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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다시 일어선 군사대국 일본

필자는 1995년에 '일본이 일어선다'라는 책을 출간했다. 운이 좋아 출간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996년 일본의 덕간서점이라는 출판사에서 '다시 부활하는 군사대국 일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는데 사회과학도서로는 흔지 않게 1만3000여권이 팔렸다고 번역자에게 전해 들었다. 서문의 첫 문장이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로 시작한 이유는 일본은 자위대라며 취약한 군사력이라고 우겨왔지만 민간분야에 녹아 있는 최첨단기술은 군사부문에도 공히 사용되는 범용기술이기 때문에 군사기술을 분석하여 군사기술대국이라는 증명을 한 것이다. 도쿄도지사를 지냈던 이시하라 신타로씨는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The Japan That Can Say No)'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그 당시 일본은 F-2 전투기를 개발하고 있었던 바, F-2 전투기의 날개를 복합일체성형기술을 사용해 탄소섬유수지로 이음매 없이 통자로 찍어낸다고 적고 있다. 가볍고 튼튼한 날개 덕분에 일본의 F-2 전투기는 공중에서 선회하려면 반경 1600m면 되고, 그 당시 미국의 최고 전투기인 F-15는 반경 5000m가 필요해 공중전에서 F-15 전투기보다 일본의 F-2가 빨리 돌아 F-15를 뒤쪽에서 공격할 수 있으니 일본 전투기를 이길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의 최첨단 탄소섬유기술을 미국에 넘기라고 강요하니 이시하라씨는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 제목을 쓴 것이다. 이 책은 미국에서도 번역되어 미국에 충격을 안긴 책으로도 유명했다. 물론 그 이전에 '퍼시픽 커뮤니티(Pacific Community)'라는 학술지에 일본의 군수산업에 대한 논문이 실렸는데 그 논문에 따르면 미국의 대륙간탄도탄도 일본이 생산하는 갈륨비소 반도체가 없으면 정확한 공격이 어렵다고 평가한 바 있다. 출간 이후 31년이 지난 2026년 현재 일본은 사실상 군사대국이 되었고, 이 변화는 더 커지고 있다. 31년 전에 일본국제교류기금 초청으로 일본 방위연구소에서 1년 가까이 연구하며 일본자위대를 연구하게 되었고 민간에 녹아 있는 군사기술의 막강함을 담아낸 책의 제목이 '일본이 일어선다'이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하면서 군사력이 완전히 해체되었지만 일본이 반드시 군사대국으로 일어설 것이라는 예측을 했었는데 오늘날 군사대국 일본으로 부활한 것을 목도하면서 30여년 전 예측이 증명되면서 연구의 보람도 느낀다. 그러면 2026년 일어난 일들을 들여다보자. 일본은 중국을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조기경계무인기 도입을 결정하고, 필리핀에 군함을 수출하는 데 양국이 합의했다. 사정거리 1000㎞가 넘는 중거리미사일도 일본 도쿄 근처와 남쪽 규슈에 배치하고 북한 전역이 사정권 안에 들어간다.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요미우리 여론조사도 국민의 74% 이상이 찬성해 2차 대전 이후 최초로 높은 국민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군수산업 강화도 국가정책으로 내세웠는데, 이미 일본의 군수산업은 세계 정상급이다. 미사일, 잠수함, 이지스함, 전투기 등이 세계 정상급인데 2026년에 특별히 공식적인 발표들을 하고 있어 한반도를 둘러싼 군비경쟁이 시작되었음을 유념하고 한미동맹 강화와 자주국방력을 더욱 키워 나가야 하겠다. 김경민 한양대 명예교수

[fn광장] 직장인 떠난 마음 붙잡는 '진동서사'

최근 조용한 퇴사가 만연하고 있다. 직장을 실제로 그만두지는 않지만, 받는 급여와 정해진 근무 시간만큼만 최소한으로 일하는 업무태도를 가진 사람이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회사에 뼈를 묻겠다는 열정이나 승진에 대한 집착 대신 워라밸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직장에 몸은 남아 있으나 마음은 떠나버린 '심리적 퇴사', 직장에 대한 열정으로부터의 은퇴자들이다. 이에 기업도 대놓고 해고하진 않지만, 해당 직원에게 중요한 업무를 주지 않거나 연봉 인상이나 승진 대상에서 슬쩍 제외해 스스로 나가게 만드는 '조용한 해고'로 대응하기도 한다. 반대로 이렇게 느슨해지는 열정을 붙들어 맬 수 있는 해법이 무엇일지 고민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먼저 연봉을 높이면 이들의 의욕을 일정 기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높아진 임금은 단기적 효과는 있으나 그 금액에 금세 익숙해지고 더 높은 임금을 계속 갈망하게 된다. 다음으로 직장 분위기나 환경, 복지 등을 과감히 개혁하는 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익숙해지고 나면 당연한 조건처럼 느껴진다. 이보다 더 근원적인 변화가 있어야만 심리적 퇴사자들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 조직이 설정한 목표와 가치에 대한 심리적 애착과 헌신적인 자세, 즉 조직몰입을 높이는 방법론을 고민할 때다. 조직몰입을 위해서는 구성원이 조직을 단순한 고용 관계를 뛰어넘는 의미 있는 공동체로 인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에 심리학자인 에머리대학교 마셜 듀크 교수와 로빈 피버시 교수는 조직을 단단하게 묶어주고, 특히 위기상황에서 결속력을 가져오고 구성원의 회복탄력성을 높여주는 요인으로 '진동서사(Oscillating Narrative)' 개념을 제시했다. 조직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하나의 흐름으로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서사적 경험을 구성원에게 제시하고, 특히 위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다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는지와 같은 기업의 오르막과 내리막의 진동 스토리를 전달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조직의 역사를 단순히 연혁이나 성과 목록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문제의식, 갈등, 선택, 전환, 그리고 누적된 의미를 살아 있는 이야기로 조직 구성원에게 경험시키는 일이다. 물론 모든 조직에는 그 나름의 매뉴얼이 있지만, 사람을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매뉴얼 밖의 이야기다. 위기를 어떻게 넘겼는지, 선배가 어떤 시행착오를 겪었는지, 조직이 무엇을 포기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서사는 구성원의 감정에 각인된다. 반대로 영웅 서사를 과도하게 강조한다거나 작았던 조직이 이렇게나 크게 성장했다는 것만 강조하는 상승형 서사는 압박감이나 소외감을 유발하게 된다. 서사의 효과는 한두 사람의 미화된 성공담을 반복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완성된 조직보다 성장하는 조직이 더 큰 공감을 얻는다. 실패와 갈등, 우회와 수정의 과정이 포함된 진동서사가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창업자가 가졌던 문제의식, 조직이 겪은 위기와 극복 과정, 고객과의 상호작용에서 얻은 교훈, 그리고 현재의 전략이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되었는지를 함께 제시하면 구성원은 자신의 역할을 보다 넓은 서사 속에서 이해하게 된다. 실제로 조직의 이야기를 개인의 업무 경험과 연결하는 작업은 몰입을 촉진하는 중요한 심리적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구성원은 조직이 완벽하기 때문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도 의미 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느낄 때 더 깊이 연결된다. 조직이 구성원에게 단순히 일을 시키는 곳이 아니라 나의 노력과 기여가 조직의 서사 속에서 의미를 갖는 공간으로 느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진동형 서사를 효과적으로 작성하고 기록하여 나가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또는 구성원 개인이 문제를 자각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회사에 대한 헌신과 열정을 말로만 강조하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 조직몰입을 높이고자 한다면 복지와 제도만 논할 것이 아니라 조직이 어떤 이야기로 기억되고, 어떤 이야기로 살아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조직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나의 의미 있는 장면 안에서 인식하게 되고 과거의 역사, 그리고 현재의 자신, 미래의 조직과 연결하게 된 구성원은 저절로 몰입하는 법을 익히게 될 것이다. 지우고 싶은 과거의 흑역사를 숨기는 대신 이 실패를 통한 교훈과 극복하게 된 계기와 방법론을 알려줄 때 구성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이야기에 공감한 구성원은 떠나지 않는 법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안전보건공시, 규제를 넘어 기업 경쟁력이 되려면

[파이낸셜뉴스]그동안 우리 기업은 GRI(지속가능경영 관련 가이드라인을 제정하는 국제기구), ESG·CSR 평가지표와 ISO 45001 등 국제 기준에 따라 안전보건 정보를 자율적으로 공개해 왔다. 그러나 개정 산업안전보건법 제10조의2에 따른 '안전보건현황공시'는 자율적 공개나 선언을 넘어 국가가 요구하는 법정 의무이자, 기업의 안전보건관리 체계를 내·외부 이해관계자가 상시 감시하고 평가할 수 있는 공식 자료가 됐다. 2027년 4월 첫 공시를 앞둔 지금, 단순히 제출 서류를 준비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이번 제도 도입을 2028년 지속가능성 공시 시대에 대비해 안전보건 데이터와 내부통제, 리스크 관리체계를 재정비하는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 ■'선제적 예방활동'이 주된 목적...'예방 중심 관리체계' 기존 산업재해 정보 공개는 사고 발생 이후 명단을 공표하는 등 사후적 조치에 머물러 기업의 선제적 예방활동을 유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정부는 2025년 발표한 '노동안전 종합대책'의 후속 입법으로 안전보건현황공시제를 도입했고, 2026년 8월부터 시행에 들어간다. 이 제도의 목적은 단순히 사고 발생 여부를 공개하는 데 있지 않다. 기업이 어떤 안전보건관리체계를 운영하고, 인력과 예산을 얼마나 투입하며, 사고 예방과 재발방지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시장과 이해관계자의 객관적인 평가를 유도하고, 기업 스스로 예방 중심의 안전관리 체계를 강화하도록 하는 데 의미가 있다. 현재는 상시근로자 500명 이상 기업을 우선 대상으로 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으며 향후 300명 이상 기업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공시 대상 기업은 안전보건관리체계, 산업재해 발생 현황, 안전보건 활동 실적과 계획, 투자 현황, 재발방지대책 등 법령이 정한 사항을 매년 공시해야 하며, 대표이사가 내용을 확인·서명한 뒤 고용노동부에 제출하고 지정된 홈페이지에 공개해야 한다. ■공시 대상 범위부터 정해야...기준 세우는 것도 핵심 이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먼저 법령상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한 기본 토대가 마련돼야 한다. 우선 우리 회사가 공시 대상에 해당하는지 확인하고, 법인 전체와 사업장, 자회사, 협력사 가운데 어디까지 공시 범위에 포함할 것인지 명확히 정해야 한다. 공시 경계가 불분명하면 데이터 산정 오류가 발생하고 감독기관의 보완 요구나 이해관계자의 질의에 대응하는 과정에서도 혼선이 생길 수 있다. 또한 재해율 산정 기준, 협력사 사고 포함 범위 등 각 공시항목의 정의와 산정 기준을 문서화하고 전사적으로 공유해야 한다. 사고 건수 같은 후행지표뿐 아니라 안전교육, 위험성평가, 개선조치 이행률 등 선행지표도 정량화해 공시 데이터의 객관성과 비교 가능성을 확보해야 한다. 공시정보는 실제 작동하는 안전보건경영시스템의 결과물이어야 한다. 경영책임자와 관리감독자, 안전부서와 현장조직의 역할과 책임이 명확해야 하며 문서상 체계와 현장의 운영 실태가 일치해야 한다. 특히 위험성평가 과정에서 근로자의 참여와 의견수렴이 형식적으로 이뤄진다면 공시의 신뢰성이 저하될 뿐 아니라 부실공시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아울러 산업재해 현황은 사고보고서와 산재 처리기록으로, 교육 실적은 교육일지와 이수기록으로, 투자금액은 예산서와 지출 증빙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원천자료와 공시정보가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한다. 공시 수치에서 원천자료까지 역추적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은 향후 근로감독이나 사고조사 과정에서도 핵심 근거가 된다. ■법적 의무 충족만으로 역부족...'고도화 관리체계' 구축해야 그러나 법적 의무를 충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안전보건공시가 기업의 신뢰와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적 수단이 되려면 보다 고도화된 관리체계가 필요하다. 우선 안전보건공시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와 사업보고서, 이사회 보고자료 등 다른 공시와 내용이 일관돼야 한다. 자료마다 수치나 설명이 다르면 시장의 신뢰를 잃을 수 있다. 또한 유해·위험요인의 변화와 사고 발생, 개선조치 이행 현황 등을 상시 관리해 공시 시점의 수준뿐 아니라 개선 과정과 변화 추세까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안전보건공시는 안전부서만의 업무도 아니다. 안전, 법무, 재무, ESG, IR 등 관련 부서가 함께 데이터의 정확성과 법적 타당성, 기존 공시와의 정합성을 검증하는 전사적 협업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통한 점검과 근로자 의견수렴 절차 역시 함께 운영돼야 한다. 공시 이후를 대비한 소통 전략도 중요하다. 예상 질문과 주요 쟁점을 반영한 FAQ와 설명자료를 마련하고, 언론과 투자자, 노사 등의 반응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해 사실관계 오류나 논란에 신속하고 일관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안전보건공시는 단발성 규제 대응이 아니라 기업의 안전 수준을 보여주는 시계열 데이터로 축적돼야 한다. 연도별 정보를 비교하면 사업장별 개선 추이와 안전투자의 효과, 반복되는 취약요인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이는 중장기 안전보건 전략과 투자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경영자료가 된다. 축적된 공시정보는 ESG 평가와 공급망 관리, 공공입찰, 금융·보험 심사, 투자자 커뮤니케이션에서도 기업의 지속가능성과 리스크 관리 역량을 보여주는 신뢰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AI 기반 안전 분석도 '임박'...공시 범위 확장도 대비해야 앞으로는 공시 이후의 환경도 크게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AI 기반 분석시스템이 기업의 공시정보를 실시간으로 비교·분석하면서 재해 현황과 안전투자, 개선조치의 효과까지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시대가 열릴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개별 데이터의 정확성뿐 아니라 연도별 변화 추이와 투자 대비 성과, 공시자료 간 일관성, 실제 이행 수준과의 정합성이 더욱 중요한 평가 요소가 될 것이다. 2028년부터 지속가능성 공시가 단계적으로 확대되면 안전보건 정보는 기업의 지속가능성과 리스크 관리 역량을 판단하는 핵심 정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시장의 활용도가 높아질수록 데이터의 정확성과 추적 가능성에 대한 요구도 커질 것이며, 장기적으로는 독립적인 제3자 검증을 요구하는 흐름도 나타날 수 있다. 또한 이해관계자의 관심은 개별 사업장을 넘어 자회사와 관계사, 협력사 등 공급망 전반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기업은 법정 공시범위에만 머물지 말고 실질적으로 지배·관리하거나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업장과 협력사의 안전보건 정보를 어디까지 관리할 것인지 명확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차관 칼럼] 국민 안전한 식생활·건강 수호

주역에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는 말이 있다. 변화에 발맞춰 새로운 길을 찾을 때 비로소 지속될 수 있다는 뜻이다. 정책 역시 마찬가지이다. 국민의 일상과 산업의 환경이 달라지면 변화에 맞게 진화해야 하고,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안전관리도 한발 앞서야 한다. 이는 '국민의 건강과 안심'을 지키기 위해 변화하는 현장과 소통하며 정책을 만들어가는 식품의약품안전처의 노력과도 일맥상통한다. 지난해 '식의약 안심 50대 과제'를 발표하며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정책을 발굴해 식의약 안전을 한층 더 강화하겠다고 약속드렸고, 가시적 성과를 위해 속도감 있게 추진해 왔다.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올해도 청년과 소상공인을 비롯한 소비자와 환자, 산업계와 전문가 등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제조·수출 현장 등 현장 방문 33회, 정책이음 열린마당 등 현장 의견 수렴 132회에 이르기까지, 정책은 책상 위가 아니라 국민의 삶 속에서 완성된다는 믿음으로 현장을 찾아 애로사항을 경청하고 더 좋은 정책으로 이어내려고 노력해 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지난 2일 '식의약 안심 60대 과제'를 국민께 보고드렸다. 올해는 '국민과 함께 만드는 안심의 기준'이라는 방향성을 유지하면서도 급변하는 사회와 기술 환경을 반영해 한 단계 더 발전된 안심 정책을 담았다. 단순히 과제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일상에서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국민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은 해외직구 식품을 안전하게 구매할 수 있도록 기존의 텍스트 중심 검색을 넘어 사진 한 장만 업로드하면 위해성분을 즉시 판독해 주는 인공지능(AI) 기반의 '올바로 웹앱' 서비스를 도입한다. 현장의 애로사항을 해소하는 규제혁신도 담았다. 하나의 용기에 알약과 액상이 함께 포장된 '이중제형 비타민'을 일반의약품 표준제조기준에 추가해 제품의 신속한 출시를 돕고 복용의 편의성을 높인다. 아울러 누구나 쉽게 화장품 안심정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화장품 안심 QR'을 도입하고, AI와 소프트웨어가 결합한 최첨단 의료제품들이 개발부터 허가까지 유기적으로 이어지도록 '디지털 융합의약품 원스톱 통합심사체계'를 구축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나침반의 바늘은 가만히 멈춰 서서 정답을 가리키지 않는다. 정북 방향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거친 폭풍우 속에서도 배가 나아가야 할 단 하나의 올바른 방향을 끈질기게 가리킨다. 오늘날 급변하는 기술 환경과 다변화된 사회 속에서 식의약 안전을 책임지는 규제기관의 역할 역시 이 나침반의 속성과 닮아 있다. 규제는 단순히 멈춰 서서 앞길을 가로막는 '벽'이 아니라 국민의 건강과 안심이라는 절대적 기준점을 향해 끊임없이 조정하며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이정표'여야 하기 때문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국민의 건강과 안심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지를 향한 든든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흔들림 없는 신념과 유연한 혁신을 바탕으로 국민께는 굳건한 신뢰를, 현장에는 미래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는 진정한 동반자가 되도록 지속적으로 혁신해 나갈 것이다. 오유경 식품의약품안전처장

[포럼] 주택시장 흔드는 '주거 안전주의'

부동산 시장을 분석할 때 우리는 흔히 데이터의 힘에 의존한다. 금리, 가격, 거래량 같은 통계는 향방을 예측하는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계로 환산되지 않지만 주거문화를 밑바닥부터 재편하고 있는 실존적 목소리가 존재한다. 최근 젊은 세대, 특히 여성층을 중심으로 뚜렷하게 관측되는 '안전강박'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와 그레그 루키아노프는 현대 젊은 세대의 핵심 심리적 기제로 '안전주의(Safetyism)'를 꼽았다. 안전을 다른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절대 원칙으로 떠받드는 문화를 의미한다. 물리적 위해를 넘어 정서적 불편함까지 위험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심리적 특성은 주거 선택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오늘날 부동산 시장을 움직이는 핵심 동력으로 작용한다. 흥미로운 점은 안전공간에 대한 인지가 성별에 따라 차이를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한 해외 연구논문에 따르면 남성은 주거의 경계를 개별 가구의 현관문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여성은 단지의 외곽 울타리와 출입 게이트를 사생활 영역의 시작점으로 꼽는다. 단지 내부의 모든 공유 공간을 보호받아야 할 사적 영역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른바 '확장된 거실'의 개념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공간 통제권과 심리적 영토 의식이 한층 더 강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성에게 안전은 선택이 아닌 기본값이다. 집은 단순한 자산 가치의 척도를 넘어선다. 외부 세계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는 심리적 방패이자 안전지대의 요건을 충족해야 하는 공간이다. 한국의 단지 중심 아파트 문화가 가진 폐단은 적지 않다. 외부와 구분하고 이웃 간의 교류를 단절하는 폐쇄적 커뮤니티는 도시의 삭막함을 가중시킨다. 그래서 '아파트 공화국'보다 '단지 공화국'이 더 문제라고 지적하고 이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담장을 낮추고 보행로를 연결하여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열린 도시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의 관점에서는 지극히 합당한 논리일 수 있다. 하지만 안전에 민감한 개인의 눈에는 현실과 동떨어진 낭만주의로 비칠 뿐이다. 늦은 밤 어두운 골목길을 홀로 걸어본 이들이라면 쉽게 공감한다. 단지 선호현상을 공간의 이기적인 소비로 지적할 수는 있다. 하지만 여성의 안전주의 심리를 고려하면 무조건 비판만 할 수는 없다. 이 같은 주거의 안전주의 트렌드는 향후 주택 공급 대책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진다. 최근 빌라나 다세대·다가구 주택 등 전통적인 서민 주거지는 공급이 사실상 마비되었다. 빌라 전세사기 여파와 영세 주택업자들의 자금난이 겹친 탓이다. 여기에 일부 젊은 여성은 안전을 이유로 다세대·다가구 주택을 꺼리는 현상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대도시 전월세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왕성한 주택수요층인 젊은 층의 심리적 니즈를 고려해야 한다. 그 방향성은 도시형생활주택이나 오피스텔, 소형 아파트 등 보안이 철저한 주택 공급을 늘리는 것이다. 다세대·다가구 주택을 짓더라도 보안 시스템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주택 공급은 원론보다 달라진 현실에 기초를 둔 실천론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인간이 공간을 통해 얻고자 하는 '심리적 안녕감'의 가치를 중시해야 한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

[fn광장] 반도체 플랜테이션 국가의 난맥상

15세기 대항해 시대의 개막으로 서양 열강이 세계 각지에 진출하였다. 중남미에는 사탕수수, 커피, 바나나를 경작하는 대규모 농장인 플랜테이션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20세기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들은 바나나 공화국으로 불렸다. 단일작물 기반의 취약한 경제구조, 정치불안정과 빈번한 정변, 양극단 사회구조라는 후진성을 투영한 경멸적 명칭이다. 최근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난장판을 보면 반도체 단일품목 플랜테이션 국가라는 비유적 표현이 연상되는 후진적 행태의 연속극이다. 반도체를 생산하지만 관련한 제도와 정책, 운영역량 측면에서는 바나나 공화국과 피장파장이라는 의미이다. 첨단제품을 생산하는 산업기술적 하드웨어와 플랜테이션 수준인 낙후된 정치사회적 소프트웨어의 간극이 파멸적 상황이다. 반도체 초호황은 실력보다 행운이다. 미국의 인공지능(AI) 투자 급증과 미국·중국 패권경쟁에 따른 시장 분절이 증폭되었다. 불과 1년 전 삼성전자가 5만전자로 조롱당하고 중국 굴기에 전전긍긍하던 상황의 급반전이다. 반도체가 황금알을 낳기 시작하자 사방팔방에서 이런저런 명분으로 숟가락을 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먼저 삼성전자 노동조합이 나섰다. 높은 성과에 높은 보상은 당연하지만, 금번에는 영업이익 일정 비율의 성과급 보장을 요구하고 전면파업까지 들고나왔다. 경영악화-적자발생에도 급여삭감-정리해고가 병행되지 않으니 책임은 분리하고 과실만 가지겠다는 요구에 무기력한 경영진은 굴복하였다. 금융투자업계는 돈잔치를 벌이고 있다. 국내 주식시장 시가총액 절반 수준의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대한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라는 기형적 금융상품을 출시하여 종합주가지수가 중소형 잡주처럼 급등락하면서 각종 신기록이 양산된다. 개인투자자들을 호도하여 수수료 대박을 터트린 증권회사들이 내세우는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의 구호가 위선적이다. 초과이익 배분 요구도 등장했다. 정상이익과 초과이익의 구분 자체가 추상적이고 선동적 개념이다. 산업-기업별로 상이한 경기사이클, 투자규모, 원가구조에서 결정되는 현금흐름과 이익에서 보편적인 기준이 설정되기 어렵다. 정책당국은 호남 반도체 투자를 발표하면서 국가기간산업의 미래를 정치적 영역으로 끌고 들어갔다. 외국인투자자들이 해당 기업의 독자적인 사업성 판단 여부에 의문을 가지면서 신개념의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연결되고 있다. 반도체 초호황의 떡고물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관련자들에게 음수사원(飮水思源)과 거안사위(居安思危)의 덕목이 필요한 시점이다. 음수사원, 물을 마실 때에는 원천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겸손해야 한다. 반도체 산업에서 오늘날의 과실이 있기까지 50여년이 걸렸다. 1974년 경기 부천에 설립된 한국반도체로 시작해 1982년 '반도체공업육성추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국가적 미래산업으로 규정되었다. 1983년 2월 삼성이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 선언하면서 본격화되었다. 당시 반도체 산업 육성에 대해 경제기획원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경제적 타당성이 낮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심지어 삼성의 기흥 반도체공장 건설에 대해 농수산부는 '쌀이 부족한데 농지를 공장부지로 전용하면 막대한 차질이 빚어진다'는 명분으로 반대할 정도였다. 하지만 국가 지도자의 비전, 정책담당자의 실행력, 기업가의 결단이라는 3박자로 반도체 산업은 시작되었다. 오늘날의 성과는 앞선 세대의 과감한 도전과 끈질긴 노력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거안사위, 편안할수록 향후의 위태로움을 생각하고 대비해야 한다. 현재 반도체 초호황의 지속성에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AI투자 정체, 미국·중국 간 반도체 교역 재개, 중국기업 약진으로 급변할 위험성이 우려된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반도체 수출입 차단이 완화될 가능성도 상존한다. 실제로 반도체 가격급등으로 칩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는 가운데 미국 애플이 중국산 반도체 구입을 타진하고 있다. 급부상하는 중국의 창신메모리(CXMT)는 상하이증권거래소에 7월 말 상장하여 조달한 자금으로 대규모 투자에 나설 예정이다. 반도체 초호황이라는 로또를 맞은 주식시장의 급등락은 광기와 절망이 교차하는 특성상 자연스럽다. 하지만 미래의 경쟁력을 고민하고 제도를 정비할 정책당국과 관련업계의 부화뇌동은 소위 바나나 공화국의 후진적 행태이다. 행운을 실력으로 착각하는 순간 파국은 시작된다. 앞선 세대의 헌신에 감사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해 실행할 당면과제를 각자의 위치에서 차분하게 성찰해야 한다. 김경준 전 딜로이트컨설팅 부회장

[포럼] 차세대발사체 성공하려면

미국의 노예제 폐지를 이끌었던 남북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 주도로 개발되어 남군과 북군의 주력 야포로 사용된 청동제 M1857 12파운드 나폴레옹 대포는 더 이상 생산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무료함을 느낀 대포 제조 전문가들의 모임인 '대포 클럽'의 회장인 임피 바비켄은 대포를 '재활용'하여 달 탐사를 위한 획기적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이 황당한 계획에 전 세계로부터 막대한 자금(클라우드 펀딩)이 모이고 새로운 목표에 동기부여된 회원들은 지구탈출속도 계산(임무궤도설계), 사람을 달까지 보낼 수 있는 초대형 대포 콜롬비아포(로켓)와 사람이 탑승할 포탄(우주선)의 설계, 이 대포를 주조하고 발사할 장소(발사장) 선정 등의 이슈를 돌파해 나간다. 이후 지구에 달이 가까워지는 시점에 대포는 플로리다(100여년 뒤 케네디 발사장이 실제로 설립됨)에서 지구탈출속도로 발사되고 탑승한 3인의 모험가는 달 표면에서 탐험을 하고 우여곡절 끝에 지구로 귀환한다. 과학적으로도 설득력 있는 이 스토리는 미국 남북전쟁이 끝나던 해인 1865년에 발표된 쥘 베른의 SF소설 '지구에서 달까지'의 줄거리이다. 대포의 탄환은 일회용이나 대포는 적정한 수명이 다할 때까지 버리지 않고 재사용하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대포의 용도변경과 재사용을 통해 달 탐사를 시도한 베른의 혜안은 우주시대 초기는 물론 현재까지 수많은 우주개발자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적을 공격하는 살상무기로 먼저 실용화되었던 로켓은 포탄의 개념처럼 한번 사용하면 재사용 또는 재활용하지 않는 것으로 수십년간 인식되어 왔다. 2002년 설립된 신생기업 스페이스X가 로켓을 재사용한다는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전 세계 발사체 시장의 판도를 바꾼 것은 물론 사상 최대 기업공개로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은 가운데 미국 나스닥에 시총 5위권으로 진출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로켓의 역사를 고증해 보면 인간이 만든 기계를 재사용한다는 상식적인 논리를 적용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정지궤도 위성인 무궁화 1호를 발사한 미국의 맥도널 더글러스사는 미국 국방부와 항공우주국(NASA)의 지원을 받아 1993년 기존 로켓처럼 바다에 추락하지 않고 이륙했던 발사장에 다시 수직으로 착륙할 수 있는 델타 클리퍼(DC-X)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재사용 발사체의 기술적 타당성을 확인하였다. 1996년 시험 중 발생한 착륙기어 고장 및 화재로 인해 개량모델인 DC-XA 기체가 파손되며 결국 프로젝트가 전면 취소되어 DC-X는 물론 회사도 보잉에 합병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정부의 지원에 의존한 나머지 실패를 딛고 재사용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신시장 개척에 성공하지 못한 사례라 하겠다. 반면 스페이스X는 2015년부터 현재까지 발사체 폭발과 발사대 훼손까지 감수하면서도 수많은 실패를 통해 확보한 데이터로 착륙 다리와 엔진 재점화 및 로켓회수 기술 등 재사용기술의 완성도를 높여 오늘의 성공을 이루었다. 우여곡절 끝에 완전 재사용을 목표로 방향 전환한 우리나라 차세대 발사체도 미래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실패를 용인하는 분위기도 중요하고 속도전도 중요하다.주광혁 연세대 인공위성시스템학과 교수

[기고] 임업직불금 현실화, 건강한 숲과 임업인의 미래

우리 국토의 63%를 차지하는 산림은 깨끗한 공기와 물을 제공하고 탄소를 흡수하며, 각종 재난으로부터 국민의 삶을 지켜주는 소중한 자산이다. 하지만 이러한 풍성한 숲은 결코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묵묵히 숲을 가꾸고 산림을 관리해 온 임업인의 땀과 노력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산림을 있게 한 임업계의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산지는 대부분 경사가 급해 작업이 어렵고 기계화에도 한계가 있다. 나무를 심고 가꾸더라도 소득을 얻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여기에 기후변화로 산불과 산사태, 병해충 발생 위험은 더욱 커지고 있고, 인건비와 자재비 상승까지 겹치면서 임업인의 경영 부담은 갈수록 버거워지고 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임업인은 국민 모두가 누리는 숲을 묵묵히 지켜오고 있다. 연간 약 259조원에 달하는 산림의 공익적 가치는 임업인의 꾸준한 산림경영 위에서 실현된다. 국민은 그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그 가치를 지켜온 임업인에 대한 보상은 아직 충분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실제로 지난해 기준 임가소득은 약 3831만 원으로 농가소득의 약 70%, 어가소득의 약 65% 수준에 머물고 있다. 산림이 국민에게 제공하는 공익적 가치와 임업인의 역할을 생각하면 지금의 소득 기반과 보상체계는 반드시 개선해야 할 과제다.  이러한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지난 2022년 도입된 제도가 바로 임업·산림 공익직접지불제다. 임업인이 건강한 숲을 조성하고 탄소흡수, 수원함양, 생물다양성 보전, 산림재난 예방 등 산림의 공익기능을 유지하는데 대해 국가가 보상하는 제도다. 이는 단순한 소득지원이 아니다. 국민 모두가 누리는 숲의 가치를 함께 지키기 위한 사회적 약속이자 미래를 위한 투자다.  그러나 제도 도입 당시 임업직불금은 생산여건과 토지생산성 등을 고려해 농업직불금의 약 70% 수준에서 설계됐다. 이후 농업직불금은 여건 변화에 맞게 인상되었지만, 임업직불금은 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 그 결과 현장에서는 농업과의 형평성을 높이고, 산림의 공익적 가치에 걸맞은 보상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산림청은 임업직불금 지급단가의 현실화를 통해 이러한 불균형을 개선해 나가고자 한다. 농업 분야와의 형평성을 고려해 지급단가를 현재보다 12~36% 인상해 임업인의 안정적인 경영 기반을 마련하고 지속가능한 산림경영을 뒷받침할 계획이다. 이는 특정 분야를 우대하기 위한 정책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누리는 산림의 공익적 가치에 걸맞은 보상체계를 마련하기 위한 과정이다.  여기에 더해 산림청은 선택형 직불제 도입도 함께 준비하고 있다. 기본형 직불제가 안정적인 산림경영의 기반이라면, 선택형 직불제는 탄소흡수원 확충, 산림재난 예방, 생물다양성 증진 등 산림의 공익기능을 더욱 높이는 활동에 대해 추가로 보상하는 제도다. 이는 임업인의 자발적인 공익활동을 확대하고 국민이 체감하는 건강한 숲의 가치를 더욱 높이는 새로운 정책 기반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재명 대통령께서도 최근 "농업은 매우 중요한 안보 전략 산업"이라며, "농촌과 농업, 농민을 살리려면 농업보조금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국가 생존 차원에서 임업을 포함한 농업과 농산촌을 적극 보호해야 한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건강한 숲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그루의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는 오랜 시간과 땀이 쌓여 비로소 국민의 숲이 완성된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임업인이 있다. 산림청은 앞으로도 임업인이 자긍심을 가지고 산림을 경영할 수 있도록 임업직불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산림의 공익적 가치에 걸맞은 보상체계를 마련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임업인을 지키는 일이 곧 우리 숲을 지키는 일이며, 건강한 숲을 미래세대에 온전히 물려주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계약서를 타고 온다. 가정법원 부장판사가 알려주는 혼전계약의 모든 것"[부장판사 출신 김태형 변호사의 '알쏭달쏭 이혼]

왜 요즘 혼전계약에 열광할까 가정법원에서 수천 건의 이혼 사건을 처리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 전에 미리 약속을 해둘 걸"이다. "내가 왜 내 특유재산을 나눠줘야 하느냐"며 혼인 자체를 주저하는 젊은 세대부터 재산분할 과정에서 갈등이 폭발하는 재혼 부부까지 혼전계약은 더 이상 '부자들만의 장난감'이 아니다. 실제로 한 결혼정보회사의 설문조사에서 예비부부의 70% 이상이 "혼전계약이 필요하다"고 답했고, 그 이유로는 '재산분할에 대한 욕심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 '이혼에 대비해 자신의 고유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가 주로 꼽혔다. 미국식 프리넙에 호감을 갖는 젊은 부부들이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이혼율이 높은 현실에서 "사랑은 사랑대로, 재산은 재산대로" 별도 관리하겠다는 인식 변화가 분명히 느껴진다. 트럼프식 프리넙과 한국식 혼전계약 외국 사례에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인물이 바로 오늘날 미국식 프리넙을 상징하는 '도널드 트럼프'다. 그는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면서 혼전계약서를 점점 더 치밀하게 '업그레이드'했고, 심지어 "이혼 후 본인을 소재로 한 인터뷰·책 등 출판 금지 조항"까지 넣어 '프리넙의 제왕'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한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발상을 적용하는 사례가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혼전계약이 실제로 작성되었다. "혼인 중 외도 적발 시 상대방에게 위자료 3억 원을 지급한다. 결혼 전 취득한 A아파트와 B주식은 이혼 시 상대 배우자에게 분할하지 않는다. 각자 부모로부터 증여받은 재산은 어떤 상황에서도 각자의 특유재산으로 본다." 우리 법원은 이런 약정 전부를 기계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누가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지', '어떤 재산이 누구 소유인지'를 판단할 때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한다. 한국에서 혼전계약은 유효한가? 결론은 "원칙적으로 유효"하다. 민법은 사적 자치의 원칙을 인정하기 때문에 강행규정이나 공서양속에 반하지 않는 이상 당사자 사이의 계약은 언제든 자유롭게 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민법 제829조는 혼인 전 부부재산약정을 명시적으로 허용하고 있고, 부동산 등 일부 재산에 관해 약정을 공증·등기까지 하면 제3자에게도 효력이 미친다. 다만 많은 분들이 "혼전계약은 다 무효다"라고 오해하게 된 계기는 "협의 또는 심판에 의해 구체화되지 않은 재산분할청구권을 혼인 해소 전에 미리 포기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본 대법원 판례 때문이다. 즉, 이혼 후에야 비로소 발생하는 재산분할청구권을 이혼 전도 아니고 결혼 전에 포기한다는 조항은 그대로 통용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혼전계약 전체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각자가 어떤 방식으로 재산을 관리·운용할지'에 대한 약정은 민법과 판례가 상당히 넓은 범위에서 인정하고 있다. 혼전계약에 들어가는 조항은 대략 네 가지 형태로 나뉠 수 있다. 첫 번째, 재산의 귀속·관리에 관한 조항이다. "결혼 후에도 각자 명의 재산은 원칙적으로 각자 소유로 한다. 부부 공동으로 취득한 주택은 7:3으로 지분을 나눈다." 등이다. 이런 조항들은 재산관계를 명확히 한다는 측면에서 법적으로 존중될 여지가 크다. 두 번째로 이혼 시 재산분할 비율에 관한 조항이다. "이혼 시 재산분할은 일률적으로 3:7로 한다. 배우자는 A회사 지분에 대해서는 재산분할청구를 하지 않는다." 판례는 이러한 조항들이 '재산분할청구권 자체의 사전 포기'에 해당한다고 보아 이를 허용하진 않지만 구체적인 분할 방식·비율을 미리 정해두었다면 재판 과정에서 중요한 참고자료로 참작되는 경향은 있다. 세 번째로 생활 방식·가사 분담에 관한 약정이다. "설날엔 친정부터, 추석엔 시댁부터 방문한다. 집안일은 맞벌이를 감안하여 5:5로 분담한다." 이런 약정은 실제 강제집행의 대상이 될 수는 없지만 이혼소송에서 '혼인 파탄 책임'을 판단할 때 중요한 자료가 된다. 재판에서 "당사자들이 합의한 생활 원칙을 어느 쪽이 반복적으로 위반했는지"를 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덕적·인격적 약속이다. "폭언을 하면 매회 100만 원씩 지급한다. 외도를 하면 다툼 없이 합의이혼에 응한다." 등이다. 이런 조항들 중 일부는 민법 제103조(선량한 풍속·사회질서 위반)에 의해 무효가 될 수 있지만 일부는 혼인 파탄 책임을 평가하는 중요한 자료로 쓰일 수 있다. 특히 양육권·면접교섭권 사전 포기 약정 등은 전형적으로 무효가 되는 약정이다. 실제로 있었던 흥미로운 사례들 사례 1: "바람 피우면 재산 포기" 실제 사건에서, A씨는 남편과 시어머니로부터 "혼인 중 폭력·외도 없이 성실하게 생활하겠다"는 각서를 받았다. 남편이 반복적으로 이를 위반한 뒤 이혼소송이 제기되자 법원은 각서와 사실관계 전체를 종합해 혼인 파탄의 주된 책임이 남편에게 있다고 보았고 상당액의 위자료를 인정했다. 비슷하게 "외도를 하면 모든 재산을 포기하겠다"는 혼전계약·각서도 그 조항 자체를 그대로 집행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재판상 이혼에서 귀책사유를 강하게 인정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실제로 이러한 약정은 재산분할, 위자료 액수에 직접·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례 2: 장모가 강요한 혼전계약의 역풍 TV 프로그램에 소개된 한 사례에서는 장모가 예비사위를 상대로 "딸에게 폭언·폭행을 하면 거액의 위약금을 지급한다"는 혼전계약서를 강요했다. 남편은 부담을 느끼면서도 결혼을 위해 그 계약서에 서명했지만 이후 갈등 과정에서 이 문서가 계속해서 '무기'처럼 사용되면서 오히려 혼인관계가 급속히 파탄 나게 되었다. 법률적으로는 강요·협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취소가 가능하고, 지나치게 일방적·불공정한 약정은 공서양속 위반으로 무효가 될 수 있다. 사례 3: "설날엔 친정 먼저"는 왜 안 통하나? 어느 예비부부는 다음과 같은 혼전계약을 체결했다. "설날에는 친정부터, 추석에는 시댁부터 먼저 방문한다. 결혼 전 모은 비상금은 각자 개별 계좌로 따로 관리한다." 법적으로 효력이 있는 것은 후자의 '비상금 관리'에 관한 약정이다. 이는 민법 제829조에 따른 부부재산약정으로 인정될 여지가 크다. 반면 명절 방문 순서와 같은 생활 방식 조항은 '강제이행'의 대상도 아닐뿐더러 위반 시 바로 손해배상을 명할 수 있는 성격의 조항도 아니다. 다만, 이혼 재판에서 상대방의 반복적인 약속 위반이 혼인 파탄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수는 있다. 잘 만든 혼전계약이 가져오는 효과 혼전계약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충분한 순기능을 갖는다. 기대치의 명료화 "나는 이 정도 가사 분담을 기대했고 이런 재정 운영을 원했다"는 내용을 문서로 공유하는 순간 많은 막연한 오해가 사라진다. 서로 다른 가정에서 자란 두 사람이 '결혼'이라는 공동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데에 있어 '사업계획서'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혼전계약'이다. 갈등 발생 시 신속한 정리 재산관계가 분명히 정리되어 있으면 이혼을 결심했을 때 길고 소모적인 분쟁을 줄일 수 있다. 그 계약 내용이 재판에서 전면적으로 관철되지는 않더라도 어떤 재산이 누구의 특유재산인지, 누가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 판단하는 데 도움을 주어 절차를 단축시킬 수 있다. 관계 유지에도 도움이 됨 역설적으로 혼전계약은 이혼을 쉽게 하기 위한 장치라기보다는 '싸움이 커지기 전에 감정과 재산을 분리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분쟁 시 도망갈 출구가 아닌 서로의 책임과 경계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 역할을 한다. 맺으며 가사소년전문법관, 가정법원 부장판사, 그리고 현재 이혼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며 체감한 실무 팁을 정리하면 이렇다. '각서' 수준이 아니라 제대로 된 계약서로 만들 것 서명·날인, 날짜, 당사자 인적 사항을 명확히 기재하고 가능하면 공증까지 받아두는 것이 좋다. 공증된 부부재산약정은 나중에 "억지로 쓰게 했다"는 주장을 상당 부분 차단해 준다. 일방에게 지나치게 불리한 내용은 피할 것 "모든 재산을 포기한다"식의 극단적인 조항은 공서양속 위반으로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폭력·외도 등 인격권 침해에 대한 예외 없이 '봐주기' 조항을 넣는 것은 법원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렵고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된다. 양쪽이 각자 변호사에게 상담받고 체결할 것 양측이 독립적인 법률 자문을 받았다는 사실은 나중에 계약의 공정성을 입증하는 데 큰 힘이 된다. '장모·장인 주도'처럼 제3자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계약은 분쟁의 씨앗이 될 뿐이다. '법적 효력'과 '증거 가치'를 구분해서 생각할 것 모든 조항이 집행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 많은 조항들이 이혼 재판에서 귀책사유·혼인 파탄 경위 등을 판단하는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설령 강제이행이 어려운 내용이라도 분쟁 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록으로서 의미가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법은 결국 세상을 따라온다 현재 판례는 여전히 "재산분할청구권은 이혼이 성립한 때에 발생하는 것이므로 그 이전에 미리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혼인제도에 대한 인식이 급변하고 있고 다른 나라에서 부부재산약정의 주요 대상에 '이혼 시 재산분할 방식'을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우리 법제가 언젠가는 보다 적극적으로 혼전계약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도 있다. 현장에서 젊은 부부들을 만나보면 "미국식 프리넙 제도에 찬성한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 법과 판례는 결국 아주 천천히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 사이에 우리가 할 일은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서로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한 필수 문서'로서의 혼전계약을 현명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김태형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 l 김태형 변호사는 가사∙상속 분야 전문가이다. 2007년 법관 임용후 2024년 수원가정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17년간의 법관생활을 끝내고 법무법인 바른에 합류했다. 김태형 변호사는 법관시절 2012년부터 총 8년간 가사∙상속 및 소년심판 업무를 담당했다. 특히 법관 퇴직 전 5년(2019~2024)간 수원가정법원에서 가사소년전문법관으로 수많은 가사∙상속 관련 케이스를 처리하면서 이 분야의 전문성을 확보했다. 베스트셀러인 "부장판사가 알려주는 상속, 이혼, 소년심판 그리고 법원"(박영사, 2023)의 저자이기도 하다.

[포럼] 3대 메가 프로젝트, 中企 '패싱'

지난달 '3대 메가프로젝트'가 발표됐다. 반도체, 피지컬 인공지능(AI), AI 데이터센터가 세 축이다. 호남, 충청, 영남을 중심으로 첨단산업 거점을 세운다. 거기에 대기업이 1600조원을 투자한다. 정부는 전력과 용수를 대고, 세제도 지원한다. 규모 면에서 국책사업으로 불릴 만하다. 국책사업의 역사는 길다. 기원전 중국은 황하의 물길을 다스렸다. 로마도 도로를 놓고 제국을 건설했다. 1933년 미국은 테네시강에 댐을 세웠고, 독일은 아우토반을 깔았다. 우리도 주택 200만호, 인천공항, KTX 등이 있었다. 국책사업으로 일자리를 만들었고, 경제를 키웠다. 과거 국책사업은 토목 공사였다. 토목 공사는 재정 투입의 승수효과가 크다. 투입된 만큼 실물경제가 꿈틀댄다. 그러나 토목 공사에 대한 환경성, 주민 수용성, 사업성 검증이 강화됐다. 한동안 국책사업이 사라졌던 이유다. 이번 프로젝트는 국책사업의 새로운 모델이다. 토목 공사에 딥테크 산업을 얹었다. 그리고 기업이 앞장서고, 정부가 지원한다. 정부가 이번 프로젝트를 주도하기엔 재정 부담이 크다. 빠르게 진화하는 기술은 기업이 쫓는 게 맞다. 문제는 중소기업의 역할이다. 1970년대 산업정책은 국가가 설계했고, 대기업이 이끌었다. 그래도 '중소기업계열화촉진법'(1975년)을 제정해 대·중소기업 거래를 제도로 묶었다. 물론 촉진법의 공과는 갈리지만, 중소기업의 참여만은 제도화했다. 그런데 이번엔 중소기업이 눈에 띄지 않는다. 오로지 대기업 중심이다. 프로젝트를 보면, 중소기업은 협력사와 소재·부품·장비에 스치듯 나온다. 팹에 부품과 장비를 대는 역할이다. 산업에서 이를 후방연관효과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번 프로젝트의 성패는 전방연관효과에 달렸다. 팹이 찍어낸 반도체와 데이터센터가 제공할 컴퓨팅 자원을 누가, 어떤 조건으로 이용할 것인가이다. 전방연관효과엔 중소기업이 강하다. 빠르게 창업하고, 시장을 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에 이게 빠졌다. 1990년대 후반의 경험은 달랐다. 정부가 초고속정보통신망을 깔았다. 그 위에서 사업할 주체를 따로 길렀다.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1997년)이 창업자를 만들었고, 코스닥이 자금을 댔다. 네이버와 엔씨소프트가 인프라와 제도 위에서 성장했다. 정부가 전방연관효과를 치밀하게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대기업이 주도한다. 그들이 전방연관효과를 고민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정부와 국회는 다르다. 연산의 일정 몫을 중소기업에 배분해야 한다. 피지컬 AI 모델의 개방도 필요하다. 합리적 비용으로 접근할 수 있는 원칙도 있어야 한다. 진입비용이 높은 AI 산업에서는 인프라 접근권 자체가 창업정책이다. '메가특구법'에 이런 조항을 넣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대기업을 위한 규제완화와 세제 혜택뿐이다. 3대 메가프로젝트의 성패는 삼성과 SK의 공장 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공장과 데이터센터 위에서 얼마나 많은 기업이 태어나느냐에 달렸다. 과거의 촉진법과 벤처특별법은 산업정책이 시작된 뒤 뒤늦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AI 경쟁에서는 몇 년의 시차로 시장 전체를 잃을 수 있다. 당장 메가프로젝트를 위한 협의와 입법에 중소벤처기업을 참여시켜야 한다.오동윤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

[fn광장] 한국사회 고질병 '불안' 떨치려면

현재 한국 사회를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를 하나 고르라면 불안일 것이다. 청년은 취업을 걱정하고, 직장인은 승진과 구조조정을 걱정하며, 자영업자는 폐업을, 중장년은 노후를, 부모는 자녀의 미래를 걱정한다. 경제 규모는 커졌고 생활 수준도 과거보다 크게 향상되었지만, 정작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졌다.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높은 교육 수준과 뛰어난 산업 경쟁력을 갖춘 나라임에도 행복지수는 낮고 우울과 불안,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라는 역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개인의 심리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산물이기도 하다. 서유럽과 북유럽의 복지국가에서도 불안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불안이 되지 않는다. 실직하거나 병에 걸리더라도 사회안전망이 최소한의 삶을 보장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국가와 사회를 하나의 보험처럼 인식한다. 실패가 곧 인생의 파산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회적 신뢰가 존재한다. 반면 한국과 일본은 구조적으로 불안이 확대되기 쉬운 사회이다. 특히 한국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가장 큰 이유는 성장 과정에 있다. 한국은 풍부한 천연자원도 없고, 넓은 내수시장도 없는 나라였다. 결국 사람의 능력과 노력만이 유일한 성장자원이었고, 국가 발전은 치열한 경쟁을 전제로 이루어졌다. 교육 경쟁, 입시 경쟁, 취업 경쟁, 승진 경쟁이 국가 발전의 동력이 되었고 그 결과 세계가 놀랄 만큼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성공을 이끌었던 경쟁 시스템은 이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4만달러에 가까워졌지만 행복은 그만큼 증가하지 않았다. 경제적 풍요가 개개인의 심리적 안정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승자, 패자 가릴 것 없이 끊임없이 불안을 재생산하는 구조이다. 최근에는 저출산과 고령화, 수도권 집중, 청년 일자리 부족, 주택 가격 상승,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까지 겹치면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의 발전은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기존 일자리의 불안도 확대하고 있다. 불안은 이제 특정 계층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공통된 정서가 되었다. 그렇다면 불안사회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일차적으로는 구조적 전환이 필요하다. 경쟁 자체를 없앨 수는 없지만 과도한 경쟁을 완화할 수는 있다. 무엇보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촘촘한 사회안전망, 안정적인 노후소득 보장, 질 높은 공교육, 청년의 자산형성 지원, 지역 균형발전,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소득과 자산 양극화 완화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성장과 분배를 대립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안정된 사회가 오히려 지속 가능한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는 관점의 전환도 요구된다. 사회적 신뢰가 높을수록 소비와 투자도 확대되고, 경제는 더욱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구조의 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같은 사회에서도 어떤 사람은 상대적으로 평온하게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끊임없는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결국 불안은 외부 환경과 함께 개인의 인식 구조에서도 만들어진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행복은 헛된 욕망을 계속 키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욕망을 줄이는 데 있다고 말했다. 이는 경쟁을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성공을 자신의 존재 가치에 연결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자신만의 삶의 기준을 세우고, 타인과의 비교보다 자신에 집중하며, 미래의 불안보다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태도가 필요하다. 가족과 친구 같은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회복하는 일 역시 개인의 불안을 줄이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불안은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적절한 불안은 미래를 준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가 만들어낸 과도한 불안과 스스로 만들어낸 끝없는 불안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회는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하고, 개인은 끝없는 비교와 무한한 성공 경쟁에서 한 걸음 물러날 수 있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불안사회는 제도만으로도, 마음가짐만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사회구조가 사람을 안심시켜야 하고, 개인의 인식이 삶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 구조적 전환과 인식의 변화가 함께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를 넘어 마음까지 안전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김용하 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

[포럼] 국립지역연구원 설립하자

예전에 강대국에 둘러싸인 개발도상국 한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외교가 중요하다는 말이 많았다. 한국이 중견국을 넘어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지금 힘을 앞세운 강대국이 충돌하고 국제질서가 흔들리는 지정학의 시대가 도래했다. 한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다시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다. 지정학적 충돌의 시대에 한 국가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다층적·다면적 외교를 통한 국가 간 협력관계 구축은 필수적이다. 특정 국가·세력에 기대지 않고 외교선을 다변화하며 전략적인 헤징을 통해 우리의 협상력과 자율성을 높여야 한다. 이는 외교 대상 국가와 지역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통찰을 필요로 한다. 외교 상대의 역사, 사회, 문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바탕 위에 현재의 정치, 경제, 사회적 맥락을 더한 전략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은 특정 국가와 지역에 대한 오랜 시간에 걸친 연구와 관찰, 즉 깊이 있는 지역연구다. 지역연구가 만들어내는 산출물은 우리 외교를 위한, 국가 경영(statecraft)을 위한 중요한 공공재다. 어려운 지정학적 도전을 넘어 선진국으로 외교지평을 확장해야 하는 한국 입장에서 지역연구라는 공공재가 충분히 확보되었는지 돌아볼 때다. 우리의 지역연구 기반은 우리와 비슷한 국가와 비교해 볼 때 처참한 수준이다. 우리가 일본 등 여타 중견국이 가진 것과 유사한 지역연구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 답할 수 있는 국내 지역연구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대외정책 자문을 위해 동남아, 중동, 남미, 서남아, 아프리카 등에 천착하는 전문가를 찾을 때 국내에서 각 지역별로 두세명을 찾으면 다행이다. 그간 지역연구라는 공공재를 만들어 내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 구호 아래 주요 대학 국제대학원에 대한 지원을 했다. 그러나 몇몇 설치되었던 지역연구를 위한 전공과정들은 이내 주요국과 개발협력 위주로 재편되었고 국제대학원은 영어로 수업하는 과정이라는 특징만 남았다. 이후 간헐적인 정부 지원과 지역연구자 자체 노력으로 지역연구에 관한 전공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여러 대학에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상황이다. 산재된 소규모 인프라(학과) 사이 연계도 쉽지 않다. 더욱이 이런 노력마저 대학을 집어삼킨 시장의 논리, 즉 졸업생의 취업이라는 현실적 도전 앞에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다. 한국의 지역연구 기반 부족은 전형적인 시장 논리, 즉 돈(취업)이 안된다는 현실 앞에 좌절한 결과다. 뜻을 품은 학생들은 취업이라는 현실 앞에 꿈을 접고, 그나마 살아남은 연구자도 생계를 위해 연구 방향을 전환한다. 이런 현실 속에 한국의 지역연구가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시장이 공급하기 어려운 공공재는 국가가 준비해야 한다. 국가가 나서 특히 동남아, 중동, 남미, 서남아, 아프리카 등 비강대국 지역이나 국가에 대한 학술 및 정책적 연구와 차세대 교육을 담당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연구와 교육의 기반은 우리 외교와 국가 경영을 위한 긴요한 공공재가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 정부에 국립지역연구원 설립을 제안하는 바이다.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

[fn광장] K아트, 글로벌브랜드 자리잡으려면

베니스의 여름은 언제나 뜨겁지만 올해는 그 열기가 더욱 특별하다.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지인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한국 현대미술이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제61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은 '해방공간, 요새와 둥지'를 주제로 최고은, 노혜리, 이랑, 황예지 작가가 참여해 동시대 한국 사회와 개인의 정체성, 그리고 공간의 의미를 새롭게 탐구했다. 여기에 현지에서 열린 위성 특별전에는 장소영, 이혜경, 강경록, 이태윤 등 다양한 장르의 한국 작가들이 함께하며 한국 현대미술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세계의 컬렉터와 미술계 전문가들에게 선보였다. 이번 베니스에서 펼쳐진 한국 작가들의 활약은 단순한 해외 전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특히 한국 현대미술이 서구 중심의 미술사적 문법을 수용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이를 주체적으로 재해석하며 자신만의 미학과 서사를 구축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제 K아트(K-ART)는 더 이상 세계 미술의 변방에서 주목받는 존재가 아니라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함께 이끌며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창조적 주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중 최고은 작가는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금속 파이프를 활용해 건축의 안과 밖, 경계와 구조를 새롭게 사유하는 조각과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노혜리는 퍼포먼스와 설치를 결합해 몸과 공간의 관계를 탐구했고 이랑과 황예지는 퍼포먼스, 사진, 텍스트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한국관의 주제를 더욱 입체적으로 확장했다. 각각의 작업은 표현 방식은 달랐지만 동시대 사회에 대한 깊은 질문과 실험정신이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했다. 베니스 곳곳에서 만난 한국 작가들의 작품은 한국 미술이 지닌 창의성과 사유의 깊이를 충분히 증명했다. 그러나 동시에 한 가지 중요한 질문도 남겼다. K팝과 K드라마가 세계 문화산업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처럼 K아트 역시 지속 가능한 글로벌 브랜드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점이다. 미술은 대중문화와 다른 생태계를 가진다. 소비 속도가 느리고, 작품의 가치가 축적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며, 미술관·비엔날레·갤러리·비평가·컬렉터로 이어지는 복합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시장이 형성된다. 따라서 단발성 해외 전시 지원만으로는 세계 미술계의 중심에 안착하기 어렵다. 이제는 보다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문화정책이 필요하다. 우선 글로벌 플랫폼과의 지속적인 연계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해외 유수 미술관과 비엔날레, 국제 아트페어에 한국 작가들이 꾸준히 참여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펀딩과 네트워크 지원이 병행돼야 한다. 정부와 문화재단은 단순한 전시 지원기관을 넘어 해외 큐레이터와 평론가, 컬렉터를 연결하는 국제 플랫폼의 허브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둘째, 한국 미술을 세계 언어로 번역할 전문 인프라가 절실하다. 세계 미술계는 작품만이 아니라 이를 설명하는 비평과 담론을 함께 소비한다. 뛰어난 작품이라도 국제 미술계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이론으로 해석되지 못하면 세계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 전문 번역가와 미술 비평가를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해외 주요 미술 전문지에 한국 미술 담론이 지속적으로 소개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셋째,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K아트 아카이브 구축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전 세계 큐레이터와 컬렉터들이 언제 어디서나 한국 작가의 작품과 연구자료를 검색하고 활용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디지털 플랫폼이 필요하다. 이는 단순한 자료 축적이 아니라 한국 미술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핵심 인프라가 될 것이다. 가장 필요한 것은 문화정책의 관점을 지원에서 산업 생태계 조성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K팝의 세계화도 오랜 투자와 민관 협력, 체계적인 해외 전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K아트 역시 개별 작가의 역량에만 의존해서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예술가와 갤러리, 미술관, 기업, 정부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생태계를 구축할 때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K아트는 이미 세계와 대화할 예술적 역량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문화는 국가 브랜드를 만드는 가장 강력한 자산이며, 미술은 그 국가의 철학과 미래를 보여주는 언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예술가 개인의 열정이 아니라 그 열정이 세계 무대에서 지속적으로 꽃필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국가적 전략이다. 그 토대가 마련될 때 K아트는 하나의 유행이 아닌 세계 문화의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이상미 유럽문화예술콘텐츠 연구소장

[차관칼럼] AI 통한 금융산업 혁신

이달 초 포르투갈 신트라에서 열린 유럽중앙은행(ECB) 포럼을 관통한 화두는 단연 인공지능(AI)이었다. 'AI가 과연 생산성을 얼마나 높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인플레이션, 금융안정, 통화정책의 미래까지 논의는 폭넓게 이어졌다. AI는 이제 개별 산업의 기술혁신을 넘어 거시경제와 금융시스템을 바꾸는 중대한 전환(macro-critical transition)으로 인식되고 있다. 물론 그 잠재력이 실제 생산성과 성장으로 얼마나 연결될지는 아직 검증 중이다. AI가 인플레이션을 낮출 수 있다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 케빈 워시의 견해는 AI가 생산성을 높여 공급능력을 확대하고, 그 결과 물가 상승 압력을 완화할 수 있다는 기대에 기반한다. 반면 대규모 인프라 투자로 오히려 물가를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도 공존한다. 금융안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AI 투자 확대에 따른 자산버블과 알고리즘 거래에 따른 변동성 심화 등의 우려도 있지만, 최근의 연구들은 AI나 데이터의 유형과 활용 방식에 따라 영향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논의를 보다 구체화하고 있다. 이처럼 금융은 변화의 최전선에 있다. 금융은 본질적으로 데이터를 기반으로 위험을 평가하고 자금을 배분하는 산업이기 때문에, AI의 활용 효과가 가장 크게 나타날 수 있는 분야 중 하나다. 고객맞춤형 금융서비스, 신용평가, 리스크 관리, 이상거래 탐지, 자산운용, 금융소비자 보호, 금융 보안에 이르기까지 AI가 만들어 낼 혁신의 가능성은 매우 크다. 특히 우리 금융산업은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금융 인프라와 높은 디지털 수용성으로 AI를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활용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거시경제의 향방은 기술의 발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제도와 인프라가 이러한 기술을 수용할 수 있도록 뒷받침되어야 한다. 우리의 잠재력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제도와 규제가 함께 진화해야 한다. 정부는 망분리 규제, 개인신용정보 활용체계 및 데이터 활용 관련 규제 등 AI 시대와 맞지 않는 규제들을 합리적으로 개선해 나가고 있다. 금융시스템의 안전성과 소비자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되, AI 개발과 활용을 가로막는 불필요한 규제는 적극적으로 개선해 금융권이 AI와 데이터를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나갈 것이다. 과거의 규제가 미래의 혁신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기술변화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정책도 이에 맞춰 유연하게 진화해야 한다. 이번 ECB 포럼 개막연설에서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는 18세기 정치철학자 에드먼드 버크의 말을 인용했다. "변화할 수단이 없는 국가는 스스로를 보존할 수단도 없다." AI를 통한 혁신은 더 이상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현실이다. 그 속도와 파급력은 과거 어느 기술혁명보다 빠르고 광범위하다. 이러한 전환에 얼마나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느냐가 국가와 산업의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다. 변화에 가장 빠르게 적응하는 금융이 결국 가장 강한 금융이 될 것이다. 정부는 AI 혁신이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국민의 삶과 국가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제도와 인프라를 지속적으로 정비해 나가겠다.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포럼] 뒤처진 시장연결형 AI 플랫폼

제조 인공지능(AI)은 공장 내부에서 품질과 생산성을 높이는 내부 최적화형 AI, 기업들의 데이터와 생산자원을 연결하여 거래를 형성하는 시장연결형 AI 플랫폼으로 구별할 수 있다. 한국은 내부 최적화형 AI 도입은 유리하다는 평가 속에 정부가 다양한 업종별 공정에 AI와 로봇을 접목하는 정책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문제는 시장연결형 제조 AI 플랫폼 육성은 거의 방치되는 점이다. 이 분야에서 미국이 가장 앞서고 있다. 벤처자본·소프트웨어 산업·다양한 제조업체를 기반으로 민간 주도의 AI기반 제조 거래 플랫폼이 성장 중이다. 조메트리(Xometry)의 경우 구매기업이 CAD도면과 제품 사양을 업로드하면 알고리즘이 형상, 재질, 공차, 공정 난이도, 예상 생산시간 등을 분석해 가격과 납기를 제시하고 등록된 제조업체 중 적합한 공급자를 추천한다. 2025년 말 현재 조메트리 구매자는 8만1821개, 공급자는 4996개로 나타났다. 이는 시장연결형 AI 플랫폼이 상당한 규모의 산업 거래 인프라로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플랫폼들은 생산설비를 직접 소유하지 않아도 분산된 생산능력을 하나의 가상공장처럼 활용하여 공급기업에는 유휴설비 활용과 고객 확보 기회를 제공하고 구매기업에는 공급업체 탐색, 견적 요청, 가격협상과 납기 확인 등의 거래비용을 낮춘다. 거래가 반복될수록 데이터가 축적되어 플랫폼 역량은 높아진다. 독일은 미국과 다른 양상으로 시장연결형 AI가 발전 중인바 개별 기업이 자신의 데이터를 통제하면서도 공급망 전체에서는 안전하게 공유할 수 있는 산업 데이터 공간을 구축하는 것이다. 자동차산업 카테나엑스(Catena-X)의 경우 완성차업체, 부품업체, 서비스업체들이 품질, 탄소배출, 공급망 위험 등 데이터를 표준화된 방식으로 교환하고 있다. 참여기업이 데이터 주권을 유지하면서도 필요한 상대방과 데이터를 공유하는 것이다. 중국의 움직임도 빠르다. 중국은 산업 인터넷을 인터넷·빅데이터·AI와 실물경제를 융합하는 핵심 수단으로 설정하고 업종별, 대기업 중심 플랫폼을 확산해 왔다. 최근엔 산업 인터넷 플랫폼에 AI 모델과 산업용 지능형 에이전트를 결합하고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도 이를 활용하도록 하고 있다. 이들 플랫폼은 생산관리, 공급망, 주문, 설비 연결 및 전자상거래 기능이 통합되는 양상을 보인다. 대기업이나 플랫폼 기업은 협력업체의 설비와 주문정보를 연결하고 다수의 중소기업에 표준화된 디지털 서비스를 제공한다. 한국은 생산 자동화와 내부 AI 활용에서는 주요국과 대등하게 가고 있지만, 시장연결형 AI 플랫폼에서는 취약하다. 기업 간 데이터 단절, 폐쇄적 공급망, 데이터 표준 미비와 플랫폼 사업모델 부족이 문제다. 이는 확고부동한 모기업과 협력업체 체계, 데이터 외부 공개 시 협력업체의 거래상 지위 약화나 영업비밀 유출 위험, 중소업체의 디지털 역량 부족, 데이터 표준화 미흡 등 요인에 기인한다. 향후 우리 제조업의 경쟁력은 스마트공장에만 달려 있지 않다. 공장 설비, 기술, 품질, 생산능력 데이터를 얼마나 안전하게 연결하고, 얼마나 많은 국제 거래를 창출하느냐에도 달려 있다. 시장연결형 AI 플랫폼 확산 정책이 시급한 시점이다. 정만기 한국산업연합포럼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