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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반도체는 공공재가 아니다

인공지능(AI) 시대 반도체는 산업과 국가안보의 핵심 투입재가 되었다. 선진국은 반도체 산업 재구축에 나섰고, 중국의 추격도 강화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보고 정부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다만 반도체의 중요성이 커졌다는 사실과 반도체가 공공재가 되었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문제다. 공공재란 비경합성과 비배제성이라는 특성을 가진 재화를 말한다. 비경합성이란 한 사람이 어떤 재화를 소비해도 다른 사람이 소비할 수 있는 몫이 줄어들지 않는 성격이다. 비배제성이란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사람을 이용에서 배제하기 어려운 성격이다. 국방의 경우 국민 중 어떤 한 사람이 안보위협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보호가 줄어들지 않는다. 또한 특정 개인이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사람만 안보위협으로부터 배제할 수도 없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공공재는 시장에 맡길 경우 무임승차 문제가 발생하고, 수요 대비 공급이 적게 될 수 있다. 따라서 국방, 치안 등의 분야에서는 정부의 직접공급 또는 강한 공적 개입이 불가피하다. 반도체는 공공재 특성에 부합하지 않는다. 특정 기업이 어떤 반도체 칩을 구매하면 다른 기업은 바로 그 칩은 구매할 수 없다. 소비가 경합적이란 것이다. 또한 반도체는 가격을 지불하지 않는 기업이나 사람은 소비에서 배제할 수 있다. 반도체는 명확히 사적 재화란 것이다. 다만 반도체는 일반 소비재와 달리 많은 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고, 공급차질 발생 시 전후방 산업파급효과가 막대하며 미중 기술패권 경쟁, 경제안보와도 직결된다. 국가전략적 산업재로 불리는 이유다. 그러나 혼동을 해서는 안 된다. 반도체가 전략적 산업재라는 것은 기업의 이윤을 사회적으로 환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이는 국제경쟁 속에서 국내 생산기반, 기술역량 유지를 위해 기술보호, 조세·금융 지원, 전력·용수 공급 확대 등 투자환경을 지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전략산업이라는 것은 정부 지원의 근거이지 이윤 환수의 근거가 아니다. 따져야 할 것은 정부 지원조건의 투명한 집행과 이행 여부다. 이를 따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기업 이윤을 사회적으로 환수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는 없다. 공적 지원의 집행관리와 이윤의 사회적 귀속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국민 다수가 주주다" "세금이 투입됐다" "전력과 용수가 사용됐다"는 것도 반도체를 공공재로 만드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아주 많은 지원을 했건, 국민 다수가 지분을 소유했건 이들이 제품 특성을 바꿀 수는 없다. 공공재 여부는 재화 특성, 즉 비경합성과 비배제성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정책 논의는 '공공재'라는 오해가 아니라 전략산업 입장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정부 지원은 국가 경제와 안보에 매우 중요한 사적 재화이기 때문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개념을 잘못 이해하면 정책 방향이 흐려진다. 정부는 이윤 환수가 아니라 기업이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도록 기술·인력·인프라·금융 환경을 뒷받침해야 한다. 개념 혼동이 아니라 정확한 이해의 토대 위에서 정책이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정만기 한국산업연합포럼 회장

[fn광장] 쿠팡 공룡화 부른 한국형 규제의 역설

2025년 11월 정부 조사에서 쿠팡의 3370만개 계정에 대한 개인정보 접근 정황이 확인되면서 온라인 유통시장에서 압도적 영향력을 가진 쿠팡을 둘러싼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공정거래위원회가 김범석 쿠팡Inc 이사회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하자 쿠팡 측이 이에 불복, 해당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논란은 개인정보 보호 문제를 넘어 기업지배구조와 규제체계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또한 쿠팡은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쿠팡Inc가 지분 100%를 보유한 국내 자회사라는 점에서 이번 사안은 단순한 기업 규제 문제를 넘어 한미 간 정치적 논쟁으로도 번지고 있다. 미국 공화당 의원 54명은 강경화 주미대사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 정부가 미국 기업을 "표적으로 삼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발한 범여권 국회의원 90여명은 주한 미국대사관에 항의서한을 전달하며 "대한민국의 사법주권과 독립적인 법 집행을 전적으로 존중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처럼 개별기업이 정부의 정책 결정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하고, 나아가 한미 양국 국회의원들이 특정 기업을 둘러싼 규제 문제를 놓고 공개적으로 항의서한을 주고받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단순히 쿠팡이라는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규제체계와 글로벌 경제환경의 충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쿠팡의 성장에는 혁신적 물류투자와 서비스 경쟁력이라는 내부 요인이 있었지만, 의도와는 별개로 '유통산업발전법'에 따른 규제환경 역시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이 법은 전통시장과 골목상권 보호라는 정책목표 아래 대형마트의 의무휴업과 심야영업 제한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실제 소비자들은 대형마트가 쉬는 날 전통시장으로 이동하기보다 쿠팡·네이버·컬리와 같은 24시간 이용 가능한 온라인 플랫폼으로 이동하였다. 오프라인 점포를 기반으로 한 대형마트는 경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였고, 전통시장 활성화 효과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해당 규제는 온라인 플랫폼 기업의 시장지배력 확대라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 측면이 있다. 다음으로는 공시대상기업집단의 실질적 지배자를 동일인으로 지정하는 이른바 갈라파고스적 규제 문제가 있다. 동일인으로 지정되면 친족·특수관계인 관련 공시 의무가 확대되고 내부거래 및 사익편취 규제도 강화된다. 국내법적 관점에서는 기업집단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국적과 관계없이 동일인으로 지정하는 것이 공정하다. 물론 외국기업이라고 해서 다른 외국기업이나 국내기업과 다른 기준이 적용되어서도 안 된다. 과거 쿠팡이 자체브랜드(PB) 상품과 직매입 상품의 검색순위를 인위적으로 높였다는 이른바 '검색 알고리즘 조작 사건'으로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를 받았을 때에도 동일한 기준이 한국 시장에 진출한 해외 플랫폼 기업들에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규제의 공정성은 규제의 강도뿐 아니라 적용의 일관성에서도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글로벌 기업 관점에서는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미국 증시에 상장된 기업의 창업자를 한국의 전통적인 재벌 총수와 동일한 기준으로 규제하는 것은 국제적 기업지배구조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과도한 규제라고 주장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규제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러한 상반된 시각과 논란이 발생하는 배경에 한국만의 독특한 제도와 규제체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한국 경제는 한국 특유의 규제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외국기업의 한국 투자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투자기업들이 투자지역이나 제도적 환경에 따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면 한국의 투자매력도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는 결국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으며, 한국 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번 쿠팡 사태는 한국 경제가 다른 선진국들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국내외 기업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규제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입각해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중요한 것은 규제의 완화나 폐지 자체가 아니라, 규제가 의도한 정책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면서도 시장의 혁신과 경쟁을 저해하지 않는 합리적 규제체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한국 경제가 글로벌 시장과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는 상황에서 국내 정책목표를 유지하면서도 국제적 정합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제도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강성진 한국경제학회 회장·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포럼] 세계 최고 수준의 中 인공위성

중국의 인공위성이 얼마나 막강한지 잘 알려진 바 없다. 인공위성이 배치되는 지구 궤도 가운데 고도 2000㎞ 이내의 우주공간은 저궤도, 고도 약 3만6000㎞는 정지궤도라고 부른다. 한국의 천리안 기상위성은 고도 3만6000㎞의 정지궤도에 위치해 지구 자전 속도와 비슷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항상 한반도를 관측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구름의 분포와 비구름 여부를 파악하고 태풍 등 자연재해를 미리 예측하는 데 활용된다. 중국은 저궤도 위성을 활용해 일본 도쿄 인근 요코스카에 배치된 주일 미군 제7함대의 동향과 나가사키 인근 사세보 해군기지의 강습상륙함 움직임 등을 탐색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일본 항공자위대 간부는 중국이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고도 7000㎞의 중궤도에 다수의 첩보위성을 배치해 인도태평양 지역 전반을 감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 위성은 북위 20도에서 적도, 남위 20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모두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강국인 미국도 이 고도에 첩보위성을 쏘아 올리지 않았기에 경계감을 더욱 높이고 있다. 이 중궤도 위성은 저궤도 위성의 단점을 보완한다. 저궤도 위성은 특정 지역을 수분 정도밖에 관측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지만, 중국의 중궤도 위성 2기는 1시간20분 정도 긴 시간을 추적 관찰할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은 중궤도 위성으로 확보한 정보를 저궤도 첩보위성과 연계해 지상 15㎝ 이상 크기의 물체를 감시하고 있으며, 한국.일본.북한 등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다. 중국은 2004년도에 달탐사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2024년에 무인탐사기 '상아 6호'를 달 뒷면에 세계 최초로 착륙시켜 시료를 채취하여 지구로 귀환시켰다. 중국이 달을 주목하는 이유는 물이다. 1998년 미국의 탐사기가 달에 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최근에는 달의 남극과 북극에 약 60억t의 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물이 있으면 물을 전기분해해 로켓의 연료가 되는 수소와 산소 획득이 가능해 달에 기지를 세우고 장기체류할 수 있다. 일본 역시 광학위성과 레이더 위성 등 총 11기의 정보수집위성을 운용하며 지구상 어느 지점이든 하루에 한 번 이상 관측할 수 있는 우주강국으로 평가받는다. 일본은 약 300명 규모의 우주작전군을 창설한 데 이어 2026년 말까지 670명 규모의 우주작전단으로 확대 개편하고, 2027년에는 880명 규모의 우주작전집단으로 격상해 우주의 군사적 활용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에 비해 우주개발을 늦게 시작했지만, 국방부의 정찰위성 5기를 통해 북한 전역을 샅샅이 감시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부분이다. 이제 우주개발은 단순한 과학기술 경쟁을 넘어 국가안보의 핵심 영역이 되고 있다. 특히 고도 7000㎞ 안팎의 중궤도는 상대적으로 활용 사례가 많지 않은 영역으로 꼽힌다. 그런데 중국은 저궤도와 정지궤도에만 위성을 배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궤도에 인공위성을 올려 지구를 감시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중궤도는 주로 전지구측위시스템(GPS) 위성이 자리하고 있는 궤도인데, 중국은 첩보위성을 배치하고 있다. 우주 전문가들은 미국도 배치하지 않고 있는데 중국이 중궤도에 배치하고 있는 것은 극히 예외적이라고 분석한다. 인공위성은 우주 공간에서 방사선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데, 특히 중궤도는 저궤도보다 방사선 피폭량이 높아 내구성 측면에서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김경민 한양대 명예교수

그때 누가 한 번만 더 물어봐 줬더라면[부장판사 출신 김태형 변호사의 '알쏭달쏭 소년심판']

[파이낸셜뉴스]2016년 그리고 그 이후 몇 년 동안 소년부 판사로 일하며 수많은 소년들을 만났습니다. 법정에 선 소년들은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뒤에는 늘 하나의 공통된 질문이 숨어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어디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을까?" 어떤 아이는 충동적으로, 어떤 아이는 반복된 방치 속에서, 또 어떤 아이는 도움을 요청할 곳조차 몰라 결국 그 자리에 서게 됩니다. 판사로서 나는 그들의 '행동'을 판단해야 했지만, 동시에 그 행동 뒤에 있는 '이유'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아이들이 선택한 너무나 위험한 방법 어느 해 소년보호협의회(가정법원, 소년원, 아동복지시설, 보호관찰소, 청소년상담복지센터 등 소년재판과 관련된 다양한 기관의 관계자들이 1년에 한 번씩 모여 현장의 목소리를 공유하고, 각 기관이 겪는 어려움과 제도적 한계를 솔직하게 나누는 자리임)에서 들은 이야기는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일부 청소년들이 더 가벼운 처분을 받기 위해 '임신'을 선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곧 그것이 단순한 소문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년들은 SNS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판사가 엄한지, 어떤 경우에 처분이 약해지는지, 마치 시험 대비 요령을 나누듯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비행 청소년들 사이에서 소년원 처분을 자주 내리는 판사를 '10호 천사'라고 부른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임신하면 처분이 가벼워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퍼졌고, 그것을 그대로 믿고 행동으로 옮긴 소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충격과 함께 깊은 슬픔을 느꼈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품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처벌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물론 소년원이나 아동복지시설은 집단생활을 전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임산부가 생활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더 마음이 아팠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 선택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거운 일인지 그 소년들은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소년의 선택을 함께 책임져 줄 어른이 없었습니다. 법정에서 울며 "아이를 낳아 키우겠다"고 말하던 비행소년들 중 상당수는 사회 내 처분을 받은 이후 임신을 중단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이 소년들의 문제가 결코 그 소년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모의 관심, 가정의 안정, 그리고 소년을 붙잡아 줄 누군가의 존재. 그 중 하나라도 무너질 때 소년은 생각보다 훨씬 쉽게 잘못된 선택 앞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칙을 더 엄격히 세우기로 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임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분이 달라지지 않도록 말입니다. 시간이 지나자 그런 선택을 하는 소년들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이 경험은 제도의 작은 틈이 어떻게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소년들이 보내온 편지 소년재판이 끝난 뒤에도 소년들과의 인연은 완전히 끝나지 않습니다. 소년부 판사는 소년에 대한 처분 이후에도 집행 감독의 차원에서 일정 기간 동안 그 소년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지켜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종종 소년들로부터 편지를 받습니다. 어떤 편지는 짧았습니다. 하루 일과를 적어 내려간 일기 같은 글도 있었고, 어떤 편지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가득 담겨 있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소년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길게 풀어놓으며 자신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편지는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내용이 담긴 편지들이었습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요.""다시 시작해 보고 싶어요." 시설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소년들은 처음으로 멈춰 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제야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누군가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지만, 누군가는 그 시간 속에서 처음으로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그 변화의 시작을 담은 편지는 길지 않아도 묵직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집행 감독을 하는 모든 소년들에게 공평해야 했고 판사로서 비행소년들과의 거리도 필요했기 때문에 그 편지들에 답장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편지를 보낸 소년들을 만날 때마다 꼭 한마디는 전했습니다. "네 편지, 잘 읽고 있다." 부모에게 드리고 싶은 이야기 이 글을 읽고 계신 부모님들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훨씬 쉽게 흔들립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대화를 미루는 하루, 아이의 변화를 지나치는 한 번의 순간, "괜찮겠지"라고 넘긴 작은 신호들. 그런 것들이 쌓여 아이를 점점 혼자 서게 만듭니다. 물론 모든 상황을 부모가 막아줄 수는 없습니다. 아이는 결국 스스로 선택을 하며 자라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이 곁에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자리'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만들어진다는 점입니다. 법정에서 수많은 비행소년들을 만나는 동안 소년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던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때 누가 한 번만 더 물어봐 줬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아이를 지키는 일이 생각보다 거창한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저 한 번 더 묻고, 한 번 더 듣고, 한 번 더 기다려주는 것만으로 충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한 번이 아이의 인생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김태형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 l 김태형 변호사는 가사∙상속 분야 전문가이다. 2007년 법관 임용후 2024년 수원가정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17년간의 법관생활을 끝내고 법무법인 바른에 합류했다. 김태형 변호사는 법관시절 2012년부터 총 8년간 가사∙상속 및 소년심판 업무를 담당했다. 특히 법관 퇴직 전 5년(2019~2024)간 수원가정법원에서 가사소년전문법관으로 수많은 가사∙상속 관련 케이스를 처리하면서 이 분야의 전문성을 확보했다. 베스트셀러인 "부장판사가 알려주는 상속, 이혼, 소년심판 그리고 법원"(박영사, 2023)의 저자이기도 하다.

[포럼] 韓 북방외교 근본부터 재설계 하자

미중 정상회담과 중러 정상회담이 연이어 개최되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남북 관계를 포함한 동북아 질서가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그동안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북러 군사협력이 강화되고 미중 전략경쟁이 장기화되면서 한반도 긴장 고조와 안보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론만으로는 급변하는 현실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롭게 형성되는 북방 질서 속에서 우리의 전략적 공간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변화는 북한의 노선 전환이다. 북한은 지난 3월 헌법 개정을 통해 기존의 통일·민족 개념을 삭제하고 사실상의 '두 국가 노선'을 공식화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중심의 통치체제를 강화하고 핵무력 지휘체계를 명문화한 것은 단순한 대남 압박을 넘어 체제 생존전략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이후 유지돼 온 남북 특수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국내 일각에서는 여전히 과거의 통일담론이나 선언적 접근에 머물러 현실을 충분히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북러 밀착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북극항로와 극동개발의 전략적 가치를 더욱 중시하고 있다. 중국 역시 정상외교 재개를 통해 북중 협력 기반을 확대하고 중국 중심의 경제·안보 질서 안에 북한을 안정적으로 편입시키려 한다. 북미 정상회담에 대비하면서 동시에 북한은 미국과의 전략경쟁에서 활용할 수 있는 지정학적 카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앞으로는 북방 경제와 지역 협력이 새로운 핵심 변수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두만강 개발과 북극항로(NSR)를 연결하는 북방전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후변화로 북극항로의 상업적 가능성이 확대되면서 러시아 극동과 동북아를 잇는 물류경쟁이 본격화될 경우 나진항과 두만강 유역의 전략적 중요성도 더욱 커질 전망이다. 따라서 한국의 북방외교 역시 근본적인 재설계가 필요하다. 미·중·러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이 지역을 단순한 갈등의 단층선이 아니라 '경제적 완충지대'로 전환할 수는 없을까. 그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광역두만개발계획(GTI)의 재활성화다. 지난해 12월 러시아에서 열린 GTI 총회에서는 교통, 무역·투자, 관광, 에너지, 환경, 농업 등 주요 협력분야의 추진 현황과 향후 협력방안이 논의됐다. 특히 GTI의 국제기구화와 북한 재참여 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뤄졌으며, 회원국들은 '모스크바 선언'을 통해 역내 협력 확대 의지를 재확인했다. 이는 단순한 경제협력 사업을 넘어 북방 지역을 새로운 평화·물류 협력축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물론 국제 제재와 미중 전략경쟁 심화로 인해 실질적 협력에는 적지 않은 제약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제 북방외교는 과거의 자원외교나 단순 경협을 넘어 안보·물류·공급망·디지털·기후협력을 결합한 복합전략으로 재구성돼야 한다. 한반도의 미래는 이제 남북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 전체 질서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안보위기를 평화적 공존과 지역 협력의 기회로 전환하려는 모색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점이다.권율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fn광장] 비교하는 사회에서 행복감 찾기

삼성전자 노조 사태로 긴장된 나날들이 지나고 드디어 타협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노사 모두 많은 고충이 있었을 것이고, 최종 결과가 양측 모두에 완벽히 만족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태를 지켜보던 우리들은 일단 한국 경제의 불안요소 하나가 제거된 것에 안도감을 느낌과 동시에, 이후 그들이 받게 될 성과급을 떠올리며 아픈 배를 쓰다듬게 된다. 무려 6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성과금액 앞에 한없이 초라해지는 나의 월급 통장. 어느 순간 자책과 자괴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인간의 본능 중에는 늘 자신과 누군가를 비교하게 되는 '사회비교욕구'라는 게 있다. 자신의 신념, 능력, 성과를 평가할 때 절대적 기준보다는 '타인과의 비교'라는 상대적 거울을 사용한다. 이 비교는 상향비교와 하향비교라는 2가지 속성의 방향성을 가진다. 이 중 '상향 사회비교욕구'는 나의 성장과 발전에 밑거름이 되는 긍정적 작용을 한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능력이나 조건을 가진 사람과 비교하며,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성취지향적 동기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고, 결국 자신이 세운 목표를 달성하게 만드는 강력한 동인으로 작동한다. 자신을 발전시키는 건강한 욕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비교 대상과의 격차가 너무 크거나 극복 불가능하다고 느끼게 되면, 자존감이 급격히 하락하고 상대적 박탈감이나 시기심이 생길 수도 있다. 이런 박탈감은 그저 상대의 존재만으로도 무기력과 우울감을 유발하기도 한다. 또 다른 방향의 비교욕구는 주관적 안녕감의 회복을 위해 사용되는 '하향 사회비교욕구'다. 나보다 처지가 나쁘거나 더 많은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과 비교하며 '그래도 내가 저 사람보다는 나으니까'라는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과 동시에, 타인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사회 전체에 온기를 퍼트리는 긍정 요인이 된다. 하지만 이 하향 비교가 지나치면, 오히려 사회악이 되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실패하거나 곤란한 일을 겪는 모습을 보는 사람의 뇌를 촬영했을 때, 보상중추인 기쁨 중추가 활성화되는 실험의 결과처럼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즉 타인의 불행에서 기쁨을 느끼는 고약한 감정이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접하는 요즘, 우리들은 매 순간 상향 비교욕구와 하향 비교욕구 상황에 노출된 채 살아간다. 나보다 나은 사람들의 사진과 영상을 보면서 부러워하다 시기심이 생기고, 질투에 지쳐 나 자신을 비하하다 보면 어느새 우울감에 휩싸인다. 반면 연예인, 정치인, 기업인 등 유명인들의 작은 실수 하나에, 그들의 수많은 과거 사건들이 소환되고 비난과 질책이 쏟아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그 잘나가던 사람의 하염없는 추락 앞에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저렇게 유명하지 않은 나, 저렇게 잘나가지 못한 내가 더 낫다는 안도감으로 그나마 행복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사회비교욕구의 비교 대상이 전 세계 사람들 대상이 아니라는 데 있다. 바다 건너 일론 머스크가 제 아무리 대단한 재벌이라 해도 그를 시기하며 우울해하진 않는다. 자신이 기준으로 삼는 것은 바로 자기 주변 환경이라는 참조집단 이론(Reference Group Theory)에 의하면 결국 회사 동료, 친구, 친척 등이 비교 대상일 수 있다. 한 실험에서 개인의 지능과 역량을 평가하는 시험이라며, 친한 친구와 잘 모르는 사람 중 한 명에게 힌트를 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 결과 놀랍게도 타인보다 가까운 친구에게 도리어 힌트를 주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다. 즉 가까운 친구가 나보다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은 내 자존감에 치명상을 입히지만, 잘 모르는 타인의 점수는 관심 대상이 아니므로, 무의식적으로 친구의 성공을 방해한 것이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진급 기회가 거의 없는 부대의 군인들보다 진급 기회가 많아 주변 동료들이 자주 진급하는 부대의 군인들이 오히려 진급에 대한 불만과 박탈감이 훨씬 크다는 것을 발견했다. 결국 비교욕구는 멀리 있는 대상이 아니라 같은 사회계층, 같은 조직 내 동료나 친구, 가족 등 가까운 상대에게 작용하는 것이다. 지금은 삼성전자 성과급이 많은 사람들에게 허탈감을 안겨주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 잊혀질 이슈이다. 다만 삼성과 비슷한 위치의 기업, 또는 삼성 내 타 계열사나 부서 간 성과급 차이로 인한 박탈감은 쉬 가시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박탈감이나 우울감의 부정적 정서가 우리 경제의 균열을 만드는 작은 틈으로 작동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DGIST 석좌교수

코스피 좌우하는 삼전닉스…'선도기업 쏠림' 자연스러운 현상 [한미재무학회]

【 뉴욕=이병철 특파원】 최근 한국 주식시장은 인공지능(AI) 반도체 산업에 대한 기대와 글로벌 유동성 환경 변화 속에서 빠른 상승과 높은 변동성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코스피 지수가 역사적 고점 부근까지 상승하는 과정에서 이를 단순한 버블이나 과열로 해석해야 하는지, 혹은 글로벌 기술 패러다임 변화와 한국 기업들의 구조적 재평가 과정으로 봐야 하는지를 둘러싼 논쟁 역시 커지고 있다. 멍고 윌슨 영국 옥스퍼드대 경영대학원 재무경제학 교수와 류동한 영국 옥스퍼드대 재무학 박사과정 학생의 대담을 통해 최근 한국 증시의 급격한 변화와 글로벌 자본시장의 흐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리고 현대 자산가격이론이 오늘날 시장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지 들어봤다. 윌슨 교수는 자산가격결정이론(Asset Pricing)을 중심으로 금융시장이 거시경제 정보와 불확실성, 그리고 투자자 간 신념 차이를 어떻게 가격에 반영하는지를 연구해 온 세계적 석학이다. ―현재 집중하고 있는 연구 주제와 자산가격결정 분야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재무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 중 하나는 결국 이것이다. "위험한 자산의 가격과 기대수익률은 어떻게 결정되는가"라는 문제다. 전통적인 자본자산가격결정모형(CAPM)은 시장 전체 움직임에 대한 민감도인 '베타(Beta)'만으로 자산의 위험 프리미엄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이론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실제 금융시장에서는 CAPM이 항상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난 수십년간의 실증 연구들은 베타가 높은 자산이 반드시 더 높은 수익률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반복적으로 보여줬다. 학계에서는 이를 재무학의 대표적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로 여겨 왔으며, 나 역시 바로 그 지점에서 큰 학문적 흥미를 느끼게 됐다. 내 연구의 핵심 관심사는 시장이 '언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위험을 가격에 반영하는가에 있다. 특히 투자자들이 거시경제 정보와 불확실성을 어떻게 해석하는지가 자산가격 형성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발표한 연구 가운데 하나가 2014년 논문 '자산가격: 이틀의 이야기(Asset Pricing: A Tale of Two Days)'다. 이 논문에서는 금융시장의 거래일을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나 소비자물가지수(CPI) 발표와 같은 주요 거시경제 발표일과 그렇지 않은 날로 구분해 분석했다. 흥미롭게도 평상시에는 잘 작동하지 않던 CAPM이 거시경제 불확실성이 집중되는 발표일에는 매우 강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투자자들은 중요한 정보가 공개되는 순간 시장 전체의 체계적 위험(systematic risk)을 다시 평가하며, 그에 상응하는 더 높은 위험 프리미엄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결국 금융시장은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위험을 가격에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와 불확실성이 집중되는 특정 시점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연구들을 보면 기업 실적 발표 역시 시장 전체 위험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투자자 간 정보와 신념 차이가 자산가격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최근 연구들로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핵심 질문은 금융시장이 새로운 정보를 어떻게 가격에 반영하는가, 그리고 투자자들이 불확실성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점이다. 초기 연구에서는 연준 회의나 물가 발표처럼 거시경제 정보가 공개되는 특정 시점에 주목했다. 그런데 연구를 이어가다 보니 흥미로운 점은 시장 전체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주체가 반드시 중앙은행이나 정부 발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개별 기업의 실적 발표 역시 투자자들에게 경제 전반에 대한 중요한 신호(signal)를 제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기업의 실적은 단순히 그 기업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 산업의 수요 상황이나 소비 흐름, 나아가 경제 전반의 상태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을 수 있다. 최근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투자자 사이 정보와 신념 차이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전통적 재무이론은 시장 참여자들이 대체로 동일한 정보를 공유하고 비슷한 방식으로 위험을 평가한다고 가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현실의 금융시장은 훨씬 복잡하다. 투자자들은 같은 정보를 보더라도 서로 다른 기대와 해석을 갖고 있으며, 바로 그 차이가 가격 변동성과 거래를 만들어낸다. 최근 발표한 논문 '잃어버린 자본자산가격결정모형(The Lost Capital Asset Pricing Model)'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우리는 흔히 CAPM이 실증적으로 실패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투자자들 사이 정보와 기대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연구자가 관찰하는 '베타'와 투자자들이 실제로 인식하는 위험 사이에 괴리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시장의 변동성이나 가격 움직임은 단순한 비이성적 과열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투자자들이 미래 경제 상태를 다르게 해석하는 과정의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내 연구 전반의 공통된 관심사는 정보(information), 불확실성(uncertainty), 그리고 투자자 간 신념의 이질성(heterogeneity)이 금융시장 가격 형성에 어떤 방식으로 반영되는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근 한국 증시처럼 AI 반도체 기업을 중심으로 빠른 상승과 높은 변동성이 동시에 나타나는 시장 역시 단순히 '버블' 여부만으로 설명하기보다는 투자자들의 기대와 신념 차이를 함께 봐야 한다는 뜻인가. ▲시장이 빠르게 상승하면서 동시에 변동성도 큰 상황에서는 사람들은 보통 그것이 버블인지 아닌지를 먼저 묻는다. 물론 지나친 낙관론이나 투기적 요소가 일부 존재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연구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시장 참여자들이 미래 경제와 기업 실적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특히 최근 한국 시장은 단순한 국내 시장이라기보다 글로벌 거시경제와 기술 사이클에 매우 깊게 연결돼 있다. 한국 경제는 반도체와 첨단 제조업 비중이 높고 AI 인프라 투자 확대나 글로벌 기술 수요 변화에 직접적으로 노출돼 있다. 따라서 투자자들은 단순히 현재 실적만이 아니라 미래 AI 수요, 글로벌 성장 경로, 미국 통화정책, 그리고 장기적인 기술 패러다임 변화까지 함께 가격에 반영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투자자 간 기대와 신념 차이 역시 자연스럽게 커질 수밖에 없다. 어떤 투자자들은 AI 중심 기술 변화가 장기간 지속될 구조적 변화라고 보는 반면, 다른 투자자들은 지나치게 빠른 기대 반영이나 향후 경기둔화 가능성을 우려할 수 있다. 결국 시장의 높은 변동성은 단순히 비이성적 과열의 증거라기보다 미래 경제 상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충돌하고 있다는 신호로도 볼 수 있다. ―특히 최근 한국 증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소수 반도체 기업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커졌다는 평가가 많다. 미국 역시 '매그니피센트 7(Magnificent 7)' 중심의 집중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전통적 자산가격이론은 시장 포트폴리오가 비교적 잘 분산돼 있다는 암묵적 가정을 두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미국이든 한국이든 소수 초대형 기술기업들이 시장 전체 움직임을 크게 좌우하는 구조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 이런 집중 현상은 단순히 특정 기업 규모 확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투자자들은 이러한 기업들을 미래 기술 혁신과 글로벌 성장의 핵심 수혜자로 인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시장 전체 기대와 거시경제 전망이 이들 기업 가격에 매우 강하게 반영된다. 다시 말해 특정 기업의 움직임이 점점 더 시장 전체 기대를 대표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시장 역시 매우 흥미로운 사례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은 단순한 개별 기업 뉴스라기보다 글로벌 AI 투자와 반도체 수요, 나아가 세계 경기 흐름에 대한 신호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기업의 실적 발표나 전망 변화가 코스피 전체 변동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교수님의 연구들을 보면 미국 연준 정책 발표가 글로벌 금융시장에 매우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도 강조했다. 실제 한국 증시 역시 국내 변수보다 미국 금리나 연준 발언에 훨씬 민감하게 움직인다는 평가가 많은데. ▲실제로 내 연구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결과 가운데 하나는 글로벌 금융시장이 미국 연준 통화정책 변화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현상이 미국 시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국을 포함한 많은 개방형 경제의 주식시장 역시 미국 통화정책 발표일에 높은 민감도를 보인다. 그 이유는 연준 정책이 단순히 미국 단기금리만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할인율(discount rate)과 자본 흐름, 그리고 위험 선호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처럼 글로벌 무역과 기술 산업 의존도가 높은 경제에서는 이러한 영향이 더욱 크게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최근 한국 증시를 이해할 때도 국내 변수만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글로벌 유동성과 미국 통화정책, AI 중심의 글로벌 기술 투자 사이클이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있는지를 함께 볼 필요가 있다. 현재 시장 변동성 역시 이러한 거대한 글로벌 정보 흐름 속에서 투자자들이 미래를 계속 재해석하는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 멍고 윌슨 교수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사이드비즈니스스쿨 재무학과 정교수이다. 실증재무와 자산가격결정(Asset Pricing) 이론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CAPM과 위험 프리미엄, 거시경제 불확실성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경제학 및 재무학 주요 학술지에 발표해 왔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PPE(Philosophy, Politics and Economics) 전공으로 학사를 취득했으며,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pride@fnnews.com

[기고] 에이전틱 AI가 재편하는 비즈니스의 미래

지난 20일과 21일, 서울 코엑스에서 개최된 'AWS 서밋 서울 2026'이 막을 내렸다.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이한 AWS가 약 2만 7000명의 참가자와 함께한 이번 행사에서 확인한 가장 큰 흐름은 명확했다. AI가 단순 기능 중심 생산성 도구를 넘어 실제 업무 프로세스와 조직 운영 체계 전반을 재편하는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기업 현장에선 AI가 사람의 지시를 기다리는 수동적 조력자를 넘어 실제 운영 흐름 안에서 역할을 분담하는 주체로 진화하고 있다. 특히 스스로 판단하고 실행하는 '에이전틱 AI'가 등장하면서, AI는 실제 비즈니스 운영 안으로 빠르게 내재화되기 시작했다. '어떤 AI를 도입할 것인가'는 이미 시효가 지난 질문이다. 기존 운영 구조를 AI와 함께 작동하는 형태로 전환하는 것이 기업 앞에 놓인 본질적인 과제다. 이러한 변화는 제조, 커머스, 콘텐츠, 로보틱스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 걸쳐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은 아마존 베드록 등 AWS 서비스 기반으로 AI를 활용해 피부 진단부터 제품 추천까지 이어지는 고객 경험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하고 있다. NC AI 역시 단 한 장의 사진과 짧은 음성 대화만으로 모델 컷과 패션 영상, 상품 상세 페이지 생성까지 자동화하며 콘텐츠 제작과 커머스 운영 방식을 재구성하고 있다. 최근 주목받는 피지컬 AI는 AI가 물리 세계를 이해하고 스스로 판단·행동하는 단계로 진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로아이(ROAI)는 시뮬레이션에서 설계한 경로를 실제 로봇이 즉시 구현하는 SIM2REAL 환경을 선보였고, 컨피그는 사람과 로봇이 같은 작업 공간 안에서 역할을 나누어 협업하는 시나리오를 구현했다. 뉴빌리티 역시 AWS 기반 관제 시스템과 자율주행 로봇을 연동해 배달·순찰·이상 상황 탐지까지 하나의 운영 체계 안에서 수행하는 모습을 선보였다. AI가 소프트웨어 영역을 넘어 제조·물류 등 실물 산업의 운영 방식까지 재편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처럼 다각적인 산업 혁신의 이면에는, 기업이 기술의 복잡성에 얽매이지 않고 본연의 비즈니스 가치 창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안정적인 기반이 중요하다. AWS 역시 국내 기업들이 각자의 산업 환경과 데이터에 최적화된 에이전틱 AI를 안정적으로 구축하고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적 기반이 갖춰지더라도, 기술의 발전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조직의 흡수력과 실행력이다. 새로운 AI 모델을 경쟁사보다 먼저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차별화가 어렵다. 경쟁력의 핵심은 기술을 조직 전반의 일하는 방식 안으로 얼마나 효과적으로 연결하고 체화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에이전틱 AI를 단순한 생산성 도구가 아닌, 조직 운영의 새로운 표준으로 받아들이고 재설계하는 기업만이 다가오는 미래 시장의 주도권을 거머쥐게 될 것이다.지용호 AWS 코리아 마케팅 총괄

[김예니의 법 이야기] '한정승인의 함정' 부동산 상속 세금

A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상속받을 재산보다 빚이 더 많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에 한정승인을 신청했다. 그런데 상속 부동산에 대한 경매가 실행되자 취득세·양도소득세 등의 세금 문제가 발생했다. 그런데 전문가마다 세금에 관한 의견이 엇갈려 A씨는 큰 혼란에 빠졌다. A씨는 실질적으로 물려받는 재산이 없으니 상속재산 한도 내에서만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A씨의 생각처럼, 한정승인을 한 경우에는 납세의무 또한 상속재산 한도로 제한될까? 결론부터 말하면, 대체로 그렇지만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존재한다. A씨 사례에서 전문가들의 의견이 엇갈린 이유다. 최근에는 채무 정리를 위하여 상속 부동산 등을 처분할 때 발생하는 양도소득세는 상속재산의 관리 및 청산에 필요한 비용, 즉 '상속에 관한 비용'으로 보아 상속받은 재산의 범위 내에서만 책임 진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상속인에게 양도소득세를 부과하는 것 자체는 적법하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과세관청에서 상속인의 고유 재산에 가압류 등의 체납처분을 해, 이에 대해 다투는 경우가 존재한다. 반면 취득세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과거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일관되게 한정승인을 한 경우에도 상속인에게 취득세 납부의무가 있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이에 따라 상속인은 상속채무를 정리하며 고유재산으로 취득세를 납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법원이 2021년 '채권자'가 한정승인을 한 상속인을 대위하여 상속등기를 마치며 지출한 취득세 등 등기비용을 상속인에게 청구한 사건에서, 해당 비용은 상속에 관한 비용에 해당하므로 상속인은 상속재산의 한도 내에서만 책임을 진다는 취지로 판시해 취득세 역시 상속에 관한 비용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채권자와 한정승인 상속인의 관계에서가 아닌 과세관청과 한정승인 상속인 사이의 취득세 납부 책임에 관해 아직 명시적인 판단이 없으므로, 이에 대해 개별 사건에서 다퉈 봐야 하는 실정이다. 결국 A씨의 경우처럼 상속채무가 상속재산을 초과하는 상황에서 한정승인을 한 경우 상속부동산에 대한 경매가 진행된다면, 과거와는 달리 양도소득세는 물론 취득세에 관해서도 위에서 언급한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다툴 여지가 있다. 한정승인을 하더라도 특히 상속 부동산이 있는 경우라면, 한정승인 신청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을 수 있으므로 신청시부터 세금 문제까지 통합적으로 설계해 줄 전문가의 조력을 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기고] 주거안정, 관계부처 협업에 있다

지난 5월 14일 국토교통부 장관 주재로 열린 수도권 주택건설 현장 관계자 타운홀 미팅에 참석했다. 장관을 비롯해 관련 부서 담당자들이 100명의 현장 관계자를 만나 주택 공급이 왜 막히고 있는지, 어떤 제도·정책이 필요한지 듣는 자리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무엇보다 실제 애로사항을 파악해 정책으로 연결하려는 진심이 느껴졌다. 이날 현장의 건의는 크게 네 방향이었다. 첫째, 금융이다. 비 아파트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중도금·잔금대출 등 공급 전 과정에서 자금 조달이 막혀 있다는 호소가 많았다. 둘째, 세제이다. 소형 오피스텔 등 전월세 시장 안정화에 기여하는 주거의 경우 주택 수 제외 기준을 현실화하고 일몰을 연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다음으로 공공매입과 인허가 개선이다. 신축매입 약정가격 현실화, 지자체 그림자 규제 해소가 필요하다는 건의가 있었다. 넷째, 비 아파트 공급모델 다양화다. 비 주거 건축물의 주거 전환, 민간 장기임대주택 육성 등 단기간에 공급 가능한 방안들이 제시됐다. 현재 시장의 가장 큰 어려움은 집을 짓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어려운 환경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공사비는 이미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고, 금융 문턱도 높아졌다. 금리 부담, 분양시장 불확실성, 인허가 지연, 자재 수급 문제와 공사비 갈등까지 겹치면서 신규 사업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특히 비 아파트와 오피스텔은 서민과 청년의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해왔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공급 여건이 크게 나빠졌다. 이는 최근 전월세 가격의 급등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최근 국토부가 도시형생활주택 규제 완화, 공실 상가·오피스의 주거 전환, 주택기금 사업자대출 확대 등의 대책을 발표한 것은 긍정적이다. 단 지금은 국토부의 의지만으로 공급이 완성되지 않는다. 세제 관련 부처는 서민 주거안정을 위한 소형 임대주택에 대해 주택 수에서 제외하는 원칙을 더 분명하고 안정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투기 수요와 민간의 임대 공급시장을 같은 잣대로 다루면 필요한 공급까지 위축된다. 금융 당국도 기존 주택 거래시장과 신규 분양시장을 구분해 봐야 한다. 투기적 수요 관리는 필요하다. 하지만 신규 공급을 뒷받침하는 분양시장까지 같은 관점으로 규제하면 공급 자체가 지연된다. 주거안정 실현은 가격 상승 억제, 수요 억제만으로는 어렵다. 필요한 곳에, 필요한 유형의 집이, 제때 지어지도록 세제와 금융의 신호가 함께 맞아야 한다. 조일진 도시이야기 대표

[포럼] 숏폼 시대에 K드라마의 미래

박해영 작가의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모자무싸)'가 막을 내렸다.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와 마찬가지로 박해영 작가 팬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한 회가 끝날 때마다 명대사에 대한 반응도 뜨거웠다. '모자무싸'에서 제목과 대사를 통해 표방하고 있는 '무가치함'은 근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진지한 문학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싸워온 주적이자 현대인들이 드라마와 같은 서사물에 빠져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대인이 느끼는 삶의 허무는 병리적 현상이기도 하지만 누구나 느끼는 보편적 증상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지긋지긋한 무가치 속에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느냐다. 당연히 서사보다 월등히 중요한 것은 삶 그 자체다. 드라마와 같은 서사가 가치를 지니는 것은 때로 삶의 허무를 달래주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우리는 삶의 무가치를 견디기 위해 서사를 접하며, K-드라마는 오락과 의미를 동시에 제공해온 대한민국의 특산품이다. 지난 수년간 대한민국이 자랑할 만한 드라마는 지속적으로 축적되어 왔다.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확산되어온 K-드라마에 대한 관심은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플랫폼과 협업하면서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시장으로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드라마 시장과 영화 시장의 인력교류가 활발해졌고, 황동혁 감독과 같은 창작자는 드라마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저명한 창작자로 발돋움했다. 드라마의 가치는 산업적인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국가와 같은 큰 의미에 대한 공동체 관련 서사부터 가족이나 친목집단에 대한 미시 서사까지, 드라마는 공동체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를 자연스럽게 제공하는 드문 장르다. 가족 혹은 유사 가족과 같은 작은 공동체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은 '모자무싸'를 비롯한 박해영 작가의 작품을 애호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의 결일 것이다. 대한민국 영상산업 영토를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해 왔고, 국민 감수성에 중요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K-드라마가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필자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당연한 명제는 아니다. 국내 영상산업의 총체적 위기로 드라마 제작편수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2026년 제작편수가 반등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리고 있지만, 앞으로의 추세는 예상하기 어렵다. 단위당 콘텐츠를 소비하는 이용자의 이용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16부작이었던 드라마 회차 수가 12부작으로 줄어든 것은 이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숏폼과 릴스에 익숙해진 이용자들에게 드라마 시청은 갈수록 버거운 마라톤이 될 가능성이 높다. K-드라마의 미래가 낙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드라마를 통해 이미지 제고를 해온 대한민국, 텐트폴 콘텐츠가 필요한 미디어 산업, 다양한 볼거리가 필요한 이용자 모두에게 K-드라마는 여전히 선전해 줘야 할 존재다. 대한민국 드라마는 자신이 가진 가치를 꾸준히 증명해 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러한 성과가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인식하고, 드라마가 앞으로도 그 가치를 입증해 나가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관심과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일이다. 노창희 디지털산업정책 연구소장

[fn광장] 조지 오웰의 묘비 앞에서

2010년 7월 25일 오후, 나는 영국 옥스퍼드주 작은 마을 서턴코트니를 향해 일행과 가고 있었다. 그곳의 올세인츠 교회 묘지는 조지 오웰(1903~1950)이 잠든 곳. 런던과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오웰의 흔적을 답사하는 여정의 마침표였다. 묘역에 들어서자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내가 여기에 오다니! 작가의 안식처를 직접 찾아보고 싶었다. 묘역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다 오웰의 묘비를 발견했다. 순간, 당혹스러웠다. 묘비가 너무나 초라해 보여서였다. 여기 에릭 아서 블레어 잠들다(Here lies Eric Arthur Blair) 1903년 6월 25일 태어나 1950년 1월 21일 숨지다(Born June 25, 1903 Died January 21, 1950) 조지 오웰은 작가로 데뷔한 1933년부터 사용한 필명. 묘비에는 생을 받을 때의 본명이 음각되어 있었다. 무릎을 꿇은 채 묘비를 쓰다듬었다. 여러 가지 상념이 교차했다. '소설가님, 여기까지 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비석을 어루만지는데 문득 뒤쪽의 묘비가 눈에 들어왔다. '데이비드 애스터(David Astor) 1912~2001.' 데이비드 애스터가 누구지?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7년간 옵서버 신문 발행인을 지낸 언론인. 소설가보다 아홉 살 아래였지만 그를 존경했고 아낌없이 도와준 사람. '동물농장'이 세상 빛을 본 것은 1945년 8월 17일. 원고는 1944년 2월에 완성되었지만 런던의 출판사들은 소련의 눈치를 보느라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커앤워버그' 출판사가 용기를 냈다. '동물농장'은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데뷔 12년 만에 마침내 먹고사는 문제에서 해방되었다. 두 사람이 알게 된 것은 '동물농장'이 나온 직후였다. 유력신문 발행인과 유명 소설가. 두 사람은 모든 면에서 대화가 통했고, 신뢰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구상한 소설을 써내고 싶었다. 몸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머릿속에 꽉 차 있는 이야기를 마냥 미뤄둘 수는 없었다. 소설 제목은 '유럽 최후의 남자'. 그는 스코틀랜드의 외딴 섬 주라(Jura)로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애스터에게 부탁을 한다. 그곳에 들어가 소설을 쓰고 싶은데 도와달라. 천재는 몰입하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 몰입은 스스로를 고립시킨 고독한 상태에서 가능해진다. 글 감옥에 갇힌 채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 주라섬에서도 사람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이 반힐(Barnhill). '동물농장'을 써낸 월링턴의 집보다 몇 배 더 고립된 황량한 오지였다. 그곳에는 플레처 집안 소유의 농가 한 채가 있었다. 애스터는 플레처 집안과 연락해 이 집을 장기 임차했고, 오웰은 1946년 말 이곳에 들어갔다. 집필을 하는 동안 오웰은 간간이 피를 토했다. 거칠고 음울한 환경에서 그는 '유럽 최후의 남자'를 탈고했다. 타자기로 친 원고를 수없이 고치고 고쳐 원고를 완성한 게 1948년 12월 4일. 원고를 런던의 세커앤워버그 출판사로 우송한다. 출판사는 책을 편집하면서 '유럽 최후의 남자'라는 제목 대신 작가와 협의해 '1984'로 바꿨다. 그가 섬을 나온 것은 1949년 1월. 폐결핵이 악화되어 더 이상 섬에 머물 수 없었다. 애스터는 그가 런던에 오는 즉시 입원 치료를 받을 대학병원 병실을 잡아놓았다. 병원에서 집중치료를 받았지만 몸이 결핵균에 너무 많이 갉아먹힌 상태였다. 그는 병실에서 소니아 브라우넬에게 청혼한다. 첫 부인과 사별한 지 4년 만이다. 1949년 가을 그는 병실에서 애스터가 지켜보는 가운데 브라우넬과 결혼한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눈을 감았다. 장지를 정해준 사람도 애스터였다. 89년의 생애를 산 애스터는 이렇게 유언했다. "오웰 묘지 뒤에 묻어달라." '1984'는 용어 혼란과 역사 조작을 일삼는 전체주의 폭정을 고발한 디스토피아 소설. 목숨과 맞바꾼 소설이 '1984'다. 조성관 작가·지니어스 테이블 대표

[차관 칼럼] 한반도 평화공존 위한 3대 정책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지 어느덧 1년이 되었다. 정부가 출범했던 1년 전 남북 간에는 대화와 교류가 7년 이상 단절된 시기였고, 그 7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는 불신으로 서로를 짓누르기에 충분했다. 이에 더하여 지난 2023년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과 지난 정부의 대결적 대북정책으로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되었던 시기에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고, 한반도의 위기상황을 '평화공존'의 남북 관계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 이재명 정부의 시대적 사명이었다. 통일부는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을 발표하고 크게 3대 분야에 초점을 두어 정책을 구체화해 나갔다. 통일부가 가장 시급하게 추진해야 했던 과제는 잃어버린 일상의 평화를 접경지역에서부터 회복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출범 일주일 만에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지하고, 군사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대북전단도 민간에 적극적으로 요청하여 자발적 중단을 이끌어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접경지역에서 들렸던 괴음과 오물·쓰레기 풍선, 그리고 전단은 사라지게 되었고, 지난해 11월 파주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88%가 "변화된 일상에 만족한다"고 응답했다. 또한 지난 1월 발생한 민간인 평양 무인기 침투 사건에 대해 통일부 장관의 공식적인 유감 표명과 재발방지 조치 발표는 평화를 위한 이재명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특히 지난해 12월 경찰관 직무집행법, 5월 항공안전법이 개정되어 한반도 상공에서 인위적으로 긴장을 고조시키는 행위는 제도적으로도 근절되었다. 그리고 접경지역에서 찾은 평화는 한반도 전역으로 스며들어 갔다. 둘째, 통일부는 꽉 막힌 남북 관계의 바늘구멍을 뚫기 위해 그 기초를 다지는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되었던 북한주민접촉신고 처리 지침을 지난해 7월 폐지하는 등 남북 간 교류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민간교류의 자율성을 보장했다. 아울러 대화와 교류를 담당하는 부서를 신설해 통일부 조직을 정상화했고, 올해 남북협력기금을 1조원대로 회복하여 남북협력추진의 재정적 기반도 마련했다. 마지막으로, 국민주권정부로서 국민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북한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평화통일의 공감대를 확산해 나가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다. 안보 중심의 주입식 통일교육을 참여형 평화·통일·민주시민교육으로 전환했고, 국민의 성숙한 민주시민의식에 부합하게 지난해 12월 '노동신문'을 일반자료로 재분류하는 등 북한 자료에 대한 접근성을 확대했다. 이런 통일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북 간 연락채널은 연결되지 않은 상태이고, 남북 간 대화의 문은 닫혀 있다. 지난주에 북한 내고향여자축구단이 국제대회 참가를 위해 방문한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많은 관심을 끌었던 것이 남북 관계의 현주소다. 정부는 '한반도 평화공존'이라는 뿌리를 소중히 심어 왔지만, 현재 남북 관계와 엄중한 한반도 정세라는 척박한 토지에서 그 뿌리를 깊이 내리는 데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통일부는 일희일비하지 않고, 그 뿌리가 든든히 자리 잡아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평화공존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고 제도화해 나가고자 한다. 이를 위해 앞으로도 국민 여러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경청하며, 이해와 지지를 구해 나갈 것이다. 김남중 통일부 차관

[기고] 가난 증명보다 따뜻한 밥이 먼저다

복지 예산은 매년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에는 증명하기 어려운 가난으로 신음하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국가의 도움을 받기 위해 서류를 떼고, 자신의 가난을 입증해야 하는 행정 절차는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 요청을 주저하게 만드는 높은 장벽으로 작용한다. '배고픔에는 증명서가 필요 없습니다'는 기치 아래 정부가 '그냥드림' 사업을 시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냥드림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국민에게 자격 기준을 먼저 묻지 않고 식품을 즉시 지원하는 사업이다. 지난해 12월 57개소에서 시범적으로 시작해 올해 5월 18일 본사업으로 전환되면서 운영 사업장이 280개소로 대폭 확대되었다. 그냥드림이 기존 현물지원 사업과 다른 점은 단순히 식품을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사업은 추가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이용자에게는 상담을 거쳐 복지서비스를 연계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4월까지 9만 7926명에게 식품을 제공하였고, 이 중 상담을 통해 1553가구에게 복지서비스를 연계하였다. 그냥드림 사업이 현장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제가 있다. 첫째, 사람과 행정의 조화가 필요하다. 본사업을 시행하면서 꼭 필요한 자가 그냥드림을 이용할 수 있도록 자가점검표를 도입하였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위기로 인식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리는 자가 생기지 않도록 현장 인력이 방문자의 상황을 세심하게 살펴 위기 신호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또한 경찰청과 협약을 맺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냥드림에 연계할 수 있도록 한 예처럼, 위기가구를 마주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사회 내 기관과 인적자원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둘째, 정부와 민간의 협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신한금융그룹이 100억원을 후원하는 등 민간 후원금 116억원을 확보한 것은 고무적이다. 정부는 그냥드림을 통해 위기를 극복한 사례를 확산해 사업성과를 알리고, 이를 기반으로 민간의 참여를 꾸준히 이끌어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홍보 수단을 다각화해야 한다. 경기에 민감한 임시일용직이나 소상공인 등은 갑작스러운 위기가 닥쳐도 복지 제도를 이용해 본 경험이 없어 도움을 청할 생각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다. 주저 없이 그냥드림을 떠올릴 수 있도록 이들이 많이 찾는 장소를 중심으로 홍보를 강화해야 한다. 또한 주거 불안정 가구가 밀집한 지역을 찾아가는 이동형 코너도 고려할 수 있다. 가난을 증명하지 않아도 따뜻한 밥 한 끼를 먼저 지원하는 것은 '퍼주기'가 아니라 인간 존엄을 지키기 위한 국가의 책무다. 그냥드림이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곳까지 단단히 묶어주는 연대의 이정표가 되기를 기대한다.홍경준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포럼] AI·로봇 시대의 생존 의지

인공지능(AI)과 로봇의 발전으로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고 한다. 한편 인간 노동의 상당 부분이 불필요해지고 일자리들이 사라져서 결국 기본소득과 같은 대규모 재분배가 필요해질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가 과도한 낙관과 지나친 비관 사이를 오가며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술 발전이 인간 노동의 필요성을 급격히 줄일 것이라는 전망도, 더 많은 사람이 국가의 재분배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모두 인간이 스스로 살아내기 위해 노력하려는 의지를 약화할 위험이 있다. 우리 사회와 문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바로 그 살아내려는 의지 말이다. 산업혁명 당시에도 기계가 노동을 대체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컸다. 영국의 스핀햄랜드제도는 임금이 생계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공동체가 그 차액을 지원하는 사실상의 최소소득 실험이었다. 그러나 그 제도가 노동의욕을 저해한다는 비판이 거세게 제기되었고, 결국 영국은 이후 빈민법 체계를 대폭 수정하게 된다. 이미 200여년 전 사람들도 기술 발전에 직면하여 노동과 생계보장의 관계를 두고 지금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맹자는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라 했다. 안정된 생업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건강한 사회 역시 유지되기 어렵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구가 스스로 움직인다면 노동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그는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시민에게 자기수양과 공동체적 책임의식은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보았다. 노동으로부터의 자유가 인간을 더 고귀하게 만들 가능성과 더 쉽게 타락시킬 가능성이 동시에 열려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생산성에서 AI와 로봇에 뒤처지더라도 인간 노동을 생산 과정에서 배제하는 것은 소중한 생산자원을 버리는 일이다. 비교우위의 논리가 말해주듯, 사회 전체의 효율은 모든 자원이 제 역할을 찾을 때 극대화된다. 설령 노동 없는 생계가 가능하다 해도 인간 노동이 생산 과정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것은 경제 전체로 보면 여전히 손실이다. AI와 로봇 기술 발전이 곧 인간 노동의 광범위한 배제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생산을 어떻게 조직할지는 결국 제도와 선택에 달려 있다. 인류의 역사적 경험과 고민의 결과는 다수의 구성원이 생산의 책임을 담당하는 쪽을 가리킨다. "누가 얼마를 가질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임은 분명하지만, 이를 재분배만으로 해결하는 것보다는 "생산과 노동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고민하여 생산 과정에서부터 그 답을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역사 속 많은 사회가 이미 생산된 몫을 둘러싼 지대추구와 분배갈등에 몰두하기 시작했을 때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여주는 기술 발전과 인간의 노동은 양립할 수 있을까? 생산성 향상이 일하는 사람의 수가 아니라 각 사람이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쪽으로 활용된다면 그것은 가능하다. 기업의 인사조직과 고용관행, 나아가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이중구조의 개선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생산에 참여하고 높아진 생산성의 과실을 자신의 소득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경제와 제도를 설계하는 것, 그것이 우리 앞에 놓인 과제다. 김민성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