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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광장] 두뇌유출을 두뇌순환으로 바꾸려면

최근 서울의 한 대학 경제학과 교수 두 명이 홍콩 소재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대학이 제시한 연봉은 기존 연봉의 세 배를 넘는 수준이라고 한다. 더 나은 보상과 연구 환경을 찾아 해외로 떠나는 전형적인 두뇌유출(brain drain) 사례다. 국내 대학 현실을 보면 이해가 간다. 대부분의 사립대학은 2000년대 후반부터 지속된 등록금 동결로 재정 여력이 크게 약화됐다. 교수 연봉 역시 호봉 승급분을 제외하면 사실상 동결 상태였다. 한국경제학회는 국내 경제학자들의 보수와 근무 여건을 파악하기 위해 설문조사를 했다. 국내 경제학자 174명을 포함한 5개국 회원 214명을 대상으로 연봉, 직무 만족도, 이직 의향 등을 조사한 결과 기본급의 중앙값은 교내 추가 보상을 제외하고 9500만원으로 나타났다. 직급별 중앙값은 조교수 7500만원, 부교수 8500만원, 정교수 1억500만원이었다. 응답자의 72.5%가 현재 급여 수준에 불만을 표시했다. 주요 이유로는 생활비 상승에 따른 실질소득 감소가 32.2%, 해외 경쟁국에 비해 현저히 낮은 급여가 31.4%를 차지했다. 특히 응답자의 91.7%는 한국의 낮은 보상체계가 두뇌유출을 가속하고 학문적 경쟁력을 떨어뜨린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응답자의 63.9%가 해외 이직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거나 이미 준비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한국경제학회가 개최한 한·중·일 경제학자 포럼에서도 이와 관련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다. 먼저 미국경제학회 홈페이지에 공개된 박사학위 수여 대학 정년트랙 교수의 평균 연봉을 살펴보면 한국 대학의 보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2025년 평균 환율인 달러당 1412원을 적용하면 미국 대학의 평균 연봉은 조교수 약 2억3300만원, 부교수 약 2억7600만원, 정교수 약 3억7100만원에 이른다. 중국 측 발표를 보면 조교수 약 2200만~5500만원, 부교수 약 3300만~8800만원, 정교수 약 5500만~1억7600만원 수준이었다. 직급별로 연봉 격차가 크지만, 개인의 연구 역량과 성과에 따라 특별 연봉이 지급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예컨대 국가 최고 수준의 역량을 인정받은 교수에게는 약 2억2000만원의 연봉이 보장되며, 별도의 정착금과 함께 최대 약 11억원의 연구비가 지원된다고 한다. 연공서열의 영향이 강한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개인의 능력과 연구 성과를 훨씬 중시하는 보상체계이다. 국민소득 수준에서 명실상부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우리나라는 인공지능(AI) 대전환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성공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수한 연구인력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두뇌유출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해외 인재가 국내로 유입되는 두뇌유입을 촉진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미국 국립과학재단 자료에 따르면 2017~2019년 미국에서 이공계 박사학위를 취득한 외국인 가운데 한국 출신은 중국과 인도에 이어 세 번째로 많았다. 그러나 이들 중 2023년에도 미국에 거주한 비율은 50%에 달해 우수인재 상당수가 국내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제 대학의 인재정책과 재정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장기간 이어진 획일적 등록금 규제를 재검토하고, 대학이 교육과 연구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 내년에 최대 100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에 학령인구 감소시대를 반영하여 고등교육 지출을 확대해야 한다. 즉 연구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교육재정 배분구조로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해외 우수인재를 국내 연구 생태계로 끌어들이기 위한 제도적 유연성도 확대해야 한다. 국내외 대학 간 공동 임용, 장기 방문연구를 활성화해 해외 연구자들이 국내 대학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도록 해야 한다. 완전한 귀국만을 요구하기보다 국내외 연구자가 자유롭게 이동하며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는 '두뇌순환(brain circulation)'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다. AI 대전환 시대의 국가경쟁력은 결국 사람에게서 나온다. 반도체 공장과 데이터센터 등 인프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계적 인재가 국내에서 연구하고 도전하며 성과에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대학·정부·기업이 우수 인재를 미래 성장의 핵심 자산으로 인식하고 과감한 투자와 제도개혁에 나서야 한다. 두뇌유출을 두뇌유입과 두뇌순환으로 전환하는 것이 AI 대전환 시대에 지속가능 발전을 위한 핵심 과제다. 강성진 한국경제학회 회장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기고] 소상공인 사회안전망 구축 나서야

전통시장을 찾을 때마다 '폐업 정리' 안내문을 어렵지 않게 마주한다. 예전에는 장사가 어려워도 버텼지만 이제는 버틸 힘조차 남지 않았다는 상인들의 하소연이 먼저 들린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말한 '위험사회(Risk Society)'는 바로 이러한 현실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과거의 위험이 자연재해나 전쟁과 같은 외부의 위협이었다면 오늘날의 위험은 경기침체와 고금리·고물가, 플랫폼 경제의 확산, 감염병, 기후변화처럼 사회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비자발적 위험이다. 이러한 위험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지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계층은 소상공인이다. 최근 늘어나는 소상공인의 휴·폐업은 더 이상 개인의 경영 실패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성실하게 가게를 운영해도 소비는 줄고 임대료와 인건비는 오르며 온라인 소비는 갈수록 늘어난다. 폐업 뒤에는 빚과 생계의 불안, 심리적 고립이 남는다. 경제위기 때마다 자영업자의 극단적 선택이 증가하는 현실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구조가 만들어낸 결과이며,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할 정책의 과제다. 소상공인은 단순한 자영업자가 아니다. 골목의 식당과 카페, 미용실, 세탁소, 전통시장 점포 하나하나는 지역경제를 떠받치는 생활 인프라이자 공동체를 연결하는 사회적 자본이다. 점포 하나가 문을 닫으면 매출만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단골과 이웃의 관계가 끊기며 골목상권의 활력도 함께 약해진다. 소상공인의 위기는 곧 지역공동체의 위기다. 지난 20여년 동안 소상공인 정책은 창업과 성장에 많은 역량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위험사회에서는 '잘 키우는 정책'만큼 '무너지지 않게 하는 정책'이 중요하다. 이제 정책의 중심도 창업과 폐업 지원을 넘어 경영위기를 예방하는 방향으로 옮겨가야 한다. 이를 위해 정책금융과 함께 정책보험을 소상공인 사회안전망의 한 축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 특히 1인 소상공인은 질병과 사고, 출산과 육아, 범죄 피해, 일시적 휴업만으로도 곧바로 생계위기에 놓일 수 있다. 휴업 기간의 고정비 지원, 경영컨설팅, 채무조정, 심리회복 프로그램을 유기적으로 연계하고 정부의 정책보험과 민간보험이 상호 보완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복지는 비용이 아니라 투자라는 말이 있다. 소상공인 안전망도 다르지 않다. 위험을 개인에게만 떠넘기는 사회는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된다. 소상공인은 우리 경제의 모세혈관이다. 모세혈관이 건강해야 몸 전체가 건강하듯 소상공인이 버텨야 지역경제도 살아난다. 위험사회의 시대, 소상공인에게 필요한 것은 더 치열한 경쟁이 아니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촘촘한 안전망이다. 사람을 지키는 정책이 시장을 살리고, 시장을 살리는 정책이 결국 대한민국 경제의 지속가능성을 지키는 길이다. 김유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상임이사

[포럼] AI 셧다운과 백신의 경고

얼마 전 평소처럼 인공지능(AI) 모델 클로드를 켰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화면에 뜬 "Fable 5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라는 안내문 때문이었다. 앤스로픽이 선보인 최신 모델 '페이블(Fable) 5'와 '미토스(Mythos) 5'가 미국 상무부의 수출통제 조치로 순식간에 차단된 것이다. 다행히 19일 만에 통제가 해제됐지만, 그 짧은 순간의 낯선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제 AI 없이는 일상도 업무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그런데 한 국가의 정책 결정 하나로 다른 나라의 AI 인프라가 언제든 멈춰설 수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섬뜩한 현실이었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개념이 '소버린 AI(Sovereign AI)'다. 자국의 데이터와 인력, 알고리즘으로 독자적인 AI 영토를 구축하고 통제하는 역량을 뜻한다. 우리나라도 이를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5개 기업과 손잡고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의 닻을 올렸고, 2027년까지 5300억원을 투입해 톱티어급 한국형 AI를 완성한다는 밑그림을 그려둔 상태다. 이 예기치 못한 'AI 셧다운' 소동을 겪으며, 잔인했던 코로나19 시절의 기억이 겹쳐졌다. 마스크 없이는 숨 쉬기 어려웠고, 국경이 닫힌 채 비대면이 일상이 됐던 그 시절, 구원투수로 등장한 건 화이자·모더나 같은 글로벌 제약사의 백신이었다. 통상 10년 걸리던 백신 개발을 단 1년 만에 끝낸 인류의 기적이었다. 하지만 '백신 주권'이 없던 우리는 그 기적을 구걸하듯 확보하려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당시 필자는 한국연구재단 국책연구본부장으로서 국내 백신 개발 예산을 한 푼이라도 더 확보하려 사방으로 뛰던 기억이 생생하다. 덕분에 국산 백신 플랫폼 기술이라는 값진 씨앗을 어렵사리 심었고, 그중 일부 항원 설계 방법론은 국내 개발 백신 중 유일하게 임상3상까지 나아가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엔데믹 전환과 함께 관심과 지원은 빠르게 식었다. 정부 지원은 단계별 단발성에 그쳤을 뿐, 상용화와 글로벌 허가까지 이끌 지속적인 뒷받침은 없었고 완제 생산도 사실상 멈췄다. 결국 어렵게 심은 씨앗은 꽃피우기도 전에 관심 밖으로 밀려난 셈이다. 진짜 우려는 그 이후부터였다. 위기가 지나자마자 감염병 연구개발(R&D) 투자액은 슬그머니 줄어들었다. 지금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질병 X(Disease X)'가 언제든 국경을 넘어올 준비를 하는데, 우리는 소나기가 그쳤다고 우산부터 내던지는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는 셈이다. 외국에 손 벌리지 않고 자국 기술로 국민을 지키는 능력, 즉 '소버린 백신'의 중요성은 소버린 AI와 정확히 같은 궤적을 그린다. 각국이 자국 물량부터 빗장을 걸어 잠그던 팬데믹의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AI와 백신이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불이 난 뒤에야 소방서를 지으려 하면 이미 늦는다. 탄탄하게 다져놓은 독자적 기술과 인프라만이 진짜 위기 속에서 우리를 지켜줄 든든한 방패가 된다. 해외 AI 접속 셧다운 하나에, 혹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하나에 국가 전체가 흔들리지 않는 미래, 그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차분히 쌓아 올려야 할 예산이라는 주춧돌과 지속적인 관심에서 시작된다. 문애리 덕성여대 약대 석좌교수

[포럼] 베트남, 중진국 함정 넘을까

세계은행이 최근 베트남을 상위 중소득국(Upper Middle-Income Country·UMIC)으로 상향 조정했다. 2025년 1인당 국민총소득이 4970달러를 넘기며 도이머이 개혁 40년 만에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상위 중소득국 진입은 축배를 들 시점이 아니라 중진국 함정(middle income trap)을 피해야 하는 더 어려운 과제의 시작이다. 아세안 주요국은 물론 수많은 국가가 이 문턱에서 생산성 정체와 산업혁신 부재로 성장의 벽에 부딪혔다. 동남아에서 그 시험대가 바로 전기차 산업이다. 전기차는 배터리, 반도체, 전력망, 소프트웨어, 인공지능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융합산업으로 제조업 전반의 생산성 향상을 견인할 핵심 산업으로 평가된다. 이에 따라 한때 일본 브랜드가 장악했던 아세안의 자동차 시장은 전기차를 기반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자동차 생산허브인 태국은 오랜 기간 축적한 부품 생태계와 숙련인력을 바탕으로 중국 전기차 기업의 투자를 끌어들이며 생산량을 늘리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 수준의 니켈 자원을 앞세워 배터리 원료에 기반한 공급망을 강화하고, 말레이시아는 중국계 전기차의 위탁생산 거점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의 선택은 다르다. 단순한 하청 생산기지에 머무르지 않고 독자 브랜드를 키우는 길을 택했다. 빈패스트(VinFast)는 2025년 한 해 17만5000여대를 판매하며 베트남 전체 승용차 시장의 약 30%를 차지하여, 15개월 연속 1위 브랜드에 올랐다. 빈그룹 계열의 빈에스는 배터리팩 생산을 시작했고, 브이그린이 구축한 15만개 이상의 충전포트도 전국으로 확대됐다. 전기차 시장 규모는 2025년 31억달러에서 2030년 80억달러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빈패스트의 성장은 단순한 판매실적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베트남이 처음으로 자국 브랜드를 중심으로 미래차 생태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산업정책 전환이 현실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전기차 보급을 넘어 핵심 부품과 기술을 내재화하고 녹색전환과 함께 미래차 기술과 브랜드, 설계 역량을 축적하겠다는 장기적 포석이다. 베트남이 전기차를 축으로 디지털 경제와 첨단제조업의 결합을 서두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현실은 아직 녹록지 않다. 베트남의 완성차 판매는 빠르게 늘고 있지만 배터리·반도체·차량용 소프트웨어 등 핵심 기술은 해외 의존도가 높다. 시장을 키우는 것과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은 전혀 다른 과제다. 특히 중국의 저비용 대량생산에 대응하려면 베트남은 전기차 산업생태계 구축과 전략산업 연구개발(R&D) 확대를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산업협력 모델이 필요하다. 한국 역시 이를 새로운 공급망 파트너십의 기회로 인식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투자 확대가 아니라 기술과 공급망을 함께 설계하는 전략적 협력이다. 베트남의 도전은 이제 시작이며, 그 성패는 결국 중진국 함정을 넘어설 수 있는 산업 경쟁력 확보에 달려 있다. 그 도전에 한국이 전략적 파트너로 참여할 때 양국은 물론 동남아시장에서 새로운 성장의 기회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권율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fn광장] 삼성이 무기사업을 포기한 이유

2016년 개봉한 영화 워 독(War Dogs)은 '전쟁무기 거래 실화'라는 독특한 소재와 블랙코미디 장르의 결합으로 적지 않은 기대를 모았다. 미국 플로리다에서 팍팍한 삶을 살아가던 데이비드는 우연히 고교 동창 에프레임을 만난다. 에프레임은 미 국방부 조달시스템의 틈새시장을 노려 소규모 무기 계약을 따내는 비즈니스가 직업이다. 에프레임의 솔깃한 제안에 합류한 데이비드는 노트북과 전화기 한 대로 수백만달러가 오가는 무기 밀매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처음에는 소소한 군용 장비 계약으로 재미를 보던 두 청년은, 점차 대담해지며 미 국방부가 내놓은 3억달러 규모의 초대형 아프가니스탄 군 무기 공급 계약을 따내는 데 성공하지만, 기쁨도 잠시다. 계약된 엄청난 양의 탄약을 구하기 위해 봉쇄된 이라크 전장에 들어가고, 동유럽의 무기 암시장을 전전하며 목숨을 건 위험에 직면한다. 돈맛을 알아버린 20대 청년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위험한 전쟁 비즈니스의 소용돌이 속에서, 두 사람의 파트너십과 운명은 아슬아슬한 균열을 맞이한다. 돈과 성공이 커질수록 위험도 비례해서 커진다. 그들이 발을 들인 세계는 단순한 사업 영역이 아니라 국제정치와 전쟁산업이 얽힌 복잡한 정글임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전쟁을 다루지 않고 전쟁 비즈니스를 다룬다. 군인과 전투가 아니라 전쟁 뒤편에서 돈을 버는 사람들에게 앵글을 맞춘다. 총성이 울리는 전선이 아니라 계약서와 이메일, 협상 테이블이 무대가 된다. 전쟁이 산업이 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전쟁은 국가와 이념의 충돌이지만 이면에는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거대한 산업이 존재한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전쟁산업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젊은 사업가들의 무모한 시도로 포장해 풍자했다. 영화사적으로 대박 작품은 아닐지라도 21세기 방산 거래의 아이러니를 블랙코미디라는 형식으로 풀어낸 수작임은 틀림없다. 필자가 워 독을 다시 넷플릭스에서 찾아 본 것은 60조원 규모의 캐나다 차세대잠수함 사업 수주 실패 때문이다. 독일 티센크루프마린시스템스(TKMS)가 12척의 잠수함 수주를 따냄으로써 한화는 또 한번 해외 대형 방산 프로젝트 수주에 실패했다. 폴란드 오르카(ORKA) 사업에 이어 캐나다까지 연이어 고배를 마셨다. 한국은 이번 수주전을 위해 잠수함 '도산안창호함'을 현지에 파견하는 등 민·관·군이 총력 지원했다. 2032년 첫 잠수함 인도라는 빠른 납기와 2044년까지 약 700억캐나다달러(약 75조원) 규모의 경제효과 창출을 제시했으나 패배했다. 양측의 기술력 차이보다 독일이 나토(NATO) 회원국이라는 구조적 강점이 최종 선택에 있어 크게 작용했다는 평가다. 한화오션은 입장문을 통해 "진인사(盡人事)의 자세로 이번 사업에 임했지만 결국 나토 동맹이라는 높은 벽을 넘지 못했다"고 했다. 과연 진인사의 의미를 어떻게 봐야 할까. 진인사에는 기술력과 가격만이 들어가지 않는다. 사실 정부는 대통령 비서실장을 현지에 보내고 업체는 캐나다 현지에 대규모 신문 광고를 내보내는 등 외형적이고 거시적 측면에서는 진인사를 했다. 하지만 무기 거래의 은밀성과 복잡성은 고차방정식이다. 평가 배점은 성능 20%, 후속군수지원 50%, 산업협력 15%, 금융 및 사업 역량 15%다. 한국은 현대차 공장 건설 등 산업협력 요소만이 우세했을 것이다. 배점 평가는 매우 주관적이다. 현지 정·관계 인사는 물론 해군 관계자 등 다양한 계층의 인물과 동업자처럼 유대관계를 맺어야 한다. 캐나다 현지 인맥과 취향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도 충분하지 않다. 동양 유색인이 백인을 상대로 무기를 판매한다는 것의 복잡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존에 잠수함을 수출한 인도네시아에 그칠 것이다. 요컨대, 무기 외적인 요인이 최종 승부를 가른다. 과거 삼성이 무기 사업 회사인 삼성테크윈을 한화에 매각한 이유는 반드시 특수복합거래를 해야 하는데 삼성의 이미지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간단히 흘려버릴 이야기가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나토 방산포럼에서 한·나토 방위산업 파트너십 2.0을 제안했다. 무기를 사고파는 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함께 연구 및 생산하고 운용하는 표준 구조로 협력 단계를 높이자는 의미다. 하지만 나토에서 강력한 경쟁자인 한국에 이런 협력을 허용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과거 일본이 네덜란드에서 화포와 군함 기술을 배우기 위해 자국인을 귀화시키고, 스코틀랜드에서 위스키 증류법을 습득하기 위해 현지에서 장인의 딸과 결혼까지 했던 중장기 전략은 필수다. 올림픽처럼 방산 입찰 공고에 무한 도전하면 백전백패다.남성욱 숙명여대 석좌교수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포럼] 시급한 전력산업 혁신

2026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32강 진출 가능성이 높게 점쳐졌지만 결과는 본선 진출 실패였다. 비판은 감독과 선수 개인을 넘어 대한축구협회의 운영 시스템으로 향하고 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이번 실패를 개인이 아닌 거버넌스의 문제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20년 전 스마트그리드는 전력산업의 '인터넷 혁명'을 약속했다. 정보통신기술을 통해 새로운 서비스와 기업이 등장하고, 전력산업 역시 혁신 생태계로 진화할 것이라는 기대였다. 우리나라도 제주 스마트그리드 실증단지 등 대규모 사업을 추진했고, 그 결과 스마트미터 보급과 수요반응(DR), 에너지관리시스템(EMS) 등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전력망은 스마트해졌다. 그러나 기대만큼 산업은 달라지지 않았다. 스마트그리드는 전력망을 디지털화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전력산업을 혁신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인공지능(AI) 시대는 전력산업의 의미 자체를 바꾸고 있다. AI 데이터센터와 분산에너지의 확산으로 전력망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가 되었다. 이제 경쟁력은 발전소를 얼마나 많이 짓느냐보다 그 위에서 얼마나 다양한 혁신이 일어날 수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왜 전력망은 스마트해졌는데도 전력산업 혁신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까. 많은 사람들은 기술의 한계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기술보다 거버넌스에 있을지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거버넌스는 전력망의 소유 구조가 아니라, 누가 참여하고 어떤 규칙 아래 경쟁하며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가 시장에 진입하는지를 결정하는 제도와 운영체계를 의미한다. 인터넷 혁명의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누구나 참여하고 경쟁할 수 있는 개방형 생태계였다. 그 위에서 생성형 AI를 비롯한 수많은 혁신이 탄생했다. 반면 전력산업은 데이터의 무한 확장이 가능한 인터넷과 달리 송전망이라는 물리적 인프라의 제약을 강하게 받는다. 작은 운영 오류도 대규모 정전으로 이어질 수 있어 안정성과 공공성, 사이버 보안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가치다. 이러한 특성은 새로운 사업자의 참여와 혁신을 제약해 왔다. 안정성과 혁신은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전력망 자체를 무분별하게 개방하는 것이 아니라, 안정성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기술과 다양한 사업자가 혁신할 수 있는 제도와 시장을 설계하는 일이다. 이것이 AI 시대 전력 거버넌스의 핵심이다. 축구도 좋은 선수 몇 명을 더 선발한다고 강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감독 선임과 유소년 육성, 의사결정 체계가 함께 발전할 때 지속적인 경쟁력이 만들어진다. 전력산업도 마찬가지다. 더 많은 스마트 장비를 구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좋은 기술이 산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좋은 거버넌스 안에서 기술은 혁신으로 이어진다. 이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새로운 전력기술을 어떻게 도입할 것인가가 아니다. 망 안정성을 담보할 공적 책임과 민간의 혁신을 촉진하는 시장 메커니즘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즉 AI 시대에 걸맞은 전력 거버넌스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이다. 미래 경쟁력은 기술보다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에 달려 있다. 그것이 대한민국 전력산업의 최우선 과제이다.모정훈 연세대 산업공학과 교수

[fn광장] 뉴저지와 빅토르 위고

2026 북중미 월드컵 결승전은 뉴저지에서 열린다. 조별리그 1차전 중 명승부의 하나가 C조 1차전. 브라질 vs 모로코. 결과는 1대 1 무승부. 이 경기가 뉴저지에서 열렸다. TV 중계화면에 자주 'New Jersey'가 비쳤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뉴저지, 뉴저지, 뉴저지…. 허드슨강을 사이에 두고 뉴욕과 마주 보는 곳, 맨해튼의 야경을 황홀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곳, 자동차 번호판의 별칭이 '가든 스테이트(Garden State)'인 곳, 미국의 국민가수 프랭크 시나트라가 태를 묻고 묻힌 곳, 뉴저지. TV 화면의 '뉴저지'를 보다가 나는 엉뚱하게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가 떠올랐다. 위고가 나폴레옹 3세의 독재를 비판하다가 1852년 쫓겨간 곳이 저지섬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노르망디 사이의 채널군도(Channel Islands). 움푹 파인 형태의 노르망디만에 점점이 흩뿌려진 섬들이 채널군도다. 이 섬들은 영국령이다. 거리상으로는 프랑스와 훨씬 가깝고, 전력도 프랑스에서 해저케이블로 공급받지만 엄연히 영국 땅이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911년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살던 바이킹이 남쪽으로 내려와 정복한 땅이 노르망디다. 노르망디공국의 윌리엄 공작은 1066년 영국을 침공해 점령한다. 영국 왕실은 15세기 중반 백년전쟁이 끝날 때까지 노르망디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백년전쟁의 승전국 프랑스는 영국이 점령한 자국 내 영토 대부분을 회복했지만 해협군도의 섬들만큼은 영국령으로 인정했다. 이 군도에서 제일 큰 섬이 저지(Jersey)이고, 두 번째로 큰 섬이 건지(Guernsey)이다. 유럽 대륙에 변란이 생길 때마다 반체제 인사들이 손쉽게 망명지로 선택한 곳이 두 섬이었다. 위고는 저지섬에서도 나폴레옹 3세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파리의 주요 신문들은 인편으로 원고를 받아 신문에 실었다. 위고의 글이 실릴 때마다 신문은 불티나게 팔렸다. 위고는 나폴레옹 3세에게 눈엣가시였다. 온갖 회유를 했지만 위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폴레옹 3세가 영국 여왕에게 청을 넣는다. 이어 여왕이 위고에게 부탁한다. "프랑스에서 먼 건지섬으로 들어가 계셔달라." 1855년 그는 만 안쪽에 있는 건지로 거처를 옮긴다. 건지는 저지에 비하면 프랑스에서 훨씬 멀리 떨어진 곳. 여러 가지 여건상 나폴레옹 3세를 계속 비판할 수가 없게 되자 그는 소설 집필에 전념한다. 찾아오는 이 없는 섬에서 그는 소설에만 매달렸고, 1861년 6월 말 마침내 원고를 탈고했다. 그게 '레미제라블'이다. 원고를 끝내고 나서 그는 지인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 속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오늘 아침 레미제라블을 끝냈다네. 이젠 죽어도 좋아.' 레미제라블은 다음 해 파리에서 출간되었고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럼에도 위고는 건지섬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폴레옹 3세가 있는 한 프랑스 땅을 다시 밟지 않겠노라 결심했기 때문이다. 1871년 보불전쟁의 패배로 나폴레옹 3세가 실각하자 위고는 망명을 끝내고 19년 만에 파리로 돌아온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캣츠' '오페라의 유령' 등과 함께 세계 4대 뮤지컬이다. 1985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된 이래 세계에서 40년간 1억3500만명 이상이 이 뮤지컬을 봤다. 몇 년 전 넷플릭스에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The Guernsey Literary and Potato Peel Pie Society)'이라는 영화가 공개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점령당한 건지섬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뉴저지는 저지 출신 영국 장군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뉴욕 남쪽 땅에 붙인 지명이다. 뉴저지는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했을 때 13개주 중의 하나였다. 저지와 건지는 낙농업이 주산업이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최고급 우유 중 하나가 저지 젖소에서 짠 밀크다. 제조사는 영국 왕실 전용 우유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저지 우유로 만든 우유식빵도 팔린다. 위고가 19년간 망명생활을 한 채널군도의 저지섬과 건지섬.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섬은 생각보다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조성관 작가 지니어스 테이블 대표

[차관칼럼] 맞춤복처럼 편안한 법령

해마다 계절이 바뀌면 장롱 속 옷들을 꺼내 정리한다. 작년에는 멋스럽게 입었던 외투도 올해 다시 입으려니 디자인과 색감이 어색하게 느껴져 외출을 망설인 경험은 누구에게나 한번쯤 있을 것이다. 우리 삶을 규율하는 법령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과거에는 합리적이고 타당했던 법령도 세상이 변하고 생활방식이 달라지면, 어느새 몸에 맞지 않는 낡은 옷처럼 우리의 일상을 가로막는 규제가 된다. 법제처는 국민 삶의 접점에 있는 지방정부가 현장의 불편함을 가장 먼저 감지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지난겨울, 지방정부를 대상으로 하는 '법령정비 제안창구'를 개설했다. 불합리한 규정이나 입법 미비로 인한 불편사항에 대하여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법령 체계를 검토하여 완성도 높은 정비안을 마련한다. 나아가 이렇게 마련된 정비안이 실제 법제화라는 결실을 맺도록 소관부처와 끊임없이 협의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고 있다. 정비의 손길은 국민이 불편함을 느끼는 지점에 따라 세심하게 나뉜다. 먼저 옷의 품을 대대적으로 넓혀야 하는 작업이 있다. 새로운 사회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기존 법령이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거나 상충하는 규정들로 인하여 혼선이 빚어지는 경우다. 예를 들어 음식영업 활성화를 위하여 푸드트럭 영업범위를 확대하는 내용으로 식품위생법 시행규칙이 개정되었음에도 영업활동의 기반이 되는 공유재산 및 물품 관리법 시행령의 행정재산 사용허가 규정은 여전히 기존 영업범위만을 수의계약 대상으로 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규정 간 괴리는 현장의 활력을 저해하는 불합리한 장벽이 되어 국민의 일상을 가로막는다. 지방정부의 제안을 토대로 법제처가 정비 필요성을 검토하고 소관부처와 협의한 결과, 현재는 관련 규정의 개정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푸드트럭 영업범위 확대에 맞추어 수의계약 체결 가능 범위가 조정되면, 법령 개정의 취지가 현장에 온전히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옷에 단추가 지나치게 많거나 혼자서 채우기 힘든 위치에 달려 있어 입고 벗기조차 어려운 경우도 있다. 하수도법 시행규칙에 따른 개인하수처리시설의 폐쇄 신고의무가 바로 그런 경우다. 공공하수도 공사로 인해 공공하수도관리청이 개인하수처리시설을 폐쇄한 경우에도 그에 따른 신고의무는 고스란히 개인의 몫으로 남아 있다. 불필요한 단추의 정리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역시나 현장의 공무원이었다. 현장의 날카로운 지적이 정책 개선의 실질적인 열쇠가 되었고, 소관부처는 개인하수처리시설에 대한 전국적 운영 실태를 면밀히 파악한 후 법령 개정을 추진할 계획이다. 수선의 모든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친 재협의와 설득은 부처 간 벽을 허물고 국민 편익을 실현하기 위한 동력이 된다. 법령 체계를 바로잡는 것은 우리 사회의 꽉 막힌 숨통을 틔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법제처는 국민의 일상이 낡은 법령에 가로막히지 않도록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소관부처와 협력하며 법령의 매무새를 다듬는 재단사로서 소명을 다할 것을 약속한다. 우리가 수선한 법령들은 다시 국민의 삶으로 돌아가 몸에 꼭 맞는 옷처럼 편안하고 안정적인 일상을 지원할 것이다.조원철 법제처장

[기고] 800조 반도체, 인재는 도시를 선택한다

온 나라가 800조원이라는 투자 규모에 주목하고 있다. 6월 29일 청와대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발표한 서남권 반도체 투자다. 그러나 투자를 받는 지역의 입장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라 어떤 기능이 내려오느냐다. 사람 없이 돌아가는 자동화 공장과 데이터센터만으로는 지역경제에 오래가는 효과를 내기 어렵다. 결국 사람이 와야 한다. 그날 두 회사 경영진이 정부에 요청한 것도 빠른 행정절차와 함께, 직원과 가족이 살 만한 정주환경이었다. 사람에 대한 고민은 기업도 다르지 않다. 과거에는 기업이 투자하는 곳으로 인재가 따라갔다. 산업단지가 들어서면 일자리가 생기고, 사람이 모이고, 도시가 자랐다. 이제는 순서가 뒤집혔다. 인재가 몰리는 곳에 기업이 투자한다. 십여 년간 지방 산업단지에는 생산기능만 남고, 연구개발 조직과 엔지니어, 근로자 가족의 삶터는 수도권으로 옮겨 갔다. 생산기반과 혁신·정주기반이 서로 떨어져 나가는 '탈동조화'다. 국토연구원이 고용보험 자료를 분석한 결과, 구미는 생산직 한 명당 엔지니어가 0.2명에 못 미치는 반면 판교는 3명이 넘는다. 공장은 지방에 있는데 인재는 수도권에 있는 것이다. 반도체는 이 구조를 되돌릴 기회다. 첨단공장은 이제 단순한 제조시설이 아니라 연구, 시험생산, 양산이 한 공간에 맞물리는 거대한 실증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팹을 제대로 조성하면 그간 수도권을 떠나지 않던 연구개발 기능과 고급 기술인력이 함께 내려올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저절로 되는 일은 아니다. 젊은 엔지니어가 가족과 정착할 매력적인 도시환경, 그리고 대학·연구소와 교류하며 성장할 혁신생태계가 팹과 함께 조성될 때 가능한 일이다. 대만 신주과학단지가 좋은 참고다. 대만 정부는 해외로 떠난 인재를 불러들이기 위해 1980년 이 단지를 조성하면서, 토지를 분양하는 대신 국가 소유로 두고 기업에 장기임대했다. 명문 공과대학 옆에 터를 잡았고, 산업시설 못지않게 주택과 학교, 병원, 공원에 자리를 내주었다. 오늘날 이곳에는 600여 개 기업과 16만 명이 넘는 인력이 모여 있다. TSMC도 그 토양에서 자란 기업이다. 대만은 팹을 지은 것이 아니라, 엔지니어가 살고 싶은 도시를 지은 것이다. 우리도 답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낡은 산업단지에 정주환경을 덧대는 실험도, 도심 한복판에 산업단지를 끼워 넣는 실험도 해 봤다. 어느 쪽도 여의치 않았다. 정부가 보고회에서 '기업형 첨단도시' 조성을 약속한 것이 반가운 이유다. 관건은 공급의 철학을 바꾸는 데 있다. 공공은 땅을 팔고 떠나는 공급자가 아니라 토지를 소유한 채 도시를 함께 키우는 동반자가 되고, 수요자인 기업에는 인프라와 정주환경을 직접 설계할 권한을 주어야 한다. 산업 따로, 주거 따로, 연구 따로 짓던 칸막이를 걷어내, 산단과 원도심을 하나의 도시권으로 엮어야 한다. 그래야 기업이 원하는 속도가 나오고, 설령 기업이 떠나더라도 도시는 지역에 남는다. 800조원이라는 숫자는 출발점일 뿐이다. 기업과 정부가 방향에 합의한 지금, 모처럼 지방을 향한 거대한 흐름이 지역의 미래로 이어질지는 결국 우리가 공단을 짓는지, 인재와 기업이 함께 자라는 도시를 짓는지에 달려 있다. 조성철 국토연구원 산업입지연구센터장

[포럼] 전세 제도의 지속력

전세는 사라져가는 주거 유형일까. 숫자만 보면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다. 인구주택총조사 기준으로 1995~2015년 전국 임차가구 중 전세 비중은 63.6%에서 35.8%로 크게 낮아졌다. 금융 접근성 향상, 저금리, 1·2인 가구 증가 등이 함께 작용한 결과다. 그런데 같은 조사에서 2020년 전국 전세 비중은 36.4%로 2015년과 큰 차이가 없었다. 서울의 전세 비중도 인구주택총조사 기준 2015년 45.3%, 2020년 45.4%로 거의 변화가 없었고 2024년 서울시 주거실태조사 결과도 이와 비슷하다. 적어도 2015년 이후 전세 비중이 계속 하락하고 있다는 징후는 뚜렷하지 않다. 전세는 수명을 다한 제도라기보다 월세와 공존하는 새로운 균형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세 회의론에도 일리는 있다. 전세사기는 전세가 보증금 반환이라는 위험을 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전세가 임대인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사금융 역할을 해왔지만, 금융 발달로 그 기능이 약해진 것도 사실이다. 갭투자가 집값 상승을 부추긴다는 비판도 가볍게 볼 수 없다. 그러나 전세의 부작용을 인정하더라도, 전세가 왜 여전히 선택되고 있는지는 제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장의 선택에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전세는 보증금을 매개로 임대인과 임차인의 필요가 맞물리는 계약이다. 보증금의 활용 가치가 월세 수입보다 더 큰 임대인과, 목돈을 마련했거나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임차인은 전세를 선호할 것이다. 반대로 보증금을 활용하는 것보다 월세 수입이 더 나은 임대인과, 초기 자금이 부족하거나 유동성을 중시하는 임차인은 월세를 선호할 것이다. 전세와 월세의 공존은 서로 다른 자금 사정과 선호를 가진 사람들이 각자에게 맞는 계약을 고른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누가 전세를 선택하는지를 보면 전세의 또 다른 역할이 나타난다. 인구주택총조사 자료에서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가구주 집단의 주거 형태를 따라가 보면, 20대 초반에는 월세 비중이 높고 20대 후반~30대에는 전세 비중이 크게 높아지며 이후 자가 비중이 상승한다. 특히 서울에서는 30대 전세 비중이 60% 안팎까지 높아진다. 이는 전세가 월세와 자가 사이에서 주거안정과 자산형성의 중간 단계로도 기능해 왔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전세에는 위험이 있다. 그러나 월세 역시 위험이 없는 계약은 아니다. 월세에서는 임대인이 임차인의 미납 위험을, 전세에서는 임차인이 임대인의 보증금 반환 위험을 부담한다. 두 계약의 차이는 위험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위험이 누구에게 배분되는가에 있다. 위험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면 임대인의 부채와 선순위 권리 확인 절차의 실효성을 높이고, 위험에 맞게 설계된 보증과 에스크로 등을 통해 주택임대차계약의 안전성을 높이는 것이 정책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 전세가 정말 그 가치를 잃었다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월세를 선택할 것이고, 결국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흐름만으로는 전세가 곧 사라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전세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일정한 수요층을 중심으로 월세와 공존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전세와 월세라는 두 선택지 각각의 위험을 관리할 방법이다.김민성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fn광장] 첨단산업 생명줄, 전력시장 개방하라

인공지능(AI)이 거대언어모델(LLM)을 거쳐 AI 에이전트(Agentic AI) 시대로 접어들었다. 또한 AI는 사이버 공간을 벗어나 제조, 모빌리티, 휴머노이드 등 물리적 세계로 융합되는 '피지컬 AI(Physical AI)' 시대로 발전하고 있다. 강력한 제조업 경쟁력을 갖춘 대한민국은 이러한 피지컬 AI 흐름을 적극 활용해 대체 불가한 제조업 강국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해야 한다. 최근 국내 대기업들이 계획하고 있는 기가와트(GW)급 AI 데이터센터 구축은 다가올 대한민국의 미래 100년을 위한 담대한 투자다. 첨단산업의 성패는 이제 데이터나 알고리즘의 우위를 넘어 거대한 연산장치를 뒷받침할 전력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급격한 첨단산업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반도체 팹(Fab) 증설 역시 막대한 전력을 요구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한 곳에만 대형 원자력발전소 15기 규모인 15.4GW의 전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에너지를 실어 나를 송전망 구축사업의 절반 이상이 인허가와 지역갈등에 가로막혀 지연되면서 대한민국 전력 인프라는 심각한 동맥경화를 앓고 있다. 이러한 인프라 마비 현상의 이면에는 한국 전력시장이 안고 있는 오랜 구조적 모순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단일 공기업이 송전·배전·판매를 모두 독점하고 있으며, 전력 요금은 시장의 수요·공급 원리가 아닌 정치적 논리에 의해 강력하게 통제되고 있다. 원가를 밑도는 경직된 요금체계 탓에 발생한 천문학적인 누적 적자는 국가안보와 직결된 필수전력망 확충에 대한 투자동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들었다. 더욱 뼈아픈 문제는 '가격신호(Price Signal)'의 상실이다. 요금이 고정되어 있다 보니 소비자와 기업이 전력 사용을 효율화하거나 피크시간대를 피하도록 유도할 경제적 유인이 시장에서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이제는 전력 시스템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거시적 관점에서 송전망(Transmission) 구축은 국가안보 및 초격차 산업기술 보호와 직결되므로 공공이 주도하여 패스트트랙으로 확충해야 한다. 한편 전기가 최종 소비자에게 흐르는 모세혈관인 배전(Distribution)과 소매 판매(Retail) 부문은 과감하게 민간에 개방하여 경쟁체제를 도입하는 것이 마땅하다. 과거 국가가 독점하던 무선통신 시장을 과감히 민간에 개방하여 경쟁체제를 도입한 결과 이용자에게 어떤 편익이 제공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전력시장의 경쟁체제 도입 필요성은 자명하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이미 소매시장의 자유화로 이동한 지 오래다. 일본은 2016년 전면 자유화 이후 통신·가스·정보기술(IT) 등 다양한 분야에서 700여개의 신전력사업자가 등장했다. 시장이 열리면서 통신비 결합할인, 전기차 충전 요금제, 100% 무탄소 에너지 요금제 등 소비자의 선택권이 폭넓게 보장되었다. 미국의 텍사스주나 영국 역시 다원화된 요금체계를 통해 소비자가 직접 공급자를 선택하는 유연한 시장을 구축했다. 나아가 소매 경쟁은 단순한 요금 인하 수단이 아니다. 분산된 에너지를 모으는 가상발전소(VPP), 수요반응(DR), 스마트 전력제어 등 새로운 에너지 혁신 생태계를 창출하는 강력한 마중물이다. 물론 시장개방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안전장치가 있다. 바로 '독립적인 전력 규제기관' 설립이다. 현재 국회에는 독립적인 전력시장 감독기구로 '전력감독원'을 신설하는 내용의 전기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되어 있다. 금융시장의 금융감독원과 유사하게 전력시장을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기구는 합리적인 원가주의에 기반해 정치권의 외풍으로부터 전기요금을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해야 한다. 전력시장의 공정성 감시, 전력망 안정성 감독, 원가검증, 분쟁조정 등을 전담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도매시장 가격의 극심한 변동성을 제어하고, 독점적 망 이용의 공정성을 엄격히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국가가 주도하는 단일 공급 시스템으로는 폭발적이고 다양한 미래 산업의 에너지 수요를 결코 감당할 수 없다. 규제기관의 독립화와 소매시장 개방은 지속적 산업발전과 에너지 대전환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동전의 양면이다. 국가 생존과 기술패권이 걸린 전력 인프라 혁신을 위해 정부와 국회의 초당적이고 실용적인 결단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윤의준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기고] RE100 넘어 ‘언제’ 쓰나 따진다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을 100% 재생에너지로 채우겠다는 RE100은 이미 익숙한 이니셔티브가 됐다. 삼성·SK·LG 등 국내 대기업도 잇달아 참여를 선언했고 녹색프리미엄이나 재생에너지 인증서(REC) 구매를 통해 재생에너지 확산에 분명한 기여를 해왔다. 그런데 글로벌 선도기업들은 이미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바로 24/7 CFE(무탄소 전력)다. 24/7 CFE의 핵심은 '총량'이 아니라 '시간'이다. RE100은 1년 동안 쓴 전력량만큼 재생에너지 실적을 확보하면 충분했다. 비유하자면, 1월에 고기를 실컷 먹고 12월에 채소를 몰아 먹어도 연간 균형 식단이라고 인정받는 방식이다. 반면 24/7 CFE는 매 끼니마다 균형 잡힌 식단을 요구한다. 밤새 전기를 쓰면서 낮의 태양광 실적으로 이를 상쇄하는 방식은 탄소 배출 시간대를 감추는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구글은 2030년까지 매 시간 무탄소 전력으로 모든 데이터센터를 운영하겠다고 선언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사용 전력의 100%를, 사용 시간 100% 동안, 탄소 없는 전원으로 채우는 이른바 '100/100/0' 목표를 공식화했다. 24시간 쉬지 않는 데이터센터에서 낮의 남는 재생에너지로 밤의 화석연료 사용을 상쇄하는 방식은 진정한 탄소중립과 거리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국제연합(UN) 주도의 24/7 CFE 이니셔티브에는 이미 180곳이 넘는 기업·정부·기관이 참여 중이다. 이 변화는 국내 수출기업에도 현실적인 압박으로 다가온다. 현재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협력업체에 시간 단위 기준을 직접 요구하는 단계는 아니다. 하지만 공급망 전반에서 무탄소 전력의 시간 단위 사용 실적을 계약 조건으로 요구하는 움직임은 이미 뚜렷하다. 선도기업의 기준이 '매 시간'으로 옮겨가는 흐름을 감안하면 머지않아 국내 기업도 연간 사용량만이 아니라 어느 시간대에 어떤 전원을 썼는지까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오후 2시에 쓴 전기가 같은 시간대 무탄소 발전량과 얼마나 맞아떨어졌는지, 저녁 부족분은 어떤 수단으로 보완했는지를 실제 계량 데이터로 확인하고 증빙으로 남기는 일이다. 이는 단순한 절차 강화가 아니라 에너지 사용의 투명성을 시간 단위로 입증하라는 요구다. 식당으로 치면, 연간 친환경 식재료 구매 영수증이 아니라 오늘 점심 메뉴 하나하나의 원산지 이력서가 필요해지는 셈이다. 문제는 국내에 이런 시간 정보를 담은 CFE 인증 체계가 아직 갖춰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준비가 늦으면 해외 고객사의 요구가 본격화될 때 기업은 더 높은 비용을 치르거나 증빙을 제때 제출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일 수 있다. 기존 RE100 이행 성과는 살리되, 그 위에 시간 정보를 결합한 CFE 인증·보고 기반을 미리 마련해야 한다. 이는 개별 기업의 노력만으로 해결되기 어렵고 공적 인프라가 마중물 역할을 해야 시간 단위 무탄소 매칭이 모든 기업의 공통 토대가 된다. 전력을 '언제' '어떤 전원으로' 썼는지 신뢰할 수 있게 보여주는 CFE 기반,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이유다. 정부 및 한전의 역할을 기대한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미래에너지융합학과 교수

[포럼] 덩치만 커진 한국의 지방재정

우리나라는 지난 6·3 지방선거를 통해 지방자치단체장과 의원을 선출했다. 정치적 의미에서의 지방자치를 실시한 지도 벌써 30년이 넘었다. 이번이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였다는 점에서 지방분권의 의미에 대해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는 재정의 관점에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지난 1948년 정부수립 후 제헌헌법을 마련했고, 그 이듬해 지방자치법 제정을 통해 지방자치가 시작되었다. 박정희 정권 때 전면 중단되었다가 1991년에 이르러서야 지방의회가 부활되었고, 1995년 전국동시지방선거를 통해 완전한 민선자치시대를 연 바 있다. 하지만 여전히 선거 과정에 주민주권이나 지역권력 견제와 같은 이슈보다는 전국적 이슈에 휘말린 모습은 아쉬움이 남는다. 분권이란 말 그대로 한곳에 집중된 권한과 그에 동반된 책임을 분산함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정치적 분권, 행정적 분권, 재정적 분권 및 경제적 분권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재정적 분권은 상위 정부로부터 낮은 단계의 정부에 조세 및 지출에 관한 의사결정권을 포함한 재정적 권한과 책임을 이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역별로 서로 다른 주민들의 선호와 환경을 반영하여 차별화된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면 모든 지역에 대해 획일적인 경우보다 후생 수준을 높일 수 있다. 지방은 경쟁하고 주민들은 지방정부의 반응성과 재정적 이동성을 통해, 또는 투표와 이탈을 통해 사적재를 선택할 때와 같이 효율성이 증대될 수 있다. 나아가 공공서비스 지출 책임이 주민과 보다 가까이 있는 지방정부에 주어짐에 따라 지방정부와 주민 간의 연계가 강화됨으로써 책임성 또한 증진된다. 이론이 그렇다. 양적으로는 1990년과 비교해 지방재정 규모가 18.75배나 급증했고, 전체 재정지출에서 지방정부의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서도 매우 높은 수준을 나타내는 등 형식적 측면에서는 재정분권이 빠르게 자리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구조적 측면에서는 여전히 수도권 집중과 맞물려 분권 자체에 대한 회의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문제로 지방재정의 대폭 확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부분의 지자체가 재정부족을 호소하고 있고, 재정자립도는 40.89%에 불과하다. 아울러 지자체가 자율성은 원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문제, 주민들의 무관심과 낮은 참여 문제, 지방분권과 지역균형발전 간의 갈등 문제 등으로 현실에서 이를 구현하는 데 많은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미국은 연방제 국가로 우리와 시스템이 매우 상이하지만 지방정부의 책임성 차원에서 근간이 되는 세금인 재산세가 다른 여타 세원으로 충당하지 못하고 남은 지출수요를 감당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울러 현재와 같이 모든 지방세원의 종류와 세율을 국회가 정하고 재산세의 과세표준이 되는 재산가액까지 중앙정부가 정하는 제도는 지방분권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지방정부들이 탄력세율제도가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혀 활용하지 않고 암묵적인 담합을 하도록 유도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현재와 같이 지방교부세와 같은 일반재원보다 국고보조금이 더 비중 있게 운용되어서는 안 된다. 지방재정 이론에서 강조하는 편익과 비용 간의 연계로부터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박정수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

[기고] 장벽 없는 마이데이터, 삶을 이롭게 하다

마이데이터는 정보주체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데이터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제도다. 주인으로서의 통제권은 데이터를 스스로 이동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보장된다. 마이데이터의 핵심이 '데이터 이동성'에 있다고 하는 이유다. 마이데이터는 처리자의 벽을 허물고, 데이터가 정보주체의 뜻에 따라 흐를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흐르게 된 데이터는 '분야'라는 또 다른 벽을 마주하고 있다. 금융데이터는 금융 분야에서, 의료데이터는 의료 분야에서 주로 활용된다. 기존 분야를 넘어 다른 분야에서 데이터가 활용되는 일이 많지 않다. 데이터는 본래 다면적 성격을 갖고 있어 같은 데이터라도 어떤 맥락에 놓이느냐, 어떤 목적으로 쓰이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낸다. 예컨대 신용카드 결제내역은 금융에선 지출에 관한 정보이지만 건강관리 관점에서는 내가 술을 마시는 지, 담배를 피우는 지, 어제 야식을 먹었는 지 알 수 있고, 규칙적으로 수영장에 다니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의료 영역에서 이런 데이터를 활용하면 환자의 생활습관을 정확히 알 수 있고, 만성질환 관리를 위한 지시를 환자가 잘 이행했는 지도 확인할 수 있다. 금융 데이터가 건강관리를 돕는 것이다. 건강 데이터로 금융의 문제를 풀 수도 있다. 질병보험의 본질은 앞으로 닥칠 건강상 위험에 대비하는 것인데 정작 사람들은 자신에게 언제, 어떤 위험이 닥칠 지 예상하지 못한 채 보장범위를 정하고, 보험에 가입한다. 자신의 데이터로 장래의 건강 위험을 통계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면 합리적 보장 범위를 정할 수 있다. 건강관리를 잘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낮은 금리로 대출을 해주거나 건강 악화로 발생한 의료 채무의 연체를 신용평가에서 제외하는 등 건강에 관한 데이터로 개인의 신용을 합리적으로 평가 및 관리할 수도 있다. 다면적인 데이터가 정보주체에 불리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다. 예를 들어 보험회사가 건강 데이터를 활용해 인수 거절이나 보험료 인상의 목적으로 사용할 가능성이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 때문에 활용의 기회를 포기하는 것은 '칼이 위험한 도구라고 해서 칼을 사용하지 말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마이데이터는 정보주체가 데이터의 이동 여부와 목적을 결정하기 때문에 이동하는 데이터가 정보주체에게 불리하게 활용되는 상황을 구조적으로 막을 수 있다. 관련된 법과 제도도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다. 금융과 공공 분야에서 시작된 마이데이터 제도가 개인정보보호법에 근거를 두고 전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의료와 통신은 물론 교육·고용·부동산·교통·복지 등 삶의 전 영역에서 정보주체가 자신의 데이터를 원하는 곳으로 이동시킬 수 있게 된다. 최근 시행령 개정을 통해 '본인전송요구' 범위가 전 분야로 확대됐다. 이를 통해 데이터가 분야의 벽을 넘어 새로운 가치와 이익을 위해 활용되는 사례가 등장할 것으로 본다. 데이터로 사람들의 삶을 이롭게 만들겠다는 꿈도 곧 이뤄질 것 같다.이정운 뱅크샐러드 최고법무책임자

눈 가려움, 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다...알레르기 결막염 '연중 관리' 필요

[파이낸셜뉴스] 매년 7월 8일은 세계알레르기기구(WAO)가 지정한 '세계 알레르기의 날'이다. 올해 슬로건은 "Allergy Care is Essential Care"다. 알레르기 질환을 계절마다 잠깐 신경 쓰는 문제가 아니라, 계절과 관계없이 일년 내내 발생하는 환자의 삶의 질과 직결된 질환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메시지일 것이다. 안과 진료 현장에서 이 메시지는 매우 중요하다. 알레르기 결막염 환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오해는 "봄이나 가을만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많은 환자들이 "증상이 심한 봄에만 안약을 사용하다 나아져서 중단했다 다시 불편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알레르기 결막염은 특정 계절에만 나타나는 질환이 아니다. 겉으로 증상이 줄어든 것처럼 보여도, 눈의 염증 반응은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꽃가루에 의한 알레르기 등 특정 계절에 발생하는 경우도 많지만, 많은 경우의 알레르기 결막염은 계절에 국한되지 않는 '통년성 질환'이다. 따라서 봄·가을 이 지나도 관리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알레르기 결막염의 주증상인 가려움증은 눈을 비비면 일시적으로 해소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비만세포를 자극해 히스타민 분비를 증가시키고 염증을 더욱 악화시킨다. 또한 눈을 비비면서 각막상피를 손상시킬 우려도 있어 장기적으로 각막 손상과 각막혼탁 난시 등의 이차적인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 진료 현장에서도 가벼운 증상으로 여겨 치료를 미루다, 각막 손상이 진행된 상태로 병원을 찾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알레르기 결막염 증상이 심할 때에만 약을 사용하는 방식으로는 충분한 관리가 어렵다. 알레르기 면역 반응은 한 번 시작되면 완전히 가라 앉는 데 몇 주가 소요되며, 겉으로 증상이 완화된 이후에도 눈 표면에서는 염증 반응이 지속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항히스타민 작용과 비만세포 안정화 작용을 동시에 나타내는 듀얼 액팅 점안제가 알레르기 결막염의 1차 치료 옵션으로 활용되고 있다. 듀얼 액팅 점안제는 증상 완화와 함께 염증의 지속과 재발을 동시에 억제할 수 있어, 계절에 국한되지 않는 통년성 알레르기 치료와 관리에 적합한 선택지로 평가된다. 알레르기 결막염은 일시적인 불편이 아니라 반복되고 재발하는 만성 질환이다. 증상이 나타난 이후에만 치료하거나 임의로 관리를 중단할 경우, 염증의 악순환과 재발 위험은 더욱 커질 수 있다. 증상 발생 전 부터 예방적으로, 증상이 완화된 이후에도 안과 전문의와 함께 장기적인 관리 계획을 세워 치료를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 알레르기의 날 슬로건인 'Allergy Care is Essential Care'는 통년성 알레르기 결막염 관리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봄이 지났다고, 증상이 줄었다고 치료와 관리를 중단하지 않도록 하고, 꾸준한 치료와 관리를 통해 통년성 알레르기 결막염의 재발과 합병증을 예방하고 환자의 삶의 질을 지켜야 하겠다. 정혜욱 대한안과의사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