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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로봇 개발도 수소차 충전도, 규제 대못 왜 못 뽑나

한국경영자총협회가 21일 정부에 건의한 112건의 규제개선 과제는 기술과 제도 사이 간극이 얼마나 벌어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현재 연구개발용 로봇은 규제특례를 받지 않으면 사람의 얼굴과 음성을 모자이크하거나 변조한 데이터만 활용해야 한다. 원본 데이터는 쓰지 못한다. 정비 과정에서 초저압 상태의 수소차는 충전기준이 없어 충전 자체가 어렵다. 세계는 피지컬 인공지능(AI)과 수소경제 선점을 위해 속도전을 치르는데 우리는 현실에 맞지 않는 규정으로 제자리 뛰기만 해야 할 판이다. 로봇이 가공된 자료에 의존하면 정확성에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미세한 움직임과 돌발행동, 위험신호를 원본 데이터로 정확히 학습할 수 있어야 기술의 벽을 넘을 것이다. 이런 경직된 기준을 고수하다가는 기술개발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개인정보와 사생활 보호라는 규제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로봇의 연구개발 단계에서 원본 활용을 일률적으로 막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안일한 관리방식이다. 자율주행차를 둘러싸고도 같은 비판이 있었다. 정부는 결국 보안과 목적 외 이용 금지 등을 전제로 원본 영상 제한 규제를 풀었다. 그런데 로봇에는 여전히 엄격한 기준을 강제한다. 형평성도 융통성도 없다. 수소차 관련 규제도 마찬가지다. 초저압 수소차 충전기준뿐 아니라 이동형 수소충전소 배치기준도 불분명하다. 새 충전소의 안전성능 평가 중복 문제도 계속 제기된다. 수소를 고압으로 다루는 만큼 엄격한 안전관리는 필요하다. 하지만 위험을 이유로 모호한 기준만 제시한 채 생산과 정비를 막는 것은 전형적인 탁상행정이다. 산업 숨통을 죄는 규제는 곳곳에 널려있다. 경총에 따르면 해외 공장을 철수하고 국내로 돌아오려는 기업이 지나치게 까다로운 요건 때문에 지원 대상에서 탈락한 사례도 많다. 노후 산업단지의 빈 땅에 창고를 지을 수 없고 운수업 입주도 제한을 받는다. 물류센터가 폐스티로폼을 현장에서 분쇄·압축하는 것도 규정에 어긋난다. 이런 규제가 쌓이면 투자비용이 더 들고 사업 불확실성이 커져 기업은 떠날 것이다. 노동규제도 현실에 맞게 손봐야 한다. 장기 저성과자 해고 기준과 절차가 불명확해 기업이 인력 운용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나왔다. 근로자 보호는 필요하지만 유연성이 없으면 성실한 근로자와 기업 모두 피해를 본다. 20년 가까이 바뀌지 않은 파견허용 업무도 산업구조 변화에 맞게 재검토해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규제혁신 로드맵과 규제샌드박스가 발표됐다. '선허용·후규제' 원칙도 수없이 강조했다. 그러나 현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 주말 경제단체 수장들이 제주도에서 낡은 규제 혁파에 한목소리를 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은 신산업 초격차 경쟁의 시대다. 미국과 중국은 AI와 로봇 인프라에 막대한 자본과 인재를 쏟아붓고 있다. 기술경쟁의 승패는 누가 더 빨리 실험하고 사업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기술력이 아니라 수십년 전 만들어진 규정과 안일한 행정 때문에 경쟁에서 뒤처진다면 누구 책임인가. 보호를 명분으로 기술 활용을 제한하는 방식은 산업과 경제 발전을 가로막을 것이다. 연구개발 단계에선 폭넓게 허용하되 상용화 단계에서 책임 기준을 강화하는 것이 바른 방향이다. 특히 신산업 분야의 규제 대못을 빨리 뽑아야 한다.

[사설] 국립외교원까지 줄 잇는 해킹, 뻥 뚫린 사이버 안보

정부서울청사 별관의 국립외교원 온라인교육시스템 서버가 해킹돼 전현직 외교관과 주재원 등의 개인정보 1만건이 유출됐다. 북한 해킹조직의 소행 가능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해외 파견 정보요원의 신원 노출 우려까지 나온다. 단순한 개인정보 유출 사고를 넘어 국가안보와 직결된 재난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문제의 서버가 외교부 본부 안에 있으면서도 정기 보안점검 대상에서 제외돼 보안 사각지대를 자초했다는 점이다. 관계기관이 통보할 때까지 10개월간 해커가 제집 드나들듯 침투했는데도 몰랐다. 지난 2월 긴급 차단하고도 5개월 뒤에야 공개했다. 늑장대응에 뒷북 공개다. 퇴직자나 원부처 복귀자의 정보를 파기하지 않고 방치해 피해를 키웠다는 지적도 나온다. 있어서는 안 될 정부기관 보안 사고가 최근 잇따르고 있다. 정부 창업지원 프로그램 '모두의 창업' 합격자 5000명의 개인정보와 창업 아이디어가 유출돼 당시 주무 장관이 직접 사과했다. 서울시 공공자전거 '따릉이' 이용자 462만명의 개인정보도 유출됐다. 전문가들은 공공기관에 대한 제재가 민간보다 약하기 때문에 사고가 줄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민간기업도 마찬가지다. 롯데카드를 비롯해 KT·SK텔레콤 등 통신사, 쿠팡과 티빙까지 개인정보 침해 사고가 이어졌다. 쿠팡(3370만명), SK텔레콤(2324만명) 등 피해 규모도 커지고 있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예스24, GS리테일, 넷마블 등도 조사 중이다. 보안 사고가 잦아 국민은 기업이 공지하지 않으면 자신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국민의 일상이 사이버 공격에 노출된 셈이다. 보안 사고가 반복되는 것은 제재가 솜방망이 수준이기 때문이다. 개인정보 침해 사고가 두 건 이상 발생한 기관의 절반 가까이가 과징금 대신 시정권고나 과태료 처분에 그쳤다고 한다. 과징금은 과태료보다 훨씬 강력한 제재다. 반복 사고에도 처벌이 약해진 사례가 적지 않다. 정부도 과징금 기준 상한을 높이고 집단소송제를 추진하는 등 제도 보완에 나서고 있다. 쿠팡에는 역대 최대인 6200억원대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보안을 투자 아닌 비용으로 보는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근본적인 예방은 어렵다. 보안 사고는 화재나 자연재해와 같다. 한 번 터지면 피해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고 기업 신뢰에도 치명적이다. 사고 때마다 대책을 외치지만 곧 흐지부지된다. 투자계획을 세울 때마다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일쑤다. 사이버 공격은 이제 안보와 경제를 동시에 위협하는 국가재난이다. 사이버 안보 체계를 전면 재정비해야 한다. 국가 차원의 컨트롤타워를 구축하고 공공과 민간을 아우르는 대응 체계를 갖춰야 한다. 개인정보 유출을 은폐하거나 관리에 소홀한 기관과 기업에는 과징금을 대폭 올리고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야 한다. 무엇보다 사이버 보안을 비용이 아니라 국가 안보와 생존을 위한 필수 투자로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반복적인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기자수첩] 주식 광기의 시대

"세입자 전세보증금으로 투자했다가 물렸습니다. 전세 만기가 다가오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무리해서 투자하는 사례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전세보증금을 비롯해 결혼자금, 부모의 노후자금 등 눈앞에 있는 돈을 모두 주식에 쏟아 넣는 분위기다. '빚투'(빚내서 투자)를 넘어 지켜야 하는 돈까지 건드리는 그야말로 광기의 투자가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주식투자 열기는 점차 광기로 변질되고 있다. 상승세를 이어오던 코스피가 지난 3월 중동전쟁 여파로 19.08% 하락했지만, 4월(30.61%)에 이어 5월(28.45%)에도 급등하자 마치 주식이 '돈복사' 수준으로 자산을 증식시킨다는 믿음이 생기면서다. 하지만 지난달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전쟁 등 뚜렷한 외부요인이 없었음에도 하루에 8~9% 급등락을 오가는 등 널뛰기 장세가 펼쳐졌다. 증권가에선 극심한 변동장에서 '관망'이 필요하다는 조언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 급등락장에선 투매나 추격매수를 하기보다 추이를 지켜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은 변동성을 오히려 기회로 삼았다. 기존에 증시에 진입하지 못한 투자자들은 '포모(소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심리로 인해, 기존 투자자들은 고점보다 낮아진 수익률로 인해 더 공격적인 투자에 나섰다. 지난달 개인은 코스피 시장에서 42조4005억원을 대규모 순매수했다. '빚투' 역시 빠르게 치솟았다. 신용거래융자 잔고는 지난달 24일 38조6328억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고, 위탁매매 미수금은 지난달 25일 2조688억원으로 사상 최대치인 2조1488억원(3월 5일)에 근접했다. 하지만 이달 증시는 그야말로 현기증 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달 들어 이날까지 14거래일 동안 코스피·코스닥 시장에 사이드카나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되지 않은 날은 3거래일뿐이다. 몇 달 전만 해도 높은 수익으로 웃던 개미들 사이에서 어느새 곡소리가 나올 정도다. 투자자들도 본인의 심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돈을 좇는 데 치중해 필요한 돈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빚을 내고 있는지 말이다. 가치투자의 창시자이자 워런 버핏의 스승인 벤저민 그레이엄은 "투자란 철저한 분석을 기반으로 원금의 안전성과 적절한 수익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종목에 대한 분석 없이 무리하게 뛰어드는 것은 투자가 아닌 투기에 불과하다. [email protected] 서민지 기자

[강남視角] AI와 결합한 개발원조

한국전쟁이 끝나고 폐허 된 땅에 처음 도착한 원조는 밀가루 포대와 의약품이었다. 그다음 초토화된 국토에 도로와 항만, 발전소와 학교가 들어선다. 고마운 손길 덕분에 지금의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으로 발돋움했다. 우리는 그 고마운 마음을 잃지 않았다. 원조 받던 나라가 201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 회원국으로 전환됐다. 새마을운동은 해외 원조의 대명사가 된 지 오래다. 그런데 개발원조도 경쟁력이 요구된다. 개발원조가 시대별로 바뀐 과정을 우물 이야기로 풀어보자. 오염된 식수원으로 고통받는 마을이 있다. 1990년대엔 엔지니어들이 지질을 조사하고 중장비로 깊은 우물을 판다. 시멘트로 둘레를 보강하고 펌프를 설치한 뒤 준공식을 연다. 그러나 5년 뒤 펌프가 고장 나면 부품을 구할 데가 없고 고칠 기술자도 없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3㎞ 떨어진 강으로 물을 길으러 간다. 돈과 시간을 들인 우물은 그렇게 폐허가 된다. 2010년대라면 여기에 사물인터넷(IoT) 센서를 단다. 수질과 수위, 펌프 작동 상태가 실시간으로 보건소 태블릿에 전송되고 고장 징후가 감지되면 문자 알림이 간다. 마을 청년 몇 명은 기본적인 유지·보수 교육을 받아 스스로 고칠 수 있다. 그러나 건기가 되면 수위가 급격히 낮아지고, 우기가 되면 지표면의 오염물질이 지하수로 스며드는 걸 센서는 알려줄 뿐 막지는 못한다. 문제가 벌어진 뒤에야 반응할 수 있을 뿐이다. 2026년 현재는 어떨까. 인공지능(AI)이 5년 치 수위 데이터와 20년 치 기상 데이터, 인근 100개 마을의 지하수 데이터를 통합 분석한다. 석 달 뒤의 가뭄을 미리 예측해 물 사용 조절을 권고하고, 어느 방목지에서 가축 배설물이 비와 함께 흘러드는지 오염경로를 짚어내 사전에 막는다. 이 마을의 데이터는 인근 50개 마을과 공유되면서 하나의 통합 물 관리 시스템으로 거듭난다. 우물 하나를 고쳐주는 원조가 아니라, 지역 전체가 스스로 위기를 예측하고 대응하는 네트워크를 놓아주는 원조다. 이 가상의 사례는 'AI 휴먼 코드'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개발원조 방식이 전통적 물자 제공에서 디지털 그리고 AI로 진화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우물의 사례에서 보듯 한국의 개발원조 전략도 AI를 중심에 둔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개발원조에 AI를 접목하면 명분과 실용을 갖추기 좋다. 전통적 개발원조 방식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개발원조는 상대국을 돕는다는 취지를 살리면서 국내 수출을 늘리는 두 가지 목표를 추구한다. 그런데 지원국이 실익만 앞세우면 수혜국으로부터 원조를 빙자한 장사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반대로 무상원조 비중이 커지면 세금 낭비라는 국내 여론의 비난에 직면한다. 게다가 개발원조 경쟁이 무척 치열하다. 중국은 도로와 항만 건설 같은 일대일로 정책에서 5G와 스마트시티 등 디지털 실크로드로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일본도 AI를 앞세워 아세안 지역 내에서 입지를 넓히고 있다. AI를 개발원조의 새 축으로 삼는 전략은 한국에 안성맞춤이다. 정부가 내건 'AI 3강'은 국가의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장기 전략이다. 국내에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을 많이 짓고 연구인력을 육성하더라도 초강대국들의 물량공세를 넘어서기 버겁다. 자본과 시장 규모에서 압도적인 미국과 중국을 같은 방식으로 따라가다가는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지는 격이 될 수 있다. 땅도 자원도 적은 한국은 연대와 네트워크로 살길을 찾아야 한다. 세계에는 데이터센터와 전문인력, 학습데이터가 부족해 AI 전환의 출발선에도 서지 못한 나라가 수두룩하다. 산업과 행정, 의료와 교육에 AI를 구축하는 개발원조는 공동성장의 플랫폼이 될 수 있다. 수원국은 새로운 발전역량을 얻고, 한국 기업은 기술 실증과 시장을 넓히는 기회다. 한국이 개발원조와 AI 전략을 결합해야 하는 이유다. [email protected]

[테헤란로] 한계 봉착한 대출 총량규제

"주택 가격이 안정화된다면 서민·중산층에서 주택 구입이 원활해지고, 서민 주거안정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10·15 부동산대책 발표 당시 신진창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현 사무처장)이 '강도 높은 대출규제가 서민과 중산층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내놓은 답이다. 같은 해 6·27 부동산대책으로 '주택담보대출 6억원' 한도 제한을 건 금융위가 주택 가격에 따라 6억·4억·2억원의 정밀한 대출한도 규제에 나서자 15억원 미만의 아파트 가격이 더 오르면서 실수요자에게 피해가 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졌다. 실제 대출 총량규제를 대표하는 6·27 대책 이후 1년이 지나고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은(KB부동산 기준) 15억8284만원으로 1년 만에 11.8%(1억6765억원) 상승했다. 강도 높은 대출규제 정책을 내놓더라도 소위 '약발'이 오래가지 못한 결과다. 금융위는 올해는 가계대출 증가율을 전년 대비 1.5%로 억제한 가계대출 총량규제 정책을 한층 더 강화했다. 부동산과 금융을 '절연'하겠다고 선언했고, 하반기 금융위 업무보고 전 기자들과 가진 사전브리핑에서도 '1.5%'를 조정할 수 없다고 했다. 문제는 이 같은 총량규제가 한계에 봉착했다는 점이다. 금융위는 올 초부터 월별·분기별 관리체계를 도입했고, 한도를 초과한 금융회사는 금융당국이 각별히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5대 시중은행 기준으로 가계대출 증가액 목표치가 이미 80%에 도달하면서 한겨울의 대출절벽 현상이 반년이나 앞당겨졌다. KB국민은행이 주담대 한도를 3억원으로 줄이자 풍선효과를 우려한 다른 은행들도 덩달아 대출문턱을 높이거나 문을 닫으면서 대출이 막힌 실수요자들은 은행 지점을 돌기 시작했다. 사실 올해 정책성 대출을 제외한 주담대 잔액은 거의 늘지 않았다. 오히려 가계대출 증가세를 주도한 것은 신용대출이다. 주식투자 열풍이 불면서 이른바 '빚투(빚내서 투자)'에 나선 영향이다. 가계대출 총량규제는 주담대와 신용대출, 전세대출 등을 합산한다. 즉 신용대출 증가세가 지속되면 주담대로 내줄 총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주담대 외에 급하게 생활안정자금이 필요한 서민이나 중산층의 경우에도 은행들의 대출 셧다운이 본격화되면 당장 피해를 입게 된다. 대출규제에서 차별받고 있다는 청년층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다. 결국은 기존 양적인 규제방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email protected] 박소현 기자

[사설] 삼성 비만치료 시장 진출, 바이오를 신성장축으로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비만·당뇨 치료제 핵심 원료인 펩타이드 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시장에 본격 진출한다. 기존 항체의약품 중심 사업을 최근 수요가 폭증하는 펩타이드로 확대해 차세대 바이오 의약품 전반을 아우르는 종합 바이오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전략이다. 글로벌 의약품 시장의 게임체인저로 떠오른 비만 치료제 공급망을 선점해 '제2의 반도체 신화'를 이끌 새 성장동력을 마련한다는 의미가 크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글로벌 펩타이드 CDMO 기업인 폴리펩타이드 그룹 인수계약을 체결했다고 20일 밝혔다. 인수금액은 약 2조7000억원으로 국내 제약·바이오업계 인수합병(M&A) 사상 최대 규모다. 회사는 대주주 지분 인수와 공개매수를 통해 올해 말까지 지분 100%를 취득, 인수를 최종 마무리할 계획이다. 펩타이드는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이 짧은 사슬 형태로 연결된 물질로 체내에서 호르몬과 신호 전달 역할을 한다. 이를 활용한 대표적 의약품이 위고비와 마운자로 등 전 세계를 휩쓴 GLP-1 계열 비만·당뇨 치료제다. 폭발적인 수요로 펩타이드 원료와 생산시설은 만성적인 공급 부족을 겪고 있다. 글로벌 제약사들은 특히 비만 치료를 넘어 항암제와 면역질환, 알츠하이머 등 뇌질환 치료제로까지 적용범위를 넓히고 있어 미래 성장동력으로 손색이 없다. 단순한 몸집 불리기가 아니라 항체의약품 위탁생산 세계 1위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 먹거리를 향한 과감한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폴리펩타이드 그룹은 1996년 글로벌 제약사 페링의 펩타이드 사업부에서 분사한 기업으로, 1000건 이상의 펩타이드 의약품 개발·생산 실적을 보유하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이번 인수로 미국 등 5개국 6개 생산거점과 핵심기술, 1500여명의 전문인력을 확보하게 된다. 기존 고객사와 맺은 계약도 승계해 인수 직후부터 안정적인 매출 기반을 이어받는다.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세계 비만 치료제 시장이 2035년 약 200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다. 글로벌 펩타이드 CDMO 시장 역시 올해 8조2000억원에서 2035년 43조4000억원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M&A가 삼성바이오로직스만의 성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인수한 펩타이드 기술력에 삼성의 대규모 생산역량과 신속한 의사결정 능력을 결합해 글로벌 빅파마가 찾는 초격차 경쟁력을 갖춰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나아가 국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과 바이오 벤처가 함께 성장하는 생태계를 조성해 K바이오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전기가 돼야 한다. 정부도 이를 계기로 바이오를 국가 첨단전략산업에 걸맞게 육성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 등 경쟁국에 뒤처지지 않도록 인프라 확충과 규제개선 등 정책 지원에 나설 필요가 있다. 반도체가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것처럼 이번 인수가 일회성 확장에 그치지 않고 K바이오를 한국 경제의 또 다른 성장축으로 키우는 출발점이 되도록 해야 한다.

[사설] "산업전환 위해 규제완화 시급" 재계의 절박한 호소

산업 대전환을 위해 규제완화가 시급하다고 경제단체장들이 재차 강조하고 나섰다. 류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은 "구글, 애플, 메타, 엔비디아, 테슬라, 넷플릭스, 오픈AI는 출생지가 모두 미국 캘리포니아로, '안 되는 것 빼고는 다 되는' 제도에서 성장했다"고 말했다. 최근 열린 한경협 경영자 제주하계포럼의 기자간담회에서다. 규제완화 요구와 주장은 국민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새삼스럽지도 않은 말이다. 그런데도 계속 나오는 것은 정부 당국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역대 어느 정권에서나 대통령을 포함한 정책 담당자들은 류 회장과 같은 발언을 해 왔지만 정작 이뤄진 것은 거의 없다. 규제완화가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버리는 것은 결국 법적인 경직성과 책임을 두려워한 공직자들의 몸사림이 합쳐진 결과다. 규제는 입법권자나 행정부 공무원들이 가진 통제 권한으로 인식해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다. 재계에서 아무리 부르짖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전임 정부에 이어 이재명 정부 또한 규제완화를 강조해왔지만 성과는 거의 없다. 대통령이 나서고 지시해도 정치권이 움직이지 않고 실무 책임자들이 의지가 부족하니 그런 것이다. 쓸데없는 기구를 정리하고 규제완화위원회나 담당 청와대 수석을 신설해서라도 밀고 나가야 될까 말까 할 텐데 그런 움직임도 없다. 도리어 입법을 통한 각종 규제들이 더 나오고 있다. 류 회장은 "미국식 네거티브 규제를 전면 도입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신기술과 신산업, 특별구역 등 범위를 특정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더 늦기 전에 규제 시스템을 재설계해 과거의 잣대로 미래 산업을 제한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정말 이 요구가 정책적으로 실현되기를 바란다. 류 회장의 언급은 일정 분야에서 제한적으로나마 규제를 풀어주는 '규제 샌드박스'를 의미한다. 미국처럼 법률이나 규정으로 금지된 것이 아니면 모두 허용하는 네거티브 방식이 아니더라도 규제 없이 자유롭게 기업들이 활동할 공간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물론 규제 샌드박스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주요국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는 현재 첨단기술과 미래산업을 선점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기업이나 청년 창업자들이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해보려고 해도 각종 규제에 가로막혀 포기하고 만다면 그 책임은 정치권과 행정부가 져야 한다. 대표적인 예가 반도체 등 특정 산업에서만이라도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를 인정해 달라는 재계의 요구가 묵살되고 있는 것이다. 제주에서 별도로 포럼을 연 대한상의 최태원 회장은 "사업주는 52시간제를 지켜야겠지만, 더 하고자 하는 근로자가 있다면 자유의지를 존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쟁국들은 24시간 연구실에 불을 밝히며 개발에 몰두하는데 우리만 정해진 노동시간에 얽매여 있으면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원하는 사람만 하겠다는데도 반대하는 쪽은 막무가내다. 노동권 보호라는 경직된 사고로 어떤 융통성도 발휘하지 못하는 실정인 것이다. 다른 규제들도 마찬가지 상황일 것이다. 이래서야 무슨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나. 행정부보다 국회의 책임이 더욱 크다. 그동안 재계에서 수없이 요구한 규제혁신안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책임을 방기하지 말기 바란다.

[강남視角] 선택적 언론 알레르기

중국 초나라의 시인 굴원은 '어부사(漁父辭)'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세상 사람 모두가 흐린데 나 홀로 맑고, 뭇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다(擧世皆濁我獨淸 衆人皆醉我獨醒)." 자신만이 진실을 보고 있고 세상은 눈멀었다는 이 탄식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문장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화법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유일한 진실의 목격자로 규정하는 순간, 다른 모든 이의 판단은 자동으로 '취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외신기자클럽 초청 행사에 참석한 민희진 전 어도어 대표의 발언에서 이 오래된 화법이 겹쳐 보였다. 신규 레이블 'OOAK Records'를 설립해 새 보이그룹을 준비 중인 그는 이날 새 사업에 대한 기대감을 밝히면서도 어도어와의 분쟁 관련 질문에는 국내 언론을 겨냥한 불만을 앞세웠다. 그는 "외신기자들로만 구성된 자리에서 발언하는 것은 처음"이라며 자신이 "언론 알레르기가 있다"고 털어놨다. 이어 "지금까지 나온 모든 언론 보도가 일방적"이라며 "현재까지 나온 보도는 99.9대 0.1 수준으로 불균형한데,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답변할 수 있겠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이번 분쟁의 흐름을 살펴보면 민 전 대표의 항변이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지점들이 드러난다. 뉴진스 다섯 멤버는 2024년 11월 어도어와의 전속계약 해지를 선언하고 'NJZ'라는 이름으로 독자 활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본안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멤버들의 독자 활동을 금지해달라는 어도어의 가처분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이면서 활동이 중단됐다. 2025년 11월 혜인·해린·하니는 어도어로 복귀했고, 민지의 계약상 지위는 여전히 논의 중이다. 어도어는 같은 해 12월 다니엘과의 전속계약을 해지했으며, 다니엘의 전속계약 위반 의혹과 관련해 다니엘과 그의 모친, 민희진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진행 중이다. 그러나 정작 주요 쟁점과 결정적 증거 앞에서 선택적으로 침묵해온 쪽은 민 전 대표 자신이라는 지적이 많다. 어도어와의 전속계약이 유효하다는 법원의 가처분 결정이 나온 뒤에도 'NJZ'라는 이름으로 홍콩 공연이 강행됐고, 그 배후에 민 전 대표가 있었다는 정황, 뉴진스의 중국 이중계약 체결 배후에도 그가 있었다는 정황이 나왔다. 어도어는 또한 다니엘이 전속계약이 법적으로 유효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공연하기 위해 중국계 행사업체와 체결한 이른바 '이중계약'을 숨겼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민 전 대표는 납득할 만한 해명을 내놓지 않았다. 주목할 부분은 이번 외신 간담회에서 보인 화법의 온도차다. 민 전 대표는 다니엘·뉴진스 관련 질문에는 "내가 언급할 사안이 아니다" "직접 답할 경우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즉답을 피했다. 뉴진스 컴백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도 "정확한 사실관계를 알지 못해 의견을 말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정작 자신에게 불리할 수 있는 핵심 쟁점에는 답변을 유보한 것이다. 또 그는 호소의 무대로 국내가 아닌 외신을 택했다. 그는 "언론 알레르기가 있다"면서도 정작 자신의 억울함은 외신기자 앞에서 풀어놓았다. 국내 언론 보도가 '일방적'이라고 주장하려면 그 보도들을 상대로 직접 반박하고 해명하는 것이 순리다. 그런데도 정작 문제 삼는 상대 앞에서는 침묵하고, 사안의 전후 맥락을 상대적으로 충분히 접하지 못한 외신 앞에서만 억울함을 토로하는 모습은 여론전의 무대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옮기려는 전략으로 비칠 수 있다. 실질적인 반박이 필요한 곳은 외신기자클럽이 아니라 법정과 국내 언론이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K팝 산업의 유명 프로듀서라면, 언론의 공정성을 요구하기에 앞서 제기된 물증과 의혹에 대해 직접 설명할 책임이 있다. 진실은 법정에서 증거로 가려진다. 외신을 상대로 한 억울함 호소가 아니라 제기된 의혹 하나하나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야말로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이다.

[노동일 칼럼] 용인의 성공이 광주의 미래다

대만 TSMC의 일본 구마모토 제1공장은 2021년 착공 후 3년 만인 2024년 말부터 가동 중이다. 당초 TSMC는 '최첨단 공정은 대만, 구형(레거시) 공정은 해외'라는 분업 원칙을 가졌다. 구마모토 1공장이 12~28나노급의 기술로 출발한 이유이다. 하지만 1공장의 성공은 TSMC의 글로벌 전략을 수정하게 만들었고, 2공장 투자의 결정적 발판이 되었다. 국내외 언론이 TSMC 구마모토 1공장 성공 비결로 첫손에 꼽는 건 일본 정부의 '초법적·원스톱' 지원이다. 일본 정부는 1공장에 4760억엔(약 4조2000억원)의 보조금을 즉각 집행했다. 통상 1~2년 걸리는 용도변경을 단 4개월 만에 처리했다. 구마모토현은 전담부서를 통해 환경영향평가 등을 일괄 해결하기도 했다. 반도체 제조에 최적화된 유틸리티(물과 전력)도 중요했다. 아소산의 풍부한 지하수와 규슈 원전 덕분에 대만 본사가 겪던 고질적인 전력 및 가뭄 리스크를 탈피할 수 있었다. 현지 건설사 및 근로자들이 주말과 밤낮 없는 24시간 교대공사로 공기를 획기적으로 단축한 것도 큰 몫을 했다 1공장 성공을 확인한 TSMC는 곧바로 제2공장 건설을 확정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생산 반도체의 수준이다. 2공장은 6~7나노급 공정으로 계획되었으나 1공장의 안착과 글로벌 반도체 수요에 힘입어 최첨단 3나노(㎚) 공정으로 설계가 변경되었다. TSMC는 대만 중심주의를 깨고 구마모토를 글로벌 최첨단 AI 반도체(3나노)의 핵심 해외 거점으로 전환하며 제2공장 가동(2027년 말 목표)을 향해 속도를 내고 있다. 광주(전남광주) 반도체 공장 건설 문제를 두고 논란과 의구심이 여전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삼전·닉스)가 추진 중인 '용인(평택 포함) 반도체 메가클러스터'의 물량이나 인프라를 광주로 이전·분산하려는 것 아니냐는 불안한 시선도 있다. '발표용'이나 '여당 전당대회용'이라는 말도 나온다. 해법은 '용인의 완벽한 성공'이 선행되는 것이다. '구마모토 TSMC'가 증명한 성공 방정식이다. 구마모토 TSMC 사례를 대입하면 용인은 구마모토 1공장이고, 광주는 제2공장이다. 기업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허브에서 먼저 성공 모델을 만들어내야만, 축적된 역량이 비로소 광주 등 다른 지역으로 확장될 수 있다. 첫 단추인 용인이 흔들리면, 두 번째 단추인 광주는 끼워볼 기회조차 사라진다. 구마모토 성공의 핵심 요인은 일본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초법적·원스톱 지원'이었다. 광주는 말 그대로 '초법적·원스톱 지원'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달 29일 발표, 지난 6일 광주 군공항 부지 결정, 9일 토지거래허가구역 지정, 영광 한빛 원전 1호기 재가동 및 신규 원전 검토 소식 등 숨 가쁠 지경이다. 군공항 이전, 원전 재가동, 댐 건설 등이 가능한지, 얼마나 걸릴지 예측불가능이지만 어쨌든 현란한 속도전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헬기로 군공항을 시찰하고 민관합동점검회의를 주재하는 퍼포먼스도 선보였다. 여권의 신성불가침이던 '주52시간 규제' 완화를 검토한다는 소식까지 나왔다. 반면 용인 클러스터는 인허가와 인프라 확보 문제로 수년째 발목이 잡혀 있다. 부지, 용수, 전력 등 모든 여건이 지체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추미애 경기지사는 '반도체 초격차 전략회의'를 주재하고 인허가 기간 대폭 단축, 전력·용수공급망 책임완공 등을 공언했다. 환영할 일이지만 그만큼 지금까지의 추진 경과가 지지부진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관련 인프라 구축은 기업이나 지자체의 노력만으로는 힘에 부치는 게 현실이다. 청와대와 관련부처 전체가 나서 문제를 점검하고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 이 대통령은 용인과 광주를 순차적으로 추진하려던 기업들을 "설득하여" 동시 추진으로 바꾸도록 했다고 한다. 청와대가 앞장서 광주와 똑같은 '초법적·원스톱 지원'을 용인에 제공해야 할 당위성이 있는 셈이다. 52시간 규제 완화가 광주에만 적용되어야 할 명분도 없다. 일단 기업이 선택한 용인의 규제를 혁파하고 인프라를 속전속결로 완성한 성공 사례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다. 정부가 기업을 초고속 지원하는 '용인의 성공 경험'이 확립되어야 광주 반도체에 대한 초고속 행정 지원도 정당화될 수 있다. 지금은 한정된 국가적 자원과 에너지를 집중해 먼저 시작한 용인의 성공담을 하루빨리 만들어 내야 한다. 그래야 광주가 거대한 반도체 공급망의 한 축을 담당할 기회가 열린다. 용인의 성공은 광주 반도체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줄 발판이다. 대한민국 반도체의 초격차 유지와 지역 상생을 동시에 추진하는 길은 '선(先)용인 안착, 후(後)확산'이라는 구마모토의 교훈을 직시하는 것이다. [email protected]

[기자수첩] 민선 9기 숙제는 '먹고사니즘'

지난 1992년 미국 대선판을 흔들었던 '문제는 경제'라는 캐치프레이즈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지난달 치러진 2026년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이 격언은 고스란히 유효했다. 거대담론이나 화려한 정치적 구호는 매달 은행 계좌에서 빠져나가는 주거비와 생활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다. 표심을 결정한 것은 '먹고사니즘'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 결과는 도시란 결국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시민들의 총합이라는 사실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이달 1일부터 시작한 오세훈 서울시장의 '민선 9기' 역시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글로벌 톱3 도시(G3) 입성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내걸었지만 이를 달성할 방안은 경제 활성화와 내집 마련, 청년들의 사회참여 등으로 채워져 있다. 오 시장은 취임사부터 '삶의 질 특별시'를 강조하며 정책의 일차적 도달점을 거대 인프라가 아닌 시민의 일상에 맞췄다. "약한 고리가 먼저 무너지는 K자형 양극화를 막겠다"는 말은 곧 '먹고사니즘'이 최우선 과제로 떠오른 민생을 우선적으로 살피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서울 시민들이 체감하는 일상의 지반은 주거, 직장, 수입이라는 생존의 세 축에서 모두 흔들리고 있다. 서울 아파트는 고사하고 오피스텔 등 비아파트 입주 물량이 급감하면서 1~2인 가구 청년들의 주거비 부담은 일찌감치 임계점에 달하고 있다. 수입과 노동의 불안정성도 커졌다. 프리랜서와 플랫폼 노동자 등 고용불안정 계층은 늘어나는 반면, 고물가로 인해 실질소득은 뒷걸음쳤다. 직장인의 주머니가 닫히며 소상공인의 수입까지 줄어드는 악순환이 굴러가는 중이다. 시는 올해 총 2조7906억원 규모의 '민생경제 활력 더보탬' 패키지를 가동하며 현금흐름과 안전망 보강에 나선 상태다. 첫 정례 간부회의의 핵심 의제로는 '야간경제 활성화 방안'을 택해 '달빛야장' 확대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도시의 밤을 새로운 소비 활력의 불씨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2030년까지 청년주택 4만9000호와 유휴부지 활용 2만5000호를 더해 총 7만4000호를 공급하는 '더드림집+'도 흔들림 없이 추진한다. 다만 체감 수준의 효과를 보는 것은 아직 숙제다. 상봉먹자골목의 한 상인 역시 "야장 단속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바로 믿기는 어려웠다"며 "상인회에서 가이드라인을 주고, 실제로 야장이 무리없이 돌아가는 것을 본 뒤 효과를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오 시장이 각종 현장에서 강조한 '시민 체감 수준'이 실현될 때 수십년된 격언의 유행이 끝날 전망이다. [email protected]

[사설] 지방투자 확대 기업에 과감한 인센티브 마중물을

경제성장률 상승세와 3대 메가프로젝트 가동 등의 영향으로 기업들의 투자 의욕이 높아질 전망이다. 특히 수도권 이외 지방 투자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실제로 한국경제인협회가 매출액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6년 하반기 투자계획' 조사 결과 응답기업 4곳 중 1곳(27.4%)이 3년 내 비수도권 투자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방에 대한 기업들의 투자 유도는 수없이 추진해왔지만 성과가 그리 크지 않다. 심지어 해외로 나간 기업이 국내로 복귀할 때 각종 세제 혜택과 보조금을 쏟아부어도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 지방으로 돌아올 경우 세제혜택을 많이 주는 방식이었다. 이처럼 기업 투자를 국내로 유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방으로 가달라고 해봤자 실제 성과를 얻기 힘들다. 정부가 국내 투자를 강조하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자국 이익 중심 정책이 강화되면서 자국 내 생산시설을 짓기를 원한다. 나아가 기왕이면 수도권으로 집중된 경제의 편중현상을 바꾸려면 지방 투자가 필요하다. 기업이 만약 지방에 투자한다면 국가경쟁력 강화와 더불어 국토균형발전까지 이룰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이런 면에서 최근 기업들의 지방 투자 의지가 나아진 건 우리로선 청신호다. 문제는 기업의 의향이 실제 투자로 이어지느냐다. 기업이 지방 투자를 결정하고 이행하지 못하는 복잡한 이유들을 풀어내야 한다. 지방 신규 투자를 이끄는 가장 큰 결정 조건은 세제혜택 및 보조금 등 재정지원을 꼽을 수 있다. 그다음으로 기업들이 중요하게 보는 것은 산업 생태계와 인프라가 잘 갖춰졌느냐는 것이다. 협력업체의 구축과 물류·교통망 확충 및 전력·용수 등 인프라 확충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기업의 지방 투자를 유도하는 수단들은 모두 재정지원으로 이뤄지는 것들이다. 기업들이 스스로 지방으로 내려가겠다는 의지를 보일 때 충분한 마중물을 부어서 결정을 내리도록 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초과세수를 허용 범위 내에서 활용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할 만하다. 기업이 벌어들여 세수로 거둬들인 돈을 다시 그 기업들의 지방 투자를 자극하는 데 쓴다면 이보다 더 합리적인 선순환 구조가 어디 있겠는가. 정부는 '5극 3특' 등 행정구조 변화로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과 반도체 등 첨단산업의 지방 분산투자를 유도해 낙후된 지역경제에 새로운 성장축을 놓는다는 구상이다. 이런 청사진들이 시너지효과를 내려면 다른 기업들의 지방 투자가 원활하도록 길을 넓혀줘야 한다. 지역소멸을 극복하고 국가 경쟁력도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를 살려야 한다. 기업 4곳 중 1곳이 지방행을 저울질하는 시기를 놓치면 이만한 기회를 잡기 어렵다. 신산업 투자가 원활히 이뤄질 수 있도록 정부가 과감하게 물꼬를 터줘야 할 때다.

[사설] 美 맹추격 中 AI, 韓 반도체만으론 패권 못 잡아

중국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문샷AI가 최근 공개한 신형 모델 '키미 K3'가 세계 AI 업계를 흔들고 있다. '키미 K3'는 2조8000억개의 매개변수와 100만토큰의 문맥 처리능력을 갖춘 초대형 AI 모델이다. AI 모델 독립 평가기관인 아티피셜 애널리시스는 키미 K3의 지능지수를 57점으로 평가했다. 현존 최고 성능으로 꼽히는 앤스로픽의 '클로드 페이블 5'(60점)와 오픈AI의 'GPT-5.6 솔'(59점)을 바짝 뒤쫓는 수준이다. 미국의 고성능 반도체 제재를 견디며 성장한 중국 AI가 이제 저가경쟁을 넘어 최고 성능 경쟁에서도 미국의 턱밑까지 다가선 것이다. 전 세계가 그 파장을 주시할 수밖에 없다. 주말 세계 증시가 급락한 것도 문샷 때문이었다. 천문학적 투자비를 쏟아부은 미국 기업들이 기대만큼의 수익을 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커지면서 미국 기술주들이 대거 급락한 것이다. 미국 빅테크의 고가 폐쇄형 모델과 이를 떠받치는 막대한 반도체 수요에 대한 회의론까지 일면서 줄줄이 무너졌다. 지난해 중국 딥시크 충격에 이은 두 번째 경고로 볼 수 있다. 물론 미국의 AI 경쟁력이 당장 중국에 역전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픈AI와 앤스로픽 등은 여전히 최상위 모델 경쟁을 주도하고 있다. 다만 구글의 차세대 제미나이 출시가 성능 개선 문제로 지연되는 등 미국 빅테크도 기술 고도화에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고 있다. 중국 기업들은 이 틈을 파고들어 빠르게 격차를 좁히는 중이다. 특히 개방형 모델을 앞세워 세계 개발자와 기업의 선택지를 넓히며 미국 중심의 AI 생태계에 균열을 내고 있는 것이다. 미중과 격차를 좁히기는커녕 오히려 간격이 더 벌어지고 있는 우리의 처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첨단 반도체 생산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나라다. 그러나 AI 패권은 반도체 하나만으로 결정되는 경쟁이 아니다. 파운데이션 모델과 클라우드, 데이터, 소프트웨어, 플랫폼, 개발자 생태계와 글로벌 서비스가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한다. 정부가 추진하는 소버린 AI 사업은 독자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이다. 지난해 5개 정예팀으로 출발한 사업은 단계 평가를 거쳐 현재 LG AI연구원, SK텔레콤, 업스테이지와 추가 선발된 모티프테크놀로지스의 4강 체제로 진행되고 있다. 정부는 올 상반기 목표한 첨단 그래픽처리장치(GPU) 5만장 가운데 3만5000장을 확보하고 세계 3위권 독자 모델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한다. 마냥 제자리걸음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다행이지만, 미중의 질주를 감안하면 속도와 성과 모두 만족스럽다고 하기 어렵다. 천재급 인재 수혈과 안정적인 양성 시스템도 시급하다. 미국이 외국인 유학생과 연구자의 체류 문턱을 높인 상황을 글로벌 인재를 끌어올 기회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오는 9월부터 외국인 유학생과 연구자의 체류기간을 최장 4년으로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전격 발표했다. 첨단 분야 세계의 석·박사와 연구자를 대상으로 한 인재 포섭책을 정교하게 다듬고 실행해볼 것을 제안한다. '키미 K3'의 돌풍은 AI 패권이 미국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준다. 동시에 반도체 강국이라는 현재의 지위만으로 한국의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경고도 새겨야 할 것이다.

[강남視角] 핵심역량 위에 미래를 세워라

"기업은 제품이 아니라 핵심역량으로 경쟁한다." 경영학자 C K 프라할라드와 게리 하멜은 1990년 '핵심역량' 이론을 통해 기업의 지속 가능한 경쟁력은 새로운 사업이 아니라 쉽게 모방할 수 없는 본질적 역량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사업은 바뀔 수 있지만 핵심역량을 잃으면 기업은 방향을 잃는다. 30여년 전 제시된 이 명제는 오늘날 포스코가 내세운 '소재보국' 전략을 바라보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포스코는 최근 철강 중심 기업을 넘어 리튬과 니켈, 이차전지 소재, 에너지 사업을 아우르는 '트리플 코어' 전략을 제시했다. '철강보국'을 넘어 '소재보국'으로 대한민국 산업의 미래를 뒷받침하겠다는 선언이다. 반세기 전 철강이 산업화의 쌀이었다면, 앞으로는 핵심광물과 첨단소재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그 방향에 이견을 달기는 어렵다. 중국의 공급과잉은 세계 철강시장을 뒤흔들고 있고, 미국과 유럽의 보호무역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탄소중립이라는 거대한 전환도 철강업계의 부담을 키운다. 리튬과 니켈, 에너지로 사업을 확장하려는 포스코의 선택은 이러한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소재보국은 철강을 넘어서는 전략인가, 아니면 철강 위에 세워지는 전략인가. 이 질문에 시사점을 주는 사례가 일본제철이다. 일본 기자 우에사카 요시후미는 '일본제철의 환생'에서 2020년 사상 최대 적자에 빠졌던 일본제철이 불과 2년 만에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한 과정을 추적한다. 많은 사람은 일본제철이 새로운 사업을 통해 부활했다고 생각하지만 책이 보여주는 현실은 다르다. 일본제철은 철강을 버리지 않았다. 저가수주를 줄이고 수익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았으며, 적자 설비를 정리하는 대신 자동차용 초고장력강과 전기강판, 에너지용 강재 등 고부가가치 제품에 역량을 집중했다. 결국 일본제철을 살린 것은 사업 다각화가 아니라 핵심역량의 고도화였다. 물론 포스코가 일본제철의 길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포스코는 철강과 리튬, 니켈, 에너지라는 서로 다른 축을 연결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철강에서 축적한 기술과 자본을 기반으로 미래 소재 산업을 키운다면 이는 단순한 사업 다각화가 아니라 대한민국 제조업 공급망을 확장하는 새로운 모델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새로운 성장축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전제가 필요하다. 기존 핵심역량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리튬과 니켈은 미래 산업의 핵심 자원이지만 가격 변동성이 큰 시장이다. 배터리 산업 역시 기술 변화와 수요 변화에 따라 사이클을 반복한다. 최근 몇 년간 원자재 가격의 급격한 변동은 신사업 역시 안정적인 성장만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핵심역량과 연결되지 않은 확장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도시바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도시바는 일본을 대표하는 전자·제조 기업으로 반도체, 전자기기, 인프라 분야에서 오랜 기술력을 쌓아왔다. 특히 메모리 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었다. 그러나 성장정체를 돌파하기 위해 원자력 사업 등 대규모 신규 사업 확대에 나섰고, 미국 원전기업 웨스팅하우스 인수 이후 예상하지 못한 대규모 손실을 입었다. 문제는 원자력 사업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 사업이 도시바가 오랫동안 축적해온 핵심역량과 얼마나 연결돼 있었느냐였다. 반도체와 전자 기술에서 쌓은 강점과 원전 건설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역량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포스코는 창립 이후 '철강보국'이라는 사명으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끌었다. 오늘날 '소재보국'은 그 사명의 연장선에 있다. 철강보국을 버리고 소재보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철강이라는 세계적 경쟁력을 기반으로 소재보국을 완성하는 길이어야 한다. 소재보국은 철강보국의 종언이 아니라 진화다. [email protected]

[사설] '초단타 놀이터'된 레버리지ETF, 근본적 개편 필요

한국 증시를 '초단타 놀이터'로 전락시킨 삼성전자·SK하이닉스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에 대한 대수술이 불가피하다. 출시 한 달도 안 돼 금융당국 수장이 "드러누워서라도 막았어야 했다"고 후회했을 만큼 부작용이 컸다. 증시 왜곡과 투자자 손실이 감내할 수준을 넘어선 만큼 대응이 늦어질수록 시장에 되돌리기 어려운 상처를 남길 수 있다.지난 5월 27일 출시된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16개의 일평균 회전율은 전날까지 120%에 육박했다. 일부 상품의 하루 회전율은 한때 2400%를 넘기기도 했다. 하루에 24차례 넘게 손바뀜이 이뤄진 셈이다. 반도체주의 변동성을 노린 초단타 거래가 급증하면서 '변동성 확대→레버리지 거래 증가→변동성 추가 확대'라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들 상품의 거래대금은 전체 시장의 40%를 차지하며 시장 왜곡을 키웠다. 국내외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잇따랐다. 골드만삭스와 JP모건 등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소수 반도체주 쏠림과 과도한 레버리지 투자가 시장의 취약성을 높이고 주가 하락을 증폭시켰다고 지적했다. 외신들도 극심한 변동성을 보인 한국 증시를 '오징어 게임'이나 '카지노'에 빗댔다.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출시 이후 코스피 사이드카는 19차례, 서킷브레이커는 5차례 발동됐다. 2002년 이후 연평균 발동 횟수와 비교하면 이례적 수준이다. 투자자의 피해도 커지고 있다. 레버리지 ETF 수익률은 대부분 고점 대비 반토막이 났다. 코스피가 9% 가까이 급락한 지난 13일에는 SK하이닉스 레버리지 ETF 투자자 전원이 손실구간에 진입하는 이례적 상황까지 벌어졌다. 투자자들은 국회 국민동의청원에 상장폐지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기초자산이 하락하면 손실이 배가되는 '음의 복리 효과'에 기계적 리밸런싱(비중 조절)까지 겹쳐 낙폭을 키우면서 피해가 더 커졌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금융당국과 유관 기관은 보완책 마련에 나섰지만 아직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시장 불안이 갈수록 커지자 결국 이재명 대통령도 직접 대응을 지시했다.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한국은행은 16일 거시경제·금융현안 간담회를 열고 보완책을 최종 조율하는 등 뒤늦게 대응에 속도를 내고 있다.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는 해외 유사상품 투자 수요를 국내로 흡수하겠다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시장 왜곡과 투자자 피해를 키웠다면 정책 실패를 인정하고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 시장을 정상화할 처방을 내놓아야 한다. 기본예탁금을 현행 1000만원에서 현금 3000만원으로 상향하는 정부의 보완책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전문투자자 전용 상품으로 전환하거나 레버리지 배수를 낮추는 방안까지 폭넓게 검토해야 한다. 투자자 신뢰 회복과 시장 안정을 위한 근본적인 제도 개편이 시급하다.

[사설] 금리 2.75%로 인상, 확장재정과 엇박자 조율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16일 기준금리를 연 2.50%에서 2.75%로 0.25%p 인상했다. 2023년 1월 이후 3년6개월 만의 인상이다. 올해 안에 한차례 이상 더 올릴 수도 있다. 본격적인 긴축 시즌에 들어가는 것이다. 중앙은행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는 물가안정이다. 그러면서 국내 경기 상황을 유의해서 금리를 결정한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최근 연달아 3%대를 기록하고 있다. 중동전쟁에 따른 국제유가의 급상승이 가장 큰 원인이다. 물가 상승과 불황이 겹치면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에 빠지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올 들어 경제성장률이 높아지고 있다. 금리 인상의 여건이 어느 정도 갖춰진 것이다. 한은은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6%에서 3.0%로 높였다. 수출이 역대급 호조세를 띠어 잘하면 1조달러라는 전인미답의 고지를 밟을 수도 있다. 경상수지 흑자 규모도 큰 폭의 증가가 예상된다. 수출과 성장은 반도체가 주도하고 있다. 정부는 대규모 투자를 통해 반도체의 경쟁력을 더욱 끌어올리고 동시에 저성장에서 탈피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그러나 확장재정을 추진하는 정부 정책과 금리 인상은 일견 엇박자로 보인다. 한은은 통화를 거둬들이려 하는데 정부는 풀려고 하니 모순처럼 보이는 것이다. 두 마리 말로 달리는 마차에서 한쪽 마부(재정 정책)는 빨리 달리라고 채찍을 가하고, 다른 마부(통화 정책)는 줄을 당겨 속도를 늦추려 하는 것과 같다. 그런 말이 끄는 마차는 똑바로 가기 어렵다. 신현송 한은 총재는 "반드시 엇박자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지만 통화·재정 정책은 일관성을 갖고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효율성을 발휘한다. 중앙은행과 정부의 정책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어느 정권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문제다. 성장과 물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는 것은 정부와 중앙은행의 숙명과도 같다. 그럴수록 정교한 후속 대책이 필요하다. 환율 안정을 위해서는 긴축정책이 필요한 상황이다. 1500원을 넘나드는 원·달러 환율은 그 자체로 수입물가를 상승시켜 국내 물가 상승을 부추긴다. 환율이 높으면 수출기업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원재료를 수입하는 기업에는 원가를 상승시켜 경영환경을 악화시킨다. 물가 억제를 위한 금리 인상은 자본유출을 막고 외국인 투자를 유인하는 효과를 낸다. 이번 인상으로 한미 금리 차는 1%p로 격차가 줄었다. 그러나 국내 기업의 자본조달에는 악재로 작용해 투자를 위축시키고 가계의 이자 부담도 늘려 소비와 내수에는 악재로 작용한다. 특히 부채비율이 높은 기업과 업황이 나쁜 업종에는 설상가상의 고통을 줄 수 있다. 빚을 많이 진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개인 취약차주들을 위한 정부의 별도의 대책이 요구된다. 저금리는 가계대출을 확대해 부동산 가격을 자극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번 금리 인상이 시기를 놓쳤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준금리 결정은 여러 대내외 여건과 주변국들의 동향을 고려해야 한다. 유럽중앙은행(ECB), 일본은행 등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최근 연이어 금리를 올렸다. 금리 결정에는 이처럼 수십 가지의 변수가 작용한다. 시기와 인상·인하율 결정을 잘못하면 경제에 피해를 줄 수 있다.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위한 최선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