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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광장] 뉴저지와 빅토르 위고

2026 북중미 월드컵 결승전은 뉴저지에서 열린다. 조별리그 1차전 중 명승부의 하나가 C조 1차전. 브라질 vs 모로코. 결과는 1대 1 무승부. 이 경기가 뉴저지에서 열렸다. TV 중계화면에 자주 'New Jersey'가 비쳤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뉴저지, 뉴저지, 뉴저지…. 허드슨강을 사이에 두고 뉴욕과 마주 보는 곳, 맨해튼의 야경을 황홀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곳, 자동차 번호판의 별칭이 '가든 스테이트(Garden State)'인 곳, 미국의 국민가수 프랭크 시나트라가 태를 묻고 묻힌 곳, 뉴저지. TV 화면의 '뉴저지'를 보다가 나는 엉뚱하게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가 떠올랐다. 위고가 나폴레옹 3세의 독재를 비판하다가 1852년 쫓겨간 곳이 저지섬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노르망디 사이의 채널군도(Channel Islands). 움푹 파인 형태의 노르망디만에 점점이 흩뿌려진 섬들이 채널군도다. 이 섬들은 영국령이다. 거리상으로는 프랑스와 훨씬 가깝고, 전력도 프랑스에서 해저케이블로 공급받지만 엄연히 영국 땅이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911년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살던 바이킹이 남쪽으로 내려와 정복한 땅이 노르망디다. 노르망디공국의 윌리엄 공작은 1066년 영국을 침공해 점령한다. 영국 왕실은 15세기 중반 백년전쟁이 끝날 때까지 노르망디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백년전쟁의 승전국 프랑스는 영국이 점령한 자국 내 영토 대부분을 회복했지만 해협군도의 섬들만큼은 영국령으로 인정했다. 이 군도에서 제일 큰 섬이 저지(Jersey)이고, 두 번째로 큰 섬이 건지(Guernsey)이다. 유럽 대륙에 변란이 생길 때마다 반체제 인사들이 손쉽게 망명지로 선택한 곳이 두 섬이었다. 위고는 저지섬에서도 나폴레옹 3세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파리의 주요 신문들은 인편으로 원고를 받아 신문에 실었다. 위고의 글이 실릴 때마다 신문은 불티나게 팔렸다. 위고는 나폴레옹 3세에게 눈엣가시였다. 온갖 회유를 했지만 위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폴레옹 3세가 영국 여왕에게 청을 넣는다. 이어 여왕이 위고에게 부탁한다. "프랑스에서 먼 건지섬으로 들어가 계셔달라." 1855년 그는 만 안쪽에 있는 건지로 거처를 옮긴다. 건지는 저지에 비하면 프랑스에서 훨씬 멀리 떨어진 곳. 여러 가지 여건상 나폴레옹 3세를 계속 비판할 수가 없게 되자 그는 소설 집필에 전념한다. 찾아오는 이 없는 섬에서 그는 소설에만 매달렸고, 1861년 6월 말 마침내 원고를 탈고했다. 그게 '레미제라블'이다. 원고를 끝내고 나서 그는 지인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 속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오늘 아침 레미제라블을 끝냈다네. 이젠 죽어도 좋아.' 레미제라블은 다음 해 파리에서 출간되었고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럼에도 위고는 건지섬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폴레옹 3세가 있는 한 프랑스 땅을 다시 밟지 않겠노라 결심했기 때문이다. 1871년 보불전쟁의 패배로 나폴레옹 3세가 실각하자 위고는 망명을 끝내고 19년 만에 파리로 돌아온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캣츠' '오페라의 유령' 등과 함께 세계 4대 뮤지컬이다. 1985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된 이래 세계에서 40년간 1억3500만명 이상이 이 뮤지컬을 봤다. 몇 년 전 넷플릭스에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The Guernsey Literary and Potato Peel Pie Society)'이라는 영화가 공개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점령당한 건지섬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뉴저지는 저지 출신 영국 장군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뉴욕 남쪽 땅에 붙인 지명이다. 뉴저지는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했을 때 13개주 중의 하나였다. 저지와 건지는 낙농업이 주산업이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최고급 우유 중 하나가 저지 젖소에서 짠 밀크다. 제조사는 영국 왕실 전용 우유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저지 우유로 만든 우유식빵도 팔린다. 위고가 19년간 망명생활을 한 채널군도의 저지섬과 건지섬.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섬은 생각보다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조성관 작가 지니어스 테이블 대표

[차관칼럼] 맞춤복처럼 편안한 법령

해마다 계절이 바뀌면 장롱 속 옷들을 꺼내 정리한다. 작년에는 멋스럽게 입었던 외투도 올해 다시 입으려니 디자인과 색감이 어색하게 느껴져 외출을 망설인 경험은 누구에게나 한번쯤 있을 것이다. 우리 삶을 규율하는 법령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과거에는 합리적이고 타당했던 법령도 세상이 변하고 생활방식이 달라지면, 어느새 몸에 맞지 않는 낡은 옷처럼 우리의 일상을 가로막는 규제가 된다. 법제처는 국민 삶의 접점에 있는 지방정부가 현장의 불편함을 가장 먼저 감지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지난겨울, 지방정부를 대상으로 하는 '법령정비 제안창구'를 개설했다. 불합리한 규정이나 입법 미비로 인한 불편사항에 대하여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법령 체계를 검토하여 완성도 높은 정비안을 마련한다. 나아가 이렇게 마련된 정비안이 실제 법제화라는 결실을 맺도록 소관부처와 끊임없이 협의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고 있다. 정비의 손길은 국민이 불편함을 느끼는 지점에 따라 세심하게 나뉜다. 먼저 옷의 품을 대대적으로 넓혀야 하는 작업이 있다. 새로운 사회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기존 법령이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거나 상충하는 규정들로 인하여 혼선이 빚어지는 경우다. 예를 들어 음식영업 활성화를 위하여 푸드트럭 영업범위를 확대하는 내용으로 식품위생법 시행규칙이 개정되었음에도 영업활동의 기반이 되는 공유재산 및 물품 관리법 시행령의 행정재산 사용허가 규정은 여전히 기존 영업범위만을 수의계약 대상으로 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규정 간 괴리는 현장의 활력을 저해하는 불합리한 장벽이 되어 국민의 일상을 가로막는다. 지방정부의 제안을 토대로 법제처가 정비 필요성을 검토하고 소관부처와 협의한 결과, 현재는 관련 규정의 개정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푸드트럭 영업범위 확대에 맞추어 수의계약 체결 가능 범위가 조정되면, 법령 개정의 취지가 현장에 온전히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옷에 단추가 지나치게 많거나 혼자서 채우기 힘든 위치에 달려 있어 입고 벗기조차 어려운 경우도 있다. 하수도법 시행규칙에 따른 개인하수처리시설의 폐쇄 신고의무가 바로 그런 경우다. 공공하수도 공사로 인해 공공하수도관리청이 개인하수처리시설을 폐쇄한 경우에도 그에 따른 신고의무는 고스란히 개인의 몫으로 남아 있다. 불필요한 단추의 정리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역시나 현장의 공무원이었다. 현장의 날카로운 지적이 정책 개선의 실질적인 열쇠가 되었고, 소관부처는 개인하수처리시설에 대한 전국적 운영 실태를 면밀히 파악한 후 법령 개정을 추진할 계획이다. 수선의 모든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친 재협의와 설득은 부처 간 벽을 허물고 국민 편익을 실현하기 위한 동력이 된다. 법령 체계를 바로잡는 것은 우리 사회의 꽉 막힌 숨통을 틔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법제처는 국민의 일상이 낡은 법령에 가로막히지 않도록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소관부처와 협력하며 법령의 매무새를 다듬는 재단사로서 소명을 다할 것을 약속한다. 우리가 수선한 법령들은 다시 국민의 삶으로 돌아가 몸에 꼭 맞는 옷처럼 편안하고 안정적인 일상을 지원할 것이다.조원철 법제처장

[기고] 800조 반도체, 인재는 도시를 선택한다

온 나라가 800조원이라는 투자 규모에 주목하고 있다. 6월 29일 청와대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발표한 서남권 반도체 투자다. 그러나 투자를 받는 지역의 입장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라 어떤 기능이 내려오느냐다. 사람 없이 돌아가는 자동화 공장과 데이터센터만으로는 지역경제에 오래가는 효과를 내기 어렵다. 결국 사람이 와야 한다. 그날 두 회사 경영진이 정부에 요청한 것도 빠른 행정절차와 함께, 직원과 가족이 살 만한 정주환경이었다. 사람에 대한 고민은 기업도 다르지 않다. 과거에는 기업이 투자하는 곳으로 인재가 따라갔다. 산업단지가 들어서면 일자리가 생기고, 사람이 모이고, 도시가 자랐다. 이제는 순서가 뒤집혔다. 인재가 몰리는 곳에 기업이 투자한다. 십여 년간 지방 산업단지에는 생산기능만 남고, 연구개발 조직과 엔지니어, 근로자 가족의 삶터는 수도권으로 옮겨 갔다. 생산기반과 혁신·정주기반이 서로 떨어져 나가는 '탈동조화'다. 국토연구원이 고용보험 자료를 분석한 결과, 구미는 생산직 한 명당 엔지니어가 0.2명에 못 미치는 반면 판교는 3명이 넘는다. 공장은 지방에 있는데 인재는 수도권에 있는 것이다. 반도체는 이 구조를 되돌릴 기회다. 첨단공장은 이제 단순한 제조시설이 아니라 연구, 시험생산, 양산이 한 공간에 맞물리는 거대한 실증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팹을 제대로 조성하면 그간 수도권을 떠나지 않던 연구개발 기능과 고급 기술인력이 함께 내려올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저절로 되는 일은 아니다. 젊은 엔지니어가 가족과 정착할 매력적인 도시환경, 그리고 대학·연구소와 교류하며 성장할 혁신생태계가 팹과 함께 조성될 때 가능한 일이다. 대만 신주과학단지가 좋은 참고다. 대만 정부는 해외로 떠난 인재를 불러들이기 위해 1980년 이 단지를 조성하면서, 토지를 분양하는 대신 국가 소유로 두고 기업에 장기임대했다. 명문 공과대학 옆에 터를 잡았고, 산업시설 못지않게 주택과 학교, 병원, 공원에 자리를 내주었다. 오늘날 이곳에는 600여 개 기업과 16만 명이 넘는 인력이 모여 있다. TSMC도 그 토양에서 자란 기업이다. 대만은 팹을 지은 것이 아니라, 엔지니어가 살고 싶은 도시를 지은 것이다. 우리도 답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낡은 산업단지에 정주환경을 덧대는 실험도, 도심 한복판에 산업단지를 끼워 넣는 실험도 해 봤다. 어느 쪽도 여의치 않았다. 정부가 보고회에서 '기업형 첨단도시' 조성을 약속한 것이 반가운 이유다. 관건은 공급의 철학을 바꾸는 데 있다. 공공은 땅을 팔고 떠나는 공급자가 아니라 토지를 소유한 채 도시를 함께 키우는 동반자가 되고, 수요자인 기업에는 인프라와 정주환경을 직접 설계할 권한을 주어야 한다. 산업 따로, 주거 따로, 연구 따로 짓던 칸막이를 걷어내, 산단과 원도심을 하나의 도시권으로 엮어야 한다. 그래야 기업이 원하는 속도가 나오고, 설령 기업이 떠나더라도 도시는 지역에 남는다. 800조원이라는 숫자는 출발점일 뿐이다. 기업과 정부가 방향에 합의한 지금, 모처럼 지방을 향한 거대한 흐름이 지역의 미래로 이어질지는 결국 우리가 공단을 짓는지, 인재와 기업이 함께 자라는 도시를 짓는지에 달려 있다. 조성철 국토연구원 산업입지연구센터장

[포럼] 전세 제도의 지속력

전세는 사라져가는 주거 유형일까. 숫자만 보면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다. 인구주택총조사 기준으로 1995~2015년 전국 임차가구 중 전세 비중은 63.6%에서 35.8%로 크게 낮아졌다. 금융 접근성 향상, 저금리, 1·2인 가구 증가 등이 함께 작용한 결과다. 그런데 같은 조사에서 2020년 전국 전세 비중은 36.4%로 2015년과 큰 차이가 없었다. 서울의 전세 비중도 인구주택총조사 기준 2015년 45.3%, 2020년 45.4%로 거의 변화가 없었고 2024년 서울시 주거실태조사 결과도 이와 비슷하다. 적어도 2015년 이후 전세 비중이 계속 하락하고 있다는 징후는 뚜렷하지 않다. 전세는 수명을 다한 제도라기보다 월세와 공존하는 새로운 균형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세 회의론에도 일리는 있다. 전세사기는 전세가 보증금 반환이라는 위험을 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전세가 임대인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사금융 역할을 해왔지만, 금융 발달로 그 기능이 약해진 것도 사실이다. 갭투자가 집값 상승을 부추긴다는 비판도 가볍게 볼 수 없다. 그러나 전세의 부작용을 인정하더라도, 전세가 왜 여전히 선택되고 있는지는 제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장의 선택에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전세는 보증금을 매개로 임대인과 임차인의 필요가 맞물리는 계약이다. 보증금의 활용 가치가 월세 수입보다 더 큰 임대인과, 목돈을 마련했거나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임차인은 전세를 선호할 것이다. 반대로 보증금을 활용하는 것보다 월세 수입이 더 나은 임대인과, 초기 자금이 부족하거나 유동성을 중시하는 임차인은 월세를 선호할 것이다. 전세와 월세의 공존은 서로 다른 자금 사정과 선호를 가진 사람들이 각자에게 맞는 계약을 고른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누가 전세를 선택하는지를 보면 전세의 또 다른 역할이 나타난다. 인구주택총조사 자료에서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가구주 집단의 주거 형태를 따라가 보면, 20대 초반에는 월세 비중이 높고 20대 후반~30대에는 전세 비중이 크게 높아지며 이후 자가 비중이 상승한다. 특히 서울에서는 30대 전세 비중이 60% 안팎까지 높아진다. 이는 전세가 월세와 자가 사이에서 주거안정과 자산형성의 중간 단계로도 기능해 왔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전세에는 위험이 있다. 그러나 월세 역시 위험이 없는 계약은 아니다. 월세에서는 임대인이 임차인의 미납 위험을, 전세에서는 임차인이 임대인의 보증금 반환 위험을 부담한다. 두 계약의 차이는 위험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위험이 누구에게 배분되는가에 있다. 위험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면 임대인의 부채와 선순위 권리 확인 절차의 실효성을 높이고, 위험에 맞게 설계된 보증과 에스크로 등을 통해 주택임대차계약의 안전성을 높이는 것이 정책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 전세가 정말 그 가치를 잃었다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월세를 선택할 것이고, 결국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흐름만으로는 전세가 곧 사라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전세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일정한 수요층을 중심으로 월세와 공존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전세와 월세라는 두 선택지 각각의 위험을 관리할 방법이다.김민성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fn광장] 첨단산업 생명줄, 전력시장 개방하라

인공지능(AI)이 거대언어모델(LLM)을 거쳐 AI 에이전트(Agentic AI) 시대로 접어들었다. 또한 AI는 사이버 공간을 벗어나 제조, 모빌리티, 휴머노이드 등 물리적 세계로 융합되는 '피지컬 AI(Physical AI)' 시대로 발전하고 있다. 강력한 제조업 경쟁력을 갖춘 대한민국은 이러한 피지컬 AI 흐름을 적극 활용해 대체 불가한 제조업 강국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해야 한다. 최근 국내 대기업들이 계획하고 있는 기가와트(GW)급 AI 데이터센터 구축은 다가올 대한민국의 미래 100년을 위한 담대한 투자다. 첨단산업의 성패는 이제 데이터나 알고리즘의 우위를 넘어 거대한 연산장치를 뒷받침할 전력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급격한 첨단산업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반도체 팹(Fab) 증설 역시 막대한 전력을 요구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한 곳에만 대형 원자력발전소 15기 규모인 15.4GW의 전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에너지를 실어 나를 송전망 구축사업의 절반 이상이 인허가와 지역갈등에 가로막혀 지연되면서 대한민국 전력 인프라는 심각한 동맥경화를 앓고 있다. 이러한 인프라 마비 현상의 이면에는 한국 전력시장이 안고 있는 오랜 구조적 모순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단일 공기업이 송전·배전·판매를 모두 독점하고 있으며, 전력 요금은 시장의 수요·공급 원리가 아닌 정치적 논리에 의해 강력하게 통제되고 있다. 원가를 밑도는 경직된 요금체계 탓에 발생한 천문학적인 누적 적자는 국가안보와 직결된 필수전력망 확충에 대한 투자동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들었다. 더욱 뼈아픈 문제는 '가격신호(Price Signal)'의 상실이다. 요금이 고정되어 있다 보니 소비자와 기업이 전력 사용을 효율화하거나 피크시간대를 피하도록 유도할 경제적 유인이 시장에서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이제는 전력 시스템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거시적 관점에서 송전망(Transmission) 구축은 국가안보 및 초격차 산업기술 보호와 직결되므로 공공이 주도하여 패스트트랙으로 확충해야 한다. 한편 전기가 최종 소비자에게 흐르는 모세혈관인 배전(Distribution)과 소매 판매(Retail) 부문은 과감하게 민간에 개방하여 경쟁체제를 도입하는 것이 마땅하다. 과거 국가가 독점하던 무선통신 시장을 과감히 민간에 개방하여 경쟁체제를 도입한 결과 이용자에게 어떤 편익이 제공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전력시장의 경쟁체제 도입 필요성은 자명하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이미 소매시장의 자유화로 이동한 지 오래다. 일본은 2016년 전면 자유화 이후 통신·가스·정보기술(IT) 등 다양한 분야에서 700여개의 신전력사업자가 등장했다. 시장이 열리면서 통신비 결합할인, 전기차 충전 요금제, 100% 무탄소 에너지 요금제 등 소비자의 선택권이 폭넓게 보장되었다. 미국의 텍사스주나 영국 역시 다원화된 요금체계를 통해 소비자가 직접 공급자를 선택하는 유연한 시장을 구축했다. 나아가 소매 경쟁은 단순한 요금 인하 수단이 아니다. 분산된 에너지를 모으는 가상발전소(VPP), 수요반응(DR), 스마트 전력제어 등 새로운 에너지 혁신 생태계를 창출하는 강력한 마중물이다. 물론 시장개방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안전장치가 있다. 바로 '독립적인 전력 규제기관' 설립이다. 현재 국회에는 독립적인 전력시장 감독기구로 '전력감독원'을 신설하는 내용의 전기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되어 있다. 금융시장의 금융감독원과 유사하게 전력시장을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기구는 합리적인 원가주의에 기반해 정치권의 외풍으로부터 전기요금을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해야 한다. 전력시장의 공정성 감시, 전력망 안정성 감독, 원가검증, 분쟁조정 등을 전담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도매시장 가격의 극심한 변동성을 제어하고, 독점적 망 이용의 공정성을 엄격히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국가가 주도하는 단일 공급 시스템으로는 폭발적이고 다양한 미래 산업의 에너지 수요를 결코 감당할 수 없다. 규제기관의 독립화와 소매시장 개방은 지속적 산업발전과 에너지 대전환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동전의 양면이다. 국가 생존과 기술패권이 걸린 전력 인프라 혁신을 위해 정부와 국회의 초당적이고 실용적인 결단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윤의준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기고] RE100 넘어 ‘언제’ 쓰나 따진다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을 100% 재생에너지로 채우겠다는 RE100은 이미 익숙한 이니셔티브가 됐다. 삼성·SK·LG 등 국내 대기업도 잇달아 참여를 선언했고 녹색프리미엄이나 재생에너지 인증서(REC) 구매를 통해 재생에너지 확산에 분명한 기여를 해왔다. 그런데 글로벌 선도기업들은 이미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바로 24/7 CFE(무탄소 전력)다. 24/7 CFE의 핵심은 '총량'이 아니라 '시간'이다. RE100은 1년 동안 쓴 전력량만큼 재생에너지 실적을 확보하면 충분했다. 비유하자면, 1월에 고기를 실컷 먹고 12월에 채소를 몰아 먹어도 연간 균형 식단이라고 인정받는 방식이다. 반면 24/7 CFE는 매 끼니마다 균형 잡힌 식단을 요구한다. 밤새 전기를 쓰면서 낮의 태양광 실적으로 이를 상쇄하는 방식은 탄소 배출 시간대를 감추는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구글은 2030년까지 매 시간 무탄소 전력으로 모든 데이터센터를 운영하겠다고 선언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사용 전력의 100%를, 사용 시간 100% 동안, 탄소 없는 전원으로 채우는 이른바 '100/100/0' 목표를 공식화했다. 24시간 쉬지 않는 데이터센터에서 낮의 남는 재생에너지로 밤의 화석연료 사용을 상쇄하는 방식은 진정한 탄소중립과 거리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국제연합(UN) 주도의 24/7 CFE 이니셔티브에는 이미 180곳이 넘는 기업·정부·기관이 참여 중이다. 이 변화는 국내 수출기업에도 현실적인 압박으로 다가온다. 현재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협력업체에 시간 단위 기준을 직접 요구하는 단계는 아니다. 하지만 공급망 전반에서 무탄소 전력의 시간 단위 사용 실적을 계약 조건으로 요구하는 움직임은 이미 뚜렷하다. 선도기업의 기준이 '매 시간'으로 옮겨가는 흐름을 감안하면 머지않아 국내 기업도 연간 사용량만이 아니라 어느 시간대에 어떤 전원을 썼는지까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오후 2시에 쓴 전기가 같은 시간대 무탄소 발전량과 얼마나 맞아떨어졌는지, 저녁 부족분은 어떤 수단으로 보완했는지를 실제 계량 데이터로 확인하고 증빙으로 남기는 일이다. 이는 단순한 절차 강화가 아니라 에너지 사용의 투명성을 시간 단위로 입증하라는 요구다. 식당으로 치면, 연간 친환경 식재료 구매 영수증이 아니라 오늘 점심 메뉴 하나하나의 원산지 이력서가 필요해지는 셈이다. 문제는 국내에 이런 시간 정보를 담은 CFE 인증 체계가 아직 갖춰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준비가 늦으면 해외 고객사의 요구가 본격화될 때 기업은 더 높은 비용을 치르거나 증빙을 제때 제출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일 수 있다. 기존 RE100 이행 성과는 살리되, 그 위에 시간 정보를 결합한 CFE 인증·보고 기반을 미리 마련해야 한다. 이는 개별 기업의 노력만으로 해결되기 어렵고 공적 인프라가 마중물 역할을 해야 시간 단위 무탄소 매칭이 모든 기업의 공통 토대가 된다. 전력을 '언제' '어떤 전원으로' 썼는지 신뢰할 수 있게 보여주는 CFE 기반,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이유다. 정부 및 한전의 역할을 기대한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미래에너지융합학과 교수

[포럼] 덩치만 커진 한국의 지방재정

우리나라는 지난 6·3 지방선거를 통해 지방자치단체장과 의원을 선출했다. 정치적 의미에서의 지방자치를 실시한 지도 벌써 30년이 넘었다. 이번이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였다는 점에서 지방분권의 의미에 대해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는 재정의 관점에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지난 1948년 정부수립 후 제헌헌법을 마련했고, 그 이듬해 지방자치법 제정을 통해 지방자치가 시작되었다. 박정희 정권 때 전면 중단되었다가 1991년에 이르러서야 지방의회가 부활되었고, 1995년 전국동시지방선거를 통해 완전한 민선자치시대를 연 바 있다. 하지만 여전히 선거 과정에 주민주권이나 지역권력 견제와 같은 이슈보다는 전국적 이슈에 휘말린 모습은 아쉬움이 남는다. 분권이란 말 그대로 한곳에 집중된 권한과 그에 동반된 책임을 분산함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정치적 분권, 행정적 분권, 재정적 분권 및 경제적 분권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재정적 분권은 상위 정부로부터 낮은 단계의 정부에 조세 및 지출에 관한 의사결정권을 포함한 재정적 권한과 책임을 이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역별로 서로 다른 주민들의 선호와 환경을 반영하여 차별화된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면 모든 지역에 대해 획일적인 경우보다 후생 수준을 높일 수 있다. 지방은 경쟁하고 주민들은 지방정부의 반응성과 재정적 이동성을 통해, 또는 투표와 이탈을 통해 사적재를 선택할 때와 같이 효율성이 증대될 수 있다. 나아가 공공서비스 지출 책임이 주민과 보다 가까이 있는 지방정부에 주어짐에 따라 지방정부와 주민 간의 연계가 강화됨으로써 책임성 또한 증진된다. 이론이 그렇다. 양적으로는 1990년과 비교해 지방재정 규모가 18.75배나 급증했고, 전체 재정지출에서 지방정부의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서도 매우 높은 수준을 나타내는 등 형식적 측면에서는 재정분권이 빠르게 자리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구조적 측면에서는 여전히 수도권 집중과 맞물려 분권 자체에 대한 회의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문제로 지방재정의 대폭 확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부분의 지자체가 재정부족을 호소하고 있고, 재정자립도는 40.89%에 불과하다. 아울러 지자체가 자율성은 원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문제, 주민들의 무관심과 낮은 참여 문제, 지방분권과 지역균형발전 간의 갈등 문제 등으로 현실에서 이를 구현하는 데 많은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미국은 연방제 국가로 우리와 시스템이 매우 상이하지만 지방정부의 책임성 차원에서 근간이 되는 세금인 재산세가 다른 여타 세원으로 충당하지 못하고 남은 지출수요를 감당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울러 현재와 같이 모든 지방세원의 종류와 세율을 국회가 정하고 재산세의 과세표준이 되는 재산가액까지 중앙정부가 정하는 제도는 지방분권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지방정부들이 탄력세율제도가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혀 활용하지 않고 암묵적인 담합을 하도록 유도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현재와 같이 지방교부세와 같은 일반재원보다 국고보조금이 더 비중 있게 운용되어서는 안 된다. 지방재정 이론에서 강조하는 편익과 비용 간의 연계로부터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박정수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

[기고] 장벽 없는 마이데이터, 삶을 이롭게 하다

마이데이터는 정보주체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데이터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제도다. 주인으로서의 통제권은 데이터를 스스로 이동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보장된다. 마이데이터의 핵심이 '데이터 이동성'에 있다고 하는 이유다. 마이데이터는 처리자의 벽을 허물고, 데이터가 정보주체의 뜻에 따라 흐를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흐르게 된 데이터는 '분야'라는 또 다른 벽을 마주하고 있다. 금융데이터는 금융 분야에서, 의료데이터는 의료 분야에서 주로 활용된다. 기존 분야를 넘어 다른 분야에서 데이터가 활용되는 일이 많지 않다. 데이터는 본래 다면적 성격을 갖고 있어 같은 데이터라도 어떤 맥락에 놓이느냐, 어떤 목적으로 쓰이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낸다. 예컨대 신용카드 결제내역은 금융에선 지출에 관한 정보이지만 건강관리 관점에서는 내가 술을 마시는 지, 담배를 피우는 지, 어제 야식을 먹었는 지 알 수 있고, 규칙적으로 수영장에 다니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의료 영역에서 이런 데이터를 활용하면 환자의 생활습관을 정확히 알 수 있고, 만성질환 관리를 위한 지시를 환자가 잘 이행했는 지도 확인할 수 있다. 금융 데이터가 건강관리를 돕는 것이다. 건강 데이터로 금융의 문제를 풀 수도 있다. 질병보험의 본질은 앞으로 닥칠 건강상 위험에 대비하는 것인데 정작 사람들은 자신에게 언제, 어떤 위험이 닥칠 지 예상하지 못한 채 보장범위를 정하고, 보험에 가입한다. 자신의 데이터로 장래의 건강 위험을 통계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면 합리적 보장 범위를 정할 수 있다. 건강관리를 잘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낮은 금리로 대출을 해주거나 건강 악화로 발생한 의료 채무의 연체를 신용평가에서 제외하는 등 건강에 관한 데이터로 개인의 신용을 합리적으로 평가 및 관리할 수도 있다. 다면적인 데이터가 정보주체에 불리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다. 예를 들어 보험회사가 건강 데이터를 활용해 인수 거절이나 보험료 인상의 목적으로 사용할 가능성이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 때문에 활용의 기회를 포기하는 것은 '칼이 위험한 도구라고 해서 칼을 사용하지 말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마이데이터는 정보주체가 데이터의 이동 여부와 목적을 결정하기 때문에 이동하는 데이터가 정보주체에게 불리하게 활용되는 상황을 구조적으로 막을 수 있다. 관련된 법과 제도도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다. 금융과 공공 분야에서 시작된 마이데이터 제도가 개인정보보호법에 근거를 두고 전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의료와 통신은 물론 교육·고용·부동산·교통·복지 등 삶의 전 영역에서 정보주체가 자신의 데이터를 원하는 곳으로 이동시킬 수 있게 된다. 최근 시행령 개정을 통해 '본인전송요구' 범위가 전 분야로 확대됐다. 이를 통해 데이터가 분야의 벽을 넘어 새로운 가치와 이익을 위해 활용되는 사례가 등장할 것으로 본다. 데이터로 사람들의 삶을 이롭게 만들겠다는 꿈도 곧 이뤄질 것 같다.이정운 뱅크샐러드 최고법무책임자

눈 가려움, 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다...알레르기 결막염 '연중 관리' 필요

[파이낸셜뉴스] 매년 7월 8일은 세계알레르기기구(WAO)가 지정한 '세계 알레르기의 날'이다. 올해 슬로건은 "Allergy Care is Essential Care"다. 알레르기 질환을 계절마다 잠깐 신경 쓰는 문제가 아니라, 계절과 관계없이 일년 내내 발생하는 환자의 삶의 질과 직결된 질환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메시지일 것이다. 안과 진료 현장에서 이 메시지는 매우 중요하다. 알레르기 결막염 환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오해는 "봄이나 가을만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많은 환자들이 "증상이 심한 봄에만 안약을 사용하다 나아져서 중단했다 다시 불편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알레르기 결막염은 특정 계절에만 나타나는 질환이 아니다. 겉으로 증상이 줄어든 것처럼 보여도, 눈의 염증 반응은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꽃가루에 의한 알레르기 등 특정 계절에 발생하는 경우도 많지만, 많은 경우의 알레르기 결막염은 계절에 국한되지 않는 '통년성 질환'이다. 따라서 봄·가을 이 지나도 관리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알레르기 결막염의 주증상인 가려움증은 눈을 비비면 일시적으로 해소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비만세포를 자극해 히스타민 분비를 증가시키고 염증을 더욱 악화시킨다. 또한 눈을 비비면서 각막상피를 손상시킬 우려도 있어 장기적으로 각막 손상과 각막혼탁 난시 등의 이차적인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 진료 현장에서도 가벼운 증상으로 여겨 치료를 미루다, 각막 손상이 진행된 상태로 병원을 찾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알레르기 결막염 증상이 심할 때에만 약을 사용하는 방식으로는 충분한 관리가 어렵다. 알레르기 면역 반응은 한 번 시작되면 완전히 가라 앉는 데 몇 주가 소요되며, 겉으로 증상이 완화된 이후에도 눈 표면에서는 염증 반응이 지속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항히스타민 작용과 비만세포 안정화 작용을 동시에 나타내는 듀얼 액팅 점안제가 알레르기 결막염의 1차 치료 옵션으로 활용되고 있다. 듀얼 액팅 점안제는 증상 완화와 함께 염증의 지속과 재발을 동시에 억제할 수 있어, 계절에 국한되지 않는 통년성 알레르기 치료와 관리에 적합한 선택지로 평가된다. 알레르기 결막염은 일시적인 불편이 아니라 반복되고 재발하는 만성 질환이다. 증상이 나타난 이후에만 치료하거나 임의로 관리를 중단할 경우, 염증의 악순환과 재발 위험은 더욱 커질 수 있다. 증상 발생 전 부터 예방적으로, 증상이 완화된 이후에도 안과 전문의와 함께 장기적인 관리 계획을 세워 치료를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 알레르기의 날 슬로건인 'Allergy Care is Essential Care'는 통년성 알레르기 결막염 관리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봄이 지났다고, 증상이 줄었다고 치료와 관리를 중단하지 않도록 하고, 꾸준한 치료와 관리를 통해 통년성 알레르기 결막염의 재발과 합병증을 예방하고 환자의 삶의 질을 지켜야 하겠다. 정혜욱 대한안과의사회 회장

[포럼] 군사대국 치닫는 독일과 일본

세계의 안보질서가 변하고 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독일과 일본을 직간접적으로 군사강대국으로 내몰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독일의 안보불안을 일으켰고, 중동전쟁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유럽 국가들이 군대를 파견하지 않으면서 미국과 NATO 국가들은 단단했던 대서양 동맹관계가 느슨해져 버렸다. 독일은 히틀러 정권하에서 유대인 600만명을 살상했다. 필자는 독일의 만행을 확인하고자 폴란드 아우슈비츠를 가 본 적 있다. 유대인의 머리카락을 잘라 쌓아 두고 신발들도 보관되어 있는 시설도 보았다. 시체를 태우기 위한 화장터도 그대로 보존되어 독일의 잘못을 반성하려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는 베를린 한복판에도 나치의 만행을 보여주기 위한 시설을 만들어 놓으며 과거의 잘못된 행위를 반성하려 한 것이다. 생체실험을 한 곳도 공개되고 있다. 과거사를 숨기려고 급급하는 일본과는 다르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NATO 국가들의 동맹관계를 소홀히 하면서 독일이 군사 재무장을 하고 있다. 독일은 2025년 헌법을 개정해 국방비 한도를 해제하고 유럽 최강의 재래식 군대를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일본도 들여다보자. 일본의 평화헌법 제9조는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하고 국제분쟁에 군사력을 파견할 수 없도록 명기하고 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투하되면서 무조건 항복을 했다. 그리고 그 당시 미국 맥아더 장군의 의도대로 평화헌법이 만들어진 것인데 다카이치 정부는 일본 헌법 제9조를 개정하려 한다. 패전 후 80년이 지나면서 전쟁의 악몽을 잊어버린 것인가. 일본은 지난 수십년간 미쓰비시중공업과 가와사키중공업이 세계 최고 기술의 전함과 잠수함을 생산하고, 전투기 날개에 탄소섬유수지를 활용하는 군사기초과학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일본은 전후 최초로 군함을 수출하고 살상력 무기를 수출한다고 해 군사력의 과학기술이 첨단화된 독일과 일본의 군사 재무장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작고한 아베 신조 전 총리가 군사강대국 일본의 청사진을 내놓았는데,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아베의 군사강국 일본의 목표를 실현하려 한다. 독일과 일본의 군사강국의 움직임은 멈출 수 없는 세계가 되고 있고, 한국의 안전보장을 위해 자주국방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일본과 중국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동북아질서의 변화에 한국은 스스로에게 한국 안보의 앞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과의 동맹은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어야 하지만 핵잠수함·미사일과 드론 등 한국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자주국방력을 키워야 한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무기 수출에 나서면서 한국의 방위산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국을 침략하고 식민지배하면서 중국까지 쳐들어 가고, 급기야 미국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는데 미국의 핵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져 1945년 무조건 항복을 한 일본이다. 그러면서 1947년 평화헌법을 선포해 군사력을 보유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일본이 100년도 못 버티고 군사강대국으로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면서 대한민국과 국민은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스스로를 지킬 힘을 비축해야 한다. 김경민 한양대 명예교수

[fn광장] AX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것

인류가 인공지능(AI) 시대의 도래를 일상에서 체감하게 된 계기는 2022년 11월 말 오픈AI 챗GPT의 출시였다. 인간의 대화형 질문에 대한 거대언어모델(LLM) 기반 챗GPT의 대답이 항상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인간과 대화하는 기계의 등장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에게 매우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지난 4년 동안 업그레이드된 구글 제미나이, 앤스로픽 클로드, 네이버 하이퍼클로바 등 다양한 생성형 AI를 사용해 본 경험담이 우리 주위에 넘쳐흐른다. 생성형 AI는 문자 커뮤니케이션 시대의 백과사전,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시대의 위키피디아나 네이버 백과사전의 고급 버전이다. 정보와 지식 미디움의 기술적 확장이라는 점에서 물론 주목할 만하다. 그 정보와 지식의 범위가 교육, 학술, 법률, 행정, 과학기술, 산업, 언론, 디자인, 예술의 영역, 즉 개별 전문 도메인까지 전방위로 확대되는 이 시대를 우리는 AI 전환(AX) 시대라고 부른다. 사회의 각 도메인에 AI 테크놀로지가 진입하면서 바뀐 것이 분명히 있다. 첫째, 우리는 매우 똑똑하고 반응이 빠른 비서를 바로 옆에 두게 됐다. 생성형 AI 구독료를 좀 더 많이 지불하면 좀 더 유능한 비서를 옆에 둘 수 있다. 질문하면 바로 답하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물으면 더 구체적으로 반응한다. 그래서 변호사, 회계사, 의사, 약사와 같이 유사한 상담 과업을 반복하는 직종은 곧 소멸되리라는 우려도 있다. 둘째, 정보와 지식을 수집하는 일의 수행 방식과 평가는 효율성 중심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인간 비서를 채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저렴한 비용으로 짧은 시간에 엄청난 양의 과업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평가기준이 되고 있음이 큰 변화다. 컴퓨터 앞에서 간단히 해결되는 작업을 위해 힘들게 도서관에서 두꺼운 서지를 넘길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셋째, 복잡한 인간관계에 부대끼는 실제 세계에 굳이 진입할 필요 없이 가상의 세계 속에서도 얼마든지 정보와 지식을 탐구할 수 있다.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만으로도 자신의 전문 도메인을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욱 커진다. 논쟁도 필요 없고 숙의도 필요 없다. 그 결과 인간은 점점 더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기계와의 상호작용에 더욱 몰입한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 또한 분명히 있다. 첫째, AX 시대 전문 도메인의 플레이어는 여전히 비서 AI가 아닌 마스터 인간이다. 법원 판결, 의사 처방, 정부 정책, 기업 경영전략, 언론 보도, 모두 AI 비서가 효율적인 방식으로 제공한 정보와 지식의 나열만으로 결정될 수 없다. 여전히 법관, 의사, 행정가, 경영인, 신문 편집인이 의사결정의 핵심 플레이어다. 둘째, AX 시대에 AI가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제공하는 정보와 지식은 인간 사고 과정에 필요한 재료이지만 그 자체가 본질은 아니다. 최고의 요리를 위해 좋은 식재료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식재료의 단순 나열이 곧 최고의 음식은 아니다. 최고 요리의 본질이 마스터 셰프의 통찰력과 손맛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셋째, 인간과 기계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가상의 시나리오는 현실의 맥락을 자주 잊게 한다. 가상 세계의 팩트가 항상 현실 세계의 진실인 것은 아니다. 법, 정책, 언론, 심지어는 과학기술 세계가 마주치는 현실 도메인은 모두 매우 특수한 맥락 속에 존재한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여전히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이며, 인간의 개입으로 인해 비로소 해결된다. 그 개입의 책임도 역시 인간의 몫이다. 정부와 기업의 보고서, 학술 논문, 그리고 학생 에세이를 읽으면서 그 내용에 오류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특수한 맥락에 대한 해석과 진단의 자기 기준과 관점이 결여됐다면 최고 점수를 주기는 힘들다. AX 시대에 AI 비서의 도움에만 전적으로 의존해 마스터의 생각과 개입이 빠진 결과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마스터, 본질, 현실의 중요성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들이 점차 망각되고 있음이 우려된다. 스마트한 프롬프트 활용으로 AI를 더 잘 이용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AI는 여전히 정보와 지식을 수집해서 전달하는 비서이자 보조도구에 불과하다. AX 시대에는 확실한 자기 기준을 기반으로 사고하는 진품 전문가의 가치가 더욱 커질 것이다. 인간 지능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학습하고 복제해 내는 AI도 인간의 지성 영역을 완전히 대치하지는 못한다. 두려움 없이 담담하게 AX 시대를 포용하면 된다. 마동훈 고려대 미디어대학 교수

[포럼] JTBC와 미디어 산업의 위기

JTBC를 포함한 중앙그룹 계열사 5곳이 회생을 신청했다. 무리한 투자가 원인이었다는 등 다양한 분석이 쏟아지고 있고, 미디어 산업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원인에 대한 각자의 의견이 있겠지만 이 소식을 접했을 때의 심경은 충격과 착잡함이었다. 뉴스를 접하고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두루 밝은 친구와 식사를 했는데, 그의 반응도 놀라웠다. JTBC만 어려울 뿐 방송산업은 호황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미디어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은 여전히 외양의 화려함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JTBC 사태는 개별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미디어 산업 전체의 구조적 위기를 보여주는 신호라고 봐야 한다. 언젠가부터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K'라는 접두어에서 미디어가 차지하는 지분은 절대적이다. 해당 분야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최근 드는 생각은 K-콘텐츠의 성공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그 이면에 내재된 문제들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콘텐츠 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던 기업이 무너졌다는 측면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JTBC의 과도한 투자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고, 타당한 지적이기도 하지만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 위험 부담이 높은 미디어 산업에서 공격적인 투자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다른 산업은 몰라도 미디어 산업에서 위대한 결과물이 나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무모함은 필수적이기도 하다. 현재와 같은 어려움이 지속되면 부담을 감내하면서 적극적인 투자를 하는 사업자들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안정을 담보로 한 투자만 이어지게 된다면 족적을 남길 만한 콘텐츠 제작을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방송산업에서는 이미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JTBC 정도의 기업이 무너지게 되면 그 파장은 연쇄적이다. 제작사를 포함하여 관련 주체가 겪게 될 어려움에 대한 우려가 다각적 차원에서 제기되고 있다. JTBC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다른 방송채널 사업자도 어렵고, 케이블TV를 비롯한 유료방송 산업의 어려움도 커지고 있다. 미디어는 생태계이고, 채널 사업자와 플랫폼 사업자의 어려움은 생태계 구성원들이 함께 부담해야 할 짐이 될 수밖에 없다. 미디어 산업계와 학계에서 '위기'라는 단어는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고 있지만, 정작 그에 대한 실질적인 대응 방향을 모색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는 단기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처방과 중·장기적인 미디어 산업의 지향점을 같이 모색해야 하는 시기다. 정부에서는 JTBC를 포함하여 어려움에 직면한 사업자들에 대한 지원방안을 마련해줘야 한다. 낡은 규제 개선과 시장에서 버틸 여력이 없는 사업자를 위한 출구전략 마련은 시급한 과제다. 콘텐츠 경쟁력이 한국의 강점이지만, 미디어는 생태계인 만큼 공생을 전제로 한 큰 비전과 가치를 공유하며 생태계 전체가 동반성장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미디어 산업이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는 것은 국가 차원에서 위중한 문제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그에 부합하는 대응이 이뤄져야 한다. JTBC와 같은 사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고 누적된다면 더 이상 'K'라는 접두어를 쓰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노창희 디지털산업정책 연구소장

[차관칼럼] '서랍 속 특허'를 깨워야 할 때

"사실 그 특허는 없앨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없앨 특허가 아니라 깨워야 할 특허였습니다." 국내 한 대학 연구진이 20여년 전 개발한 와이파이 콜링(Wi-Fi Calling) 원천특허는 오랫동안 서랍 속에 잠들어 있었다. 당시 사업성이 크지 않다고 봤던 이 특허는 매년 내야 하는 유지료 부담 때문에 포기를 고민하게 했다. 하지만 이후 미국 주요 통신사들이 사용하는 핵심기술로 자리 잡았고, 특허 라이선스 협상을 통해 수백억원의 가치를 창출했다. 연구실에서 탄생한 아이디어가 시장과 연결되며 새로운 자산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 일화는 '특허의 가치는 등록에서 끝나는가'라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나라는 작년 기준 국내 특허출원 약 26만건으로 세계 4위의 특허 강국이다. 그러나 국민 세금이 투입된 국가 연구개발의 산물인 대학·공공연 특허의 연간 기술이전 수입은 2800억원에 그치고 있다. 이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한 곳의 6400억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특허를 만드는 역량과 이를 시장의 가치로 연결하는 역량 사이에 극명한 간극을 보여준다. 해외에서는 이미 특허가 기업의 미래 성장을 이끄는 전략자산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코닥은 경영위기 속에서도 특허를 매각해 회생의 기반을 마련했고, 노키아는 휴대폰 시장의 주도권을 잃고 사업을 철수했지만 그간 축적해온 특허자산 라이선스를 통해 작년 한 해에만 3조원의 매출을 올렸다. 제품은 사라져도 제조의 근간이었던 우수한 특허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방증한다. 최근 특허 등 지식재산권(IP)을 전문으로 발굴, 가치를 평가해 거래와 라이선싱을 지원하는 기업들이 주목받고 있다. 그중 생산활동 없이 매입한 특허권을 활용해 소송을 제기하는 기업을 NPE(Non-Practicing Entity)라고 부르며, 이들의 행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에서 고품질 특허가 제값을 받도록 돕는 긍정적 측면도 부정하긴 어렵다. 특히 특허 사업화 경험이나 전문인력이 부족한 대학·공공연과 중소기업에는 특허를 시장과 연결시켜 주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이젠 'NPE'나 '특허괴물'보다 'IP수익화 전문기업(PME·Patent Monetization Entity)'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식재산처는 시장성 높은 우수특허를 발굴해 지식재산펀드 등 민간투자 확대로 연결시켜 특허로 돈을 버는 시장을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개별 특허의 일회성 거래가 아니라, 특허가 투자와 수익화로 이어지고 그 성과가 다시 연구개발과 고부가가치 특허 생산으로 연결되는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키는 일이다. 이러한 흐름이 자리 잡을 때 지식재산은 권리 그 자체를 넘어 진정한 기업의 성장 전략자산이자 국가 경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서랍 속에는 시장에서 화려하게 비상할 수 있는 특허가 잠들어 있을지 모른다. 이제는 그 특허가 일을 하도록 깨워야 할 때다. 대한민국이 특허를 많이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알짜 특허들로 기업과 국가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뒷받침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지식재산이 대한민국의 진짜 성장을 떠받치는 든든한 한 축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확신한다. 김용선 지식재산처장

[fn광장] 日 '아시아판 나토' 구상과 한국의 선택

지난 5월 말, 일본 도쿄대학에서 개최된 기타오카 신이치 명예교수의 기념 강연회에 다녀왔다. 기타오카 명예교수는 필자가 일본 유학 시기 수강했던 일본정치외교사 관련 과목의 담당 교수였고, 박사 논문의 심사위원도 담당해 준 인연이 있었다. 특히 그는 2012년부터 시작된 제2차 아베 신조 내각 시기, 총리의 외교안보정책좌장 역할을 맡아 당시 최초로 책정된 국가안보전략서를 기초하였고, 일본 학자로서는 예외적으로 유엔 차석대사 등의 공직도 역임하는 등 21세기 일본의 외교안보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대표적인 일본 내 전략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도쿄대학 법학정치학부 제자들이 마련한 이 강연회에서 기타오카 명예교수는 2021년도에 발간한 편저 등에서 제기해 온 그의 지론을 재차 강조했다. 즉 서쪽으로는 중국, 북쪽으로는 러시아, 동쪽으로는 미국에 직면해 있는 지정학적 조건 속에서 일본이 추구해야 할 대외정책의 방향은 가치와 이익을 공유하는 한국, 필리핀을 포함한 동남아 국가들, 호주 및 뉴질랜드와 더불어 가칭 '서태평양 연합'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주목할 점은 이 같은 구상들이 명칭을 달리하면서도, 일본의 정치가나 전문가들에 의해 폭넓게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는 2024년 9월, 허드슨 연구소에 기고한 영문 논설을 통해 러시아·중국·북한의 핵전력 증강이 초래할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동맹 관계인 미국에 더해 한국, 캐나다, 호주, 영국, 프랑스 등을 구성국가로 포함하는 아시아판 나토 구상을 밝힌 바 있다. 지난해 5월에는 나가타니 겐 방위성 장관이 샹그리라대화에서의 연설을 통해 '오션(OCEAN·One Cooperative Effort Among Nations)'구상, 즉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가치와 이익을 공유하는 국가들 간의 협력체계를 구축하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하였다. 즉 일본의 정치가 및 전문가들은 제1도련선 지역에 대한 중국의 해·공군력 투사와 북한의 핵능력 증대 등에 의해 자신들의 안보이익이 위협에 처할 수 있다고 보고, 미국과의 동맹체제 강화에 더해 주변 우방국들과의 안보네트워크 강화를 구축하는 대외전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이러한 지정학적 구상들을 제기하는 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관련 국가들과의 외교안보적 협력을 촉진하기 위한 조약이나 협정을 체결하면서 그 제도화도 도모하고 있다. 호주, 영국, 프랑스와는 군사정보 공유를 위한 지소미아(GSOMIA) 협정 이외에도 방위장비기술이전협정, 상호군수지원협정(ACSA), 원활화협정(RAA) 등을 각각 체결하였고 수시로 외교와 국방당국 수장 간의 2+2 회담을 개최하는 등 동맹국 미국에 버금가는 안보협력의 제도화를 갖추었다. 필리핀, 인도, 독일, 이탈리아 등과도 지소미아, 상호군수지원협정, 방위장비기술이전협정을 각각 체결하였고 상호 병력의 훈련 등 목적의 출입국 절차를 간소화할 수 있는 원활화협정 체결도 준비하고 있다. 우방국들 양자 간 인적 교류나 부대 간 교류에 더해 다양한 협정 체결을 통한 외교적 제도화까지 구축하고 있는 점에서 우리에 비해 일본이 보다 치밀한 다자안보협력을 추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일본의 이러한 지정학적 구상과 그 제도화가 미국을 경유하여 한국에 요구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제2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발족 이후 미국은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 기조나 중동지역 전쟁 발발 등의 요인에 따라 인태 지역에서의 안보 역할을 점차 한국이나 일본 등 역내 동맹국가들에 분담하는 안보정책을 가시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제시하는 '아시아판 나토' 구상이나 '서태평양 연합' 등의 구상을 트럼프 행정부가 적극 수용하여 한국에도 참가를 요청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으로서는 일본발 지정학적 구상들이 한국의 안보이익 관점에서 어떤 유불리를 초래할 수 있을지 판단해야 한다.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 표명이나 핵능력 고도화 등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으로서도 대미 동맹 강화에 더해 일본, 호주, 캐나다, 그리고 동남아 국가들과의 협력 확대는 마다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지리적으로 인접한 중국과의 관계는 일본의 그것에 비해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양자 혹은 다자 간 교류에 더해 외교적 협약을 통해 국가 간 안보협력의 제도화를 추구하는 일본 안보정책의 특성을 직시하면서 한국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반영한 대외전략구상, 그리고 그를 구현하기 위한 안보협력의 제도화를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박영준 국방대학교 국가안보문제연구소장

[fn광장] 對北 햇볕정책 다시 꺼내들 때 아니다

우리는 과연 북한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냉전이 끝난 1980년대 이후 북한을 제대로 분석하고 정확한 판단을 해왔는지 보면 볼수록 한심한 결과에 놀란다. 이에 입각한 대북정책 또한 마찬가지다. 더욱이 정권 성향에 따라 북한을 보는 시각이 다르고, 동일한 데이터를 보고도 다르게 해석한다. 김일성이 사망한 날, 참석했던 KBS 심야토론에서 김정일 정권은 빠르면 3일 늦어도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될 것이라는 것이 당대 전문가들의 중론이었다. 냉전 붕괴 이후 사회주의 정권이 연일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가운데, 고립된 북한 정권이 붕괴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북한체제 붕괴론은 우리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체제붕괴 파장이 미칠 악영향을 차단하기 위해서 연착륙을 모색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포용적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남북 체제경쟁에서 우리가 돌이킬 수 없게 승리했기 때문에 더 이상 경쟁은 무의미하며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통 크게 접근해야 한다는 논리가 정부나 전문가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미북 제네바합의에도 영향을 미쳐서 북한은 곧 붕괴될 정권이기에 통 크게 경수로 2기 등 우리가 부담하는 대규모 지원을 담았다. 햇볕정책은 체제경쟁에서 승리했다는 판단이 반영된 결과였다. 북한 문제는 강풍보다 햇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심각한 경제식량난으로 수백만의 아사자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이러한 인식이 더욱 굳어져 갔다. 그러나 정작 경제식량위기 속의 북한이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핵무기 양산과 미사일 실험을 지속하고 있고, 매년 2척의 5000t급 미사일 구축함을 건조하고 있으며, 전략핵잠수함까지 건조하고 있는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북한 경제식량난은 사실 의도적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백만의 아사 상황도 당시 옥수수 2억~3억달러어치면 막을 수 있었지만, 북한 정권은 그러지 않았고 모든 자원을 영변 핵시설 등 핵무기 개발에 쏟아부었다. 그 비용의 10분의 1이면 아사자 발생을 막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북한 식량난은 40년 가까이 진행형이다. 최근 유엔 보고서는 주민의 42%가 심각한 영양부족이라고 한다. 만성적 경제위기조차 방치되고 의도된 산물일지 모른다. 북한 경제는 민수경제와 수령과 군을 위한 경제가 다르다. 북한 경제는 민수는 사실상 방치되어 주민 삶을 극단적으로 희생시키고, 오직 수령과 군사력 강화에만 올인하는 '군사요새형 경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민수를 뺀 북한 경제는 우크라이나전쟁으로 호황이고 고도성장 중이다. 김대중 정부 이후 북한에 대한 내재적 접근이 주류가 되면서 오류는 심화되었다. 북한을 외부 잣대로 비판하지 말고 주체사상과 역사적 맥락의 내부적 논리에서 이해하자는 것이다. 심각한 인권유린에 눈감고 북한 핵무장의 심각성을 간과했다. 햇볕정책은 북한이 핵을 개발하고 개방·개혁을 하지 않는 것을 적대적 외부환경에서 찾았다. 이를 해소하면 북한은 스스로 핵을 포기하고 개혁·개방에 나선다는 것이다. 미국의 압살정책 탓에 핵을 개발한다는 북의 논리를 그대로 가져왔다. 핵실험이든 미사일실험이든 우리 정부의 설명에는 항상 협상용이라는 평가가 붙었다. 지난 30년 이상 대북협상 과정을 보면 북한 핵야망이 협상용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미국이 북한의 비밀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을 북한에 제기했을 때 놀랍게도 우리 고위직들은 일제히 제네바합의를 파기하고 남북관계 개선을 훼손하려는 미 네오콘의 조작으로 몰아갔다. 이후 북한 스스로 영변 HEU시설을 공개했지만 이와 관련, 누구도 오류를 인정한 적이 없다. 물론 북한 핵무장을 보고도 누구도 정책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김정일은 절대 세습이 아닌 당성이 강한 젊은 엘리트를 후계자로 육성할 것이라고 보았다.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가 된 것은 혈통이 아니라 그의 능력을 인정받은 결과라는 것이다. 예상과 달리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장하며 전대미문의 3대 세습이 이루어졌다. 햇볕정책을 지탱해온 북한보다 우리가 우월하다는 전제는 무너지고 있다. 북한은 핵무장에 성공했고, 중러와의 군사동맹도 부활하고 있다. 북중러 군사교류는 물론 연합훈련도 보게 될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을 만나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포기 대가로 주한미군 철수를 감행할지 모른다. 전작권 전환보다 비핵국가 한국이 어떻게 생존할 것인지 전략적 고민이 절실한 시점이다. 실패하고 철지난 햇볕정책을 다시 꺼내들 때가 아니다.윤덕민 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전 주일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