한 문제이다. 그중 하나는 시장 참여자들이 직접 만나고 교류하는 대면소통이다. 재무학에서는 이전부터 투자자가 지리적으로 가까운 지역에 있는 기업에 대해 더 나은 정보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지역 투자자는 해당 기업이 속한 산업, 고용 상황, 지역경제 분위기와 관련 뉴스를 더 자주 접할 수 있으며 전통적으로 이러한 정보는 지역 내 투자자, 기업 관계자, 산업 종사자의 공식적 및 비공식적 대면교류를 통해 축적되고 전달됐다. 더 나아가 기관투자자는 경영진을 직접 만나거나 기업 현장을 방문하면서 문서로 쉽게 정리되기 어려운 비정형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코로나가 보여준 대면소통의 가치 오늘날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대면소통의 역할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통신기술 발달로 멀리 떨어진 투자자도 기업 공시, 타 지역의 뉴스, 온라인 설명회 등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같은 지역의 투자자들 또한 전화, e메일, 화상회의 등 디지털 수단을 통해 과거 대면으로 이뤄지던 상호작용의 상당 부분을 비대면 방식으로 대체하게 됐다. 둘째, 공시규제 강화로 중요한 정보가 사적 만남이나 개별 면담을 통해 특정 투자자에게만 선택적으로 전달될 가능성이 크게 제한됐다. 이러한 변화를 고려할 때 대면소통이 오늘날에도 정보 우위를 제공하는지,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 글이나 숫자만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단서를 전달하는지는 새롭게 검토해야 할 문제이다. 저자가 최근 최근 국제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대면 사회적 네트워크와 지역 정보 우위(Face-to-face Social Interactions and Local Informational Advantage)'는 바로 이 질문에 답한다. 해당 연구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의 봉쇄조치와 이동제한, 재택근무 확산을 활용해 대면만남이라는 정보전달 채널이 갑작스럽게 약화된 상황을 분석했다. 일반적 상황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는 투자자가 더 나은 투자 성과를 낸다는 사실만으로 그 정보 우위가 대면소통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다른 지역 정보 채널에서 비롯된 것인지 밝혀내기 어렵다. 그러나 지리적 근접성이 유지된 상태에서 코로나19로 인한 대면접촉의 제약은 여러 요인 중 대면소통의 고유한 역할을 보다 명확하게 살펴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해당 연구는 미국 뮤추얼펀드를 운용하는 펀드매니저들의 당시 투자 결정과 성과를 분석하여 대면소통이 맡고 있던 역할을 실증적으로 설명했다. 대면접촉이 제한된 이후 펀드매니저들의 지역 주식 투자 성과는 원거리 주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됐다. 동일한 주식을 여러 펀드매니저가 보유한 경우에도 해당 기업과 가까운 지역 펀드매니저의 성과는 원거리 펀드매니저에 비해 낮아졌다. 이러한 변화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해당 지역 기업들의 실적이나 재무상태 등 펀더멘털이 악화된 것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렵다. 특히 지역 주식에 대한 매수 판단, 즉 향후 수익률이 높은 종목을 적절한 시점에 포트폴리오에 편입하는 능력이 약해졌으며, 성과 약화는 애널리스트 분석이나 공개 정보만으로 전망을 평가하기 어려운 기업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는 지역 내에서 이루어지는 대면소통이 기업과 지역에 관한 여러 단서를 해석하고 이를 투자 결정으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을 시사한다. ■신뢰와 맥락… 대면소통이 만드는 정보 우위그렇다면 대면만남은 무엇을 전달하는가. 크게 두 가지 요소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신뢰와 맥락을 통한 비정형 정보의 해석이다. 직접 만남에서는 말의 내용뿐 아니라 표정, 목소리의 어조, 시선, 몸짓과 같은 다양한 비언어적 단서가 함께 전달된다. 또한 상대방이 단순히 화면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공간에서 함께 대화하고 있다는 사회적 실재감도 강해진다. 이러한 단서와 감각은 서로의 의도와 설명의 맥락을 더 잘 이해하게 하고, 상대방 말의 신뢰성을 판단할 근거를 제공한다. 이는 대면소통이 정보를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쌓는 과정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뢰의 역할은 기업 경영진과 투자자 사이의 비정형 정보 교환에서 특히 중요하다. 비정형 정보는 수치로 명확히 표현되기 어렵고,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며, 쉽게 검증되지 않는다. 기업의 향후 전망, 전략 방향, 경영진의 판단과 확신은 숫자만으로 완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따라서 투자자는 경영진이 이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질문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말 속에 확신이나 주저함이 드러나는지 등을 함께 살펴야 한다. 대면소통을 통해 투자자는 이러한 단서를 직접적으로 확인하고, 경영진의 설명을 평가할 근거를 얻는다. 본 연구에서는 대면접촉 제약에 따른 성과 약화가 기업 경영진과 펀드매니저 사이의 기본적인 신뢰 수준이 낮은 경우와 투자 관계가 아직 오래되지 않은 경우에 더 크게 나타났다. 이는 대면만남이 정보 비대칭성이 큰 관계에서 신뢰를 쌓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비정형 정보를 공유하고 해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함을 시사한다. 두 번째는 경영진이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경영진은 불확실성을 줄이고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하려는 유인을 가진다. 핵심은 같은 정보라도 어떤 맥락과 논리로 제시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경영진은 같은 정보라도 기업의 강점, 향후 전략, 회복 가능성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사회심리학에서 제시하는 '인상 관리'와도 맞닿아 있다. 예컨대 실적 발표 이후 투자자들이 마진 하락이나 비용 증가를 우려할 때 경영진은 이를 일시적 조정이나 신규 사업 확대 과정의 비용으로 설명하며 향후 수익성 회복 가능성을 부각할 수 있다. 이때 투자자는 대면만남에서 설명의 내용뿐 아니라 어조, 표정, 시선, 질문에 대한 반응 등을 함께 관찰하며 신뢰도를 평가한다. 따라서 대면 만남은 긍정적 메시지의 전달 통로인 동시에, 투자자가 그 메시지의 타당성을 가려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펀드매니저의 투자 결정에서 이 해석과 일치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대면접촉이 제한된 이후 펀드매니저는 지역 주식의 매도보다 매수 타이밍에서 더 큰 성과 약화를 보였다. 이는 대면소통이 기업의 긍정적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특히 중요하며, 이러한 정보가 펀드매니저의 매수 판단과 더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CEO 보상체계가 주가 변화에 더 민감한 기업일수록 지역 주식의 투자 타이밍의 약화가 더 크게 나타났다. 이는 대면만남 중 경영진의 인상 관리와 긍정적 비정형 정보의 전달이 펀드매니저의 매수 판단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함을 시사한다. ■AI 시대에도 대면소통은 여전히 중요 물론 이러한 결과가 대면만남이 언제나 온라인 소통보다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전자공시, 온라인 설명회, 화상회의는 시간과 이동 비용을 줄이고 정보의 접근성을 넓혔다. 인공지능 기술 역시 방대한 공시자료와 회의 내용을 빠르게 정리하고 분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본 연구 결과는 기술이 정보의 양과 전달 속도를 높이더라도, 투자자가 그 정보를 어떤 맥락에서 이해하고 얼마나 신뢰할 것인지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디지털 소통의 과제는 대면만남을 단순히 대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면소통이 제공하던 질의응답의 깊이와 신뢰의 단서를 디지털 환경에서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에 있다. 이러한 관점은 기업의 투자자 관계 활동에 시사점을 준다. 최근 주주총회, 투자자 간담회 등 기업과 투자자가 만나는 주요 소통채널에서 온라인 또는 하이브리드 방식의 활용이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더 넓은 투자자층이 기업 정보와 경영진의 설명을 접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소통 방식의 디지털화가 곧 소통의 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IR은 단순히 정보를 더 많이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기업의 전략과 위험, 경영진의 판단이 어떤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시장이 해석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다. 이러한 논의는 개인투자자의 주식 거래가 활발한 한국 자본시장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특히 개별 종목 거래에서는 단기 주가 흐름, 시장 분위기, 온라인상의 투자 의견 등이 기업의 펀더멘털에 대한 판단보다 더 크게 작용할 수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투자자가 기업의 펀더멘털 분석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공시와 뉴스를 단순한 매매 신호로 받아들이기보다 기업이 관련 정보를 어떤 맥락에서 설명하는지 함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경영진이 전략과 위험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질문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 설명이 일관성을 갖는지도 기업의 펀더멘털을 해석하는 단서로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기술은 자본시장의 정보 환경을 계속해서 바꾸고 있다. 투자자는 더 많은 자료를 더 빠르게 접하고 분석한다. 그러나 정보가 풍부해지고 전달 속도가 빨라지더라도 투자자는 여전히 비정형 정보를 맥락 속에서 해석하고 그 신뢰성을 판단해야 한다. 정보를 얻고 해석하는 경로는 다양하지만, 본 연구는 현재의 기술 환경에서도 대면소통이 고유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기술이 정보전달의 속도와 범위를 넓힐수록 대면소통은 정보의 양이 아니라 그 의미를 이해하게 하는 창구로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email protected]한미재무학회(KAFA)는 지난 1991년 미주지역 재무 연구자들의 학술적 발전 및 상호교류 증진을 목적으로 발족한 학술단체다. 30여년간 발전을 거듭해 현재 미주는 물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과 유럽, 호주 지역 한인 연구자들의 모임으로 발전했다. 파이낸셜뉴스는 지난 2007년부터 한미재무학회의 학문적 성취를 장려하기 위해 KAFA를 후원하고 있다.

[포럼] '참교육'과 '감정코치 K'

요즘 넷플릭스에서 세계적 인기를 끄는 K-드라마 '참교육'에 대한 찬반 논의가 뜨겁다. 정의가 무너진 학교에 교권보호국 소속 주인공이 나타나 가해자에게 폭력과 공포를 그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되돌려주는 방식을 취한다. 그 결과 학교에는 즉각적인 평화와 질서가 찾아오고, 가해자는 혹독한 처벌을 받는다. 이 통쾌한 응징은 시청자에게 사이다처럼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위기의 학교에 해결사가 방문한다는 설정이 똑같은 작품이 이전에 하나 더 있었다. 2014년 필자가 감수한 만화 시리즈 '감정코치 K'다. 서울시와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우수한 한국 만화'로 선정한 작품의 설정은 '참교육'과 동일하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동원되는 해결 방법은 정반대다. 아이들의 문제 행동을 일종의 '살려달라는 처절한 비명'으로 인식한다. 비뚤어진 행동의 본질적인 이유를 찾아내어 내면에서부터 스스로 변화하게 돕는 방식이다. 다만 해결 과정이 '빨리빨리'를 원하는 우리에게 고구마처럼 답답해 보인다. 인공지능(AI)에 둘 중 무엇이 더 현실적 해결책인지 물어보니 "학교폭력이라는 거친 현실 앞에서 우리는 가끔 참교육식의 즉각적인 단죄에 열광하지만, 교육의 본질과 한 인간의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고민할 때 '감정코치 K'가 정답이다"라고 한다. '참교육'이 만든 평화는 두려움에 의한 순종과 초법적 처리이며, 오히려 악순환의 불씨가 된다. 과거 체벌과 촌지로 얼룩진 교육을 경험한 세대가 오늘날 학교와 교사에 대한 신뢰를 잃고 대립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서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미국 질병관리본부가 1만7000명을 대상으로 20년간 진행한 방대한 종단연구는 청소년과 성인의 행동 문제의 원흉으로 '아동기 부정적 체험'을 지목한다. 비록 학교에서 불거진 문제라 할지라도 생태계가 아니라 사건으로 접근하는 미봉책은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고립과 단절을 부추기는 AI 생태계일수록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법과 힘의 군림이 아닌 인간적 연결이다. 하지만 두 시리즈 사이에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학교 현장은 너무 황폐해졌다. 우리보다 한 세대 먼저 교육 황폐화를 겪은 몇몇 외국에서는 별다른 논쟁 없이 이 드라마에 열광한다. 손쓸 타이밍을 놓쳐 학교의 자정능력을 완전히 상실했기에 외부의 힘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참한 현실을 반영한 결과다. 반면 한국에 치열한 찬반 논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교육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는 희망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증거다. 속 시원한 판타지에 현혹되기엔 섣부르다. 아직은 어른들이 '싸다구'를 날리는 해결사가 아니라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감정코치가 되어주어야 할 때다. 그러나 교권보호국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또 하나의 기구를 신설하는 게 아니라 현존하는 교육지원청, 교육청, 교육부, 국가교육위 자체가 교권보호국이 되어야 하겠다. 누군가를 학교 현장에 파견 보내는 게 아니라 교육당국 책임자들이 학교에 직접 가보고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그래서 학생과 교사와 학부모가 사건 해결사 때문이 아니라 교육 자체가 모두에게 가치 있고 소중해서 학교에 가는 게 희망적이어야 하겠다. 조벽 고려대 석좌교수·HD행복연구소 공동소장

[fn광장] 한국은행 2008년의 교훈

중앙은행의 가장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미래를 내다보고 통화정책을 운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제는 수많은 변수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시스템이고, 결정적인 사건은 언제나 예상 밖의 곳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통화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를 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능력이다. 2008년 여름의 경험은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 한국은행의 최대 고민은 인플레이션이었다. 국제유가는 배럴당 140달러에 육박했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를 넘어섰다. 이에 따라 한국은행은 2008년 8월 기준금리를 5.0%에서 5.25%로 인상했다. 그러나 불과 한 달 뒤 미국의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면서 세계 경제는 금융위기 국면으로 빠져들었다. 인플레이션을 걱정하던 세계 경제는 순식간에 디플레이션과 금융위기 국면으로 진입했다. 한국은행은 2008년 10월에 기준금리를 5.25%에서 4.25%로 내리는 등 '빅컷'을 단행했다. 그 후 2009년 2월에는 기준금리가 2.0%까지 인하되었다. 당시 누구도 그런 급격한 정책 전환을 예상하지 못했다. 최근 한국은행의 움직임을 보면서 문득 2008년이 떠오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 5월 경제전망에서 올해 성장률과 물가상승률 전망을 동시에 상향 조정했다. 중동 정세불안으로 국제유가가 상승했고, 원·달러 환율은 1500원을 넘어섰다. 원화 약세는 수입물가를 자극하고, 이는 다시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은행 입장에서는 물가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성장 측면에서는 전혀 다른 그림이 나타날 수 있다. 반도체 수출 증가에 힘입어 상반기 성장률은 예상보다 높게 나타나고 있지만 하반기로 갈수록 성장세는 빠르게 둔화할 확률이 높다. 수출 증가가 경제 전체로 확산되지 못하는 가운데 내수는 여전히 부진하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의 물가 상승이 수요 과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 물가 상승은 국제유가와 환율 상승이라는 공급 충격의 성격이 강하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금리 인상으로 대응하면 물가 안정 효과보다 성장둔화와 금융불안이라는 부작용이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 최근 미국경제연구소(NBER)의 한 논문('원자재 충격에 중앙은행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도 비슷한 결론을 제시했다. 원자재 수입국에서는 공급 충격에 대해 중앙은행이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가 상승은 물가를 올리는 동시에 성장률을 낮춘다. 이때 금리까지 인상하면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면서 경기침체 위험이 더욱 커질 수 있다. 한국은 대표적인 원자재 수입국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은행은 물가와 성장이라는 전통적 딜레마를 넘어 환율과 금융안정이라는 새로운 과제까지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의 변화는 한국은행이 더욱 신중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미국에서는 케빈 워시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체제가 출범하면서 지난 15년간 지속돼 온 유동성 중심 질서가 변화를 맞고 있다. 시장은 여전히 금리 인하를 기대하고 있지만 Fed는 인플레이션과 재정적자, 국채시장 불안을 이유로 쉽게 완화정책으로 돌아서지 못하고 있다. 만약 미국의 장기금리가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면 한국 역시 독자적인 통화정책 운용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금리를 낮추면 자본유출과 환율 상승 압력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금리를 인상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한국 경제는 이미 높은 가계부채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문제를 안고 있다. 금리 인상은 단순한 경기둔화를 넘어 금융안정 문제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2008년의 경험이 보여주듯 미래는 언제나 의외의 곳에서 온다. 지금 세계 경제는 인공지능(AI) 혁명, 지정학적 갈등, 공급망 재편, 원자재 충격, 고부채 구조가 동시에 진행되는 복합 전환기에 들어서 있다. 이런 시대에 중앙은행은 단순히 물가만 관리하는 기관이 아니라 환율과 금융안정, 자산시장과 유동성까지 함께 고려하는 종합 안정화 기관으로 변화해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은행이 선택해야 할 길도 분명하다.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중앙은행은 없다. 그러나 변화하는 환경에 가장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시장의 신뢰를 유지하는 중앙은행은 있을 수 있다. 중앙은행의 진정한 경쟁력은 미래를 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예상 밖의 미래에 가장 잘 대응하는 능력에 있을 것이다. 김영익 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