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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광장] 제조강국 韓, 혁신의 '두뇌' 심어라

지금 세계 경제는 단순한 경기 순환이 아니라 근본적인 구조적 전환(Structural Transformation)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인공지능(AI), 양자기술, 바이오 혁명이 산업의 경계를 허물고 있으며, 글로벌 공급망은 과거의 '효율성' 중심에서 '안보와 신뢰' 중심으로 급격히 재편되고 있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 리쇼어링, 프렌드쇼어링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생존 조건이 되었다. 이러한 대외 격랑 속에서 한국은 생산가능인구 감소가 가속화되면서 내수시장 축소와 복지비용 폭증이라는 이중고가 현실화되고 있다. 제조 강국으로 쌓아온 기반을 혁신 강국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면 장기 정체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추격형 성장 모델의 한계가 명확해진 지금, 혁신으로 돌파해야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다. 해답은 조지프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에서 찾을 수 있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데서가 아니라, 그것을 끊임없이 뒤흔드는 혁신에서 찾았다. 새로운 기술과 기업이 기존 산업을 대체하는 과정 자체가 성장의 진정한 원천이다. 여기에 내생적 성장 이론(Endogenous Growth Theory)이 힘을 더한다. 기술과 혁신은 경제 시스템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며 지식 축적, 인적 자본, 강력한 인센티브가 결합될 때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 이는 202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필리프 아기옹·피터 하윗의 '창조적 파괴를 통한 지속적 성장'과 직결된다. 한국이 과거 추격형 성장에서 벗어나 선도형 또는 혁신형 성장으로 나가려면 바로 이 혁신 메커니즘을 작동시켜야 한다. 일본은 제조 강국이 혁신 강국으로 전환하지 못한 대표적 사례다. 1980년대 세계 최고 제조 경쟁력을 가졌으나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장기 침체에 빠졌다. 카이젠식 점진적 개선에는 강했으나 파괴적 혁신과 디지털 전환을 놓친 것이 결정적 한계였다. 경직된 노동 시장과 안정 지향 문화가 창업과 위험 감수를 막았다. 반면 미국은 대학, 벤처캐피털, 자본시장이 연결된 혁신 생태계를 통해 새로운 기업을 지속적으로 탄생시켰다.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와 강력한 인센티브가 핵심이다. 부가가치만을 강조해온 탓에 발생한 제조업 공동화의 부작용에 직면해 있으나, 최근 반도체법,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을 통해 혁신과 제조 기반을 다시 결합하는 전략적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우리의 최대 무역 상대국 가운데 하나인 중국은 '연성 예산 제약'하에서 부채를 동원해 성장을 이어온 결과 지방정부와 부동산 부채가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중국제조 2025'를 통해 전기차, 배터리, AI 등 전략 산업에서 빠르게 기술 경쟁력을 축적하고 있다. 과잉생산과 혁신 역량이 결합되면서 한국에 단순한 가격 경쟁이 아닌 구조적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을 기술 추격자이자 혁신 경쟁자로 정확히 인식하고 공급망 다변화와 기술 우위 전략을 강화해야 한다. 한국 경제는 대기업 중심 연구개발(R&D)의 한계와 서비스 산업의 낮은 생산성이라는 구조적 제약에 봉착해 있다. 대기업 체계는 기술 추격에는 효과적이었으나 파괴적 혁신에서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또한 서비스업 노동생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26위로 최하위권이며, 그 격차가 계속 확대되고 있다. 각종 규제와 아날로그 법체계가 AI와 데이터 활용을 가로막아 전체 생산성 저하를 초래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제조업 편중 성장의 잔재로, 서비스 부문의 디지털 전환 지연과 규제 과잉, 중소기업의 투자 부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결국 한국 경제가 재도약하려면 혁신으로 돌파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첫째, 혁신 주체를 대기업뿐만 아니라 스타트업 등으로 다변화하고 창업부터 재도전까지 이어지는 선순환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대기업과 스타트업 간 개방형 혁신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지원정책이 필수다. 둘째, 서비스 산업의 고도화와 스마트 규제 개혁이 시급하다. AI와 데이터를 의료·교육·금융 등에 적극 도입하고, 규제 샌드박스 확대와 데이터 공유 체계를 통해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셋째,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기반 위에 AI를 접목한 지능형 제조로 전환하여 기술 주권을 확보해야 한다. 넷째, 창의성과 문제 해결 역량을 중심으로 한 인재 양성 체계로 전환하고, 노동 이동성을 높이며 주 52시간제 같은 불합리한 노동 규제를 과감히 철폐하며, 해외 인재 유입을 확대함으로써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혁신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제조라는 강력한 심장에 혁신이라는 뇌를 이식할 때 진정한 혁신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다. 박기순 한중경제포럼 회장

[기고] '연결'의 시대, 다시 뛰는 부산·경남

최근 부산과 경남에는 다시 '연결'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산업과 물류, 도시와 사람이 다시 이어져야 한다는 공감대다. 지역은 지금 또 하나의 전환점 앞에 서 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앞서가느냐보다 어떤 방향으로 함께 움직이기 시작하느냐다. 세계의 물류지도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첨단산업 경쟁 심화 속에서 이제 물류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 인프라가 되고 있다. 최근 북극항로 가능성까지 현실화되면서 항로 변화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항로가 바뀌면 물류가 바뀌고, 물류가 바뀌면 산업과 투자 흐름 역시 달라진다. 지금 부산과 경남은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다. 가덕도신공항 건설과 진해신항 조성, 북극항로 논의까지 이어지며 동북아 물류 환경 자체가 새로운 전환기를 맞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를 얼마나 먼저 읽고 실제 성장동력으로 연결하느냐다. 결국 앞으로의 경쟁력은 개별도시 경쟁이 아니라 항만과 공항, 산업과 물류가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되느냐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부산은 이미 해상 물류 경쟁력을 충분히 입증해 왔다. 신항은 대한민국 컨테이너 물동량의 중심축이자 세계적 환적항만으로 성장했고, 부산·경남·울산으로 이어지는 동남권은 조선·자동차·기계 산업이 집적된 국내 최대 제조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제조와 물류 기반이 동시에 집적된 지역은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그러나 이제는 해상 물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반도체와 바이오, 인공지능, 로봇 같은 첨단산업일수록 속도와 공급망 안정성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글로벌 주요 물류 허브들도 항만과 공항, 철도를 유기적으로 연결한 복합물류 체계를 중심으로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그 변화의 핵심에 가덕도신공항이 있다. 2035년 개항을 목표로 추진 중인 가덕도신공항이 완공되면 부산·경남은 해상과 항공, 철도가 결합된 '트라이포트' 기반을 갖추게 된다. 여기에 2040년 개항 예정인 진해신항까지 더해지면 동남권은 생산과 물류, 유통과 산업이 연결되는 거대한 복합 플랫폼으로 확장된다. 단순한 인프라 확충을 넘어 기업의 투자 환경과 산업구조 자체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다음 달이면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장으로 취임한 지도 어느덧 1년6개월, 임기 반환점을 맞게 된다. 최근 지역의 변화 역시 결국 '연결'의 문제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산업과 물류, 기업과 행정, 부산과 경남이 하나의 흐름으로 움직일 때 비로소 새로운 성장도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 역시 이러한 변화에 맞춰 새로운 역할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 개발률은 이미 98%를 넘어섰다. 이제는 얼마나 넓게 개발하느냐보다 어떤 산업을 유치하고 어떤 기업과 함께 성장할 것인가가 더 중요해진 시점이다. 단순한 산업단지를 넘어 산업과 물류, 기술과 사람이 연결되는 플랫폼으로 변화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 역시 조직체계를 다시 정비했다. 이달부터 기존 2본부 4부 12과 체제를 2본부 1실 4부 14과 체제로 확대하고, 정원도 102명에서 110명으로 늘렸다. 투자유치와 기업지원 기능을 보다 세분하고 전략산업 대응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다. '혁신성장부' 신설과 기업지원 체계 개편을 통해 기업의 투자 결정부터 성장, 후속 투자까지 보다 유기적으로 지원하는 현장중심 행정을 강화하고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수도권 중심 구조 속에서 살아왔다. 많은 청년들이 기회를 찾아 지역을 떠났고, 지역은 인구감소와 산업 침체라는 어려움을 동시에 겪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부산·경남은 다시 한번 새로운 기회를 맞고 있다. 산업과 물류, 기술과 사람이 연결되는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부산·경남은 단순한 물류 거점을 넘어 대한민국 성장의 새로운 축으로 다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변화는 단순한 지역 개발을 넘어 대한민국 성장전략의 전환과도 맞닿아 있다.박성호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장

[fn광장] '퐁피두센터 한화'에 바란다

2026년 6월 4일 서울 여의도에 퐁피두센터 한화가 개관했다. 이는 우리가 아는 해외 유명 미술관의 분관 유치가 아니다. 이번 개관은 국제 문화기관과 국내 민간기업이 협력해 새로운 문화 인프라를 구축한 사례이자, 서울이 글로벌 문화 네트워크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정책적 사건으로 볼 필요가 있다. 퐁피두센터는 단순한 전시기관이 아니다. 1977년 개관 이후 현대미술, 디자인, 건축, 음악, 영상, 퍼포먼스를 아우르는 복합문화 플랫폼으로 기능하며 현대 문화기관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 왔다. 특히 미술관의 역할을 소장과 전시에 한정하지 않고 연구와 교육, 창작 지원, 국제교류까지 확장했다는 점에서 세계 문화예술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서울에 개관한 퐁피두센터 한화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퐁피두센터 한화는 스페인 말라가, 중국 상하이에 이은 세 번째 해외 거점이다. 이는 최근 서울이 국제 미술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상의 변화를 보여준다. 프리즈 서울 개최 이후 서울은 아시아 주요 미술시장으로 자리매김했으며 국제 갤러리와 컬렉터, 문화기관의 관심도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과거 국제 문화 콘텐츠를 수용하는 시장으로 인식되던 서울이 이제는 글로벌 문화 네트워크의 주요 거점으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파리 퐁피두센터 본관이 2030년까지 대규모 리노베이션에 들어간 상황에서 서울이 해외 거점으로 선택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번 프로젝트는 문화 인프라 구축 방식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국내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이 주로 후원과 협찬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퐁피두센터 한화는 장기간의 국제 협상과 공간 조성, 운영 전략이 결합된 프로젝트다. 문화예술을 일회성 사회공헌이 아닌 지속 가능한 문화자산으로 접근한 사례라는 점에서 향후 기업 메세나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건축적 측면 역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설계를 맡은 장 미셸 빌모트는 루브르박물관 리노베이션을 비롯, 세계 주요 문화공간 프로젝트를 수행한 건축가다. 퐁피두센터 한화는 전통 기와의 곡선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도 여의도라는 도시 맥락 속에서 개방적 문화공간을 구현하고자 했다. 이는 단순한 건축 디자인을 넘어 문화공간과 도시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제안으로 읽힌다. 그러나 퐁피두센터 한화의 진정한 가치는 개관 이후의 운영 방향에서 결정될 것이다. 파리 퐁피두센터가 세계적 영향력을 확보한 이유는 단순히 유명 작품을 소장했기 때문이 아니다. 새로운 예술 실험을 지원하고 신진 예술가를 발굴하며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이 교류하는 플랫폼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퐁피두센터 한화 역시 단순한 해외 명작 전시공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국제교류의 허브로서 국내 예술가와 해외 문화기관을 연결하고, 공동 연구와 공동 제작을 촉진하며, 차세대 창작자를 육성하는 역할까지 수행해야 한다. 특히 아시아 문화기관들과의 협력 네트워크를 확대함으로써 국제 문화교류의 실질적 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의 확산은 예술 창작 환경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오늘날 문화기관은 더 이상 작품을 소장하고 전시하는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지식과 창의성, 기술과 예술이 융합되는 실험의 장이자 미래 문화 담론을 생산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국제 문화기관의 브랜드를 유치하는 것만으로 문화 경쟁력이 확보되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을 통해 어떤 창작자를 성장시키고, 어떤 예술적 실험을 지원하며, 어떤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생산하느냐다. 퐁피두센터 한화 역시 세계적 명작을 소개하는 전시장을 넘어 창작과 연구, 교육과 국제교류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개방형 문화 플랫폼으로 발전해야 한다. 국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예술가와 연구자, 시민과 산업이 만나고 협력하는 혁신 생태계의 거점이 될 때 비로소 그 존재 이유가 완성될 수 있다. 퐁피두센터 한화의 개관은 하나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다. 결국 그 가치는 얼마나 많은 관람객이 찾았는가가 아니라 한국 문화예술 생태계에 어떤 변화와 기회를 만들어냈는가에 의해 평가될 것이다. 서울이 글로벌 문화 네트워크의 핵심 거점으로 성장할지,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가 국제 문화협력과 문화인프라 구축의 새로운 모델로 자리매김할지는 앞으로의 운영 역량과 장기적 비전에 달려 있다. 이상미 유럽문화예술콘텐츠 연구소장

[포럼] 李정부의 지역외교 전략

프랑스에서 올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열리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도 초청을 받아 참석하고 있다. 한국은 2020년 이후 꾸준히 G7 정상회의에 초청을 받았다. G7 초청이 높아진 한국의 위상을 보여준다는 말이 진부할 만큼 글로벌 무대에서 우리의 위상은 높고 견고하다. 높아진 위상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우리는 이런 위상에 걸맞은 적극적이면서도 치밀한 글로벌·지역 외교전략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의문도 든다. 한국의 지역외교전략과 비전은 탈냉전 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냉전 시기 한국은 강대국이 만든 냉전질서 속에 옴짝달싹하기 어려웠다. 개발도상국인 한국의 국가 역량은 한반도 문제 관리를 위한 외교도 벅찼고 적극적 지역 정책, 비전은 먼 이야기였다. 냉전이 끝나면서 비로소 우리 외교를 구속했던 냉전질서도 느슨해졌고, 이어진 경제성장과 민주화로 우리 외교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도 늘어났다. 한반도와 주변 4강을 넘어 더 넓은 지역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는 이런 배경에서 등장했다. 체제전환을 시작한 공산권 국가들과 적극적인 관계 수립을 통해 한반도 문제 관리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넘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려는 의도가 이 정책에 드러났다.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를 화두로 삼았다. 너무 빠른 확장이란 비판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후반의 빠른 경제성장과 민주화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글로벌 차원으로 눈을 돌린 외교 이니셔티브다. 1990년대 말 경제위기 속에 탄생한 김대중 정부는 경제위기 극복을 최우선으로 했다. 함께 위기를 맞은 동남아 국가들과 연대를 통한 위기극복을 지역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다. 아세안+3 등 동아시아 지역협력에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은 이런 지역외교 전략의 결과였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가 만든 남북 화해의 분위기를 계승하면서 높아진 한국의 위상을 동북아로 투영한 동북아 균형자론에 기반한 동북아중심국가 전략을 추진했다. 이어진 이명박 정부는 신아시아 이니셔티브를 주창했다. 아시아 전반으로 외교적 초점을 확대하면서 한국의 구체적인 경제이익 실현을 앞세운 중상주의적 지역외교 전략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다시 동북아로 회귀해 동북아평화협력구상, 그리고 후반에는 이를 북방으로 연장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지역외교 전략으로 삼았다. 격화되는 미중 전략경쟁 속에서 등장한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문제에 천착하면서도 아세안, 인도를 포함한 신남방정책과 북쪽으로 눈을 돌린 신북방정책을 펼쳤다. 주변 4강 외교를 벗어나 외교적 다변화라는 화두를 실천했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뒤를 이은 윤석열 정부는 인도태평양 정책을 앞세웠다. 이재명 정부는 강대국 경쟁에 강대국 일방주의, 글로벌 및 지역질서의 혼란이라는 복합적 위기를 항해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한국의 위상, 그 어느 때보다 혼란한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 지형은 향후 글로벌 질서, 지역의 미래와 질서를 어떻게 형성해갈지에 대한 한국의 구체적 비전과 전략을 그 어느 때보다 필요로 한다. 이런 시대적 요구에 답할 수 있는 이재명 정부의 지역외교전략이 긴요하다는 것은 필자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

[기고] 베트남 농산물 판매의 역설

베트남내 여러 농업협동조합은 미국·일본·유럽 등 기준이 까다로운 선진국 시장에 다양한 농산물을 수출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선진국 수출 기준을 충족한 이러한 농산물이 베트남 내수시장에서는 판매가 부진하다. 람동성에서 용과를 생산하는 호아레 농업협동조합은 생산된 용과가 베트남 유기농 기준(VietGAP)을 충족해 생산량의 80% 이상을 중국, 유럽, 일본 등으로 수출하고 있지만, 베트남 국내 시장에서 판매되는 용과는 수출용만큼 인기가 높지 않다. 즉, 생산한 농산물이 세계 여러 시장의 수출 기준을 충족한다면 국내 소비도 더 수월해야 하나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가격인데, 가격은 베트남 소비자의 구매결정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동탑성 호아록 모래망고 협동조합에 따르면, 호아록 모래망고의 가격은 일반적으로 kg당 약 7만₫으로, 태국·인도·중국 등에서 수입되는 망고보다 ㎏당 약 2만동 비싸다. 베트남 소비자들은 구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비싼 가격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즉, 여러 농업협동조합들이 수출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투자를 확대함에 따라 상승된 생산 비용으로 인해 판매 가격이 높아지면서 국내 판매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역설은 수출 기준을 충족하는 제품들이 베트남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베트남 사람들은 껍질이 검게 변한 잘 익은 바나나를 선호하는데, 이는 잘 익은 바나나가 더 달콤하고 향이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 소비자들은 껍질이 단단한 덜 익은 바나나를 더 선호하는데, 이는 덜 익은 바나나가 건강에 좋은 영양소가 더 많이 함유되어 있고 신선하고 안전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또한, 수출용 자몽과 오렌지는 신선해야 하지만, 베트남 소비자들은 약간 시든 자몽과 오렌지를 선호한다. 셋번째 이유는 수출은 주로 기술 표준 충족에 초점을 맞추면 되지만, 국내 판매는 소비자의 인식과 구매 습관이 더 우선하기 때문이다. 해외 고객들은 원산지·균일성· 포장 규격 등 일반적으로 명확한 기준 체계에 따라 농산물을 구매한다. 즉, 그들은 단순히 농산물을 사는 것이 아니라 품질 시스템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 소비자들은 해당 농산물이 선진국의 수출 기준을 충족하더라도 포장이 매력적이지 않거나 브랜드 인지도가 약하거나 차별성이 부족하다면 선택하지 않는다. 또한, 다양한 농산물이 전통시장·온라인·슈퍼마켓 등 다양한 유통채널을 통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다른 대안을 쉽게 찾을 수 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농산물이 풍작을 이루고 품질은 전혀 떨어지지 않음에도 가격이 하락하는 경우가 있다. 이제 베트남 농업협동조합은 농산물 생산 뿐만 아니라 브랜딩·유통체계 강화 등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품질은 단순히 필요조건일 뿐이고, 이제는 소비자가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포럼] 수익률 낮은 아파트 월세 시장

최근 아파트 시장을 두고 '월세나 전월세 전환율이 크게 올랐다'는 분석이 쏟아진다. 뉴스만 보면 월세 시장이 임대인 우위로 급격히 재편되고, 월세 투자 수익률도 좋아진 것처럼 비친다. 그러나 이 두 용어를 동일 선상에서 해석하면 오류가 발생한다. 전월세 전환율과 월세 투자 수익률은 서로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전월세 전환율의 출발점은 전환가격이다. 전세보증금을 월세로 전환할 때 보증금 1원당 얼마의 월세를 받을지 결정하는 비율이다. 이 지표의 용도는 명확하다. 임차인에게는 전세와 월세 중 어느 쪽이 주거비 측면에서 유리한지 따지는 기준이 되고, 임대인에게는 '보증금 대신 월세를 얼마로 책정할지' 알려주는 가이드라인이 된다. 기준금리와 비교해 현재 월세가 적정한지를 가늠하는 잣대로 활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투자자 관점의 월세 투자 수익률은 전혀 다른 질문에서 시작한다. 투자금액 대비 세전 임대수익의 비율인 명목 수익률을 기준으로 자산의 가치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게를 차릴 때 초기 투자자금 대비 예상 매출과 총수익률을 따져보는 것과 유사하다. 다시 말해 투입한 자본이 외견상 얼마의 수익을 창출하는지 그 '체급'을 먼저 비교하는 원리다. 문제는 이 두 개념이 시장에서 자주 혼용된다는 점이다. '전월세 전환율이 4~5%대이니 월세 수익률도 그만큼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대표적이다. 현실은 딴판이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 3월 서울 아파트 전월세 전환율은 4.7%, 수도권은 5.1%, 전국은 5.3%를 기록했다. 그러나 실제 아파트 월세 수익률은 이 수치에 턱없이 못 미친다. 서울의 경우 적게는 2%대, 많아야 3%대를 넘는 곳을 찾기 힘들다. 이들은 계산의 출발점부터 다르다. 전환율은 세입자에게 돌려줄 보증금을 기준으로 따지지만, 투자 수익률은 집을 살 때 들어간 매입가격을 기준으로 계산하기 때문이다. 매매가가 지나치게 높게 형성된 아파트 시장에서는 월세가 아무리 올라도 매매가격 상승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실제로 KB부동산에 따르면 올 들어 5월까지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지수는 5.47% 상승했다. 반면 같은 기간 월세지수는 3.63% 오르는 데 그쳤다. 전세(3.49%)보다는 높지만 매매가 상승률보다는 확연히 낮다. 결과적으로 아파트 월세 시장은 기묘한 모순에 빠져 있다. 임차인 입장에서는 월세 부담이 눈에 띄게 커졌지만 투자자 입장에서는 여전히 매력적이지 않은 자산이다. 아직 전세제도가 남아있기도 하지만 급등한 매매가격 탓에 초기 투자금 장벽이 너무 높아진 게 핵심 요인이다. 아파트는 월세라는 현금흐름보다는 자본이득으로 보상을 받는 부동산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단순 수치가 아니라 어떤 기준 위에서 도출되었는지 본질을 꿰뚫어 보는 일이다. 전월세 전환율의 상승은 주거비 구조가 변화하고 있다는 신호일 뿐 아파트 월세 투자의 수익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는 증거가 아니다. 이 두 개념을 명확히 분리하지 않으면 월세 시장의 착시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특히 월세를 받아 노후 생계비를 마련하려는 고령 은퇴자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전면 월세 시대가 도래하면 월세 투자 수익률은 개선될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점이 오기까지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

[fn광장] 국민연금 기금운용 성과, 개혁 마무리

2025년 국민연금 개혁은 보험료율을 9%에서 13%로 단계적으로 인상하고 소득대체율을 43%로 조정함으로써 적립기금 소진 예상연도를 2064년으로 늦추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개혁 직후부터 다소 미흡하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5차 재정계산위원회가 정책 목표로 제시한 2093년까지의 기금 유지에는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3년의 기금운용 성과와 향후 수익률 전망을 함께 놓고 보면, 그 평가는 달라진다. 기금운용 성과가 제도 개혁의 공백을 메우며 연금개혁을 사실상 완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기금은 최근 3년 괄목할 만한 수익률을 거두고 있다. 2025년 한 해에만 수익률 18.82%의 역대 최고 성과를 달성했고, 2026년에도 코스피 급등과 해외자산 호조에 힘입어 적립기금은 1800조원을 상회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성과 배경에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 주가가 글로벌 인공지능(AI)·로봇 혁명의 흐름을 타고 큰 폭으로 상승한 것과 정부의 금융시장 선진화 정책이 주효했다. 해외주식 비중 확대와 원화 약세에 따른 환차익도 기여했다. 기금운용 성과는 연금재정 전망의 근본적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필자가 추산한 바로는, 최근 성과를 기반으로 향후 연 5.5%의 수익률이 계속된다면 기금 소진 예상연도는 2095년으로 늦추어져 5차 재정계산위원회가 목표로 삼았던 2093년까지의 기금 유지가 달성된다. 2025년 제도 개혁만으로는 부족했던 30년의 간극을 기금운용 성과가 채워주는 구조다. 기금운용의 성과로 연금개혁이 완성되는 것이다. 가입자와 수급자의 추가 고통 없이 기금운용 수익으로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발군의 사례가 될 수 있다. 국민연금의 성과 의미는 생각보다 깊다. AI·로봇 혁명이 불러온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소수의 대기업 주주에게만 막대한 이익을 집중시킨다는 비판을 낳고 했다. 일부에서는 초과이익의 사회적 공유를 별도의 제도적 장치를 통해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그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대주주로서 이들 기업이 창출한 가치 상승을 기금수익으로 흡수하고, 이를 전 국민이 가입한 연금의 재정 안정으로 환원하고 있다. 기업의 성장 과실이 자본시장을 통해 공적연금 재정으로 흘러드는 이 구조야말로 별도의 세금이나 규제 없이 작동하는 가장 효율적인 이익공유 모델이다. 국민연금이 대형 성장주를 보유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 공유의 실현 수단이 되고 있다. 다만 이 성과를 기금운용 성과만으로 귀속시켜서는 안 된다. 2025년 연금개혁으로 보험료율이 인상되면서 기금에 유입되는 재원의 규모 자체가 커졌다. 더 많은 보험료가 투입되었기 때문에 같은 수익률로도 더 큰 절대 수익금이 발생할 수 있는 구조다. 개혁이 없었다면 기금 규모는 작았을 것이고, 운용 성과의 파급력도 반감되었을 것이다. 적립방식 연금제도에서 연금개혁과 기금운용은 상승적 관계이며, 어느 하나만으로는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성과에 안주하기에는 구조적 취약성이 존재한다. 평가이익의 상당 부분이 미실현 상태이고, 국내주식 비중이 이미 계획치를 초과하여 30% 내외에 달한 점은 새로운 긴장 요인이다. 국민연금 기금운용계획으로 담기 어려운 높은 주식성과로 리밸런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전대미문의 폭발적 주식시장 성장으로 자본시장의 구조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새로운 기금운용계획이 만들어져야 한다. 특정 시점의 평가이익을 구조적 개선으로 해석하는 낙관론적 편향을 경계해야 하고, 하방 시나리오와 스트레스 테스트를 병행하는 신중함이 요구된다. 구조적으로 아직 확장기에 있는 국민연금에서의 국내주식 비중 조정은 기계적인 매도가 아닌 신규 유입 재원의 해외자산 배분을 통한 자연스러운 희석 방식으로 접근해야 시장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 더욱 바람직하게는 기금운용 평균 수익률이 장기적으로 6.5%를 상회할 수 있도록 하여 급여지출이 본격화될 때 발생 가능한 멜팅다운(melting down·기금 잠식)을 막는 것이다. 최근 3년간 국민연금의 빛나는 성과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연금개혁이 기반을 다지고, 기금운용이 그 위에서 성과를 만들어낸 결과다. 이제 과제는 이 성과를 일시적 호황으로 소모하지 않고, 적립기금 소진 방지라는 궁극적 목표를 향한 지속적 역량 강화로 이어가는 것이다.김용하 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

[fn광장] ESG 환상 접고 사업 본질 집중해야

도덕론과 종말론이 결합하면 무소불위가 된다. 세계의 종말에 대비하고 인류를 구원하는 대의명분으로 절대적 권위를 확보하기 때문이다. 각종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교리의 기본적 구조에서 도덕적 당위론과 종말적 구원론이 교차하는 이유이다. 사회경제적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에너지 고갈, 식량위기, 물 부족 등이 단골 메뉴로 변주된다. 또한 이러한 사안들은 다양한 이해관계와 결합되면서 사회적 영향력이 생겨나고 기업경영에도 파급되었다. 1968년 서유럽 지식인들을 주축으로 국제 전문가그룹인 로마클럽이 발족하였다. 1972년 출간한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는 인구 증가, 공업생산, 식량생산, 환경오염, 자원고갈의 5가지 분야에 대해 1900년부터 1970년까지의 자료를 바탕으로 2100년까지 추이를 예측했다. 핵심은 세계인구가 증가하고 자원소비가 계속되면 현대문명은 한계에 도달한다는 경고였다. 특히 석유와 천연가스의 고갈시기를 20~30년 후인 2000년대로 전망하였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이러한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셰일가스와 심해유전을 비롯해 확인된 에너지 매장량은 오히려 대폭 증가하였다. 이러한 오류와는 무관하게 로마클럽이 제시한 유한한 자원과 무한한 성장의 충돌이라는 거대담론은 자원고갈과 문명종말의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지속가능성의 개념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이러한 맥락에서 2000년대 기업분야에서 환경·사회·지배구조(ESG)경영이 부각되었다. 21세기 기업 도덕론인 ESG는 기후변화, 자원절약, 환경보호, 다양성 확보, 사회갈등 해소 등 각종 사안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였고 금융업계는 일부 투자와 대출에 ESG 요소를 반영하였다. ESG는 정치권, 언론과 학계, 전문가 집단 및 시민단체가 기업에 각자의 입장에 따른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한 효과적 명분이 되었다. 심지어 전 세계에서 대주주·경영진의 도덕적 흠결을 가리는 전술적 도구로서 ESG가 호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일종의 메가트렌드인 ESG는 미국에서부터 거품이 빠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하고 국제기후금융계획도 폐지하였으며 화석에너지 관련규제도 대대적으로 철폐하고 있다. 미국 주요 산업에 대한 부담 감소라는 경제적 측면과 함께 탄소배출과 기후변화의 상관성 등에 대한 실질적 근거도 불명확하다는 입장이다. 실제로도 화석연료 사용과 기후변화의 상관성에 대한 과학적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또한 ESG를 주도하던 유럽의 경제적 쇠퇴도 동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특히 친환경 저탄소 관련기술을 선도하여 차세대 산업경쟁력으로 발전시키려던 유럽연합(EU)의 미래산업 구상이 차질을 빚으면서 자동차, 화학 등 주요 산업들이 난관에 봉착했다. 글로벌 자동차 산업이 대표적이다. 21세기 초반 전기차(EV)는 온실가스 배출감소를 통한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대의명분에 배터리 기술발전이 결합되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증폭되었다. 각국 정부도 보조금 지급, 충전인프라 확충 등으로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독일의 벤츠, BMW, 미국의 GM, 포드 등은 2030년대 100% EV 전환을 선언하였다. 일본의 닛산은 EV 선구자였고, 혼다도 적극적으로 투자하였다. 반면 도요타는 급격한 EV 의무화 정책에 부정적 입장으로 하이브리드-EV 병행전략을 표방하였고, 전 세계 ESG 투자자와 환경단체로부터 변화를 거부하는 시대착오적 기업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기존 자동차 기업 중에서 최대 승리자는 도요타이다. 현재 도요타는 하이브리드를 앞세워 글로벌 자동차 시장 1위를 질주하는 반면 여타 회사들의 EV 투자는 회수 불가능한 매몰비용으로 전락하고 있다. 특히 혼다는 EV사업 정리에 따른 90억달러 손실로 1957년 상장 이후 69년 만에 적자로 전환하였다. 기존 주요 자동차 기업들이 미래전략산업으로 추진했던 EV시장의 주도권마저 신규 참가자인 미국 테슬라와 중국 BYD에 넘어갔다. 현시점 우리나라 기업의 입장에서 ESG의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는 없다. ESG 흐름을 각자의 입장에서 적절히 수용하면 된다. 다만 ESG의 트렌드에 경도되어 현실과 사업전략이 유리되는 경우는 경계해야 한다. 정치사회적 트렌드에 과잉반응하여 추진하는 사업의 실패는 오롯이 기업의 손실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ESG 거품은 소위 본진인 미국부터 급속하게 빠지고 있다. ESG의 도덕론적 한계를 통찰하고 사업의 본질인 고객과 시장에 천착해야 한다. 김경준 전 딜로이트컨설팅 부회장

[포럼] 과학기술 외교력이 국가 경쟁력

지난달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제11회 유엔 과학기술혁신(STI) 포럼'이 열렸다.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주관 포럼은 2030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달성을 위해 과학기술의 역할을 논의하는 국제 무대다. 올해도 전문가 500여명이 기후위기, 빈곤, 청년창업, 기술격차 등 복합과제를 논의했다. 필자는 유엔 과학기술 전문가그룹 위원으로 '물 시스템 전환' 세션과 '청년창업 지원' 특별세션에 패널로 참여했다. 물 부족 문제 논의 중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의 물 소비가 주요 의제로 떠올랐다. 빅테크 데이터센터의 막대한 냉각수 사용으로 일부 지역의 식수 공급까지 우려된다는 내용이었다. 기후와 빈곤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AI 인프라 문제가 핵심 의제로 다뤄진 장면은 상징적이다. 과학기술이 산업과 연구 영역에 머물지 않고 국제질서와 외교·안보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확장됐음을 보여준다. 과학과 외교가 맞물려 움직인 역사는 오래됐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핵무기 개발 후 핵 비확산 논의의 문제의식과 근거를 제공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는 백신이 외교 수단이 됐다. 2021년 이스라엘은 시리아에 스푸트니크V 백신 비용을 지불하고 억류된 자국민을 돌려받았다. 백신이 적성국과의 협상에서 외교 카드로 활용된 사례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외교를 보조하는 수단을 넘어 국제질서를 움직이는 권력이 됐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스타링크는 전장 통신망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고, TSMC의 반도체 생산 역량은 미중 전략경쟁의 핵심 변수로 거론된다. 유전체 데이터는 안보자산으로 분류되고, 반도체 공급망 재편은 국가 간 연구협력까지 흔들고 있다. 첨단기술은 이제 경제와 안보, 외교를 동시에 움직이는 전략자산이다. 이런 시대에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에서 앞서려면 기술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국제 의제를 선점하고,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연구 성과를 세계의 규범과 표준으로 연결하는 힘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과학기술 외교력이다. 2023년 서울에서는 노벨상 수상자들과 청소년들이 대화하는 '노벨프라이즈 다이얼로그'가 열렸다. 필자는 조직위원장으로 참여하며 스웨덴 등 여러 나라가 수십년간 구축한 글로벌 과학 네트워크의 힘을 실감했다. 일본의 노벨과학상 수상자 27명 배출 배경에도 연구 투자뿐 아니라 국제사회와 연결해 온 시간의 축적이 있다. 우리에게도 그런 축적이 필요하다. 그 연결의 시간을 한국도 이제 본격적으로 쌓아가야 한다. 우리 연구자들이 국제 회의장을 더 자주 찾아야 하고, 한국 과학기술의 성과가 세계의 언어로 더 폭넓게 오가야 한다. 과학기술외교는 선언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자리에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사람이 꾸준히 나타나야 한다. 기술패권 시대의 경쟁은 더 많은 기술을 개발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기술의 규칙과 표준을 누가 만들고, 어떤 가치와 방향으로 이끌어 가느냐의 경쟁으로 이어진다. 과학기술이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시대라면 과학기술 외교력은 곧 국가 경쟁력이다. 문애리 한국여성과학기술인 육성재단 이사장

[포럼] 스타벅스의 출구 전략

영미권과 달리 한국의 기업은 오너가 직접 경영하거나 영향력을 발휘한다. 덕분에 의사결정이 빠르고, 책임감도 강하다. 특히 산업화 시절에 오너 창업주의 리더십은 강력했다. 그들은 일자리를 만들고, 국가경제를 일으켰다. 비록 정경유착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지만, 존경받을 자격은 충분하다. 그러나 오늘의 오너 경영인은 과거 창업주와 다르다. 일부 오너 경영인은 기업을 자신의 이미지와 취향을 드러내는 무대로 착각한다. 개인의 이익과 인기가 기업의 장기적 신뢰보다 앞선다. 오너의 인식 오류는 개인의 실수로 끝나지 않는다. 피해는 주주, 근로자, 협력업체, 납품 중소기업으로 번진다. 스타벅스는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에 '탱크데이' 프로모션을 시작하면서 현대사의 아픔을 희화화했다. 비난이 쏟아지자, 정용진 회장은 대표이사와 담당 임원을 해임했다. 반나절 만이었다. 그러나 여론은 정용진 회장의 정치 성향에 주목했다. 오너가 계열사의 프로모션까지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너의 성향은 조직의 문화에 스며들 수밖에 없다. 이번 스타벅스 논란은 그런 점에서 새로운 형태의 오너리스크다. 1966년 당시 비료는 국가의 핵심 산업이었다. 삼성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은 울산에 세계적 규모의 공장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건설자재를 수입하면서 사카린 원료를 밀반입했다. 식용 사카린을 제조해 이익을 취하려 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창사 이래 최대 위기였다.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했고, 관련 임원인 차남과 함께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로부터 1년5개월 후 경영에 복귀했고, 1969년 삼성전자를 설립했다. 2014년 대한항공의 '땅콩회항' 사건도 사회를 들끓게 했다. 조현아 당시 대한항공 부사장은 승무원의 기내 서비스가 맘에 들지 않자 이륙하려던 여객기를 강제로 되돌렸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갑질에 그치지 않았다. 총수 일가의 지배구조 문제로 번졌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직접 사과했고, 당사자도 부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여론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다만 불매운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리 미워도 외국에 가려면 대한항공을 타야만 했다. 마침 해외유행 붐이 일었었다. 스타벅스의 오너리스크는 생각보다 오래갈 수 있다. 과거 삼성은 기업 헌납과 회장 퇴진이라는 초강수를 뒀다. 그리고 삼성전자라는 획기적 전환점을 만들었다. 스타벅스는 사과와 임원 해임 그리고 행사를 기획한 실무팀을 해산한 것밖에 없다. 정용진 회장은 이번 문제를 마케팅 실수와 검수 실패쯤으로 본 듯했다. 시간이 흐르면 해결될 거란 생각은 버려야 한다. 대한항공처럼 수요 폭발과 독과점적 시장 구조의 덕을 기대할 수 없다. 커피는 대체재가 많아 스타벅스 말고 갈 곳이 많기 때문이다. 스타벅스의 오너리스크는 법적 책임을 묻기 어렵다. 그 대신 소비자의 감정과 기억에 더 오래 남을 것이다. 오너리스크가 무서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관건은 스타벅스의 출구전략이다. 오히려 오너리스크를 스스로 도려내야 한다. 오너의 성향과 기업 운영을 분리하고, 조직의 문화를 바꿔야 한다. 시장과 소비자가 인정할 때까지 변화하고, 신뢰를 쌓아야 한다. 스타벅스가 존경받는 기업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오동윤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

[fn광장] HBM 넘어 V-D램 준비하라

인공지능(AI)이 촉발한 메모리 슈퍼사이클이 한국 반도체 산업을 다시 끌어올리고 있다. 올해 1·4분기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매출 81조원, 영업이익 53조원을 기록했고 SK하이닉스도 매출 52조원, 영업이익 37조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생성형 AI 확산으로 그래픽처리장치(GPU)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결합한 AI 가속기 수요가 폭증하면서 HBM, 서버용 D램, 낸드플래시까지 동반 호황을 맞은 결과다. 그러나 지금의 호황이 곧 미래의 초격차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AI 서버 투자는 2029년 이후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공급 부족이 길어질수록 후발국과 신규 기업의 진입 동기도 커진다. 범용 D램과 낸드 가격이 급등하는 시기일수록 기술 선도기업은 현재 수익을 미래 연구개발(R&D)과 공급망 강화에 재투자해야 한다. 메모리 산업의 경쟁축은 이미 단순 증산에서 차세대 구조 전환으로 이동하고 있다. HBM4는 2048비트 인터페이스와 스택당 2TB/s 수준의 대역폭을 요구하고, HBM4E는 더 높은 속도와 열·전력 조건을 요구할 것이다. D램은 11㎚급을 넘어 10㎚ 이하로 진입해야 하고, 낸드플래시는 300단 이상 수직적층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더 큰 과제는 기존 2차원 D램 셀의 한계를 넘어서는 3차원 V-D램 또는 3D-D램이다. 2029년 이후에도 기술우위를 유지하려면 셀 구조 설계, 주변회로와 셀의 수직접합, 초박형 웨이퍼 가공, 하이브리드 본딩 등 전혀 다른 난도의 공정을 양산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이는 단순한 선폭 축소가 아니라 재료, 장비, 패키징, 계측 기술이 동시에 바뀌는 산업 전환이다. 중국의 추격도 더 이상 가볍게 볼 수 없다. CXMT는 범용 D램 시장에서 점유율을 빠르게 높이며 4위권 사업자로 부상했고, HBM 개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YMTC는 270단 안팎의 3D 낸드를 양산하고 300단 이상 제품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술격차는 존재하지만 중국 정부의 지원과 내수 시장, 국산 장비 사용 확대가 결합되며 추격 속도는 빨라지고 있다. 미국의 수출규제가 중국의 첨단 공정을 늦추는 효과는 있지만, 동시에 중국의 소재·부품·장비 국산화를 가속하는 역설도 만들고 있다. 한국이 메모리 소자 기술만 앞서고 장비·소재 생태계에서 뒤처진다면 초격차의 기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의 과제는 명확하다. 첫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현재의 HBM 증설에 머물지 말고 10㎚ 이하 D램, V-D램, 3D-D램, 16단 이상 HBM을 동시에 준비해야 한다. 둘째, 국내 소재·부품·장비 기업은 기존 공정의 대체공급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하이브리드 본딩, 초박형 다이 핸들링, 웨이퍼 박막화, 고정밀 계측·검사 등 차세대 공정에서 차별화된 제품을 확보해야 한다. 셋째, 정부는 단기 과제가 아니라 5년 이상 장기 로드맵을 기반으로 R&D, 실증, 양산 검증을 연결해야 한다. 반도체 장비와 소재는 연구실 성능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수요기업의 테스트베드와 초기 구매, 정부의 위험 분담이 결합돼야 실제 양산에 들어갈 수 있다. 특히 국산화율이라는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특정 공정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신뢰성과 수율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대학·연구소·소재·부품·장비 기업이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는 12인치 웨이퍼 실증 인프라인 트리니티 팹이 조속히 구축·운영되어야 하며, 전문인력 양성체계도 확충해야 한다. 실패 위험이 큰 선행 공정일수록 민간 소재·부품·장비 기업의 단독투자가 어렵기 때문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역대 최대 영업이익 일부를 활용해 연 1조원 규모의 소재·부품·장비 기초연구 자금을 출연하고, 이를 통해 국내 소재·부품·장비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시대의 메모리 호황은 한국 AI 반도체 산업에 다시 찾아온 기회다. 그러나 중국과의 격차가 줄어드는 속도를 고려하면 안심할 수 없다. 현재의 실적에 취해 미래 구조 전환이 늦어진다면 초격차는 순식간에 평준화될 수 있다. 중국은 더 이상 저가 범용 제품만으로 경쟁하지 않는다. 장비와 소재까지 함께 키우며 한국의 약한 고리를 파고들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차세대 메모리 구조와 국내 소재·부품·장비 생태계를 함께 키우는 국가적 전략이다. 지금의 투자 결정이 2030년 글로벌 메모리 지형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반도체의 다음 10년은 HBM의 성공을 넘어 V-D램과 3D-D램,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국내 공급망을 얼마나 빨리 양산 경쟁력으로 연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석학교수

[기고] 새 정부 1년, 기초연구의 새로운 길 열어

새 정부 출범 1년이 지났다. 과거에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찬바람이 기초연구 생태계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그 복원을 위한 힘찬 여정의 시간도 1년이 벌써 지난 것이다. 지난 1년간 예산의 복원을 넘어 기존의 예산보다 확대되는 등, 기초연구 생태계는 이제 회복의 과정 중에 있다. 기초연구에 대한 지원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의 확보가 국가 경쟁력의 출발점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새 정부의 기초연구 R&D 지원 방침 중 두드러지는 특징은 청년 연구자에 대한 다양한 지원, 우수 연구자에 대한 장기적 안정적 지원, 개인 연구를 넘어선 기관 차원의 연구생태계 강화, 그리고 지역 R&D의 활성화 등이다. 과학연구 성과의 대국민 홍보에도 힘을 써서 기초연구의 중요성을 체감하게 하겠다는 방향성도 바람직하다고 본다. 다만 준비 없이 진행된 지난 정부의 글로벌 R&D 사업에 대한 반작용으로 해외관련 연구지원을 지나치게 축소하지는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 인재가 해외 지식의 큰 바다에서도 헤엄칠 수 있도록 단단히 지원하는 일도 병행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 벌어진 기초연구진흥협의회 회의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당시 기초연구예산을 대폭 삭감하고는 기초연구의 방향 자체도 수월성 위주의 연구로만 집중하겠다는 정책 기조가 제시되었던 때였다. 기초연구는 도전적 연구를 다양하게 수행할 수 있어야 탁월한 성과가 나온다. 다양성은 배제하고 수월성만 추구하겠다면 그건 기초연구 진흥과는 거리가 먼 철학이라는 점이 너무나 명확했다. 당시 회의에서 일부 위원이 사퇴하는 등 위기가 고조되었지만 결국 기초연구의 방향을 '다양성 위의 수월성' 으로 재정립하자는 절충안으로 기초연구진흥협의회의 회의 파행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다양성 기반의 수월성' 기조가 새 정부에서 진행하고 있는 모든 기초연구 진흥사업의 실질적인 기반이 되어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아무런 협의나 공감대 없이 하루 아침에 정부 R&D가 무너질 수 있다는 충격적 경험은 학문후속세대로 하여금 기초연구에 몰입해서 얻을 수 있는 보람의 크기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의 크기가 훨씬 크게 느껴 지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다행히 지난 1년간 현장 목소리에 과기정통부와 교육부가 귀를 기울였다. 그 덕에 젊은 연구자 지원이 두터워 졌고 기회의 폭도 넓어졌다. R&D 예산 대폭 삭감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국가 예산의 10%를 기초연구에 투자토록 하는 '기초연구진흥법의 개정안'이 국회에 올라가 있으니 통과를 희망해 본다. 없던 길을 새롭게 찾아 가는 것이 선진국 대한민국의 기초연구가 가야 할 길이다. 가다 보면 길이 된다.이준호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포럼] AI시대 방송, 소유 논쟁 넘어야

한국 미디어 산업이 생존의 갈림길에 섰다. 지상파와 케이블TV, 국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와 지역 미디어는 글로벌 플랫폼 공세 속에 광고 감소와 제작비 급등이라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문제는 단순한 경기침체가 아니다. 인공지능(AI)과 플랫폼 중심의 새로운 질서가 기존 방송 산업의 문법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방송 산업의 위기는 산업 경쟁력의 위기인 동시에 규제체계의 위기다. 현재의 방송 규제는 전파와 채널이 희소자원이던 시대를 전제로 설계됐다. 그러나 오늘날 공론장은 방송사의 편성표보다 플랫폼 알고리즘 위에서 더 빠르게 형성된다. 방송 권력의 중심은 채널 소유에서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이동했다. 과거의 규제는 더 이상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글로벌 플랫폼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국내 방송법 규제는 거의 받지 않는다. 반면 국내 방송사는 여전히 소유제한, 광고 규제, 재승인 심사라는 과거형 규제 틀에 묶여 있다. 국내 사업자만 양손이 묶인 채 글로벌 플랫폼과 경쟁하는 구조가 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공영성을 과거의 소유구조 논리로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공영성은 더 이상 "누가 소유하느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정치 권력의 영향 아래 흔들리는 공영 구조 역시 우리는 이미 수없이 경험해 왔다. 반대로 민간자본의 참여가 곧바로 저널리즘 붕괴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소유 형태가 아니라 거버넌스다. 편집권 독립과 뉴스룸 자율성을 실제로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 구조가 존재하느냐다. 최근 방송사 소유구조를 둘러싼 갈등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진다. 승인 절차의 위법성은 사법부의 몫이다. 그러나 글로벌 OTT와 빅테크의 공세 속에서 장기자본 투자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현실도 직시해야 한다. 그 귀한 투자가 콘텐츠 경쟁력과 기술혁신이 아닌 소유권 분쟁과 정치 공방으로 소진된다면 산업 전체의 손실이다. 이제는 소유 주체를 둘러싼 논쟁을 넘어 어떤 제도와 거버넌스가 산업 경쟁력과 공적 책임을 함께 담보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모아야 한다. 소유권을 둘러싼 공방이 길어질수록 미래 미디어 질서를 위한 개혁과제는 의제의 뒷자리로 밀린다. 우리가 과거를 둘러싼 논쟁에 힘을 쏟는 사이, 미래를 설계할 골든타임은 줄어들고 있다. 시장 논리에만 맡기자는 것도 아니다. AI 시대의 공영성은 오히려 더 강한 기준을 필요로 한다. 알고리즘 추천이 여론을 좌우하고 AI 생성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에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투명성, 공적 저널리즘의 신뢰, 그리고 뉴스 데이터의 공공성이 핵심자산이 된다. 이제 공영성은 단순한 소유규제가 아니라 데이터와 알고리즘 시대의 공적 책임체계로 재설계돼야 한다. 결국 지금 필요한 것은 과거 질서를 되돌리는 것이 아니다. 글로벌 플랫폼 시대에 맞는 새로운 공영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일이다. 어떠한 형태의 힘으로부터 독립된 편집구조를 만들지 못한다면 공영성은 지켜질 수 없다. 지속가능한 산업 기반 없이 공영성만 외치는 것 역시 공허하다. AI 시대 방송의 공영성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떻게 데이터를 통제하고, 알고리즘을 설계하며, 공적 신뢰를 지켜낼 수 있느냐의 문제다.모정훈 연세대 산업공학과 교수

[기고] 희귀 림프종 환자와 첫 면역세포치료

지난 4월, 국내 첫 '첨단재생의료 치료'가 승인되었다. 재발 위험이 높은 희귀 림프종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세포치료가 첨단재생의료 치료 제도 시행 이후 처음으로 의료현장에서 시행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면역세포치료는 환자 자신의 면역세포를 활용해 암의 재발을 억제하고 장기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치료법으로, 희귀·난치 질환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기존 치료로는 더 이상 선택지가 많지 않은 환자와 가족에게 새로운 치료법이 절실하다. 때로는 해외 치료를 고민하고, 때로는 검증되지 않은 광고 앞에서 희망과 불안 사이에 놓이기도 한다. 이러한 환자와 그 가족들이 보다 안전한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과 책임이다. 첨단재생의료란 세포와 유전자 기술을 활용해 손상된 조직이나 기능을 회복하고, 질병의 원인을 치료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의료기술이다. 기존 의료로 치료가 어려웠던 질환에 근원적 치료 가능성을 제시하는 미래 정밀의료의 핵심 분야다. 환자의 세포가 치료의 재료가 되고, 질병의 원인을 보다 정밀하게 겨냥하며, 손상된 기능의 회복을 도모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실제로 첨단재생의료 임상연구를 통해 환자의 상태에 맞춰 제작한 인공 기도를 이식해 성공적으로 생착시키는 성과가 나오면서, 새로운 치료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정부는 이러한 가능성이 보다 확실한 효과를 달성하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왔다. 지난해 2월 첨단재생의료 치료제도를 시행해 대체 치료가 부족한 희귀·난치질환 환자에게 새로운 치료 기회를 제공할 길을 열었다. 의료기관은 인력과 시설·장비를 갖춰 첨단재생의료실시기관으로 지정받아야 하며, 실제 치료를 하려면 대상, 안전성·유효성 근거, 비용 등을 심의받아야 한다. 치료 기회는 넓히되, 국민이 안심할 수 있는 기준과 절차는 꼭 준수하겠다는 원칙이다. 최근 첨단재생의료 치료 1호 승인은 이러한 제도적 준비가 실질적인 환자 치료로 이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앞으로도 정부는 심의체계를 지속적으로 보완하고 의료와 연구현장의 의견을 반영하여 필요한 환자에게 적시에 치료 기회가 연결될 수 있도록 하겠다. 기술 발전만큼 중요한 것은 신뢰다. '첨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모든 시술이 안전성과 효과를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이에 정부는 재생의료 관련 거짓·과대광고에 대한 온라인 모니터링도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 7월부터 11월까지 블로그, 유튜브, SNS, 홈페이지 등을 점검해 거짓·과대광고 246건을 확인하고, 63개 의료기관에 대해 지방자치단체의 조치를 요청했다. 첨단재생의료는 국민 생명과 직결되는 분야인 만큼 혁신과 안전의 균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부는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안전관리 체계를 바탕으로 첨단재생의료 기술이 의료 현장에서 보다 원활하게 희귀·난치질환자의 치료에 활용될 수 있도록 제도를 지속 보완해 나가겠다.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한 합리적 규제혁신을 통해 환자의 치료 기회를 확대하고, 우리나라가 글로벌 첨단재생의료 선도국가로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이형훈 보건복지부 제2차관

[차관칼럼] 재난 대응에 '과함'은 없어

집중호우와 폭염 같은 여름철 자연재난의 빈도와 강도가 해마다 더 심각해지고 있다. 지난달 12일 경남 남해군에는 시간당 50㎜가 넘는 집중호우가 쏟아지며 올해 첫 호우 긴급재난문자가 발송됐다. 이어 20일에는 인천과 경기, 전남, 경남 등에 호우주의보가 발효되며 첫 호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가동됐다. 이는 지난해보다 약 20일 빠른 대응이다. 폭염도 심상치 않다. 세계기상기구(WMO)는 지구 연평균 기온이 가장 높았던 2024년의 기록을 향후 5년 안에 넘어설 확률이 86%에 달한다고 전망했다. 실제 지난달 18일 경북 김천시의 낮 기온은 36도까지 치솟았고, 서울에서는 벌써부터 폭염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는 온열질환 감시체계 시작 이래 가장 빠른 인명피해다. 기후변화는 숫자로 확인된다. 기상청에 따르면 시간당 50㎜ 이상 집중호우 발생 빈도는 1970년대 연평균 10회에서 2020년대는 31회로 세 배 이상 늘었다. 지난해 폭염일수는 29.7일로 평년 11일의 두 배를 훌쩍 넘었다. 이러한 기후재난에 대응해 정부는 올여름 인명피해를 획기적으로 줄이겠다는 목표 아래 '범정부 여름철 자연재난 종합대책'을 마련했다. 지난달 15일부터 10월 15일까지를 여름철 자연재난 대책기간으로 정하고, 24시간 상황관리 체계를 가동한다. 위험 기상이 예보되면 즉시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소집하고, 필요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가동해 총력 대응에 나선다. 특히 집중호우에 대비해 산사태, 하천 재해, 지하공간 침수 등 3대 유형의 인명피해 우려지역을 지난해 8964개소에서 올해 9412개소로 확대 지정하고, 지역별 특성에 맞춘 통제·대피 기준을 강화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전 대피'다. 전국 모든 시군구에 주민대피지원단을 구성하고, 이·통장과 자율방재단 등 9만4315명이 참여한다. 고령자와 장애인처럼 혼자 대피가 어려운 2만4500여명을 우선대피 대상자로 지정하고, 주민대피지원단과 일대일로 연계해 안전한 대피를 돕는다. 위험상황 발생 시에는 긴급재난문자와 함께 민방위 사이렌까지 활용해 신속하게 대피를 유도한다. 폭염 대응도 한층 강화했다. 올해부터는 하루 이상 일 체감온도 38도 이상이 예상될 경우 '폭염중대경보'를 발령, 범정부 대응을 한층 강화한다. 에너지 취약계층의 냉난방비 등을 지원해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폭염 시 사업장 작업 중지와 충분한 휴식을 적극 안내한다. 더위를 피할 수 있도록 금융기관 등 민간시설을 포함해 무더위쉼터도 더욱 다양화했다. 또 물·그늘·휴식의 온열질환 예방 3대 수칙도 적극 홍보할 계획이다. 국민주권정부는 '국민의 목숨을 살리는 정부'를 목표로, 인명피해 최소화를 최우선에 두고 과하다 싶을 정도의 선제적 대응을 할 계획이다. 국민 여러분께서도 집 주변 배수로와 빗물받이를 사전에 점검하고, 대피소 및 무더위쉼터 위치와 행동요령을 미리 숙지해 주시길 당부드린다. 위험요소를 발견하면 '안전신문고'에 신고하고, 가족과 이웃의 안전도 함께 살펴봐 주시길 부탁드린다.김광용 행정안전부 재난안전관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