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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視角] 소상공인 지원기회 놓친 배달앱 규제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달 배달의민족과 쿠팡이츠가 제출한 동의의결안을 기각하면서 조만간 과징금 부과 결정이 나올 예정이다. 양사가 총 3600억원 규모의 상생안을 제시했음에도 공정위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종 제재 수위가 가볍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시장은 이제 '얼마나 많은 과징금이 나올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다. 동의의결은 건강한 시장을 만들기 위해 규제당국이 활용하는 제도 중 하나다. 한편으로는 제재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조사 대상기업이 시장회복 방안을 제시하도록 유도한다. 규제당국의 조사 사안에 대해 사업자가 스스로 원상회복 방안이나 소비자 피해구제 등 타당한 방안을 제시하면 규제당국은 의견수렴을 거친 후 타당하다 판단하면 사건을 종결한다. 특히 미국 같은 해외에선 정부 제재만큼이나 민사소송이 두렵기 때문에 기업들이 시장회복 방안을 적극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국내에선 공정위가 지난 2014년에 이 동의의결 제도를 도입했다. 효과도 봤다. 제도 적용의 첫 대상자는 네이버와 다음이었다. 직전 조사에서 공정위는 네이버와 다음이 검색 시장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부당하게 고객을 유인하고 거래상 지위를 남용했다고 판단했다. 수천억원의 과징금이 예상됐지만 네이버와 다음이 제시한 총 1040억원의 상생자금 집행안을 공정위가 받아들였다.또 다른 동의의결 사례는 애플코리아 건이다. 당시 애플코리아는 국내 이동통신사들을 상대로 광고비와 유상 수리비용을 떠넘기는 등 '갑질'(거래상 지위남용) 혐의로 공정위 조사를 받은 바 있다. 공정위의 과징금 처분 수순에 앞서 애플은 1000억원 규모의 자진 상생방안을 제시해 공정위의 승인을 받았다. 여기엔 제조 분야 중소기업 지원을 위한 제조업 연구개발(R&D) 지원센터 설립·운영방안뿐 아니라 국내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애플케어플러스 할인 방안도 함께 담겼다. 네이버와 애플코리아 같은 동의의결 사례가 나왔다는 점에서 이번 배민·쿠팡이츠에 대한 동의의결안 승인 여부에도 시장의 관심이 컸지만 결과적으로 아쉬움이 크게 남게 됐다. 상생방안을 담은 동의의결안에 대해 소상공인연합회 등 5개 단체가 지지 의견을 냈다는 점에서 그렇다. 과징금을 통해 불법행위를 단죄할 순 있지만, 국고에 들어가는 과징금만으로는 시장에 즉각적 도움을 주기는 어렵다. 거액의 과징금은 단순히 기업 재무제표에 비용 한 줄을 추가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첫 번째 부담은 말 그대로 막대한 현금 유출이다. 두 번째는 이에 불복할 경우 공정위를 상대로 장기간 행정소송을 이어가야 한다는 부담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수년 동안 법적 대응에 경영 역량을 투입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피해를 입은 소상공인들이 당장 체감할 수 있는 지원도 멀어진다. 과징금은 국고로 귀속되지만 동의의결을 통해 마련된 상생재원은 시장으로 직접 흘러간다. 앞으로 이어질 법적 공방이 수년간 지속된다면 그 기간 관련 업체가 소상공인을 지원할 여력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공정위의 원칙도 충분히 이해한다. 시장에 좋은 동의의결안을 당국이 받아들였다고 해서 칭찬만 나온 것은 아니었다. '네이버·다음'과 '애플코리아'의 동의의결안을 승인했을 때 공정위는 늘 '봐주기 논란'이라는 비판을 함께 받아야 했다. 그러나 사후 처벌만으로는 시장에 뿌리 내린 불공정행위의 고리를 끊어내는 데 근본적 한계가 있다. 공정위에 따르면 올 상반기 공정위가 부과한 과징금 규모는 1조7000억원이 넘는다. 아무리 가혹한 과징금을 부과하더라도 불공정한 진입장벽이나 지배력 전이의 통로 등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위법행위는 또다시 반복되기 마련이다. 이미 발생한 불법을 단죄하는 경찰 역할은 당연히 필요하다. 다만 시장이 유연하게 작동하도록 공정한 경쟁환경을 만드는 정책적 해법 마련에도 공정위가 더 많은 고민을 기울였으면 한다. [email protected]

[사설] 한국 반도체 위상 널리 알린 미국 AI 서밋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24일(현지시간) 이재명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샌프란시스코 인공지능(AI) 서밋'이 성황리에 열렸다. 엔비디아와 오픈AI 등 세계 AI 산업을 이끄는 기업 수장들이 총출동했다. 이번 서밋은 단순한 외교 이벤트를 넘어 한국이 글로벌 AI 공급망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줬다. 실제로 AI 산업 확대의 최대 병목인 메모리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전 세계 빅테크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최근 "AI 쪽으로만 한정해도 내년 수요가 60~100% 더 늘어날 것"이라며 "아비규환이라는 이야기까지 써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로비와 압력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 메모리 산업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과거 단순 부품 공급자로 여겨졌던 메모리 반도체는 이제 AI 시대의 핵심 산업으로 떠올랐다. 한국 반도체 기업의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기술 역량이 세계 AI 산업의 확장 속도를 좌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행사에는 세계 AI 산업을 이끄는 주요 기업 수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브로드컴의 혹 탄, 오픈AI의 샘 올트먼, 앤스로픽의 다리오 아모데이가 같은 무대에 섰다. 아모데이는 오픈AI를 떠나 앤스로픽을 창업한 뒤 올트먼과 AI 모델 경쟁과 안전규제를 둘러싸고 줄곧 대립해 왔다. 경쟁 관계인 글로벌 AI 기업 수장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만으로도 이번 서밋의 위상을 보여준다. 이 대통령도 이 자리에서 AI 시대 한국의 비전을 담은 '샌프란시스코 AI 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대한민국은 대체 불가능한 글로벌 AI 공급망의 핵심 국가로 도약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선언을 뒷받침하는 협력 성과도 이어졌다. 이번 행사에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주요 빅테크와 대규모 AI 인프라·메모리 협력을 이끌어내며 세계 AI 생태계의 핵심 파트너임을 입증했다. 청와대는 이번에 국내 기업과 글로벌 빅테크가 총 9500억달러(약 1375조원) 규모의 반도체 분야 협력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브로드컴과 향후 5년간 첨단 메모리 반도체 공급과 파운드리 협력을 추진하고, SK그룹은 엔비디아 등과 장기 메모리 공급 협력을 확대하기로 했다. 한국 기업들은 이제 메모리 공급을 넘어 데이터센터와 자율주행, 로보틱스로 이어지는 피지컬 AI 생태계 구축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해외 빅테크의 투자와 수요를 국내 메가 반도체 클러스터로 연결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더 나아가 기술경쟁을 넘어 AI 안전과 국제규범 논의에서도 발언권을 높여 글로벌 AI질서 형성의 한 축을 맡아야 한다. 정부의 과제도 적지 않다. 글로벌 빅테크와의 협력이 확대될수록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한국 반도체를 둘러싼 압박도 커질 수밖에 없다. 치밀한 통상외교가 필요한 이유다. 글로벌 AI 생산기지로 도약하려면 안정적인 전력과 용수 공급도 필수적이다. 국가 첨단산업 인프라 구축에 속도를 내 전력·용수 등 기반시설 확충의 걸림돌을 과감히 해소해야 한다. 샌프란시스코 선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한국 반도체 공장 없이는 세계 AI 산업도 돌아가지 않는다"는 이 대통령의 말이 통하려면 냉정한 현실 인식과 치밀한 실행력이 뒤따라야 한다.

[사설] ‘똘똘한 1채' 겨냥 보유세 개편 추진, 출구 열어줘야

부동산 정책 토론회를 개최했던 정부가 보유세를 높인다는 원칙 아래 세부 방안을 놓고 고심하고 있다. 종합부동산세 부과 기준을 3그룹으로 나누는 방식이 유력하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임광현 국세청장이 26일 SNS를 통해 "강남구 주택 1채를 양도하고 장기보유특별공제로 200억원이 넘는 금액을 공제받은 경우도 있다"며 고가 1주택자를 겨냥한 언급을 해 주목을 끌었다. 정부의 보유세 상향 조정은 서울 강남권의 이른바 '똘똘한 한 채'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실거주 용도는 최대한 감안해 주되 초고가 주택은 1주택이라도 종부세 부담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이는 이재명 대통령이 밝혀온 내용이기도 하다. 초고가의 기준을 얼마로 정할 것인지를 놓고 마지막 검토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실거주 용도의 1주택자를 배려한다는 방향은 맞는다고 본다. 일찍이 마련한 집 한 채와 연금소득 외에 다른 재산과 소득이 없는 사람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다만 가령 공시지가가 30억원 넘는 초고가주택에 과도한 세금 혜택을 줄이고 세금을 더 부과하겠다는 것인데, 이 경우도 일정기간 매도할 수 있도록 출구를 열어줘야 할 것이다. '똘똘한 한 채'는 다주택자 규제가 낳은 결과다. 집 3채를 가진 사람보다 1채 가진 사람의 세 부담이 적은 구조가 서울 강남권을 비롯한 일부 지역의 집값의 초고가화를 부른 것은 맞다. 이번 종부세제 개편을 통해 이를 바로잡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똘똘한 한 채'를 수십년 전부터 보유하고 살고 있는 실거주민도 많다. 이들에게 세율을 높이고 세금 혜택을 줄이는 것은 생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연금 소득이 1년에 수천만원뿐인 사람들은 종부세를 지금도 내기에 버거운데 더 오르면 그 아파트에 더 거주하기 어려울 것이다. 팔고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세를 줘야 할 텐데 그 기회를 충분히 열어줘야 한다. 임 청장이 말한 것처럼 장특공제가 과해 앞으로 높인다고 하면 더욱더 출구를 보장해야 한다. 수도권 집값은 초고가 주택이 주도하고 있어 이를 통해 집값을 억제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계산인 듯하다. 종부세율을 높이고 혜택을 줄이면 최상위 집값이 떨어지고 연쇄 효과로 집값이 하향 안정되는 효과를 나타낼지는 미지수다. 이 과정에서 평생 집 한채 갖고 살아온 실수요자들이 피해를 보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보유세는 높이되 양도세는 낮춰 진퇴를 자유롭게 해야 집값 안정에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본다. 보유세를 높이는 동시에 양도세를 같이 높여 세 부담을 키운다고 해서 매물이 쏟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먼저 양도차익을 일률적으로 불로소득으로 보는 시각은 논의가 필요하다. 보유세를 높이면 강남의 일부 선호지역은 세 부담을 느끼지 않는 부유층만의 카르텔로 변질될 수도 있다. 여러 경우와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세제 개편에 반영해야 할 것이다.

[기자수첩] 현장 검사들의 항변

"지휘부는 어떨지 몰라도 평검사들은 보완수사권이 사라지길 바란다. 형사사법체계가 더 망가지는 상황에서 아예 검사 탓을 못하게 해야 한다." 서초동에서 근무하는 한 평검사가 서너 달 전부터 기자를 만나면 줄곧 하는 말이다. 크고 똘망한 눈을 가진 그는 대화를 할 때면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더하지만, 옷차림에는 늘 '옥의 티'가 있다. 셔츠에 잉크가 묻어 있거나, 아침에 머리를 덜 말리고 온 티가 나거나…. 칠칠맞지 못하다 싶다가도 검사들의 업무량을 떠올리면 납득이 간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 6월 한 달 전국 검찰청의 사건 접수는 11만2756건이다. 비슷한 시기 전국 지검의 실근무 검사는 1404명으로 알려져 있다. 검사 한명이 한 사람의 생사여탈이 걸린 사건을 한 달에 80건씩 새로 떠안는 셈이다. 지난 5월 기준 처분이 3개월을 넘긴 '장기미제'가 3만1036건인 점까지 더하면 업무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야근을 달고 살아도 최저시급도 못 받는다"는 그들의 자조가 이해된다. 여당이 조만간 형사소송법 개정에서 보완수사권을 폐지할 것이란 소식이 여의도로부터 들려온다. 대통령의 말처럼 검찰이 쌓은 업보가 있고, '정치검사'의 폐해도 명백하니 '검찰개혁'의 명분은 충분하다. 다만 개혁의 명분이 제도 본연의 기능까지 도려낼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검사는 19세기 프랑스와 독일에서 수사기관의 권한 오남용을 견제하는 '법률의 인권 감시자'로 구상된 제도다. 기소권과 직접수사권을 함께 쥐고 벌여온 표적수사와 먼지떨이식 수사는 도려내야 할 환부가 맞다. 그러나 경찰이 넘긴 기록을 다시 읽고 영장 신청을 걸러내는 일은 환부가 아니라 형사사법이라는 분업체계의 뼈대다. 제도의 이름은 검사이지만, 그 설계의 수혜자는 수사를 받는 시민이었다. 숫자도 같은 말을 한다. 수사지휘권이 사라진 2021년을 기점으로 경찰이 기소 의견으로 송치한 피의자의 불기소율은 4%대에서 지난해 9.6%로, 구속영장 기각률은 17%대에서 26.8%로 뛰었다. 통제가 헐거워진 만큼 설익은 수사와 무리한 영장이 늘었다는 뜻이다. 지금도 경찰이 보완수사 요구에 잘 응하지 않는다는 게 일선의 토로다. 강제력이 약한 요구권만 남는다면, 그 청구서는 검사가 아니라 시민 앞으로 날아든다. 지지층에 '검찰개혁을 완수했다'고 선언하기 위해 잘라내도 되는 권한이 있고, 끝내 잘라내선 안 되는 기능이 있다. 셔츠에 잉크를 묻히고 다니는 그 평검사의 말이 자조가 아닌 농담으로 남길 바란다. [email protected] 김동규 기자

[fn사설] 美 301조 관세부과, 최종 15% 상한 반드시 지키게 노력해야

[파이낸셜뉴스]  미국이 무역법 301조를 근거로 한국을 비롯한 60개국에 이른바 '강제노동 관세'를 부과하기로 23일(현지시간) 결정했다. 한국산 제품에는 기존 최혜국대우 관세와 합쳐 최소 12.5%가 되도록 관세가 적용된다. 유럽연합과 대만에는 10%, 한국과 일본에는 12.5%를 기준으로 삼는 등 미국과 맺은 기존 무역 합의에 따라 국가별 적용 방식에 차이를 뒀다. 이들 60개국에서 수입되는 제품이 미국 전체 수입품의 99%에 달하는 만큼 사실상 전 세계 무역 상대국을 겨냥한 보편 관세나 다름없다. 이번 조치는 연방대법원이 위법으로 판단한 상호관세를 다른 법적 근거로 되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은 상호관세가 무효화되자 무역법 122조에 따라 10% 글로벌 관세를 부과했고, 그 시한이 끝나기 불과 7시간 전에 무역법 301조 관세를 확정한 것이다. 미국은 후속으로 구조적 과잉생산을 문제 삼은 별도의 301조 조사도 진행하고 있다. 철강·알루미늄과 자동차 등 이미 품목별 관세를 적용받는 제품은 이번 강제노동 관세 중복 부과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러나 과잉생산 301조와 338조 등 다른 수단을 동원한 추가 압박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1930년 제정된 관세법 338조를 근거로 캐나다산 와인 등에 50%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트럼프발 관세 리스크를 상시적인 통상 위험으로 보고 대비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동시다발적인 관세 부과로 한미 간 합의가 사실상 무력화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 한국은 지난해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하는 대신 미국이 예고했던 25% 관세를 15%로 낮췄다. 청와대도 강제노동 관세와 앞으로 부과될 공급과잉 관세를 합한 최종 세율이 15%를 넘지 않도록 미국과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한미 양국이 기존 합의를 준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명목의 관세가 추가되더라도 한국산 제품의 최종 관세 부담은 15%를 넘지 않는다는 분명한 보장을 받아내야 한다. 15% 상한이 무너지면 양국간 신뢰도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한국이 막대한 대미 투자와 현지 생산 확대를 약속한 것은 관세 불확실성을 줄이고 안정적인 교역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대규모 투자는 집행하면서도 약속된 통상 여건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우리 기업의 경쟁력은 물론 정부 통상정책과 한미 경제 동맹 전반에도 적지 않은 타격이 생긴다. 정부는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와 고용 기여를 협상 지렛대로 적극 활용해 15% 상한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품목별 감면까지 끌어내야 한다. 국내 후속 조치도 서둘러야 한다. 미국은 강제노동으로 생산된 상품을 차단하는 법과 집행 체계가 미흡하다는 점을 관세 부과의 근거로 삼았다. 정부는 강제노동 생산품 수입 금지와 공급망 실사 체계를 국제 기준에 맞게 정비할 필요가 있다.

[사설] 부동산 토론회, 요식행위 아닌 현장 요구 반영하길

이재명 대통령이 주재한 '부동산 정책 국민 대토론회'가 예정된 100분을 훌쩍 넘기며 열띤 토론으로 이어졌다. 다양한 정책 제안과 의견이 쏟아졌다. 정부 정책을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불만과 요구도 적지 않았다. 전문가의 정교한 분석도 제시됐고, 일반 국민의 절박한 호소도 나왔다. 이날 제기된 다양한 의견이 이미 제시된 정책 방향을 보완하고 수정하는 데까지 이어질 때 비로소 국민 대토론회의 의미가 살아날 것이다. 23일 서울 여의도 KBS 별관에서 열린 토론회에는 정부·전문가·국민 등 140여명이 참석해 공급·금융·세제 등 부동산 전 분야를 놓고 3시간 넘게 찬반 의견을 쏟아냈다. 자유토론에 앞선 전문가 발제에서는 끊어진 주택 공급의 연결고리를 복원하려면 금융·세제 지원과 민간 정비사업 활성화를 위한 규제완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세제와 관련해서는 보유세 부담이 주요국과 비교해 어느 수준이 적절한지, 초고가주택의 과세기준을 어떻게 정할지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보유세 강화와 균형을 맞추기 위한 양도소득세 완화 방안도 함께 제안됐다. 이번 대토론회는 국토교통부(14일·공급), 금융위원회(15일·금융), 재정경제부(16일·세제)가 잇달아 연 사전토론회를 거쳐 마련됐다. 정부가 운영한 온라인 창구에도 토론회 당일까지 6000여건의 정책 제안이 접수될 만큼 관심이 뜨거웠다. 그러나 규제지역 지정, 대출규제, 이른바 '똘똘한 한 채'로 불리는 초고가 1주택과 비거주 1주택자 보유세 강화, 보유세 인상에 맞춘 거래세 완화 등을 놓고 찬반이 팽팽히 맞섰다. 부동산 정책을 둘러싼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 셈이다. 참석자들의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지만 정책 결정권자인 이 대통령의 발언에 가장 큰 관심이 쏠렸다. 이 대통령은 보유세를 선진국 수준으로 정상화하려면 최소 3배가량 올려야 한다고 밝히면서도 급격한 인상에 따른 조세저항을 고려해 실거주 여부와 주택 가격, 보유 목적에 따라 부담을 차등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토론회에서 다양한 의견이 제기됐음에도 핵심 정책 방향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기존 입장이 비교적 분명하게 재확인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최근 집값 급등과 관련해서는 "공급의 한계는 뚜렷하다"며 시장가격은 존중하되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부담을 지우겠다고 밝혔다. 또 "공직자의 최대 덕목은 비난과 갈등, 저항을 감수하고 책임지는 것"이라고 말해 보유세 강화 의지를 거듭 강조했다. 1주택 보유자라도 실거주·서민·중산층·지방 주택은 감면하되, 초고가·다주택·투기 목적의 비거주 주택에는 세 부담을 늘리겠다는 방침도 재확인했다. 다만 초고가주택의 기준과 세 부담 수준은 국민 의견을 더 수렴해 정하겠다고 밝혔다. 토론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자리에서 나온 목소리가 실제 정책에 얼마나 반영되느냐다. 이미 제시한 입장을 재확인하는 데 그친다면 국민 대토론회의 의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토론회의 목적이 민의를 폭넓게 수렴해 부동산 정책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끌어내는 데 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래야 '나라의 주인과 함께 설계하는 대한민국 부동산정책 청사진'이라는 이번 토론회의 슬로건도 구호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기자수첩] 대형마트 규제, 이제 풀어줄 때

대형마트가 유통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던 시절이 있었다. 소비자가 물건을 사려면 주말마다 차를 몰고 대형마트를 찾던 때다. 당시 대형마트는 골목상권을 위협하는 '공룡'으로 불렸다. 대형마트의 의무휴업과 영업시간 제한도 이런 인식 속에서 도입됐다. 하지만 지금의 유통시장은 당시와 전혀 다르다. 소비의 중심은 온라인으로 이동했고, 새벽배송과 당일배송이 일상이 됐다. 대형마트가 쉬는 날에도 소비자는 전통시장보다 온라인 플랫폼을 찾는다. 규제가 소비를 골목상권으로 돌려놓기보다 온라인으로 옮겨놓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물론 규제가 없었다면 골목상권의 위축 속도가 더 빨랐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규제 도입 이후에도 전통시장 매출 비중이 반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최소한 '규제가 의도한 효과를 내고 있는가'는 다시 물어야 할 때다. 백화점 역시 한때는 성장의 한계가 뚜렷한 채널로 평가받았다. 내수시장에 의존하는 데다 해외 진출도 쉽지 않아 장기적으로 쇠퇴할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백화점은 외국인 관광객 유입과 함께 명품·프리미엄 매장을 앞세운 리뉴얼 전략으로 다시 성장동력을 확보했다. K컬처 확산과 환율효과 같은 외부 요인뿐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변화가 함께 작용한 결과다. 대형마트와 백화점의 사례는 유통채널의 경쟁력이 고정돼 있지 않다는 점을 함께 보여준다. 어제의 강자가 오늘도 강자라는 보장은 없고, 한때 성장성이 없다고 평가받던 채널도 환경 변화에 따라 다시 기회를 얻는다. 그런데도 대형마트 의무휴업 규제는 10여년 전 시장 구도에 머물러 있다. 대형마트 규제완화를 기업 특혜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온라인 플랫폼과 오프라인 유통업체가 같은 소비자를 두고 경쟁하는 상황에서 특정 업태에만 영업시간과 휴업일을 강제하는 것이 공정한지 따져봐야 한다. 전통시장을 살리는 일은 중요하다. 다만 대형마트의 문을 닫게 하는 방식이 여전히 유효한 해법인지는 별개다. 시장 변화와 소비자의 선택을 외면한 규제는 보호하려는 대상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의무휴업일을 획일적으로 강제하기보다 지역·상권 단위로 자율성을 부여해 대형마트도 온라인 플랫폼과 같은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게 하는 방향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유통 환경이 달라졌다면 규제도 달라져야 한다. 대형마트를 과거의 '강자'로만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변화한 유통 현실에 맞는 규제체계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email protected] 이정화 기자

[사설] 예상 웃돈 성장, 청년백수·양극화 해법 적극 찾아야

한국 경제가 2·4분기 0.6% 성장하며 시장의 예상을 웃돌았다. 한국은행이 23일 발표한 2·4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지난 5월 제시했던 전망치(0.2%)보다 0.4%p 높은 '깜짝 성장'이다. 1·4분기 1.8% 성장에 이어 양호한 흐름을 이어가면서 연간 3%대 성장도 가시권에 들어왔다. 중동전쟁에 따른 유가 충격 속에서도 반도체 호황이 줄곧 버팀목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성장의 내용도 이전보다 나아졌다. 민간소비에서도 재화와 서비스가 모두 늘어 0.4% 성장을 이뤘다. 연구개발과 소프트웨어 등 지식재산생산물투자가 3.3% 늘어난 점도 미래 성장 기반을 넓힌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반도체 가격 상승으로 교역조건이 개선되면서 실질 국내총소득(GDI)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5.6%나 급증했다. 1988년 1·4분기 이후 38년여 만의 최고 증가율이다. 이런 흐름이 이어진다면 기업의 투자 여력과 가계의 구매력이 커져 내수 회복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성장의 온기가 국민 모두에게 고르게 퍼지고 있느냐다. 같은 날 발표된 청년층 고용 통계는 정반대 현실을 보여준다. 지난 5월 기준 최종학교를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청년 가운데 미취업 기간이 1년 이상인 비율은 48.6%로, 글로벌 금융위기였던 2009년(51.7%) 이후 가장 높았다. 3년 이상 일자리를 얻지 못한 비율도 19.4%로 통계 작성 이후 최고치다. 대학 졸업자의 평균 졸업 소요기간은 약 4년6개월로 역대 가장 길어졌다. 취업과 자격시험을 준비하려고 휴학하는 청년은 늘었지만, 졸업 후 취업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비율은 84.8%로 통계 작성 이후 가장 낮았다. 청년 개인의 눈높이나 노력 부족으로 돌릴 일이 아니다. 기업들이 경력직과 수시채용으로 선발 방식을 바꾸면서 신입 채용 문은 갈수록 좁아졌다. 공무원시험 준비 비중이 5년 만에 다시 증가한 것도 이런 이유다. 성장의 과실이 특정 집단에만 쏠리는 것을 바로잡고 사회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을 과감한 구조개혁이 결국엔 해법이다. 그동안 정부가 내놨던 청년대책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를 면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기업의 청년 신규 고용 여력은 일률적 연봉형 임금과 막무가내 정년연장 요구, 그리고 과도한 성과급 투쟁 리스크가 해소돼야 가능하다. 전 영역의 인공지능(AI) 대전환과 맞물려 고용 시장에서 가장 위태로운 이들이 청년층이다. AI가 청년들의 출발 기회를 앗아가고 있다는 분석은 최근 고용 통계에서 현실로 확인됐다. 그런 만큼 청년 취업 지원책은 보다 구체적이고 정교해져야 한다. 양극화 해소도 더 방치할 수 없는 과제다. 대기업 노조의 무분별한 임금투쟁이 협력사와 중소기업 근로자의 박탈감을 키운다는 지적을 새겨야 한다. 취약계층이 고용과 물가 충격에 시달리면 호전된 성장 수치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반도체가 살린 성장의 온기가 청년의 첫 일자리와 국민의 나아진 삶으로 이어지도록 정부가 사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강남視角] 원정 응원단이 일으킨 긍정 릴레이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이 스페인의 우승으로 끝났다. 축구 경기에서 늘 발생하는 심판 판정에 대한 논란도 있었고, 정치로 인해 관중들끼리의 가벼운 충돌도 있었다. 이란 현 정부에 반대하는 미국 거주 이란인들은 사자가 그려진 옛 국기를 들고 시위를 벌였고, 1982년 남대서양의 포클랜드 제도(아르헨티나명 말비나스)에서 전쟁까지 치른 아르헨티나와 영국을 구성하는 3개국 중 하나인 잉글랜드가 준결승전에서 만나자 축구 경기로만 봐달라는 아르헨티나 노병들의 당부에도 아르헨티나 선수들과 팬들은 승리 후 "말비나스는 우리 땅" 구호를 외쳤다. 이번 월드컵은 한국 축구대표팀의 졸전과 잡음으로 우리에게는 생각도 하기 싫은 대회였다. 대표팀의 32강 탈락이 확정된 날 유튜브를 보는데 스코틀랜드 팬들을 포함해 여러 외국 관중들의 동영상이 뜨기 시작했다. '타탄 아미(Tartan Army)'로 불리는 스코틀랜드 관중들은 전통의상인 킬트를 입고 전통악기인 백파이프를 거리에서 연주하면서 미국 보스턴과 마이애미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스코틀랜드에서 원정 온 약 4만명으로 인해 보스턴 시내 술집들은 맥주 재고가 바닥이 날 정도로 매상이 올라갔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처음 가보는 야구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지역 어린이병원에 기부까지 하면서 호감을 받았다. 32강 진출을 기대했던 스코틀랜드 대표팀의 탈락이 확정되자 이들은 귀국 짐을 싸야 했다. 보스턴 인근에는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가 있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행복으로 연결되지 않는가 보다. 시민들은 우울한 보스턴에 스코틀랜드 팬들이 짧은 시간이나마 긍정과 즐거움을 가져왔다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보스턴의 유력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는 스코틀랜드 팬들에게 감사하다는 전면 광고를 실었고, 스코틀랜드 일간지 더헤럴드는 보스턴 시민들의 환대에 감사를 나타내는 광고를 냈다. 이러한 월드컵 경기장 밖의 소식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음주가 엄격하게 제한됐던 4년 전 카타르 대회와 달리 이번 북중미 대회에서 관중들은 자유를 즐겼다. 공동개최국 중 하나인 미국을 처음 여행하는 관중들은 경기 개최도시의 유명한 맛집들을 체험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유럽인들은 식당에서 물컵에 얼음을 넣어주고, 커피나 탄산음료를 마시면 무료로 채워주는 리필은 유럽에서는 볼 수 없다며 좋아했다. 다만 미국 식당의 팁 문화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번 월드컵을 앞두고 유럽 관중들과 콧대 높기로 유명한 유럽의 축구 기자들은 축구가 다른 구기종목에 비해 인기가 떨어지는 미국에서 대회가 제대로 진행될지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자기네 축구장의 우수성을 내세우며 미국의 경기장들은 별것 아닐 것이라는 선입감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막상 경기장에 들어선 유럽 축구 팬들과 기자들은 입이 떡 벌어졌다. 35도가 넘는 밖의 더위와 달리 냉방이 나오는 개폐식 돔구장의 규모, 천장에 매달려 있는 360도 전광판을 보고 감탄에 빠지는 동영상들이 뉴스와 유튜브를 통해 빨리 퍼졌다. 한 잉글랜드 팬은 그동안 자기네 나라 축구 경기장들을 최고로 알고 있었으나 댈러스와 애틀랜타, 보스턴 같은 경기장들을 가본 후 그동안 착각 속에 살았다며 미국인들에게 사과한다는 트윗까지 올렸다.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번 월드컵 대회 기간 외국 관중이 많이 구입한 제품은 전혀 예상치 않았던 샐러드 드레싱인 랜치 소스였다. 국내에서도 모 식품사가 제조해 판매하는 랜치 소스를 이들은 미국에 와서 처음 맛본 후 반해버린 것이다. 특정 한류 스타 공연을 보려고 외국에서 팬들이 몰려오는 게 이제는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한국을 체험하고 좋은 기억을 남기도록 음식 등 관광자원을 계속해서 발굴했으면 한다. [email protected]

[fn광장] 원전·방산 수출국의 생존 전략

"한국은 핵연료 농축과 재처리를 못하게 돼 있다. 한국산 원전을 쓰다가 연료 공급이 끊기면 어떻게 할 거냐. 우리는 핵 재처리 회사도 있어 안정적인 연료 공급도 보장한다." 아랍에미리트(UAE)의 원전 수주전이 뜨겁던 2008년. 프랑스는 한국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며 어필했다. 한전 등의 '코리아 컨소시엄'은 시공능력과 가격경쟁력에도 '핵 농축과 재처리 불가'라는 약점에 밀려 대세는 프랑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다 한국의 파격적인 군사·안보 파트너십 제안이 UAE의 선택을 바꿨다. UAE는 원전 건설국이 자국 안보의 일부를 함께 책임져주기를 원하고 있었고, 한국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아크부대' 파병을 약속했고, UAE와 '형제국가'로서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정무적 다짐도 다졌다. 인구 9000만명의 이란과 해협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인 UAE. 인구 1000만명 가운데 900만명이 외국인이고, 자국민은 100만명밖에 안되는 이 나라는 안보불안 해소가 당면과제였다. 외국군의 자국 주둔을 억지력으로 보고 있었다. 절실한 현안에 손을 뻗으며 다가선 한국의 결단(군대 주둔)에 힘입어 코리아 컨소시엄은 2009년 12월 바라카 원전 4기 건설의 주계약을 따냈다. 186억달러(약 27조5075억원) 규모의 'K원전' 수출 1호는 그렇게 이뤄졌다. 그 뒤 UAE는 각종 수주 경쟁에서 한국 기업들을 챙겼다. 특정 국가가 UAE를 침공할 경우 한국군도 연루되는 사실상 동맹 관계가 형성됐기 때문이었다. 한국 기업들이 UAE에서 100여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연간 수주실적이 100억달러(2025년 93억7000달러)에 육박하게 된 것도 이런 신뢰의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 그 뒤 한국의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UAE는 우리 대통령 비서실장을 불렀다. 그 과정에서 다시 (군대 파견 연장) 다짐을 받고, 유류 추가 공급을 선물로 보내며 우호를 다졌다. 임종석·강원식 비서실장도 그렇게 다녀왔다. 원전 같은 초대형 계약들은 가성비 좋은 물건을 사고파는 거래와는 차원이 다르다. 국가 간 신뢰를 바탕으로 전략적 결단과 약속, 향후 협력 전망, 지정학적 고려 등에 대한 고차방정식이 적용된다. UAE처럼 안보 불안에 시달리는 경우 신뢰와 안보를 주고받는 패키지딜 성격은 더 짙어진다. 국가 차원의 섬세한 외교적·지정학적 배려와 정무적 결단이 필요하다. 방위 산업의 경우는 더 복잡해진다. 이달 초 독일로 결정 났던 캐나다 초계잠수함 프로젝트(CPSP) 수주 경쟁도 그런 속살을 드러내 보였다. K방산 고객들이 가파르게 늘어난 까닭은 일부 강대국의 팽창적 태도로 인한 안보불안이 높아진 탓이다. 방산 수출은 리스크와 딜레마도 따라온다. 아무도 가성비와 품질만 갖고 원전과 방산 물자를 사고팔지 않는다. 힘센 제3의 국가들의 ("특정 무기를 특정 국가에 팔지 마라"는) 압박 속에서도 고객국가들과 약속을 지키고, 유지·보수·부품 공급 등에 대한 신뢰를 줄 때만 방산 수출은 이뤄지고 유지된다. K2 전차, K9 자주포, 천무 다연장로켓 등이 K방산 고객들에게 갈 때 이를 주시하며 불편해하는 주변 강대국들이 있다. 양자 관계를 넘어 또 다른 상대방을 상정해야 하는 다자적인 행위가 된다는 점에서 셈법은 복잡해진다. 때로 방산협력을 간접적 군사행위로 여기는 이해 당사자도 있다. 지난 16일 러시아 외무부가 이석배 주러 한국대사를 불러 "한국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쪽으로 한층 더 기울고 있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며 몰아세운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7·8일 튀르키예 나토 정상회의에서 밝힌 한·나토 방산협력 확대 제안을 견제한 것이다. 방산 수출국은 더 이상 냉장고와 세탁기 팔던 때의 그 나라가 아니다. 전혀 다른 외교적 지형과 도전을 맞닥뜨리게 된다. 우호와 적대, 동맹과 연루의 덫을 회피하고 감수하고 돌파해야만 한다. 몸집이 달라진 한국은 사고방식과 태도도 변해야 산다. 달라진 행동양식과 전략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을까. 주변국과 이해당사국의 입장을 확인하고 사전에 설득하고 대응하는 예방외교는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나. 최근 러시아의 반발과 CPSP 경쟁 실패는 새로운 모색과 점검을 강요한다. 우리는 달라진 국제 환경과 지형에 더 적합한 새로운 국가적 생존전략을 구축하고, 우호적인 새 환경 구축을 위해 더 절치부심을 해야 할 때이다. [email protected] 이석우 기자

[사설] 석화 구조재편, 울산 3호 늑장 결정 용납 안돼

정부가 여수산단 석유화학 사업재편 계획을 최종 승인했다. 지난 2월 대산 1호 프로젝트에 이은 두 번째 구조개편 승인이다. 석화 사업재편 작업은 기업들의 자발적인 희생과 정부의 적극적인 중재 및 지원으로 진행되고 있다. 문제는 국내 3대 석유화학 산단 중 마지막 퍼즐인 울산 사업재편 건이다. 울산 3호 사업재편 프로젝트는 구체적인 재편안조차 내놓지 못한 실정이다. 마지막 사업재편까지 완결되지 않으면 지금까지 추진해온 사업재편 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이 지역 석화기업들은 최근 중동사태에 따른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 유류 수급차질로 석화업계는 오히려 실적이 좋아지는 특수를 누렸다. 이런 마당에 굳이 구조개편을 서둘러야 할 이유가 약해졌을 것이다. 사업환경이 잠깐 좋아지다 보니 업체 간 사업 구조조정을 놓고 견해차가 생기면서 구조개편을 주저하는 모양새다. 특히 약 9조원이 투입된 에쓰오일 샤힌 프로젝트는 이번 구조조정 논의의 발목을 잡는 최대 변수다. 연간 180만t의 에틸렌을 생산할 수 있는 이 설비는 내년 본격 가동될 전망이다. 그렇게 되면 정부의 전체 감산목표치 절반에 해당하는 새로운 생산능력이 추가되는 셈이다. 이미 대산과 여수의 기업들이 뼈를 깎는 자구노력에 동참키로 했는데, 울산 지역만 대규모 신규 설비를 가동한다면 가당키나 한 말인가. 샤힌 프로젝트가 선제투자로 효율을 높인 사례라는 논리만으로 감산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 이런 주장을 방치한다면 먼저 구조조정에 나선 기업들에 대한 명백한 역차별이다. 큰 틀에서 전체 업계의 감산목표 안에 포함시켜 판단하는 게 순리다. 석화기업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사업재편을 일부러 늦추거나 딴마음을 먹는 건 국내 석화산업 스스로 자해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이번 석화 사업재편은 국내 문제보다 대외환경 악화 탓에 추진하는 것이다. 전 세계 석화시장은 지금 구조적 공급과잉 덫에 빠졌다. 중국의 대규모 증설과 저가공세로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의 석화산업도 대위기를 맞고 있다. 여기에다 원유를 수출만 하던 중동이 자체 생산시설을 갖추고 저원가 생산에 들어갔다. 또 세계 수요 둔화라는 근본적 공급과잉 구조까지 겹치면서 석화산업은 그야말로 레드오션에 빠졌다. 최근 실적 호조는 중동 정세불안 등 일시적 변수에 따른 반짝 반등일 뿐이다. 단기 실적이 좋다고 이대로 안주하겠다는 생각은 경쟁력을 스스로 퇴화시키는 어리석은 셈법이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구조조정에 늑장을 부리거나 무임승차를 시도하는 일은 용납해선 안 된다. 석화 구조조정은 산업 하나를 살리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넘어 국가 기간산업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중복설비를 줄이고 체질을 바꿔 고부가가치·친환경 제품 중심으로 전환해 글로벌 경쟁력을 회복하자던 초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설] 노란봉투법 혼란, 재개정 외엔 달리 수습할 길 없어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이 22일 노란봉투법(개정 노조법) 시행 이후 논란이 되고 있는 노동조합의 교섭과 쟁의행위 범위를 구체화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전날 노란봉투법과 관련해 노동 현장에 일어나고 있는 분쟁 문제를 지적하고 'N% 성과급'이 노동쟁의 대상이 아니라고 언급한 데 따른 후속 조치다. 노란봉투법이 야기할 혼란은 법 제정 당시부터 줄기차게 제기돼 온 문제다. 예상한 대로 특히 사용자성 판단 문제를 놓고 노사갈등이 극심한 상황이다. 반도체 기업의 환경미화를 담당하는 노동자가 기업을 상대로 노동쟁의를 벌일 수 있는지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 하나의 예다. 다른 하나는 노란봉투법이 '사업 경영상 결정'까지 노조의 쟁의행위에 넣은 부분이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사측 권한으로 간주된 신규 공장 건설, 생산기지 이전 등 경영상 결정도 노동자의 근로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교섭 대상이 될 수 있게 했다. 이 규정을 근거로 삼성전자 초기업노조가 호남 반도체 공장 건설을 내년 노사교섭 의제로 다루겠다고 나서자 이 대통령이 "터무니없다"고 비판하며 노동부에 관련 기준을 마련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야당은 노란봉투법이 호남반도체를 가로막고 있다며 여당의 자업자득이라고 힐난했다. 반면 양대 노총은 이 대통령의 발언이 노란봉투법 입법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반발했다. 정부가 구체적인 기준과 범위를 마련한다고 해도 노사 양쪽을 모두 만족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상위법인 노란봉투법을 따라야 하는 명령이나 규칙을 통한 규정이 마련된다 해도 분란은 가시지 않을 것이다. 결국은 노사 양측은 사법부의 판단을 받으려 할 게 분명하다. 이런 혼란을 자초한 것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며, 이 대통령도 노란봉투법의 입법을 지지하고 동의했었다. 이제 와서 혼란과 갈등을 깨닫고 남의 일처럼 말하는 것으로 비치니 야당의 비판을 받을 이유가 충분하다. 노란봉투법은 입법 단계에서부터 규정을 명확히 해야 했으며, 노조 쪽으로 편향된 규정 신설은 신중하게 다뤘어야 했다. 민주당은 당시 어떤 반대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묵살했으니 혼란을 수습할 책임이 있다. 수습이란 문제가 있는 조항을 재개정하는 것밖에 없다. 정부 지침을 마련한들 노조가 수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어느 한쪽이 유리하게 마련된 조항을 거둬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여당은 냉정한 태도로 법 개정 문제를 꺼내 논의의 테이블에 올려야 한다. 성과급은 법 조항을 잘 해석하면 의무적 교섭 대상이 아닐 수 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됐다. 온 기업, 온 나라가 성과급을 놓고 들끓고 있다. 정부는 정부대로 초과이윤을 특정 목적으로 쓸 논의를 하며 불을 지르고 있다. 그 배경에 노조의 권한을 강화한 친노동적 정책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노동운동은 탄압해도 안 되지만 너무 커져도 기업 성장과 나라 발전과 장애가 된다. 파업을 볼모로 한 삼성전자 초기업노조가 국민의 눈높이에서 봐도 너무 과도한 성과급을 보장받은 일을 국민들은 목도하지 않았나. 앞으로 이런 일은 또 일어날 것이다. 정부와 여당은 이제부터라도 노동정책에서 노사 균형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정당한 노조의 권한은 보장하되 부당한 권리 행사에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테헤란로] 부동산 정책 '신뢰' 살아날까

이재명 대통령이 주재하는 부동산정책 국민 대토론회가 23일 열린다. 정부는 이에 앞서 공급·금융·세제를 주제로 사전 토론회를 진행했고, 최종적으로 대토론회에서 국민 여론을 수렴하겠다는 구상이다. 여기서 나온 의견은 이르면 이달 말 발표될 부동산 세제 개편안에도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 본인의 부동산 거래가 정책의 신뢰성에 의문을 던지게 만드는 일이 발생했다. 이 대통령이 경기 성남시 분당 아파트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17억7700만원 규모의 근저당을 설정한 것이다. 이른바 매도인 근저당권으로 매수인이 은행 대출 대신 매도인에게 사실상의 사금융을 받는 구조다. 이에 청와대는 법적 문제가 없고, 이 대통령의 부동산 시장 정상화 의지에 따라 시세보다 낮게 재건축으로 기대되는 이익을 포기하고 처분했다는 입장을 내놨다. 정치권에서도 꼼수와 관행 등 각자의 입장에 따라 엇갈린 해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안은 정치적 해석을 떠나 정책적 함의로 볼 때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다. 정부는 그동안 갭투자와 과도한 레버리지를 억제하겠다며 주택담보인정비율(LTV) 규제를 촘촘히 유지해 왔다. 그런데 대통령의 개인 거래에서 활용된 방식이 결과적으로 대출규제 밖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효과를 냈다면 실수요자들 입장에서 불만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당장 최근 내 집 마련을 위해 대출을 받으려 전전긍긍했던 기자의 아내에게서마저 '실망했다'는 말부터 나왔다. 이 대통령은 근저당 논란이 불거진 뒤 부동산 안정이 양극화 완화의 전제조건이라며 실수요자를 위한 대책을 촘촘히 마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방향은 맞다. 그러나 정책의 설득력은 결국 정책 결정권자 스스로 그 원칙을 지키는 데서 나온다. 따라서 국민 대토론회에서 보유세·거래세 개편과 대출규제 완화 여부를 논의하기에 앞서 이 대통령은 직접 이번 거래의 경위를 투명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부동산 정책은 결국 신뢰의 문제다. 아무리 정교한 공급·금융·세제 대책을 내놓아도 정책 집행 주체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면 정책 효과는 반감된다. 그 때문에 정부는 이번 논란을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부딪쳐야 한다. 실수요자의 대출문턱을 낮추는 방안을 고민하는 동시에 규제의 사각지대를 이용한 우회거래가 확산되지 않도록 제도적 보완책도 함께 내놓아야 한다. 원칙 없는 규제는 오래가지 못한다. 이번 토론회가 정책에 대한 신뢰를 다시 세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mail protected]

[강남視角] 1만건 해킹된 '외교 대참사'

전현직 외교관들과 관련된 정보 1만건이 통째로 해킹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해 외교가가 발칵 뒤집어졌다. 외교관 정보 해킹사태를 두고 외교부의 늑장 대응과 애매모호한 해명들까지 구설에 오르내리고 있다. 국립외교원 온라인교육시스템에서 일어난 이번 해킹 사건으로 외교부 퇴직자는 물론 다른 중앙부처에서 재외공관으로 파견된 직원들 정보까지 더해 최대 1만건의 정보가 새어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공격자의 접속 횟수에 대해 외교부가 명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수시로 해킹이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해커들이 제집 드나들듯 외교망을 접속한 셈이다. 외교부는 보안점검을 계속해 왔다고 밝히고 있지만, 해킹 사실을 무려 9~10개월 동안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도둑 침입을 막기 위해 경비를 섰지만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해킹을 막지 못한 해명도 궁색하다. 해킹기술이 너무나 고도화되고 지능화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외교부는 밝혔다. 해킹사실을 국가 정보기관으로부터 통보받은 직후 외교부의 대처도 논란이다. 국내외에서 활동한 외교부 전현직 직원들의 정보가 통째로 해킹에 노출됐음에도 당사자들에게 즉각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대국민 공개도 한참 늦었다. 해킹 인지 시점에 해당 시스템을 차단한 이후 무려 5개월이 지나서야 국민에게 공개했다. 외교안보 중대기관인 만큼 신중을 기했다고 외교부는 해명하고 있다. 하지만 전쟁 중 한강 다리를 끊고서 국가안보상 어쩔 수 없이 국민에게 뒤늦게 알렸다는 것처럼 들린다. 재외공관에는 외교관뿐 아니라 정보·보안·국방 분야 타 부처 직원들도 근무하는 만큼, 국가정보원 요원이나 국방부 무관 등의 정보도 빠져나갔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은 외교 일선에서 국가기밀에 해당하는 정보를 취급해왔다. 이들의 정보가 북한, 중국 해커 등에 유출될 경우 악의적으로 활용될 우려가 크다. 유출된 외교부 공무원들의 정보를 사칭한 피싱 등에 사용될 수도 있다. 외교부조차 이번 유출은 유례가 없는 경우로, 국가안보와도 무관하지 않은 사안이라고 시인했다. 이번 해킹사고는 국방부 내 군함, 전투기 등 무기정보가 빠져나간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외교부 내 가장 중요한 제1 자산은 국가안보 정보를 다루는 외교관들이기 때문이다. 외교 정보요원들 명단이 국외로 유출될 경우 사안은 더욱 심각하다. 외교부 직원 상당수는 국가안보실 업무뿐만 아니라 해외 파견근무 등 다양한 일을 해왔다. 국가안보 기밀사항을 취급해왔던 해외 정보원들에 대한 정보가 적대국에 넘어갔을 우려도 있다. 정부도 북한이나 중국 등의 해킹 조직에 의한 공격일 가능성까지 고려하고 있다. 일반 기업이었다면 국회에 총수를 소환해 조사해야 할 중대한 사고가 연이어 터진 것이다. 이번 해킹은 이재명 정부 출범 직후였던 지난해 5월부터 올해 2월까지 이어졌다. 그렇지만 외교부 장차관 누구도 이번 사태에 대한 별다른 사과나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외교부는 사건 직후에 검찰과 경찰 등 수사당국에 알리지 않았다. 경찰은 외교부의 신고가 없어서 그동안 수사를 못했다는 입장이다. 외교부는 그동안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와 관련한 미국 정치권의 차별대우 주장에 대해 법대로 처리해왔다고 밝혀왔다. 하지만 정작 외교부 내 해킹사고에 대해선 사법당국에 신고조차 하지 않으면서 미국 정치권이 주장하는 형평성 지적에 대해 할 말이 없게 됐다. 외교부의 찜찜한 해명들로 인해 의혹과 국민 불신만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하루빨리 사법당국과 국정원의 공조를 통한 수사가 시작돼야 한다. 또한 명명백백하게 해킹사고의 원인과 보안사고 책임을 가려야 한다. 국민들은 윤석열 정부의 외교참사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또 다른 제2의 외교참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email protected]

'권력 시녀·정권 충견' 오명 쓴 채… 檢, 칼 접다 [논설실의 뉴스 진단]

검찰청이 공소청으로 바뀜에 따라 78년 검찰 역사가 오는 10월 종지부를 찍게 됐다. 검찰 조직은 1948년 8월 정부 수립 직전 검찰청법이 제정되면서 출범했다. 수사를 총괄하고 기소 독점권을 가진 최고 국가 법 집행기관이었다. 그러나 막강한 검찰 조직을 역대 정권은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했고, 그 결과 검찰은 '권력의 시녀' '정권의 충견'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다. 보완수사권이라는 마지막 문제가 남아 있지만 오는 10월 2일이면 검찰청은 폐지되고, 기소권만 가진 공소청으로 간판이 바뀐다. 검찰의 수사권은 1948년 제정된 검찰청법에 근거가 마련돼 정부 수립 때부터 보장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임명한 초대 검찰총장은 권승렬이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처럼 독립운동가 변론 항일 변호사 출신이다. 그는 이 대통령의 불기소 지시에도 독직 사건에 연루된 임영신 상공부 장관을 기소했다. 당시 수사를 맡은 서울지검장은 최대교였다. 1954년 형사소송법 제정 과정에서 검찰 수사권을 놓고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경찰에 독자적인 수사권을 주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반대도 많았다. 검찰 출신 엄상섭 의원과 한격만 검찰총장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당시 엄 의원은 "우리나라는 경찰이 중앙집권제로 돼 있는데, 경찰에다가 수사권을 전적으로 맡기면 경찰 '파쇼'라는 것이 나오지 않나. 검찰 파쇼보다는 경찰 파쇼의 경향이 더 세지 않을까?"라고 했다. 그러면서 "범죄 수사의 주도권은 검찰이 가지는 게 좋지만, 장래에 있어서는 우리나라도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한 총장은 "이론적으로 말하면 수사는 경찰에 맡기고, 검사에게는 기소권만 주는 것은 법리상으로는 타당하다. 그러나 앞으로 100년 후면 모르지만 (지금은) 검사에게 수사권을 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결국 국회는 검찰에 수사권을 부여하기로 하고 1954년 9월 23일 형사소송법을 통과시켰다. 초기 입법 과정을 보면 국회는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는 대원칙에는 공감하면서도 검경 권력균형을 고려해 검찰에 수사권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광복 후의 경찰 권력은 지금보다 더 막강했다. 식민지 강압통치의 도구였던 일제 경찰의 그림자가 이승만 정부에도 드리워 있었고, 국민들의 인식도 나빴다. '파쇼'는 강압적 권력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검찰 파쇼도 그렇지만 경찰 파쇼를 더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은 것이다. 그런 정치역학적 배경에서 수사권을 확보한 검찰은 경찰과 서로 견제하면서 수사·기소권을 동시에 행사했다. 검찰과 경찰은 각각의 수사권을 갖고 힘 겨루기를 벌였다. 최고 권력은 두 기관을 권력유지에 활용했다. 특히 경찰은 치안유지라는 본래의 목적 외에 대공·대야당 문제에 이용당했다. 정권과 야합한 경찰 권력도 기세등등했다. 경찰의 위상이 격하된 것은 제1공화국 몰락 이후다. 3·15 부정선거에 관여한 경찰이 정권의 하수인이 되는 것을 막고자 제2공화국 헌법은 경찰의 정치적 중립을 명문화했다. 1961년 영장청구권을 검사의 권한으로 한정했는데, 이는 경찰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에는 검찰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보다는 역시 검경의 균형과 상호 견제를 염두에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경찰의 정치적 중립 문제는 그 이후의 개헌으로 흐지부지됐다. 혹자는 박정희 정권이 검찰을 활용하려고 검찰권을 강화했다는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최고 권력자 입장에서 보면 검찰이나 경찰이나 다 같은 존재다. 박정희 시대에 경찰은 당시 내무부 내 조직이었다. 검경의 어느 한쪽에만 힘을 실어줄 이유도 없었다. 검찰이나 경찰이나 권력의 하수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최고 권력자를 부모로 둔 형제지간이었을 뿐이다. 다만 검찰의 힘이 점차 세져서 주눅이 든 경찰은 수사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날을 염원하고 있었다.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이라는 개혁 덕분에 드디어 경찰은 꿈을 이루게 되었다. 그것은 경찰이 최고 권력과의 유착 관계가 덜하고 상대적으로 중립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경찰의 중립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1960년대 초에 시도했다가 무산된 경찰의 중립화는 6·29선언 직후인 1988년에 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당시 여야가 합의하여 경찰의 중립성 보장방안을 확정했고, 이에 따라 내무부 치안본부가 경찰청으로 독립했다. 경찰청장은 경찰위원회의 동의를 얻어 내무부 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그러나 경찰청은 내무부의 외청 형태로 완전한 독립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제로나 형식적으로나 현재의 경찰을 중립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경찰위원회도 허울 좋은 빈껍데기 조직에 불과하다. 윤석열 정부는 행정안전부에 경찰국을 설치해 경찰 통제를 강화했다. 이재명 정부는 경찰국을 폐지했지만 경찰의 독립성이 강화됐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검찰 권력이 어떻게, 언제부터 경찰을 누르고 이렇게 비대해진 것일까. 제3·4공화국 박정희 시대에는 권력기관으로서의 검찰의 힘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중앙정보부, 보안사 등 정보기관들의 권력이 훨씬 강했다. 굵직한 대공·학생 시위 등 공안 사건은 이들 두 기관이 주도적으로 수사하고 검찰은 보완수사와 기소만 담당하는 정도였다. 검찰에 힘이 실린 것은 5공화국 때였다. 그 중심에 대검 중앙수사부가 있다. 물론 공안사건만 맡는 공안부도 따로 있었다. 대검 중앙수사부의 뿌리는 광복 후 제정된 검찰청법에 들어 있는 대검 중앙수사국이다. 중요한 범죄를 수사·지휘·감독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실제 발족된 것은 1961년 4월이었다. 1973년 1월 특별수사부로 이름이 바뀌어 정권이나 검찰총장 하명 사건을 전담했다. 전두환 정권은 기존 권력조직을 활용하면서 한편으로 검찰의 권한을 키워줬다. 초임 검사의 직급을 고위공무원인 3급으로 높이는 등 전체 검사의 직급을 상향 조정한 것은 1981년이다. 법원조직법과의 균형을 맞춘다는 취지로 검찰총장, 고등검사장, 검사장, 고등검찰관, 검찰관이라는 직급을 만들었다. 중앙수사국도 중앙수사부로 개명해 청와대나 검찰총장의 하명 사건을 본격적으로 맡아 수사하기 시작했다.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명성사건 등 굵직한 비리 사건을 파헤쳤다. 노태우 정권에서는 검찰총장 임기제를 도입하는 등 중립을 보장하는 듯했지만 검찰의 위상과 역할은 변함이 없었다. 5공 비리사건, 수서사건, 율곡사업 비리사건, 12·12 쿠데타 수사,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 한보 사태 등을 처리하며 검찰은 절정기를 구가했다. 검찰공화국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회자됐다. 이런 사건들을 볼 때 사실 거대비리 척결에 검찰이 공헌한 점도 무시하지 못한다. 일견 검찰은 정의로운 보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여줬다. '성역 없는 수사'를 강조하며 검찰은 제 할 일을 다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조직폭력배와 마약 범죄자들을 처단하면서 민생과 치안에 힘을 쏟는 최고 수사기관의 모습도 과시했다. 검찰의 문제는 살아 있는 권력에의 굴종이었다. 전임 정권의 비리를 파헤치는 보복수사의 주체를 자임했다. 그러면서 현재 권력의 부패와 비리에는 눈감았다. 가령 이명박 전 대통령이 연관된 BBK 수사를 해보지도 않고 면죄부를 줬다. 전현직 대통령의 자녀나 측근 비리 수사는 국민적 비판에 직면한 정권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여겨졌다. 5공 비리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 사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들 사건이 그렇다. 검찰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탄압하며 공안정국을 조성, 정권유지를 위한 직할 친위부대 역할을 자처했다. 정치적 하명 사건 수사는 으레 검찰의 몫이었다. 조폐공사 파업 유도 논란이나 '옷 로비' 사건도 그런 유형이다. 표적수사, 정치검찰의 비난이 쏟아졌다. 검찰 내부의 항명 파동도 있었다. 1999년 초 전별금 사건으로 사퇴 압력을 받은 심재륜 당시 대구고검장은 "검찰을 정치권력의 시녀로 만든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치부를 숨긴 채 후배 검사들의 희생만을 강요하고 있다"며 수뇌부를 향해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최고 권력과 결탁한 검찰권에는 무소불위, 안하무인의 수식어가 붙었다. 권력에 저항하는 세력에는 가혹행위를 포함한 불법적인 수사 방식을 동원했다. 이른바 짜맞추기 수사, 별건 수사, 먼지떨이식 수사가 그런 것이다.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한 수사에서도 서슬 퍼런 검찰의 위세는 다르지 않았다. 일반사건 피의자를 상대로 한 물고문 사건이 터져 검찰총장이 옷을 벗는 일도 있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가진 검찰권의 비대화에 대한 견제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특별검사 제도가 도입됐고, 검찰 개혁과 중수부 폐지 요구가 거세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으로 이어진 박연차 게이트 수사는 대검 중수부 폐지의 결정적 도화선이 됐다. 2013년 4월 직접수사권을 가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현판을 내렸다. 중수부장은 모두 31명이 재직했는데 초대는 이종남, 마지막은 김경수였다. 검찰의 중립성은 어느 정권이나 강조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도 다르지 않았다. 검찰을 적폐수사의 본산으로 활용했고, 검찰 조직을 친정권화했다. 검사들도 중심을 잃고 이념에 의해 분열돼 정권의 변화에 따라 부화뇌동을 일삼았다. 경찰 또한 검찰과 더불어 정권유지에 일조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과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주체는 경찰이다. 경찰은 시국 사건 등의 수사에서 검찰의 하부조직이나 같았다. 경찰이 잘해서 수사권을 일임해 독립시켜 주려는 것이 아닌 것이다. 검찰이 사라져도 경찰의 독립이 보장되지 않는 한 경찰은 제2의 검찰이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거기에다 보완수사권까지 박탈하면 경찰이 검찰을 대체하는 공룡 조직이 될 수 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설치돼 있지만 발족 6년 동안 아무 성과가 없다. 중대범죄수사청은 행정안전부 산하에 설립된다. 독립된 조직이 아니므로 정권의 영향권 안에 있다. 마음만 먹으면 대검 중앙수사부의 하명 수사를 얼마든지 시킬 수 있다. 검찰권이 비대해진 것은 역대 정권이 독립과 중립을 보장하지 않고 집권 도구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 검찰 수사권을 박탈하여 경찰에 넘겨준들 정권 입맛대로 경찰을 부리면 수사·기소 기능 분리라는 검찰개혁은 의미를 상실한다. 그래도 검찰은 막강한 수사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비록 표적수사를 했다고 해도 거악 척결에 공헌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과연 경찰이 검찰만 한 능력을 보여주며 거대비리를 단속할 수 있을지 의문부호는 여전히 남는다. [email protected] 손성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