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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반도체 공장, 왜 호남이어야 하나

호남권 반도체 공장 신설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수도권에 집중된 반도체 공장을 지방에 분산하는 것은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필요하며 타당하다. 하지만 왜 호남이어야 하는가를 놓고 시끄럽다. 호남은 비수도권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 입지적으로 열악하다. 반도체 공장에 필요한 전력·용수·인력·물류·협력사 모두 부족하다. 입지조건을 따져선 호남에 반도체와 같은 첨단 공장이 세워지기 어렵다. 공장이 없으니 낙후되고, 낙후되니 안 들어오는 악순환의 덫에 갇혀 있다. 이게 바로 호남권이 오랫동안 소외된 이유이다. 땅도 좁은 우리나라에서 지역 간 우열을 따지는 건 별 의미 없다. 삼성은 미국 오스틴·테일러와 중국 시안·쑤저우 4곳에서 반도체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중국의 우시·다롄·충칭 세 곳에 생산거점이 있다. 미국과 중국에도 설립한 반도체 공장을 왜 호남권에 못 짓는다고 난리인가.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 TSMC는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응해 미국, 독일, 중국, 일본 등으로 해외 생산기지를 분산하였다. TSMC 일본 공장은 도쿄나 오사카가 아닌 구마모토에 설립되었다. 허허벌판 논밭 가운데 거대한 TSMC 공장이 우뚝 솟은 모습은 기괴하게 보인다. 남부 규슈의 소도시 구마모토현에 TSMC가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결정한 것은 일본 정부가 전력과 용수를 해결해 주고, 공장 건설비의 상당액을 보조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부는 호남권에 반도체 공장이 설립된 다음에 차질 없이 가동하고 운영되도록 전폭적 지원을 제공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반도체 공장은 호남의 산업환경을 개선하고 다른 공장들도 유입되어 선순환 성장동력이 활성화되는 역할을 할 것이다. 문제는 정부가 다른 지역을 배제하고 호남권을 특정해 반도체 공장 입지로 발표하는 과정이 투박해 논란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6·3 지방선거 후 지방발전을 위한 큰 그림을 내보이지 않고 호남만 콕 찍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공장을 건설한다고 하니 비판이 쏟아지지 않을 수 없다. 기업들은 가만 있는데 정부가 먼저 나서 기정사실로 공표하는 바람에 정경유착의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개발시대와 달리 정부가 주도하고 기업이 들러리 서는 것에 대한 국민의 거부감이 크다. 이에 더해 청와대 정책실장이 정치적 편향성이 강한 유튜브에 나와 국가 정책을 공론화한 것이 기름에 불을 던진 꼴이 되었다. 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하다 국가백년대계가 정쟁의 불쏘시개로 전락해 버렸다. 정치적 공방과 지역 간 갈등을 불식하고,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권위 있는 제3자의 정책 자문과 제언이 필요하다. 가덕도신공항 사례와 유사하게 글로벌 컨설팅사가 호남권 반도체 공장의 성공요건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도록 해야 한다. 호남권에 반도체 공장뿐 아니라 대학, 연구소, 소부장 중소기업, 관련 공공기관 등의 생태계 조성계획도 수립되어야 한다. 국내 기업뿐 아니라 글로벌 기업도 유인될 수 있는 여건이 호남권에 조성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수십년 후 호남권에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기 잘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임채운 서강대 경영학과 명예교수

[포럼] 난파선에서 노를 젓는 현대인

불확실한 미래, 통제 불가능한 현실의 절벽을 앞에 두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으로 자주 '난파선에 올라탄 선원'이라는 비유가 사용된다.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가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은 이 위기 상황을 잘 보여준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남긴 "당신은 이미 배에 올라탔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선택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현실이라는 배에 올라타 항해를 하고 있다. 폭풍우 속에서 망망대해를 떠도는 난파선에 탄 우리는 이 절대적인 현실을 어떻게 이겨낼까. 신화시대의 인류는 번개라는 거대한 자연 폭력에 압도당할 때, 이를 '제우스의 분노'로 명명하고 황소를 제물로 바쳤다. 정체 모를 천둥 번개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고대인은 불안을 이겨낼 정신적 도구를 마련한 것이다. 이처럼 신화적 서사는 허구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현실이 가져다주는 정체 모를 불안을 이해하고, 이로부터 거리를 두는 기술이다. 역사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에 따르면,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위압적인 현실의 불안을 넘어서기 위해 시대에 따라 다양한 신화를 수용하고 변형해 왔다. 프로메테우스 서사가 대표적이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변천사는 인류의 '정신적 투쟁기'와 같다. 고대의 인류가 불을 가져다주는 프로메테우스 서사로 자연의 공포를 이기고 문명을 이루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면, 괴테의 프로메테우스는 역경을 이기고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근대적 주체의 자화상이다. 현대에 이르면 모습이 사뭇 달라진다. 카프카는 프로메테우스의 결말을 이렇게 묘사했다. "신들도 지치고, 독수리도 지치고, 상처도 지쳐 아문다. 남은 것은 설명할 수 없는 바위산뿐이다." 그는 본질을 알 수 없는 절대적 현실, 현대인이 마주한 거대한 불안의 실체를 '설명할 수 없는 바위산'으로 표현한 것이다. 유한한 인간이 이 거대한 바위산을 단번에 정복하거나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좌절하는 대신 '설명할 수 없는 바위산'으로 명명함으로써 비로소 이 현실의 본질을 파악하고 방향을 잡아나갈 수 있다. 우리의 관점으로 세계를 은유하고 명명할 때, 세계는 우리가 파악하고 이겨낼 수 있는 영역 안에 들어온다. 물론 이름 붙이는 것만으로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출발점일 뿐이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가치를 따라 살아갈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주체성이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편파적인 주관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과 함께 상호주관적인 세계에서, 함께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를 공유하며, '세계 내적 존재'로 더불어 살아간다. 이런 맥락에서 키르케고르가 말한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개념은 깊은 울림을 준다. 신 앞에 선 단독자는 세상의 유용성이나 손익계산을 넘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붙들고 외롭게 결단하는 사람이다. 불확실한 현실이라는 바위산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이해하며, 자신이 부여한 가치인 '노'를 붙잡을 때 우리는 난파선 위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다. 폭풍우를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 어떤 방향으로 노를 저을 것인지를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김길웅 성신여대 인문융합예술대학 명예교수

[기고] 내 손으로 들어온 의료 마이데이터

[파이낸셜뉴스]  의료 마이데이터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 그동안 정보 수집 과정에서 관행적으로 활용돼 온 스크래핑 방식은 점차 제한되고, 안전성이 검증된 표준 전송 방식인 API 등을 중심으로 개인이 지정한 곳에 자신의 데이터를 전송하고 활용하는 체계가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는 단순히 정보기술 규제가 하나 추가되는 변화가 아니다. 진료기록과 처방 내역 등 가장 민감한 건강정보의 주도권이 의료기관이나 플랫폼에서 정보주체인 개인에게 이동하는 구조적 전환이다. 개인은 자신의 데이터를 어디에, 어떤 목적으로 활용할 것인지 직접 결정하고, 기업은 그 선택을 안전하게 구현해야 한다. 의료 마이데이터는 결국 '데이터를 모으는 산업'이 아니라 개인의 권리를 실질적인 건강 편익으로 전환하는 산업이어야 한다. 데이터 주권의 이동, 일상의 변화를 만들다 과거 우리의 진료기록과 처방 내역은 병원 전산망이나 공공기관 서버에 분산돼 있었다. 내 건강에 관한 기록임에도 정작 필요할 때 한 번에 확인하거나 다른 서비스와 연결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의료 마이데이터가 정착되면 개인은 자신의 건강정보를 직접 확인하고, 필요한 기관이나 서비스에 안전하게 전송해 건강관리와 의료 이용에 활용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일상 속에서 구체적인 가치로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해외에서 갑작스러운 사고로 응급진료를 받게 된 상황에서 개인의 동의 아래 복용약, 과거 병력, 알레르기 정보 등이 신속히 전달된다면 의료진의 판단을 돕고 불필요한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여러 기관에 흩어져 있던 데이터가 개인의 통제 아래 연결될 때, 건강정보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생명과 삶의 질을 지키는 가치 있는 자산이 된다. 신뢰를 지키는 특수전문기관의 역할 다만 의료 마이데이터의 확산은 활용 가능성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민감한 의료정보를 다루는 만큼 보안과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산업 전체가 국민의 선택을 받기 어렵다. 정부가 보안체계와 기술 역량, 재정적 안정성 등을 엄격하게 심사해 보건의료 분야 개인정보관리 전문기관, 이른바 특수전문기관을 지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수전문기관은 단순한 데이터 보관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서로 다른 의료데이터를 표준화하고, 정보주체의 권리를 보호하면서도 의료·돌봄·보험·여행·인공지능 등 다양한 분야가 안전하게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신뢰의 중간 인프라'가 되어야 한다. 데이터 활용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고, 이용자가 자신의 정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역시 특수전문기관이 맡아야 할 중요한 책무다. 정부의 제도적 성과, 이제는 산업의 실행력을 높일 때 정부는 그동안 의료 마이데이터 제도화와 개인정보 전송요구권 도입, 특수전문기관 지정, 개인건강기록 활성화 및 데이터 활용 지원사업 등을 통해 산업의 기반을 차근차근 마련해 왔다. 특히 안전한 전송체계와 신뢰할 수 있는 사업자 기준을 제시한 것은 시장의 불확실성을 낮추고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의미 있는 진전이다. 의료정보를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는 제도적 토대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정부의 노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제 다음 단계는 이러한 제도가 실제 서비스와 사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기업의 실행 여건을 강화하는 것이다. 우선 의료기관별로 상이한 데이터 형식과 전송 품질을 개선하고, 표준 API의 제공 범위와 안정성을 지속적으로 높일 필요가 있다. 데이터가 전송될 수 있다는 제도적 권리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활용 가능한 수준의 정확성과 적시성이 함께 보장돼야 하기 때문이다. 기업이 제도 해석의 불확실성으로 사업 추진을 늦추지 않도록 개인정보 처리, 인공지능 활용, 제3자 제공과 위·수탁 구조 등에 관한 보다 구체적이고 일관된 가이드라인도 필요하다. 혁신적인 서비스를 준비하는 기업이 사안마다 개별적인 법률 해석에 의존하기보다, 예측 가능한 기준 안에서 책임 있게 사업을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보안 투자에 대한 지원도 중요하다. 특수전문기관을 비롯한 의료 마이데이터 기업은 높은 수준의 보안 인프라와 인증체계, 상시 관제 및 전문인력을 유지해야 한다. 이는 국민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비용이지만, 초기 시장을 개척하는 기업에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보안 인프라 구축과 인증 비용에 대한 정책금융 및 지원사업, 공공·민간 공동 실증사업, 우수 서비스의 공공조달과 지자체 사업 연계 등 '사업화의 마지막 구간'을 지원하는 정책이 더해진다면 제도의 성과가 국민이 체감하는 서비스로 보다 빠르게 이어질 수 있다. 정부가 마련한 안전한 제도적 토대 위에서 기업의 기술과 서비스가 성장할 수 있도록, 예측 가능하고 지속 가능한 시장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안전한 토양 위에 피어날 초개인화 헬스케어 룰루메딕 역시 보건의료 분야 개인정보관리 전문기관으로서 이러한 변화에 참여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사업 기회를 얻었다는 의미에 앞서, 안전한 의료 마이데이터 활용의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는 책임을 부여받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룰루메딕은 의료 마이데이터 플랫폼 '디스탯(d'stat)'을 중심으로 개인의 건강정보를 안전하게 연결하고, 인공지능 기반의 건강정보 요약과 맞춤형 관리 서비스로 확장하기 위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또한 글로벌 응급의료 지원 네트워크와의 연계를 통해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여행과 해외 체류 상황에서도 개인의 의료정보가 실질적인 안전과 편익으로 이어질 수 있는 활용 모델을 모색하고 있다. 앞으로의 의료는 아픈 뒤에 의료기관을 찾아가는 수동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개인의 건강 상태를 지속적으로 살피고 위험 신호를 조기에 발견하며 필요한 서비스와 혜택을 연결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의료 마이데이터는 초개인화 헬스케어와 돌봄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인프라가 될 수 있다. 정부가 구축한 제도적 신뢰와 기업의 기술·서비스 혁신이 함께 맞물릴 때, 데이터 주권은 선언에 머물지 않고 국민 개개인의 건강과 안전을 높이는 실질적인 혜택으로 이어질 것이다. 특수전문기관은 그 연결을 가장 안전하게 구현하는 역할을 맡고, 정부는 기업이 책임 있는 혁신을 지속할 수 있도록 제도와 시장 사이의 간극을 메워야 한다. 신뢰와 지원이 함께할 때 의료 마이데이터 생태계는 비로소 지속 가능한 헬스케어 혁신의 기반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김영웅 디지털헬스산업협회 회장·룰루메딕 대표이사

우리는 부부인가, 룸메이트인가[부장판사 출신 김태형 변호사의 '알쏭달쏭 이혼]

[파이낸셜뉴스] 필자는 2010년대 초반과 2020년대 초반, 약 10년의 간격을 두고 가사 재판을 담당하며 수많은 이혼 사건을 접했다. 그리고 현재는 변호사로서 다양한 이혼 사건을 수임하여 처리하고 있다. 10년의 시간을 관통하며 가장 뚜렷하게 변화한 영역 중 하나가 바로 '부부의 성생활', 그중에서도 이른바 '리스(less) 문제'이다. 과거에는 부부 갈등의 한 단면에 불과했던 이 문제가 이제는 주된 이혼 사유로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리스 부부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리스 부부'란 일정 기간 동안 성관계가 거의 없거나 극히 드문 부부를 의미한다. 흔히 1년에 10회 미만을 기준으로 삼기도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통계적 참고일 뿐 법적 기준은 아니다. 실제 상담을 하다 보면 같은 '월 1회'라도 어떤 부부에게는 충분하고, 어떤 부부에게는 심각한 결핍으로 작용한다. 중요한 것은 횟수가 아니라 '상호 만족과 합의'이다. 최근에는 리스의 양상도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남편이 관계를 원하고 아내가 거부하는 유형이 많았다면, 최근에는 오히려 아내가 관계를 요구하고 남편이 회피하는 사례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예를 들어 한 사건에서는 아내가 "남편이 몇 년째 관계를 회피하고 잠자리를 따로 하며 스킨십 자체를 거부한다"고 주장했다. 남편은 "아내가 싫은 것은 아닌데, 너무 피곤하고 관계 자체에 관심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는 단순한 성향 차이가 아니라 부부관계 단절의 중요한 징표이다. 또 다른 사례에서는 남편이 게임과 개인 취미에만 몰두하면서 부부 사이의 친밀감 자체가 사라졌고, 결국 아내가 외도를 저지르게 된 사건도 있었다. 이 사건에서 법원은 외도 자체를 유책으로 보면서도 장기간의 관계 단절 역시 혼인 파탄의 주된 원인으로 함께 고려했다. 리스가 문제되는 경우 리스 자체가 곧 이혼 사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부가 서로 동의하고 불편함이 없다면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실제로 정서적 유대나 공동의 일상적인 삶에 더 큰 의미를 두는 부부들도 많다. 문제는 한쪽이 관계를 원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쪽이 정당한 이유 없이 지속적으로 이를 거부하는 경우다. 민법 제826조는 부부의 '동거 및 협조 의무'를 규정하고 있고, 여기에는 성적 교섭 의무도 포함된다고 해석된다. 따라서 특별한 사유 없이 장기간 성관계를 거부한다면 민법 제840조 제6호, 즉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에 해당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당한 이유'의 유무다. 출산 직후의 회복 기간, 질병이나 성교통, 우울증과 트라우마,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의 사망 정신적 충격 등이 있는 경우에는 성관계 거부에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문제는 경계에 있는 사례들이다. 예를 들어 실제 사건에서 아내는 "관계 시 통증이 점점 심해져 결국 성관계를 회피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남편은 "치료 노력 없이 일방적으로 거부했다"고 주장하는 경우 등이다. 이처럼 신체적·심리적 요소가 뒤섞인 경우에는 법원이 어느 쪽 손을 들어줄지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다. 또 최근에는 '정서 단절형 리스'도 증가하고 있다. 겉으로는 갈등이 없어 보이지만, 대화 단절, 스킨십 부재, 각방 생활이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성관계가 사라지는 유형이다. 이런 경우 당사자조차 문제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거리감이 형성된다. 리스를 유책사유로 입증하는 방법 리스 문제의 가장 큰 난점은 입증이다. 성생활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객관적 증거를 확보하기 어렵다. 실무에서 흔히 발생하는 상황은 다음과 같다. 원고는 "지속적으로 관계를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피고는 "그런 요구 자체가 없었고, 언제나 가능했다"라고 반박한다. 이 경우 법원은 주장만으로 정당한 이유 없는 성관계 거부 사실을 인정하기는 어렵고 결국 입증책임을 지는 쪽이 불리해진다. 따라서 사전에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본인이 참여한 대화 녹음, 카카오톡, 문자 메시지 등 성관계 요구와 거부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기록, 성기능 장애, 통증 등 관련된 상담 기록이나 병원 진료 기록 등이 필요하다. 반면 일기장의 기록, 혼자 작성한 메모나 캘린더 표시 등은 상대방이 인정하지 않을 경우 증거력이 크게 떨어진다. 최근에는 부부 상담 기록이나 정신과 진단서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단순히 "거부했다"는 사실보다 "왜 거부했는지"가 더 중요한 판단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달라진 시대, 달라진 선택 많은 이혼 사건에서 표면적인 이혼 사유는 '성격 차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성생활 불만족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완벽하게 맞는 부부는 거의 없다. 성격도, 생활 방식도, 성적 취향도 대부분은 맞춰 가는 과정 속에서 적절한 관계가 형성된다. 다만 그 '맞춤의 과정'이 서로를 존중하는 범위 내에 있어야 한다. 일방의 희생이 지속되고, 그로 인해 결핍과 좌절이 누적된다면 이러한 관계는 더 이상 건강한 관계로 보기 어려워진다. 최근 사건들을 보면, 성적 결핍이 장기화되면서 별거나 외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겉으로는 명백한 유책 사유로 보이지만 사실 오랜 시간에 걸쳐 관계의 균형이 무너진 결과로 볼 수 있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감당해야 할 수준이 어디까지인가?" 그 범위 안이라면 노력과 조율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선을 넘어섰다면 이혼 역시 현실적인 선택지로 검토될 수 있다. 부부관계는 사랑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이해, 조율, 그리고 때로는 냉정한 판단이 함께 필요하다. 그리고 리스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숨겨진 이야기가 아니라 혼인의 지속 여부를 좌우하는 중요한 화두가 된 것이다. 김태형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 l 김태형 변호사는 가사∙상속 분야 전문가이다. 2007년 법관 임용후 2024년 수원가정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17년간의 법관생활을 끝내고 법무법인 바른에 합류했다. 김태형 변호사는 법관시절 2012년부터 총 8년간 가사∙상속 및 소년심판 업무를 담당했다. 특히 법관 퇴직 전 5년(2019~2024)간 수원가정법원에서 가사소년전문법관으로 수많은 가사∙상속 관련 케이스를 처리하면서 이 분야의 전문성을 확보했다. 베스트셀러인 "부장판사가 알려주는 상속, 이혼, 소년심판 그리고 법원"(박영사, 2023)의 저자이기도 하다.

[포럼] 부메랑이 된 노란봉투법

지난 3월 개정 노동조합법, 이른바 노란봉투법이 시행된 후 100여일이 지났다.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겠다는 법 개정 취지와는 달리 산업 현장은 전례 없는 불확실성의 폭풍우를 맞이하고 있다. 하청노조의 동시다발적 교섭 요구가 빗발치며 개별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혼란이 현실화하는 양상이다. 특히 문제는 원청의 사용자성을 가늠하는 기준인 '실질적 지배력'이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는 점이다. 원청 경영진은 자신들이 법적 교섭 의무를 지는 주체인지조차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성과급 분배와 같은 무리한 요구까지 마주하고 있다. 현행법상 원청의 단체교섭 거부는 부당노동행위로 간주되어 형사처벌로 이어질 수 있기에 하청노조의 거센 요구를 무작정 외면하기도 어렵다. 결국 개정법이 하청노조에는 강력한 압박 수단을 부여했지만 원청기업에는 예측이 어려운 사법 리스크를 지운 셈이 됐다. 이러한 상황은 예상 밖의 곳에서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혹시라도 실질적 지배력을 인정하는 근거가 될까 우려한 원청은 하청과의 상시적 소통이나 현장 안전을 위한 일상적 기술협력마저 주저한다. 이는 원청의 안전관리 책임을 강화한 중대재해처벌법의 취지와도 정면으로 상충한다. 아예 강성 노조가 있는 하청과의 거래를 단절하거나 하청 외주를 축소하려는 움직임까지 감지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폐해가 단순히 원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중소 하청업체와 소속 노동자에게도 전가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청 사측 입장에서는 자사 노조의 요구를 수용하자니 원청과의 거래단절이 두렵고, 원청의 눈치만 살피자니 내부 노사갈등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길이 막막하다. 노동자 보호를 표방한 개정법이 역설적으로 중소기업의 폐업과 하청 노동자의 연쇄 실직을 부르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물론 노동 위험을 외주화하며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일부 원청의 행태를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감당 불가능한 사법 리스크가 산업 생태계 전체를 상시적 위기로 내몰고 있다면 이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제도 시행 과정에서 드러난 맹점들을 면밀히 점검해 조속히 보완해야 한다. 보완책으로는 우선 사용자성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 핵심 근로조건에 대한 직접적·구체적 결정권 행사 여부나 채용·해고·임금 결정에 대한 실질적 관여 여부와 같이 산업별 특성을 반영한 구체적인 판단기준을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교섭 거부에 대해 형사처벌을 무조건 앞세우기보다는 행정적 구제 제도나 조정 기능을 우선 활용하는 유연함도 필요하다. 아울러 수많은 하청노조의 동시다발적 교섭 요구로 인한 대혼란을 막기 위해 교섭의 절차와 범위를 체계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절차적 장치도 입법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복잡한 노동시장의 격차 해소를 형벌의 위협이나 거친 규제에만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개정법이 촉발한 혼돈을 넘어 양극화된 노동시장을 정상화해 나가기 위해서는 신속히 보완입법에 나서야 한다. 이 과정에서 노사정이 서로를 공존의 동반자로 인정하고, 누구든 수긍할 수 있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룰을 만들어 나가는 상생의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김태은 법무법인 비트 대표변호사

[fn광장] 외신을 맹신하는 '韓 외교 사대주의'

우리의 외교 문제 분석에서 가장 큰 결함은 외국 언론과 전문가에게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향에 있다. 우리에게 유의미한 점을 우리의 입장에서 발굴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유는 그네들이 세계적인 외국 언론이고, 저명한 학자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들에겐 유의미한 점이 우리와는 별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 별 의미 없지만 우리에게 유의미한 내용을 주장하면 주류에서 벗어난 '설(說)'로 왕왕 치부한다. 그래서 우리 언론이나 전문가들은 그네들의 견해와 시각을 가감 없이, 여과 없이 마치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수용하는 사대적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외국 언론인과 전문가들은 당연히 자국과 상관있고 유의미한 점에만 관심이 있다. 우리가 처한 상황과 당면한 과제가 그네들과 엄연히 다른데도 우리는 그들의 분석 관점과 틀에서 우리의 외교를 보려 한다. 지난 4월 미중 정상회담도 그들이 재단한 승패 스토리를 우리는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우리네 지도자가 아니라 별 의미도 없는데도 말이다. 뉴욕타임스, CNN이 자국 대통령을 폄훼하는 데 혈안이 된 속성이 강해도 우리는 수용한다. 중국 인사의 트럼프 영접 스토리도 마찬가지다. 중국 외교부장이 영접하는 것이 전통이지만 이번엔 중국공산당 서열 8위 한정을 이례적으로 파견했다. 이런 역사를 간과한 뉴욕타임스는 그에게 의사결정권이 없다며 중국의 홀대로 비판했다. 그것도 2014년 오바마 대통령을 영접한 외교부장 겸 외교 국무위원 양제츠의 사례에 빗대어서 말이다. 그 역시 의사결정권이 없을뿐더러 당서열은 한정보다 낮다. 뉴욕타임스의 무지를 우리 언론, 전문가도 가감 없이 수용했다. 5월의 중러, 6월의 북중 정상회담도 마찬가지다. 한반도, 북핵, 한국이 언급되지 않은 단순한 이유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이들 회담에서 사상 처음으로 언급된 유의미한 발언이 많았는데도 말이다. 작년 9월 베이징에서 김정은은 홍콩, 신장, 티베트, 대만 등 중국의 핵심 이익을 존중한다고 사상 처음 밝혔다. 같은 달 최선희 북한 외무상도 중국에서 하나의 중국 외교원칙 지지와 대만 문제의 외부간섭 반대 입장을 사상 처음 공개했다. 10월의 리창 총리와 올 4월 왕이 외교부장과의 평양 회담에서도 김정은이 이를 재확인했다. 과거 북중 정상과 고위급 회담의 의제는 제한적이었다. 각국의 성과, 양국의 공동 현안,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문제 등에 집중했다. 이를 초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만 유사시에 북한의 간여, 관여 가능성을 염두에 둔 포석으로 보인다. 또한 북중 정상은 처음으로 자매도시 간의 협력을 강조했다. 북한 군함 구축사업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조선소가 경제특구가 아닌 지방에 있다. 지난 2월 9차 노동당 대회에서 해군력 강화를 국책사업으로 채택했다. 게다가 북중러 3국이 작년 9월에 공동 군사훈련에 합의한 상황에서 급선무다. 육상훈련은 불가능하다. 외국군의 자국 영토 진입을 불허하는 사회주의 전통 때문이다. 중러 육상 군사훈련이 중앙아시아 등 제3국에서 진행되는 이유다. 따라서 북중러의 군사훈련은 해상에서만 가능하다. 북한 해군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아직은 시기상조다. 양국 정상은 아시아의 발전과 평화에 공동대응하는 데도 합의했다. 북중 협력의 지리적 범위가 한반도를 초월한 순간이다. 중러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도 사상 처음 밝힌 양국의 입장을 우리는 무시했다. 중장거리 미사일 배치, 미국과 동맹국의 핵 공유 반대 입장을 처음 전했다. 특히 이들의 핵 반격 능력뿐 아니라 확장 억제력, 핵 공유, 핵방어시스템(킬체인) 강화 반대를 처음으로 명시했다. 우리의 2024년 한미 워싱턴 선언, 개발 중인 킬체인, 논의 중인 핵추진잠수함 건조 등이 중러의 반대 사안에 해당한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6월 19일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우리의 핵잠수함 추진을 엄중히 경고했다. 핵확산과 충돌 가능성을 촉발하는 원흉으로 보는 인식을 표출했다. 우리가 외신과 외국 전문가의 견해와 관점에 함몰될 때 정작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유의미한 점을 적지 않게 놓친다. 그네들은 자국 중심의 사고에서 의미를 찾는다. 우리의 입장, 상황, 국익은 뒷전이다. 주변 4강에 둘러싸인 주권 국가로서 외교적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입장과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는 함량을 충분히 이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성(知性) 사대주의에서 벗어나는 노력이 선제적으로 이뤄져야 하겠다.주재우 경희대 중국어학과 교수

숫자로 못 담는 기업정보, 대면 IR 통해 신뢰 줄 수 있어[한미재무학회]

【 뉴욕=이병철 특파원】 현대 자본시장에서 정보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생산되고 널리 공유된다. 기업 공시는 전자공시 시스템을 통해 공개되고, 애널리스트 보고서와 뉴스는 시장 참여자에게 신속하게 전달된다. 더 나아가 최근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과 확산으로 투자자는 방대한 자료를 더 빠르게 분석하고 투자 판단에 반영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정보가 많아졌다고 해서 투자 판단이 그만큼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같은 실적 발표도 어떤 투자자는 일시적 부진으로 해석하고, 다른 투자자는 장기적 경쟁력 약화의 신호로 받아들인다. 시장에서 차이를 만드는 것은 정보를 얼마나 많이, 얼마나 빠르게 얻느냐만이 아니라 그 정보가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졌고 어떻게 해석돼야 하는지를 가려내는 과정이다. ■정보는 많아졌지만 해석은 더 어려워져 투자 판단에서 정보의 해석이 중요하다면 정보가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는지도 중요한 문제이다. 그중 하나는 시장 참여자들이 직접 만나고 교류하는 대면소통이다. 재무학에서는 이전부터 투자자가 지리적으로 가까운 지역에 있는 기업에 대해 더 나은 정보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지역 투자자는 해당 기업이 속한 산업, 고용 상황, 지역경제 분위기와 관련 뉴스를 더 자주 접할 수 있으며 전통적으로 이러한 정보는 지역 내 투자자, 기업 관계자, 산업 종사자의 공식적 및 비공식적 대면교류를 통해 축적되고 전달됐다. 더 나아가 기관투자자는 경영진을 직접 만나거나 기업 현장을 방문하면서 문서로 쉽게 정리되기 어려운 비정형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코로나가 보여준 대면소통의 가치 오늘날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대면소통의 역할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통신기술 발달로 멀리 떨어진 투자자도 기업 공시, 타 지역의 뉴스, 온라인 설명회 등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같은 지역의 투자자들 또한 전화, e메일, 화상회의 등 디지털 수단을 통해 과거 대면으로 이뤄지던 상호작용의 상당 부분을 비대면 방식으로 대체하게 됐다. 둘째, 공시규제 강화로 중요한 정보가 사적 만남이나 개별 면담을 통해 특정 투자자에게만 선택적으로 전달될 가능성이 크게 제한됐다. 이러한 변화를 고려할 때 대면소통이 오늘날에도 정보 우위를 제공하는지,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 글이나 숫자만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단서를 전달하는지는 새롭게 검토해야 할 문제이다. 저자가 최근 최근 국제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대면 사회적 네트워크와 지역 정보 우위(Face-to-face Social Interactions and Local Informational Advantage)'는 바로 이 질문에 답한다. 해당 연구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의 봉쇄조치와 이동제한, 재택근무 확산을 활용해 대면만남이라는 정보전달 채널이 갑작스럽게 약화된 상황을 분석했다. 일반적 상황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는 투자자가 더 나은 투자 성과를 낸다는 사실만으로 그 정보 우위가 대면소통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다른 지역 정보 채널에서 비롯된 것인지 밝혀내기 어렵다. 그러나 지리적 근접성이 유지된 상태에서 코로나19로 인한 대면접촉의 제약은 여러 요인 중 대면소통의 고유한 역할을 보다 명확하게 살펴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해당 연구는 미국 뮤추얼펀드를 운용하는 펀드매니저들의 당시 투자 결정과 성과를 분석하여 대면소통이 맡고 있던 역할을 실증적으로 설명했다. 대면접촉이 제한된 이후 펀드매니저들의 지역 주식 투자 성과는 원거리 주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됐다. 동일한 주식을 여러 펀드매니저가 보유한 경우에도 해당 기업과 가까운 지역 펀드매니저의 성과는 원거리 펀드매니저에 비해 낮아졌다. 이러한 변화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해당 지역 기업들의 실적이나 재무상태 등 펀더멘털이 악화된 것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렵다. 특히 지역 주식에 대한 매수 판단, 즉 향후 수익률이 높은 종목을 적절한 시점에 포트폴리오에 편입하는 능력이 약해졌으며, 성과 약화는 애널리스트 분석이나 공개 정보만으로 전망을 평가하기 어려운 기업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는 지역 내에서 이루어지는 대면소통이 기업과 지역에 관한 여러 단서를 해석하고 이를 투자 결정으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을 시사한다. ■신뢰와 맥락… 대면소통이 만드는 정보 우위그렇다면 대면만남은 무엇을 전달하는가. 크게 두 가지 요소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신뢰와 맥락을 통한 비정형 정보의 해석이다. 직접 만남에서는 말의 내용뿐 아니라 표정, 목소리의 어조, 시선, 몸짓과 같은 다양한 비언어적 단서가 함께 전달된다. 또한 상대방이 단순히 화면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공간에서 함께 대화하고 있다는 사회적 실재감도 강해진다. 이러한 단서와 감각은 서로의 의도와 설명의 맥락을 더 잘 이해하게 하고, 상대방 말의 신뢰성을 판단할 근거를 제공한다. 이는 대면소통이 정보를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쌓는 과정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뢰의 역할은 기업 경영진과 투자자 사이의 비정형 정보 교환에서 특히 중요하다. 비정형 정보는 수치로 명확히 표현되기 어렵고,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며, 쉽게 검증되지 않는다. 기업의 향후 전망, 전략 방향, 경영진의 판단과 확신은 숫자만으로 완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따라서 투자자는 경영진이 이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질문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말 속에 확신이나 주저함이 드러나는지 등을 함께 살펴야 한다. 대면소통을 통해 투자자는 이러한 단서를 직접적으로 확인하고, 경영진의 설명을 평가할 근거를 얻는다. 본 연구에서는 대면접촉 제약에 따른 성과 약화가 기업 경영진과 펀드매니저 사이의 기본적인 신뢰 수준이 낮은 경우와 투자 관계가 아직 오래되지 않은 경우에 더 크게 나타났다. 이는 대면만남이 정보 비대칭성이 큰 관계에서 신뢰를 쌓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비정형 정보를 공유하고 해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함을 시사한다. 두 번째는 경영진이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경영진은 불확실성을 줄이고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하려는 유인을 가진다. 핵심은 같은 정보라도 어떤 맥락과 논리로 제시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경영진은 같은 정보라도 기업의 강점, 향후 전략, 회복 가능성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사회심리학에서 제시하는 '인상 관리'와도 맞닿아 있다. 예컨대 실적 발표 이후 투자자들이 마진 하락이나 비용 증가를 우려할 때 경영진은 이를 일시적 조정이나 신규 사업 확대 과정의 비용으로 설명하며 향후 수익성 회복 가능성을 부각할 수 있다. 이때 투자자는 대면만남에서 설명의 내용뿐 아니라 어조, 표정, 시선, 질문에 대한 반응 등을 함께 관찰하며 신뢰도를 평가한다. 따라서 대면 만남은 긍정적 메시지의 전달 통로인 동시에, 투자자가 그 메시지의 타당성을 가려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펀드매니저의 투자 결정에서 이 해석과 일치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대면접촉이 제한된 이후 펀드매니저는 지역 주식의 매도보다 매수 타이밍에서 더 큰 성과 약화를 보였다. 이는 대면소통이 기업의 긍정적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특히 중요하며, 이러한 정보가 펀드매니저의 매수 판단과 더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CEO 보상체계가 주가 변화에 더 민감한 기업일수록 지역 주식의 투자 타이밍의 약화가 더 크게 나타났다. 이는 대면만남 중 경영진의 인상 관리와 긍정적 비정형 정보의 전달이 펀드매니저의 매수 판단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함을 시사한다. ■AI 시대에도 대면소통은 여전히 중요 물론 이러한 결과가 대면만남이 언제나 온라인 소통보다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전자공시, 온라인 설명회, 화상회의는 시간과 이동 비용을 줄이고 정보의 접근성을 넓혔다. 인공지능 기술 역시 방대한 공시자료와 회의 내용을 빠르게 정리하고 분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본 연구 결과는 기술이 정보의 양과 전달 속도를 높이더라도, 투자자가 그 정보를 어떤 맥락에서 이해하고 얼마나 신뢰할 것인지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디지털 소통의 과제는 대면만남을 단순히 대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면소통이 제공하던 질의응답의 깊이와 신뢰의 단서를 디지털 환경에서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에 있다. 이러한 관점은 기업의 투자자 관계 활동에 시사점을 준다. 최근 주주총회, 투자자 간담회 등 기업과 투자자가 만나는 주요 소통채널에서 온라인 또는 하이브리드 방식의 활용이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더 넓은 투자자층이 기업 정보와 경영진의 설명을 접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소통 방식의 디지털화가 곧 소통의 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IR은 단순히 정보를 더 많이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기업의 전략과 위험, 경영진의 판단이 어떤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시장이 해석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다. 이러한 논의는 개인투자자의 주식 거래가 활발한 한국 자본시장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특히 개별 종목 거래에서는 단기 주가 흐름, 시장 분위기, 온라인상의 투자 의견 등이 기업의 펀더멘털에 대한 판단보다 더 크게 작용할 수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투자자가 기업의 펀더멘털 분석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공시와 뉴스를 단순한 매매 신호로 받아들이기보다 기업이 관련 정보를 어떤 맥락에서 설명하는지 함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경영진이 전략과 위험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질문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 설명이 일관성을 갖는지도 기업의 펀더멘털을 해석하는 단서로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기술은 자본시장의 정보 환경을 계속해서 바꾸고 있다. 투자자는 더 많은 자료를 더 빠르게 접하고 분석한다. 그러나 정보가 풍부해지고 전달 속도가 빨라지더라도 투자자는 여전히 비정형 정보를 맥락 속에서 해석하고 그 신뢰성을 판단해야 한다. 정보를 얻고 해석하는 경로는 다양하지만, 본 연구는 현재의 기술 환경에서도 대면소통이 고유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기술이 정보전달의 속도와 범위를 넓힐수록 대면소통은 정보의 양이 아니라 그 의미를 이해하게 하는 창구로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pride@fnnews.com한미재무학회(KAFA)는 지난 1991년 미주지역 재무 연구자들의 학술적 발전 및 상호교류 증진을 목적으로 발족한 학술단체다. 30여년간 발전을 거듭해 현재 미주는 물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과 유럽, 호주 지역 한인 연구자들의 모임으로 발전했다. 파이낸셜뉴스는 지난 2007년부터 한미재무학회의 학문적 성취를 장려하기 위해 KAFA를 후원하고 있다.

[포럼] '참교육'과 '감정코치 K'

요즘 넷플릭스에서 세계적 인기를 끄는 K-드라마 '참교육'에 대한 찬반 논의가 뜨겁다. 정의가 무너진 학교에 교권보호국 소속 주인공이 나타나 가해자에게 폭력과 공포를 그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되돌려주는 방식을 취한다. 그 결과 학교에는 즉각적인 평화와 질서가 찾아오고, 가해자는 혹독한 처벌을 받는다. 이 통쾌한 응징은 시청자에게 사이다처럼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위기의 학교에 해결사가 방문한다는 설정이 똑같은 작품이 이전에 하나 더 있었다. 2014년 필자가 감수한 만화 시리즈 '감정코치 K'다. 서울시와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우수한 한국 만화'로 선정한 작품의 설정은 '참교육'과 동일하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동원되는 해결 방법은 정반대다. 아이들의 문제 행동을 일종의 '살려달라는 처절한 비명'으로 인식한다. 비뚤어진 행동의 본질적인 이유를 찾아내어 내면에서부터 스스로 변화하게 돕는 방식이다. 다만 해결 과정이 '빨리빨리'를 원하는 우리에게 고구마처럼 답답해 보인다. 인공지능(AI)에 둘 중 무엇이 더 현실적 해결책인지 물어보니 "학교폭력이라는 거친 현실 앞에서 우리는 가끔 참교육식의 즉각적인 단죄에 열광하지만, 교육의 본질과 한 인간의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고민할 때 '감정코치 K'가 정답이다"라고 한다. '참교육'이 만든 평화는 두려움에 의한 순종과 초법적 처리이며, 오히려 악순환의 불씨가 된다. 과거 체벌과 촌지로 얼룩진 교육을 경험한 세대가 오늘날 학교와 교사에 대한 신뢰를 잃고 대립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서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미국 질병관리본부가 1만7000명을 대상으로 20년간 진행한 방대한 종단연구는 청소년과 성인의 행동 문제의 원흉으로 '아동기 부정적 체험'을 지목한다. 비록 학교에서 불거진 문제라 할지라도 생태계가 아니라 사건으로 접근하는 미봉책은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고립과 단절을 부추기는 AI 생태계일수록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법과 힘의 군림이 아닌 인간적 연결이다. 하지만 두 시리즈 사이에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학교 현장은 너무 황폐해졌다. 우리보다 한 세대 먼저 교육 황폐화를 겪은 몇몇 외국에서는 별다른 논쟁 없이 이 드라마에 열광한다. 손쓸 타이밍을 놓쳐 학교의 자정능력을 완전히 상실했기에 외부의 힘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참한 현실을 반영한 결과다. 반면 한국에 치열한 찬반 논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교육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는 희망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증거다. 속 시원한 판타지에 현혹되기엔 섣부르다. 아직은 어른들이 '싸다구'를 날리는 해결사가 아니라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감정코치가 되어주어야 할 때다. 그러나 교권보호국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또 하나의 기구를 신설하는 게 아니라 현존하는 교육지원청, 교육청, 교육부, 국가교육위 자체가 교권보호국이 되어야 하겠다. 누군가를 학교 현장에 파견 보내는 게 아니라 교육당국 책임자들이 학교에 직접 가보고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그래서 학생과 교사와 학부모가 사건 해결사 때문이 아니라 교육 자체가 모두에게 가치 있고 소중해서 학교에 가는 게 희망적이어야 하겠다. 조벽 고려대 석좌교수·HD행복연구소 공동소장

[fn광장] 한국은행 2008년의 교훈

중앙은행의 가장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미래를 내다보고 통화정책을 운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제는 수많은 변수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시스템이고, 결정적인 사건은 언제나 예상 밖의 곳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통화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를 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능력이다. 2008년 여름의 경험은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 한국은행의 최대 고민은 인플레이션이었다. 국제유가는 배럴당 140달러에 육박했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를 넘어섰다. 이에 따라 한국은행은 2008년 8월 기준금리를 5.0%에서 5.25%로 인상했다. 그러나 불과 한 달 뒤 미국의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면서 세계 경제는 금융위기 국면으로 빠져들었다. 인플레이션을 걱정하던 세계 경제는 순식간에 디플레이션과 금융위기 국면으로 진입했다. 한국은행은 2008년 10월에 기준금리를 5.25%에서 4.25%로 내리는 등 '빅컷'을 단행했다. 그 후 2009년 2월에는 기준금리가 2.0%까지 인하되었다. 당시 누구도 그런 급격한 정책 전환을 예상하지 못했다. 최근 한국은행의 움직임을 보면서 문득 2008년이 떠오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 5월 경제전망에서 올해 성장률과 물가상승률 전망을 동시에 상향 조정했다. 중동 정세불안으로 국제유가가 상승했고, 원·달러 환율은 1500원을 넘어섰다. 원화 약세는 수입물가를 자극하고, 이는 다시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은행 입장에서는 물가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성장 측면에서는 전혀 다른 그림이 나타날 수 있다. 반도체 수출 증가에 힘입어 상반기 성장률은 예상보다 높게 나타나고 있지만 하반기로 갈수록 성장세는 빠르게 둔화할 확률이 높다. 수출 증가가 경제 전체로 확산되지 못하는 가운데 내수는 여전히 부진하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의 물가 상승이 수요 과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 물가 상승은 국제유가와 환율 상승이라는 공급 충격의 성격이 강하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금리 인상으로 대응하면 물가 안정 효과보다 성장둔화와 금융불안이라는 부작용이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 최근 미국경제연구소(NBER)의 한 논문('원자재 충격에 중앙은행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도 비슷한 결론을 제시했다. 원자재 수입국에서는 공급 충격에 대해 중앙은행이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가 상승은 물가를 올리는 동시에 성장률을 낮춘다. 이때 금리까지 인상하면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면서 경기침체 위험이 더욱 커질 수 있다. 한국은 대표적인 원자재 수입국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은행은 물가와 성장이라는 전통적 딜레마를 넘어 환율과 금융안정이라는 새로운 과제까지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의 변화는 한국은행이 더욱 신중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미국에서는 케빈 워시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체제가 출범하면서 지난 15년간 지속돼 온 유동성 중심 질서가 변화를 맞고 있다. 시장은 여전히 금리 인하를 기대하고 있지만 Fed는 인플레이션과 재정적자, 국채시장 불안을 이유로 쉽게 완화정책으로 돌아서지 못하고 있다. 만약 미국의 장기금리가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면 한국 역시 독자적인 통화정책 운용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금리를 낮추면 자본유출과 환율 상승 압력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금리를 인상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한국 경제는 이미 높은 가계부채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문제를 안고 있다. 금리 인상은 단순한 경기둔화를 넘어 금융안정 문제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2008년의 경험이 보여주듯 미래는 언제나 의외의 곳에서 온다. 지금 세계 경제는 인공지능(AI) 혁명, 지정학적 갈등, 공급망 재편, 원자재 충격, 고부채 구조가 동시에 진행되는 복합 전환기에 들어서 있다. 이런 시대에 중앙은행은 단순히 물가만 관리하는 기관이 아니라 환율과 금융안정, 자산시장과 유동성까지 함께 고려하는 종합 안정화 기관으로 변화해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은행이 선택해야 할 길도 분명하다.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중앙은행은 없다. 그러나 변화하는 환경에 가장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시장의 신뢰를 유지하는 중앙은행은 있을 수 있다. 중앙은행의 진정한 경쟁력은 미래를 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예상 밖의 미래에 가장 잘 대응하는 능력에 있을 것이다. 김영익 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

[차관 칼럼] 공공조달 개혁의 성공 조건

영화 '인터스텔라'에는 강한 중력장 속에서 시간이 지구와 다르게 흐르는 장면이 나온다. 시간이 항상 똑같이 흐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쉽게 보여준 장면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시간도 때로는 상대적인 것 같다. 지금 세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빠르게 바뀌고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이 등장한 이후 변화의 속도는 우리 예상을 크게 앞지르고 있다. 기업의 생존전략과 정부의 작동방식도 원점에서부터 바뀌고 있다. 변화의 시기는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위기가 될 수도 있다.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속도와 실행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재의 자리를 유지하려면 최소한 변화와 같은 속도로 달려야 한다는 레드 퀸(Red Queen) 효과를 가슴에 새겨야 할 시기다.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공공조달도 전통적 역할에 머물 수는 없다. 종전에는 공공조달이 정부가 국민에게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때 필요한 물품, 서비스, 시설물을 효율적이고 투명하게 조달하는 데 초점을 뒀다면 지금은 국가정책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전략적 수단이 돼야 한다. 연간 225조원에 달하는 공공구매는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지난 1년 조달청이 추진해 온 공공조달 개혁도 바로 이런 고민에서 시작됐다. 조달청은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확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혁신제품을 발굴하고, 이들 제품이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고 과감하게 구매해 왔다. 평균적으로 조달청이 처음 시범구매한 금액의 6배 규모의 판매실적을 보였으며, 당초 시범구매 금액의 28배 규모 수출에 성공한 사례도 나타났다. 또한 유망한 AI 제품과 서비스가 공공조달시장에 쉽게 진입하도록 진입장벽을 낮췄다. 납품실적 요건을 폐지하고, 평가와 서류를 면제할 뿐만 아니라 가점 등 인센티브를 부여하거나 구매절차를 간소화해서 공공기관들이 더 많은 AI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하도록 하고 있다. 지방 주도 균형성장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올해 경기와 전북을 시작으로 지방정부가 지역 특성과 수요에 맞게 자율적으로 구매할 수 있도록 조달 자율화의 첫걸음을 뗐다. 비수도권 기업이 좀 더 많이 수주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도 마련했다. 비수도권으로 공장을 이전한 기업·인구감소지역에 소재한 기업 등에 가점을 부여하고, 실질적으로 비수도권 기업 간에 경쟁이 이뤄지도록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활용하게 된다. 공공조달의 기본은 다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며, 선택의 과정과 결과가 공정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계약을 이행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이들이 무분별하게 입찰에 참여해서 낙찰받고, 실제 계약 이행은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조달청은 낙찰예정자를 대상으로 실지조사를 해서 부적격자를 낙찰에서 배제하고 있다. 상반기 시범조사를 거쳐 하반기에는 본격적으로 실시한다. 국민주권정부 출범 이후 1년간 추진해 온 공공조달 개혁을 되짚어보니 보람과 아쉬움이 교차한다. 하지만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 조달청이 개혁을 추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시간의 상대성'이다. 국민의 시계와 조달청의 시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공공조달 개혁의 성공은 결국 조달청이 국민의 시계에 맞춰 일할 때 가능할 것이다. 백승보 조달청장

[fn광장] '월드모델'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인공지능(AI)이 로봇의 몸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월드모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월드모델은 다양한 형태의 데이터를 종합적으로 학습해 세상의 구조와 인과관계를 담는 피지컬 AI의 생각의 그릇이다. 월드모델 이야기는 백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동물 행동심리학자인 에드워드 톨먼의 1930년 논문에서는 미로를 경험한 쥐가 목표가 생겼을 때 더 빠르게 배운다는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환경에 대한 모델을 학습에 활용한다는 '인지 지도' 가설을 세웠고, 이후 의사결정과 학습의 뇌과학 연구의 뿌리가 되었다. 제어공학에서는 1970년대부터 모델 예측 제어라는 기술을 통해 시간지연 제어 시스템의 성능을 높여 왔는데 이를 작은 월드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매사추세츠공과대(MIT) AI연구소를 설립한 마빈 민스키는 1986년 '마음의 사회'라는 책에서 뇌가 외부 세계를 점진적으로 이해해 나가는 계층적 월드모델 개념을 제안했다. 곳곳에서 싹을 틔운 월드모델은 반도체라는 밭에서 덩치를 키우고, 피지컬 AI라는 제철을 만났다. 돌아오는 계절에 우리는 무엇을 수확하게 될까. 첫째, AI의 인지·추론·전략 수립 능력이 향상된다. 월드모델을 가진 로봇은 다양한 관점을 동일한 개념으로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행동하기 전에 미래를 시뮬레이션하여 시행착오를 최소화할 수 있다. 휴머노이드 로봇은 짐을 들고 경사로를 내려가기 전에 굴러떨어지는 상상을 하여 무게중심을 조정하고, 유리문이 잘 깨진다는 것을 알기에 천천히 움직이며, 바둑에서는 '이런 수를 둔다면 상대방이 어떻게 대응할까' 상상하여 행동하기 전에 최적의 전략을 세운다. 시장의 역학관계를 담은 월드모델을 가진 AI는 다음 분기의 시장 변화를 상상하며 사업 방향을 피버팅(전환)한다. 둘째, AI가 스스로 데이터를 모아 학습하며 진화한다. 지금까지는 인간이 가진 모든 데이터를 모으고 정제하여 AI를 학습시키고 월드모델을 구축했다면, 이제는 그 월드모델을 탑재한 로봇이 실제 세계에서 스스로 데이터를 모아 인간에게 제공하거나 자기 자신을 파인튜닝(미세조정)하는 세상이 열린다. 실험 분야, 특히 신소재나 반도체 분야에서 새로운 발견이 기대된다. 인간이 AI에게 제공한 월드모델을 이용해 새로운 발견을 하고, 확장된 월드모델을 인간에게 돌려주는 선순환이 발생한다. 스스로 진화하는 월드모델의 선순환 속에서는 AI가 창의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다. 이러한 AI의 월드모델은 우리 머릿속 월드모델과 비슷할까? 같은 경험을 했다고 같은 생각을 하지 않듯, 다르다. AI는 파운데이션 모델로 불리는 통합형 월드모델을 추구하는 반면, 뇌의 월드모델은 적어도 네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우선 직관이다. 물리적 세상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기에 정확하진 않지만 본능적이고 순간적인 판단에 필요하다. 그다음은 의사결정 모델이다. 이 역시 세상의 구조를 직접 활용하진 않지만 세상과 상호작용으로 발생하는 결과를 예측하는 간접적인 월드모델이다. 뇌의 피질하 영역 속에서 우리의 움직임과 습관을 만들어낸다, 셋째는 예측인지 모델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해마 시스템 속 격자세포와 장소세포는 현재 상황뿐만 아니라 나와 세상의 상호작용을 통한 결과 예측에도 관여한다. 기억을 재생하지 않는 의사결정 모델보다는 느리지만 기억세포가 주변 환경의 구조를 표상하므로 작지만 정교한 월드모델로 볼 수 있다. 넷째는 전두엽의 인지 모델이다. 이 뇌 영역은 외부 세상의 구조를 명시적으로 담고 있고, 사건 전개의 상상에 직접 관여한다. 할 일이 많아 가장 느리지만 가장 정교하다. 뇌는 매 순간 이 모든 것들을 버무려 피상적이지만 빠르고, 때로는 느리지만 정교한 월드모델을 만들어 낸다. 종합해보면 AI의 월드모델은 뇌와 다르다. 지금 인간이 가장 빠르게 퇴보하는 길은 AI가 던져주는 지식의 조각들로 자신의 월드모델을 채우는 것이다. AI가 하사하는 영상과 젠슨 황의 내한공연에 도파민 터지고, 바이브 코딩과 하네스 엔지니어링 결과물을 공유하고, AI로 만든 자료를 발표하는 자신에게 취해본 적이 있는가. 오늘 AI 음주를 위해 지불한 '토큰'은 내일 사라질 내 월드모델의 '몸값'이다. 휴먼 월드모델이라는 주식이 있다면 지금이 공매도 타이밍이다. AI 월드모델에 대한 열정과 인간 가치 상실이라는 냉정함이 교차한다. 바보 같지만, 미래의 내 머릿속에는 오늘의 선택을 후회할 능력을 가진 월드모델조차 남아있지 않을 테니, 기분만큼은 괜찮을 거라 스스로 위안해본다. 이상완 KAIST 신경과학·인공지능 융합연구센터장

찜통 더위에도 가마꾼이 된 동네 사람들… 축제로 깨어난 마츠리 [전경수의 요지경 日本]

'마츠리'라고 하면 가무가 동원된 방식의 축제라고 생각하는데, 결단코 아니다. 팡파레와 행진으로 시작하는 페스티벌이라기보다는 멕시코나 페루의 피에스타에 가까운 모습이다. 그곳에서 먼저 살았던 분들의 돌아가신 영혼을 맞이하여 위로한다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접신용의 술을 마시고 숙취한 상태로 춤을 추는 모습들이 어울린다. 일본에서 마츠리는 '祭り'라고 쓴다. 오래된 동네의 연중행사표를 보면, 일년 내내 마츠리와 관련된 행사들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다. 삼계만령 사상으로 표현되는 애니미즘 최강의 사회가 일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만령을 위한 공양이 마츠리로 행제될 수밖에 없다. 마츠리의 나라 일본… 지역 연례행사 그 이상의 의미 일본 최초로 마츠리를 연구한 민속지는 자그마치 1500쪽이 넘는 '하나마츠리'(花祭, 1930년)이며, 그 저자는 아이치현의 동부인 미카와(三河)를 고향으로 한 하야카와 코우타로다. 천룡천 계곡의 산골 동네에서 정월 초에 며칠간씩 이어지는 마츠리의 절정은 7~8명의 가면 쓴 청년들이 물이 끓고 있는 가마솥 주변을 돌면서 춤을 추는 '유바야시'(湯ばやし) 과정이고, 마지막에는 마츠리에 참여한 관객들에게 복을 나눠주는 상징행위로서 끓는 물을 흩뿌리는 겨울 마츠리다. 커다란 도끼를 들고 춤을 추는 적색 가면의 '사카키오니'가 어린이들의 등을 살포시 밟아주는 '헨베'(反閉)는 역병귀신을 쫓아내고 무병 장수하라는 주술로서, 오랫동안 기억으로 남는 체험이다. 일본 사회변동의 역동성은 마츠리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에, 마츠리가 도시인류학이란 관점으로 일본을 연구하는 안성맞춤인 주제라는 인식도 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요코하마 롯카쿠바시의 동네에도 '초나이카이'(町內會)의 공지판에 봄부터 스기야마신사(杉山神社)의 '나고시오하라이'(夏越大祓)의 안내문이 나붙었다. 마츠리로 여름 더위를 잘 넘기자는 뜻이다. 혈연의 조상 제사에만 몰입하는 세계관의 한국인들은 죽었다 깨도 공감하지 못하는(이해는 하겠지만) 부분이 지연 관계의 일본사회다. 한국인들에게 혈연의 의미가 그토록 중요하다면, 일본인들에게는 지연 관계의 인생살이가 핵심이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장소의 의미가 이토록 중요할까. 땅으로 연결된 인생살이의 의미가 피로 연결된 인생살이만큼 중요하다는 논리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요코하마의 츠루미구에 있는 스기야마신사에서 개최된 마츠리에는 13대의 '미코시'(神輿)가 무도 행렬을 이었고, 늦은 오후의 약속된 시간에 스기야마신사 앞에 정렬해 신관이 주제하는 제사 과정에 참여한다. 이후, 모두가 함께 접신하는 술판이 이어진다. 지역사회의 모든 문제들이 구조적으로 착종되어 있는 삶의 장소로서 이웃관계와 이웃들의 연결인 공동체가, 지역을 창조한 신에 의해서 매년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의 제사가 마츠리다. 신이 정좌한 자리에, 신의 허락에 의해서 사람들이 주민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신앙이다. 신과 주민들은 '우지카미'(氏神)와 '우지코'(氏子)의 관계다. 마츠리에 참여하면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신사의 조직도 오야붕과 코붕 관계를 유지한다. 카나가와현 일대에 자리잡은 스기야마신사의 분원에 해당되는 나마무기 지역의 메이신신사(明神神社)에서는 본사의 '레이타이사이'(例大祭)에 참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별도의 날을 받아서 '쟈모가모마츠리'(蛇も蚊も祭)를 한다. 마츠리의 구성과 내용 그리고 진행방식이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소학교의 운동장을 빌려서 진행하는 마츠리에는 네 개의 구역으로부터 각각의 팀들이 창포와 짚을 엮어 만든 초록색 머리를 한 뱀 모습의 긴 줄을 매고, 편싸움을 하는 모습을 연출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동일한 츠루미구에 속해 있지만, 마츠리상으로는 별도의 삶의 공간이 존재한다. 일본의 도시발전사와 궤를 함께하는 마츠리의 분포와 구성이 복잡한 실타래처럼 엉켜 있고, 과거 해변의 매립지대가 도시로 변한 곳에 이주해온 사람들의 정착 과정과도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쟈모가모마츠리는 도시형성 이전의 토박이들 중심으로 진행하고 있는 마츠리임에 대해서 레이타이사이는 도시 확장과 '혼죠도리잇쵸메'(本町通一町目) 자치회처럼 외국인 거주자들의 참가에 의한 글로벌 현상의 장면까지 연출하고 있다. 사람이 모여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마츠리의 일본사' 과정이 잘 드러난다. 종교민속학자 나카야마 타로가 편찬한 '일본민속학사전'(1940년)에는, 나가노에 총본사가 있는 스와대사(諏訪大社)의 '온바시라마츠리'(御柱祭)의 중요한 과정은 온바시라 4본의 신성한 기둥을 세워서 사방 경계를 한다고 썼다. 그 스와대사의 요코스카 분원의 온바시라마츠리는 총본사로부터 신성화된 절차를 밟은 온바시라 2본을 분양받아서 가지고 오는데, 이 과정이 '사토히키'(里曳き)다. 요코스카의 '우지코'(氏子)들이 신사의 신관인 '구지'(宮司)의 지휘하에 기중기를 동원하여 신사의 경내에 세우는 '타테온바시라'(建御柱) 행사가 마츠리의 절정을 이룬다. 지역의 정치가들이 유권자들에게 얼굴을 내밀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마츠리의 원만한 진행을 위한 당연한 물주의 역할을 한다. 천년 역사, 교토의 기온마츠리… 삿포로 요사코이도 이색적 마츠리를 구성하는 다양한 행사들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서는 촘촘하게 연결된 여러 단계의 부문별로 담당자들이 배정되어 있고, 수개월 전부터 담당자들은 준비 모임을 거듭한다. 그 과정이 함께 살아가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시집간 딸들도 자녀들을 데리고 돌아와서 미코시를 함께 메고 춤을 추는 주민 참여의 행사가 마츠리인 일본에서는 이미 마츠리경제의 생산성에 관한 연구도 적지 않게 진행되어 있다. 후덥지근하기로 이름난 교토의 여름을 달구는 기온마츠리는 그 역사적 깊이와 함께 이미 세계적인 명물이 되었고, 새로운 형태의 마츠리로 자리잡은 코우치와 삿포로의 요사코이도 그 경제적 효과는 이미 증명되었다. 관 주도 동원 형식의 축제로 가수의 출연 교섭에 안간힘을 쓰면서 애꿎은 공무원들만 닦달하는 한국의 지방정부들이 제대로 한 수를 배울 수 있는 부분이지만, 이것은 결코 흉내를 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기고] 에너지주의, 절약 넘어 효율의 시대로

최근 미국과 이란간 휴전 논의가 진행되고는 있다. 하지만 전쟁이 종식되더라도 우리나라의 원유 수급 안정화에는 상당 시간이 걸릴 가능성이 높다. 이번 고유가 위기속에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불안정한 중동 정세로 인한 유가의 급등 속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을 체감했고, 인공지능 기술의 급변 속 에너지의 생산과 소비의 효율화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았다. 에너지 수입의존도가 94% 안팎에 이르는 우리 현실에서는 '아끼고 줄이는' 에너지 절약이 절실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에너지에 관한 인식 대전환이 필요하다. 그동안 우리는 특정한 에너지 위기 상황에서 절약 실천을 권고하는 소통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 발 더 나아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습관'의 새로운 소통 접근이 필요하다. 우리는 과거 고유가와 공급망 위기 속에서 늘 국민과 기업의 자발적 참여로 어려움을 극복해 왔다. 모두가 에너지 절약을 위한 실천 방법을 어느 정도는 다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불필요한 조명 끄기에서부터 냉난방 적정 온도 유지 등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위기 때만 하는 절약을 넘어 평소에 각 개인이 자발적이고 창의적으로 에너지 사용의 효율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에너지에 주목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실천을 통해 어떻게 하면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는 방식의 소통이 필요하다. 무조건 아끼고 줄이는 절약을 넘어, 필요한 에너지는 쓰되 더 똑똑하게 에너지를 소비하는 실천이 더욱 절실하다. 지난 2년간 진행했던 '온도주의' 캠페인에서 강조했듯 각 개인의 에너지 사용 출발점은 온도를 의식하는 것이었다. 여름철 실내 온도 26도를 기준으로 맞추고, 쿨 맵시로 체감온도를 낮추는 실천, '문열고 냉방' 자제 등은 기본이다. 하지만 절약 그 이상의 효율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시간대별 사용에 주목해야 한다. 태양광 발전이 줄어드는 오후 5시부터 8시 사이 전력피크 시간대 전기소비를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세탁기와 청소기처럼 시간 조정이 가능한 기기 사용은 전력수요가 낮은 주말로 옮기는 것만으로도 전력망 안정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올해 새롭게 추진되는 에너지 대전환 인식 개선 캠페인의 메시지는 '에너지 주의 시대, 에너지를 보다'이다. 첫째는 에너지를 의식하자는 것이다. 보이지 않던 에너지에 주목하고 각 개인이 에너지 안보의 주체라는 소명 의식을 갖고 에너지를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고민해 보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두 번째는 에너지 사용을 보다 더 개선하자는 것이다. '에너지를 보다' 뒤에 괄호( )를 넣어 보자. 에너지를 보다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노하우)와 같이 각자 자신만의 문장을 만들어 볼 수도 있다. 올여름, 에너지 절약을 넘어 에너지 효율이라는 과제를 마주하며 우리 스스로 빈 괄호를 채워 나가는 작은 실천에 동참해 보았으면 한다.이종혁 광운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포럼] 과정의 디자인, 길 위에서 길을 묻다

얼마 전 지하철역 앞을 걷다가 오랜만에 그 말을 들었다. "도를 아십니까?" 예전 같으면 웃으며 지나쳤겠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그 말이 오래 남았다. 도(道)는 길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길 위에 서 있다. 길을 찾기도 하고 잃기도 하며, 때로는 돌아가고 멈추기도 한다. 인생은 목적지보다 그 길을 걸어가는 과정에 더 가까운지 모른다. 요즘 세상은 유난히 빠르고 시끄럽다. 주식과 인공지능, 새로운 기술이 하루도 쉬지 않고 사람들을 흔든다. 모두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지름길은 유혹이 되고, 과정은 종종 생략된다. 그러나 인생에 정말 지름길이 있을까. 6·3 대선 이후의 정치 풍경도 비슷해 보인다. 승패는 갈렸지만 갈등은 여전하다. 서로 다른 길을 말하지만 정작 길의 방향보다 결과와 속도에 더 몰두하는 듯하다. 개인도 사회도 과정이 흔들리면 결국 길 위에서 길을 잃게 된다. 철학의 본래 뜻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다. 정답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놓치지 않는 태도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새 질문보다 답을, 과정보다 결과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은 디자인을 결과물로 이해한다. 하지만 좋은 디자인은 완성의 순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질문하고, 관찰하고, 실패하고, 다시 수정하는 시간 속에서 탄생한다. 결국 디자인의 본질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나는 오랫동안 도시와 공간, 색채와 디자인을 연구해 왔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도시도 사람도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성장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서울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역시 그랬다. 처음에는 낯설고 이질적이라는 평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건축과 도시는 완공되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만나고 기억을 품고 시간을 축적하며 자신의 의미를 만들어간다. 오늘의 DDP는 건물이 아니라 경험과 문화가 자라는 플랫폼이 되었다. 도시의 공간 또한 하나의 가능태로 바라보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가능태와 완성태의 존재로 설명했다. 도토리 안에는 이미 거대한 참나무가 들어 있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자기 안에 아직 피어나지 않은 가능성을 품고 살아간다. 인공지능은 수많은 답을 내놓는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지 삶의 목적까지 대신 정해주지는 못한다. 그 질문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앞으로 더 중요한 것은 기술보다 자기 기획력일 것이다. 니체는 말했다. "목적지보다 중요한 것은 춤추며 가는 길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목적지만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좋은 삶은 가장 빠른 길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장 정직한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실패와 시행착오조차 우리가 샤랑해야 할 길의 일부다. 되돌아보니 그렇다. 도토리가 하루아침에 참나무가 될 수 없듯 사람도 삶도 공간도 시간을 품으며 성장한다. 오늘, 내 안의 작은 도토리를 떠올려 보자. 그것을 정성껏 키워 한 그루의 참나무로 만드는 일, 그리고 그 나무들이 모여 더 건강한 숲이 되어 누군가의 쉼과 숨결이 되어주는 일, 그 과정이 결국 한 사람의 삶을 빛나게 하지 않을까. 김현선 서울디자인재단 이사장

[fn광장] 탈모약 건보 적용, 정책인가 정치인가

요새 가장 주목받는 세대는 단연 2030세대라고 할 수 있다. 선관위의 투표용지 부족 문제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항의하는 세대가 바로 2030세대이고, 과거와 달리 지금의 2030세대가 상당히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들은 주목받고 있다. 이 세대의 보수 성향은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번 지방선거에서 보수 진영의 오세훈 시장이 다시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를 2030세대에서 찾아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보수 성향이 강한 이들 젊은 세대가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덕분이라는 것이다. 물론 정확한 분석을 위해서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발표하는 세대별 투표율을 확인해야 하겠지만,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선관위 상황을 보면 언제 해당 통계를 볼 수 있을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까지의 출구조사 결과 등을 참고하면, 이번 선거에서 이들의 역할을 무시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데 선거가 끝난 지금 시점에서 다시금 이들 세대가 주목받고 있다. 다름 아닌 탈모약 건강보험 적용 여부 때문이다. 보건복지부가 20대부터 34세까지의 청년들이 탈모약을 복용할 경우 건강보험이 약값의 일정 부분을 부담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나섰다. 물론 아직은 공론화 단계이기는 하지만 이런 언급 자체가 정부에서 나왔다는 점은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생각한다. 정부는 탈모약의 건강보험 적용을 언급하면서 "탈모는 생존에 관한 문제"라는 입장을 밝혔다. 탈모 때문에 취업도 어렵고 연애도 힘들기 때문에 결국 생존 문제로 이어진다는 주장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탈모로 고민하는 젊은이들의 고통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고민을 건강보험 적용으로 일정 수준 해결하겠다는 정부의 입장이 상당한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외모 때문에 취업과 연애가 힘든 사람이 있다면 성형수술도 건강보험 적용 대상이 돼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또 모발이식수술도 건강보험이 부담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탈모로 고통을 느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탈모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유사한 고통'을 느끼는 이들이 다수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유독 탈모로 고민하는 이들, 그중에서도 20대 이상 34세까지의 젊은이들만을 대상으로 건강보험 적용을 고려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점은, 탈모와 같은 외모와 관련된 고통은 그 정도가 주관적·심리적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어떤 이는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으로 받아들이지만, 어떤 이는 그 정도로 심각하게 느끼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바로 탈모 문제라는 것이다. 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생존' 문제는 심리적·주관적 요소가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객관적·의학적으로 생존 문제는 증명 가능하다는 것이다. 생존 문제는 과학적 영역이기 때문이다. 또한 간접적으로 생존과 관련된 사안도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난청 환자의 경우 소리를 잘 듣지 못해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데, 특히 어린이 난청 환자의 경우 그럴 확률이 높을 수 있다. 인공와우 삽입 수술을 받은 어린이 난청 환자의 경우 5년에서 7년에 한 번씩 인공와우를 교체해 주어야 하는데 한 번 수술비용이 1000만원이 넘는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건강보험은 단 한 번의 수술비만 지원하고 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탈모를 건강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시키지는 않지만, 인공와우 수술은 횟수와 상관없이 지원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집을 팔지 않고서는 치료비를 부담할 수 없는 희귀병 환자가 다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들이야말로 생존이 달린 문제인데, 이런 희귀병 환자들에 대한 건강보험 지원은 뒤로한 채 탈모로 고생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건강보험을 적용한다는 것은 논리적 타당성을 얻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정부 주장에 대해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제기하는 측도 생기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그런 주장을 믿고 싶지 않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의도를 가진 것이라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지금 젊은이들은 '위선'과 '불공정'에 분개하여 보수 성향을 띠게 된 것인데, 이런 젊은이들에게 탈모 지원을 내세운다고 해서 이들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직은 공론화 단계이니 정부는 일부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한 탈모 건강보험 적용 문제를 다시 신중히 검토하기 바란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