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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視角] 공짜보다 일자리를 원하는 세대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말이 있다. 40대 이상의 중장년에게는 익숙한 말이지만 요즘 세대에는 낯설 수 있다. 최근의 문해력 논란을 대입하면 양잿물을 '서울 양재동에 흐르는 하천' 이름쯤으로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잘못 먹으면 목숨까지 위험한 물질도 공짜라면 먹는다는 얘기다. 과장된 표현이고 먹고살기 힘든 시절에 나왔다. 그만큼 모든 것이 귀했다. 주는 것은 일단 받고 보는 게 남는 장사였다. 81%. 지난해 한국리서치 조사에서 지하철 무임승차 연령을 높이는 데 찬성한 65세 이상 응답자의 비율이다. 전 연령대에서 가장 높았다. 공짜로 타던 지하철을 돈을 내고 타겠다는 것이다. 이전 노인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자신감이고 여유다. '65세가 됐으니 이제 노인 대접을 받아야겠다'는 생각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어르신들이 모이는 곳도 달라지고 있다. 갈 곳이 없어 모이던 경로당 이용률은 보건복지부 노인실태조사 기준 2008년 46.9%에서 2023년 26.5%로 거의 반 토막 났다. 지금은 더 줄었을 것이다. 반면 며칠 전 찾은 서울의 한 시립도서관에서는 5060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정리하는 사람, 자격증 책을 들여다보는 사람 중 5060으로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과장되게 말하면 2030세대 절반, 5060세대 절반처럼 보일 정도였다. 한 도서관의 풍경을 세대 전체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다만 적어도 그날 그 열람실의 5060에게는 갈 곳과 할 일, 목적이 분명했다. 숫자는 더 분명했다. 국가데이터처가 지난해 내놓은 경제활동인구조사 고령층 부가조사에 따르면 55~79세의 69.4%는 앞으로도 일하기를 원했다. 이들이 스스로 정한 은퇴 시점은 평균 73.4세. 10명 중 7명이 계속 일하기를 원하고, 그들이 원하는 은퇴는 평균 일흔셋을 넘긴다는 얘기다. 일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이들을 활용하는 기업도 있다. 맥도날드에는 지난해 9월 기준 870명의 시니어 크루가 근무했다. 최고령 직원은 82세다. 복지 차원에서만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민간은 이미 이들을 '지불한 만큼 제 몫을 하는 노동력'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정책은 여전히 고령자를 '일자리를 만들어 줘야 하는 사람'으로 보는 데 익숙하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재정을 투입해 노인 일자리를 만들고 참여자를 모집하는 방식이다. 물론 필요한 사업이다. 생계가 어려운 노인에게는 절실하다. 하지만 지금 60대로 진입하는 세대는 다르다. 1964~1974년생 2차 베이비부머는 954만명, 한국은행 분석으로 전체 인구의 18.6%에 달한다. 이들은 교육 수준과 직업 경험도 이전 세대와 다르다. 지금 정치권의 논의는 '정년을 몇 살로 늘릴 것인가'라는 획일적인 싸움에만 갇혀 있다. 정년을 늘리느냐 마느냐, 임금을 깎느냐 마느냐를 두고 노사 갈등만 키우는 사이 시간은 흘러간다. 이들을 놀리는 것은 고령층 본인에게도,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기업에도, 결국 우리 경제에도 거대한 손해다. 한국은행은 2차 베이비부머의 은퇴만으로 2034년까지 연간 경제성장률이 최대 0.38%p 깎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반대로 이들의 고용을 끌어올리면 하락 폭을 3분의 1 이상 줄일 수 있다는 게 같은 보고서의 결론이다. '81%'가 스스로 공짜를 마다하며 보낸 신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정부는 최근 잠재성장률 3% 달성, 수출 세계 4강 진입, 1인당 국민소득 5만달러라는 야심 찬 '3·4·5 비전'을 내놨다. 그 비전의 빈칸을 채울 수 있는 이들이 바로 일하겠다고 손을 든 5060이다. 이제 정부가 실질적인 제도개혁으로 응답할 차례다. [email protected]

[기자수첩] 좋은 규제가 경쟁력이다

과거 바이오산업의 경쟁력은 얼마나 뛰어난 신약을 개발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양상이 달라졌다. 좋은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기술이 시장에 얼마나 빠르게 도달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하느냐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 이제 규제는 산업의 걸림돌이 아니라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 인프라다. 이 같은 변화는 바이오시밀러 분야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현재 한국 바이오의약품 산업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력을 가진 분야도 바이오시밀러다. 셀트리온과 삼성바이오에피스 등 국내 기업들은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확실히 구축했고, K바이오 수출을 견인하는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과 유럽의 규제기관은 바이오시밀러 개발 과정에서 대규모 임상 3상 시험을 축소하거나 면제하는 방향으로 가이드라인을 개정하고 있다. 정밀한 분석기술과 약동학 시험만으로도 오리지널 의약품과의 동등성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는 과학적 판단이 반영된 것이다. 과학은 발전했는데 규제가 과거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다는 인식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도 최근 바이오시밀러의 임상 3상과 반복투여독성시험 자료 제출 요건을 완화하며 이러한 글로벌 흐름에 발맞췄다. 국내에서만 통하는 규제 완화가 아니라 선도국들이 추진하는 규제 조화 흐름에 한국도 합류한 것이다. 이는 개발 기간과 비용을 줄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국내에서 확보한 개발 데이터를 글로벌 허가 전략과 보다 자연스럽게 연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산업적 의미가 더욱 크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규제를 푼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안전성과 유효성 검증은 그대로 유지하되, 과학적으로 중복되거나 실익이 낮아진 절차를 합리적으로 정비하는 것이다. 규제혁신은 안전성을 희생하는 선택이 아니라 과학 발전에 맞춰 규제 수준을 진화시키는 과정이다. 물론 바이오시밀러만으로 K바이오의 미래를 설명할 수는 없다. 앞으로는 항체·약물접합체(ADC), 세포·유전자치료제, RNA 치료제, 인공지능(AI) 기반 신약개발 등 새로운 분야에서도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다. 이들 분야 역시 결국 얼마나 신속하고 예측 가능한 허가환경을 갖추느냐에 따라 기업의 경쟁력이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기술은 기업이 만든다. 그러나 산업 경쟁력은 국가가 만든다.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만큼 중요한 것이 과학을 반영한 규제혁신과 예측 가능한 허가 시스템이다. 기술이 국경을 넘는 시대에 규제가 발목을 잡는 순간 경쟁력은 다른 나라로 이동한다. [email protected]

[사설] 분쟁 급증한 노동정책 1년, 노봉법 혼선 바로잡길

이재명 정부의 노동정책 1년 성적이 60점대에 머문 것으로 조사됐다. 15일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정부 노동정책 1년 평가' 토론회에서 공개된 국민 1000명 대상 노동정책 38개 항목 평가 결과다. 응답자들은 임금체불 사업주에 대한 과징금 부과 등에 대해선 비교적 공감을 보였지만 노란봉투법과 주 4.5일제, 외국인노동자 통합지원책 등 정부의 핵심 정책엔 낮은 점수를 줬다. 이런 결과를 주목하며 정부·여당은 지난 1년의 노동정책이 지나치게 노조 편향적으로 흐른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노동정책은 법안 통과 숫자가 아니라 노사 분쟁을 줄이고 청년 일자리와 안정적인 고용환경을 잘 지켜냈는지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노란봉투법 시행 이후 산업현장 곳곳에서 빚어지는 혼란은 정부 노동정책의 뼈아픈 실패로 받아들여야 한다. 노란봉투법이 지난 3월 시행된 뒤 석달여 동안 하청노조 1160여곳, 조합원 16만여명이 원청사업장 440곳을 상대로 교섭을 요구했다. 이 가운데 자율교섭이나 교섭창구 단일화 등의 절차가 진행된 원청은 96곳이었지만, 실제 본교섭에 들어간 곳은 10곳에 불과했다. 사용자성 등을 둘러싸고 노동위원회 절차를 밟은 원청도 141곳에 달했다. 교섭을 촉진하겠다던 법이 오히려 교섭 절차를 둘러싼 분쟁을 양산하고 있는 셈이다. 노동계는 갈수록 압박 수위를 높인다. 민주노총은 이날 서울 광화문에서 조합원 1만명 규모의 총파업 집회를 열고 원청기업의 직접 교섭과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했다. 산하 조직들이 지난 4개월간 400여개 원청을 상대로 교섭을 요구했지만 실제 교섭이 진행된 곳은 4곳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총파업을 시작으로 8월 하투(夏鬪)를 본격화하고 하반기엔 투쟁 규모를 더 키우겠다고 선언했다. 교섭의 기준과 절차조차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막무가내로 기업만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노란봉투법을 둘러싼 갈등과 혼란은 날로 커지고 있다. 원청 사용자성 확대 논의에 불을 지핀 대표적 사건이 CJ대한통운 택배노조 분쟁이다. 중앙노동위원회와 하급심은 CJ대한통운이 택배기사들의 근로조건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며 단체교섭 거부를 부당노동행위로 판단했다. 정치권은 하급심 해석을 토대로 원청의 사용자 책임을 넓히는 입법을 서둘러 밀어붙였다. 그러나 최근 대법원은 직접적·묵시적 근로계약 관계가 없는 CJ대한통운에는 옛 노동조합법상 단체교섭 의무가 없다며 하급심 판단을 뒤집었다. 법 논의를 촉발한 사건의 최종 법적 판단은 출발점과 달라졌는데, 정치권이 그 출발점의 논리를 법으로 굳혀 놓으면서 현장의 혼란은 더 커졌다. 문제가 있는 법을 그대로 둘 순 없다. 노란봉투법의 근본적인 문제는 사용자 개념이 지나치게 모호하고 적용 범위도 광범위하다는 데 있다. 불복과 분쟁이 이어지고 파업 위험까지 도미노처럼 번지는 원인도 여기에 있다. 산업현장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해 법을 손질하고 제도를 보완해야지만 노동정책의 성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사설] 최저임금 3.7% 인상, 벼랑끝 자영업자 어쩌나

내년도 최저임금이 올해보다 3.7%(380원) 오른 시간당 1만700원으로 결정됐다. 지난해 인상률은 2.9%였다. 언제나 그렇듯 공익위원에 의해 결정되는 최저임금은 노측이나 사측이나 불만이 많다. 특히 올해에는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불만이 어느 때보다 크다. 소상공인연합회는 15일 "역대 최다 부채와 경기침체 속에서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790만 소상공인의 절박한 호소를 외면한 이번 결정에 깊은 유감과 허탈감을 감출 수 없다"고 밝혔다. 특히 업종별 구분 적용은 이번에도 무산돼 기업인들의 부담을 줄여주지 못했다. 경영계는 해마다 지불능력이 열악한 숙박·음식업 등의 구분 적용을 요구해왔다. 업종 구분은 소상공인 입장에서는 현실적인 요구다. 일부 업종의 최저임금 미만율은 이미 30%를 웃돌고 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에 맞춰 지급하고 싶어도 여력이 안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법을 위반하고 있는 셈이다. 제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해 위법자를 양산하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져도 노측은 막무가내다. 노측도 공정을 주장하는데 과연 누구를 위한 공정인가. 현장의 사정을 누차 강조해도 매년 최저임금 논의 때는 안건을 올려놓기만 하고 성과 없이 내년으로 넘기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다. 노동자들도 절박하지만 소상공인의 사정은 더 딱하다. 그들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인상되면 고용을 축소하고 신규 채용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는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맡고 있다. 일자리를 창출하는 고용주이면서 일반 근로자와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이다. 저임금 노동자의 생계를 책임지는 동시에 본인의 생계도 유지해야 한다. 실제로 아르바이트생보다 벌이가 적은 자영업자들이 있다. 자신들의 최저임금은 아무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들의 목소리는 해마다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다. 올해 최저임금 심사 논의에서는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의 최저임금 적용도 정식 안건으로 올랐다. 올해 처음 다룬 이 안건은 내년 이후에도 계속 공식 의제로 다뤄질 것이다. 더구나 올해 국제노동기구(ILO)가 차량 호출, 음식 배달, 전자상거래 등 플랫폼 경제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위한 국제 고용기준을 처음으로 마련했다. 이런 국제적 인정 추세를 타고 특수노동자에 대한 최저임금 논의 방안이 더 주목받을 수도 있다. 문제는 새로운 의제가 주요 안건으로 추가될수록 기존에 주요 의제로 다뤄지던 업종별 구분 적용 문제는 관심사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 바란다. 더 이상 최저임금 심사 논의가 형식적인 틀에 갇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운영되어선 안 된다. 지난해에 다뤘던 주제를 올해도 관행적으로 안건으로 올려 똑같은 결론을 내고 마는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 이해 당사자들의 주장을 충분히 듣고 원점에서 다시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최저임금위원회의 논의 절차부터 개선할 필요가 있다. 공익위원들이 최종 결정하는 구조는 노사 양측의 합의를 거치지 않아 문제다. 실효성 있는 제도개선 추진단을 설치해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 내년에도 똑같은 관행이 되풀이된다면 노사는 물론 최저임금 제도 자체에 대한 국민의 불신만 더 깊어질 것이다.

[특파원칼럼] 미국에서 만난 90대 참전용사들

행사 시작 전부터 흰색 셔틀버스가 차례로 도착했다. 버스 뒤편 리프트가 천천히 내려오자 휠체어를 탄 참전용사들이 한 명씩 모습을 드러냈다. 봉사자들이 휠체어를 밀고, 의료진이 부축하며 행사장으로 안내했다. 한때 20대 청년이었던 이들은 이제 대부분 90대를 훌쩍 넘겼다. 스스로 걷기 어려운 참전용사도 적지 않았다. 기념식이 시작되자 노병들은 다시 가슴에 손을 올렸다. 미국 국가가 울려 퍼지자 휠체어에 앉은 참전용사도 따라 불렀고, 지팡이를 짚은 노병은 힘겹게 일어나 경례를 했다. 행사가 끝난 뒤 뉴욕총영사는 참전용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으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미국 뉴저지 포트리에서 열린 한국전 기념행사는 분명 엄숙했고 의미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기념식 자체가 아니라 세월이었다. 참석한 참전용사들의 머리는 대부분 희끗했고, 휠체어와 보행기는 이제 행사의 익숙한 풍경이 됐다. 며칠 전 만난 95세 한국전 참전용사의 말도 그 풍경과 겹쳐졌다. 그는 살아 있는 전우들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요양원에 있는 전우, 병원에서 투병 중인 전우, 연락이 끊긴 전우들. "이제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 말은 자신의 삶보다 한국전 참전용사 공동체 전체를 향한 걱정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 걱정은 근거 없는 불안이 아니었다. 실제로 미국 한국전참전용사회(KWVA)가 처한 현실은 녹록지 않다. 미국 전역에 흩어진 참전용사들을 연결하고 회원들의 안부를 확인하며 분기마다 잡지를 발간하는 것이 이 단체의 역할이다. 그러나 회원 수는 빠르게 줄고 있고 재정도 넉넉하지 않다. 과거 매달 발간하던 잡지는 제작비 부담으로 분기 발간으로 바뀌었다. 그 잡지는 참전용사들을 한국과 유일하게 연결하는 통로다. 그런데 이 통로를 지탱하는 실무는 체계적인 조직이 아니라 사실상 한국인 봉사자 한 사람의 손에 맡겨져 있다. 정부와 기업을 찾아다니며 후원을 요청하는 일도, 잡지를 만드는 일도, 참전용사와 한국을 이어주는 일도 결국 개인의 헌신에 기대고 있다는 뜻이다. 한 사람의 선의가 사라지는 순간 그 연결고리도 함께 끊길 수 있다. 한국에서는 해마다 6월이면 6·25전쟁과 관련한 기념식이 곳곳에서 열리고 "참전용사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말 자체는 틀리지 않다. 하지만 기억은 행사 하루로 유지되지 않는다. 한 사람의 헌신으로도 유지되어서는 안 된다. 참전용사들이 서로 연락할 수 있도록 돕는 단체가 있어야 하고, 생존자의 증언을 기록하는 사업이 계속돼야 하며, 마지막 세대가 살아 있는 동안 역사를 보존하는 작업도 이어져야 한다. 기억은 행사장이 아니라 일상에서, 그리고 몇몇 개인의 선의가 아니라 제도 위에서 유지되는 것이다. 한국은 이제 세계가 인정하는 경제강국이 됐다. 미국 거리에서는 삼성전자와 현대차를 쉽게 볼 수 있고, 젊은 세대는 K팝과 K드라마를 즐긴다. 하지만 정작 그 성장의 출발점을 지킨 이들 곁에는, 여전히 한 사람의 손이 전부다. 1950년 이름조차 생소했던 나라를 위해 미군 178만여명이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3만6000여명이 전사했다. 그들의 희생 위에서 대한민국은 산업화를 이루고 민주화를 완성했으며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이제 한국이 고민해야 할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참전용사들에게 충분히 감사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 기억을 이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다. 현장에서 만난 한 한국인은 "한국에서는 참전용사를 소재로 행사와 콘텐츠는 많이 만들어지지만, 정작 이들을 직접 돕거나 이들이 활동하는 단체를 꾸준히 지원하는 일은 드물다"고 말했다. 기억은 말이 아니라 예산으로 남고 제도로 이어질 때 비로소 다음 세대의 역사가 된다. [email protected] 이병철 뉴욕특파원

[테헤란로] 정권은 5년, 연금은 30년

지난 1년 동안 정부의 자본시장 정책은 '시장 활성화'라는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를 허용했고,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국내주식 목표 비중을 상향 조정했다. 성격은 다르지만 시장의 투자 기회와 자금 유입을 확대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흐름이다. 방향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렵다. 국내 퇴직연금은 원리금보장형에 과도하게 쏠려 있고, 자본시장도 성장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시장 영향을 이유로 장기 자산배분 기준까지 조정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국민연금은 시장을 예측해 투자하는 기관이 아니다. 미리 정한 목표 비중과 허용범위에 따라 자산을 운용하고, 가격 변동으로 비중이 벗어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는다. 이른바 리밸런싱이다. 시장이 오르든 내리든 원칙을 지키는 것이 연기금 운용의 기본이다. 그런데 올해는 그 원칙에 예외가 생겼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지난 5월 올해 국내주식 목표 비중을 14.9%에서 20.8%로 높였다. 공식적으로는 국내 주식시장의 구조적 변화를 고려해 장기 수익성,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질문이 생긴다.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후를 위한 장기 투자자인가, 아니면 시장 안정까지 함께 고려해야 하는 정책 수단인가. 시장 영향을 고려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렵다. 그러나 연금의 자산배분 기준이 시장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시작한다면 장기 운용 원칙과 단기 시장 안정 사이의 경계는 흐려질 수밖에 없다. 한국금융연구원은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의 전제로 '합리적인 위험통제 아래 적정한 수익 확보'를 제시한다. 즉 투자 대상을 넓히는 것보다 먼저 가입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수탁자 책임과 감독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의미다. 해외 사례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노르웨이 국부펀드(GPFG)는 국내 자산을 투자 대상에서 제외하고 해외 자산에만 투자한다. 국가경제와 연금기금의 위험을 분리하고 투자 대상을 전 세계로 분산하기 위해서다. 미국도 401(k)의 투자 범위를 넓히면서 가장 먼저 손본 것은 투자상품이 아니라 수탁자의 책임이었다. 국민연금은 증시를 떠받치는 기금이 아니라 국민의 노후를 지키는 기금이다. 시장을 위해 연금의 원칙이 흔들리기 시작한다면 그 순간 연금은 장기 투자자가 아니라 정책 수단이 된다. 정권은 5년이다. 그러나 연금은 30년, 길게는 40년을 책임진다. 그래서 연금의 원칙은 어느 정부보다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 [email protected] 최두선 증권부 차장

[fn광장] 반도체 '대박'과 위기 '트라우마'

기획예산처 박홍근 장관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내년 국세 수입이 당초 전망인 412조원을 훌쩍 넘은 '500조원+알파(α)'로 사상 최대 세수를 기록할 것이란 대목에선 유독 자신감이 묻어났다. 지난 13일 이재명 대통령 주재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박 장관이 국가재정운용 방향을 제시하는 모습을 TV 생중계로 보면서 스친 느낌이다. 박 장관의 여유는 어디에서 왔을까. 4선 중진 국회의원이면서 초대 기획처 장관이라는 경력이 갖는 무게감일까. 정답은 모두가 알고 인정하는 '반도체 대박' 영향이 아닐까 싶다. 인공지능(AI) 대전환 시대를 맞아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본격화되고 있다. AI 구동에 필수적인 고대역폭메모리(HBM)의 사실상 독점공급 기업인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은 급증세다. 반도체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물량 부족에다 가격도 높아서다. 올해 2·4분기 삼성전자는 하루에 1조원씩 영업이익을 냈다. SK하이닉스는 지난 10일(현지시간) 미국 증시에서 265억달러(약 40조원) 조달에 성공했다. 미국 증시에 상장한 외국 기업 중 가장 큰 조달규모로 나스닥 시장에 입성했다. 기업 이익 급증은 세수증가로 이어진다. 법인세, 근로소득세 등이 더 걷히면 예산당국은 지출을 늘릴 여력이 커진다. 더 걷힐 세수가 100조원을 훌쩍 넘긴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정부가 내년 예산을 올해보다 10% 이상 증가한 800조원대로 편성하겠다는 자신만만함의 배경이다. '삼전닉스'의 활약은 또 여럿 있다. 국부가 팽창 중이다. 코스피 상승세를 이끌었고, 경상수지 흑자도 큰 폭으로 늘렸다. 올 5월까지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1412억8000만달러다. 지난해 연간 흑자액(999억7000만달러)을 5개월 만에 넘어섰다. 역대급 성적이다.'호사다마'는 잔칫집에 재 뿌리는 말이지만 좋은 일이 생길수록 혹시 망칠 만한 조짐은 없는지 살피라는 교훈도 담고 있다. 경제영역으로 해석을 확대하면 '위기' 조짐은 없는지 경계하라는 경구다. 찜찜한 흐름은 있다. 원화 가격 급락이다. 원·달러 환율은 좀처럼 1500원대 아래에 안착하지 못하고 있다. 경상수지 흑자로 보면 이해 불가다. 삼성전자 실적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반도체 수출로 그만큼 달러를 벌고 있다. 환율만 보면 2009년 금융위기와 별반 다름없다. 환율만의 문제일까, 아니면 우리의 경제체력이 약해진 탓일까. 동남아 통화의 약세도 묘하다. 인도네시아가 유독 심하다. 인도네시아 정부 재정 악화가 원인으로 꼽힌다. 태국, 필리핀, 베트남도 재정악화·통화가치 약세다. 아시아 통화 동반 약세는 1997년 외환위기 트라우마를 소환한다. 당시 위기는 태국에서 시작돼 각국으로 전염됐고, 한국까지 덮쳤다. 그때는 고정환율제였다. 변동성 흡수력이 월등한 현재의 변동환율제와는 다르다. 외환보유액도 두껍다. 분명히 다르지만 닮은 면도 있다. 경계심을 유지해야 한다. 반도체 효과를 활용해 위기 트라우마에서 탈피해야 한다. 추가세수로 유입되는 막대한 재원은 기존 경제시스템 전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정부가 추가세수를 일회성이 아닌 미래대응기금으로 조성, 미래·청년·지방·교육에 집중 투자하겠다는 점은 적절하다. 반도체 등 3대 메가프로젝트 지원 방침도 당연하다. 다만 정책방향이 옳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격언이 빈번하게 인용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미래대응기금은 관련법에 따라 조성·설치되겠지만 정부 쌈짓돈이 될 것이란 우려는 있다. 기금은 예산과 달리 국회의 심의·견제 기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정권의 이해나 정치논리에 따라 돈 쓸 데를 늘리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과거 사례가 이를 대변한다. 예상 못한 세수가 쏟아졌을 때,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3저' 호황의 노태우 정부는 정당성 보완을 위해 임금·복지 확대 요구에 맞춰 재정을 확대했다. 1994~1995년 소위 1차 반도체 호황 당시 김영삼 정부는 미래투자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이라는 치적에 집중, 위기를 불러왔다. 반도체 사이클이 좋았던 문재인 정부도 호기를 놓친 건 마찬가지다. 반도체 대박과 정치논리가 결합하면 과감한 혁신과 투자는 물 건너간다. 반도체발 추가세수가 구세주가 아닌 위기를 불러오는 독이 될 수 있다.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이었던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의 멘트는 여전히 유효하다. "1990년대 중반 모두가 반도체 특수에 눈이 멀어 취약해져 가는 경제구조를 방치했는데, 이것이 외환위기의 원인이었다." [email protected] 김규성 정치부장

[사설] 초격차 경쟁시대, 이윤은 분배보다 재투자에 써야

인공지능(AI) 전환 시대의 기업 이익과 노동의 미래를 논의하는 고용노동부 토론회가 14일 열렸다. 삼성전자 성과급 갈등을 계기로 시작된 기업 이윤 재분배 논의가 공식적인 공론의 장에 오른 것이다. 토론회에선 대기업의 초과이윤을 사회적으로 환수하는 특별목적세와 국가임금위원회 설치 방안까지 나왔다. 노동계는 기업 이익의 사회적 재분배를, 경영계는 기업 투자 확대를 주장하며 서로 맞섰다. 인공지능(AI) 혁신의 성과를 사회 전체로 확산하면서도 기업의 경쟁력을 훼손하지 않는 해법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당장의 이익을 나누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장기전을 적극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반도체 호황의 성과가 특정 집단에만 몰리고 원·하청, 대·중소,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격차가 벌어지는 문제는 가볍게 볼 일은 아니다. 기술혁신으로 생산성이 높아지는 동안 청년 일자리가 줄고 기존 직무가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에도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해법을 기업의 이윤을 강제로 나누는 방식에서 찾아선 곤란하다. 특별목적세는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기업은 이미 이익에 대해 법인세를 부담한다. 여기에 정부가 임의로 초과 기준을 정해 별도 세금을 부과하면 이중 부담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경쟁국들이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앞세워 첨단기업을 유치하는 상황에서 한국만 이익이 늘 때마다 추가 부담을 지우면 국내 투자와 기업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 국가임금위원회 역시 신중해야 한다. 플랫폼·프리랜서 근로자의 최소보수와 최저임금 등 분산된 임금정책을 종합적으로 연구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국가 기구가 민간기업의 임금 인상률과 성과급 배분까지 사실상 지도한다면 거대한 임금통제기구로 변질될 수 있다. 임금과 성과급은 개별 기업의 경영상황과 노사 합의에 따르는 것이 순리다. 오히려 정부가 당장 서둘러야 하는 일은 노조의 막무가내식 N% 성과급 요구를 막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기업에 이어 이제는 현대차 노조까지 N% 성과급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선 상태다. 자율주행과 전기차 확산으로 글로벌 자동차가 대격변기를 맞아 자동차 업체들은 숨넘어가는 기술전쟁을 벌이는 와중이다. 파격적인 대우를 받는 현대차 노조는 기업에 힘을 보태기보다 순이익 30%를 요구하며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노조가 계속 이런 식이면 기업 이익의 규모는 줄고 일자리는 더 위축될 것이다. 정부는 이를 제어할 법적 조치에 더 손을 써야 한다. 세계 각국은 AI와 반도체, 데이터센터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부으며 초격차 경쟁을 벌이고 있다. 투자시기를 한번 놓치면 기술과 인재, 공급망을 한꺼번에 잃을 수 있다. 김영훈 장관이 말한 대로 투자와 분배를 단순한 이분법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투자 없이는 향후 나눌 성과도 사라진다는 원칙만큼은 분명히 해야 한다. 정부는 새로운 세금보다 기업이윤의 재투자 선순환을 지원하는 데 정책 역량을 모아야 할 것이다.

[사설] 하반기 경제전략 발표, 신산업 키워 고용 증대를

정부가 2026년 하반기 경제성장전략을 14일 발표했다. 반도체 산업 호황 국면을 살려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1월 전망보다 1.0%p 올려 3.0%로 제시했다. 잠재성장률 3%, 수출 4강, 국민소득 5만달러 달성이라는 '3·4·5 비전'도 내놓았다. 정부가 제시한 단기 경제 목표는 어느 때보다 공격적이다. 성장률 3%는 5년 만의 최고치이며, 잠재성장률 3%도 높은 수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추정한 올해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은 1.66%다. 수출 4강도 가보지 않은 길이며 국민소득 5만달러 또한 마찬가지다. 현실을 도외시한 장밋빛 목표는 일종의 포퓰리즘이다. 역대 정권들은 출범 초기 '747' 등의 듣기 좋은 숫자로 국민의 기대를 부풀게 했지만 달성한 적이 없다. 그러나 목표는 언제나 조금 높이 잡는 것이 좋다. 비록 달성하기가 쉽지 않아도 목표치가 높으면 더 나은 결과를 얻는다. 정부가 고백했듯이 '3·4·5 비전'도 이재명 정부 임기 안에 이뤄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의지는 높이 산다. 정부 발표 내용은 비교적 현실적이고 짚을 것은 다 짚었다. 다만 성장률 3%는 반도체 의존도가 너무 크다. 반도체 경기가 언제까지나 호황일 수는 없다. 3% 성장을 이룬다 해도 내년 이후에는 장담할 수 없다. 반도체만이 아니라 주요 제조업을 고루 균형되게 발전시키는 전략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저성장에서 탈피하고 잠재성장률을 높이려면 반도체와 함께 우리 경제를 이끌 복수의 신성장동력을 키워야 한다. 이를 잘 아는 정부도 이미 여러 차례 첨단산업 육성책을 밝혔었다. 이날 발표에도 들어 있다. 올 하반기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민관이 힘을 합쳐 신산업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초혁신 성장동력 육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내세운 미래 산업은 제약·바이오, 방위산업, 우주·항공, 인공지능(AI) 에이전트, 블록체인 경제 등이다. 제2의 반도체 후보들로 앞날이 밝은 산업들이다. 문제는 추진력이다. 큰 산업의 물길을 정부가 주도적으로 개척하고 이끌어야 한다. 정부가 이날 신산업별로 내놓은 구체적인 육성 로드맵에서 어느 때보다 강한 의지가 읽힌다. 계획한 대로 미래의 주도적 산업으로 발전시키기 바란다. 다만 미진한 것은 구조개혁에 관한 언급이다. 반도체를 제외하면 현재 기업들의 경영사정은 결코 좋은 형편이 아니다. 중국의 공세에 석유화학, 철강, 자동차 등 기존 주요 제조업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고용, 노동시간과 관련해 경직된 제도를 개편하고 개혁해서 기업들의 숨통을 터줘야 한다. 우리 경제의 현실에서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은 고용 없는 성장과 양극화다. 성장률이 아무리 높아져도 고용을 늘리지 못하면 '빛 좋은 개살구'다. 고용은 정부가 인위적 수단으로 확대하기 쉽지 않다. 산업이 발전하고 기업이 잘 돌아가면 고용이 저절로 늘어난다. 고용에는 왕도가 없다. 결국은 앞서 말한 신산업의 발굴과 기존 산업의 지원으로 산업계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고용 증대를 위한 최선의 길이다.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는 반도체 산업이 두세 개만 있어도 경제는 끄떡없이 발전을 지속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한국 경제의 재도약을 위한 골든타임이라는 생각으로 다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기자수첩] 리센느의 규칙

K팝 시장에는 정해진 공식이 있었다. 대형 기획사, 거대자본, 방송사 네트워크. 세 가지 모두 갖췄다면 어느 정도 성공은 보장됐다. 안타깝게도 이 함수는 셋 전부 미흡한 중소기획사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좋은 음악, 뛰어난 춤 실력은 대중에게 가닿지도 못한 채 증발했다. 이 문법을 흔든 건 유튜브라는 무대의 등장이다. 주요 음악방송 출연은 더 이상 흥행의 신호탄이 아니게 됐다. 알고리즘은 회사의 재무제표와 인맥을 묻지 않았다. 시청자의 관심은 소속사가 아닌 콘텐츠로 향했다. 자본과 연줄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지만, 핵심은 공식에 난 균열이다. 최근 걸그룹 리센느의 부상은 이 변화가 빚어낸 대표적 현상이다. 실력과 음악성, 꾸준한 노력이 입증됐기에 단기간에 김이 빠지지 않고 오히려 한층 도약했으나 당초 빛을 볼 수 있었던 건 이를 드러낼 경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통의 창문을 여러 번 두드릴 권한이 부여된 것이다. 반면 우리 경제 시스템은 과거의 규칙에 머물러 있다. 산업 구조와 성장의 원천이 달라졌음에도 대규모 설비, 자본집약적 산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오래된 믿음을 고집한다. 그 결과가 '가격발견' 기능의 상실이다. 가능성을 가진 기업이 시장에서 적정 가치평가를 받을 기회 자체가 적다는 것이다. 소위 '잘나가는 곳'만 잘나가게 된다. 올해 경제성장률은 3.0%대까지 점쳐지지만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의 귀엔 다른 나라 얘기다. 그 틈을 겨우 비집는 창업과 혁신을 위한 성장 사다리는 허술하다. 양극화의 모양은 소문자(k)를 넘어 대문자(K)가 되고 있다. 'K'를 양쪽이 모두 올라가는 'Y'로 바꾸려면 새로운 방정식이 요구된다. 이미 경쟁력을 탑재한 산업에만 투자와 지원이 몰리는 구조로는 불가능하다. 인공지능(AI), 플랫폼, 데이터 등 차세대 산업은 공장과 자본뿐만 아니라 인재와 아이디어, 시장 선점이 필수다. 착실히 내실을 다진 기업들이 최소한 그 저력을 증명할 길은 마련해줘야 한다. 혁신기업이 제대로 기술과 성장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금융 시스템, 한번 넘어진 창업자가 재도전할 수 있는 환경, 중소기업도 글로벌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인프라가 그 밑바탕이 된다. 가깝게는 '반도체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 2~3년 전만 해도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현재 모습을 꿈꾸지 못했다. 누가 될지 모르는 '그들의 시간'이 왔을 때 세계무대에서 한걸음 빠르게 치고 나가려면 '제2의 리센느'를 탄생시킬 새로운 규칙이 필요하다. [email protected] 김태일 기자

[강남視角] 그린스펀과 클린턴

"기쁘게도, 클린턴은 내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듯했다. 적자 문제의 시급함을 그도 알아챈 것 같았고, 정치인들에게서는 좀처럼 기대하기 힘든 날카로운 질문도 여러 차례 던졌다." '세계 경제 대통령'으로 불린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2007년 펴낸 자서전 '격동의 시대'에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평가한 대목이다. 평생 공화당원인 그가 자신이 만난 7명의 대통령 중 가장 높이 평가한 인물은 의외로 민주당의 클린턴이었다. 지난달 100세를 일기로 타계한 그는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때부터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6년까지 18년 넘게 연준 의장을 지내며 공화당 대통령 3명과 민주당 대통령 1명을 거쳤다. 그의 자서전에는 이 4명을 포함해 역대 대통령 7명에 대한 평가가 나온다. 그린스펀은 "클린턴은 많은 결점에도 내가 만나 본 이들 중 가장 지적 능력이 뛰어난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과 많이 비슷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공화당원 닉슨보다 클린턴을 더 높이 본 것은 정적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대선을 앞둔 내부 모임에서 닉슨의 연설을 듣고 "그는 정책 토론 대신 민주당을 향한 격렬한 비난을 쏟아냈다. 언성을 높이지 않았지만 그 어조가 너무 강렬하고 험해 토니 소프라노(드라마 속 마피아 두목)마저 얼굴을 붉힐 정도였다"고 적었다. 그의 이런 면모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만천하에 알려지게 됐다고도 했다. 클린턴에 대해서는 "사실에 입각해 국가경제 전반을 직관하는 통찰력을 지녔고 재정적자 감축 계획을 과감히 추진하는 정치적 용기를 보였다"고 찬사했다. 실제로 1993년 클린턴은 민주당 내부 반발과 공화당의 공세 속에서도 재정적자 감축법을 가까스로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만큼 정치적 부담이 큰 선택이었다. 인간적으로도 가까웠다. "나는 시가를 같이 피우거나 축구 경기를 함께 볼 친구는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둘 다 책을 많이 읽었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호기심이 많았다. 클린턴은 우리를 '기묘한 경제 커플'이라고 공공연하게 불렀다." 미국 정계와 언론도 그의 자서전이 공개됐을 때 공화당원인 그린스펀이 민주당 대통령과 가까웠다는 점에 주목했다. 클린턴 역시 재임 중 그를 연준 의장으로 재지명하며 화답했다. 당시 정가는 물론 그린스펀 본인도 민주당 출신의 새 의장이 임명될 것으로 예상했다. 다만 모니카 르윈스키 성추문이 불거졌을 때는 "매우 실망스럽고 서글펐다"고 적었다. 그린스펀을 사로잡은 것은 클린턴의 선입견 없는 경청에 이은 정치적 결단이었다. 클린턴이 법안 통과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그린스펀은 백악관으로 그를 찾아가 격려했다. 최소한 경제 문제만큼은 정파를 뛰어넘었다. 결국 이 법은 1990년대 후반 재정흑자 전환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독립성이 생명인 연준에서 그가 18년 넘게 의장직을 지킨 사실도 놀랍지만 정파보다 국가경제를 앞세운 두 사람의 우정과 신뢰 역시 인상적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미국은 다르다. 양극화는 심해졌고,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일이 일상이 됐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거대 양당은 진영 논리에 갇혀 사사건건 충돌한다. 상대가 합리적인 정책을 내놓아도 무조건 반대하는 일이 적지 않다. 자신들이 주장했던 정책도 상대가 다시 들고나오면 돌아선다. 이런 편가르기는 전문가 사회에도 번져 연구 결과가 충분하게 축적된 사안마저 정파에 따라 해석을 달리한다. 이는 전문가에 대한 신뢰마저 흔든다. 뼛속까지 공화당원인 그린스펀은 자서전에 이런 바람을 남겼다. "공화당 대통령과 민주당 부통령, 아니면 그 반대의 조합이 탄생한다면 정치에 무관심했던 중도층을 끌어들일 수 있을지 가끔 생각해 본다." 정당은 달라도 국익 앞에서 기꺼이 협력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오늘 우리 정치가 곱씹어야 할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email protected] 임상수 논설위원

[손성진 칼럼] 당신이 피해자라면

"우리는 선생님 편도, 학생 편도 아닙니다. 오직 피해자 편에만 섭니다." '참교육'이란 드라마에서 교권보호국의 감독관인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마치 보완수사권을 폐지하려는 정치권에 던지는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각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는 최근 검찰의 보완수사권을 폐지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보완수사권 폐지의 피해는 범죄 피해자들에게 돌아간다. 피해자들이 2차 피해를 당할 수 있는 것이다. 형사사건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고 그 사이에 범죄를 수사하는 검찰 또는 경찰이 있다. 경찰이 1차 수사를 하고 미진한 부분이 있다고 검찰이 판단하면 보완수사를 하는 게 현재의 형소법 체계다. 보완수사권까지 박탈하려는 것은 비대한 검찰의 힘을 완전히 빼겠다는 취지다. 권위주의 시대의 검찰은 정권 유지의 도구 역할을 했다. 그 보상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군림했다. 검찰권은 하늘을 찌를 듯했고 공룡과도 같은 거대한 권력조직이 되었다. 검찰이 정권과 야합하여 권력을 남용하는 일이 더는 없도록 마지막 남은 작은 칼 하나까지 빼앗겠다는 게 보완수사권 폐지 목적이다. 그러나 보완수사권 폐지는 위헌 여지가 다분하다. 먼저 법익 균형에 반한다. 검찰개혁에 치중한 나머지 피해자 보호라는 법익을 무시하고 있다. 사건의 진실을 규명할 기회를 빼앗아 피해자의 기본권을 침해한다. 영장 청구권을 검사에게 부여한 헌법 규정과도 어긋난다. 보완수사권은 검찰권 약화라는 정책적 목적을 위해 피해자 보호라는 헌법적 가치를 도외시한다. 수사도 인간이 하기에 완벽할 수 없다. '형사 콜롬보'처럼 뛰어난 형사라도 간과하고 놓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지난해 검찰이 요구한 보완수사는 9만3000여건이다. 경찰 송치 사건의 10.7%다. 검찰이 부실하고 미진한 수사라고 판단한 사건이 그만큼 된다는 얘기다. 그만한 숫자의 피해자들이 연관돼 있다. 때마침 장윤기 사건, 부산 돌려차기 사건, 김창민 영화감독 사망 사건이 터져 나왔다. 검찰이 보완수사로 파묻힐 뻔한 진실을 밝혀낸 사건들이다. 사건을 검경이 크로스 체크하면 허점을 찾아내 실체적 진실에 다가설 가능성이 높아진다. 보완수사의 개념을 그렇게 봐야 한다. 검찰과 경찰은 상하 관계라기보다 이처럼 보완 관계이면서 견제 관계다. 검찰은 경찰 수사의 감시자 역할도 할 수 있다. 재판은 3심제를 두어 피고인에게 항변권을 준다. 보완수사권은 일종의 수사 2심제인 셈이다. 경찰의 수사 역량은 객관적으로 검찰에 뒤진다. 경찰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검찰의 역량은 상대적으로 뛰어나다.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은 검찰이 쌓아온 수사력과 노하우가 멸실된다는 측면에서는 아쉽다. 도덕성에서도 경찰의 신뢰성은 떨어진다. 경찰이 고의로 진실을 외면하고 가해자의 편을 들 가능성도 있다. 제2, 제3의 장윤기 사건이 있을 수 있다. 권력의 압력과 금전의 유혹에 경찰은 취약하다. 고위직인 전직 경찰청 차장이 10억원을 받고 사건에 개입한 혐의로 징역 15년을 구형받았다. 하나의 사례다. 보완수사권 폐지를 밀어붙인 강경론자들은 자신 또는 가족이 피해자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라. 절절한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애를 써 보라. 여당 주축 인사들 중에는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검찰의 조사를 받은 이들이 있다. 독재에 맞서다 서슬 퍼런 검찰로부터 모욕적이고 가혹한 행위를 당했을 수 있다. 검찰개혁에 이토록 철저한 이유일 게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들도 피해자였다. 가해자는 물론 검찰이다. 같은 피해자로서 피해자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 어디 하소연할 곳 없는 그들의 막막함을 잘 알지 않겠나. 야당이 예로 든 것처럼, 아이로니컬하지만 박종철 사건의 진실을 밝힌 것도 검찰이다. 검찰의 수사 기능을 박탈하고 공소청으로 바꾸는 것은 이미 정해진 길이다. 검찰에 보완수사권을 남겨준다고 검찰개혁의 큰 틀을 해치지는 않는다. 보완수사권은 대체로 일반 형사사건, 즉 성폭력이나 폭행, 살인 등에 적용된다. 권력에 아부하고 시류에 편승하는 검사들과는 무관하다. 묵묵히 정의와 실체적 진실을 바라보며 일하는 검사들이 다수다. 검찰 권력의 씨를 말리는 것보다 새로운 권력의 발아(發芽)를 경계할 때다. 경찰이 검찰의 자리를 대신하여 또 다른 공룡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검찰이든 경찰이든 문제는 하부 권력 자체가 아니다. 핵심은 상위 권력이다. 그 조직을 관장하는 정권에 모든 것이 달린 것이다. [email protected] 논설실장

[사설] 추가세수로 미래기금 신설, 재정 체질도 개선을

이재명 대통령이 13일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주재하며 추가 세수를 활용한 미래대응기금 신설을 공식화했다. 반도체 호황으로 발생하는 대규모 추가 세수를 미래와 청년, 지방, 교육 등 국가 미래를 위한 4대 분야에 집중 투자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3대 메가프로젝트를 기업의 투자 시간표에 맞춰 대대적으로 지원하고 '모두의 성장'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계획도 포함됐다. 향후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재정의 청사진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세수 펑크를 메우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며 재정 운용에 허덕였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이날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은 내년 국세 수입이 당초 전망한 412조원을 훌쩍 넘어 사상 처음으로 500조원+α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내놨다. 세금은 기업 경쟁력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기업 성장과 세수, 국가 발전은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 산업 경쟁력을 높여 성장과 세수의 선순환이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재정의 출발점이다. 추가 세수를 미래를 위한 전략적 투자 재원으로 활용하겠다는 방향은 타당하다. 전력망과 용수, 첨단산업단지 같은 기반시설은 민간이 대신할 수 없는 국가의 영역이다. 특히 정부가 추진하는 3대 메가프로젝트는 민간의 천문학적인 투자 계획과 맞물려 있다. 기업이 공장과 기술을 책임진다면 정부는 전력과 용수, 교통·물류망, 정주여건 등 인프라를 선제적으로 정비해야 마땅하다. 산업 전환기에 필요한 재교육 역시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라는 점에서 재정이 우선적으로 뒷받침해야 할 분야다. 그러나 이런 투자가 일회성 선언에 그치지 않으려면 안정적인 재원과 엄격한 재정 운용 원칙이 전제돼야 한다. 미래대응기금의 출발점은 반도체 호황에 따른 추가 세수 활용이었다. 글로벌 AI 산업 수요가 폭증하면서 반도체 기업들이 기대 이상의 이익을 내고 있지만 업황 사이클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미래를 보고 기업과 국가는 과감히 투자를 하되 호황 이후는 상시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기금 사용 원칙을 분명히 세워야 한다. 미래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투자와 한번 시작하면 되돌리기 어려운 경상지출은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정치적 계산에 따른 지역 나눠 먹기, 선심성 사업, 현금성 지원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미래와 지방이라는 이름만 붙이면 어떤 사업이든 기금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구조가 돼서는 안 된다. 기존 재정의 체질 개선도 시급하다. 정부가 내년에 50조원 규모의 지출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모든 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고 밝힌 것은 평가할 만하다. 저성과 사업은 감액하고 폐지 사업의 예산은 전액 삭감하겠다는 원칙도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 국가채무 관리 역시 소홀히 할 수 없다. 정부는 내년부터 재정수지와 국가채무가 개선될 것이라고 자신했지만 낙관적인 세수 전망만으로 재정건전성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추가 세수의 일부는 국가채무를 줄이고 재정 여력을 확충하는 데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호황기에 곳간을 채워야 불황이나 국가적 위기가 닥쳤을 때 재정을 과감하게 투입할 수 있다. 선제적으로 빚을 줄이는 것이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 있는 자세다. 이 대통령은 "지금 논의하는 재정의 방향이 대한민국의 20년, 30년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정부는 원칙 있는 투자와 철저한 재정 규율로 국가 도약의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

[사설] 상법 개정 공과 따져 경영 걸림돌 걷어내야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를 골자로 한 1차 상법 개정안이 시행된 지 1년이 지났다. 대한상공회의소가 도입 효과를 조사한 결과, 상장기업 10곳 중 8곳이 이사회 운영방식을 바꾼 것으로 나타났다. 법무·준법팀 검토 절차를 신설하고 이사회 의사록을 상세히 기록하는 등 제도가 안착되는 분위기다. 도입 당시 기업경영에 미칠 장단점을 놓고 무수한 갑론을박이 벌어진 것을 감안하면 비교적 소프트랜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개정 상법 규정이 기업경영에 미치는 영향을 냉철하게 중간점검을 할 필요가 있다. 우선, 형식적인 제도 개선만 이뤄진 건 아닌지 현장의 어려움 여부를 짚어봐야 한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의사결정의 책임성과 지배구조 투명성이 높아졌다는 응답이 나온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응답 기업의 과반(53.7%)은 주주대표소송과 손해배상 청구 등 소송 우려가 커졌다고 답했다. 또 21.7%는 법적 검토 강화로 투자나 사업재편 같은 주요 의사결정이 지연되거나 보류·취소된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신사업·인수합병 관련 사안이 30.8%로 가장 많았다는 대목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안이다. 이사회가 절차적으로는 투명해졌을지 몰라도 정작 기업이 새로운 사업 기회 앞에서 머뭇거려야 하는 일이 심화된 건 아닌가 우려스럽다. 지배구조를 개선하려는 목적은 주주 이익 보호와 기업의 경영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제도가 오히려 경영을 위축시키는 견제와 감시로 작동하는 건 아닌가 의문이 든다. 투명성은 높아졌으나 경영의 역동성이 떨어진다면 그 원인을 점검해봐야 한다. 상법 개정안 시행에 따른 기업의 비용 부담이나 대응도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감당하는 부담은 매우 차이가 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대기업이야 전담 조직과 예산으로 대응할 여력이 되지만, 인력과 자원이 부족한 중소 상장사는 강화된 이사의 충실의무와 소송 부담이 훨씬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정책 당국은 상법 개정안 시행 이후 기업들의 고충을 경청하되 중소기업의 애로사항을 더욱 각별히 챙겨야 할 것이다. 1차 상법 개정안 시행 외에 또 다른 제도 시행도 임박했다. 내년 1월부터 전자주주총회 의무화와 독립이사 비율 확대가 시행된다. 그런데 전자주총 대상 기업 중 운영체계 구축을 마친 곳은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독립이사 후보 선정을 진행 중인 기업도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런 제도의 시행일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기업들이 서둘러 준비하는 데 큰 어려움이 예상된다. 시행 이후 우왕좌왕할 게 아니라 지금부터 예상되는 부작용을 선제적으로 점검하고 지원책을 마련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상법 개정안을 도입한 취지는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만들어 장기적으로 기업과 주주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정부는 철저한 중간점검에 나서길 바란다.

[강남視角] '답정너' 아닌 진짜 토론회를

전국이 폭염으로 고통받는 가운데 한쪽에서는 '한파'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있다. 당장 '살 집' 마련을 위해 돈이 필요하지만 은행이 빗장을 걸어 잠그면서 '대출 한파'에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다. 지난해 6·27 대책을 시작으로 10·15 대책, 서울과 수도권의 규제지역 확대까지 고강도 대출규제가 연달아 나오면서 주택담보대출은 최대한도 6억원, 담보인정비율(LTV)은 40%로 묶인 상태다. 여기에 최근 금융당국의 대출총량 관리로 은행들이 자체적으로 대출 문턱을 한 단계 더 높이고 있다. 신한은행과 하나은행이 대출모집인을 통한 접수를 중단하는 방식으로 가계대출 조이기에 나섰다. KB국민은행은 지난 10일부터 대출한도를 6억원에서 3억원으로 축소하는 전례 없는 초강수를 뒀다. 20년 가까이 전셋집을 옮겨다닌 40대 A씨는 "이제 겨우 전세를 졸업하나 했는데 대출 계획이 꼬이고 있다. 이 와중에도 집값은 계속 오르고 있어 아내의 바람과 달리 눈높이를 낮춰가는 중"이라고 했다. 지난 9일 기준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776조원에 육박한다. 지난달 말과 비교하면 불과 7영업일 만에 1조원이 넘게 늘었다. 무엇보다 올해 초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연간 가계대출 증가액 목표치(약 4조3400억원)를 이미 80% 이상 채웠다. 일부 시중은행은 목표치를 넘어섰고, 특히 B은행은 목표치의 1.3배 수준으로 불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 같은 증가세라면 한 달 안에 모든 은행이 연간 목표치를 초과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연간 목표치를 초과하는 은행은 '내년 관리 목표에서 초과분을 차감하는' 불이익을 받게 된다. 은행들 입장에선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하반기 '대출 절벽' '대출 빙하기'가 현실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하지만 획일적으로, 전방위적으로 대출을 옥죄면 청년과 중산층 실수요자들의 내집마련을 위한 자금조달 창구까지 막힐 수밖에 없다. 현재 서울의 아파트 평균 가격이 13억원 수준이다. 누구든 현금을 10억원 가까이 쥐고 있어야 내집마련이 가능한 셈이다. 정부가 부동산 관련 공개토론회를 연달아 개최한다. 14일 공급, 15일 금융에 이어 16일에는 세금을 주제로 각각 토론회를 열 예정이다. 오는 23일 이재명 대통령이 부동산 대토론회를 직접 주재하며 여러 의견을 듣기로 했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정부가 정답을 다 알고 있다고 여기지 않겠다" "정부가 생각지 못한 것을 국민들이 짚어주면 듣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급증하는 가계부채를 엄격하게 관리해야 하는 것은 맞다. 지난해 말 기준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89.0%로 추정된다. 세계 최고 수준이던 2021년 말(98.7%)보다는 낮아졌지만 주담대 수요가 높아 개선세가 더디다는 평가다. 하지만 대출규제만으로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킬 수 없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얼마간은 집값을 붙잡을 수 있어도 그 효과가 오래 가지는 못한다. 이는 과거 사례를 봐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역대 가장 강력한 규제 중 하나로 평가받는 지난 2018년의 9·13 대책이 그랬다. 고강도 대출규제 등을 포함하면서 급등하던 부동산 시장을 진정시키는 효과를 거뒀다. 하지만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부동산 가격은 다시 상승세로 돌아서고 말았다. "대출규제는 집을 살 수 있는 사람을 바꾸는 것뿐, 집값의 방향을 바꾸지는 못한다"고 하는 이유다. 결국 (김용범 실장의 언급대로) '닥치고 공급'이 나와야 하고, 정교한 세제가 함께 균형을 이뤄야 한다. 그래서 절박한 심정으로 여전히 심상치 않은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킬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이번 토론회가 '답정너'가 아니길 바란다. [email protected] 윤경현 금융부장·마켓부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