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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視角] 이제는 선관위가 답할 때

최근 5년 동안 치러진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발생한 선거관리 사고는 모두 184건이다. 파이낸셜뉴스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료를 분석한 결과다. 선거인명부 착오와 투표용지 관리, 회송용 봉투 오류, 투표함 관리, 개표 결과 오입력까지 유형은 다양했지만 공통분모는 뚜렷했다. 자료를 들여다볼수록 눈에 들어온 것은 사고 건수보다 같은 유형의 사고가 반복됐다는 점이다. 서울 잠실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선거관리 부실이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대선과 총선, 지선은 선거 방식과 규모가 서로 다르다고 해도 자료 속의 사고 패턴은 사실상 동일했다. 사전투표 과정에서는 회송용 봉투와 투표지 관리 문제가 이어졌고, 투표소의 경우 선거인명부 착오와 투표용지 오교부가 잇따라 발견됐다. 개표 단계도 예외는 없었다. 투표함 관리와 결과 입력 오류가 연이어 확인됐다. 물론 모든 사고를 같은 무게로 볼 수는 없다. 단순한 행정착오도 있고,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미세한 유형도 나왔을 것이다. 다만 선거가 바뀌어도 비슷한 유형의 사고가 다시 나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한 번이라면 현장 문제로 치부하더라도, 같은 잘못이 여러 선거에서 재차 등장한다면 시스템 전체를 다시 들여다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올해 지선 사고 건수는 51건이다. 선거인명부 관리 부실, 이중투표, 투표함 관리, 개표 결과 오입력 등 투표 절차와 직접 연결되는 부분이 상당수다. 2022년 지선 때와 유사하다. 당시 13건보다 약 4배 많다는 점만 다르다. 그래서 더욱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선거는 결과뿐 아니라 절차에 대한 신뢰도 함께 관리해야 하는 제도다. 선관위가 다른 행정보다 더 엄격한 기준으로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복되는 사고를 모두 현장 직원의 실수로 돌리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선거는 중앙선관위와 지방선관위, 투표소·개표소 현장 인력이 동시에 움직이는 업무다. 명부 확인, 투표용지 교부, 봉투 관리, 투표함 이송, 개표 입력이 이들의 협력 속에 짧은 시간 안에 이뤄지는 만큼 교육과 매뉴얼, 점검 체계가 중요하다. 따라서 같은 절차에서 착오가 되풀이된다면 어느 단계에서 관리가 작동하지 않았는지 따져봐야 한다. 사고를 한 덩어리로 묶어 '현장 착오'라고 넘겨버리면, 다음 선거에서도 반복된다는 것이 수치로 확인됐다. 선관위가 그간 교육을 강화하고 각종 매뉴얼을 보완해 왔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교육이 현장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인지, 인력이 부족한 것인지, 기존 매뉴얼이 실제 투표환경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향후 사안별로 재발방지 대책을 수립하고 국정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명부 관리, 투표용지 교부, 투표함 관리, 개표 입력 가운데 어느 절차를 어떻게 고치겠다는 대책이 나와야 한다. 해외라고 완벽한 것은 아니다. 미국은 선거 때마다 우편투표와 개표 지연 문제가 논란이 되고, 일본 역시 투표용지 교부 착오나 개표 오류가 보고된다. 영국은 선거가 끝난 뒤 독립기구가 운영 전반을 평가하고 개선 권고를 국민에게 알린다. 그러나 사후점검 방식에선 우리와 차이가 난다. 사고를 공개하고, 원인을 분류하며, 다음 선거 전까지 개선 권고 이행 여부를 다시 확인하는 체계가 갖춰져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주민등록등본을 잘못 발급하면 다시 발급하면 된다. 세금이 잘못 부과되면 이의신청과 정정 절차가 있다. 반면 투표와 개표는 한 번으로 끝난다. 선거 후에는 없었던 일로 되돌릴 방법이 없다. 이런 이유에서 선거관리 사고는 사후 해명만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설명과 개선책이다. 동일한 사고가 왜 다시 나왔는지, 다음 선거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까지 선관위가 이제는 내놔야 한다. [email protected] 정지우 사회부장

[사설] 종전에도 치솟는 물가, 못 잡으면 성장도 속빈 강정

중동전쟁 여파에 따른 고유가에 고환율까지 겹치면서 소비자물가가 두 달 연속 3%대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체감물가를 보여주는 생활물가지수도 가파르게 오르면서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무더위까지 덮친 여름철로 접어들면서 취약계층의 부담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국가데이터처는 6월 소비자물가지수가 지난해 같은 달보다 3.2% 상승했다고 2일 발표했다. 2년6개월 만의 최고치다. 올해 1~2월 2%였던 상승률은 중동발 지정학적 충격으로 3월 2.2%, 4월 2.6%로 높아진 데 이어 5월 3.1%, 6월 3.2%를 기록하며 두 달 연속 3%를 웃돌았다. 국제유가 급등에 따른 석유류 가격 상승이 결정적이었다. 석유류 가격은 지난해보다 24.7% 뛰며 전체 소비자물가를 0.93%p 끌어올렸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충격이 한창이던 2022년 7월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이다. 기름값 상승은 식재료 운송비와 배달비, 매장 운영비를 거쳐 외식물가까지 밀어올린다. 그나마 정부의 석유제품 최고가격제가 전체 소비자물가를 0.4%p 낮춘 것으로 분석됐다.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생활물가지수도 5월 3.3%에서 6월 3.4%로 더 올랐다. 식품은 2.3%, 식품 외 품목은 4.1% 상승했다. 서울 유명 냉면집의 냉면값은 2만원에 육박하고 삼계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장면·김밥·칼국수 같은 서민 음식도 줄줄이 올랐다. 직장인과 학생들에게는 매일 반복되는 점심값 부담이다. 미·이란 간 종전합의라는 대형 호재로 유가가 다소 안정을 찾고 있지만 물가를 낙관하기는 이르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발표한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 보고서에서 올해 하반기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 안팎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했다. 유가충격이 시차를 두고 상품과 서비스 가격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2일 물가상황 점검회의에서도 경기회복에 따른 수요 압력이 커지면서 당분간 물가가 높은 수준을 이어갈 것으로 진단했다. 반도체 성과급발 임금 상승이 소비를 자극하고 있는 데다 달러당 1500원을 넘어선 고환율과 시중 통화량 증가까지 겹쳐 고물가는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인플레이션 압력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유럽과 일본 등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기준금리를 잇달아 올리며 물가 잡기에 나서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기대와 달리 긴축 기조를 강화했고, 한국은행 역시 금리를 올려서라도 물가를 잡겠다는 뜻을 거듭 밝혀왔다. 문제는 고물가의 충격을 취약계층이 더 크게 받는다는 점이다. 금리까지 오르면 빚을 안고 살아가는 서민과 영세 자영업자, 소상공인의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정부가 검토 중인 추가경정예산도 신중해야 한다. 재정지출 확대가 자칫 고물가·고환율에 다시 불을 지필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물가안정과 경기대응 사이에서 더욱 정교한 정책공조를 펼쳐야 한다. 물가를 잡는 것이 최우선의 민생대책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설] ‘호남 반도체’ 문제 없다 장담 말고 여건 잘 따져야

호남권 반도체 산단 신설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여전하다. 이재명 대통령이 임기 안에 단지를 완공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공장 운영에 필요한 전력과 용수 등을 과연 충분하게 확보할 수 있느냐를 놓고도 논란이 가시지 않고 있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2일 호남 반도체 산단의 인프라 문제에 대해 방송에 출연해 언급했는데 큰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었다. 영산강과 섬진강을 합하면 7개 댐이 저장하고 있는 물의 양이 약 15억t인데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전력 공급에 대해서도 김 장관은 "호남은 한빛 원전 6개와 재생에너지 등 무탄소 에너지원이 풍부한 곳"이라며 "6.3기가와트(GW)가 필요한데 현재 3~5GW 정도의 전력이 여유가 있다"고 했다. 김 장관의 설명대로만 된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나. 그러나 현실은 김 장관의 말처럼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용수가 충분하다고 해도 가뭄이 들면 사정이 달라진다. 기후변화로 홍수와 가뭄이 번갈아 발생하는 상황에서 마냥 낙관하는 태도는 좋지 않다. 2022~2023년 서남권 가뭄이 극심했을 때 동복댐과 주암댐 저수율은 10%대에 불과했다. 섬진강은 4대강 공사도 반발로 취소됐었다. 반도체 공장은 24시간 돌아가야 한다. 물을 공급할 수 없다면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전기 또한 마찬가지다. 한빛 원전이 있다고는 하지만 여유가 있다는 전력의 원천은 신재생에너지다. 풍력이나 태양열 발전 등 신재생에너지는 날씨에 따라 생산량이 크게 달라진다. 안정적인 공급원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장기적으로 공급이 끊기지 않는 전력원이 필요한데 현재로서는 원전뿐이다. 용수와 전력 외에도 공장 건설과 가동에 필요한 주요 인프라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송전 시설도 그중의 하나다. 호남지역에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한 이상 이제는 소모적 정치적 논쟁은 중단해야 한다. 과정이 비록 썩 투명하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건설 지역이 정해졌으므로 산단을 이 대통령이 약속한 시간 안에 완공하고 제반 인프라를 갖출 수 있도록 여야 정치권이 힘을 실어줘야 한다. 당연히 산단 건설과 운용에 필요한 여건을 어떻게 확보할지 고민하겠지만 철저한 시뮬레이션을 거쳐 한 치의 모자람이 없도록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시간이 걸려도 원전을 호남지역에 추가로 건설하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기 바란다. 용인 반도체 산단 건설이 늦어지는 이유는 바로 전력과 용수난 때문이다. 호남 산단도 비슷한 문제에 부딪힐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무조건 문제가 없다고 호언장담할 계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사업의 당사자인 기업들과 긴밀히 소통하면서 의견을 귀담아듣고 반영해야 한다. 설령 입지를 정할 때는 그렇지 못했다 해도 이제부터는 그들의 주장과 요구를 우선시해야 한다. 전력과 용수뿐만이 아니라 산단 건설에 필요하다면 관련 제도도 정비해야 하고 규제도 풀어야 한다. 근로시간 규제를 풀어주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을 도입한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이 지역에만 가능할지는 몰라도 할 수 있는 지원책은 다 꺼내들어야 성공적으로 출범할 수 있을 것이다. 야당도 이제는 협력해야 한다. 언제까지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것은 국익을 해치는 일이다.

[fn광장] 2030이 버럭 화를 낸 진짜 이유

대학에 다니는 20대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깜짝 놀랄 때가 가끔 있다. 1960년대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소위 '86세대'인 내가 보기엔 정치적 입장이 다소 보수적이지 않나 싶을 때가 종종 있어서다. 그중 하나가 이번 지방선거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부정선거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실선거가 명백한 이번 사태를 대하는 기성세대의 상대적으로 차분한 대응에 아들은 화가 좀 난 듯했다. 특히 스타벅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연일 격앙된 언어를 쏟아냈던 이들이 선거 부실 앞에서는 침묵하는 듯한 모습을 두고 '선택적 분노'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아들의 분노는 소셜미디어와 잠실 올림픽공원 거리로 쏟아져 나온 2030세대의 목소리와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과거 이들은 정치적 무관심층이나 '사회에 무심한 개인주의자'쯤으로 치부되곤 했다. 하지만 이번 지방선거를 전후해 이들은 확실한 캐스팅보터로 존재감을 드러냈고, 특정 조직의 지휘 없이 자발적으로 "참정권 보장"을 외쳤다. 이를 두고 기성세대의 일각, 혹은 일부 진영론자들은 "청년층이 우경화되었다"라거나 "보수화되었다"라며 손쉽게 재단하려 든다. 늘 그렇듯 현상의 본질을 놓친 단편적 진단이자, 기성세대의 관성적 시선이 낳은 오독이다. 2030세대가 분노하는 진짜 이유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공정과 생존'의 문제에 있다고 보는 게 맞다. 과거 86세대에게 자유가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집단적 개념이었다면, 지금의 청년들에게 참정권은 내 삶을 규율하는 최소한의 규칙이자 개인의 권리다. 사기업의 실책에는 정부와 사회가 나서 매섭게 책임을 묻고 목소리를 높이더니, 정작 민주주의의 근간인 투표권이 침해당한 사태에는 절제된 언어로 유감을 표하는 기성 권력의 이중적 태도에 그들의 공정 감각이 요동친 것이다. '스타벅스보다 못한 참정권'이라는 자조 섞인 외침은 기성세대의 진영 논리와 선택적 분노를 거부하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청년들의 목소리는 꽤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평창올림픽 남북단일팀 논란과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전환 파동, 조국 사태는 물론 최근 여당의 공소취소 특검 발의와 대한축구협회의 독단적 감독 선임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자신들이 마주한 현실이 불공정하고 불투명하다고 느낄 때마다 거침없이 의사를 표출해 왔다. 한때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던 '90년생이 온다'의 저자는 2030세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로 '정직함'을 꼽은 바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직함이란 솔직하거나 순수하다는 의미의 '어니스티(Honesty)'가 아니라 시스템의 진실성과 온전함을 뜻하는 '인티그리티(Integrity)'에 더 가깝다. 청년들이 가장 공정하다고 믿는 채용시스템인 9급 공무원 시험에 목을 매는 '공시족'이 되었던 배경에도 정직하고 온전한 시스템에 대한 갈구가 자리 잡고 있다. 이들에게 공정은 단순한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날로 좁아지는 기회의 문턱에서 자신을 지켜줄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지금의 청년 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더 가혹한 경제적 구조조정 속에서 살아간다. 인공지능(AI)과 로봇의 도입으로 일자리는 급감하고 있으며, 기업들은 신입 공채마저 줄여 청년들을 '인턴 무한 루프'로 내몰고 있다. 여기에 자산 양극화와 주거 불안정이라는 가혹한 현실이 더해지면서 청년들은 깊은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기성 정치권은 기존 노동자만 보호하는 법안을 밀어붙이거나 일회성 지원금 같은 단기 처방으로 이들의 표심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2030이 보수나 진보 정부를 막론하고 역대 최저의 지지율을 보내는 것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기득권이 되어버린 세대의 오만함과 위선에 대한 엄중한 경고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청년이 미래를 선도하는 사회를 전망하며 "이제 청년이 스승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한 바 있다. 기성세대는 자신들이 이룩한 과거의 성취에 취해 청년들을 가르치려 들거나 그들의 분노를 해묵은 이념의 잣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기존 방식만 고수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꼰대'로 전락하는 길이다. 이들이 던지는 돌은 위선적인 진보와 탐욕스러운 보수 모두를 향하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는 기득권의 안일함을 버리고 청년들의 누적된 분노와 요구를 직시해야 한다. 삶과 직결된 공정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 2030세대의 생생한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email protected] 정순민 기자

[사설] 월간 첫 1000억달러 돌파, 새 역사 쓰는 수출

한국 수출이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산업통상부가 1일 발표한 '6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수출액은 전년 동월 대비 70.9% 증가한 1022억5000만달러를 기록했다. 월간 기준으로 사상 첫 1000억달러 돌파다. 독일·중국·미국에 이어 세계 네 번째 기록이다. 상반기 누적 수출은 4967억달러로 같은 기간 역대 최대치를 갈아치웠다. 중동전쟁에 따른 물류·에너지 불안, 미국발 관세 압박과 보호무역주의 확산 속에서 거둔 성과라서 더 값지다. 이 흐름이 하반기까지 이어진다면 연간 수출 1조달러 달성도 못하란 법이 없다. 수출 호황으로 경제성장률 전망치도 올라가고 있다. 캐피털 이코노믹스는 최근 한국의 올해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4.0%로 제시했다. 지난 2월 1.0%였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 다른 주요 기관들도 3%대 이상의 성장률을 제시했다. 당분간 반도체 호황이 지속되면 3% 이하의 저성장률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경제가 구조적 저성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성급하다. 일시적 호황, 반짝 성장으로 보는 것이 아직은 맞기 때문이다. 자축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이다. 반도체 한 업종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은 편이다. 양극화는 더 극명해지고 있다. 외형적으로 좋은 경제지표가 나타나도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리는 것은 문제다. 수출을 견인하는 품목은 사실상 반도체 하나다. 물론 컴퓨터, 석유 제품, 선박, 화장품도 수출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으나 반도체가 차지하는 규모가 전체에서 워낙 크다. 상반기 반도체 수출액은 1924억달러로 지난해 연간 실적을 반년 만에 넘어섰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반도체 증가분을 빼면 작년 정도의 속도다. 특정 업종이나 일부 대기업이 주도하는 수출은 외부 충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메모리 가격 사이클이 꺾이거나 글로벌 수요가 둔화되면 수출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대기업에 쏠리면서 중소기업의 수출 비중이 쪼그라드는 점도 보완해야 할 과제다. 매번 지목되었던 문제들이다. 품목·시장 다변화와 중소기업 수출 경쟁력 강화를 수출정책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거시지표 개선의 온기가 국민 전체로 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도체 관련 업종이 사상 최대의 수출실적을 구가한 반면, 내수와 서민 경제는 여전히 냉기가 감돌고 있다. 성장률이 올라도 반갑게만 들리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출이 아무리 잘되어도 과실이 중소기업과 일반 서민에게 골고루 전달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되레 양극화만 부추길 수 있다. 그렇더라도 한달 수출 1000억달러 돌파는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수출은 한국 경제를 일으킨 원동력이다. 1977년에 100억달러, 1995년에 1000억달러를 달성했다. 수출 입국을 기치로 내세워 총력을 기울여 거둔 성과였다. 이제 1~2년 안에 대망의 1조달러 기록을 넘어설 것이다. 다만 산업 다변화 전략으로 산업구조를 건강하게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앞에 놓였다. 반도체만이 아니라 미래형 첨단산업을 키우고 거기에 전통적 제조업이 힘을 보태면 수출 5강을 넘어 3강도 이루지 못할 꿈은 아니다.

[사설] 코스닥 30년, 신뢰 회복·체질 개선 더 미룰 수 없다

한국판 나스닥을 지향했던 코스닥시장이 1일 출범 30년을 맞았다. 1996년 벤처·중소기업의 자금조달을 돕고 혁신기업을 키우겠다는 취지로 문을 연 시장이다. 외형 면에서는 적잖은 성장을 이뤄냈다. 개장 초기 300여개였던 상장사는 현재 1700개를 넘어섰고, 시가총액은 7조원에서 500조원대로 커졌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기업공개와 유상증자를 통해 공급한 모험자본도 90조원에 육박한다. 강소기업의 성장 통로 역할을 해온 공로는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내실 면에서는 실망과 아쉬움이 크다. 코스피가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대형주를 앞세워 뜨겁게 달아오른 반면, 코스닥은 증시 활황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냉랭하다. 올 상반기 코스피 지수는 9000선까지 질주했지만 코스닥은 오히려 뒷걸음쳤다. 시장은 일부 대형주에 의존한 채 변동성을 키우며 극심한 양극화 장세를 보였다. 대형주 쏠림을 완충할 건강한 중소형 성장주 생태계가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코스닥 침체는 한국 증시의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내는 단면이다. 한국 증시의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코스닥의 체질개선을 더는 미뤄선 안 된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부실기업을 과감히 걸러내는 일이다. 실적개선 없이 편법으로 생명만 연장하는 좀비기업이 시장에 남아 있는 한 투자자들이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 이대로라면 혁신기업은 외면받고 코스닥 전체가 저평가를 면치 못한다. 시장을 혼탁하게 하는 부실기업을 과감하게 퇴출하는 것이야말로 시장 신뢰 회복의 출발점이다. 거래소와 금융당국이 이날 퇴출제도 강화와 세그먼트 도입을 핵심과제로 제시한 것은 늦었지만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실행력이다. 선언에 그치지 말고 확고한 실천으로 시장질서 회복을 주도해야 한다. 불성실공시, 횡령·배임, 회계 부실 등 시장 신뢰를 훼손하는 행위에는 무관용 원칙으로 대응해야 한다. 상장 유지요건도 최소한의 형식 기준을 맞추는 데 머물러선 안 된다. 매출과 영업 지속성, 기술력, 내부통제, 주주 보호 수준을 종합적으로 따져 시장에 남을 자격을 더 엄격히 판단해야 한다. 세그먼트 도입도 신중하되 분명하게 추진해야 한다. 코스닥 안에서 성장성과 안정성을 갖춘 대표기업을 선별해 투자자가 더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우량기업이 좀비기업과 한데 묶여 할인받는 구조를 바꾸려면 시장 안의 층위를 정교하게 나누는 것이 맞다. 한국 경제는 반도체와 AI를 중심으로 다시 도약의 기회를 맞고 있다. 그러나 자본시장이 대형주 쏠림에 갇힌다면 혁신 생태계는 넓어질 수 없다. 코스닥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나오려면 기술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춰야 한다.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시장의 신뢰성을 갉아먹는 부실기업과 테마주가 판치는 풍토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우량기업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구조를 더는 방치해선 안 된다. 코스닥의 다음 30년은 달라야 한다. 과감한 개혁으로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재도약의 원년을 열기 바란다.

[테헤란로] K조선, 낙관 이르다

"지금이라도 중국은 마음만 먹으면 K조선이 수주한 물량을 다수 가져올 수 있다. 정부·민간 투트랙 시너지가 본격화되는 시점을 경계할 때다." 최근 만난 조선업계 고위 관계자의 발언이다. 역대급 호황을 누리는 K조선이 사이클 변동에 대비해야 할 때라는 시각이다. 공격적인 설비투자(Capex·자본적지출)보다 호황일 때 적극적인 합병을 통해 중형 조선사를 대형 조선사로 만드는 등 경쟁력을 확보해 신(新)빅4 체제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중국은 현재 글로벌 조선업계의 지배자다. 영국 조선·해운 시황 분석업체 클락슨리서치 집계에 따르면 지난 5월 중국의 누적 수주잔량은 1억2943만CGT(표준선환산톤수·선박의 부피를 나타내는 총톤수에 선종별 계수를 곱해 산정)로 전체의 65%에 달했다. 전월 대비로도 중국은 2552만CGT가 증가했다. 현대차그룹 물류 전문 계열사인 현대글로비스가 완성차 해상 운송에 투입한다고 밝힌 자동차운반선(PCTC) '글로비스 리더호'도 중국선박공업그룹(CSSC) 산하 광저우광촨궈지 등이 건조했다. 설계 또한 중국 상하이 선박연구설계원(SDARI)이다. 길이 230m·폭 40m·중량 10만2590t으로 적재공간 14개 층을 합하면 축구장 약 28개 면적을 갖춰 소형차 1만대 이상을 운송할 수 있는 세계 최대 수준의 선박도 중국 차지다. 고급 함정인 항공모함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자체 기술로는 처음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전자기식 '캐터펄트'를 장착한 항공모함인 '푸젠함'까지 건조했다. 국내 조선업계 고위 관계자는 "'푸젠함'이 사출기 설계오류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중국의 다른 곳에서 또 다른 항공모함이 건조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건조 실패 경험을 그대로 다른 건조에 적용, 빠르게 기술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 중국 조선의 무서운 점"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호경식 한국투자파트너스 중국법인 대표는 최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넥스트라이즈에서 "중국은 실패한 기업의 자산이 다음 기업으로 이동하면서 산업 전체가 학습 효과를 얻는다"며 "중국은 다수의 기업이 경쟁하고 검증받는 과정 자체를 성장동력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실패를 성공의 어머니로 만드는 중국의 도전 속에 K조선이 지금의 호황을 누리기만 한다면 만시지탄(晩時之歎)의 때는 곧 온다. 역대급 영업이익 'N% 성과급'을 말하기 전에 '생존'을 위한 산업 경쟁력 강화가 필요한 때다. [email protected]

[특파원 칼럼] 370조엔 vs 4755조원

"인공지능(AI)·반도체 등 17개 전략분야에 대해 민관이 370조엔 이상의 투자를 추진한다."(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관이 강하게 나선 만큼 민간도 마인드셋을 전환해 투자목표를 다시 제시해야 한다."(쓰쓰이 요시노부 게이단렌 회장) 지난달 30일 관민 협력 투자구상이 공개된 일본 성장전략회의에서 정부와 민간을 대표하는 두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이날 일본 정부는 AI, 반도체, 에너지, 조선, 바이오 등 17개 전략분야를 묶어 2040년까지 370조엔(약 3532조원) 이상을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게이단렌(일본경제단체연합회)은 민간 설비투자 목표를 250조엔(약 2394조4500억원)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맞받았다. 겉으로는 관민이 함께 속도를 맞추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부가 투자 방향을 제시하고 민간이 그 틀 안에서 대응하는 분위기다. 이번 구상은 경기 부양보다 산업정책을 개별 지원에서 패키지형 투자로 전환하는 성장전략에 가깝다. 그러나 시장은 환호보다 계산기를 먼저 두드리고 있다. 실제 민간과 재정의 비율이 어떻게 나뉠지, 추가 국채 발행이 어디까지 확대될지가 초점이다. 일본 국채 시장은 오랜 기간 안정을 유지해왔다. 일본은행(BOJ)이 국채의 절반 이상을 보유하고 초저금리 환경 속에서 정부의 이자 부담은 억제돼 왔다. 그러나 금리 정상화가 본격화되는 지금 이 구조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번 계획이 더 복잡하게 읽히는 이유는 '일회성 경기 부양'이 아닌 '상시투자 체제로의 전환'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경기대응을 위해 재정을 늘리고 다시 줄이는 일이 반복됐지만 이제는 AI·반도체 같은 전략산업이 장기 재정 구조 안으로 편입되는 방식에 가까워지고 있다. 투자 확대가 성장정책이면서 동시에 재정구조 자체가 되는 순간 정책은 선택이 아니라 경로가 된다. 일본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일본 정부는 2027년 이후 연간 약 10조엔(약 95조7810억원) 규모의 추가 재정 지출을 전제로 효과를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17개 분야, 62개 기술을 포괄하는 설계는 범위가 넓어 선택과 집중이 흐려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이번에 구체적인 투자배분은 공개되지 않았다. 어떤 기술과 산업을 우선순위로 둘 것인지 기준이 불분명할 경우 정책은 전략적 투자보다 분산된 지출로 흐를 수 있다. 이 논쟁은 한국과 무관치 않다. 한국 역시 지난달 29일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를 발표하며 대규모 산업 투자 사이클에 들어섰다. 핵심은 제조 AI 전환이다. 정부는 2030년까지 민관이 20조원을 투입해 100조원 이상의 경제효과를 창출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국가 제조데이터와 AI 모델을 구축하고 이를 산업단지와 제조 현장으로 확산시키는 구조다. 물론 한국의 접근은 일본과 결이 다르다. 일본이 국가가 산업 포트폴리오를 설계하고 투자 프레임을 전면에 세우는 방식이라면 한국은 민간기업의 투자결정이 먼저 움직이고 정부는 데이터, 인프라, 제도, 금융을 보완하는 구조에 가깝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도의 4755조원 규모 반도체 투자, 용인 클러스터, AI 데이터센터 확장은 이미 민간 사이클이 주도하는 형태다. 다만 두 나라가 마주한 질문은 같다. 투자 규모가 아니라 그 투자가 어떤 구조 위에서 지속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일본은 국가 주도의 투자 확대가 재정과 금리 제약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시험대에 올라 있고, 한국은 민간 중심 투자구조가 경기 사이클 변화 속에서도 유지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낼지가 관건이다. 최근 벌어지는 논쟁도 결국은 투자 규모보다 그 결정을 가능하게 한 원칙과 구조가 얼마나 지속 가능한지에 대한 시장의 검증 과정인지 모른다. [email protected] 서혜진 기자

[강남視角] 퍼스트 펭귄은 어디서 태어나나

'퍼스트 펭귄(First Penguin)'은 혁신과 리더십을 상징한다. 범고래와 표범물범이 서식하는 차디찬 바다 앞에서 펭귄 무리는 망설인다. 저 바닷속으로 뛰어들어야 먹고살 수 있지만, 그 순간 포식자들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다. 그때 한 마리가 먼저 몸을 던진다. 퍼스트 펭귄의 용기가 나머지 무리를 움직인다. 경영학은 이 장면에 홀딱 반했다. 스타트업 투자자들은 '퍼스트 펭귄상'을 만들었고, 기업들은 "우리 회사의 퍼스트 펭귄을 찾습니다"라는 채용공고를 냈다. 2010년대 혁신의 열풍 속에서 퍼스트 펭귄은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이 비유는 불편한 진실을 품고 있다. 퍼스트 펭귄은 가장 먼저 잡아먹힐 수도 있다. '혁신의 선구자'라는 찬사에 떠밀려 실패의 짐을 혼자 짊어진다. 조직이 퍼스트 펭귄에게 명운을 맡긴 채 결과만 기다린다면, 그것은 리더십이 아니라 희생양 고르기에 가깝다. 혁신을 독려하면서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조직에서 퍼스트 펭귄의 신화는 잔혹사에 가깝다. 퍼스트 펭귄은 아무 조직이나 사회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그를 키우고 배려하고 누군가 희생하는 건강한 생태계에서만 퍼스트 펭귄이 등장하는 법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생태계의 주인공은 '황제'라는 이름의 실재하는 펭귄이다. 황제펭귄의 생존 비결은 '허들링(Huddling)'이다. 영하 50도 남극의 혹한 속에서 수천마리가 거대한 원형 대열을 이룬다. 바깥쪽 펭귄이 칼바람을 몸으로 막으면, 안쪽 펭귄들은 체온을 회복한다. 온기를 되찾은 안쪽 펭귄이 다시 바깥으로 나가 동료를 지킨다. 그리고 그 허들링 안에서, 수컷들은 발등 위에 알을 올린 채 두 달을 굶으며 버틴다. 알이 얼음 바닥에 닿는 순간 단 몇 초 만에 생명은 끝난다. 그 알을 지키려고 무리 전체가 필사적으로 서로의 온기를 나눈다. 혹한이 끝날 즈음, 알에서 새 생명이 깨어난다. 훗날 바다에 가장 먼저 뛰어들 퍼스트 펭귄의 탄생이다. 허들링은 아름다운 이야기도 지혜로운 선택도 아니다. 그렇게 안 하면 다 죽기 때문에 그냥 하는 행위다. 수백만년에 걸쳐 극한의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생태적 본능이다. 이러한 펭귄의 생태 본능은 우리 사회와 빼닮았다. 위기를 돌파하는 영웅 즉 퍼스트 펭귄이 등장하는가 하면, 공동체가 똘똘 뭉쳐 국난을 극복하는 허들링을 보여주기도 한다. 분명한 사실은 퍼스트 펭귄은 허들링이라는 환경 속에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회를 이끌 유능한 리더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법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허들링 환경은 어떤가.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에다 민주주의 선도국가라는 자부심. 우리는 그 박수 소리에 취해 경계심이 느슨해졌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계엄 사태 이후 대한민국은 두 개의 나라처럼 쪼개졌다. 같은 팩트를 보고도 정반대로 이해하고 적대시한다. 고질적인 세대·지역·젠더 갈등이 해소되기는커녕 서로의 급소에 감정의 날을 겨냥하는 등 더 깊이 곪아가고 있다. 서로를 위해 차가운 외풍을 막아주기보다 내부적으로 표독스럽게 쏘아붙이며 사분오열한다. '역(逆)허들링'의 광풍이 부는 것 아닌가 싶다. 황제펭귄은 바깥의 찬바람보다 내부 분열이 더 치명적이라는 점을 본능으로 안다. 원형 대열 가운데 한 곳이라도 무너지는 순간, 혹한은 그 틈을 파고들어 공동체를 전멸시킨다. 공동체를 이끌 패기 있고 건강한 리더는 시기와 질투로 분열된 공동체에서 나올 수 없다. 이것이 펭귄 생태계가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다. '갈등 공화국'의 특징은 사람들 스스로 고립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역허들링 문화를 바로잡는 변화는 거창한 데서 오지 않는다. 삶에 지쳤다면 먼저 자신을 한번 꼬옥 안아주자. 그리고 옆자리의 동료를, 혹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누군가를 꼬옥 껴안아 보자. 황제펭귄이 수백만년 동안 그래왔듯이, 그 작은 온기 하나가 대열을 되살린다. [email protected] 조창원 논설위원

[사설] 시장 뒤흔드는 레버리지 ETF, 금융당국 책임 크다

금융당국이 시행령까지 고쳐 도입한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가 출시 한달 만에 시장을 흔들고 있다. 출시 때부터 시장 변동성을 키울 우려를 샀던 ETF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드러누워서라도 막았어야 했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시장 왜곡과 투자자 손실이 더 커지기 전에 고강도 대책을 서둘러야 한다. 최근 증시에서는 반도체 슈퍼사이클 기대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 자금이 쏠리면서 하루 5~10%씩 오르내리는 변동 장세가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두 종목을 기초자산으로 한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까지 등장하면서 이를 활용한 초단타 매매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하루 수익률을 2배로 추종하는 구조여서 짧은 시간의 방향만 맞히면 큰 차익을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홀짝 도박판'에 비유하면서 투기성 단타매매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루 회전율이 1261%나 되는 상품도 있었다. 하루 동안 전체 물량이 12차례 넘게 손바뀜한 셈이다. 이들 상품에 개인 자금 8조원 이상이 몰리면서 시장 왜곡도 심해지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 비중이 압도적인 데다 레버리지 ETF의 급등락이 시장 변동성까지 키운다는 것이다. 두 종목만 오르면 다른 종목이 대부분 하락해도 코스피는 상승하는 구조다. 한 증권사 보고서는 단일종목 ETF 출시 이후 국내 상장사 주식의 95% 이상이 하락했는데도 코스피는 강세를 이어갔다고 분석했다. 상승률 상위 종목도 SK하이닉스 레버리지 ETF가 휩쓸었다. 코스닥 역시 1000선을 내주는 등 약세를 이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대형 반도체주로의 자금 쏠림을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열풍이 불고 있다. 변동성을 키운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하지만 미국은 시장구조가 한국과 다르다. 수백개의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가 상장돼 있어 특정 종목 쏠림이 덜하다. 대표 종목인 엔비디아도 S&P500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8% 수준이다. 지수 영향력이 절대적인 소수 종목에 집중된 한국과는 사정이 다르다. 국내 증시 변동성이 커지면서 해외에서는 코스피와 개별 종목을 기초자산으로 한 초고위험 레버리지 선물상품까지 등장했다. 애초 단일종목 ETF는 홍콩 상장 레버리지 ETF 투자 수요를 국내로 돌리기 위해 도입됐지만 효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규제 사각지대에서 새로운 투기 시장만 키웠다는 비판이 나온다. 세계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 바이낸스에는 코스피 150배 투자 선물상품까지 등장했다. 금융당국도 판촉 제한과 투자자 교육 강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그러나 부작용이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만큼 보다 정교하고 강도 높은 보완책이 필요하다. 예탁금 요건 강화와 신용공여 한도 축소, 증거금 비율 상향 등을 추진해야 한다. 아울러 서킷브레이커와 비슷한 '과열 시 매매 제한' 등 시장 불안을 줄일 수 있는 종합대책을 더 늦기 전에 마련해야 한다.

[사설] 반도체 호황에 가려진 전반적 경영난 살펴야

반도체 등 일부 업종 외에 다른 기업들의 경영 사정은 좋지 못하다. 관련된 통계가 30일 나왔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상장기업 가운데 번 돈으로 이자도 못 갚는 '한계기업' 비중이 27.6%로 2017년보다 15.8%p 상승했다. 미국 등 다른 주요국들도 비중이 높아지고는 있지만 우리의 속도가 유독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한국 경제는 반도체가 떠받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공지능(AI)의 발전에 따른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반도체 강국으로서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다. 고유가 등의 악조건 속에서 한국의 분기 성장률이 주요국 가운데 1위를 한 것도 반도체 효과다. 반도체 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유럽 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과 비교하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러나 대외 여건의 악화로 산업계 전반으로는 불황이 지속되고 있는데 반도체 초호황의 착시 효과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물론 반도체 산업이나마 선전하고 있는 것은 정부나 국민으로서는 감사할 따름이지만 경영난에 빠진 다수 업종과 기업에도 관심을 갖고 지원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반도체 경기는 순환하기 마련이고 AI 산업이 계속해서 발전한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반도체 경기가 꺾이는 순간 한국 경제의 민낯이 드러나고 단기 성장률이 급전직하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한두 업종이 전체 경제를 끌고 갈 수는 없다. 산업 전반의 고른 발전과 성장이 바탕이 되어야 쉽게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경제구조를 유지할 수 있다. 반도체 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는 당연히 필요하지만 정부로서는 경제와 산업 전체를 보면서 불황에 빠진 전통적인 제조업도 옥석을 가려 도와주고 이끌어 줘야 한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한계기업은 조속히 정리하고 살릴 가치가 있는 기업은 어떻게든 살려서 제 역할을 하도록 유도해야 하는 것이다. 한경협이 설명했듯이 기업들 앞에 놓인 대외 여건은 역대 최악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고유가·고환율·고금리에 높은 인건비와 내수 부진이 겹친 복합적 요인이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비용이 많이 드니 이익률을 높일 수가 없다. 가용한 정책과 금융 지원을 동원해 기업들의 애로를 해소해 줘야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자영업, 소상공업의 부진은 이보다 더하다. 지난 1·4분기 자영업자들의 금융권 대출잔액이 1100조원에 육박해 역대 최대 규모에 이르렀고, 연체율 역시 2%대로 10년여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자영업은 경제를 지탱하는 한 축이다. 한국의 자영업 비중은 주요국 중에서 4위권이다. 자영업이 무너지면 경제 전체가 작지 않은 충격을 서서히 받을 것이다.반도체 등 일부 대기업의 호황과 거액의 성과급 지급은 최저임금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최저임금을 많이 올리면 자영업자나 소상공인에게는 당장 사업을 그만두라는 소리와 다름없다. 임금을 주지 못해 실제로 폐업하는 자영업자가 늘어날 것이다. 고용은 감소할 수밖에 없고 그 피해는 최저임금을 받고 생활하는 서민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것이다. 이처럼 우리 경제의 본모습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그래도 전체적인 상황이 좋을 때 언젠가는 닥칠 수도 있는 위기에 대비하는 게 유비무환의 자세다.

[기자수첩] 서울 전세시장의 두 얼굴

"매물은 많죠. 그런데 당장 계약할 수 있는 집은 몇 개 안 돼요." 최근 전세시장 취재 과정에서 만난 중개업소 관계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서울 아파트 전세 매물이 다시 2만건을 넘어섰지만 현장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전세 매물은 분명 늘었다. 그러나 막상 들여다보니 임차인이 거주 중인 '세 낀 매물'이 적지 않았다. 실수요자에게 중요한 것은 실제 계약이 가능한 매물이 얼마나 되는지인데 말이다. 더 의아했던 건 계약 종료가 한참 남은 집들이 시장에 나와 있었다는 점이다. 그중에는 계약 종료가 2027년 상반기인 집도 있었다. 실제 거래를 염두에 둔 매물인지, 시장 반응을 보기 위해 내놓은 물건인지 쉽게 구별하기 어려웠다. 이런 매물이 뒤섞이면서 같은 단지 안에서도 가격 차이는 크게 벌어졌다. 수천만원은 물론 일부 단지에서는 수억원까지 차이가 났다. 처음에는 층이나 조망, 인테리어 차이 때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요인 외에도 시장 반응을 살피기 위해 높은 호가로 내놓은 매물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그 가격에 계약할 수 있는지 물어보면 "그냥 올려둔 물건"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단지마다 층과 향, 조망에 따른 차이는 원래 존재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시장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집주인마다 가격 기준도 제각각인 듯했다. 비슷한 조건의 매물끼리도 가격 차이가 크게 벌어지면서 어느 가격이 적정 시세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았다. 특히 거래 의사가 분명하지 않은 매물까지 시장에 나오면서 적정 시세를 가늠하기가 더욱 까다로워졌다. 인터넷에 올라온 매물만으로는 후보를 추리기도 쉽지 않았다. 실제 거래 가능 여부와 입주 시기 등 정작 필요한 정보를 알기 위해 실수요자는 결국 중개업소를 찾아 발품을 팔 수밖에 없다. 원하는 조건의 매물이 나오면 오래 고민하지 말고 계약부터 하라는 조언을 여러 중개업소에서 들었다. 결국 언제 입주할 수 있는지, 가격이 적정한지는 실수요자가 직접 확인해야 한다. 원하는 조건에 맞는 매물이 나오면 다른 물건과 충분히 비교해볼 시간도 없이 계약을 결정해야 한다. 결국 표면적인 통계만으로는 실수요자가 체감하는 전세시장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 간극을 줄이는 것이 부동산 정책의 역할일 것이다. 하지만 잇단 정책 변화 속에서 그 시세를 찾는 일은 예전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시세가 다시 거래의 기준이 되는 시장이 되길 바란다. [email protected]

[구본영 칼럼] '당신들의 천국'에 성난 2030

'앵그리 영맨'(성난 젊은이들)의 귀환일까. 지난 6·3 지방선거를 전후해 2030세대 청년층이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애초 정치 무관심층으로 꼽혔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여야 격전지 투표장에서 캐스팅보터로 나섰다. 특히 초유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벌어진 서울 올림픽공원 시위를 주도 중이다. 정치적 구심점도 없는 청년층의 자생적 결집은 한국 정치사를 통틀어 흔치 않은 풍경이다. 선거전 초반부터 거대 여당의 압승이 점쳐졌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야당이 궤멸적 참패는 면할 수 있을지가 남은 관심사였을 정도로. 하지만 예상 밖의 결과가 나타났다. 광역단체장 기준으로 여당이 12대 4로 이겼지만, 정치적 상징성이 큰 서울시장은 야당의 몫이었다. 선거 전문가들은 여당의 '공소취소 특검' 발의가 이변을 불렀다고 봤다. 이재명 대통령의 사법 리스크를 지우기 위한 불공정한 기도에 청년층·중도층이 등을 돌렸다는 뜻이다. 물론 단일 요인으로 선거전을 평가하긴 어렵다. 서울시장 선거전은 징벌적 부동산 세제가 결정적 변수였다. 이 대통령은 선거에 앞서 다주택자는 물론 비거주 1주택자까지 압박하며 집값 잡기에 나섰다. 그러나 외려 매매·전세·월세 가격이 모두 오르면서 저소득층·청년층이 직격탄을 맞았다. 대출규제의 덫에 걸린 이들은 '월세 지옥'에 갇혔다. 변수가 뭐든 청년층의 분노를 빼곤 선거 결과를 설명할 수 없는 셈이다. 현 정부는 코스피 열기를 끌어올리는 데 진심이었다. 하지만 청년층에겐 '당신들의 천국'(이청준의 소설 제목)일 뿐이다. 소설 속 섬사람들은 대규모 간척으로 낙토를 만들자는 소장의 제의에 시종 회의적이었다. 뭍과 격리된 삶을 진짜 천국으로 믿을 수 없어서다. 작금의 현실에서 2030이 진정 원하는 것도 안정된 일자리지 주식 대박은 아닐 법하다. 4050세대와 달리 주식을 살 종잣돈조차 없는 그들이다. 2030에 고유가지원금이나 탈모치료제 건보 적용 등 선거용 정책이 통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미래 세대인 자신들에게 부담으로 돌아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2030세대가 딱히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것 같진 않다. 출구조사에서 이들 중 다수가 서울시장감으로 이 대통령이 꽂은 정원오 후보 대신 오세훈 후보를 고른 건 확인됐다. 그러나 잠실 집회에서 청년세대는 "재선거" "참정권 보장" 등을 외쳤지만 장동혁 대표 등 현장을 찾은 국힘 측과 거리를 두려는 기류를 보였다. 다만 이들이 이재명 정부에 호의적이지 않은 건 사실이다. 일련의 여론조사 추이를 보라. 지난 11일 공개된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실시한 전국지표조사(NBS)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18~19세(27%), 30~39세(29%) 지지도는 40대(57%), 50대(59%)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17일 조원씨앤아이의 이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 조사 결과도 유사한 추세였다. 40대(긍정 56.0%)와 50대(긍정 56.8%)에서는 긍정 평가가 우세를 보였지만, 20대(긍정 32.0%·부정 61.4%)와 30대(긍정 34.6%·부정 64.9%)에서는 부정 평가가 압도적이었다. 이는 내란 프레임으로 야권을 잘 몰아붙였다고 보는 여권 입장에선 당혹스러운 지점이다. 반면 제3자적 시각에서 보면 공정이 최우선 가치인 2030의 눈높이를 못 맞춘 업보라 봐야 할 듯싶다. 비상계엄 자폭극 이후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이미 동반 구속됐다. 그런 마당에 현 정권의 오만한 행태가 시야에 어른대자 2030은 윤 정권에 분노했던 때와 같은 잣대로 행동에 나선 격이다. 여당의 공소취소 특검 발의에 응징 투표로 맞서거나,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기화로 거리로 뛰쳐나온 배경이다. 2030의 이례적 결집은 여야나 보수·진보를 떠나 기득권의 위선에 대한 불만의 표출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올림픽공원에 청년들이 태극기를 들고 모인 건 공정하지 않은 사회, 기득권이 독점한 권력에 대한 분노"(강원택 교수)라는 관점이다. 현 정부의 중추세력인 86그룹도 한때 민주화 세력이었을지언정 청년세대의 눈엔 기득권 집단일 뿐이다. 2030은 주로 현 여당이 집권하거나 다수당일 때 성장한 세대인 까닭이다. 우리 사회가 이제 2030의 이런 누적된 분노를 직시할 때다. 병사 월급 인상과 선택적 모병제 등 생색내기로 이를 달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일자리와 자산 양 측면에서 세대 간 양극화는 갈수록 더 심해질 참이다. 여든 야든 이를 풀 해법은, 청년층에게 공정은 생존의 문제임을 인식해야만 찾을 수 있을 듯싶다. [email protected] 구본영 논설고문

[테헤란로] AI 강국 위한 조건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가 발표됐다.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구축, 피지컬 AI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날 대통령의 마무리 발언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를 마치면서 "사실 최근 며칠 동안 놀랐다"고 했다. 그동안 국가 균형발전을 국가 핵심과제로 선정하고 지역투자를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왔지만, 이번 정책은 기대했던 수준보다 너무 높은 수준의 목표를 설정해줬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기자 역시 그랬다. 지난주 보도를 통해 3대 프로젝트가 공개됐을 때, 이들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감은 높지 않았다. 3가지 모두 기존 정책 발표에서 많이 언급됐던 단어들이었다. '그럴듯한 청사진' 정도가 나올 수 있겠다고도 생각했다. 일례로 AI 데이터센터 구축에 대해 과연 구체적인 장소와 일정이 발표될지 반신반의했다. 구축 위치와 착공일, 규모 등이 발표될 것인지가 관심사였다. 의외로 이날 정부는 구체적인 장소와 구축 연도를 발표했다. 규모도 내놓았다. 정책 발표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최근 과학기술계에서 아쉬웠던 것은 정책 대신 사람에 대한 이슈가 더 부각된 것이다. 실제 K-문샷 프로젝트에서는 K-문샷의 12개의 각 미션을 총괄하는 프로젝트디렉터(PD)에 대한 자격 논란이 불거졌다. K-문샷은 국가 난제를 AI로 해결하는 대형 연구개발(R&D) 추진 계획이다. 12개의 첨단기술을 지원한다는 목적은 뒷전이었다. 논란이 된 해당 PD는 현재 사임한 상태다. 그의 자리는 당분간 공석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범위를 좀 더 넓혀보면 AI 정책도 비슷했다. 새 정부가 'AI강국' 기조에 맞춰 신설한 대통령 직속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는 출범 1년 만에 사실상 핵심 자리인 AI미래기획수석이 공석이 됐다. AI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 중 한사람이었던 그의 공석은 실상 정책에 대한 기대를 반감시키기에 충분했다. 후임에 대한 하마평이 나오고 있지만 AI전략위 역할에 대한 기대는 예전과는 달라졌다. 결국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묵묵히 업계와 소통하고 계획하는 이들이라는 것을 새삼 절감한다. 다만 여기서 의문은 그렇다면 과연 K-문샷의 PD나 AI전략위의 AI수석이 의미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정책에서 사람이 주는 상징성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책 자체가 아닐까 화려한 타이틀이 아니라 정책 자체가 실질적인 알맹이여야 한다는 평범한 사실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된 보고회였다. [email protected]

[사설] 호남에 반도체 단지 건설, 생태계 구축에 총력 쏟길

정부와 주요 기업들이 반도체·인공지능(AI)·데이터센터를 삼각축으로 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를 29일 공개했다.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충청권 AI 인프라, 영남권 피지컬 AI와 로봇·모빌리티 거점을 잇는 전국 단위 첨단산업 재편 구상이다. SK는 서남권 400조원을 포함해 그룹 전체로 1100조원 투자계획을 밝혔고 삼성도 반도체는 광주, 로봇은 구미, 배터리는 울산, 차세대 조선은 거제를 중심으로 육성하겠다고 발표했다. 투자 규모만 놓고 보면 전례를 찾기 어려운 초대형 산업 프로젝트다. 정부는 수도권 반도체 생산능력을 5년 안에 2배로 키우고, 반도체 팹(공장) 구축 기간을 최대 12년 단축하겠다는 방안도 밝혔다. 반도체와 AI, 로봇은 국가 생존을 좌우하는 전략산업이다. 고성능 메모리, 첨단 패키징, 데이터센터, 로봇과 스마트 제조 산업의 중요성은 더 강조할 필요도 없다. 어려운 대내외 여건 속에서 기업들이 비수도권 지역에 기록적인 투자를 결정한 것도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이 중차대한 프로젝트가 시작도 전에 지역 갈등과 정치 공방에 휘말리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여기엔 정부의 책임도 상당히 있다고 본다. 난데없이 용인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호남 이전설이 나왔고, 반발이 일자 갑자기 호남을 새 투자처로 결정한 듯한 흐름은 매끄럽지 않다. AI 시대의 폭발적인 반도체 수요를 감안하면 추가 생산거점 확보는 기업에도 불가피한 과제다. 하지만 수백조원이 투입되는 천문학적 규모의 사업이고, 국가 미래와도 직결된 프로젝트다. 절차가 불투명하고 투자처 결정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면 아무리 긴요한 투자라 하더라도 정치적 지역 안배라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국민보고회를 주재하며 "균형발전과 기업 수요가 일치했다"면서 기업에 손실과 위험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세밀한 논의 과정은 알 길이 없다. "관치 개입에 따른 억지 결정(국민의힘)" "국가산업에 답정너식 처방(개혁신당)"이라는 야권 비판은 이래서 나오는 것이다. 이제는 용수와 전기, 기술인재 공급 문제를 얼마나 빨리, 제대로 푸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 반도체 클러스터가 실제 경쟁력을 갖춘 산업거점으로 자리 잡으려면 물, 전력, 사람의 3대 난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영산강과 섬진강 수계가 대형 클러스터의 공업용수를 안정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지, 가뭄에도 공급에 차질이 없을지 검증을 두번, 세번 철저히 해야 한다. 재생에너지가 풍부하다는 말로 전기 문제를 풀 수 없다. 전력망, 송전선로, 백업전원, 용수 재이용 시설까지 종합적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지역균형발전이라는 명분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공장이 돌아갈 수 있는 산업 생태계다. 인재 문제도 가볍게 볼 수 없다. 첨단 반도체와 AI 산업은 결국 사람이 움직인다. 다시 강조하지만 균형발전과 소외지역 개발을 위해 기업 경쟁력이 기회비용이 돼선 안 된다. 일분일초가 간절할 만큼 속도에 미래가 좌우되는 글로벌 초격차 경쟁의 시대다. 경영활동에 애로가 없도록 기업을 지원하는 것은 국가의 사명이다. 정부의 지원을 충분히 받은 기업이 세계 시장의 리더로 우뚝 서고 그 결과로서 균형발전을 이루면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다. 이번에야말로 공염불에 그치지 않도록 정부는 사력을 다하기 바란다.