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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영 칼럼] 호남 반도체, 신기루 쫓기 안 되려면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문제가 정국의 핫이슈다. 이재명 대통령이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지만, 논란은 진행형이다. 청와대는 임기 내 완공을 공언했지만, 투자 주체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시장의 싸한 분위기를 읽은 듯 신중하다. 800조원 넘는 '초현실적' 투자 규모라 실현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 기류도 엄존한다. 지난달 29일 이 대통령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함께 '3대 메가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총 4755조원을 쏟아붓는 대역사다. 삼성전자 평택·용인(2030조원), SK하이닉스 용인(600조원) 반도체 클러스터 등 진행 중인 투자를 포함해서다. 신규 사업으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메모리 반도체 팹(각각 2기) 신설 등에 약 896조원을 투자하는 서남권(전남광주) 반도체 사업이 두드러졌다. 그러니 소외된 여타 지역에서 불만이 비등했다. 충청권에는 반도체 패키징 팹(약 392조원), 영남권에는 피지컬 인공지능(AI)·우주산업(약 312조원) 등을 투자한다고 했지만, 해당 지역의 상대적 박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 분위기다. 심지어 같은 호남이라도 새만금 반도체 팹을 기대했던 전북지사가 소외감을 피력했을 정도로. 여권은 이런 논란을 국토균형발전 논리로 돌파할 태세다. 이 대통령은 "그간 차별과 설움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지켜 온 호남에 대한 역사적 보상"이라고 했다. 물론 호남 차별대우론은 근래 통계로 보면 반박할 수도 있겠다. 다만 이 대통령 말마따나 "역사적으로 누적된 투자량을 비교한다면" 이번 호남 반도체 산단이 지역 간 균형발전이라는 논거도 일정 부분 설득력이 있다. 청와대는 후보지별 입지 조건을 따져보지 않은 일방적 결정이란 야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호남 반도체 속도전을 천명했다. "이 정부 임기 내 완공을 목표로 해서 2년 안에 기반공사를 마무리하겠다"면서다. 하지만 물음표는 남는다. 즉 여권이 압도적 의석으로 밀어붙여 첫 삽은 뜰 수 있겠지만, 실제 임기 내 가동이 가능할지 여부다. 무엇보다 3대 메가프로젝트의 주체는 기업이란 점이 변수다. 박정희 정부 때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일군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그리고 노무현 정부의 세종시 건설이나 이명박 정부의 4대강 개발 등 국가예산 주도 사업과는 성격이 달라서다. 당장엔 반도체 호황 슈퍼사이클을 맞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투자여력은 큰 편이다. 하지만 사이클이란 말 자체가 언젠가 내리막이 온다는 걸 뜻한다. 골드만삭스 등은 2027년이면 메모리칩 '공급 과잉' 국면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경고를 내놨다. 그렇기에 기업으로선 장기간 대규모 투자는 모험이다. 중앙·지방 정부가 전력, 용수, 토지, 인력 등 4대 기반을 책임져도 될까 말까 한 일이어서다. 삼성전자, SK그룹 경영진 모두 투자 시점을 특정하기보다는 인프라와 지원이 먼저란 입장을 피력하고 있는 배경이다. 특히 반도체 제조엔 단 1초도 정전을 허용할 수 없는 고품질 전력과 무수히 많은 세정공정을 위한 '초순수'가 필수다. 전력과 용수가 반도체 산업의 핵심 인프라인 이유다. 지난 4월 관훈클럽의 이천 SK하이닉스 견학 때 이를 실감했다. 아파트 38층 높이(105m)의 거대한 공장은 안정적 전력으로 24시간 돌아가고 있었다. 남한강 여주보 상류에서 끌어온 물도 팹 가동에 부족함이 없다는 설명도 들었다. 반면 서남권은 두 가지 인프라 모두 수도권 등에 비해 열악하다. 애초 청와대 측은 전남의 풍부한 태양광·풍력을 전력 기반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밤낮과 날씨에 따른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은 반도체 업종엔 치명적이다. 한강이나 낙동강 수계에 비해 수량도 적고 탁도는 높은 영산강 수계도 용수에 크게 불리한 입지다. 그런 맥락에서 홍준표 전 대구시장이 정곡을 찔렀다. "호남 반도체 팹의 전력·물 부족을 해결하려면 소형모듈원전(SMR)과 댐 건설이 필요하다"면서다. 최근 그와 여권이 얽힌 이런저런 소문의 진위를 떠나 고언 자체는 경청할 만하다. 이는 탈원전과 같은 여당의 DNA를 바꾸는 격이라 쉽지 않은 과제다. 특히 여권 고위층 다수가 홍수 예방과 수자원 확보가 명분인 4대강 사업을 "대국민 사기극"이라며 매도해 왔지 않나. 만일 여권이 종전처럼 원전과 댐을 혐오시설인 양 치부하면서 그것이 입지한 다른 지역의 전기와 물을 끌어오려고 한다면? 다음 총선에서 전국적 역풍을 맞아 호남 반도체는 결국 '종잇장 팹'으로 그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가 신기루가 안 되려면 정부가 첫걸음부터 정직하게 떼야 한다. 구체적 로드맵과 함께 서남권 전력과 용수 인프라 구축부터 확실히 떠맡으란 뜻이다. [email protected]

"장기가치투자시대 열릴 것… 테마株보다 저평가株 주목" [논설실의 뉴스 진단]

대한민국 주식시장이 천지개벽하고 있다. 코스피는 지난 40년 가까이 한국 경제성장에 훨씬 못 미치는 상승곡선을 그려오더니 요즘은 하늘을 뚫을 기세다. 상승세가 가팔라질수록 오히려 아찔한 공포가 밀려온다. 이제 증시는 어디로 갈까. 최근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언론과 시장 참가자들이 유독 찾는 이가 있다. 이직이 잦기로 소문난 증권가에서 39년을 버텨온 사람이다. 그것도 모멘텀·추세추종 투자가 각광받는 시장에서 한결같이 가치투자를 고수해왔다. 스스로 소심하고 겁이 많다고 한다. 버는 것보다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한국의 '워런 버핏'으로 불리는 이채원 라이프자산운용 이사회 의장에게 지금의 한국 증시를 물었다. ―39년차 증시 주요 플레이어, 특히 가치투자자로서 지금의 시장을 어떻게 보나. ▲가치투자자를 떠나 한 사람의 시장 참여자로 감회가 새롭다. 1988년 한신증권(현 한국투자증권)에 입사할 때 코스피는 900~1000선이었다. 작년 4월 7일 코스피가 2300선으로 연중 저점이었으니 그동안 겨우 두 배 남짓 상승한 셈이다. 한국의 경제성장에 크게 못 미치는 성과다. 그래서 최근 반전이 더 놀랍다. 불과 14개월 만에 3.9배 급등했다. 오랫동안 이어진 저평가, 정부의 자본시장 활성화 정책, 반도체 등 기업실적 호전이 원인이다. 가치투자자로서 코스피가 현재 주가수익배율(PER) 8배 수준에 거래되는 만큼 여전히 저평가 영역에 있다고 본다. 다만 상승 속도나 폭이 지나치게 가팔랐기 때문에 속도조절이 필요하다. 또 기업들의 호실적이 이어지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도 완전히 해소돼야 지금 코스피 수준이 정당화된다. ―한국 증시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오명에서 벗어나는 듯한데. ▲극도로 저평가돼 있던 한국시장은 작년 대선 후 정치적 리더십 회복과 적극적인 경기부양, 자본시장 선진화 정책 등으로 물꼬가 터졌다. 특히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핵심인 후진적 거버넌스와 투자자 보호장치 미흡이 상법 개정으로 해소돼 비로소 한국주식에 내재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 전까지는 주주의 비례적 이익이 보호되지 않았다. 1%의 주주는 1%만큼, 10%의 주주는 10%만큼 보호돼야 한다. 하지만 20~30%를 보유한 지배주주가 70~80%를 가진 일반주주의 이익을 합병, 분할 또는 터널링 등으로 편취해가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제는 이사의 충실의무가 기존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돼 이런 문제가 없어졌다. 상법 제382조의 3 개정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의 핵심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완전히 해소하려면. ▲배당소득세와 상속세 개편이 필요하다. 대주주는 배당세 최고세율이 지방세 포함 49.5%인 데 비해 주식 양도소득세는 27.5%였다. 그나마 특정 요건을 맞추면 분리과세가 가능해 33%로 낮아졌다. 그래도 대주주 입장에서는 주식 양도가 이익이다. 대주주가 배당에 소홀해지는 이유다. (양측 세율을) 일치시켜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상속세 측면에서 보면 대주주는 주가가 오르는 게 불편하다. 가업승계가 어려워진다. 상속세율을 낮추지 않고도 제도개편만으로 가업승계를 원활하게 할 수 있다. 독일은 고용승계 등 특정 조건만 충족하면서 7년간 사업을 유지하면 상속세를 탕감해준다. 일본도 상속세를 이연해주는 제도가 있다. 다만 부의 세습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해 개편에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한다. ―워런 버핏은 금융시장이 점점 투기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며 "지금처럼 사람들이 도박 기분에 빠진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의 경고가 한국에도 유효하다고 보나. ▲유효하다. 특히 국내 개별기업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와 빚투 등은 매우 걱정된다. 장기투자 문화를 육성하고 시장의 변동성을 줄이는 정책이 필요하다. ―반도체주 급등락의 배경에 AI 투자가 정점을 지난 것 아니냐는 전망이 있는데.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상당 기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주가가 선반영되는 점을 고려하면 주가 정점은 올해 내 기록할 가능성이 크다. 반도체 이익이 올해 갑자기 엄청나게 불어났다. 이것을 얼마나 지속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보인다. 반도체 사이클이 대체로 2, 3년 정도인데, 내년이나 내후년 정점일 가능성이 있다. 대체로 주가는 실적에 1년6개월 선행하는 만큼 올해 정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번만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시장 참여자도 있지만 증권시장은 지난 200년간 바뀌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 즉 욕망과 두려움이 존재하는 이상 바뀌지 않는다. 물론 주가 앞에서는 한없이 겸손해야 한다. 누구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삼전닉스' 쏠림이 해소될 수 있나. ▲늘 그랬듯이 시장의 쏠림현상은 점차 완화될 것이다. 살 사람 다 사고 주가가 오를 만큼 오르면 다른 업종으로 확산될 것이다. 삼성전자는 작년 매수에 들어갈 때 6만원이었다. 실적이 좋은 때가 아니었다. 비관적인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저평가돼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삼성전자에 투자한 것이 가치투자의 전형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9년을 이어온 투자철학은 어떻게 형성됐나. 성공도 실패도 맛봤다고 들었다. ▲어릴 때부터 성격이 소심하고 겁이 많았다. 많이 벌기보다는 잃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자연스럽게 잃지 않는 가치투자자가 됐다. 1997년 외환위기 때 큰 폭의 펀드 손실을 경험하면서다. 코스피를 벤치마킹하기보다 최대한 투자원금을 지키면서 절대수익을 중시하는 운용으로 돌아섰다. 1998년 12월 한국 최초의 가치투자 전용펀드 '동원밸류 이채원 1호'를 탄생시켰다. 가치투자자도 힘들 때가 있다. 2014년부터 2020년까지 성장주에 유리한 저금리 상황이었다. 새 기술을 가지고 사업하기 좋은 환경이 됐다. 당시 기업들이 '제로 금리'로 자금을 조달했다. 당연히 주가가 크게 상승하지만 가치투자자 입장에서는 절대 살 수 없다. 그때 수익률이 좋지 않아서 마음고생을 했다. 다만 직전 3년 수익률이 1400%로 워낙 좋아서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서 정든 직장을 떠났다. 그때 후배들이 찾아와서 명예회복도 하고 진정한 가치투자 펀드를 만들자고 제안해 함께 라이프자산운용을 설립했다. 대표 펀드인 '라이프한국기업ESG향상'(2021년 7월 말 설정)은 지난달 말 기준 누적 수익률 465%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코스피 상승률(162%)을 크게 웃도는 성과다. 운용자산(AUM) 규모도 빠르게 성장해 5조원을 넘었다. ―자신만의 주식(종목) 선정 방법이 있는지. 매수·매도 타이밍은 어떻게 잡나. ▲시장의 비합리성으로 인해 내재가치 대비 저평가된 기업에 투자한다. 정량분석을 통해 주가순자산비율(PBR)이나 PER이 낮은 기업을 찾아 기업탐방을 한 후 정성분석을 한다. 정성분석은 기업 거버넌스, 경영자의 자질, 비즈니스모델 등을 고려한다. 가슴이 뛸 정도로 저평가된 종목이 나타나면 즉시 매수한다. 그리고 적정 주가에 도달하면 매도한다. 실적은 그대로인데 주가가 많이 올라도 판다. 이런 주식 운용은 일반인도 가능하다. 단순하게 말해 보유주식 가격이 과열됐다고 느끼면 팔면 된다. 주식은 조용할 때 샀다가 폭등해서 뉴스에 나오고 화제가 되면 파는 게 맞다. ―직장에서나 식당에서나 모두 주식 얘기만 한다. 이런 투자자에게 조언한다면. ▲상법 개정으로 이제 모든 주주가 보호받기 때문에 본격적인 장기 가치투자시대가 열릴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는 PER, PBR 같은 전통 가치지표가 중요한 시대다. 테마주보다는 저평가된 주식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펀드 가입을 권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요즘도 운용하는 펀드에 본인 자산을 넣나. ▲그건 당연한 것이다. 일반인이 전문투자자를 이기는 방법이 없지는 않다. 잘하는 분야, 예를 들어 의사나 약사는 바이오 분야에 대한 이해가 전문투자자보다 낫다. 여기에 '빚투'가 아닌 여윳돈으로 투자한다면 금상첨화다. 그렇지 않다면 펀드 투자가 맞다. 펀드에 내 자산을 넣는 것은 2006년부터 해왔다. 그래야 책임운용이 가능하다. 아직 운용펀드에 자신의 자산을 투자하는 관행이 미국처럼 보편화된 것은 아니다. 라이프자산운용은 외국인 자산이 2억달러 정도 있다. 이들은 투자할 때마다 매니저의 자금도 함께 운용하는지 묻는다. ―은퇴세대에 자산 관리가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이들에게도 조언한다면. ▲자산관리에 왕도는 없다. 기본적으로 부동산, 주식, 현금성자산(채권)을 3분의 1씩 균형 있게 배분해야 한다. 기대수익률이 높은 쪽으로 수시로 비중조절도 해야 한다. 현재 부동산은 임대율 기준으로 5% 수준이고 금리는 3~4% 수준이다. 주식은 12%(PER의 역수) 수준이다. 따라서 주식 40%, 부동산 30%, 예금(채권) 30% 수준이 적정하다. ■이채원 의장 약력 △중앙대 경영학과 △국내 최초 가치투자펀드(밸류 이채원 1호) 설정 및 운용 △한국투자증권 자산운용본부장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대표이사 △라이프자산운용 이사회 의장(현) [email protected] 임상수 기자

[사설] 삼성전자 최대 실적, 초격차 기술만이 미래 보장

삼성전자가 반도체 슈퍼사이클과 기술 경쟁력에 힘입어 사상 최대 분기 실적을 내놓았다. 3개 분기 연속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최대치를 갈아치웠다. 대표적 빅테크인 엔비디아와 애플을 제치고 글로벌 테크기업 영업이익 1위에 올랐다. 삼성전자는 7일 올해 2·4분기 잠정실적을 발표했다. 연결 기준 매출 171조원, 영업이익 89조4000억원이다. 작년 동기보다 각각 129%, 1810% 급증했다. 영업이익만 보면 세계 테크기업 중 역대 최대 분기 실적이다. 종전 기록은 엔비디아의 2027회계연도 1·4분기(지난 2~4월) 535억달러(약 81조9000억원)였다. 애플은 작년 4·4분기 508억5000만달러를 기록했다. 특히 이 실적에는 반도체 사업부 특별성과급 충당금 약 17조원이 빠져 있다. 충당금을 더하면 영업이익은 100조원을 훌쩍 웃돈다. 이번 실적은 최근 '반도체 피크아웃(정점 후 하락)' 우려를 상당 부분 걷어낼 수 있는 수준이다. 메모리 호황이 예상보다 길어질 것이란 기대도 커졌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 중국과 일본의 추격이 거세기 때문이다. 일본 메모리 기업 키옥시아는 최근 주주총회에서 낸드플래시 세계 1위 탈환을 선언했다. 일본은 세계 최고 수준의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경쟁력을 바탕으로 반도체 부활에 국가 역량을 쏟고 있다. 일본 정부는 TSMC 구마모토 공장과 라피더스에 대규모 보조금을 지원하며 반도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세계 3위 메모리 기업인 미국의 마이크론은 일본 히로시마 공장 증설에 14조원을 투자했다. 미일 메모리 업계가 한국을 겨냥해 공조를 강화하는 모습이다. 중국의 추격은 더 위협적이다.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등에 업은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와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는 범용 D램과 낸드플래시를 넘어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에도 뛰어들었다. 한중 기술격차가 꽤 좁혀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애플이 중국 판매용 제품에 이들 업체의 메모리 채택을 검토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도 있다. 두 회사는 기업공개(IPO)를 추진하며 반도체 생태계 확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 내부 과제도 만만치 않다. 성과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디바이스경험(DX) 부문 직원 사이에 거센 불만과 갈등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DX 부문 노조는 반도체(DS) 부문과의 성과급 격차에 항의하는 집회를 예고하는 등 단체행동을 이어가고 있다. 성과급 논란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시간이 없다. 지금은 성과를 나눌 때가 아니라 미래를 준비할 때다. 반도체 업황은 주가보다 예측하기 어렵다. 지속적인 연구개발(R&D) 투자와 기술 초격차만이 이 호황을 미래 성장으로 이어갈 수 있다. 외부의 추격과 내부 갈등에 대한 답은 결국 기술투자에 있는 것이다. "회사의 미래를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고 했던 이건희 회장의 말을 되새길 때다.

[사설] 캐나다 잠수함 고배, K방산 경쟁력 강화 계기로

최대 60조원 규모의 캐나다 잠수함 수주전에서 한화오션이 고배를 마셨다. 캐나다 방위산업 역사상 최대 규모였던 초계잠수함 사업(CPSP) 수주전은 한국 방위산업이 한 단계 도약할 기회였던 만큼 기대도 컸다. 한화오션은 캐나다에 막대한 교역·투자와 연간 2만5000개 이상의 일자리를 약속하고, 현지 기업·기관 67곳과 협력각서를 맺으며 총력전을 펼쳤다. 정부도 특사단 파견과 수소 인프라 인센티브 제안까지 더하며 민관이 힘을 합쳤다. 그러나 우선협상대상자 자리는 독일 티센크루프마린시스템스(TKMS)에 돌아갔다. 최선을 다해 독일 업체와 승부를 벌였던 만큼 아쉬움도 크다. 그러나 이번 결과를 패배가 아닌 방위산업 경쟁력을 더욱 끌어올리는 학습과정으로 볼 필요가 있다. 방산 4강 진입을 목표로 내건 우리로선 캐나다 사업의 실패에서 건진 교훈이 많다. 글로벌 방산시장은 기업의 기술력과 정부의 외교력이 함께 작동해도 될까 말까 한 보수적인 시장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캐나다 수주전에서 확인된 값진 성과는 기술력이다. 한화오션이 제안한 잠수함은 이미 실전 배치된 도산 안창호함을 통해 진해에서 괌, 하와이를 거쳐 캐나다 서부 기지까지 1만4000㎞에 이르는 장거리 항해 능력과 캐나다 해군과의 상호 운용성을 입증했다. 반면 독일이 내놓은 모델은 아직 실물 없이 설계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기술력과 인도 일정, 가격 경쟁력을 종합적으로 따져서 한화오션은 잠수함 종주국인 독일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한화오션이 프랑스 나발그룹, 스페인 나반티아, 스웨덴 사브 등 유럽의 내로라하는 방산 강호들을 제치고 독일과 함께 최종 숏리스트에 올랐다는 점도 의미가 크다. 우리 방산 기술력이 첨단 분야에서 세계 톱 수준에 도달했다는 점을 전 세계에 공개적으로 검증받았다는 점은 큰 수확이다. 기술력과 더불어 외교 관계는 방위산업 경쟁력의 핵심이다. 캐나다가 독일업체를 선정한 이유를 보면 알 수 있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이자 대서양 동맹의 일원인 독일과의 상호협력과 유럽 공급망 연계가 이번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의 핵심 이유로 꼽혔다. 아무리 성능과 납기에서 앞서더라도 동맹 네트워크라는 벽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다른 첨단 제품과 달리 방위산업에선 이런 외교적 배경이 기술력보다 더 크게 작용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NATO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유럽 순방길에 오른 첫째 목적도 글로벌 방산 세일즈다. 기술은 충분하되 동맹 네트워크가 부족하다는 경험을 캐나다 수주전에서 배운 만큼 외교활동을 통한 네트워크 확장이 절실하다. 특히 세계 국방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NATO 시장으로 나아가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이번 방문은 큰 의미를 갖는다. 결국 방산 경쟁력의 답은 민관이 하나의 팀으로 움직이는 데 있다. 기업의 기술력과 정부의 외교력이라는 두 축이 완벽하게 맞물려야 겨우 승부를 걸어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글로벌 방산 시장이다. 기업은 끊임없는 기술혁신으로 격차를 벌리고, 정부는 정상외교와 산업 협력을 통해 신뢰의 네트워크를 넓혀가야 한다. 이번 캐나다 실패를 발판 삼아 민관 원팀 체제를 한층 정교하게 다듬어 유럽을 포함한 세계 방산 시장 수주전에서 승전고를 울리길 기대한다.

[강남視角] 가오슝의 시간

대만이 세계 인공지능(AI)의 심장이 될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엔비디아 창업주 젠슨 황이다. 2년 전 타이베이를 방문한 자리에서 그는 이 말을 했다. 황이 지목한 AI 심장의 근거지를 추적해 들어가면 파운드리 업체 TSMC의 남부 기지 가오슝(팹 22)의 2나노 초미세공정이 나올 것이다. 변방의 가오슝은 굴곡진 대만의 근현대사가 관통하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동남아 진출을 위한 남진정책 전초기지로 삼았던 장소가 여기였다. 가난한 항구는 근대적 무역항으로 개발된다. 태평양전쟁 기간엔 거대한 중화학 군수기지로 거듭난다. 실질적 번영기는 전쟁이 끝나고 찾아왔다. 대형 정유공장과 철강사, 조선소, 석유화학 단지가 빼곡히 들어서 대만 경제 엔진의 중추가 됐다. 도시가 쇠락의 길을 간 것은 본토 중국이 깨어나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다. 값싼 인건비를 쫓아 제조공장들이 줄줄이 중국으로 거점을 옮겼다. 자국 안보 방패를 반도체에서 찾았던 대만 정부는 북부 중심으로 대규모 과학단지를 조성하며 산업 재편을 밀어붙인다.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 수석부사장 출신 모리스 창이 정부의 파격적인 제안으로 북부 신주에 정착, TSMC 철옹성을 쌓기 시작한 시기도 이 무렵이었다. 가오슝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이 하나둘 짐을 쌌다. 남은 것은 낡은 공장과 오염투성이 부지였다. 추락하던 가오슝을 일으켜 세운 것이 AI 혁명의 물결이라는 사실은 흥미롭기 짝이 없다. 북부의 TSMC는 모바일과 AI 급변기를 거치며 남하를 시작해 타이중에서 7나노, 타이난에서 5나노, 3나노 설비를 들여 팹 영토를 확장했다. 하지만 대만 반도체 지도의 남방 한계선은 거기까지였다. 가오슝 이름이 전면에 등장한 것은 차량용 반도체 공급대란이 일던 2021년이다. TSMC가 다급하게 범용 신규 공장을 물색하고 있을 때 본사에 들이닥친 이가 1년 전 보궐선거로 당선된 의사 출신 천치마이 가오슝 시장이다. 그의 손엔 오염된 채로 버려진 가오슝 정유공장의 도면이 들려 있었다. 통상 10년이 걸리는 토양 정화사업을 단 2년 만에 끝낼 것이며, 이 땅을 비롯해 물·전기·인허가 전체를 100% 시 정부가 책임지겠다며 전현직 경영진을 만나 유례없는 기업 유치전을 펼친다. 시 내부에 이미 TSMC 전담팀을 꾸린 상태였다. 팀은 밤을 새워가며 타임테이블 간격을 줄이고 지원항목을 늘렸다. 중앙정부와 대만전력공사의 강력한 후방 협력을 끌어낸 것도 물론이다. 시큰둥하던 TSMC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외국인 주주가 다수인 이사회가 마라톤회의를 열고 가오슝 투자안을 결국 승인했다. 가오슝 기적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생성형 AI 혁명이 세계를 휩쓸던 2023년 말 가오슝의 기존 공정은 2나노 팹으로 승격된다. 당초 TSMC가 낙점했던 북부의 2나노 예정지가 주민들 반대로 무산되자 천치마이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물과 전기 요구량이 4배 이상 폭증하는 초유의 인프라 청구서 해결책을 먼저 내놨다. 세계 AI 공급망의 심장 2나노 팹은 2024년 가오슝에서 이렇게 완성됐다. 정치가 이 과정에서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고 보는 건 무리가 있을 수 있다. 대만 민주화의 중요 분수령인 된 1979년 민중 봉기의 발상지가 여기다. 집권 여당 민진당의 영혼이 서려 있는 곳이다. 가오슝의 유치전에 중앙정부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대신 최종 선택권은 전적으로 TSMC가 쥐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새겨볼 대목이다. 가오슝의 시간은 이제 한국 반도체가 넘어야 할 중대 관문이 됐다. 필요한 모든 선결조건을 패키지로 완결 짓는 행정 시간이 칩 패권의 시작이다. 우리 정부와 지자체가 사생결단의 각오로 해내야 하는 일이 바로 이 시간과의 싸움이다. 물, 전기, 사람, 교통, 교육, 주거 그리고 환경단체 설득까지. '닥치고 인프라' 해결이 먼저다. 나머지는 기업에 맡기시라. 조건이 성사되면 기업은 번개처럼 움직인다. [email protected]

[기자수첩] ‘부산 세계유산委’에 거는 기대

문화유산은 과거의 흔적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 시대의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삶과 지혜를 담고 있으며 미래 세대에도 이어져야 할 인류 공동의 자산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특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계유산은 특정 국가의 문화재가 아니라 인류 모두가 함께 보존해야 할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은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뜻한다. 세계유산을 지킨다는 것은 과거를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래를 이어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세계유산의 미래를 논의하는 국제사회의 중요한 무대가 7월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다.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세계유산의 신규 등재 여부를 심의하고, 기존 세계유산의 보존 상태를 점검하며, 세계유산협약의 운영 방향을 논의하는 의사결정기구다. 특히 이번 회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최되는 세계유산위원회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오래됐거나 아름다운 문화재라고 해서 등재되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함께 보존해야 할 가치를 인정받고 진정성, 완전성, 보존관리 체계 등 엄격한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이처럼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등재된 세계유산은 특정 국가의 자산을 넘어 인류 공동의 유산으로 보호받는다. 현재 우리나라는 문화유산 15건과 자연유산 2건 등 총 17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단순히 새로운 세계유산을 선정하는 회의가 아니다. 이미 등재된 유산이 제대로 보존되고 있는지 점검하고, 기후변화와 도시 개발 등 다양한 환경 속에서 세계유산을 어떻게 보호하고 계승할 것인지 국제사회가 함께 논의하는 자리다.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일은 한 나라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만큼 국제적인 협력과 공감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리는 이번 위원회는 세계유산의 가치를 국민에게 더욱 가까이 알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개최지인 부산에서는 회의와 함께 전시와 문화행사, 시민 참여 프로그램 등 다양한 부대행사가 마련돼 시민과 관광객도 세계유산의 의미를 직접 경험할 수 있다. 전문가만의 국제회의가 아니라 누구나 세계유산의 가치를 함께 나누는 문화 축제의 장이 되는 셈이다. 세계유산은 한 나라만의 자랑이 아니라 인류 모두가 함께 지켜야 할 공동의 자산이다. 이번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세계유산의 의미를 되새기고, 문화유산 보존의 중요성을 공유하는 뜻깊은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mail protected]

[테헤란로] 배재고 사태 이후의 과제

배재고 야구부 학생들과 교직원, 학부모들이 6일 광주제일고를 찾았다. 청룡기 야구대회 경기 중 5·18민주화운동을 조롱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응원 구호를 외친 데 대해 사과하기 위해서다. 논란이 불거진 지 7일 만의 방문 사과다. 학생과 교직원, 학부모 등 80여명은 광주일고에서 사과의 시간을 가진 뒤 국립 5·18민주묘지를 참배했다. 사과문에는 반성의 문장이 담겼다. 학생선수 대표는 "인생에서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배우게 됐다"고 했고, 배재고 감독은 "저의 책임이 가장 크다"며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책임을 인정했다. 잘못을 돌아보고 고치려는 시간은 이미 시작된 셈이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어디서부터 선을 넘었느냐다. "학생들 응원 구호를 두고 이렇게까지 할 일이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별뜻 없이 했다는 말이 책임을 지워주지는 않는다. 말의 무게는 말한 사람의 의도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그 말이 누구의 상처를 건드렸고, 경기장 안에서 어떤 조롱으로 들렸는지도 함께 봐야 한다. 스포츠는 이미 '말의 책임'을 경기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축구에서 상대를 향한 모욕적 언행은 퇴장 사유가 된다. 말도 경기의 일부이고, 그 말에 대한 책임까지 경기규칙 안에 있다는 뜻이다. 학생선수들이 배워야 할 것도 여기까지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사안이 정치권 공방으로 넘어가면서 아이들은 스스로 돌아볼 기회 대신 논쟁의 소재가 됐다. 아이들을 위한다는 말은 있었지만, 정작 아이들은 사라지고 정쟁의 목소리만 커졌다. 표현의 자유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타인의 고통을 조롱할 자유까지 뜻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그 기준은 진영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된다. 내 편의 말이면 농담이고, 상대편의 말이면 혐오가 되는 식이라면 자유도 책임도 모두 정치의 도구가 된다. 표현의 자유를 말하려면 어느 편의 말인지와 상관없이 같은 기준을 세워야 한다. 책임을 묻지 말자는 뜻도 아니다. 잘못에는 그에 맞는 징계와 조치가 따라야 한다. 다만 정치와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을 정쟁의 소재로 삼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묻고 다시 배우게 하는 기준을 세우는 일이다. 이제 논의의 중심은 정쟁이 아니라 아이들이어야 한다. 이번 사과 이후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의 반성의 시간을 지켜주는 것이지, 그 사과마저 진영 논리로 끌고 가는 일이 아니다. 학생선수들은 언젠가 프로 무대에 서거나 지도자가 되어 또 다른 아이들 앞에 설 수 있다. 지금 경기장에서 어떤 말과 태도를 배우느냐가 중요한 이유다. [email protected]

[사설] 15년 표류한 서비스발전법, 이젠 통과시켜야

서비스산업을 제조업에 이은 국가 성장축으로 키우기 위한 논의를 더 미룰 수 없다. 구윤철 부총리와 경제단체, 관계 부처가 6일 서비스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을 함께 논의하고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제정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구 부총리는 회의를 주재하며 "이제는 서비스산업 발전을 위한 판을 새로 짜야 한다"고 언급했고, 류진 한국경제인협회장은 "서비스산업 고도화가 뉴 K-인더스트리 시대를 여는 핵심 과제"라고 진단했다. 한경협은 서비스산업발전법 입법과 함께 K콘텐츠 금융지원 활성화, 비대면 배송 관련 제도 개혁 등 20개 과제를 정부에 건의했다. 논의 내용이 말로 끝날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정부와 정치권의 후속 조치가 나와야 한다. 반도체와 제조업 쏠림이 심한 한국 경제는 이로 인한 양극화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반도체 산업은 펄펄 끓고 있는데 나머지 업종은 냉기가 돈다. 중국발 저가 공습, 미중 패권 싸움이 격해지면서 한국 제조업은 설 자리를 잃고 위태로운 상황이다. 한국 경제의 리스크를 줄이고 다음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려면 콘텐츠, 관광, 의료, 물류, 뷰티, 인공지능(AI) 기반 서비스 등 고부가 서비스산업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키워야 한다. 서비스산업이 담당하는 고용과 부가가치 비중은 매우 높다. 한경협에 따르면 서비스산업은 국내 고용의 70%, 부가가치의 60%를 담당한다. 하지만 낮은 생산성과 수출 경쟁력은 여전히 고질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오랫동안 제조업을 보조하는 산업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연구개발(R&D)과 세제, 금융, 인력양성 지원도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못한 탓이다. K콘텐츠와 뷰티, 의료관광이 세계 시장을 겨냥하고 AI 혁명이 산업 지형을 바꾸는 지금이야말로 서비스산업 고도화는 더 절실한 과제다. 앞으로의 부가가치는 제품을 넘어 데이터, 플랫폼, 디자인, 유통, 지식재산권에서 더 많이 만들어질 것이다. 서비스산업발전법은 이를 위한 최소한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법안은 이명박 정부 때 처음 발의된 이후 15년째 표류 중이다. 지지부진했던 이유는 의료 분야 규제완화를 둘러싼 갈등 때문이었다. 영리 의료법인, 의료민영화, 원격의료, 외국인 환자 유치 등을 둘러싼 논란이 법안 발목을 잡았다. 의료 공공성 훼손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건강보험 체계와 필수의료가 흔들려선 안 되며 과잉진료와 의료 양극화도 막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우려 때문에 의료서비스 산업 전체의 성장을 가로막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의료서비스는 진료 수입에 그치지 않고 숙박, 관광, 쇼핑, 뷰티, 통역, 보험, 플랫폼 산업으로 이어지는 고부가 서비스다. 외국인 환자 유치와 의료관광은 내수 활성화와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공공의료와 건강보험 체계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단계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단순히 규제완화에 머물러선 안 된다. 범정부적 컨트롤타워를 세우고 서비스 R&D와 인력양성, 포괄적인 세제·금융 지원, 해외 진출, 지식재산권 보호를 종합적으로 담아야 한다. 의료, 관광, 뷰티 산업에선 해외 소비자를 끌어들일 통합전략도 세워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서비스업이 반도체를 잇는 수출 산업으로 도약할 수 있다. 국회는 더는 시간을 끌지 말기 바란다. 낡은 논쟁을 반복하지 말고 입법을 서둘러야 한다. 제조업 강국을 넘어 서비스업 강국으로 가야 한국 경제가 저성장의 벽을 넘을 수 있다.

[사설] 독일 미텔슈탄트의 몰락이 보내는 경고

세계 최고 수준의 품질로 설비 시장을 장악했던 독일 중소·중견 제조업체(미텔슈탄트)들이 중국에 먹히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최근 보도했다. 사상 처음으로 독일의 대중국 첨단 자본재 수입액이 수출액을 넘어섰고, 독일 산업계는 매월 1만개가 넘는 일자리를 잃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은 일본과 함께 세계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는 국가다. 특히 기계류 제조에서 최강의 기술력과 장인정신을 보유한 국가로서 자동차와 같은 완제품뿐만이 아니라 소재와 장비, 부품(소부장) 제조에서도 세계 제일이었다. 모든 산업 분야에서 기술력을 높이고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중국이 독일의 전통적인 강소기업들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대중국 공작기계 수출은 올해 1·4분기에 1년 전보다 3분의 1 가까이 줄었다고 한다. 독일 제조업의 중심축이자 심장 역할을 해온 미텔슈탄트들은 강력한 경쟁력을 가졌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기업이라는 뜻에서 '히든 챔피언'으로 불렸다. 이 히든챔피언에 도전장을 던진 중국의 정책이 '1만개 작은 거인'이다. 전문화·정밀화·특성화·혁신을 앞세운 중소기업을 육성하겠다는 이 정책이 효과를 거두면서 독일의 히든챔피언을 쓰러뜨리고 있는 것이다. 독일을 겨냥한 중국의 정책적 공격 말고도 독일 미텔슈탄트가 몰락하는 또 다른 원인으로는 공급망 충격, 탈원전에 따른 에너지 비용 급등, 경영자 고령화로 인한 승계난,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 도입 미흡 등이 꼽힌다. 일본처럼 오직 기술력을 최고의 가치로 신봉하다가 변화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우리에게 독일 미텔슈탄트의 경영난은 경고이자 기회로 받아들여진다. 중국의 공세에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수입액 1000만달러 이상인 소부장 1575개 품목 중 중국 의존도가 50% 이상인 품목이 472개나 된다. 소부장 산업의 중국 의존도는 30%까지 높아졌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전기차·배터리·로봇·자율주행차 등 핵심 산업의 종합 경쟁력에서 중국은 이미 한국을 앞섰고, 반도체 종합 경쟁력도 중국이 한국과 대등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다만 올해 1~4월 국내 공작기계 총수주액은 1조1924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2% 늘었고, 해외 수주는 7981억원으로 23.3% 늘어났다. 공작기계에서만큼은 한국 기업들이 잘 버티고 있는 셈이다. 중국 공세에 독일의 미텔슈탄트들이 매물로 나오고 있는데 한국의 삼성전자 등이 지난해 3곳을 인수했다. 독일 기업들의 어려움을 우리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시대의 변천을 도외시하거나 기술개발을 게을리하면 100년 넘게 쌓아온 경쟁력도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첨단기술을 접목해 끊임없는 혁신을 추구해야 나날이 거세지는 글로벌 경쟁에서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강남視角] 집값 안정의 열쇠는 '신뢰'받는 정책

집값이 급등할 때마다 거론되는 단골 이슈가 있다. 한국부동산원이 발표하는 주간 아파트값 통계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 그중 하나다. 매수 심리를 자극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주간통계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집값을 과열로 이끈 정책 실패가 주범이다. 주간통계는 지난 2013년 한국감정원(현 한국부동산원)이 KB국민은행에서 조사를 넘겨받으면서 시작됐다. 표본을 선정해 매주 시세를 조사하는 방식이다. 호가 반영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는 지적도 있다. 호가 반영은 다른 시세 조사도 마찬가지이다. 주간 아파트값 통계는 정부가 검증을 거쳐 인정한 공식 통계다. 폐지 논란은 문재인 정부 때 수면으로 부상했다. 당시 정부와 정치권의 공통된 지적은 주간통계가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월간통계와도 다르고 실거래통계와도 차이가 적지 않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특히 민간 조사기관인 KB부동산과 방향성이 다르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겉으로 보면 양측 모두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진짜 속셈은 다르다. 정부와 여당은 폭등하는 집값이 주간통계에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껑충껑충 뛰는 집값이 주간통계를 통해 지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야당은 '집값은 폭등하는데 정부 공식통계가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의구심을 나타냈다. 결국 이 같은 논란은 통계조작 사건으로 이어졌다. 논란 끝에 폐지 대신 표본수 확대 등 보완이 이뤄졌다. 이후 윤석열 정부 때에는 폐지론이 사라졌다. 집값이 하락하자 주간통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수그러든 것이다. 이재명 정부 들어 집값이 다시 뛰자 이곳저곳에서 '폐지론'이 재등장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김윤덕 국토교통부 장관은 "(주간통계 폐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정부 차원에서 개선방안을 찾는 관련 연구용역도 현재 진행 중이다. 집값이 하락할 때 정부와 여당 입장에서는 주간통계가 유용하다. 수억원 떨어진 집값이 바로 통계 수치로 나오고, 시장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집값 상승기 때는 반대이다. 그래서 폐지론이 이때마다 거론되는 것이다. 만약 정부 압박(?)에 의해 부동산원의 주간통계가 폐지되면 모든 것이 끝일까. KB부동산과 부동산R114 등 민간에서는 여전히 주간통계를 발표하고 있다. 달라지는 점은 정부 공식통계만 주간 단위로 발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동산원은 물론 민간에도 주간통계 발표를 금지하는 '초강수'를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의미가 없다. 민간 앱을 활용하면 실시간으로 정보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앱을 활용하지 않아도 된다. 부동산 카페와 블로그 등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신고가 등 거래 관련 소식이 쏟아지고 있다. 국토부가 운영하는 실거래가 공개시스템만 분석해도 하루 단위, 주간 단위, 월간 단위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한마디로 부동산원 주간통계 폐지는 실효성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공신력 있는 정보의 부재'라는 오류를 범하는 실책이다. 비공식 정보 범람만 만들어 낼 수 있다. 개편 및 보완은 계속 이뤄져야겠지만 이 역시 주간 단위 통계의 '연속성'이 보장되는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 부동산 정책실패를 주간 통계에서 찾는 것은 책임 회피이다. 통계 숫자는 말 그대로 단순히 보조수단이다. 평균 상승률보다 시장은 개별 단지 가격에 더 민감하다. 집값을 안정시키는 것은 시장에서 신뢰하는 '정책'이다. 주간통계 문제점 분석에 앞서 공공 만능주의에 빠진 공급정책, 부동산을 비생산적 투자로 보는 세제·대출규제가 집값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번 기회에 '상부 또는 외부 입김에 휘둘리지 않을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통계 마사지' 등 외압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장치가 그것이다. [email protected] 이종배 기자

[노동일 칼럼] 광주 반도체의 '미션'은 무엇인가

엔비디아의 창업자·최고경영자(CEO)인 젠슨 황은 최근 방한 길에 "미션이 보스다(Mission is the boss)"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평소 지론인 이 말은 기업의 존재 이유와 최종 목표(Mission)가 조직 내 권력이나 내부 정치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경영철학을 담고 있다. 눈을 밖으로 돌려도 마찬가지다. 치열한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 속에서 기업은 오직 철저한 시장 논리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 확보'라는 지향점(미션)만을 보고 달려가야 함을 뜻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최대 관심사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삼전·닉스)의 '광주반도체' 논란은 기업의 '미션'에 부합하는가. 삼전·닉스의 미션은 '세계 초일류 반도체 경쟁력 강화와 기술 패권 수성'이다. 첨단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미·중·일의 추격이 턱밑까지 차오른 지금 우리 기업들의 모든 자원과 의사결정은 이 미션 달성에 최적화되어야 한다. 국가전략자산인 반도체 기업은 더더욱 경제 외적 논리가 작용해서는 안 된다. 광주여서 문제라는 명제는 있을 수 없다. 부지, 용수, 전력, 인력 등 핵심 조건이 충족된다면 국가안보·균형발전 등을 고려한 정부의 산업정책은 타당성이 있다. 호남 소외론 등으로 광주반도체를 정당화하려는 논리는 오히려 정치적 고려에 따른 투자결정이 아닌지 의구심을 자초하는 언급이다. 기업들은 신중하다. 용인 등의 생산라인을 신속히 완공한 후 광주에 투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발언을 내놓았다. 정치권 얘기는 다르다. 기업을 "설득해서" (용인과 광주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4년도 남지 않은 정부 임기 내 800조원 이상의 천문학적 투자를 할 수 있는 자금여력이 있는지 재무적 반론부터 나온다. 일본 구마모토 TSMC를 예로 들어 '현 정부 임기 내 완공'을 목표로 한다고 말한다. 구마모토 TSMC 1공장은 2021년 소니와 TSMC가 합작법인 설립 후 3년 만인 2024년 말부터 가동 중이다. 결정적 요소는 아소산의 풍부한 지하수와 규슈전력의 원자력발전소를 통한 안정적인 전력 공급 전망이었다. 구마모토현은 전담조직을 통해 통상 2년 이상 걸리는 농지 전용 및 환경영향평가 절차를 4개월 만에 완료했다. 벤치마킹 대상은 바로 이 점이다. 민주당은 탈원전, 4대강 반대, 보 해체 등을 내세우는 환경단체 등을 주요 지지기반으로 한다. 영산강 지역에 댐을 건설하고, 불안정한 재생에너지 대신 원전 2기 건설 등 기존 노선의 극적 전환이 가능한가. 정부가 4개월 만에 부지선정 및 환경영향평가 등을 완료하고, 용수와 전력 등에 대한 우려를 불식할 수 있다면 광주반도체에 대한 시각은 획기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재용 회장의 결단"과 "고 이병철 회장의 도쿄선언"을 언급했다. 과거에는 청와대의 '지도'와 총수의 결단으로 가능했던 일도 이제는 달라졌다. 민주당 주도로 통과시킨 개정 상법에 따르면 삼전·닉스의 광주반도체 투자 건은 상법 제393조 제1항 '회사의 중요한 업무집행'에 해당하여 이사회 의결이 필수적이다. 또한 상법 제382조의 3에 따라 이사들이 '회사 및 주주의 전체 이익'을 위해 심의했는지를 의사록에 남겨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배임 등 법적 리스크를 피하기 어렵다. 이른바 노란봉투법에 따라 '근로조건의 결정'뿐 아니라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경영상의 결정'까지 노동쟁의 대상이 되는 점도 문제다. 글로벌 반도체 전쟁의 실상은 이런 논의를 '우물 안 개구리'들의 소음으로 만든다. 미국은 '칩스법'을 바탕으로 세제 혜택과 보조금, 관세 등의 무기를 통해 반도체 제조시설을 유치하고 있다. 일본은 도요타, 소니 등 대기업 8곳이 합작해 만든 라피더스를 국가대표 반도체 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라피더스에 대한 보조금 외에 2500억엔을 출자하며 반도체 전쟁에 직접 뛰어들었다. 중국 최대 D램 제조사인 창신메모리(CXMT)의 글로벌 D램 점유율은 1년 만에 3%에서 8%로, 양쯔메모리(YMTC)의 낸드플래시 점유율은 1년 만에 8%에서 13%로 급상승했다. "애플이 창신·양쯔메모리와 칩 구매 협상 중"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디스플레이·태양광패널·배터리 등 첨단산업에서도 우리를 추월한 중국이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현실화하는 와중에 우리 기업들은 정치공방에 발목을 잡힌다면 "반도체마저"라는 비명이 언제라도 터져 나올 수 있다. 광주반도체의 미션이 호남 소외론에 대한 보상일 수는 없다. 대한민국 반도체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투자여야 한다. 많은 우려와 의문에 대해 입 다물라는 말 대신 정부·기업·전문가들이 함께 검증하고 정직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 [email protected]

[강남視角] 파행이 관행된 최저임금 심의

역시나 큰 이변은 없었다. 법정 시한인 지난달 29일을 넘기고도 아직 결론 나지 않은 2027년도 최저임금 이야기다. 삼성전자발 '대기업 N% 성과급'이 불을 지핀 최저임금 심의는 노동자 측과 사용자 측의 시각차만 확인한 채 여전히 공전하고 있다. 노동자 측이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며 처음에 16.3% 인상안을 들고 온 가운데 사용자 측은 노동자보다 더 큰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며 최저임금 동결을 요구한 상황에서 이미 기한 내 합의는 물 건너간 상황처럼 보였다. 영세자영업자, 소상공인 가운데에는 최저임금만큼도 벌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하니 일견 이해가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역대급 성과급의 이면에서 1600원을 두고 벌어지는 처절한 논쟁은 날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우리 경제가 갖고 있는 아이러니다. 이제 내년도 최저임금은 지난 1988년 처음 최저임금 제도 시행 이후 대다수의 과거가 그랬듯, 양측의 입장이 팽팽한 가운데 심의촉진구간이라는 이름의 중재안을 통해 최종적으로 정해지는 흐름이 예상되고 있다. 문제는 과연 중재안이 정말 중재안이냐는 점이다. 최저임금 결정 과정에서 반복되는 중재안이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관행은 어느새 당연한 것처럼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실제로 1988년 최저임금 제도가 시행된 이후 법정 시한을 지킨 것은 단 9차례뿐이다. 거의 매년 시한을 넘기고 결국 7월 중순께 중재안이 등장하고서야 결론이 났다. 1988년 제도 시행 이후 2026년 적용분까지 39차례의 결정 가운데 노사 합의로 마무리된 것은 단 8차례뿐이고, 나머지 31차례는 모두 표결로 매듭지어졌다. 그리고 그 31차례 표결의 절반이 넘는 16차례가 공익위원이 제시한 안으로 결정됐다. 다수의 사람들은 노동자, 사용자 및 정부가 지정하는 공익위원이 9명씩 들어가는 현재의 최저임금위원회 구성으로는 불가피한 결과라는 말도 한다. 노동자와 사용자위원이 팽팽히 맞서는 상황에서 결국 결국 캐스팅보트는 정부가 임명하는 나머지 9명의 공익위원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들이 내세우는 중재안이 결국은 최저임금을 결정하게 되는 이유다.노사는 올해 4차 수정안까지 주고받으며 격차를 1680원에서 1290원까지 좁혔지만 이 속도라면 결국 최종 순간에는 또다시 공익위원의 중재안이 등판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늘 그랬듯 4차례에 걸쳐 줄어든 390원의 격차보다 중재안으로 나올 금액이 주는 격차가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심의요청 이후 90일 이내라는 법정 시한이 너무 촉박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무엇보다 노동자와 사용자 간 최저임금 협상이 중재안이라는 메인요리를 내놓기 전 무의미한 애피타이저처럼 인식되는 현재의 상황이 좋지는 않아 보인다. 매년 노동자는 큰 폭의 인상을, 사용자는 동결 혹은 소폭 인상을 내걸고 평행선을 달리다가 법정 시한을 넘기고 결국 공익위원의 중재안으로 결론이 나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애초에 법정 시한 준수를 전제로 제도가 설계되지 않았다는 의구심마저 든다. 물론 노사 각자 자기편 논리만 밀어붙일 뿐 애초에 합의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균형을 갖고 조정을 할 수 있다는 면에서 공익위원의 역할은 필요하다. 다만 최저임금은 전체 기업의 99% 넘는 중소기업들의 경영에 직격탄을 날릴 수 있는 민감하고 중요한 결정이다. 노동자 입장에서도 가족의 생계와 직결되는, 미루거나 양보할 수 없는 절박한 문제다. 최저임금 시한을 넘기는 파행이 어느새 당연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법정 시한을 늘리거나 노동자와 사용자 측의 이견을 조정할 기회를 더 많이 주는 등 근본적인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email protected] 김영권 중기벤처부장

[사설] 홈플러스 파산 위기, 일자리·지역경제 후폭풍 대처를

서울회생법원이 홈플러스의 기업회생절차 폐지를 결정하면서 한때 국내 2위였던 대형마트가 사실상 파산 수순에 들어섰다. 회생계획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2000억원이 조달되지 않아 파산이 불가피하다. 남은 2주간 자금 문제가 해소되면 극적으로 회생절차를 밟을 수 있다. 홈플러스 문제는 대형 유통기업 하나가 사라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직원·협력업체·입점 점주들의 생계와 지역 상권까지 연쇄적으로 흔들릴 사안이어서 심각하게 짚고 넘어갈 대목들이 있다. 당장 신경써야 할 점은 청산 이후 경제적 후폭풍이다. 홈플러스가 직간접적으로 고용한 인원은 주차·카트관리·청소 인원까지 포함해 대략 1만3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의 일자리가 순식간에 사라지면 수많은 실직자가 발생할 것이다. 홈플러스와 거래해온 중소업체와 상공인들도 걱정이 태산이다. 납품대금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해 자금회전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정부가 다행히 임금체불 피해 근로자에게 대지급금과 생계비 융자를 해주고 협력업체를 위한 긴급 유동성 지원 방안을 내놓긴 했다. 그러나 이런 대책은 임시방편에 그칠 수밖에 없다. 홈플러스가 폐업을 하게 되면 일자리가 아예 없어지고, 중소상공인들은 정상적인 주요 거래처가 아예 사라지는 것이다.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급력도 무시할 수 없다. 지역별로 점포가 순차적으로 문을 닫을 경우 인근 상권의 유동성도 떨어지고, 지역 세수에 미치는 파장도 클 것이다. 이에 정부는 실직자에 대한 재취업 지원까지 멀리 내다보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청산 절차가 진행될 경우 사각지대에 놓이는 이해관계자가 없는지 촘촘히 살펴야 한다. 동시에 이번 사태를 대형마트를 포함한 오프라인 유통업 전반의 구조적 위기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홈플러스의 몰락에는 대주주와 채권단 간 책임 문제도 거론된다. 그러나 이와 별도로 유통산업의 흐름을 제대로 읽고 산업발전 방안을 재구성할 때가 됐다고 본다. 이커머스로 소비가 빠르게 이동하면서 대형마트라는 업태 자체의 수익성이 구조적으로 악화되고 있다. 점포를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는 대응으론 영업의 반전을 기약할 수 없다. 실제로 오프라인 유통업계는 최악의 혹한기를 걷고 있다. 홈플러스의 잔여 점포들이 매물로 나오더라도 경쟁 대형마트들이 점포 인수에 소극적일 것이란 전망이 나올 정도다. 남은 대형마트들도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결합한 새로운 사업모델이나 지역 밀착형 서비스로의 전환 등 생존전략을 치밀하게 점검할 시점이다. 정부 역시 대규모 고용을 창출해 온·오프라인 유통업이 무너질 때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감안, 업태 전환과 재취업을 지원하는 중장기 정책의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 홈플러스에 남은 시간은 2주 남짓이다.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수만명의 생계가 걸린 만큼 정부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안전망을 미리 갖춰야 한다.

[사설] 쿠팡 사태, 법 집행 원칙 지키되 동맹 갈등은 막아야

미국 백악관 당국자까지 한국 정부가 쿠팡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며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 앞서 미국 하원 법사위원회도 한국 정부가 쿠팡 등 미국 기업을 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다는 중간보고서를 낸 바 있다. 개별 기업의 법 위반 의혹이 동맹 현안으로 비화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정부는 미국의 과도한 주장에는 사실과 원칙으로 대응하면서 사태를 엄정하게 처리해야 한다. 동시에 이 문제가 한미 관계의 다른 현안으로 번지지 않도록 외교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쿠팡 사태의 출발점은 분명하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쿠팡의 안전조치 의무 위반으로 3755만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고 판단하고 역대 최대 규모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사건의 본질은 전 국민 대다수에 해당하는 개인정보가 외부로 빠져나간 중대한 보안사고다. 더구나 유출된 정보가 어디로 흘러갔는지도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다. 정부가 엄정한 조사와 제재에 나서는 것은 당연한 책무다. 미국 의회와 백악관의 태도는 과도한 측면이 있다. 하원 법사위 보고서는 한국 정부의 설명과 소비자 피해 실태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 미국 정부가 자국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건에 대한 한국의 정당한 법 집행을 차별적 규제로 몰아가는 것은 동맹국에 대한 예의에도, 법치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 더구나 트럼프 대통령의 쿠팡 주식 거래 내역과 미 통상·외교 핵심 인사들의 과거 쿠팡 관련 보수 수령 사실까지 공개돼 논란이 일고 있다. 미국 측은 이해충돌 소지부터 투명하게 설명하는 게 먼저라고 본다. 한국 정부는 이럴수록 냉철하게 대응해야 한다. 쿠팡은 미국에 본사를 두고 뉴욕증시에 상장된 기업이다. 쿠팡에 대한 조사 절차와 법적 근거, 과징금 산정 방식, 국내외 기업 제재 사례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미국 정부와 의회, 언론, 투자자에게 적극 설명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쿠팡 사태가 한미 안보·원자력 협력 논의에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 된다. 한미는 현재 원자력추진잠수함과 우라늄 농축,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등 원자력·안보 협력 후속 논의를 진행 중이다. 방산 등 전략 협력까지 맞물린 상황에서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양국의 핵심 현안을 흐리는 변수로 작용해선 곤란하다. 마침 이재명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튀르키예 앙카라를 방문할 예정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참석하는 다자외교 무대인 만큼 쿠팡 사태가 양국 간 접촉 과정에서 문제로 제기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정부는 국내법 집행의 정당성을 분명히 설명하되, 이 문제가 양국 간 외교 현안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관리해야 한다. 쿠팡도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과징금 부과나 조사 결과에 대해 법적 불복 절차를 밟는 것은 기업의 권리일 수 있다. 그러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의 당사자인 기업이 미국 정치권을 움직여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 듯한 모습은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 쿠팡이 먼저 해야 할 일은 유출 경위와 피해 규모를 투명하게 밝히고, 실효성 있는 재발 방지책과 피해자 보호 방안을 내놓는 것이다. 쿠팡 사태는 기업 국적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정보 보호와 법 앞의 평등에 관한 문제다. 정부는 법 집행의 정당성을 지키면서 동맹의 큰 틀이 불필요하게 흔들리지 않도록 정교하게 대응해야 한다.

[사설] 보유세 강화하되 거래세 낮추라는 OECD 권고 적극 참고해야

[파이낸셜뉴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한국의 부동산 세제는 보유세 비중을 높이고 거래세 비중은 낮춰야 한다고 권고했다.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해 '보유세 강화, 거래세 인하'라는 그간의 제언이 글로벌 기준에도 부합한다는 점을 확인한 셈이다. 우리도 일방적 증세보다 거래 활성화와 공급 확대를 유도하는 방향이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정부는 이달 말 부동산 세제 개편을 포함한 세법 개정안을 내놓을 예정인 만큼 이번 권고를 적극 참고할 필요가 있다. OECD는 2일 발표한 '2026 한국경제보고서'에서 부동산 세제를 거래세 중심에서 보유세 중심으로 점진적으로 전환해 주거 이동성을 높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다만 한국 주택시장의 특수성을 감안해 충분한 준비 기간을 두고 신중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더글러스 서덜랜드 OECD 경제국 국가분석과장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아파트 거주자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는 만큼 충분한 적응 기간을 두고 추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현행 부동산 세제는 거래를 이중삼중으로 가로막는 구조다. 취득세와 양도소득세 부담이 크다 보니 집을 팔려는 사람도, 옮기려는 사람도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거래가 막히면 매물이 줄고 주거 이동도 위축된다. 공급 부족과 전월세 불안이 이어질수록 시장 안정을 위해 도입한 규제가 오히려 시장 왜곡을 키울 수 있다. 투기 억제와 조세 형평성을 위해 보유세 강화는 필요하다. 그러나 거래세를 그대로 둔 채 보유세만 올려서는 매물 확대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OECD에 따르면 한국의 부동산 세수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3.0%로 OECD 평균(1.6%)보다 높다. 전체 조세에서 부동산 세금이 차지하는 비중도 11.7%로 OECD 평균(5.1%)의 두 배를 웃돈다. 반면 보유세 비중은 29.4%로 OECD 평균(56%)의 절반 수준이다. 전체 세 부담을 늘리기보다 거래세를 낮추고 보유세를 높이는 방향으로 세목 간 비중을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미다. OECD는 이런 세수 중립적 개편이 주거 이동성을 높이고 노동시장 효율을 개선하며 주택시장 경직성도 완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거래가 살아나면 매물이 늘고 집값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 실수요자의 주거 이전 부담이 줄고 지역 간 노동 이동도 활발해져 경제 전반의 활력도 높아질 수 있다. 거래세 인하가 투기를 조장한다는 정치적 부담을 덜고 조세 형평성과 시장 활성화를 함께 추구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도 이번 권고는 의미가 적지 않다. 다만 보유세 강화는 과거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 세 부담이 전월세 가격으로 전가돼 세입자가 피해를 보는 일은 없어야 한다. 소득이 없는 고령층이 세금 때문에 정든 집을 떠나는 상황도 막아야 한다. 보유세 강화와 거래세 인하를 함께 추진하되 세 부담을 단계적으로 조정하는 등 부작용을 최소화할 정교한 보완책도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